서평-역사/동남아사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앤서니 리드

stingraykite 2026. 3. 5. 14:34

 
중국사를 보고, 중국인 이주의 역사를 보고, 에릭 탈리아코초의 <아시아 500년 해양사>를 보며 도서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유라시아를 자다로 연결하는 항로에서 동남아시아 해역의 중요성은 여러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동남아시아사다.
중국으로부터, 인도로부터, 이슬람 세계로부터 각각 영향받으면서도 동남아시아는 고유의 문화를 축적해나간다. 그 물적 토대에는 무엇이 있으며, 14세기로 17세기까지 상업의 발전과 상호간 연결, 식민제국의 확장은 이 땅의 운명을 어떻게 가름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진 세계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찾아나간다.
서문
동남아시아는 이를 묶어주는 공통의 경험, 식생으로부터 교류를 통한 문화적 근연성, 외침에 대한 대응 과정의 유사성을 갖는다. 이들을 공통으로 묶어주는 물질문화가 그 특징을 규정한다. 왜 전체사인가, 개개 요소 요소의 역사로 보면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이, 물질, 문화, 교역, 접변의 레이어를 쌓아보면 이를 일관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부름, "야심찬 역사학자"의 모습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교역의 시대', 바람 아래의 땅에 대한 전체사적 접근을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는 구절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15세기로부터 17세기 동남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는 '국면conjontures'과 '사건evenements'으로 이 땅의 흐름을 짚어나간다.
1장. 서론:바람 아래의 땅
시적인 표현이다. 연구의 대상을 정의한다. 동남아시아는 물과 숲의 땅이다. 바닥길을 통해 열려있는 동남아시아는 해상으로 상호교류하며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울창한 숲 역시 기후의 결과이다. 높은 기온과 강수량은 풍부한 산출로, 그리고 풍토병과 수해로 양방향으로 다가온다. 연중 높은 강수량은 풍성한 열대우림이라는 공통의 조건을 부여한다. 이들은 절반 이상이 오스트로네시아족 언어로, 이는 이 지역을 묶는 혈통적, 문화적 기원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인문지리환경의 공통점은 공유되는 식생활로, 해상을 통한 교역과 이를 통한 동화로 나타난다. 높은 강수량에서 비롯한 쌀을 중심으로 한 식문화는 공통의 생활기반 아래 교역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다도해라는 지리적 요건은 해양 진출의 허들을 낮춰 바다를 통한 긴밀한 연결을 가능케한다.
중국과 인도는 동남아시아에 면한 거대 문화권으로 이 지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지만, 공통의 경험에 기반한 지리적 거리는 동남아시아가 이와는 구별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장벽으로 기능한다. 특히 말레이어를 중심으로 구성된 해상교역망은 그 자체로 교역을 통한 문화적 동질성의 구축을 통해 분석의 중심부로 삼는 물길로 연결되는 동남아시아의 핵심적 네트워크이다. 그 경계는 위로는 동남아시아 북부의 고산지대로, 아래로는 말루쿠와 뉴기니 사이로 매듭지어진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특수성이 부각된다. 중국에 대한 방파제로, 중국의 육로진출을 저지해온 베트남은 변경으로 기능하며, 중국의 동남아 진출경로를 해양으로 한정짓는다.
2장. 신체적 건강
1)인구
동남아시아 인구에 대한 추산자료는 스페인인들의 세금납부자 수로부터 근거한다. 장기간의 인구증가율을 가정하고, 사료들을 취합하여 대략적인 인구추계를 도시한다. 정확성의 개선은 앞으로도 필요하나, 대략적인 양적 비교의 기준으로 당대의 생활을 그려보기에는 적절하다. 추산치는 식민지배를 전후한 급속한 인구의 증가를 보여준다. 19세기와 20세기 사이 근대적 '인구 전환'이 시작되었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1~0.2%에서 1%로 상승한다.

낮은 인구밀도가 특징적이다. 다른 문화적 특성을 비추어볼 때, 이는 통치에 포괄되는 인구의 부족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유휴면적이 작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근대적 인구전환은 어떤 이유에서 일어났을까. 기독교의 전파와 통치의 안정이 그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수렵채집사회의 전통에 가까운 극단적인 인구통제는 필리핀에서 기독교의 전래, 문화적 변화와 함께 인구 증가율의 성장으로 나타난다. 20세기의 인구조사에서도 믄타위제도, 동부 숨바, 중부 술라웨시, 보르네오 고산지대, 루손 코르디에라 지역의 애니미즘 신봉자들과 그리스도교 개종자들간의 출생률 차이는 확인된다. 이는 이동 농경에서 정착 농경으로의 전환과 함께 일어난다.
이는 당대 사회가 마주한 여러 제약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잦은 전쟁은 비록 그 사상자는 적었어도, 지속적인 정정불안으로 인구의 증가를 가로막는 요인이었다. 정치적 안정은 인구의 증가를 불러오지만, 인구압의 폭증은 정정갈등으로 이어지고 농업사회 특유의 외생적 충격, 기후로 인한 작황의 불안등이 더해지면 이내 분절된 사회들은 불안정의 악순환으로 접어든다. 이것이 인구 사이클의 상승과 하강으로, 전 기간에 걸친 낮은 인구증가율로 드러난다.
2) 농업의 양상
열대우림의 광활한 숲과 비가 많이 오는 온난한 기후는 쌀의 재배적기를 가름하는 기준이다. 15세기는 동남아시아 전반에서 쌀이 재배되던 시기이다. 쌀이 부족한 곳에서는 사고, 빵나무 등 뿌리채소의 녹말로 식생을 영위하지만, 이동농법, 직파법, 모내기벚 세가지 모두가 혼용되며 쌀은 지배작물로써의 위치를 점한다.
이동농법은 화전이다. 숲에 불을 지르고 그 땅에 농사를 짓는다. 척박한 토양은 2년의 휴경과 그에 따른 경지의 이동을 강제한다. 범람원에 직파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우기가 오기 전 쟁기로 밭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면 비가 내리고 벼가 저절로 자란다. 경작에 사용한 일수의 38배에 달하는 날 동안 먹을 쌀이 이렇게 생산된다.
쌀 최대 수출지역인 자바에서는 모내기법을 사용한다. 당대 사용된 모내기법에 대해서는 16세기 루손에서 산데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농부들은 볍씨 한 바구니를 강물에 담가 적신다. 며칠 후 물에서 건져보고 상태가 나쁘거나 아직 싹을 틔우지 않은 것은 던져버린다. 나머지는 대나무 자리 위에 올리고 흙으로 덮은 후 젖은 상태로 둘 수 있는 곳에 둔다. 볍씨가 충분히 발아하면, 스페인에서 상추를 심을 때처럼 하나씩 옮겨 심는다. 이런 방식으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쌀을 거둬들인다."
이앙법은 노동집약적이고, 단위면적당 최대 산출을 낼 수 있으며, 이모작을 통해 생산량의 증대가 가능하다. 더하여 이는 관개수로 기술에 대한 필요를 증가시켜, 자바, 남술라웨시, 루손, 파나이, 상부 버마, 시암 등지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다. 자바의 비옥한 토양은 이를 통한 잉여곡물을 축적시켰고, 16세기 한해에 50~60척의 배를 통해 1만5천톤, 10만석을 말라카로 공급한다. 정크선 한 척이 2천석(300톤)을 운반한 것이다. 쌀 수출은 사치품 교역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아도, 농업경제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상품의 교역이라는 점에서 당대 교역망의 구성과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3) 토지소유권과 사용권
근대적 인구 변화 이전의 동남아시아는 땅이 넓고 사람이 희소한 곳이었다. 고립된 정착지와 정착지가 바다와 땅을 매개로 연결되는, 열대 우림속의 섬들의 연쇄였다. 따라서 토지소유권 역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화전을 일구고 경작을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땅이었다. 작물이 심긴 동안은. 외외에는 공동체의 공유재산이었다. 정글의 개간은 집약적인 노동소모를 필요로 했고, 따라서 권력자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후원-피후원 관계,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희소한 인력에 대한 통제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땅이 넓다는 것은 도망칠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속은 상대적으로 덜 억압적이며, 카리스마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진다.
4)농업 도구
철은 희소한 자원이었다. 쟁기는 쇠로 만들어지나, 갈퀴는 나무로 만든다. 하지만 이동농법이 주를 이루는 상황은 상대적으로 쟁기의 사용이 보편적이지는 않았음을 암시한다. 낫은 알려져 있었지만, 수확에는 주로 손가락칼이 사용되었다. 물소는 육축으로, 농우로 절찬리에 사용되었다.
5) 식생활과 식재료 공급
물과 숲의 땅이고, 바다에 면해있으며 에너지자원(나무)가 풍부하니만큼 소금 역시 자염으로, 천일염으로 생산되었다. 풍부한 어족자원 역시 식생의 주요 구성 성분이었다. 다인원이 협력하는 어업과 개인적인 어업이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동남아시아는 향신료의 땅이고, 정향, 육두구, 메이스로부터 타마린드, 생강, 강황 등 다채로운 식재료가 식단을 장식한다. 야채는 널리 재배되지 않았으나, 과일의 풍부함이 이를 보상한다. 특히 사탕수수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로, 중국식 정제법이 들어온 이후로는 상품작물로도 많이 재배되었다. 쌀의 교역에서도 드러나지만, 자바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중심지 중 하나로 역할한다. 절인생선, 쌀, 아락, 야자술, 야자 , 야자섬유라는 포르투갈 해적들의 약탈품에서 보이는 식품무역의 다채로운 구성은 당대 교역의 풍성함을 드러낸다.
육류는 상대적으로 풍성하지 않았지만, 주요 의례에서 공동체적 의식의 일환으로 소용된다. 닭, 돼지, 물소고기가 널리 소비되었으며, 낮은 육류섭취 빈도에도 불구하고 가축은 육로와 해로를 거쳐 거래된다.
이슬람의 전파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돼지고기를 식단에서 탈락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육식은 불교의 전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통을 유지했다.
7)물과 술
동남아시아는 물이 풍부하고, 마실 물이 많았다. 그러나 물로 인한 수인성 질병 역시 그 온도로 인해 성행했고, 따라서 물을 묵혀두어 침전물을 가라앉히거나, 물을 끓여 마시는 등의 용법이 발견된다. 시암에서는 물에 레몬 등으로 향을 넣어 마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코코넛으로 만든 투악, 사탕야자로 만든 아락, 킬랑kilang(당밀 발효주), 브렘brem(쌀을 발효한 술), 탐포tampo(쌀을 두번 발효한 술) 등 당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으로든 술을 만들어 마신다. 이슬람교와 불교는 술을 엄격히 금지하지만, 사람들이 돼지고기는 끊어도 술을 끊기는 어려웠다.
9) 빈랑과 담배
빈랑열매에 구장, 석회를 섞어 섭취하는 빈랑은 동남아시아에서 주요한 환각제이자,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접대의 관슺으로 빈랑을 씹는 것은 보편적인 행태였고, 종교적인 의례였으며, 남녀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위이기도 했다. 빈랑의 '열'과 구장 잎의 '차가움'이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구애의 관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기 담배가 전래되고, 담배는 빈랑과 경합하며 사회적 관습으로 자리한다.
10)건강한 사람들?
동남아시아인들의 신장은 당대 유럽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부귀와 존비에 의한 신장차이는 18~19세기 유럽이나 아시아에 비해 크지 않았으며, 성인 남성의 키는 147~167 센티미터였다. 20세기 초 동남아시아인의 신장은 157cm로 중국에 비해 5cm 작고 당대 유럽 평균은 167cm였다. 유럽의 평균 신장은 20세기 중반 177cm로 늘어난다.
루손 서남부 카탈라간의 대규모 묘지 발굴사례는 1350년부터 1500년까지 성인 유골 117구애 대한 측정사례를 보여주는데, 그 평균 신장은 160cm였다. 교역의 시대 당대 세계인들과 별반 차이나지 않던 신장조건은 당시의 평균적인 섭생을 통해 생활환경의 풍요로움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출생률과 평균수명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는 19세기 초에나 발견되며, 필리핀의 교구명부는 1800~1820년대 42세에 이르던 기대수명이 1900년 경에는 17.5세로 줄어드는 것을 보여준다. 유아사망률은 여타 사회와 대동소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11)위생
여러번 역설했지만, 동남아시아는 물이 많다. 따라서 목욕문화 역시 발달했다. 이후 물질세계에 관한 언급들에서도 나오지만, 가옥문화는 발달하지 않은 데 비해 개인의 치장과 장신구에는 많은 돈을 들인다. 이는 강역의 넓이와 낮은 인구밀도에 따른 인간자원의 희소성과, 이로부터 발원한 인간 자원에 대한 약탈적 성향, 그로 인한 풍습, 예컨대 전쟁각에서 깜 안나오면 튀는 문화로부터 그 연원을 짐작해볼 수 있다.
거주환경 역시 위생에 영향을 주었다. 바닥을 띄운 가옥양식, 도시에서도 관찰되는 낮은 가옥 밀집도는 우기라는 특성과 맞물려 당대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청결한 도시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이 되었다.
12) 의술
당대 유럽의 의술은 사람을 잡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고, 동남아시아의 의술은 약초학과 목욕,마사지를 중심으로 발달한다. 열대우림은 약초의 보고이기도 했고, 마사지는 골절로부터 근육통, 진통까지 다방면에서 효용을 보였다. 애니미즘, 샤머니즘 역시 치료의 한 형태로, 인도네시아 세계에서는 스망앗semangat, 타이어 사용자 사이에서는 콘khon 이라 불리는 생명력의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인도 양자와의 잦은 교류로 전염병에도 역시 다종다양하게 노출된다. 오랜 전염의 경험은 치사율이 높은 많은 질병에 대해 내성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로부터 천연두까지 질병은 종종 이 세계를 덮쳐왔고, 이는 종교적 터부와 역사적 기록으로 남는다.
3장. 물질문화
문화적 양태들을 보다보면 수렵채집 전통의 흔적이 강하게 나타난다. 숲과 바다에 면한 삶, 낮은 인구밀도가 주는, 넓은 변경의 존재가 그런 풍토를 강하게 한다. 집을 짓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 것도 인간자원이 희소하고 긴 우기가 존재하는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어차피 온도 높고 벌레 자주먹어서 자주 지어야하는데 굳이 공을? 들일? 필요가?
60인일로 집 한채 올린다는 점이 재료의 풍부함과 가옥의 단순함을 보여준다. 50인이 반나절만에 방 네개짜리 근사한 집을 네시간만에 뚝딱 만들어낸다. 그 주요한 특징은 바로 주상가옥이다. 바닥을 1~3미터 띄운다. 이거 홍수나면 안쓸려가나...? 바닥을 띄우는 높이로 사회적 계급 역시 구분된다. 왕과 귀족은 6미터에서 12미터. 이정도면 바닥 뚫어서 암살도 하겠다. 16-17세기 이후 이후 지상에 집을 짓는 경우도 생기지만, 주상가옥이 지배적이었다.
가옥구조에서 후면이 여자들의 공간으로, 전면이 손님의 공간으로 배정되며 부엌은 뒤케로 들어간다. 잠자리는 생활공간 위에 위치한다. 지붕을 받치는 가운데 기둥은 의례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중요하여 이에 제물을 바치곤 했다. 왕과 귀족의 집도 크고 웅장했지만 그 구조는 유사했다. 오직 종교시설만이 석재로, 모르타르로 세월이 가도 남을 수 있게 영원성을 담지하여 건축된다. 벽돌과 모르타르로 벽체를 올리고 기와로 지붕을 덮은 불교 사원들과 모스크들이 그 건축능력의 증거이다. 교역의 세기 후기로 들어서며 벽돌과 기와의 사용은 늘어난다. 유럽인들은 건축허가를 악용하여 벽돌로 요새를 지으며 도시를 침범한다.
집을 소비재로 짓는데 가구는 무슨 필요가 있나. 가구도 별로 없다. 이사람들 주거생활에는 별 공을 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무역을 통해 접변이 늘어나며 의자와 탁자등이 도입된다. 이들 문물은 중국어나 포르투갈어를 차용하여 이름지어진다. 풍부한 숲은 좋은 연료를 제공한다. 수지와 숲에서 얻은 기름은 조명의 연료가 된다. 유전도 있다. 18세기에 표토에서 채취한 석유만도 일일 수백톤에 달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디에 돈을 쓰냐, 몸 치장에 공을 들인다.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건 오스트로네시아어족 특인가... 귓볼을 뚫고, 길게 늘어트리고, 갖은 장신구로 치장한다. 인신에 대한 약탈은 하여튼 재물을 최대한 몸에 지니는 문화적 경향으로 드러난다.
문신 역시 보편적인 해양민족의 습관이기도 하다. 문신은 그 주술적 의미로 인해 종교적인 탄압을 받지만, 의례적인 의미와 전통의 계승으로 오래도록 유지된다. 게르만 친구들도 참 머리카락 사랑하지만 그건 동남아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게르만 친구들이 머리칼을 사랑하는 건 깨지지 않은 뚝배기의 증명이 아닌가 종종 의심하는데, 동남아에도 같은 혐의를 씌워본다. 머리카락에는 주술적인 의미도 깃든다. 왕의 머리장식이 승계받은 통치권의 일부라면 역시 대머리는 동남아에서도 왕이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합리적 의심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자기희생이기도 하다. 필리핀의 여성들에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가장 확실하게 슬픔을 보여주는 행위요, 머리카락을 공양하여 망자를 애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교역의 세기 이후 문화적 접변의 영향으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풍습의 변화가 나타난다. 도서부에서 이슬람의 영향으로 단발이 남성의 보편적 양태가 되고, 시암에서는 남녀 모두 성장의 일부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 이때 시암에서 유행했던, 시암과 캄보디아가 서로 니네 스타일이라고 주장하는 머리모양은 아래와 같다.
화려한 장신구 역시 치장에 돈을 붓는 동남아 문화 특이다. 이 지역의 풍부한 금 산출량은 이와 같은 경향을 뒷받침해준다. 일전의 신장에서도 드러나지만, 당대 동남아시아의 소득곡선은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지해 낮은 격차를 보인다. 가난한 이들도 중요한 행사에서 우아하게 차리려고 애를 썼다는 건 계급간 동질성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역시 인간자원의 희소성이 만든 특징이 아닐까.
화려하게 치장은 하지만 웃옷들은 잘 안입고다닌다. 유럽인들과 중국인들의 기록에서 이와 같은 풍습에 대한 언급이 교차검증된다. 허리 아래로만 의복을 걸친다. 외부와의 접변확대와 이로 인한 복식의 변화, 유행에 대한 언급은 특기할만하다. 페르낭 브로델은 유행의 존재를 근대적 요소, 향상심의 한 지표로 본다. 유행을 추종하려면 그만한 잉여가 있어야되는 법이다.
유행을 따라가려면 직물이 있어야한다. 인도-동남아 교역에서 인도의 면직물은 좋은 상품으로 여겨졌다.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직물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생산량을 넘는, 치장에 대한 욕구가 수요를 촉발한다. 목화는 오랫동안 동남아시아에서 재배되었고, 중국 역시 동남아시아로부터 목화를 전래받는다.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면직물은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상품이기도 했다.
면의 자체적인 생산량과 교역범위 역시 적지않았다. 목화로부터 면직물까지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진다. 면에 비해 견은 자생적 누에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한다. 이 역시 인구의 함수가 아닐까.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조방적 인구분포는 노동집약적이고 고도의 분업을 요구하는 면직업의 특성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버마, 타이, 베트남 등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상대적으로 도서부에 비해 인구가 밀집적이었고,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기술로 자체 견직업을 구성한다. 그러나 결국 베트남이 수출하는 건 견직물이 아니라 생사다.
농업도구에서도 나타나지만, 낮은 인구밀도는 분업과 전문화, 도구의 정교화를 저해한다. 허리띠 베틀은 당대 인문환경에 맞는 적정기술이었지만, 동시에 낮은 생산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경향은 광업에서도 나타난다.
장신구 파트에서도 드러났지만 다채로운 장신구를 이용한 개인 치장은 동남아시아의 특징이고, 이는 풍부한 광물자원에서 유래한다. 풍부한 금 산출량은 원시화폐로 금이 통용되게 했고, 잦은 교역은 저울을 이용한 거래양식을 발달시킨다. 대륙부 동남아시아 역시 금이 산출되었다.
동남아시아는 주인-하인 관계로 노동이 예속되는 특성을 가지고있었고, 제조업 역시 후원-피후원 관계속에서 도시의 수요에 따라 전문화되며 발달한다. 그러나 장인들은 예속관계로 인한 독립성의 문제, 수요의 규모 문제 등으로 대규모 선생산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오면 만드는 방식으로 생산을 진행한다. 이는 확정 비용의 지불에 따른 불확정 수익의 수취라는 생산-교환에 다다르지 못한, 전자본적 생산양식이다.
중국산 자기는 사치품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시암산, 베트남산 자기가 품질을 키워 동남아 시장에서 내수시장을 구축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면직으로부터 견직, 도기까지 제조업은 다 시암이랑 베트남이 한다. 동남아시아에 철, 구리, 주석, 니켈, 납은 광상은 풍부했지만 광상의 위치가 인구밀집지로부터 떨어져있고, 이 지역의 조방적인 인구분포는 광산업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의 발전을 어렵게 한다. 채굴, 탐광, 정제, 제련기술의 축적 역시 더딜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낮은 생산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철 광상은 많아도 철은 수요에 비해 부족했고, 중국과 유럽, 인도로부터 철 수입이 이루어진다. 고산족들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철 수급도 이루어지고, 술라웨시와 보르네오를 중심으로 철 수출도 이루어졌지만 전체 수요를 충족할 수는 없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철 수요가 자급자족과 수입으로 충당되었다면,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철 수요는 서보르네오 수카다나의 영토인 카라마타를 통해 충당되었다. 네덜란드 인들의 카라마타로부터의 도끼와 파랑(마체테) 연간 수출 톤수는 놀라운 기록을 보여준다. 1631년 1만톤, 1637년 8천톤이라는 양은 교역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분업화를 암시한다.
풍부한 구리와 주석의 매장량은 기원전 2000년이라는 동남아시아의 청동기 제작 시작 시기의 단서가 된다. 버마 연안으로부터 말레이 반도까지 세계 주석 매장량의 상당량이 묻혀있다. 그러나 풍부한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17세기 일본산 구리에 시장 점유율을 내준다. 일본산 구리는 1670년부터 1715년까지 한해 평균 3천톤이 수출된다.
4장. 사회조직
주인-하인관계에서도 나타나듯이 예속은 일반적인 일이었으나 그 결합의 강도는 높지 않았다. 대규모의 변경을 갖고 있다는 것은 도주가 용이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카리스마가 있어야했고, 제도적으로 권력이 뒷받침될 수 없는 빈약한 물적 토대는 지속적인 정정불안의 원인이 된다.
인적 자원의 희소성은 예속인의 수를 늘리기 위한 전쟁으로 이어지고, 전쟁의 양상은 살상을 노리기보다는 기세를 꺾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쟁에 대해서도, 응전보다는 도망이 현명한 선택이 된다. 인신을 노리고 전쟁을 벌이는데 잡을 사람이 없다? 파이다. 강제노동의 일반화는 낮은 생산성을 설명해주는 원인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의전이지 산출물이 아녀. 1511년 믈라카 함락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믈라카 왕은 (…) 도시를 떠나 말레이 상인과 신하와 각료들을 데리고 하루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피했다. (…) 아폰수 알부케르크가 도시를 약탈하고 약탈품을 배에 실으면 돌아갈 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의 양상은 살상보다는 포획에 집중되어 있었고, 일반화된 예속관계는 전업 군인보다는 귀족 계급과의 타협을 통한 병력조달에 대한 선호로도 나타난다. 일을? 시키는데? 돈을? 줘? 카리스마가 국가를 성립하는 기틀이라면 국가의 해소 역시 빠르게 일어난다.
서구의 진출과정에서 화약병기로 인한 이로움은 일정정도 존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적응 역시 빨랐다. 갈방의 설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예전에는 투구를 쓴 사람을 보면 그들은 “쇠머리가 온다”며 우리가 불사의 존재라 죽지 않는 줄 알고 모조리 도망쳤다. 그러나 지금은 투구 아래 잘릴 수 있는 평범한 머리와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머스킷을 쏘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입으로 치명적인 불을 뿜어낸다고 상상했다. 포탄 쏘는 소리가 나고 포르투갈인이 온다는 말을 듣자 임산부가 유산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대포가 생전 처음이고 그것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지금은 우리와 전쟁을 벌이고 그다지 놀라거나 공경하지도 않는다. 주님께서 기적을 통해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자리에 앉아 우리를 다 먹어치우고 말았을 것이다."
같은 양상은 남아시아에서도 나타난다. 문제는 무기체계가 아니다. 무기체계는 빠르게 전파되고 금새 익숙해진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동원력, 자금으로부터 조직력, 물적 기반의 차이가 시대의 변화로, 종속으로 이어진다.
예속관계가 보편적이었다는 것은 노동력이 갖는 희소성에서 비롯하며, 이는 노동력 그 자체가 거래의 대상이기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인은 상속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봐도 노예랑 별로 안달라보이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인력을 고용할 때 치러야했던 임금은 당대 생계비에 비해 5배에서 10배에 달한다. 이는 임노동시장의 부재로 인해 다른 귀족의 인력을 빌려써야했던 상황에서 비롯한다. 도시에 자유 임노동자가 없다. 이는 예속관계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 동남아시아에서 도시의 의미는 동아시아와도, 유럽과도 다르다. 종속관계에 대한 다양한 법률은 그 관계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이다.
그렇다면 귀족의 예속에서 놓여나면 어언 일이 벌어지느냐. 왕실로부터 노역의 의무를 진다. 전체 노동시간의 절반이 왕실에의 노역으로 할당된다. 이 노동의 품질이 과연 좋았을까? 계층화된 신분구조에서 공통의 정체성이랑 성립가능한가? 자유민은 사실상 공노예고 귀족의 보호 바깥의 존재라면, 대우에 따라 섬길 주인을 고르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귀족에 대한 자매 역시 공고한 경향의 하나로, 사노예 비율은 하나의 권력 지표가 된다. 인력이 곧 자본이 되는 체제에서 인력 없이는 사업도 불가능하다. 권력은 곧 금력으로 치환된다. 말레이 법령에서 나타나는 노예의 가치는 자유민의 2분의 1이었다.
사법체계는 인도의 <다르마샤스트라> 또는 당나라 법전을 채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슬람 법전 역시 이슬람의 전파와 함께 도입되었으나, 기층 단위에서는 마을 원로들에 의한 구전 전통에 따른 판단이 이루어진다. <마누 법전>은 버마, 시암, 캄보디아, 자바-발리에서 자연법의 위치를 점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남아시아에 가까울수록 강하게 나타났다.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재판은 구두로만 진행된다. 갈방과 황충의 의견은 그 간명함과 신의성실에 대한 기록과 감탄으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문서화된) 법은 없고 판결은 사리 분별에 따라 내려진다. (…) 변호사와 서기, 재연과 반박, 시간을 끄는 다른 것들을 알지 못한다.”
“거래를 수천 건씩 하면서도 계약서를 쓰는 법이 없지만,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를 하여 절대 계약을 깨는 법이 없다.”
물의 시험, 불의 시험, 결투재판, 기타등등이 판단의 기준이었다. 법의 적용 자체도 자의적이었고,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형벌로는 신체형보다는 예속형이 잦았고, 이슬람의 전파와 함께 성윤리에서는 종교적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는 그 영향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적용의 양상 역시 다원적인 무역도시와 강력한 통치하에 어느정도의 응집성이 있는 도시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비교적 단일한 인구를 다스리는 안정된 정부에서 치안은 안정되었으나 믈라카 같은 도시에서는 안전을 위해 선박에서 자야 할 정도로 무법이 횡행했다.
상대적으로 여성의 자유로운 결혼의 권리는 옹호되었다. 결혼할 때 지참금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 주어졌고, 남편의 장기간(7개월, 12개월) 부재는 이혼의 사유가 되었다. 성기 피어싱이 성선택의 중요한 표지가 되고, 문학에서 남성 영웅의 성적 매력과 인기는 인물 성격의 주요 포인트로 나타난다.
이혼은 흠결이 아니었고 이혼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도 없었다. 특기할만한점은 친족관계에 대한 강조다. 지참금이나 이혼에서 여성이 자율성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생산과 교환에서의 분업체계에 기인한다. 교역이 여성의 영역이었고, 농업의 노동집약도가 낮았고, 채집이나 원예의 중요성이 높은 점이 이러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성비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음. 혼인관계에 있어서의 인종적, 종교적 다원성 역시 도서부와 대륙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드러나는 양상으로, 이슬람의 전래와 함께 도서부에서는 성적 억압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전통 역시 두드러지게 살아숨쉰다.
조혼 풍습에 대한 전반적인 비교는 양호한 영양상태로 인한 이른 성적 성숙, 조혼 풍습의 국지성, 알려진 혼인연령등을 통해 이를 일부 지역의 문제로 정의한다. 전반적으로 높은 양육기간 역시 수렵채집-농경이 중첩된 사회적 형태의 유산이다. 더하여 자유로운 성의식은 성병의 만연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요인들이 앞서 말한 정정불안에 더하여 낮은 출산률로 나타난다.
성별분업과 교역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오늘날에도 여성들의 두드러진 시장참여율로 나타난다. 이는 낮은 고용률과 이에 따른 높은 자영업률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성별분업이 현대에도 재현된 결과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여성의 교역과 시장활동 참여율을 비교한 에스테르 보세루프의 통계에서 최상위를 차지한다. 여성의 참여율은 타이에서 56퍼센트, 필리핀에서 56퍼센트, 버마 47퍼센트, 캄보디아 46퍼센트다. 인도네시아는 31퍼센트로 다소 낮은 편이지만 다른 이슬람 국가, 특히 (1퍼센트에서 5퍼센트 사이인) 중동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다."
"나라(캄보디아) 안의 장사는 모두 여성이라야 능히 그것을 할 수 있다.
이 나라[시암] 풍속은 모든 일을 아낙이 주관하는데 (…) 장사까지 크고 작은 일은 아내의 결정을 따른다.
시암에서는 여자들만이 물건을 사들이는 상인이며, 그중에는 장사를 크게 하는 이들도 있다.
아체의 환전상은 통킹과 마찬가지로 거의 다 여자다.
코친차이나에서 남자는 다 군인이다. 상업활동은 여자가 도맡아 한다.
버마의 여자들은 (…) 남편의 중요한 장사를 도맡아 관리한다.
흥정하고 사업을 하고 사고파는 것은 (말루쿠의) 여자들이다.
(믈라카에서는) 여자들이 밤에 시장을 지킨다.
남편이 아내에게 금전 문제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 보통이다. 여자 혼자 시장에 가고 사고파는 일을 모두 다 한다. 자바 남자는 돈 문제에 관해서는 바보라는 말을 흔히들 한다."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전역적인 공통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그 물적 토대와 상호간 연결이 이러한 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외교에서, 그리고 해외 무역상들의 현지 파트너였던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재차 검증된다. 그 정치적 위치 역시 낮지 않았다.
위기의 속에서 전투적인 역할을 한 여성들의 사례나, 통치권 계승과정에서의 여성들의 역할 역시 두드러진다. 극단적인 사례에서는 성별보다 계승순위가 우선하기도 한다. 대륙부에서는 이런 사례가 적게 나타나지만, 도서부에서 기록된 여왕의 치세는 그 비율 면에서 특히 높게 나타난다. 14세기 보네 왕국의 32대 중 6대가 여성이라는 점이나, 와조 왕국의 대지도자 여섯명 중 네명이 여성이라는 점 역시 성별분업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정치적 주도권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교역, 외교에서 여성의 몫이 많다는 것은 농업 자체의 변동성이 교역에의 필요를 촉진하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작지 않았으며, 상층으로부터 기층까지 여성의 통치를 받아들일만한 문화적 저변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보편적인 예속관계 역시 이 과정의 변수로 보인다.
5장. 축제와 오락
동남아시아는 인구밀도가 낮았다. 삶은 사회적 관계 속에 붙들려있었지만, 그 절대적인 노동시간은 작았고 개개의 삶은 상대적으로 풍요로웠다. 교역의 시대에 몰려든 부는 이를 촉진한다. 국가 역시 이러한 여가활동의 제공자로, 축제와 행진은 왕의 권위를 드러내며 그 문화의 주재자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방편인과 동시에, 도시와 주변부를 섞는 장이기도 했다.
잔치는 길게 이어지며 극장국가로써 국왕의 부와 위엄을 과시하는 자리였고, 영토 내의 신민들이 교류하고 화합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함께 열린 시장은 다대한 물산이 서로 거래되는 회합의 장이자 교환경제의 공간이었다.
동물을 활용한 볼거리도 이어진다. 물소싸움, 들소싸움, 자바 일부에서는 인간들 끼리의 기마전 역시 축제의 일부이다. 코끼리는 왕권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코끼리와 호랑이의 대결을 통해 왕의 권위를 과시하는 무대 역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배 경주도 인기있는 종목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편적인 오락은 닭싸움과 도박이었다.
도박은 단순한 경제적 행위가 아니었다. 돈과 권력은 결합하여 나타나며, 타인에 대한 예속 역시 자본과 엮여서 드러난다. 즉, 도박과 그에 따른 자금의 이동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집단간의 정치행위로써 함의를 갖는다. 연날리기에 대한 묘사가 새삼 공통의 감각을 일깨운다. 특히 이 바람 아래의 땅에서 연이 갖는 의미는 농경민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마음이 아니었을까. 연은 바람을 따라 떠오르고, 배 역시 계절풍을 맞아 항구들을 누빈다. 사람과 돈이 물을 타고 섞여든다. 카드놀이, 체스, 인도식 차투랑가와 중국식 장기가 각각 대륙부의 접변으로부터 도서부까지 파고든다. 타크로(족구) 역시 오랜 전통을 갖는 동남아시아 전역의 유희였다. 문화사를 읽으면서 이런 부분이 시대에 대한 연결을 제공하는 게 흥미로움. 유희를 통해서도 과거와의 연결을, 당대의 심상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궁중문화와 대중문화는 극장국가의 형식을 통해 혼합되어 나타난다. 국가가 권위를 유지하는 동안은 양자는 단단하게 결합된다. 그 권위가 외부로부터의 침투로 무너지는 순간이 양자가 분리되는 순간이다. 축제에 음주가무가 빠질 수 없다. 구비문학 전통과 노동요로, 구전속으로 문학적 자산들이 흐르고 악기가 발달한다. 공으로부터 관악기, 역학기까지 도서부의 악곡은 나름의 음계와 리듬으로 바람을 따라 퍼져나가며 변주된다. 베트남의 음악체계는 중국의 음보와 음계를 수용하며 독특한 정취를 형성한다. 연극 역시 발달한다. 가면극, 그림자극에 더해 배우가 출현하는 연극으로, 이야기꾼의 구연설화로 사회적 통합의 장이 펼쳐진다.
교역의 세기 접촉의 기록들은 바람 아래의 땅의 문해력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근대적 조사들은 문해력이 낮았음을 드러낸다. 이는 문해력의 측정방식과 전통문자가 전수되던 방법에 기인한다. 돈과 권력이 인신에 대한 예속으로 나타나며 교역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던, 도시를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문해력이 낮았다는 것은 사뭇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서구 언어를 기준으로 한 문해력의 측정, 그리고 가정을 중심으로 한 문자체계의 전수는 실질 문해력에 비해 측정결과가 낮게 드러났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특히, 교역이 여성의 업무였고 문자의 교환이 유희활동, 이성간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식민지배의 확립과 전통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화가 문해력에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사원을 중심으로 남성의 언어가 문자로 전수되었다면, 전통 문자를 활용한 문자 교육은 가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카-가-응가 ka-ga-nga 문자는 가정에서, 만자우라는 유희를 통해 학습되었고, 여성을 중심으로 문자의 전승이 일어났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전파와 성차의 확대는 기존의 전통을 억압하며 전승의 맥을 훼손했고, 그것이 식민지배 시기의 낮은 문해력으로 드러난다.
문자의 전승과 구비문학의 발달은 문학의 융성으로도 나타난다. 교역의 시대 상호간 교류가 활성화되며 보편적인 교역어인 말레이어를 중심으로 문학의 교류 역시 활성화되고, 일종의 동남아-전역 문학이 등장한다. 이는 때로는 야자잎에, 때로는 양(염소)피지에 새겨져 내려온다. 중국과의 교류는 제지기술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자바와 베트남, 시암에서 종이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중국과의 접변 확장은 많은 제조엊이 그렇듯 중국 종이의 수입으로, 보편적 사용으로 이어진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종이를 뜻하는 단어가 타이어와 인도네시아 어에서 인도어 어근을 갖는다는 점은 독특한 일이다.
기록문학 역시 융성했지만, 구비문학이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뱃사공들의 선창과 후창으로, 논에서의 모내기로, 축제에서의 노래로 구비문학은 전승되고 이어지며 도시의 풍성함과 함께 쌓여나간다. 표현이 참 직접적이면서도 미려하다.
선창과 후창으로 이어지는 노동요 외에도 즉흥 경연을 통한 창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뛰어난 작품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일부만 기록으로 남는다. 그러나 전해진 일부가 축적되는 경향은 교역의 시대에 형성된 말뭉치가 이전 어느 시대보다 풍부함으로 당대의 변화를 전해준다.
궁정문화와 대중문화의 일치는 궁정문화를 통한 외부문화의 수용으로, 문화의 주재자인 국왕, 또는 권력자를 통한 국가 간 상호 교류의 확대로 나타난다. 주요 교역어인 말레이어, 아랍어, 포르투갈어가 꼼꼼한 번역을 거쳐 상호간 영향의 매개가 된다. 특히 말레이어는 해외로부터 지식이 유입되는 통로로써,서아시아의 고전을 흡수하여 말레이 고유의 양식이 축적되는 매개가 된다.
6장. 교역의 시대, 1400~1630년
1장으로부터 5장까지 인문지리환경과 지배작물, 식생으로부터 주거생활, 장신구와 도구들, 사회조직과 문화를 훑어보았으니 이제는 교환세계의 차례이다. 15세기로부터 17세기까지, 중국으로부터, 인도로부터, 일본과 유럽으로부터의 접촉이 시작되고 확장된다. 장거리무역의 핵심 상품인 후추, 정향, 육두구가 소비처와 직접 연결되며 동남아시아의 제 집단 역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농업사회의 주요 교역품은 식량이었으나, 향료의 교역은 화폐의 흐름을 원할하게 하며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지역 교역의 핵을 이동시키고, 주 산지와 중심무역항을 기준으로 교류의 축이 변화한다. 말루쿠산 향료의 소비는 1400년경부터 늘어나 15세기 내내 증가한다. 후추는 정향, 육두구, 메이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가가 낮은 상푼이었지만, 그만큼 확장성이 높은 작물이기도 했다. 후추의 생산과 교역에서 동남아시아가 교역의 시대에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응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초기 인도산 후추에 밀리던 동남아시아산 후추는 재배면적의 확대와 교역망의 확중에 따라 인도산 후추를 밀어내고 역내와 대외 교역의 중심 상품으로 부상한다. 생산량의 증가 역시 확인된다. 1600년경 연간 4500톤에 달하던 자바,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의 후추 생산량은 1630년경 6000톤, 1670년경 8000톤에 이르른다. 재배면적의 확대와 인도산 후추에 대한 대체 속에서 동남아시아의 역동성이 드러난다.

교역의 세기 이전에도 송대 중국과의 교류 중가는 지역의 경제력 향상으로 나타났다. 송나라 무역은 13세기 마자파힛 왕조 번성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1370년 이전 한세기동안은 무역의 침체기였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육상 교역로를 개척하고, 십자군 전쟁으로인한 레반트 무역의 중단은 전반적인 수요감소와 지역의 침체로 이어진다. 정화의 원정은 남양과 중국을 다시 이어주었고, 주요 교역거점을 중심으로 중국인 집단이 지역에 머무른다. 이후 무역정책의 변화는 주로 회족으로 구성되었던 중국인 무역상의 현지 정착으로 이어진다.
레반트 무역의 재개는 유럽향 향료수입의 증가로 나타났다. 1399년으로부터 1405년까지 정향 30톤, 육두구 10톤에 이르는 양이 유럽향으로 넘어가고, 이후로도 15세기 내내 늘어나 정향 75톤, 육두구 37톤, 메이스 17톤까지 증가한다. 포르투갈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인도양 무역의 교란으로 나타났다. 홍해와 인도 서해안으로의 진출은 주요 무역로의 정체를 유발했고, 포르투갈은 이를 통해 상대적 독점지대를 누렸다.
명은 해금을 여러번 번복하지만, 어차피 뜰 배는 뜬다. 푸젠성에서 남양으로 향하는 배는 해금령과 무관하게 증가한다. 공식 조공제도의 변화 역시 지역의 국가들에 영향을 미친다. 자바로부터 시암, 믈라카의 조공사절 횟수는 당대 조공무역이 실질적인 공식 국제무역으로 기능했음을 알려준다. 남양과 명과의 거리는 그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는 자유로우면서, 경제적 이득은 수취할 수 있는 바다로 인해 활발해졌다.

오키나와를 통한 대중국무역의 우회 역시 활발하게 일어났다. 류큐 왕 쇼하시는 복건성 상인들이 오키나와를 중개무역지로 이용하도록 장려했고, 믈라카, 아유타야, 파사이(북수마트라)로부터 출발한 선박들은 류큐를 거쳐 상품을 출하한다. 류큐 선박 역시 아유타야, 파타니, 서부 자바, 믈라카로 진출하며 류큐는 동아시아 무역의 한 결절로 기능하지만, 이는 16세기에 들어 퇴조하게 된다. 1580년경부터는 일본 선박들의 진출이 이루어진다. 도쿠가와 막부의 주인장 기록은 1604년부터 1616년까지 12년동안 173척이 동남아로 향했음을 보여준다. 동남아시아는 '왜구'와의 교역이 금지된 상황에서 중국으로의 중개무역 역시 수행한다. 그 주요 거점은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이었다.
16세기 말 유럽으로부터의 수요 증가는 포르투갈을 우회하는 대체 항로 모색의 불을 지폈고, 포르투갈은 점차 밀려난다. 그 자리를 네덜란드가 채워나간다. 말레이 무슬림 상인들의 노력은 아체를 중심으로 한 대체 항로의 개발로 이어졌고, 말루쿠 제도에 대한 포르투갈의 장악력은 1575년 인도네시아 동부의 핵심 근거지 트르나테의 상실로 나타난다.
1596년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진입은 수요측 경쟁의 심화로 인한 가격의 상승과 재배지의 확장을 통한 생산량의 증대를 불러온다. 1580~1590년대 평균 향료선 수는 5~8척이었던 것에 반해 1620년대 이는 평균 13.3척으로 증가한다. 162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메이스와 육두구에 대한 독점생산을 구축한다. 한정된 지역에서 소량 재배되는 향료의 특성상 비상한 뜻과 폭력적인 수단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기존 재배지의 초토화와 독점 재배지에 대한 지배를 통해 독점이 완수되고, 이후 정향 역시 독점품목으로 편입된다.
나가는 산물이 있으면 들어오는 돈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돈의 흐름이 생산을 확장한다. 후추 6500톤을 피쿨당 평균 9레알에 수출했다. 피쿨은 석이다. 100근에서 120근으로, 약 60kg정도에 달한다. 1레알은 7~7.84g이다. 따라서 이는 25톤에 상당한다. 정향은 1바하르당 100레알로, 1바하르는 3피쿨, 즉 180kg에 달한다. 인도, 중동, 유럽향의 총 교역량은 은으로 120톤, 중국, 일본향의 총 교역량은 은 100톤에 이르른다.
16세기 기준으로는 한 7-10 조선예산(50-100만냥) 정도 되는 양이다. 에도막부로 보면 3-5 막부(120-200만냥)정도. 당대 명 조정은 2000-3000만냥이니 750톤에서 1,125톤정도이다. 한냥의 은은 37.5g이다. 물론 총 석고와 총생산에서 정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음을 감안해도, 당대 동남아시아의 교역량은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은의 유입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은광 개발과 연은분리법에 의한 일본 은 산출의 증대가 영향을 미쳤다.
인도와의 교역에서는 인도산 직물의 수입이 큰 몫을 차지한다. 안드라프라데시로부터 타밀나두, 아체와 버고 믈라카가 연결되며 5년마다 14~27톤의 은에 해당하는 양의 직물이 동남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한다. 동남아시아는 1차 원재료를 수출하고, 무역 상대국들은 2차 생산품을 수출하면서 무역은 활성화된다. 1차 원재료의 생산 역시 국면과 시기에 따라 기존 중심지의 수축과 대체 생산지의 발달로 변화를 맞이한다.

사탕수수 역시 주요 상품작물로 수출을 위해 재배되었다. 전통 작물로 취식의 대상이었던 사탕수수는 중국으로부터 제당법이 전해지며 수출 품목으로 집중적으로 경작된다. 이와 같은 생산의 구축은 마을의 권력자를 통해 중개거래가 맺어지고, 비용을 확정적으로 지출하고 수익을 불확정적으로 수취함으로써 기업농의 양태를 나타낸다.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차익을 독점적으로 수취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한다. 이런 구조에서 도시로 돈이 모이고 도시가 발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노동력은 전통적인 예속관계, 또는 '노예'를 통해 조달되었다.
교역은 배로 이루어졌다. 프라후라고 불리는 전통 선박과, 정화의 항해로부터 정착한 중국인들이 만든 정크선이 주요 운항수단이었다. 프라후나 정크는 철물의 부족과 전통적 건조방식에 따른 경향으로 못 없이 목재 장부축의 결합을 통해 건조되었다. 정크선은 1000톤까지도 건조되었으며, 동남아시아적 요소가 혼합된 형태를 띄었다. 그러나 정크선은 유럽의 진출 이후로 소형화가 진행되고 이내 유럽식 선박에 밀려나고 만다. 이는 배 자체의 화력, 해역의 불안으로 인한 빠른 회피기동의 필요성에 기인한다. 배가 있으면 선원도 있고, 도선사도 있다. 자바인들은 동부 인도네시아 해역을 지배하며, 믈라카 인들은 이들과 함께 믈라카 해양법을 제정한다. 도선사의 임무를 언급한 구절이 당대와 오늘날을 연결한다.

“도선사에 관해 말하자면 그는 바다와 육지에서의 항해, 바람, 파도, 해류, 수심, 달과 별, 한 해의 절기와 계절풍, 작은 만灣, 곶, 해안의 펼쳐진 구간, 물에 잠긴 암초 (…) 산호초와 모랫둑, 모래언덕, 산과 언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포르투갈인들의 자바 도선사에 대한 경험은 그 수준을 잘 보여준다. 교역이 곧 삶의 방식인 사람들에게 항해기술은 호흡과 같았다. 그들의 해도 역시 완성도 면에서 부족하지 않은 정밀함을 보여준다. 말레이 해양법 <운당운당 라웃 undang-undang laut>은 당대 사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드러내주는 귀중한 자료다. 앞에서부터 한 열댓번 인용 봤더니 이제 이름도 외울 듯.
그렇다면 이 무역의 화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한평(코얀)짜리 창고를 한개 또는 세개 빌려 직접 상행에 나서는 상인(키위)들로부터, 코멘다와 유사한 용선계약을 맺어 수출대행을 맞기고 이윤을 분배하는 상인들, 그리고 선주와 선원 본인들이 있었다. 선주는 말레이인이나 자바인 '나코다'로, 이들은 각급 정부에서, 그리고 교역 대상지에서 중요하게 대접받았다.

해상교류의 활성화는 육상교역의 확대로도 나타났다. 물과 숲의 땅에서 숲을 지나 강이 흐르고, 이 강을 통한 수운과 수로간을 연결하는 육로교역이 활성화된다. 야에워다 강이, 홍강이, 메콩강이, 짜오프라야 강이 바다를 육지와 이어주고, 강과 강을 넘어 호랑이와 노상강도를 뚫고 상인들이 달려나간다.
육로의 운송수단은 인간, 동물, 수레였다. 1800년 자바에는 이 길 저 길을 넘나드는 '떠돌이 짐꾼'이 5천명은 있었다고 추산된다. "노련한 산족 짐꾼 한명은 37kg을 들고 하루에 24km를 주파한다." 이런 산행은 호랑이와 노상강도로 뒤덮인 위험한 길이었다. 상행은 대형화되고, 한번에 100단위의 수레가 길을 오가며 스스로의 짐과 목숨을 지킨다. 육상교역의 비용은 해상교역에 비해 당연히 높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7장. 도시와 교역
사람과 물자는 도시로 모여들어 다시 퍼져나간다. 교역의 확장과 향료무역은 무역 중심지를 이동시켰고, 이로부터 도시가 자라난다. 전통의 권력중심지가 신흥 교역중심지에 굴복하고, 권력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는 15세기 타이에서, 레 왕조의 수립과 함께 중농말상(重農末商)으로 문을 닫아건 북베트남에서, 참파를 멸망시키고 항구를 얻은 남베트남에서, 믈라카와 자바, 수마트라에서 다양하게 전개된다.
당대 무역은 4월에8월 아시아를 향해 북쪽으로 불고, 12월에서 3월 남쪽으로 부는 무역풍을 따라 이루어졌다. 바람이 불 때 바람을 타고 나아가고, 돌아올 때 역시 바람을 뒤로하고 귀향한다. 계절풍은 계절풍이 교차하는 안다만 해, 타이만, 자바해, 믈라카해협 연안의 땅들을 중계무역항으로 노정한다. 15세기에 들어서야 말라카 해협이 안정되었고, 그 이전에는 반도를 육로로 횡단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전 시대 해협의 험난함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것은 말레이인, 미낭카바우족, 자바인, 참족, 루손인, 버고인(몬족),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의 일반적인 무역계급으로 등장한다. 이전에도 여러번 묘사되었지만, 직역에 따른 부족적 구분이 종종 드러난다. 버고인의 제철에의 기여나 무역과 해운에서 말레이인과 자바인의 기여는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내수용 직물 생산으로부터 도기, 종이에 이르기까지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두드러진 우세 역시 인종에 따른 전문화 경향을 상기시킨다.
교역의 시대 전반적인 도시화의 진전은 추정으로 산출한 도시 인구와 당대 생활조건에 근거한다. 이후 식민지배 시기 도시로부터의 이탈이 나타난다. 식민지배시기의 낮은 도시화율은 교역 주도권의 이동과 1차 생산에의 배치가 낳은 도시의 해체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16세기 도시의 규모를 문언 증거를 통해 추산하고, 17세기의 변화를 다양한 교차 검증으로 도해한다. 이를 다시 발굴 결과와 함께 돌아보며 당대 도시와 인구의 규모에 대해 대략적인 상을 나타낸다. 탕롱, 아유타야, 마타람의 인구가 20만 이상으로, 파괴 이전의 버고 역시 그정도 수치로 추정된다. 아체, 마카사르, 반튼, 낌롱이 그 아래로 10만정도의 규모를 보여준다.
자바 북해안의 도시들은 생산지의 변동에 따른 급격한 인구변화를 겪었지만, 투반과 수라바야 등은 인구 5만에 달하는 시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먀읏우, 파타니, 위앙짠, 프놈펜, 버마의 수도 잉와 또한 2~5만명의 규모를 보여준다. 믈라카 반도의 인구규모는 당대의 높은 도시화율을 보여주는 단편이 된다.

1500년에는 전체 인구중 20%가 도시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후 1600년경 중심지가 조호르, 파타니, 파항으로 확산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와 같은 높은 도시화율은 높은 농업생산성과 열악한 육로에 비해 접근이 용이한 해로와의 접변, 그리고 물길을 통한 막대한 교역으로 뒷받침된다.
도시의 구성은 왕국과 종교시설을 중핵으로, 귀족의 거처가 이를 둘러싸고있는 형태였다. 나름의 구성을 갖고 도시는 기획되지만, 인구의 젼동은 이를 무절제한 확장으로 이끈다. 버마나 아유타야 등 불교 국가들의 도시는 성벽 안에 계획을 갖고 지어지지만, 몰려든 사람들과 시장이 밖으로 뻗어나간다. 귀족은 자신의 구역에서 독자적인 사법권을 갖고 하인들을 거느린다. 사실상 별개의 영토와도 같은 것이다. 도시의 성벽은 유럽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다. 아유타야로부터 반튼, 투반, 수라바야까지 17세기 바람아래의 땅의 도시들은 요새화를 구축한다.
주택 부분에서도 나왔지만, 도시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도시 내 녹지나 인구밀도는 낮은 편인 것으로 증언들을 통해 검증된다. 주택의 철거와 건설의 용이성은 토지의 유적인 소유권과 예속관계와 맞물려 나무를 기준으로 하는 간편한 토지보상으로 나타난다. 상관 지으려면 가서 땅에 있는 야자수값만 내면 된다. 이와 같은 도시의 해체와 재구성의 용이함은 1634년 영국의 상인들이 수마트라의 항구 인드라기리를 찾아나섰다 도시를 며칠만에 뚝딱 옮겨버려 이를 찾기 어려웠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이런 경우 도시 자체의 취약성이 있다. 잦은 화재는 그 일례이다. 목조 중심의 주거지는 화재에 취약하고, 여기에 상대의 화물을 노리는 방화나 낮은 치안환경이 문제를 키운다.
도시의 물자는 시장으로 공급된다. 시장에 대한 통치권력의 통제의 정도는 지배의 공고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보통 중앙에서 관리하는 큰 시장이 하나 있고, 이런저런 가판으로 이루어진 자발적 시장이 산발적으로 출몰한다. 도시의 시장에서도 농촌에서도 여성의 상행위가 두드러진다. 식량으로부터 환전까지 폭넓은 영역에서 활동한다. 기층의 남성 상인들도 한정된 자기 분야, 쇠붙이로 된 무기와 도구 등에서 제 역할을 맡는다.
교류와 시장이 있다면 화폐도 있다. 기존의 원시화폐를 대신하여 금과 은이 유입됨에 따라 무게를 저울에 달아 거래가 이루어지고, 교역의 시대 이전에도 화폐는 일주 존재했지만 대개 내수용으로 통용되었다. 기초 화폐로는 엽전이 환영받았고, 이외에도 스페인 헤알로부터 잉글랜드 펜스까지 무역대상에 따라 다양한 해외의 화폐들이 거래에 사용되었다.
전황은 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거대한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으로 화폐의 수요로 이어지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은 가격이 엽전 가격과 역전된다. 지역에서 납을 섞은 엽전이 자체제작되어 유통되기도 한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며 수요를 따라가기 위해 잉글랜드도 동인도회사도 엽전을 긁어다 공급한다.말레이어로 마스mas라고 하는 금화가 북수마트라에서 4세기동안 순도 17캐럿에 무게 0.6그램으로 계속 주조된다. 마스당 엽전 환율은 반톤에서 1602년 2100냥, 전황이 심해진 1630년대에는 마스당 600냥에서 1000냥으로 거래된다. 마카사르에서도 화폐주조가 시작된다. 도시내의 역학관계의 언급 중 국제무역상의 우위가 특기할만하다.
동남아시아 교역도시의 신용은 어떠했을까. 자금력이 부족하다는 언급들이 보인다. 채무에 대한 체계는 있었지만, 예속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많이 보인다.
화폐를 수입해도 땅에 묻으면 돈이 돌진 않겠지 당연히. 성적 자유분방함이나 낮은 출산율은 가족에의 구속력이 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자 체계나 고리대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환어음으로, 신용화폐로 구축될만한 공통의 기반은 부재했다. 말레이인이나 자바인 정도의 상업네트워크에서도 이 시대동안 그런 종류의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나마 종교를 구심으로 한 공동체가 일부 은행 기능을 수행한다. 공통의 문화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파편화된 사회는 사회 전체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동남아시아에서 부와 권력은 말로써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예속된 하인이 곧 자본이고 권력이다. 부가 곧 사람으로, 권력으로 치환되고 권력은 다시 부로 환류된다. 자본의 자율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까. 결국 소유권은 인신에 한하고 이를 보장해 줄 국가는 부재한다. 과시적 소비를 통해 권력을 현시해야만 정부는 기능한다. 도시 내에서.
오랑카야의 역어는 '상업지배층'이다. 이들은 고위 관료의 칭호였지만, 관계를 위해 외국 상인에게 내려지기도 한다. 이들은 외국 상인들, 토착화된 외국 상인 및 관리들, 토착 귀족으로 구성되며, 시기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첫째 부류는 개별적인 상인에서 응집되어 믈라카에서는 각급 정부의 대리인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둘째 부류는 공직에 간여하며 스스로 공직을 맡기도 하고, 항구에서의 분쟁을 중재하기도 하며 지배계급과 외국 상인들 간의 정치를 조율한다.
이들 관료의 구성은 항구에 모여드는 외국 상인들의 국적만큼이나 다원적이다. 도시국가들의 정정은 국제 무역상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때론 이들을 정부에 받아들이며 효율적인 갈등 조절을 추구하기도 했다. 교역의 시대 말기로 들어서며 이와 같은 경향은 강해진다. 좋게 말하면 개방적인 것이고, 반대로 보면 그만큼 정치적인 역량 축적이 어려워 통치자 개인의 능력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는 동시에 신분질서의 유동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믈라카의 함락으로 인한 말레이 디아스포라의 발생과 대체 중심지의 발생, 이를 통한 교역도시 각부에서의 말레이 구역의 형성은 당대 도서부 동남아시아 교역에서 이들의 비웅이 어느정도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말레이 인들의 이동과 응집으로 인한 효과가 유럽과 동남아 양자간의 발등으로 발생한 일에 대해 이들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처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외부수요의 증가가 후추의 재배지를 넓히며 세계-경제에서 동남아의 위치를 높인 것처럼, 말레이인들은 마카사를를 중심으로 무역망을 재구성하고 포르투갈에 맞선다. 그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몰아닥친 네덜란드인들과의 경쟁에서 끝내 패배하고 마카사르는 함락된다.
교역의 시대 내내 경제는 확장을 거듭했고 1570년으로부터 1630년은 그 팽창의 전성기였다. 중국, 인도, 일본등은 동남아시아에 비해 경제적으로 고도화된 사회였고, 동남아시아인들도 이들을 통해 은행과 신용이라는 기능에 대해 접하고는 있었다. 그렇다면 왜 신용은 팽창할 수 없었나. 그 오랜 전황에 시달리면서도, 왜 어음거래는 발전하지 않았고, 자체적 자본의 형성은 이루어지지 못했나.
요는 권력과 자본과의 관계에 있다. 권력과 자본이 일체화되어있다는 것은 자본의 권력에 의한 종속을 의미한다. 양자간의 갭에서, 인신의 자유와 소유권의 보장 속에서 신용이 탄생하고 거래가 회전되고 자본이 출몰한다. 유적 통치질서란 통치질서의 부재와도 같다.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의 규범도, 영토를 장악한 강력한 국가도 없는 동남아시아, 특히 도서부에서 물밀듯이 밀고들어오는 자본과의 소모전은 결국 그 응집력이 소진되면서 패배로, 그리고 그 이후의 적응과 혼화로 귀결된다.
8장. 종교 혁명
원래도 다양한 종교가 교차하고 동서의 영향이 뻗치는 지역이 동남아시아였지만, 교역의 시대 그 영향력은 확장되어 종교는 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신앙체계와 도덕은 이식된 종교와 충돌하고 내륙과 도시는 갈등 속에 놓이지만, 국가의 전진과 함께 서서히 통제는 스며들어간다. 전체사적 접근에서 장별로 중심 주제를 설정하고 종적으로 내려가 세부로 뻗쳐나가면서 각 주제를 횡적으로 연결하니 언뜻 보기에는 산만하지만 각부가 다층적으로 연결되며 이해를 넓힌다.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가 어느정도 확장되었느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영향을 받았다. 이는 경전 종교로써의 특성, 정치적 의도, 기층에서의 수요와 시대적 변화가 맞물려 일어난 일이다. 무슬림의 영향은 13세기 말로주터 14세기까지 구축된 교역 공동체로부터 유래한다. 1570~1630의 대량 은 유입기는 이들 종교의 폭발적 확장과도 일치한다. 필리핀에서의 개종속도는 역사적이다. 전통적으로 대륙부 동남아시아에 퍼져있던 상좌부 불교 역시 이 시기 정치적, 종교적 압력을 받아 변화를 겪는다.
기존의 전통종교는 실물에 착근되어있고, 실용적이었다. 현세적인 바람드링 종교 속으로 혼화되어 재구성되고, 각 집단 별 다양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일상생활로부터 장례까지 전통은 규범으로, 영성으로 삶을 지배해왔다. 경전종교의 신앙체계는 이들에게 낮설게 다가왔다. 이는 화려한 축제처럼 치러지는 장례풍습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지속력에서 차이를 가진다. 카톨릭은 사제의 존재를 필요로 했고, 정기적으로 사제가 파송될 수 없는 환경에서 그 지속성이 떨어졌다. 반면 무슬림은 현지에서 토착화과정을 통해 의례와 율법을 승계함으로써 토착 종교와의 습합에 더 강점을 보인다. 물론 돼지고기는 못먹는다. 개종은 전통 신앙에 대한 공격을 수반했고, 카톨릭은 영토 내에서 적극적인 우상 파괴와 종교적 통합에 나선다. 반면 무슬림들은 이와 같은 사례는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원리주의적인 외국인들에게 기이한 현상으로 여겨졌다. 이븐 마지드는 말한다.
“그자들에게는 문화라는 것이 없다. 신앙 없는 자가 무슬림 여자와 결혼하고 무슬림은 이교도를 아내로 맞는다. 그자들이 대체 무슬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도적질이 도처에서 벌어지나 신경 쓰지 않으니 그자들이 곧 도둑이다. 음식에 관한 법이 없어 무슬림이 개고기를 먹는다. 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율법에 따라 이혼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교의 전파는 교역의 흐름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슬람 신앙의 전파는 무슬림인 나코다들을 대표로, 교역로를 따라 신학자들이 파송되며 도서주 전역에서 일어난다. 반면 카톨릭은 스페인 국왕의 지원 아래 적극적으로 사제를 파송하며 필리핀의 개종을 이뤄낸다.
종교의 확산은 정치적 작용이기도 하다. 믈라카의 함락과 말레이 디아스포라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이슬람 신앙의 확산으로, 정치적, 경제적 동기와 결합되어 강화된다. 오스만 투르크의 대기독교전선과 연계되고, 반 외세와 반 기독교가 결합하여 성전이 선포된다. 확장은 외부의 침투에 대항하는 과정이면서, 내적 응집성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교역도시를 중심으로 신앙이 내륙으로 침투한다. 그 과정이 꼭 평화적이지만은 않았다. 정정불안은 종교 확장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작용한다. 말루쿠에서 포르투갈과 트르나테 술탄국이 타혖을 맺자 전통적인 신앙체계를 지닌 지역 세력으로 카톨릭과 이슬람이 더 파고들 수 있었다는 언급은 그 증명이기도 하다. 양자간의 대립 역시 정세에 따라 가열되었다 휴지기를 가지기도 하면서 이는 더 가속화된다.
교역도시가 갖는 다원성에 대한 지양은 교역의 시대 초반의 종교적 관용으로 드러난다. 그 분기는 믈라카의 함락과 1540년 '대권력전댕'의 시작이다. 무슬림과 비무슬림과의 갈등이 본격적인 대립으로 치달으며 이는 인도양 전역을 묶는 코스모폴리탄적 무슬림 연대로 나타난다. 구자라트인으로부터 튀르크인, 인도네시아인들이 결합하며 갈등은 격화된다.
자바의 사례는 교역도시에서 시작된 신앙이 내륙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앙의 율법은 현지의 사정에 맞춰 조정되지만, 종교를 통한 사회적 통합은 때로는 갈등으로, 때로는 화합으로 확장되며 조금씩 내륙으로 스며들어간다. 이슬람 신앙이 분절적인 사회에서 보여주는 강한 통합성이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지리인문환경과 융합되어 빠르게 전개된다. 술라웨시에서는 한세대만에 전통신앙을 주관하던 트랜스젠더 사제가 쫓겨나고, 습속과 문화가 변화를 겪으며 인근 부족들은 마카사르의 강권에 돼지고기를 끊어야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이와 같은 대립도 누그러진다. 네덜란드의 해상 통제에 의해 중동과 동남아시아간의 연결이 끊어지고, 대립의 중심축은 종교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배와 그에 대한 대항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이 전통 애니미즘 신앙에 비해 갖는 장점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신앙이 갖는 이동성의 차이로부터 구분해본다. 지역에 얽매이는 토테미즘은 신앙의 수행을 위해 고향에 얽매이게 된다. 보편 종교는 신앙의 거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동시에 그 신앙의 전파자들이 외부 교역상이었다는 것도 그들의 위상에 대한 외경이 신앙으로 이어지게 하는 통로가 된다. 현세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그만큼 물질적인 위광에 영향을 받기도 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경전종교가 갖는 전장에서의 응집성 역시 큰 영향을 미친다. 전통 종교의 수호를 위해 전장에 나서는 이들과 신앙의 전파를 위해 성전의 대의로 전장에 나서는 이들의 응집성에는 차이가 난다. 이는 전통적인 전쟁의 목적과 수행방법 면의 차이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마자파힛 붕괴의 사례에서, 용병들에 의한 접전의 와중에서 신앙이 부여해주는 임전태세는 전통 종교의 신봉자들로 하여금 경외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신앙에의 귀의로 이어진다. 전쟁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 자기가 믿는 신앙의 보편적 승리에 대한 역사적인 믿음 역시 차이를 만든다. 더하여, 경전 그 자체가 갖는 권위가 있다.
신앙의 전파과정에서 경전이 갖는 의의를 보여주는 두개의 사례가 있다.
- 마스덴은 한 수마트라인 정령 숭배자가 같은 수마트라 출신 무슬림에게 이슬람교의 알라가 정령보다 더 진짜인지 증명해 보이라며 도전한 일화를 전한다.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은 이슬람의 진리는 “책에 쓰여 있다”는 것이었다.
- 반종교개혁 선교단이 직접 성경을 인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탕롱(하노이)에서 열린 불교학자와의 공개 토론에 나가면서 베트남인 청중에 미칠 영향력을 계산해 아름다운 장정의 불가타 성경을 들고 가 라틴어로 낭독했다.
구전이 갖는 장점이 있다면 경전이 갖는 권위가 있다. 글로써 기록된 말씀은 하나의 세계관을 온전한 형태로 전하고, 고도화되는 세계 속애서의 갈등과 모순을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문자가 갖는 권위, 실물의 책이 갖는 지식으로써의 포상은 이에 아우라를 더한다. 그러나 원전만으로 선교가 이루어질수는 없다.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는 신앙고백을 번역하고, 교리문답을 작성하며 대중에게 다가간다.
"나는 아이들과 원주민에게 ‘신앙고백declaration’을 가르쳤다. 내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맞추어가며 직접 한 줄씩 쓴 신앙의 조항은 (…) 새로이 개종한 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말루쿠에서 그랬듯 믈라카에서도 기도문 대신 이 신앙고백을 가르쳤다. 그들이 진실로 믿고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는 기초를 세우고 헛된 우상 숭배를 중단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매일 조금씩, 곧 마음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스무 단어 정도를 매일 가르친다면 1년 안에 배울 수 있다."
전통종교는 단순히 신앙에만 기초하지 않았다. 치료로, 마술로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합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결국 경전종교로 전통종교를 대체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신비에 대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마로, 기적으로, 신유의 은사로 이슬람과 카톨릭은 각각 전통종교를 때로는 편입시키고 때로는 배척하며 퍼져나간다. 내세관 역시 이 과정에서 기존의 의례와 관념을 대체하며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킨다. 수피즘은 신비주의적 관념과 전통과의 융화를 통해 이 와중에 고유의 영역을 개척한다.
상좌부불교는 상대적으로 강고한 율법과 체계, 경전을 통해 이 침투에 저항한다. 선사들의 수행은 일상 속에서 신앙의 기둥이 되어 공고한 믿음을 유지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그들의 삶은 가난하고 소박하기 그지없어, 교회에서 가장 개혁적인 청빈 또는 가난으로도 표면상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은 전적으로 탁발에 의존해 살기 때문에 가진 물건 하나 없이 또는 어떤 상거래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육식을 절대 금하며 저녁에는 화식火食은 일절 입에 대지 않고 몇몇 종의 생과일에 만족한다.”
동남아시아의 성별분업은 종교에 있어서도 재현되었고, 남성과 여성의 의례는 별개의 특성과 전승을 가졌다. 경전종교의 침투는 남성을 이로 포섭하였으나, 여성들은 이 체계에서 분업으로부터 배제된다. 따라서 전통종교의 반발 역시 주로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필리핀에서 일어난 갈등의 과정에서 무슬림은 이들을 무시하고 카톨릭은 강압한다. 종교의 전래는 기존의 성도덕과의 충돌로도 이어진다.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복식과 성관념을 가지고있던 기존의 사회에 억압적인 율법과 복식이 강제되고, 이는 갈등으로, 때로는 적응으로 나타난다. 마카사르에서는 다 차도르 씌웠다. 저 날씨에...?
풍습의 변화는 빠르게 일어난다. 장례의 외양은 엄숙하고 간소해졌다. 그러나 전통과의 혼화는 드리 쉽지 않았다. 네크로맨시 안해준다고 선교사가 죽기도 한다. 장례를 빠르게 치르고 난 후에도 사람들은 무덤가에 모여 공양을 한다. 이를 여러차례 금지했던 기록이 그 반증이다. 강요된 제례가 온전히 스미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슬림들 역시 전통과의 교집합에서 진통을 겪는다. 계승된 세계관이 한날한시에 바뀔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의 전래는 기존의 다원적인 부족집단들을 하나로 엮어나간다. 종교는 권력과 긴밀한 거리를 지니고 있었고, 권력의 확산은 또한 종교의 전파이기도 했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한 경제체제의 성장 역시 이를 촉진한다. 보편종교를 선택한 이웃이 무역으로 강고해질 때, 다른 부족집단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슬람교와 상좌부불교는 권력과 결합하며 통치 확장의 수단이 된다. 이슬람은 울라마에 대한 지원으로, 상좌부불교는 그 수장 마하싱가라자에 대한 임명권의 행사로 국왕은 종교에 영향을 끼친다.
이슬람과 불교의 교리체계는 소위 말하는 왕권신수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하는 방편으로 유연하게 활용된다. 카톨릭은 보편교단의 존재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이와 같이 기능하기 어려웠다. 이는 동남아시아 그리스도교 왕조의 짧은 수명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적 예속에 대해서도 보편종교는 저마다의 입장을 가진다. 한편으로는 노예제에 대해 그 정당성을 설파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사노예를 반대함으로써 국왕의 권력강화에 이바지한다. 스페인 식민지에서도 사노예 폐지는 그대로 국가 세수의 증대로 나타난다. 사노예는 인두세를 내지 않는다.
이슬람 신앙의 전파는 지역에 따라 그 원리주의적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자바의 무슬림들은 상대적으로 이슬람적 율법에 대한 결합이 강고하지 않았다. 이슬람 국가의 발흥은 트렝가나로부터 아궁까지 지역에 강한 흔적을 남겼지만, 북해안을 통한 이슬람 세계와의 연결이 끊기자 이는 신앙에 대한 반동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종교를 이용한 집권화는 국가의 필요성이 커지고 정정갈등이 극에 달하며 피크를 맞는다. 성지순례를 통한 종교적 아우라는 이를 강화하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대중 역시 신앙을 차차 수용해나간다. 이는 꼭 권력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는 카톨릭이, 시암, 참파, 캄보디아에서 교역도시를 중심으로 무슬림이 퍼져나가는 것은 그 자발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발성에 대해 국가와 주류종교는 탄압으로, 또는 교역에의 거부로 대응한다. 북베트남에 대한 언급을 보다보면 종종 조선과의 유사성을 떠올리게 된다. 지정학적 입지나 유학에의 경향성, 상업에 대한 태도들이 상사되는 부분들이 있다. 다만 조선에는 응우옌이 없었을 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정정갈등은 이 시기 유적인 권력과 틈입한 신흥종교가 어떤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역도시의 조호르 출신 말레이인 오랑카야는 신앙으로 단결된 난민 용병집단과 선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무슬림 교역 네트워크를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정부와,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갈등을 빚는다. 비록 이후 정정갈등 속에서 몰락하지만, 대륙부에서의 종교적 침투가 경제적 배경과 접속하여 진지를 구축했을 때 어느정도의 자율성을 낳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시암 역시도 몰려드는 말레이계 무슬림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줌으로써 무슬림의 영향력이 늘어난다. 포르투갈에, 이후로는 네덜란드에 대항하던 무슬림들이 하나 둘 거처를 잃고 방황할 때 피난처로 선택한 것 역시 시암이었다. 대륙부에서의 무슬림 정체성은 이처럼 도서부에서의 현상변경의 결과이면서, 기층의 자발적인 동조 속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강고한 불교도 정체성이 확립이 그 확장을 저지하는 장벽이 되었다.
상좌부불교는 버마에서, 캄보디아에서, 수코타이와 치앙마이에서 이미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차례로 국교로 지정되며 보편적인 정체성을 확립해왔다. 사원이 갖는 국제적 네트워크로써의 중요성, 특히 시장으로써의 기능은 종교적, 경제적 영향력의 원천으로도 작용한다. 동질적인 신앙이 국제적 경제 네트워크에 대한 접속권으로도 기능한다. 교역의 시대 대륙부에서도 외부로부터 유입된 경전종교로써 각급 정부들에 의해 종교적 집권화가 정치적 짐권화와 함께 진행되고, 이는 상가에 대한 영향력의 행사를 기반으로 원천에 대한 탐구와 통제기제의 확립을 통해 구체화된다.
상가의 충실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정부는 이에 대한 율령을 통해 상가를 통제하고, 상가를 통해 집권을 확장한다. 자체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부재 또는 연성이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촉진하며 집권화를 강화한다. 승려들의 실천 역시 이 과정에서 강한 영향력으로, 외부로부터 투사된 종교에 대한 응집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동시에 승려의 수 제한 역시 이루어진다. 왜냐면 승려는 세금을 안내니까... 너무 찍어누르면 가끔 왕도 골로 간다. 1688년 나라이 왕의 축출이 그런 사례이다.
대륙부의 전통 종교로 불교가, 도서부의 전통 종교로 애니미즘이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기능하며 각각 다른 특질을 발현한다. 교역의 증가는 문화적 접면의 증대이기도 하다. 카톨릭과 이슬람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유럽의 전진 속에 이슬람은 대안적 정체성으로 기능하며 도서부를 응집시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통과의 충돌과 타협이 일어나고 네덜란드와의 정치적/경제적 충돌과 패퇴는 다시 이들을 이합집산시킨다. 그 과정에서 불교 역시 집권화의 일익을 담당하고, 대륙부로의 침투에 방파제가 되어준다. 여전히 전통종교는 그 흔적들이 남아있지만, 이슬람은 도서부에서 확고한 주류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9장 절대국가의 문제점
자금의 유입과 교역의 번성, 이로 인한 도시의 팽창은 권력의 증대로, 종교와 정치를 이용한 내륙에의 확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집권화는 그 자체로 문제를 낳는다. 몽골의 침입은 대륙부의 권력관계를 휘저어놓고, 새로운 권력이 부상할 수 있는 틈을 만든다. 원명교체기 이후 조공무역은 교역의 기회를 열어주며 동시에 정치적 정당성의 경로로 기능한다. 아유타야와 믈라카가 15세기 초 지역의 패권을 쥐며 성립되고, 향신료 교역의 활성화는 산지를 중심으로 한 지역 토후국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믈라카는 역내의 교역을 입지와 정치적 조건을 통해 모아내며 큰 성공을 이룬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찾아온다. 하부 버마의 버고는 몬족 왕국으로 무역애서 큰 역할을 하며 융성한다. 그러나 1530년대 버마족 왕국 따응우의 떠빙쉐디가 이들을 무너트리며 버고족은 디아스포라를 겪는다. 응우옌 역시 호이안을 통해 교역도시로써 부를 축적하며 코친차이나에서 권세를 떨친다. 공통적으로 교역도시의 설립과 이를 통한 부와 무력의 유입을 통해 통치 왕조를 건설한다. 교역과 부는 집권화의 원동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체는 1590년대부터 급격한 집권화 과정에 접어든다. 이는 지역의 체제를 중앙으로 모아내며 관료제를 정비하는 등 국가로써는 성공했으나, 지역 귀족들의 반발과 정정불안, 교역의 축소에 직면하며 1640년 여성 통치자의 등장과 함께 유화적인 모델로 변화한다. 마카사르 역시 술라웨시의 핵심 교역거점으로, 고와족과 탈로족의 연합으로 결성되며 말레이인들의 디아스포라 이후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주요 정치체로 올라선다. 1605년 이후로는 기독교와 이슬람, 네덜란드와 토착민간의 갈등 속에 여러 토후국을 거느리는 제국으로 올라서며 동인도회사의 침투에 저항하는 주요 거점이 된다.
분절화된 사회가 응집되면서 상호간에 영향을 준다. 하나의 도시가 지역으로 뻗쳐나가는 과정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부족집단들에게 응결의 필요성을 부여한다.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고 부와 권력이 집중되며 국가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으로 수입을 얻었나. 그 주요 새입은 무역애서 나오는 관세였다. 대개 10%를 넘지 않았고, 관세가 매겨지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입고된 물건의 10%를 떼가거나, 물건의 25%를 시가 아래로 사고 25%는 시가 이상으로 팔아 실질적으로 5%정도의 관세를 매기거나, 매가 기준으로 정률 관세를 부여하는 등의 방안이 도출된다. 인두세 역시 주요한 세입이었다. 더해서 동남아는 예속사회였다. 노동에 돈을 왜 주죠 하인 써서 부리면 되는데. 베트남은 인당 은 1.2꾸언(28그램)을 걷는데 거의 한냥이고 쌀로는 대략 한 석이다. 코친차이나는 기혼남성에게 스페인 은화로 11헤알(은 약 300그램)을 뜯는다. 응우옌놈들 혹독하다. 시암 친구들은 지조로 논에 1푸앙의 세금을 매긴다. 그러나 이 지조가 전체 영토에서 보편적으로 수취되지는 않았다. 독점 역시 왕실의 주요 세입 중 하나였다. 염으로부터 철, 귀금속등의 독점을 통해, 통행료 수입을 통햐 재정은 유지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수입은 대외무역이었다. 관세로, 독점적인 무역으로, 행심 수출붐, 향료로부터 식량에 대한 통제로 부가 축적되고 권력이 증가한다.
유럽인들의 화기는 무력의 우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개인화기의 우위는 화기의 확산으로 빠르게 희석되었고, 대포 역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베트남의 화약무기에 대한 투자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국뿐만 아니라 무슬림 화기제작자들 역시 세계적 유대를 보여주며 분쟁에 개입한다. 1560년 아체는 투르크의 술탄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그는 무기제작자를 파송한다.
화기의 보급과 사용은 무력의 집중화로도 나타났다. 결국은 화약의 지속적인 보급이 필요한 일이고, 부가 있어야하는 일이다. 국가의 본질이 폭력의 독점이라면, 화기의 전래는 이를 용이하게 했다. 코친차이나는 군인에게 봉급을 주고, 북베트남은 쪽수는 많은데 돈을 안준다. 쩐 애들이 이걸 뭔수로 이기냐... 물론 인두세를 저따위로 걷으니까 서산당의 난이 난다. 항구에서는 교역도 일어나지만 용병들도 들어온다. 일본인으로부터 포르투갈인, 말레이인, 몬족등 다양한 민족이 용병으로 동남아 곳곳을 돌아다닌다.
함선과 거기에서 발사하는 대포의 화력은 동남아시아에서 따라가지 못했던 기술격차였다. 무장갤리선과 포 설치로 대응하지만, 체급의 차이는 현격했다. 포가 있다고 능사가 아니다. 맞춰서 데미지를 줄 수 있어야한다. 배는 자본집약적인 상품이고, 리스크는 무역을 위축시킨다. 무장갤리선의 성행은 정크선 크기의 축소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아체로부터 반튼, 조호르, 파항, 브루나이 등이 척당 운용인원이 노꾼과 전투병을 합쳐 50~200 정도되는 무장갤리선을 100척씩 운용했다는 것은 당대 국가들의 해군전력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중국의 조공체계는 무역으로, 통치의 정당성으로, 동시에 역내 국가들에 대한 계서의 수립으로도 기능했다. 도서부는 자바에게 조공을 보내고, 말레이 반도의 군소국들은 시암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황금 꽃bunga emas'을 바친다. 이후 17세기에 접어들며 각 지역의 집권화가 이루어져 외교 상대자는 줄어들었지만,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구 제열강과 인도와의 교류가 확대되며 그 양상은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간다. 상호간의 혼인동맹과 교역이 확장되고, 서구열강들과의 외교관계가 빈번해지며 외교의 형식을 둘러싼 절충이 일어난다.
161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감히 동남아시아의 토후국들이 스스로를 스탓하우더르랑 동등한 군주의 반열에 놓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의 향료독점이 진행되며 갈등은 증폭되고, 외교적 출구를 찾기 위한 동남아 제 국가의 노력 역시 더해진다. 반튼 역시 동인도회사의 봉쇄와 공격 속에 동맹을 모색하고자 영국으로 와 찰스 2세의 지원을 약속받지만, 그가 조약을 맺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시암의 나라이 역시 점증하는 위협속에서 골콘다와 페르시아, 프랑스까지 그의 손길을 뻗친다.
교역이 성장하며 획득한 권력은 17세기의 위기에서 교역이 감소하며 탈출구를 찾는다. 강력한 집권화경향은 경제적 동기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그[나레수안 왕]는 늘 말했다. “이야말로 너희 시암인을 다스려야 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썩어가는 국가에 사는 추악한 본성의 고집불통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이 존경받는 민족이 될 때까지 이대로 할 것이다. 너희는 비옥한 땅의 풀과 같아서 짧게 자를수록 아름답게 자랄 것이다. 나는 길에 금을 뿌려놓고 몇 달이나 그곳에 둘 것이다. 탐욕에 찬 눈으로 이 금을 보는 자는 누구건 죽을 것이다.”
나레쑤언이 참 입지전적인 왕이다. 왕을 알현할 때 부복하고 재차 절하는 풍습 역시 그로부터 출발한다. 지역의 토후, 귀족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종교적 압박을 통해 권위를 하나하나 수립해나가며, 관료제 역시 확장된다. 이는 결코 일방적인 활동은 되지 못했으며, 강력한 집권화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종종 귀족공화정에 가까운 형태로 귀결되기도 했다. 파편화된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평의회적 전통은 드물지 않았다. 말레이 반도에서도, 필리핀에서도, 반튼, 반다, 트리나테와 같은 주요 향료교역항에서도 상업적, 경제적 결정은 토후들의 중의 아래 내려졌다.
집권화가 되기 전의 평의회적 전통이라는 건 그럼 어떤 종류의 일이었나. 유교인의 피가 끓어오르는 꼬라지였다. 왕궁에 귀족들이 사병과 코끼리를 대동하고 나타나다니 나레쑤언이 사자후를 토한 심정이 족히 이해된다. 아체의 알 무캄밀(재위 1589~1604)과 그의 뒤를 이은 이스칸다르 무다(1607~1636)는 반귀족 쿠데타와 뒤를 이은 공포정치로 국가를 집권화하고 제도를 구축한다. 아체의 오랑카야들이 이 시기 어떠했는지 볼리외는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오랑카야는 아름답고 크고 튼튼한 집에 문에는 대포를 두고 경비원과 하인으로 부리는 수많은 노예를 두고 살았다. 그들은 잘 차려입고 수행원을 여럿 거느리고 외출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런 대단한 권력은 왕권을 약화시켰다.”
이는 관료나 오랑카야가 상속인 없는 죽음에서 재산을 몰수할 수 있게 한 제도적 장치로 강화되었다. 대륙부에서는 아예 신하는 상속세를 낸다. 시암의 1635년 법은 관료의 토지는 왕의 것으로 명시하지만 실제로 3분의 1은 왕에게, 3분의 1은 가족에게, 3분의 1은 장례비용으로 쓰였다.
17세기 진행된 반튼, 마타람, 마카사르의 국가적 확장은 포르투갈의 믈라카 디아스포라와 이어진 네덜란드의 침입이 야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마타람의 정복왕 술탄 아궁(재위 1613~1646)은 이 과정애서 자바 북해안의 항구도시를 파괴하고 해군력을 손아귀에 넣는다. 교역을 통제하며 바타비아에 대한 쌀 공급을 조절하며 레버리지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17세기의 경쟁 격화는 이와 같은 집권화를 강화했지만, 결국은 미래의 자원을 끌어다쓴 꼴이 되었다. 교역시장에서 자생적으로 발달했던 해운으로부터 상업 생태계는 군주의 지배하에 놓이며 자생성을 상실하고, 통치가 붕괴하며 그 전통이 사라진다. 또한 시암과 아체에서, 버마에서 집권화는 관료제를 구축하고, 이는 절대군주들의 통치가 지나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유럽의 절대주의는 관료화와 체계화로, 그 과정에서 사유재산권의 명문화된 보장으로도 나아갔으나, 동남아시아에서 절대주의는 국왕 개인의 의사에 따라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폭압의 형태가 더 많이 드러난다.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응집된 국가는 카리스마가 사라지면 해체된다. 마타람에서의 반발이나 아체에서의 쿠데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사유재산권은 당연히 존중받지 못한다. 아 죽으면 왕 입장에서는 니땅내땅이라니까요. 종교와 정치의 관계 역시, 종교가 정치애 부복하는 형태로 전진하였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있었다. 아망쿠랏 1세가 1646년 즉위 직후 울라마 2000명을 베어버린 것 이와 같은 우열관계를 잘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평의회적 전통을 잘 보존한 연방제적 국가들이 이 과정에서 제도적 안정성을 지키는 편이다. 마카사르에서 고와와 탈로 각 가문의 권력분립이나, 시암에서 왕위계승자의 앞궁전을 통한 민의의 수렴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발리 역시 군주의 역할을 분할함으로써 합의에 의한 통치를 이루어냈다. 파타니와 아체에서 오랜기간 나타난 여왕의 통치 역시 이와 같은 연방제 전통의 한 표현이다. 아체의 집권화는 그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고, 여왕의 즉위는 실질적으로는 오랑카야들의 과두정 수립과 같았다. 여왕은 이 가운데 조정자로써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권위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퇴색되어 3대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르곤 한다.
교역의 시대 집권화와 국가의 탄생은 부의 유입과 무력의 변화, 종교적 기제의 차용과 함께 이루어져 그 절정기인 1570년으로부터 1630년까지 최고조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대륙부와 도서부에서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교역의 영향과 그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 내륙의 존재, 그리고 국가적 응집성의 차이이기도 하다.
집권화의 과정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폭압으로 종종 나타났으며, 권력과 자본의 융합은 실질적으로는 권력에 의한 자본의 종속이었다. 집권화는 국가를 구축했지만, 동시에 자본의 자율성, 해운으로부터 상업전통의 파괴로도 나타난다. 결국 집권화가 반동을 맞으며 교역의 시대를 특징지었던 문화적 전통 역시 유실되게 된다.
10장. 동남아시아 빈곤의 기원
절대주의가 항상 시장에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시장이란 곧 오랑카야들의 연합이기도 하다. 아시아에서 권력과 부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였지만, 동남아시아에서 권력과 '교역'의 관계는 다른 아시아에 비해서도 특별하다. 유럽인의 진출은 무력의 우위를 갖고 시작되지만, 그 우위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 격차가 극대화되는 공간은 바다였고, 또한 잘 구축된 요새지였다. 결정적으로, 적극적인 현지의 협력 없이 전장의 장기지속성은 담보될 수 없었다. 보급을 본토에서 당겨올 수 없다면 현지 협력자를 통해 마련해야하고, 수적 열세는 현지로부터의 충원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포르투갈의 믈라카 점경은 그런 의미에서 동남아시아의 교역조건이 유럽인들의 지배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었다. 믈라카는 교역도시로 첫 발을 내딛은 후 중국과의 조공무역으로, 역내의 허브항구로, 그 지리적 이점을 살린 번영하는 항구였다. 동남아시아 해역의 초크포인트를 포르투갈이 움켜쥠으로써, 유럽인들의 진출과 접변의 확대는 시작되었다. 반면 트르나테에서 포르투갈인들은 현지의 반감과 포위에 휩싸여 결국 도망치고야 만다. 문제는 네덜란드였다.
주식시장이라는 당대 최고의 선진 금융기법으로 자금을 조달하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박은 1620년대에 117척, 1630년대에는 148척, 1660년에는 257척에 달한다. 선복량과 물류에서의 점유율을 생각해보면 동남아시아 내 모든 물자의 교류가, 전체 해운이 네덜란드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양인 것이다. 교역도시의 권력이 교역을 통해서 나온다면, 교역의 항로를 점령하는 것은 그 국가의 주권을 탈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덜란드는 압도적인 선박량으로 일대의 해운을 장악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서부 동남아시아 무역국가들의 명운 역시 틀어쥐었다.
이 힘으로 무엇을 했는가, 육두구부터 독점한다. 어떻게 향료를 독점할 수 있었을까. 향료를 재배하던 사람들을 다 죽이고 예속민에게 향료를 재배하게 하면 생산관계에 대한 장악력으로부터 나오는 협상력은 무의미해진다. 반다제도의 15,000명은 그래서 희생되었다. 이들의 독점은 메이스로, 정향으로 그 품목을 넓혀나간다. 당연히 학살이 뒤따른다. 1629년 술탄 이스칸다르 무다의 아체와 술탄 아궁의 마타람이 유럽과의 갈등에서 패배를 맞이하고, 힘의 관계는 유럽의 우세로 기울어간다. 1628년 아궁은 바타비아에 대한 포위작전에 들어가고 동인도회사를 최대의 궁지로 몰아넣지만 결국 전장의 우세를 결정한 건 해운에 의한 보급지속능력이었다.
1623년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인 21명을 척살하고 정향의 독점을 시작한다. 마카사르를 중심으로 말레이 교역상들과 잉글랜드 회사, 덴마크 회사, 포르투갈인으로부터 골콘다와 아체의 대표들까지 대안 교역망을 구축한다.
향료제도인 말루쿠에서 역시 저항은 계속된다. 암본 북부로부터 호아모알의 트르나테인 구역까지 저항이 일어나지만, 결국 도서부의 무력은 해운에서 온다. 저항은 진압되고 정향의 독점은 완성된다. 마카사르의 집권화는 부족간의 분란으로 이어지고, 왕자 아룽 팔라카는 반란에 실패하고 동인도회사에 의탁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카사르는 동인도회사에 굴복하고 이를 거점으로 모여들었던 다른 유럽인들과 말레이 무역상들은 쫓겨난다. 동남아시안들이 통제하던 마지막 대시장이 종말을 고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후추마저 독점하고자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술탄 압둘파타 아긍(1651~1682)이 다스리던 반튼을 장악해야했다. 후계자를 '회사의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꼬셔 선왕을 폐위시키고, '회사의 왕'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교역조건을 잗아들이며 권좌에 오른다. 코스모폴리턴 무역도시 반튼과 마카사르의 함락은 교역의 시대가 끝났음을, 교역을 통한 새로운 사상과 체제의 발전이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진전되던 도시화와 국가의 탄생은 역전되었고, 각 국가는 자잘한 토후국들로 나뉘며 도시는 해체되었다.
기존 역내의 활발한 교역행위자였던 버고의 몬족과 파시시르의 자바인들의 몰락은 이 과정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버마의 집권화과정에서 난다버잉 왕은 이들에게 노역을 요구했고, 몬족은 이에 반발한다. 왕은 이들을 진멸하고자 군대를 보내고, 버고의 몬족 중심도시들은 파괴되며 수많은 이들이 이웃 국가로 난민이 되어 떠나간다. 자바 북해안 역시 마타람의 술탄 아궁(1613~1646)이 집권화의 의도를 보이며 이들을 스스로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큰 타격을 받는다. 술탄 아궁은 해군을 양성하며 이들의 함선 건조능력을 일부 유지시켰지만, 교역에서의 자발성은 국왕의 권세 아래로 들어가며 사라졌다. 물론 자바인들의 디아스포라 역시 일어났다. 그러나 땅이 없는 민족은 결국 그 경험을 계승하지 못하며 사라진다. 1677년이 되면 자바인들은 바다와 배에 무지한 사람들이 된다. 바람 아래의 땅의 해운을 지배했던 사람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마타람의 술탄 아궁이 이지랄을 해쌓아도 결국 마타람은 1677년 아망쿠랏 1세의 치세 말 동인도회사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즉위시기 울라마 2천명을 벤 업보다.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지리, 인문환경, 정치적 변동과 외부의 영향으로 바라봤다면, 장기 16세기를 끝낸 17세기의 위기, 기후를 중심으로 그 영향을 돌아본다. 17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경기가 수축되었던 시기이다. 포토시 은광의 산출량 감소, 소빙하기로 인한 가뭄과 기후변동은 17세기 내내 전지구적으로 기근과 소득감소로 나타났다.
전체 경기의 수축은 포르투갈의 퇴출로, 네덜란드의 진출과 독점으로, 그 과정에서 경쟁의 심화와 각 국의 확장과 경쟁으로 나타났다. 파이가 줄어드는 시대에 네덜란드의 자본력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 교역의 시대를 저물게 한 한 요인인 것이다. 일본 중개무역의 독점 역시 지역에서 네덜란드의 패권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17세기 들어 시작된 중국의 혼란 역시 역내에서 유럽향의 중요성, 그리고 이에 대한 장악력을 늘려가고 있던 네덜란드의 레버리지를 강화시켜준다. 아시아 무역 구조의 변화 또한 이를 심화시켰다. 남아시아 전반의 무역 활황은 동남아시아로 쏠렸던 향료무역의 강세를 다시 인도양으로 끌어오게 된다. 동남아시아 교역의 시대가 저물며, 중국인들의 침투가 시작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 구축은 지역에서 이들의 이윤율을 높여줄 수 있었던 비결이었지만, 동시에 지역 전체의 경제적 활력을 떨어트리며 장기이윤율을 갉아먹는 일이기도 했다. 향료교역의 독점은 이내 남아시아 교역의 활성화로 알파를 잃게되었고, 동남아시아 내 물류망 역시 전체적인 교역이익의 독점적 수취로 인해 지역 전체의 잉여가치가 감소하며 소비력의 약화로, 소비재를 비롯한 여타 물품소비의 감소로 나타나며 높은 군사비와 행정 간접비의 소요를 충당하기는 갈수록 버거워져간다.
17세기는 소빙하기로, 전반적인 기온의 강하로, 가뭄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라허의 고기후 데이터는 자바 인근의 티크나무 나이테 측정을 통해 1514년에서부터 1929년까지 지역의 강수량 변동을 알려준다. 1598년부터 1679년까지 지역의 강수량은 최저를 기록한다. 1606년으로부터 10년간의 가뭄은 사료를 통해 교차검증된다. 1633년부터 1638년 역시 짧은 가뭄을, 기록인 이로 인한 기근과 전염병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정도는 중국, 인도, 유럽에 비해서는 심하지 않았다.
무역의 교란과 잦은 전쟁, 이로 인한 자급자족적 성향의 강화는 교역의 시대 마지막 한 세기동안 바람 아래의 땅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향료재배지에 대한 독점 시도, 즉 약탈과 학살은 재배적지의 사람들에게 경고로 작용했고, 기존의 향료재배지에서 이를 통해 생활을 영위하던 집단들은 이를 포기하고 자급자족적 삶을 선택한다.
교역의 해체가 식량의 재배로, 자급자족으로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후추 역시 상품작물로써의 가치가 떨어지며 수요가 격감하고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속에 경제적 혼란이 이어진다. 장주기에서 보면 교역의 시대 향료 생산 산엊은 수확체증의 시기를 지나 수확체감의 시기로, 나아가 국면의 반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네덜란드의 진출 역시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1차 산업 위주의 산업구조에서 경기의 싸이클이 꺾이는 순간 어떤 구조개혁이 가능했을까. 결국 역사적 수확체증을 이루기에는 그 응집성이 모자랐다. 이 시대에 이르러 후추 재배는 오히려 금지되기까지 한다. 한편으로는 자급자족에 대한 사회적 필요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향료재배와 교역이 낳은 창조적 파괴가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났던 역사적 경험이 있다. 이는 동인도회사의 교역도시에 대한 봉쇄작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백성들이 이 나라의 어디에도 잠비와 팔렘방처럼 후추를 기르지 못하게 하라. 그 나라들은 돈을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해 후추를 재배하는 것이다. 종국에는 그들이 몰락할 것이 분명하다. 큰 음모가 있을 것이며 식량은 비싸질 것이다. (…) 규제는 사라지고 무질서해질 것이다. 농촌 사람들이 수도 사람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으며, 고산족들이 왕의 관리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후추를 가정에서 쓰는 양보다] 더 많이 파종하여 돈을 벌려 한다면 나라에 고난을 가져올 것이다. (…) 백성들이 왕에게 맞설 만큼 대담해져서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교역으로 축적한 부가 야기한 사회적 변화, 그리고 그 종말은 이 땅의 엘리트와 기층에게 강렬한 경험으로 남았다. 시대의 위축은 파괴적인 경험으로 그 폐해를 증험한다. 교역의 감소, 소비의 위축, 도시의 쇠퇴와 함께 시대가 저물어간다. 수라바야도, 마카사르도, 반튼도 이후로는 결코 그 성세를 되찾지 못했다. 대륙부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나타난다. 버마의 따응우왕조는 근거지를 내륙의 응와로 옮기고, 아유타야 역시 프랑스의 침탈에 맞서며 외국인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교역의 비중을 줄여나간다. 1635년 일본의 쇄국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역의 축소라는 하나의 세계적 트렌드에 대한 선도적 적응이기도 했다. 유럽인이 배척받고 버고인과 말레이인, 자바인들이 밀려난 틈으로 중국인들이 밀려들어온다.
응우옌놈들 인두세를 11헤알을 뜯는데 서산당의 난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 업보다... 전반적인 교역의 침체가 반드시 악영향만을 낳지는 않았다. 대륙주의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여 국가 내부에 대한 개발로 선회하고, 이는 인구의 증가로, 내수 시장경제의 발달로 나타난다. 아유타야 역시 교역의 시대 후반기 나라이 왕의 치세동안 외국인 집단 간 균형을 지키는 방식으로 성세를 구가한다. 식민지배 시기 태국의 능수능란한 외교야말로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것이다. 물론 나라이 왕은 여러번 나왔듯이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다. 프랑스군이 사실상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협천자하자 아유타야 기층과 귀족들의 분노는 높아지고, '왕실 코끼리 조련사'(높은 직위다) 옥프라 펫타라차가 불교 상가와 연합하여 프랑스 놈들을 도륙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절대주의의 추진이 교역의 부로부터 비롯했기에, 교역의 쇠퇴는 왕권의 약화로, 사회의 파편화로 나타난다. 버마가, 시암이 산산이 쪼개지며 깊은 혼란으로 빠져들고, 교역은 다시는 회복되지 못한다. 이는 도서부에서는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아체와 팔렘방으로부터 조호르와 마긴다나오까지, 유통망에 대한 통제도 내륙의 배후지에 대한 장악력도 상실한 채 토후국으로 전락한다.
"교역의 시대가 많은 문화적 혁신과 차용을 가능케 했다면, 외부세계와의 깊은 상호작용이 훨씬 줄어든 뒤이은 시기는 시암, 버마, 베트남, 자바에서 가장 빛나는 예술과 문학을 낳았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17세기에 방향의 변화가 있었으며 그 방향은 20세기까지 되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이 등장한다. 기존의 교역체계가 무너진 곳에서 강력한 본국을 갖고있던 중국인들이 바다 곳곳을 누비며 우수한 제조업 기술로 유럽인들과 협력하여 유통망을 장악하고, 도시생활에 필수적인 소비재들을 공급한다. 장거리 교역으로부터 내륙의 촘촘한 구석구석까지 중국인들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한다.
"캄보디아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고, 중국인이 주변 나라의 무역을 대부분 장악해, 사슴 가죽 같은 것이 한 해에 2만 장쯤 온다면 (…) 시장으로 오는 것은 얼마 안 되므로 중국인은 수레와 배를 타고 가서 코를 킁킁대며 사들인다. (…) 그들은 금, 코뿔소 뿔, 상아를 소금, 도자기, 쇠붙이, 작은 청동제 공과 바꾼다. (…) 그러나 이자들은 9~10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이문을 얻기 위해, 건강에 해로운 곳과 수질 나쁜 물을 견디며 심각한 병에 걸려 귀신처럼 보이게 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영락제 시기 정화의 원정으로 바람 아래의 땅에 진출한 중국인들 역시 다대했다. 그러나 이 시기와 교역의 시대 후기에 진출한 중국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본국과의 연결, 이민족 왕조로써 청과는 대별되는 정체성, 그리고 유럽인들이 구축한 교역도시였다. 별도의 공간에서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고 살 수 있게 되면서, 이들은 현지 권력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은 자신들이 조우했던 자바인들에게서 중국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었지만, 17세기 교역도시의 중국인들은 구별되는 특질을 유지해왔다.
이후 이들은 식민 정권의 매판자본으로써, 현지 유통망과 제조업의 장악으로 그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간다. 자연히 현지민과의 갈등 역시 존재했고, 시장지배적 소수민족으로써 그들은 식민지배층과 피지배층 양측 모두로부터 종종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 역시 식민지배가 구축한 교역의 질서 속에 적응하며 자신의 몫을 찾아나간다. 중국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이 주어지며,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과 자본의 분리가 일어난다. 징세청부의 시작과 그 확산은 한 예이다. 세금을 선납하고 이를 수취할 권리를 매입함으로써, 이들은 국가기구의 일익을 담당한다.
아체에서, 마타람에서, 마카사르에서 그리고 잔튼에서 무슬림 교역상들과 비 네덜란드계 유럽인, 자바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침투에 저항하며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이들의 저항은 반튼의 함락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다시 아체에서, 대중적 분노가 끓어오른다.
브로델이 지적한 자본주의는 세계-경제와 사계경제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유럽의 현상이었다. 유럽 외에서, 이는 '자본가적'이라는 행동태로 더 자주 관찰된다. 무엇이 유럽과 그 이외 지역을 갈랐는가. 인도 동인도 회사와 관련된 저작에서도 모이지만, 우월한 기술과 이를 지속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조직구조, 특히 금융, 신용의 조달이 성패를 갈랐다. 이에 대응하는 사회의 응집도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남아시아의 식민화 과정에서도 드러나지만, 현지의 협력 없이 16세기로부터 18세기 제국의 확장은 가능하지 않았다.
전근대 체제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이 체제의 붕괴를 야기하고, 그 틈으로 식민지배가 스며들어 통치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사회의 예속관계, 소유권에 대한 보장, 국가의 부재와 파편화된 사회의 저항, 연속적 수확체증으로 진입하기 어려웠던 인문지리환경이 유럽의 침투와 결합하여 가능성의 시대를 만들고, 이내 그 시대의 종말까지 달려나간다.
그러나 어떤 시대의 흔적은 영구적이다. 아체에서 구축된 관료제가, 시암에서 만들어진 지배구조가, 대외접촉의 경험들이, 자급자족적 사회로의 지향이 배양한 내재적 발전과 인구의 증가가, 이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성이 이후 식민지배의 시대로 들어서며 발아하고 다음 세대에게 전승되며 새로운 시대을 예비한다. 전통은 변화에 대한 저항성을 갖고 집에서 집으로, 어머니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지며 오늘날에도 드러나고, 자율적인 여성관은 세기를 넘어 현대에도 주채적인 여성상으로 발현한다. 말과 글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원형적 심상으로 시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저마다 주어진 조건에서 분두하며 교역의 시대 속에서 답을 찾아나갔다. 종교는 파편화된 사회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집권화의 부속으로 기능했지만 이후로도 남아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문화는 그 속에서 섞여들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더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음에도 예속관계와 사회적 신분은 은은하게 자리한다. 인간이 그 자체로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리인문환경이, 누적된 역사와 전통이, 식민지배와 그로 인한 구조의 변동이 여전히 이어지며 사람들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제 국가는 과거의 망령을 이고지고 때로는 떨쳐나가며 미래를 개척해나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관계할지 과거를 지침삼아 오늘날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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