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란 무엇인가. 로마제국의 멸망으로부터 르네상스까지의 시기가 일반적으로 중세로 불린다. 터무니없이 긴 기간이고, 엄밀한 규정도 아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축적된 전통과 구조가 이후 사회로 이어지고, 또 근대를 낳는 기초가 된다. 그래서 중세다.
로마로부터 출발한다. 로마는 현대 유럽 강역을 지배하던 제국이었고, 그 군단은 유럽의 안보를 지키는 핵심 세력이었다. 전체 GDP의 2-4%를 소모하며 강역을 지키던 군단은 군사문화의 계승자로써, 로마화의 첨병으로써 로마를 지키고 건설한다. 로마의 흥성과 당대의 안정적 기후 역시 제국의 물적 토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원인이 된다. 브리타니아 얘기는 영국사람들 꼭 집어넣음. 브리타니아가 가진 장점들, 풍족한 농경지와 지하자원, 세상의 끝에 있는 군도는 정복욕을 자극하는 대상이 되었다.
시민권은 이 지배체제에서 기득권의 상징이었다. 갈리아에 대한 시민권의 부여로 시작된 시민권의 확장은 차차 확장되며 지배계급에 대한 포섭의 도구로 작용하고, 로마 군단에 진입하는 메리트가 되어준다. 이윽고 212년 전 로마에 적용된다.
로마의 경제를 지탱했던 것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교환경제, 그리고 그 교환경제를 지탱한 물질세계의 노예들이다. 진정한 노예제 국가로써 로마의 경제는 노예의 수출입에 의존하였고, 기초생산부터 인프라의 건설, 일상생활에까지 모든 곳에서 활용되었다. 외지로부터 유입된 노예는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인 성격을 띄지는 않았으나, 통제의 용이성과 문화적 이질성을 위한 구분은 결과적으로 차별적으로 작용하였다.
로만 시티는 이후로도 하나의 도시규격을 제공하며 이후 사회에서도 따라야 할 전범이 된다. 서유럽 언어들의 로마화 역시 로망스제어를 하나의 군으로 묶으며 동질성을 부여해주는 요인이 된다.
로마의 법, 그리고 기독교의 수용까지, 이후 서유럽을 구성하는 중심 요소들의 기초가 놓인다. 키케로의 말은 법의 정신을 관통하는 좋은 전범이 된다. 강역 내에서 하나의 법에 의한 지배, 이것이 진정으로 구현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훈족이 나타난다.
훈족 이주의 원인을 고기후변동으로부터 추적한다. 청해성 차나무 표본으로부터 추출한 고기후 기록은 350-370년 사이 동아시아의 심각한 가뭄을 보여준다. 상부구조와 물질세계가 상호 영향을 주고잗는다면, 물질세계의 기초가 되는 식량생산은 기후의 함수이기도 하다. 유목민에게 필수적인 건초생산이 기후교란으로 메마르고, 훈족의 이동이 시작된다.
볼가강 유역에 대한 훈족의 틈입은 민족이동의 연쇄를 낳는다. 고트족이 로마의 강역으로 기후난민이 되어 내려오고, 발렌스는 이들을 수용하지만 제국의 체제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일부의 이민에 대한 허용은 국경에 대한 무차별적 월경으로, 반란으로 나타나며 군사적 패배로, 일련의 무정부상태로 이어진다.
훈족의 연속적인 이동, 헝가리로의 진주는 지속적인 이민발생을 촉발하고, 서로마 역시 이에 따른 안보부담의 가중으로 신음하게 된다. 스틸리코의 분투가 이를 저지하지만, 점증하는 안보부담은 내전으로, 정정의 혼돈으로 나타나고 훈족의 이동으로 유발된 막대한 게르만의 침공은 제국의 안보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분투와 모략과 정치적 혼란은 사실상 국가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알라리크의 약탈은 그 선고였을 뿐이다. 로마가 약탈되고, 서로마의 권역은 게르만의 노략질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게이세릭의 카르타고 점령은 제국의 곡창을 타격하여 서지중해 교역망의 핵심 결절을 끊는 결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틸라가 권좌에 오른다.
속민들을 대동한 아틸라의 침공은 제국의 무정부상태를 가속화시키고 안보역량을 바닥으로 내리꽂는 일격이었다. 발칸에서, 갈리아에서 아틸라는 무너져가는 제국의 잔재를 말끔히 청소하고 국경을 완전히 개방한다. 진실된 말로 자유무역(약탈)의 사도인 것이다. 개방된 국경으로 속민들이 넘어오고, 로마의 유산은 흙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아틸라는 유목민답게 죽는다. 하지만 그가 파괴한 국경과 그가 파종한 속민들은 이후로도 서유럽을 약탈하고 지배하며 새로운 정치체를 구성한다.
이베리아에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왕국들이 건설되고 이들 왕국은 기존의 문화와 습합되며 하나의 통치구조를 구축한다. 기존의 인프라를 활용하며 건설된 새로운 왕국들은 그러나 구조 자체의 내생적 취약함과 외부로부터의 변동에 따라 쉽게 사멸하고 또 대체된다.
뭔가 빠졌다 했더니 동로마 깜박했네. 발칸 반도의 지속적인 압력은 동로마를 재주조하는 원동력이 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당대 동로마를 쇄신하기 위해 법을 압축하고 요약하여 바로잡고, 종교적 갈등속에 균형을 유지하며, 아테나이 학당을 폐쇄하고 제국의 동질성을 확고히 한다. 로마의 정체성이 완전히 재구축되는 분기가 된 것이다.
이후 훌리건들에 의한 내부적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의 강역에 대한 회복에 나선다. 카르타고를 회복하며 이탈리아 반도의 수복에 나서지만 기후의 변화가 촉발한 가뭄과 역병의 확산은 그의 확장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치세동안은 제국을 쇄신하고 강역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역병과 전란은 그 강역 전반의 경제적 활력을 격감시켰고, 이는 사후의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슬람이 등장한다. 로마제국 쇠망기를 보면 볼수록 이 거대한 민족의 대이동과 침략이라는 것이 과연 당대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부하였던 것인가에 대해 생각이 더해진다. 다마스커스 전투에서 양편의 진용, 다민족으로 구성된 로마군과 신앙으로 응집된 무슬림들간의 차이는 이후 거의 천년동안 레반트의 전선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추는 한 단면이다.
다르 알 이슬람은 지중해에서 유의미한 강역을 확보했고, 그 강역은 근대까지 온전히 무슬림의 집으로 남아 전통을 계승해왔다. 최초의 움마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계시를 받고 메디나에서 신앙을 기초로 부족들을 통합하고, 카바를 점령하고 내적 단결을 다지며 예언자 사후 승계가 일어난다. 우스만은 응집된 부족들의 힘으로 확장에 나서고, 단결된 신앙의 힘은 활발한 정복으로 그 위력을 증거한다. 그러나 계승을 둘러싸고 1차, 2차 피트나가 일어나며 분열의 단초를 제공한다.
1, 2차 피트나와 순니, 시아의 분화에 대한 설명은 사실 여러번 들었는데 왜 이 책의 설명이 이해를 높여주는지 모를 일이다. 설명이 상당히 잘 들어온다. 그만한 축적이 되서인지 정말 설명이 좋아서인지 좀 헷갈림. 북아프리카에 대한 정복으로 동로마는 발칸과 콘스탄티노플, 아나톨리아로 강역이 축소되고 다르 알 이슬람의 강역이 이베리아까지로 획정된다. 새 화폐를 주조하고, 통치 언어를 확립하고, 이를 통해 지배강역의 종교를 이슬람으로 통일하며 무슬림들의 세계는 완결성을 갖는다. 이 확장은 투르전투에서 샤를 마르텔에게, 그리고 동쪽으로는 악수 전투에서 당나라에게 패배하며 일단락된다.
우마이야의 지배는 3차 피트나를 통해 가문이 도륙당하고 압바스 왕조가 들어서며 종말을 맞고, 압바스 왕조에 의해 도입된 아미르 체제는 각 영토를 제후들에게 분봉해주며 다르 알 이슬람이 저마다의 정치체로 분화되는 계기가 된다. 순니/시아의 대립, 파티마조로부터 알무라비툰, 후 우마이야까지 하나의 통일된 이슬람 왕조는 다변화된 지역세력으로 변모한다.
프랑크 족의 왕은 모발이 풍성해야만 할 수 있었다. 풍성한 모발이야말로 왕권의 신성함을 증거해주는 힘이었던 것이다.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디릭이 삭발을 당하며 수도원으로 쫓겨나고, 궁제 샤를 마르텔과 그 아들 페팽이 왕위에 오르며 카롤링 왕조의 시대가 시작된다.
샤를마뉴의 치세와 이를 통한 유럽의 재구성, 이어지는 프랑크-노르드의 갈등은 노르만이라는 제3의 민족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프랑크족은 어떻게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나. 훈족의 침입 이후 프랑크족은 강역에 대한 다른 게르만족들의 틈입을 물리치며 왕국을 건설한다. 살리 법전의 승인, 거대한 무덤과 부장품은 당대 프랑크족의 치세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조각들이다.
그러나 직접 통치하지 않는 메로빙 군주의 권력은 이후 계승받은 군주들의 나태함과 맞물려 궁재에게 권력의 중심을 이동시키게 된다. 페팽의 찬탈은 그간 왕권의 권위를 지탱해주던 전통과 신성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명분으로 그는 교황을 선택한다. 교황에 대한 페팽의 서한은 당대 왕과 교회의 권력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내준다.
"지금 프랑키아에 왕권을 지니지 못한 왕이 있다는 게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왕은 명분을 얻고 로마 교회는 보호를 얻는다. 이 시점으로부터 물질적 지원의 방향이 바뀐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리가 시작되고, 왕권에 대한 교황의 개입 역시 단초가 놓인다.
페팽의 정복사업은 랑고바르드 그리고 작센 방면으로 진행된다. 제국의 두 변경에서 한쪽은 정복으로, 한쪽은 약탈로 정지작업이 진행되며 통치가 안정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샤를마뉴에게로 계승이 이루어진다. 메로빙왕조의 공동통치 풍습은 이후로도 지속적인 왕권을 향한 존속살해의 동기를 제공하고, 샤를마뉴 역시 동생의 피로 왕관을 씻으며 랑고자르드를 정복하고 철관을 쟁취한다. 이후 아헨을 중심으로 제국의 관료체제를 일신하며 영토 전체에 대한 통일성을 부여한다.
교황이 길거리에서 두들겨맞고 납치당했다 탈출해서 신변을 의탁하고 샤를마뉴가 재집권을 시켜준다. 서로마 황제의 제관이 샤를마뉴에게 씌워지고, 이탈리아와 로마 교회는 황제의 제관을 완성하는 의궤가 된다. 샤를마뉴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계승권의 혼돈은 프랑크족 연례행사였다. 세 적자간에 왕궝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진다. 사형에서 시력상실형으로 형벌을 경감해줬어도 어차피 결과는 같다. 카롤링 가족사에 대한 성실한 공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친의 왕권에 대한 찬탈과 그 과정에서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는 것이다. 그리고 노르드인들의 침공이 시작된다.
노르드는 고립된 땅으로, 제1천년기 내내 유럽과의 격리를 유지하며 자체적인 문화를 발달시킨다. 물질세계에서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외부와의 교역(약탈)에 나설 정도록 축적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속적인 기후변화는 특히 북구에 혹독한 시련을 동반했고, 기술의 발달과 응집성의 강화를 강요한다.
선박기술의 발전, 기후에 따른 성비의 불균형과 이로 인한 남초사회의 강화, 신부값의 압박에 따른 물질적 열망의 가중은 외부로의 진출, 무역과 해적질에 대한 경로의존성의 구축으로 나타난다. 라그나 로스부룩으로부터 시작된 영국으로의 진출(과 약탈), 프랑크 영토로의 진출, 키예프 루스의 성립과 발칸으로의 팽창, 아프리카로의 확장은 노르드의 진취성과 정복욕구를 현시한다.
이 확장일변도의 흐름은 유목민족의 그것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다만 수단이 배가 되었을 뿐이다. 기동력과 전투력에 기인한 거대한 확장이 유럽사회에 새로운 민족을 유입시키고, 사회의 경계를 뒤흔들며 새로운 정치체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아헨이, 파리가 노르드인들의 약탈에 시달리고, 카롤링 왕조의 통치는 급속도로 부식된다. 이 정복사업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주조된 전체 물량의 14%에 달하는 700만 페니가 노르드인들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흐롤프르에 대한 묘사가 당대 노르드인들의 생활을 잘 드러낸다.
"공격적인 노르드 청년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을 했다. 불을 지르고, 크고 작은 마을을 파괴하고,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프랑크 땅에 노르드 인들이 자리잡고, 혼인 관계로 동맹을 맺고 노르만 인이 된다. 결정적인 분기는 기독교의 수용이다. 기독교를 수용하고 파리로 가는 센 강 어귀를 지키며 프랑크 문명과 노르드 문명의 습합이 일어난다. 이후 이들은 브리튼에 대한 정복을 통해 역사의 주역이 된다.
그렇다면 중세 사회의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인자들은 무엇이었나, 수행자와 기사를 통해 당대 구조의 두 축을 비춰본다. 사냥터 자리에 클뤼니 수도원이 건설되고, 이는 이후 수도사회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영적 처벌과 물적 제재가 성립되며 수도원은 독립적인 구조를 갖춘다. 이후 거대한 상부구조의 일원이 되며 휘하 수도원들을 통해 중세 유럽 체제를 구축한 수도회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안토니우스로부터 수도자, 은자와 수행자의 유래를 찾아나간다. 탈물질적 삶, 구도에의 길이 수행자의 본질이다. 육체노동과 신앙생활이 그 삶을 규정하고, 이는 여러 선례를 통해 재차 증험되며 수도생활의 기틀이 된다. 이집트로부터 카파도키아로,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기독교사회에 퍼져나가는 수도생활의 모습은 베네딕투스의 대에 이르러 하나의 규범으로 정식화된다.
수도원의 구축은 기반시설의 건설임과 동시에 식민활동의 첨병이기도 했다. 전도활동과 식민화의 전진기지로, 변경에 수도원들이 건립된다. 샤를마뉴에 의해 수도원은 통치구조에 통합되고, 이후 베네딕토회의 확장은 전 유럽적 통치구조의 일부분으로 수도회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수도사들이 오동의 베네딕토화에 맞서 창과 칼을 들었다는 것은 이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다.
그러나 베네딕토회와 회의 규율은 점진적으로 수도원들을 하나의 틀로 묶어내었고, 이는 제1 천년기 말 기후변동에 의한 물적 구조의 팽창, 점증하는 유럽 내 분쟁과 그에 따른 영혼세탁 수요의 증가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오블라투스라는 제도는 이 과정에서 승계권자를 줄이고 수도회와 영주와의 결합을 강화하며 수도회를 상부구조 내애 촘촘히 엮는 결합으로 기능한다.
베네딕토회는 물적 토대의 증가에 따라 고도화되고, 오푸스 데이로 통칭되는 신앙생활들은 제도화되고 규격화되며 교회 본연의 역할들을 풍성하게 했다. 찬양에 대한 언급은 당대 교회의 엔터테인먼트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기능의 발달은 수도원을 신앙의 공간에서 일종의 종합 사회복지센터로 성격의 확장을 만들어나간다.
이 과정에서 순례 역시 조직의 확장과 통합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산티아고 순례의 대중적 확산과 그 교통로에 대한 수요는 수도회가 이를 관리하며 교통망과 역참들을 다질 수 있는 기틀이 되었고, 도로를 따라 수도원이 범창하며 전 유럽에 걸친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이는 통치권력과의 관계 역시 가일층 강화하는 단초가 된다.
클뤼니의 영혼세탁 사회서비스는 정점에 이르르고, 우르바누스 2세를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이에 대한 순수주의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며 시토회가 들어서고, 수도생활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며 기사수도회, 탁발수도회 등 수도회의 다변화가 시작된다. 시토회 역시 700여개의 수도원을 거느리지만, 수도계 전반에 대해 전 시대의 베네딕트 회 만큼의 장악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수도회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통치의 보조기구로써 신앙생활과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었고, 영토의 경계를 넘나드는 국제적인 기구였으며, 유럽을 하나로 묶는 지식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수도회를 중심으로 문화와 기술이 축적되고 교류되며 세대를 넘어 전승되었고, 이는 물질세계가 역량을 축적하며 발전할 수 있는 지식의 저장고로, 유통로로 기능했다.
기사의 시대는 오토 2세와 머저르 족의 아우구스부르크에서의 전투로 시작한다. 프랑크 왕국을 몇번이나 휩쓸었던 머저르인들은 오토 2세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침공을 감행했고, 오토 2세는 잘 조직된 기사들을 이끌고 스웜전술을 활용할 수 없도록 전장을 통제하며 머저르족을 격멸에 이르르게 한다. 레히펠트 전투는 바야흐로 기사들의 시대를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인 것이다.
기사의 시대가 오기까지 많은 변화가 필요했다. 샤를 마르텔의 시대에도 전장의 주력은 잘 무장된 보병이었다. 그러나 카롤링거 왕조의 시대에 이르러 유럽은 통합되었고, 지켜야 할 변경까지의 거리는 늘어난다. 안장과 등자 기술의 발달은 기동력있고 충격력있는 무장 병력, 즉 기사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이는 제도적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도 확인되듯, 진정한 랜스차징, 충격기병전술의 확산과 전파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사라는 형태의 주류화는 새로운 사회제도의 발달로 이어졌다. 농민 10가구 이상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자체적인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방도로 봉지가 수여되고 이에 따른 계약관계가 형성된다. 봉지에 대한 권리가 규정되고, 봉신의 의무가 정해지고, 이 모든 관계를 규정하는 반 종교적인 의식이 구성된다. 바야흐로 봉건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 기사들은 어떻게 삶을 영위했는지,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갔는지 엘 시드를 통해 바라본다. 아라곤의 봉신으로 살아가던 로드리고는 봉신관계에서 해방된다. 봉신관계에서 해방된 기사는 고삐풀린 전쟁기계로, 다른 주군의 손에 들어가면 파괴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후드 왕국과 계약을 맺은 로드리고는 그 파멸적인 결과를 봉신관계를 해지한 아라곤에 잘 가르쳐주었다. 이윽고 7천명정도의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그는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재능있는 전사로, 엘 시드라고 불리운다.
알 무라비툰의 대공세에 맞서 아라곤의 군주 알폰소는 그의 옛 봉신을 사정사정하며 불러오고, 엘 시드는 계약관계에 따라 의무를 이행한다. 그러나 그에게 알폰소가 결코 만족스러운 보상을 줄 수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독립된 영지의 군주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발렌시아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고, 그 과정에서 그를 가로막는 봉신과 옛 군주와 이교도를 불태우고 약탈하고 협박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이윽고 발렌시아는 함락되고, 엘 시드와 그의 부하들은 풍족한 재물을 차지한다. 기사생활이라는 게 원체 연비가 많이 드는 일이고, 이처럼 약탈한 부에 대한 욕망과 과시는 무력의 행사에 따른 응당한 보상으로 자주 표상된다. 알 무라비툰의 군세가 반도를 엄습하고, 쿠아르테에서 엘 시드는 이들을 격파하며 레콩키스타의 분기점을 만든다. 엘 시드의 사후 그의 이야기는 기사도문학의 한 전범을 형성하며 기사들의 세계가 표상하는 바를 잘 드러내주는 하나의 방향타가 된다.
롤랑의 노래에도 잘 드러나지만, 기사도란 무에 대한 숭상, 무력을 통한 승부와 결투에 대한 신성성의 부여, 계약에 대한 존중과 이행, 기사로써의 의무에 대한 충실등의 코드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 속에서 죽음은 기사의 삶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파와 운명에 맞서 자신의 무력을 견주고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기사로써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마침표인 것이다.
이런 기사의 삶을 잘 보여주는 예로 윌리엄 마셜이 등장한다. 플랜태저넷 왕조와 함께 시작한 그의 기사로써의 삶은 주군으로 모시는 소년왕 헨리의 옆에 서며 장구한 여정의 막을 올린다.
소년왕 헨리에의 봉사가 반드시 영광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궁정에서의 암투는 그를 외유하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군의 임종을 지키고 그 유언을 받들어 성지를 순례한다. 귀환한 그는 다시 왕가 내부의 투쟁에 휩싸이고, 리처드와 존의 반란에 맞서 주군인 헨리 2세의 곁을 지키는 것으로 그는 충성을 다한다. 리처드를 낙마시키면서도 그의 목숨을 살려주고, 이후 리처드에게 봉사하며 그의 십자군원정동안 국가를 다스린다.
세월도 그의 무력을 막을수는 없다는 것을 프랑스의 전장에서 보여주고, 존왕의 여러 악덕에도 불구하고 존 왕을 위해 봉사한다. 존왕의 치세가 의롭지는 않았지만, 한낱 봉신서약이 그에게 충성을 요구하며 윌리엄은 기사로써의 의무를 다한다. 존 왕이 서거하고, 헨리 3세를 자리에 올리며 그는 다시 잉글랜드를 위해 싸움에 나선다. 왕국을 재통일하고 일흔의 나이에 1217년 링컨 전투에서 승리를 올리며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사로써의 의무를 다한다. 의뢰된 전기가 그렇듯 이 내용이 그의 삶의 음영을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당대 기사도가 지향하는 바와 그 코드가 정치적 결정에 끼친 영향을 잘 드러내준다.
글래스턴베리가 아발론으로 발명되고, 아더왕 전설에 대한 에드워드 롱생크의 적극적인 발굴과 이를 통한 브리튼 일통의 여정이 시작된다. 웨일즈의 심장부인 귀네드에 대한 정복, 성채의 건립을 통한 항구적인 지배체제의 수립은 이후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의 시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사의 시대는 짧았고, 배넉번 전투는 그 변화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후 무장이 강화되고 하마보병으로써 기사의 성격이 강화되며 투사무기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재정의 수급과 분배 구조 역시 기존의 봉건적 의무관계에서 방패세를 통한 상비군의 운용으로 바뀐다.
기사의 시대는 짧게 지나갔지만 신분으로써의 기사는 이후에도 유한계급의 상징이 된다. 영국의 하원에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기사는 하나의 신분으로 대의체계의 일부가 되고, 계급의 징표로, 추구해야 할 전범으로 깊게 흔적을 남긴다. 폰 베를린힝겐으로부터 헨리 8세까지, 이후의 가터기사단까지 여전히 기사작위와 기사단은 하나의 명예로운 자격으로 상류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로 남아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는 알프 아르슬란에게 쫄딱 망한다. 셀주크 튀르크는 튀르크인들이 으레 그렇듯 초원에서 발원하여 아랄해 인근으로부터 페르시아를 지나 아나톨리아까지 다르 알 이슬람의 패권을 쥐게된다. 로마노스의 패배는 동로마제국의 전통 스포츠 반란과 폐위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위기 속에서 알렉시오스는 서방에 구원요청을 하게된다. 1차 십자군 운동의 시작이었다.
교회의 세속권력은 카롤루스부터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각급 단위에 축적되었고, 이윽고 상부구조내에서 유의미한 비율을 차지하게 된다. 귀족의 혈통은 단절되지만 교회와 그 자산은 항구적으로 계승된다. 권력관계의 변화에 따라 구원의 의미로 주어졌던 권위의 부여를 실질적인 권력다툼의 패로 쓸 수 있게 되면서 영토국가 내의 사제들, 특히 주교에 대한 서임권을 놓고 교회는 국가들과 갈등을 빚는다. 이는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토의 주인은 누구인가. 군주인가, 그를 서임해주는 교황인가?
교회가 '신의 평화', '신의 휴전'으로 세속에 대한 관할을 늘려나가며 갈등은 증폭되고, 이 과정에서 십자군은 갈등의 원인을 외부로 투사하며 교회가 진정으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적절한 기회이기도 했다. 우르바누스의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건설한다.
레콩키스타와 클뤼니 수도원의 성장은 이 원정에 대한 경제적 동기의 배경을 제공한다. 기사로써의 삶은 연비가 높은 편이었고, 당대 기독교 사회는 잉여엘리트의 포화상태에 있었다. 종교적 동기와 경제적 동기의 합치는 거대한 열정으로 나타나며 역내의 이민족애 대한 배타적 정서로 그 서막을 드러낸다. 당대 사회의 폭력에 대한 민감도가 낮았다는 것은 학살의 잔혹함에서 재차 드러난다. 유대인에 대한 학살로 시작한 십자군 원정의 잔혹함은 민중십자군에 의한 경로의 약탈로, 그리고 이후의 군주십자군에 의한 잔혹함으로 반복적으로 증거된다.
"오늘 신께서 보살피사 너희는 모두 풍성한 전리품을 얻을 것이다!"
이 문장이 십자군의 경제적 동기에 대한 적확한 묘사인 듯. 기사의 삶은 항상 연비가 많이 드는 일이었고, 전리품에 대한 욕망과 무력의 행사로 얻은 전리품에 대한 정당화는 기사도문학을 구성하는 주요한 코드였다. 이는 종교적 열정과 결합하여 이교도에 대한 진멸로, 그 재물의 취득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합리화로 표현된다. 에데사에서,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은 포위공격에 성공하고, 학살을 하고, 약탈을 하고, 그 위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다. 이교도의 시체 위에서.
십자군은 네 개의 기독교 왕국을 구축하고, 이후 도착한 후속 병력들, 노르드인들을 비롯한 원정군은 레반트에 대한 정지작업을 통해 역내를 하나로 연결하며 식민영토국가를 건설한다. 레반트가 십자군의 수중에 들어오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중해교역이 재건되고, 영지에 영주들이 들어서며 상인들이 진출하고 교환세계 역시 유럽과 연결된다. 당대 주요 항구의 연 수입이 잉글랜드 전역의 세수와 맞먹었음은 이 지역에 건설된 식민지의 경제적 역량을 재차 증험한다. 그리고 신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자리잡는다. 이들 군사단체는 교황청으로부터 수여받은 특권을 통해 군사적 억지력으로써, 그리고 시장경제의 일부로써 신용을 담당하며 상부구조의 플레이어로 올라선다.
1차 십자군의 성공은 당대 다르 알 이슬람의 분열과 그 틈을 찌르고 들어간 종교적 열정에 기인했다. 이슬람이 레반트로 확장하며 동로마제국에 대해 갖고있던 종교적 응집성과 단결력이 이번에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역으로 투사된 것이다. 에데사를 장기가 함락하고, 이는 기독교사회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며 당대 곤란을 겪고있던 에우게니우스 3세에게 2차 십자군의 소집으로 갈등을 회피할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한번의 운좋은 성공이 반복될수는 없었다. 콘라트와 필리프의 원정은 고된 여로를 통한 탈력감으로, 동로마제국의 소극적인 지원과 아나톨리아에서의 패배로, 예루살렘에서의 지리한 대기와 기획한 원정의 실패로 마무리지어졌다. 이 와중에 동행한 엘레오노르의 짜증과 이혼과 아키텐의 플랜테저넷으로의 귀속은 이후 영불연속체의 여러 세기에 걸친 장구한 이혼으로 나타난다.
십자군의 성공은 레콩키스타와 동방식민운동으로도 나타났다. 동방의 이교도에 대한 정벌과 독일인들의 식민은 중부유럽에 대한 확장과 이후 유럽의 구조, 서유럽의 우위와 중부유럽의 종속이라는 구도를 결정짓는 사건이 된다.
그리고 살라딘이 나타난다. 파티마조에 대한 정복, 시리아 영토에 대한 장악은 그의 위치를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예루살렘 왕국과의 긴장 속에서 결국 결정적인 전투를 통해 성도를 손에 넣는다. 기 1세와 그와 함께했던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이 참수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거점 역시 함락되며 레반트의 기독교왕국들은 전면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이는 거대한 3차 십자군의 조직으로 이어진다.
리처드와 루이, 바르바로사가 성지로 향하지만 바르바로사는 수영하다 익사하고 리처드와 루이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예루살렘은 수복하지 못한다. 미진한 결과에도 세 기독교왕국은 100년간 존속하지만, 3차 십자군은 십자군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외부로 투사되던 영향력의 방향이 기독교 사회 내부를 향하게 된 것이다.
4차 십자군이 조직되고 프랑스는 대금지불을 약속하며 베네치아는 대금에 대한 상품, 선박을 준비하지만 프랑스는 대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지분을 투자하며 십자군의 방향을 이끈다. 베네치아을 배반한 자라를 철저히 응징하고 짓밟으며 출발한 4차 십자군은 이내 이사아키오스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향한다.
의뢰주가 돈을 안준다? 의뢰주의 영토에서 창의적으로 수금하면 된다.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이후 맞닥뜨린 저항 역시 분쇄하고 재차 약탈한다. 이후 십자군운동은 기독교 세계의 변경에서 내부를 향해 투사된다. 레콩키스타로, 동장 식민운동으로, 프러시아의 건설과 카타리파의 탄압으로 십자군을 교회의 칼이 되어 교회의 적을 응징하며 그 과정에서 겸사겸사 무력행사에 대한 개인적 영달도 달성한다.
십자군 운동으로 축적된 교회의 역량은 호엔슈타우펜 왕가와의 알력다툼과 가문의 몰락으로 절정을 맞는다. 교회의 축적된 역량이 고점에 이르르고, 동시에 갈등 역시 누적되기 시작한다. 한때 유럽사회를 정초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는 상부구조의 일부로 사회의 중추가 되며 모순 역시 포괄한다.
십자군 운동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응집된 종교적 역량의 투사요, 잉여 엘리트의 배출이자, 식민 활동의 정식화였다. 변경에서 통치의 수립과 영지의 건설이 기존의 피지배민족들에 대한 정복과 통치로의 편입이었다면, 레반트에 건설된 기독교 왕국들은 피지배민족에 대한 지배체제의 이식이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병진하는 두개의 쌍이고, 레반트로의 확장은 기독교 제국의 프로젝트였다. 혹독한 세월을 이겨내는 데 내권으로 응집성을 부여했던 교리가 외부로 발산할 때 그 잔인성을 드러낸다. 이는 동방식민운동에서, 레콩키스타에서, 내부에 대한 진압에서 재차 드러난다. 이후의 후스파 십자군 역시 같은 궤에서 이단을 정죄하려 했지만, 결국 참혹한 파괴를 낳고 이후 교회의 분열로 이어진다.
가득찬 달은 기우는 법이다. 세속에 깊숙이 개입하고 관여하면서 세속의 모순 역시 교회의 것이 되고, 통치자는 통치의 책임을 지게 된다. 군주제에서 책임은 군주의 계승을 통해 환원되지만, 교회는 집단적 전승을 통해 축적하는 구조이니만큼 그 모순 역시 누적된다.
로마로부터 로마의 쇠망, 동로마로의 이동, 이슬람의 발흥과 그로주터 중세가 떠오르는 과정을 약사로, 인물로 드러낸다. 이물에 대한 묘사를 통해 당대의 풍경을 생생히 드러내며 주요 집단의 특징을 잘 묘사하면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각각의 장을 통해 통치의, 군사의, 종교와 문화, 민족의 래이어를 쌓아가며 역사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형한다. 동로마에 대한 부분이나 이슬람에 대한 부분에서 새삼 통찰을 얻게된다. 특히 피트나에 대한 묘사가 이슬람의 분화에 대한 명확한 상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
브로델 책을 보면서 물질세계의 변화와 인구압의 추세가 문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있게 몰입한 후라 기후변동과 로마의 흥망, 그리고 역병을 연결하는 부분들이 구조적으로 유연하게 연결된 듯. 이제 2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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