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로부터 동로마와 이슬람, 카롤링거와 기사, 수행자로 중세의 시작을 알리며 십자군으로 마무리했다면 2권의 시작은 징기스칸이다. 몽골 제국의 성립과 동서의 교류로부터 흑사병, 베네치아,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르네상스, 종교개혁까지 중세의 황혼은 어떻게 저물어가며 새 시대를 예비했나.
이집트에 다다른 십자군들의 귀에 동방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어온다. 저 먼 아시아에서 기독교 군주가 일어나 이슬람에 신의 징벌을 내리고있다고. 그는 누구인가. 징기스칸이다. 몽골은 알타이부터 우랄까지, 유라시아를 제패하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제국을 창출했고, 그 제국을 위한 기반인프라를 건설하고 유지했다. 비록 제국의 성세가 길진 않았으나, 그 짧은 찰나에 동과 서는 육로를 통해 직접 교류했고, 이는 이후 변화의 단초가 된다.
테무진은 몽골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내었나. 이슬람에서 신앙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족들은 개별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테무진의 근대적 군사조직 속으로 편제되었다. 창기병과 궁기병으로 이루어진 십인대는 백인대로, 백인대는 천인대로, 다시 만인대로 조직되어 부대의 성취에 따라 이해관계가 새로 구성되었고, 그 규율은 엄정하게 집행되었다. 과연 등뼈를 부러트려 죽이는 것이나 자루에 담아 말발굽으로 짓이기는 게 더 자비로운 처형인지에 대해서야 이견이 있겠으나... 동시에 이 제국은 종교와 민족에 포용적이기도 했다. 칸에 적대한다면 진멸을 받지먼, 칸에 순종한다면 민족과 종교에 관계없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자무카와의 전쟁, 나이만, 케레이트, 메르키트, 자다란의 복속으로 몽골을 일통한 그는 칸의 자리에 오른다.
"우리가 그들과 만나 죽기로 싸운다 해도 그들은 자기네의 검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뺨에 화살을 맞고 검은 피를 앞으로 뿜어내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이 강인한 몽골인들과 싸우는 것이 권할만한 일이겠는가?"
유라시아의 많은 민족들은 이 말을 수도없이 곱씹게된다.
호라즘이 왜 순식간에 진멸당했는지 국경을 넘은 칸의 군대가 70만이라는 서술을 보니 새삼 실감된다. 호라즘이 패권을 쥔 지 얼마 안되었고 알력도 남아있었고 따라서 통치력이 온존하지도 못했지만, 풀파워 몽골의 동원력이라는 게 말 그대로 압도적인 질량이다.
칸의 군대가 빠르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군대가 자행한 물리적인 선전전, 약탈과 진멸을 통한 공포의 확산이기도 했다. 칸의 규율은 수많은 민간인의 학살로 증험되었고, 참혹한 광경은 공포에 의한 지배의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몽골이 베네치아와 만난다.
베네치아에 대한 묘사가 혹독한데 사실이다. 몽골과 베네치아라는 동서의 두 악마는 사이좋게 말을 탈 자격이 있다. 서방에 대한 칸의 원정이 시작되고, 노브고로드의 공작 등 러시아 군주의 연합은 칸의 서한을 받고 사절을 죽인다. 당연한 결과가 뒤따르고 이윽고 폴란드로, 헝가리로 짓쳐들어간다. 동유럽이 산산이 짓밟히던 그 순간, 칸의 군대는 회군한다. 공세종말점에 도달해서, 쿠릴타이가 열려서, 원인에 대한 추측은 다양하다. 결과는 이후 유럽에 대한 그와 같은 재침공은 없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지긴 하지만 그건 러시아니까...
몽골이 열어놓은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여행한다. 조반니는 교황의 서신을 저하고 전도행을 떠나기 위해 북방 루트로 칸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러시아 군주들을 통해 바투와 만난다. 13세기 공항 보안검색은 무엇으로 하는가? 불의 심판을 받는다. 역참을 따라 몇달에 걸쳐 왕의 궁정으로 여행하며 그는 만난 몽골인들의 삶에 대해 기록한다. 거칠고 원기왕성하고 서로간에 화목하지만, 외부인에게 적대적이고 기만적이며, 폭음하고, 쥐로부터 개 여우 늑대 말까지 보이는 것은 다 먹는 이들, 그리고 강인하고 남성과 같이 말을 타고 사냥하며 모든 것을 만드는 몽골의 여인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초원의 삶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창이 되어준다.
구유크가 좋은 답장을 주지는 않았으나, 그의 여정은 그 자체로 기념할만한 것이다. 이후로도 여러 탁발승이 그와 같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 몽골로 향하고, 여정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빌럼 판루브루크에 대한 몽케 칸의 답변이 유념할만 하다.
"신은 너희에게 성서를 주었는데, 너희는 그것을 준수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점쟁이를 주었는데, 우리는 그들이 말해주는대로 하고 평화롭게 살고있다."
호라즘 이후로도 레반트와 아라비아에 대한 몽골의 공격은 계속된다. 알 무스타심의 오만함과 몽골의 정복욕이 바그다드로 향하고, 바그다드는 약탈당하고 바이툴히크마('지혜의 집')의 장서는 강에 버려져 그 잉크로 강물이 검어질 정도였다. 알 무스타심은 융단에 말려 말발굽에 밟혀 죽고, 다르 알 이슬람 할리파의 계보는 끊어진다.
그리고 몽골제국은 차차 승계권을 둘러싼 다툼 속에 그 응집성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징기스칸이 구축한 근대적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카리스마와 지속적인 전쟁활동을 통한 내적 통합이 중요했지만, 내전으로 인한 소모와 각 칸국으로의 분열은 지속적인 내부분열로 이어지며 역량의 쇠퇴로 이어진다. 몽골의 적응성이야말로 그들이 지역에 대한 동화를 촉진하며 분화의 단초가 되는 자질이었다는 주장은 통찰력이 있다.
가잔이 일 칸국을 다스리며 지역의 법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나, 킵차크 칸국과 차카타이 칸국이 지역문화에 동화되고 칸국 간의 분쟁으로 잘전하는 것 역시 지역 문화와 지리적 요건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그리하여 하나의 지역군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의 갈등의 원인에 대한 접근이 흥미롭다. 사라이를 중심으로 동서의 물자가 교통하며 어마어마한 부가 창출되고, 몽골의 지배는 이 도시에서 교차하는 다원성을 효과적으로 북돋아주는 도구였다. 실크로드가 주의 원천이었고, 또한 양 칸국의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캅카스의 지리가 유라시아의 교통에서 갖는 중요성이 새삼 강조된다. 레반트와 초원의 연결점으로 캅카스 일대는 유력한 교통로였고, 캅카스의 장악이 레반트와 페르시아로의 확장에, 그리고 우랄 산맥과 볼가 강 인근으로의 연결에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차카타이 칸국으로부터 형제 칸국들이 실질적으로 조각조각 나뉜 14세기, 절름발이 티무르가 태어나 다시 몽골의 이름 아래 기치를 올린다. 제국을 다시 건설하겠다는 그의 야망은 세 칸국을 발 아래에 놓으며 역내의 지리환경을 다시 썼고, 또한 그 속에서 제국의 건설을 위해 수십-수백만의 목숨을 담보로 했다. 그러나 피로 조립된 제국이 으레 그렇듯 그의 제국도 사후 이내 무너져버린다.
칭기스칸의 정복으로부터 현대의 공포 독재를 비춰본다.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한데 묶어 벼려내고, 세계경제를 발아래 두겠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며 수백만의 목숨을 살상시킨다. 근대가 그 끝에 보여준 제도화된 살육기계의 원형을 칭기스칸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징기스칸이 유라시아에 남긴 지리환경적 영향은 무엇이 있나. 주요 광역권의 핵심 도시를 산산이 파괴하면 새로운 중심도시가 떠오른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가 새로운 역내의 중심도시로 건설되고, 역설적으로 형제 칸국들의 지배아래 이슬람교는 러시아 남부까지 확산된다. 지리환경과 인문환경의 변화는 몽골의 지배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남긴다. 그리고 동서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경험은, 그 경험속애서 쌓인 부가 준 욕망의 연쇄는 이후 사람들이 원거리교역에 대한 투자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 사람이었고, 그의 견문록은 동시에 상인의 시장조사이기도 했다. 지역의 특산물, 거래의 방법, 여정을 기록한 그의 글은 당대 상인의 시각이 어떤 식으로 상품에 접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장사꾼의 세계관과 정복자의 세계관이 흐릿한 선악관념속에서 마주하며 상업의 시대로 나아간다.
유럽의 상업이 처음부터 유의미한 사회적 지위를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시대 역시 교환경제가 충분히 발달한 사회였지만 상업은 귀족의 일이라기보다는 기사계급의 일이었고, 지배계급은 대개 대토지 소유주였다. 로마제국의 쇠망과 함께 유럽의 경제적 역량과 교환세계는 동시에 쇠퇴했고, 이 장기 침체는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상업이 다시 성장하게 된 것은 유럽이 다시 통합되고 안정적인 정치구조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었다.
11세기 들어 지역을 기반으로 시장이 발달하고 정기시가 지역을 돌며 물산의 대대적인 교환이 시작된다. 이 시장에서의 신용은 유럽 곳곳애 퍼진 유대인들에 의해, 이후에도 유대인과 같은 시장지배적 소수민족에 의해 제공된다. 시장의 발달은 물류의 중심을 형성하고, 샹파뉴가 유럽의 심장으로 떠오른다. 물품으로부터 통화, 신용, 선물거래와 계약이 중개되고, 거대한 창고를 중심으로 유통이 활성화된다.
상업의 이야기에 베네치아가 빠질 수 없다. 성 마르코성당의 성물부터가 장물이었다는 건 당대 상업이 걸치고있던 경계를 잘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무역이란 내킬때는 무역이요 불리할때는 약탈인 것이다. 이러니까 폭동때마다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이 매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상업이 고리스크 활동인만큼, 이윤 역시 확실했다. 지중해와 유럽의 물자를 유통하는 원거리무역은 그만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십자군 전쟁의 와중애도 상대편에 노예와 물자를 공급하고, 기독교인 노예를 사다가 이슬람 진영에 파는 등 상업은 언제나 정치적 경계를 넘나들며 음영을 동반했다.
영국은 정말 양들의 나라였다. 양모에 하얀 금이라는 이름이 붙고 양모세는 국가재정의 근본이 되어 정복활동에 소요된다. 우리 이태리 친구들이 상업의 초기부터 수직계열화와 후공정 장악의 원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건 여러 책에서 확인했는데 이렇게 기업과 도시에 포커스를 맞춘 서술로 보니 이 산업의 성격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원모를 플란데런에서 천으로 만들고 샹파뉴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간 원단에 염색과 가공을 거쳐 유통하던 것을 반도로 직접 원모를 가져와 처음부터 끝까지 가공하면 Profit! 원거리 무역의 발달과 운임료의 하락, 그리고 물류를 충분히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의 발달이 수직계열화에 대한 투자로 이어진다. 물류가 이어진 고장끼리 신용이 발달하고, 이윽고 피렌체 은행가들의 영국진출이 이어진다.
서방 곳곳에, 그리고 몽골 제국 너머 대도와 항주, 델리까지 지점을 둔 이탈리아의 은행가들은 이윽고 신용을 기반으로 영국의 세무행정까지 대리한다. 정치개입과 징세청부와 적극적인 행정대행 서비스야말로 은행가의 일인 것이다. 이러한 금융업의 고도화는 환어음, 회사의 설립을 통한 공동투자, 그리고 보험을 통한 리스크의 분산, 복식부기 등 제반 금융상품과 회계, 경영기술의 발달이 뒷받침했다.
이익이 있으면 리스크도 있는 법이고, 이권은 투자없이 얻을 수 없다. 영-불 연속체의 패권을 둘러싼 에드워드 3세의 거대한 도전이 시작되고, 전쟁은 끊임없는 자금의 소모를 동반한다. 당대 금융업의 훌륭한 담보기술은 백작 두명정도의 인신담보에 대한 실제 집행(인질)로 이어지며 전쟁으로 인한 지속적인 자금소모와 유동성위기의 단편을 보여준다.
투자는 타이밍이다. 페루치와 바르디는 백년전쟁이라는 블랙홀에 자금을 꼴아박다 이사회로부터 추궁을 당하며 지속적인 리더십 위기를 겪고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된다. 거짓말처럼 에드워드 3세는 그 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격파하며 대승을 거두지만, 그렇다고 파산한 회사는 돌아오지 않고 이득은 온전히 영국의 것이 된다. 100파운드의 빚과 1억 파운드의 빚에 대한 케인즈의 경구는 오늘이나 중세에나 유효한 통찰을 준다. 에드워드 코인 떡상했지만 레버리지 당긴 피렌체인들은 이미 템즈강 물 아래로...
상업의 발달은 중부유럽의 도시를 성장시켰고, 뤼베크를 중심으로 한자동맹이 탄생한다. 발트해의 제해권을 두고 군대를 양성하여 항로를 정비한 이후, 한자 동맹은 발트해 무역의 지배자가 되어 성장일로를 걷는다. 이와 같은 상인들의 대두는 대상인들의 지배계급으로의 편입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상인의 사회문화적 지위가 올라가며 다원적인 이해관계가 정치에 새로운 구도를 형성한다. 물론 모든 시도가 꼭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정치에 너무 개입했던 니컬러스 브렘버는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터져나갈 때 교수와 거열이라는 결과로 그 댓가를 정산받는다.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한 교환시장의 발달은 전체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였지만 단위 자본 규모에서는 큰 이윤율을 가져왔고, 상업이윤의 축적과 교환의 과정에서 창출된 신용은 사회의 물적 구조를 재조직하는 강한 촉매가 되어준다. 축적된 신용은 군주에게 제공되어 정복 활동의 연료가 되고, 제공된 신용은 이권으로 교환되며 물질세계에 대한 수금권으로, 권위의 행사로 전화한다. 돈이 권력이 되고, 다시 권력이 돈으로 전환된다. 시장경제의 초기로부터, 금-권 교환이야말로 대상인들의 주력상품이었던 것이다.
상업의 발달이 사회에서 가진 위치에 대해 리처드로부터 볼링브로크, 그리고 헨리 5세에 이르기까지 대상인으로 살아남은 위팅턴의 사례를 통해, 그리고 그의 사후 환원과 오늘날까지 남은 기념울을 통해 되짚어본다.
리처드의 호화로운 취향을 맞춰주며 궁정 상인으로 도약한 위팅턴은 다양한 권리, 궁정에서의 지위와 런던 시장으로 그 보답을 받으며 훌륭한 처세로 지배계급의 일원이 된다. 왕권의 교체 이후에도 그는 상인으로써, 행정가로써 능력을 발한다. 세금청부업자로 양모세를 거두고, 런던 시장으로 두번 재임하고, 직물업자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며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공에 기여한다.
헨리 5세의 재위기간 노르망디 침공에 개인의 재산을 희사하고, 왕의 원정을 위해 신용을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자금을 공급하고, 결정적인 전투를 대비하여 다시한번 대출을 해준 결과는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였다. 대출 상환은 인질의 대속금으로도 박으며 쏠쏠한 이윤을 번다.
물려줄 사람이 없었던 그는 본인의 재산으로 공공 인프라와 사회복지에 기여하며 마지막을 장식한다. 길드홀을 짓고, 여성보호소를 설립하고, 직물상 조합에 빈민구호소를 설치하고, 시민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으며 그의 재산은 남김없이 공공을 위해 쓰인다.
필리프 4세의 신전기사단 재판이 시작된다. 날조된 증거로 자크 드 몰레로부터 프랑스의 모든 단원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를 자행하고, 기사단의 거점은 압수수색에 시달린다. 당대의 신전기사단은 유럽 전역에 퍼진 지부를 통해 은행업으로, 행정 대행업자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는 독립된 기구였다. 이교도 숭배와 성적 타락이 그 근거로 제시되지만, 그 기저에는 기사단의 부에 대한 열망과 기득권의 징죄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다.
그래도 프랑스에는 법이 있었고, 새장에 갇힌 교황에게도 줏대는 있었다. 교황은 개별 단원과 기사단 전체에 대한 조사를 빌미로 기사단에게 대응할 시간을 벌어주고, 기사단은 수사과정에서의 탄압과 고문에 대한 증언과 법적 대응을 통해 필리프에 맞선다.
이 과정에서 파리 대학은 왕에 의해 법적인 판단을 요청받고, 대학의 학자들은 왕의 요구에 대해 국왕의 감사와 헌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서신을 지어올린다. 대학의 모든 여론이 필리프의 폭거를 묵인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의 중의는 정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대학의 의견은 곧 지적 권위를 갖고 국왕의 의지에 융합되어 1314년 자크 드 몰레의 화형으로 기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다.
중세의 학문은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세기 세비야의 이시도로는 세비야의 대성당에서 삼학(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사술(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재우며 공부에 매진하고, 다양한 책을 저술하며 학문에 정진한다. 그의 대작은 대백과사전 <어원>이었다. 이처럼 중세의 교회는 교육과 학문의 중심기관으로, 문자를 쓰고 읽으며 종교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부터 관료를 양성하고 학문을 발달시키는 것 까지 신앙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졌다.
신앙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신앙의 잣대로 지식이 선별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교회의 틀 내에서 고대의 지혜는 권장받지 않는 과목이었고, 11세기에 이르르면 그리스어는 서방에서 잊힌 지혜가 된다. 그리스 철학 역시 마찬가지로 지식의 장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지중해 너머에서는 어떠했을까. 압바스 왕조는 교육과 학문에 적극적으로 투자했고, 바그다드의 바이툴히크마('지혜의 집')는 수십만권의 장서를 가진 당대 최고의 도서관이었다. 이와 같은 투자는 수학자 알화리즈미와 화학자 이븐 하이얀, 의학자 이븐 시나와 철학자 이븐 루시드 등 기라성같은 학자들의 배출로 성과를 증명한다.
십자군 운동은 동서를 연결했고, 이슬람의 지적성과가 유럽으로 연결된다. '불구자' 헤르만은 불편한 신체와 어눌한 말에도 불구하고 라이헤나우의 수도원에 들어가 그의 명석함을 갈고닦는다. 다양한 학문을 넘나드는 그의 능력은 뛰어난 성가 작곡으로,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 다양한 재능이 가장 빛을 발한 곳은 천문학이었다. 그는 역법을 정비하고 자료들을 발굴하여 부분적인 자료들로 이슬람 세계에서 사용되던 천문 관측기구인 성반을 재구하여 완성된 기록으로 남겼다. 이슬람의 학문이 유럽의 기술로 전달된 것이다. 이것은 작은 시작이었지만, 이후 다가오는 물결을 예고하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이슬람 세계의 지식들이 서방으로 전해지고, 지속적인 번역을 통해 공유되며 새로운 변화를 촉발한다. 철학으로부터 수학, 공학까지 다양한 지식들이 전파되고 학자들 사이의 연구를 통해 발전하고, 풍차로, 화약으로, 문학으로 창조적 작업의 연쇄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지식의 물결은 교회 밖에 새로운 지식사회를 구성하고, 지식 전파의 새로운 구심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대학이다.
볼로냐는 교황-황제 대립의 변경에 낀 도시였다. 지속적인 양자간 대립은 법률가에 대한 수요를 불러왔고, 로마법 문헌의 발굴과 이에 대한 이르네리우스의 연구는 유럽 전역의 학생을 끌어모으며 규모를 키우게 된다. 그러나 도시에 모인 법률가들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소수집단으로 대접받았다. 이와 같은 대접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학자들의 길드, '우니제르타시스 스콜라리움'이 조직되어 집단적 권리를 행사하며 시의 구성원으로써 편입된다. 이 비공식 조합은 자체적인 질량을 갖추며 정부와의 연결을 활용하여 1158년 <아우덴티카 하비타>로 알려진 공식적인 문서로 그 특권과 지위가 명문화되며 공식적인 첫번째 대학이 된다.
교회 외부의 지식 전문가, 교수자, 학생집단의 형성과 전문적인 교육은 대학의 특징이었고, 행정 관료에 대한 수요와 고도화된 체제로 인한 이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은 전 유럽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옥스포드로부터 파리, 살라망카, 파도바, 케임브리지와 코임브라까지 대학이 생겨나고, 이윽고 이 물결은 중부유럽까지 전파된다. 프라하에서 크라쿠프, 하이델베르크와 쾰른까지 대학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도미니코회 수사가 되고, 지에 대한 열망으로 가족의 방해를 뿌리치고 대학에 진학하고, 파리 대학으로 가 학위를 받고 쾰른 대학에서 조교수를 하며 학문을 쌓는다. 4년간 개인적인 연구를 다하고 다시 파리대학으로 돌아와 4년만에 지도석사를 취득하고, 강의를 하며 <신학대전>을 비롯한 모든 저작을 완성한다.
자연과학으로부터 철학과 윤리학, 경제학과 '마법', 신학, 철학 저작에 대한 주석서까지 방대한 주제를 망라한다. '교회박사'받으려면 이정도는 해야한다... 그의 저작은 그리스 철학, 변증법적 추론을 활용한 신학의 재구성이었고, 이교도적 지식과 신자의 저작의 융합이었다. 고대의 지혜가 재발견되고 널리 읽히는 시대속에서 하나의 전범을 제시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순수한 학자였다면, 전업 폴리페서 역시 대학의 시초부터 존재한 전문직종이었다. 대학의 주된 수요가 행정관료를 길러 기득권층을 예비하는 것이었으니만큼 권력과의 유착과 이에 기반한 지적 권위의 행사는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권력에 편승한 신전기사단 재판의 기욤 드노가레부터, 헨리 2세의 외교관이 된 블루아의 피에르, 아버지가 파산해서 학위를 못따고 헨리에게 반항하다 살해당한 토머스 베켓까지 권력에의 종사는 때론 성공했지만 반드시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하나의 경향을 수립한다.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써의 대학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이다.
대학은 또한 자유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최초의 여성 강사 베티시아 고차디니가 볼로냐에서 1230년 임용되고, 다른 여성 강사들이 뒤를 따른다. 파리에선 시의 감독에 저항하여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마르틴 루터 역시 에어푸르트 대학을 거점으로 그의 여정을 시작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보면 볼수록 황당하다. 사회적 물의가 될만한데... 숙부가 잘했음. 물론 이후로는 플라토닉 러브를 즐기셨겠지요 물건이 없으면 사고도 못친다. 이후로도 그의 사상은 그리스철학 기반 하에 사회 주류 신학과 반목하며 위험한 길을 걷는다. 베르나르에 의해 기소, 부적절판정, 견책을 받던 그는 클뤼니 수도원에 의탁하여 여생을 보낸다.
신앙 중심의 세계관 검열에도 불구하고, 사상은 세계의 틈을 비집고 나온다. 존 위클리프의 사상은 1381년 세금에 대한 저항을 둘러싸고 벌어진 와트 타일러의 난에서 회자되며 대중적 반란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그는 이에 따라 이단적 교리를 선포한 것으로 선고되고 은퇴당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얀 후스에게로 계승되고, 중부유럽으로부터 널리 확산되어 새로운 신앙의 흐름을 구축한다.
수도원으로 이어진 지식과 기술은 행정적 수요의 증가와 독립된 지식사회에 대한 사회적 필요에 따라 도시로 들어오고, 시민권을 얻으며 별도의 생태계를 형성한다. 당대 행정이 갖는 서비스업으로써의 성격을 생각하면 서비스업 산업의 발달에 따라 행정인력을 교육하고 행정서비스를 고도화하는 주요한 기구였던 대학은 시작부터 지식산업 클러스터로써의 성격이 강했다. 대학을 구성한 학자들의 정치적 연결과 자체적으로 구축된 시장적 권력이 없었다면 과연 도시사회의 일원으로 순조롭게 편입되고 왕으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
외부 문헌과 고문헌을 번역하여 지식을 축적하고 그 권위를 활용하여 대중 이데올로기를 포섭할 수 있는 장으로써 대학은 처음부터 상부구조의 일원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지에 대한 탐구가 갖는 해방으로의 지향은 당대에도 유효했고, 결국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적 일탈과 저술활동, 대중운동에 대한 이론적 기여,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상부구조 자체의 재구성이라는 저마다의 갈래로 사회를 연결한다.
에드워드는 웨일즈를 정복하고 그 자리에 거성을 세워 지배의 영속을 꾀했다. '명인' 자크는 잉글랜드의 공병단장으로 이 임무를 위해 헌신한다. 성을 짓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회반죽이 굳지 않았고, 따라서 건설이 가능한 시기는 연간 8개월뿐이었다. 성채는 군사요충지에 지어지고, 이는 갈등의 최전선에서 작업을 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웨일즈의 저항이 성체 건설에 집중되고, 공사는 여러번 중단된다. 그러나 웨일즈 지배에 대한 에드워드의 의지는 굳건했고, 그의 비용지원은 결국 이 성의 건설을 가능하게 했다. 카이르나르번의 건설과 이 성에서 이루어진 왕자의 출산은 이후 웨일즈공이 잉글랜드의 왕세자의 상징이 되는 계기로 남는다.
이와같은 성채가 중세내내 건설된 것은 아니다. 고전적인 진채는 로마 시대의 야전요새와 주둔지였고, 이는 로마의 쇠퇴와 함께 잊혀진 기술이 되었다. 노르드인들의 도래와 함께 노르만인들의 둔덕 성채가 출현한다. 둔덕 성채는 둔덕 위에 아성(keep)과 울타리로 보호되는 안뜰을 갖춘 것으로, 대개 목재를 주 재료로 지어졌다. 이내 성채기술은 기사의 대두로 인한 사회적 변화와 이에 따른 안보적 필요에 따라 분쟁과 십자군 원정 등 다양한 요소의 도입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곧 해자와 도개교, 문루와 동심원 구조를 갖춘 원형 성채가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잡는다.
다양한 성채가 주요 군사요충지에 지어지며 중세의 성세를 알리지만, 성채의 시대는 길지 않았다. 화약병기의 발달과 함께 성채의 공략법이 제시되고, 전쟁은 새로운 수단의 발달로 무기의 변화, 재정조달수단의 다변화와 함께 다음 세대로 진화한다.
기독교의 흥성과 동방과의 연결, 잉여의 축적은 또 하나의 건축양식을 불러온다. 성물과 성당 건축이라는 트렌드다. 루이의 생트샤펠로부터 노트르담, 그리고 스트라스부르로부터 프라하까지 전 유럽은 증가한 부와 군주의 권력, 교회의 열정과 시민들의 희사에 힘입어 성당 건축에 나선다. 당연히 공이 많이 드는 일이고,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채석, 건설, 장식에 이르기까지 석공으로부터 예술가, 건축가들의 노력이 모여 고딕 스타일이 서유럽을 뒤덮는다.
피렌체 두오모의 건설 역시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총감독이 선정되고, 도시의 재화가 투여되고, 건물은 완성에 이르르나 다양한 여건의 변화로 돔은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처음 계획한 웅장한 돔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수학자의 탄생과 다시 20년간의 건설기간, 그리고 그에 걸맞는 후원을 필요로 했다.
1314년부터 안좋은 날씨가 지속되고, 1316년이 되자 대기근이 시작된다. 대기근이 가시고나서는 1319년 몽골로부터 전해진 우역이 퍼져나가 평균 60퍼센트의 소가 죽었다. 이는 14세기로부터 시작된 소빙기의 영향이었다. 지난 기후 온난기동안 급증한 인구는 소빙기로 접어들며 인구압에 의한 환경적 취약성을 강화한다.그리고 몽골에서부터 한가지 질병이 유럽을 강타한다. 바로 흑사병이다.
몽골과 전투를 치른 흑해 연안의 베네치아 식민지로부터 흑사병은 시작된다. 베네치아로 침투한 흑사병은 이내 1348년 봄 프랑스로, 잉글랜드로 퍼져나가고, 1349년에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스칸디나비아와 아일랜드까지, 유럽 전역을 강타한다. 가장 사망률이 높은 지역에서는 60%에 달하는 사망률을 보이며 흑사병의 1차 파도는 1351년까지 맹위를 떨친다.
흑사병은 인구구조를 변화시켜 임노동자 전반의 협상력을 높였고, 이는 임금의 대폭 인상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세력관계의 역전에 따라 영국에서는 노동자 조례를 통한 임금의 통제로, 타국에서도 법제화와 탄압을 불러오며 갈등은 증폭된다. 그러나 소민 쪽으로 가울어진 권력은 이에 저항하는 대중 봉기로 유럽 전역에서 터져나갔다.
이와 같은 대중 봉기는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9세기로부터 13세기까지, 작센으로부터 플란데런까지 임노동자가 모이는 곳에서 대중봉기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농민과 중산층들은 귀족의 압제에 맞서 자크리의 난을 일으키고, 피렌체의 양털깎이들은 다른 기술공들과 연합해 1378년 촘피 반란을 일으켜 시정을 3년간 장악한다. 갈수록 반란은 거세게 타오르고, 진압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며 힘의 균형이 어느쪽으로 기울었는지를 보인다. 그리고 잉글랜드 역시 세금에 대한 불만이 끓어오르며 대중 봉기가 시작된다. 바로 와트 타일러의 난이다.
당대의 대중봉기는 단지 임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중간계급이 구심점이 되고 이론을 제공하며 와트 타일러의 난은 잉글랜드의 넓은 지역에서 호응을 얻으며 런던의 균형을 깨어버린다.
'아담이 땅을 파고 하와가 실을 자을 때 도대체 신사가 어디있었나?'
요구안이 극단으로 치닫고 동력이 소실되며 결국 패배와 처벌로 이어졌지만, 공방을 둘러싼 리처드 2세의 대응도 적절하지 못했다.
결국 주동자와 참여한 다수의 희생으로 끝났지만, 이들 실패한 반란은 이후의 대중봉기에 더 나은 로드맵을 제공한다.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합리적인 수준의 요구안을 제시하고, 작은 개혁들을 통해 저마다의 삶을 진전시키고, 개인의 권리를 명문화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시민적 권리의 점진적 획득, 그리고 획득을 위한 과정은 세대로 전승되며 후대의 길라잡이가 된다.
14장은 르네상스다. 르네상스란 무엇이었나. 11-12세기부터 시작된 교회 외곽의 지식집단, 대학이 설립되고 번역된 지식이 축적되며 고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해외로부터 부가 들어오며 사회적인 잉여가 축적되고, 이는 전통적인 유럽의 핵심 상업지를 중심으로 집약된다. 피렌체, 부르고뉴, 이탈리아 반도로부터 새로운 지적 흐름이 움트기 시작한다.
페트라르카를 통해 당대 지식인들의 전형이란 무엇이었는지 조명한다. 보헤미안적 지식인으로써 페트라르카는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며 견문을 넓히고, 계관시인으로써 자국어로 문학활동을 한다. 흑사병이 남긴 시대적 고통에서 신앙에 의존하면서도, 다방면의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이어간다. 그의 사망을 분기점으로, 각국의 문학작품들이 꽃피운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로부터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까지, 소위 말하는 민족문학의 얼개가 잡혀나간다.
'선량공' 필리프와 판에이크의 관계로부터 새로운 미술기법, 유화의 발달로 르네상스 미술의 변곡점을 비춘다. 부르고뉴공 필리프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폭음을 즐기고, 1000 파운드를 들여 궁정의 사람들에게 펀치기계로부터 물총발사 기계를 만들어 짖궂은 장난을 치고, 오만 기행을 저지르지만 군주로써의 그는 냉혈하게 강역을 확장하며 프랑스를 위협하는 거대한 세력을 이끈 장이기도 했다. 잔다르크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듯. 다 이긴 도박판이 엎어졌으니...
판에이크에 대한 그의 투자와 믿음은 유화라는 기업의 창조로, 겐트 제단화로부터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흔, 십자가와 최후의 심판, 그리고 다양한 성화로 남았다. 이와 같은 투자는 필리프에게 단순한 취미나 여흥이 아니었다. 그는 예술에 대한 후원을 통해 권위를 끌어올리고, 외교를 비롯한 다양한 용도로 그의 재능을 활용하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국가는 사라졌어도 그의 후원의 결과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메디치의 로렌초 역시 예술에 대한 후원을 통해 예술을 다원적으로 활용한다. 외교의 수단으로, 연막으로, 그리고 공공에의 기여로 그는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했고, 기라성같은 대가들이 그의 아래로 몰려든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에서 그 경력을 시작한다.
진정한 르네상스인으로써 레오나르도의 작업은 영역을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이어졌다. <최후의 만찬>으로부터 <바위굴의 동정녀>, <모나리자>까지 회화작품도 회화작품이지만, 조각 역시 그의 분야였고, 공학, 건축, 토목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과 세상에 대한 열정은 다양한 영역을 가리지않고 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기계에 대한 착상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영감을 줄 정도라는 점에서 그 통찰의 놀라움과 깊이가 새삼 체감된다.
15장은 항해자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마지막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애 함락된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을 통한 동방과의 무역이 막을 내렸음을, 누천년을 이어져온 로마제국이 진정으로 마지막을 맞이했음을 의미했다. 서로마제국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천년의 중세가 황혼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동방무역의 어려움은 또한 새로운 루트를 찾을 동기가 증가하였음을 말해줬다. 그 루트는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6세기 아일랜드의 성 브랜던은 페로 제도로 항해하며 망망 대해를 멈어가야 발견할 수 있는 섬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노르드 인들은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개척지를 마련하며 그린란드 너머, 빈란드에 정착한다. 그러나 이들 정착지는 기후의 변동으로 버려지고, 대서양을 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선박기술이 발달하고, 카라벨선이 등장한다. 라틴세일의 채용은 역풍에도 전진할 수 있고, 기동성이 좋으며 동시에 승조인원 역시 줄여주었다. 장거리 탐사에 유용한 조건들을 갖춘 배의 출현과 대중화는 탐사에 대한 지원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이는 이후 탐험가들의 선박 선정으로 그 진가를 드러낸다. 콜럼버스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나 바스쿠 다 가마나 페르디낭드 드 마갈량이스나 오직 카락 아니면 캐러밸이다.
서아프리카 주요 제도에 대한 포르투갈의 진출이 시작되며 노예무역 역시 활성화된다. 고래로부터 노예무역은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었고, 기존의 사하라루트와는 다른 서아프리카 항해 루트의 개척은 포르투갈을 주요 행위자로 만들었다. 당대 노예의 가격은 말 한마리에 9-14명으로, 그 과정은 당대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윤리적인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고메스 이아네스 드주라의 생생한 묘사는 당시의 한 시각을 보여준다.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라 해도 이 무리를 보면서 연민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처절한 신음을 내며 서서 하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그곳에 고정시키고 크게 울부짖으며 조물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듯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고 땅바닥에 큰대자로 누워버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의 방식대로 노래를 부르듯이 신세 한탄을 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슬퍼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콜럼버스는 역사적인 항해를 떠난다. 다양한 고난 끝에 그는 신대륙과 신대륙으로 이어지는 항해 루트를 '발견'하고, 이는 중세와 근세를 구분짓는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그가 발견한 루트를 통해 스페인은 진정한 세계제국이 되고, 원주민에 대한 정복과 아메리카로부터 유입된 금, 은은 가격 혁명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수만은 아메리카인들은 유럽인들에 의해 밀려나며 거대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그 윤리적 평가가 어떻든, 그의 발견은 중세의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바르톨로매우 디아스는 서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며 다른 루트로 인도에 접근하고자했고, 결국 희망봉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그 너머로 항해를 지속할수는 없었다. 선원들이 목을 몸통과 이별하게 해주고자하는 강한 열망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이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가 시작되고, 다년간의 항해 끝에 인도에 도착하고 돌아오며 절반의 선원을 잃는다. 이후 무역풍과 계절풍을 이용해 브라질을 거쳐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들어가는 루트가 정식으로 나타나며 세계무역의 시대가 열린다.
이 항해의 역사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의 세계일주로 정점을 찍는다. 모난 성격으로 본국에서는 쫓겨났지만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아 항해를 떠난 페르낭은, 수많은 발견과 모험 끝에 필리핀에서 비명횡사하지만 그의 선원들은 결국 유럽으로 귀환하며 지구는 유한하고 인간은 그 모든 곳에 원한다면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한다. 지구 전체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그의 발견은 대항해시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대사건이었다.
16장은 종교개혁. 구텐베르크가 이름은 알렸지만 돈은 못벌었군. 기술발달 다 시켜놓고 사업화를 못해서 채권자에게 홀라당 넘어가고 채권자가 그 기술로 노가 나버리는 슬픈 현실... 아이고 진작에 제깍제깍 팔았어야지... 면죄부 굉장히 합리적인... 금융상품이다. 기간의 정함이 있고 천국생명보험이 있고 면죄의 범위는 한정되어있는데 당대 문해율을 생각하면 불완전판매가 매우 성행했을 듯.
면죄부의 기원 자체는 십자군전쟁으로 올라가고, 상품 판매기술은 시대를 지나며 고도화된다. 말 그대로 영혼세탁서비스 구독권이다. 상품의 모델링 자체야 당대 신학이론에 근거해서 성사에 기반한 면죄로 규정되어있지만 과연 실제로 그렇게 팔렸을까. 면죄부에 대한 비판들을 보면 불완전 판매는 성행했고, 어느정도 의도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런 걸 팔면서 이게 어떻게 활용될지 몰랐다는 건 기만에 가까움.
후스는 팩트 잘 말했는데 안타깝게 되었다. 위클리프로부터 발현한 사상이 프라하로 전해지고 후스파 운동 역시 전유럽적인 규모의 운동이 된다. 이후의 종교개혁 역시 이 자장으로주터 출발한다.
대량인쇄기술이 서두에 나온 이유가... 있다. 면죄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해서 대량으로 판매한다. 말하자면 면죄부 사업의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안그래도 호엔슈타우펜에 대한 고로시 이후로 아비뇽 유수로 떨어진 교황청의 권위는 실시간으로 저점을 갱신한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얻은 세상의 권세가 아비뇽 유수와 이후의 전개로 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보면, 중세란 기독교와 함께 시작하여 카톨릭의 쇠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산피에트로 대성당 건립을 위해 면죄부 생산은 가열차게 진행되고, 마인츠 대주교, 푸거, 교황 사이에 선제후 티켓을 둔 삼자거래가 일어나며 푸거가가 대신 지불해준 선급금을 메꾸기 위한 눈물의 똥꼬쇼가 시작된다. 이 선제후 투표권 결국 카를한테 돈받고 카를에게 행사한다. 이런 짓거리를 하고있으니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지. 반박문의 말미에 붙은 문구는 이것이 사실 학회 초대장의 성격임을 보여준다. 루터 역시 이 반박문이 일으킬 후폭풍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를 5세가 참 독특한 인물이다. 입지전적인 군주이면서 동시에 투표권 거래를 통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위에 오르고, 이때의 거래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다. 번역이 잘못됐네 마그데부르크는 대주교가 아니고 변경백이잖아... 어쩐지 인물명 번역도 통일성이 없고 횡설수설한다했어.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가 성직선제후가 아닌데 왜 두장인가 한참 고민했다.
루터와 그를 보호해준 프리드리히 3세와의 관계가 특이하다. 루터는 당연히 교황의 규탄칙서를 받고, 이를 불태우고, 심문에 놓이고, 기가막히게 탈주하고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놓있다. 그는 카를을 지지하면서도 루터를 지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기간이 루터가 스스로의 신앙을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루터도 결혼을 하는데...! 수녀랑...! 독일 농민반란이 벌어진다. 이때 반란의 강도는 다양했다. 도시 내에서 원만히 수습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백작을 탑에 넣고 백작 오븐구이를 하거나 탑에서 낙하를 시키고 가족들도 줄줄이 따라보내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반란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루터의 신학은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쓰였고, 그는 이에 반대하며 선을 긋는다. 당대 농민반란의 폭력과 무질서라는 현실을 목도했을 때 루터가 가진 배경과 걸어온 행적으로 미루어보면 그 결정이 이해되지 못할 내용은 아니다.
그럼애도 불구하고 군주들은 대중봉기의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강력한 피의 진압 이후 결론 자체는 당대 군주들의 숙의와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이후의 대응에서는 관용을 권고함으로써 최소한의 여지를 남긴다.
이탈리아 정벌에서 프랑수아를 생포함으로써 키를 5세는 전장의 주도권을 쥐지만, 프랑수아는 왕국으로 돌아가며 약속을 나몰라라한다. 설상가상으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수아의 약속 불이행은 공식적으로 면제시켜주며 카를의 뒤통수를 친다. 당시 카를이 기독교 세계를 위해 헌신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친구들은 오스만 스파이인가 하는 생각이 아니들 수 없다. 그리고 프랑스는 실제로 오스만과 이후 동맹을 맺는다. 사코 디 로마 ... 그럴만 했다.
오스만의 공세가 동유럽을 뒤덮은 상황에서 카를이 이탈리아로 파병한 란트크네히트와 스페인군이 로마로 진격한다. 로마를 지키던 스위스 용병들은 남김없이 전투에서 살해당하고, 통제할 지휘관을 잃은 용병들은 적은 급료를 채우기 위해, 그리고 교회에 대한 복수심에서 로마를 약탈한다. 다수를 이루던 루터파 란츠크네히트들은 수사를 살해하고 로마 시민을 20% 이상 죽이며 철저히 로마를 약탈한다. 게르만의 약탈로 시작된 중세는 다시 로마에 대한 약탈로 막을 내린다.
이 사건으로 교황권은 땅에 떨어져 카를 5세에게 종속되고, 헨리 8세는 안타깝게도 이혼을 못해 성공회를 창설한다. 당대 군주들의 이혼사례를 보면 헨리 8세는 단순히 분조장으로 성공회를 창설한 게 아니라 이를 중대한 통치권의 위협으로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너덜너덜해지고,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유럽으로 전파된다. 세계제국으로써의 스페인의 패권은 확고해지지만, 뿌려진 종교개혁의 씨앗은 하나의 교회로써의 카톨릭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렇게 중세가 대외무역으로, 로마의 약탈로, 기독교의 새 장으로 나아가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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