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지배왕조와 정부에 맞춰 일관되게 정리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로부터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의 식민지 활동, 카르타고와 로마의 쟁패로부터 로마의 속주화, 제국의 붕괴와 서고트족의 틈입, 우마이야조의 지배로부터 레콩키스타를 거쳐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공화국과 프랑코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지리적 환경과 지역의 형성, 경제의 발달과 쇠퇴, 유럽 역내에서 지위의 변화가 반도의 삶에 미친 영향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낸다.
로마 속주 이후 합스부르크조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널리 다루어지는 주제가 아니라 잘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일국적 입장에서 이 부분을 정리하고, 이후 콜롬버스와 누에바 에스파냐 확장의 내재적 역량이 되는 부분들이 어떻게 축적되었는지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지방분권적 사회로써 스페인이 갖는 지역적 특성이 제국을 수립하는 기초적 역량을 축적하는 밑거름이 되어 누에바 에스파냐 전 지역에 대한 지배의 빠른 확립에 보탬이 되었다. 최초의 근세 제국으로써 스페인은 그렇게 성립된 것이다.
합스부르크조의 카톨릭 신앙의 수호자로써의 희생은 역사의 반동으로써 지닌바 역량을 모두 투입해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두번 증명함으로써 끝이 났다. 무슬림의 침공으로부터 수행한 방파제로써의 역할과 분열되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분투는 결국 스페인 본토의 내재적 역량마저 소진시키고, 강력한 지방자치를 국가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쓰였어야 할 역량을 외부로 투사하여 이후 이어지는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다.
부르봉 조에서의 중앙집권화 노력들은 시대에 조응하려는 스페인의 갈망을 잘 보여주었으나, 나폴레옹 시기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완패와 이어진 반도의 혼미는 누에바 에스파냐 대부분의 독립과 해양패권의 상실을 통해 반도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고, 할거한 지역과 정치는 누구도 패권을 쥐지 못한채로 오랜 세월 반도의 쇠락을 가속했다.
1898년의 미서전쟁의 패배는 이러한 쇠락의 마침표를 찍었고,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은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했다. 군부와 왕가의 밀착, 군부에 의한 지배는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화답이었고... 참혹한 내전과 패배를 통해 프랑코의 집권으로 이어진다.
공화파에 대한 프랑코의 숙청과 이후 이어진 2차대전, 그리고 전후의 고립과 경제성장, 유럽에의 편입을 통해 스페인은 다시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지만,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와 근래의 이민 유입은 새로운 우려를 낳고 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위치로써, 지역주의가 강한 국가로써 스페인이 역사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지리적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권 국가로써 군림할 수 있었던 내재적 역량, 그리고 오늘날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이후의 과정까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독서였음. 역사의 조연이 되어버렸다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하고, 그리스인들이 정착하고,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이 땅에 심어진다. 반도 동부의 풍요로움이 정착자들을 이 땅으로 이끌고, 이윽고 도시들은 번영한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손길이 이 땅에 뻗힌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전개는 역설적으로 이 반도가 카르타고의 온전한 세력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사군툼의 존재나 도시들과 맺은 협약이나... 로마가 진출하고 동부가 빠르게 식민화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존재하는 듯. 사군툼의 함락이 이베리아 사의 일부라면 이베리아는 역시 로마를 계승하는가...? 그런 맥락에서 카르타고는 스페인사의 어디쯤에 놓이는지.
로마에 대한 유럽인들의 집착은 로마의 가도를 보면 이해가 된다. 로마인들이 처음 구축한 도시들과 이후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확장한 콜로니들, 그리고 이를 잇는 가도들이 오늘날에도 각지에서 오랜 도시로 남아 살아숨쉬는 것을 보면 그 지리적 통찰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도판들이 아름답다.
기독교가 전래되고 반도 곳곳으로 전파된다. 주교가 생기고 로마 교구와의 관계 속에서 오랜 전통이 시작된다. 각종 광산업과 토지의 풍요로 성세를 누리던 이베리아와 로마 제국에도 쇠퇴가 엄습한다.
서고트족이 연방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훈족으로부터의 침입과 경제적 여건이 나은 토지를 찾아 제국으로 틈입하고, 발칸을 유린하고 이내 이탈리아 반도로 들이친다.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감행하고, 지배자의 죽음과 반도로의 정착, 비잔틴 제국의 수복과 후퇴가 이어지며 제국의 전 강역은 쇠퇴에 접어든다.
이슬람의 반도 진입. 우마이야 왕조 시대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의 무리가 반도로 진격하고, 처음 반도에 발을 딛고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반도 동안을 석권한다. 이런 전격적인 진격의 배경에는 그간 통치세력이었던 서고트족의 무능이 있었다. 당시 반도로 진입한 무슬림들의 규모와 반도 전체의 인구를 보면 이 대비가 이해된다. 무슬림의 진격은 카를 마르텔에 의해 피레네 산맥에서 막히고, 이후 후 우마이야 시대가 시작된다.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한 후 우마이야조의 설립과 이슬람 세계의 분열. 이후로도 파티마조의 성립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이슬람 세계는 3개로 나뉘게 된다. 반도의 우마이야조는 내재되어있던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의 갈등, 피지배 기독교도, 유대인과 무슬림간의 갈등에 더해 난립한 지역들의 지역주의로 3세기동안 몸살을 앓다 이내 해체된다.
반도 북부 기독교 왕국의 성립. 반보 북부의 지역세력과 서고트족 잔존세력이 아스투리아스를 세우고 기독교 왕국으로 남는다. 반도 북부는 예로부터 산이 험하고 교통이 좋지 않아 로마 시대에도 복속까지 장구한 세월이 걸린 지역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이 발흥하고, 카롤루스의 반도 원정이 시작된다. 반도 북부의 아바스계와 협력관계로 시작된 원정은 알-안달루스와의 전투 끝에 귀환을 맞이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바스크인과의 분쟁으로 많은 기사를 잃는다. 이거 약탈하다 칼맞은 거 아냐...?
이슬람 치하에서의 생산력 증대. 당대 무슬림은 중앙아시아와의 연결, 기술의 창달등을 통해 선진 문명을 구현하였고, 이베리아 반도는 그 수혜를 입고 다종다양한 산물을 생산하는 풍요로운 땅이 된다. 칼리프국의 붕괴는 각 지역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고, 장구한 레콩키스타의 막이 오른다.
나바라가 분열되고, 아라곤, 카스티야가 생긴다. 이 셋이 레콩키스타의 주역이 되어 톨레도로부터 세비야, 발렌시아, 이윽고 반도 전역으로 재정복을 이룩한다. 무슬림들의 지배왕조도 시기에 따라 빠르게 변한다. 무라비트 왕조로부터 알무와히드까지. 다양한 왕들과 왕조들이 반도에 교차한다.
엘 시드와 레콩키스타. 엘 시드는 양 진영을 넘나들며 무용을 뽐내고 그 와중에도 의리를 지키는 등... 여러 의미에서 레콩키스타의 복잡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다원적으로 구성된 스페인의 권력관계에서 신앙/지역/민족은 복잡하게 교차했고, 그런 허울은 부하들과의 관계, 섬기느누주군들과의 관계에서 넘나들 수 있는 얇은 장막이었다. 무라비트로부터 알무와히드로 지배세력이 바뀌고, 이베리아 반도는 다시 이들의 침략에 놓인다. 이를 막기 위해 기독교세력이 결집하고, 반도의 패권은 최종적으로 기독교에게 넘어간다. 이후 코르도바, 무르시아, 하엔을 거쳐 세비야까지 레콩키스타의 큰 장이 마감된다. 그라나다는 연공을 바치며 자신들의 권력을 존속한다.
알폰스 10세에 관한 예화. 이양반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되겠다고 돈 쓴거 빼면 법전 재정비해 스페인사 카스티야 어로 써 세계사 써 시 써... 국왕이 적성에 안맞았던 거 아닌가 새삼 생각한다... 콘비벤시아라는 이베리아의 다원성에 대한 관용은 국왕에 의한 융합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민족/종교 속에서 시민들이 화합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관용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크게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 두 지배세력이 갈등하던 양상에서 어느 한 쪽을 배제할 수 없는 토대가 그런 문화의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이종융합의 상징으로 과달라하라 산타 마리아 대성당이 제시된다. 발렌시아의 부유함은 유서가 깊은 듯.
15세기까지 일어난 경제적 변화와 왕조의 계승,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추방등을 통해 스페인이 어떻게 근세국가로 발전하는지 따라간다. 지중해-대서양 중개무역으로써의 스페인이라는 입지. 프랑스와의 교역, 잉글랜드 교역, 대서양 무역은 바스크 인들과 제노바인들에 의해 스페인 경제의 큰 축으로 작동한다.
안그래도 낮은 인구밀도는 목양에 대한 공급을 촉진하고, 이는 제도적 발전을 통해 메스타라는 전국단위 목양업체조합으로 나타난다. 역내 무슬림에 대한 경비 역시 조합의 영향력 하에 배치되며, 목양업자들은 경제의 한 기둥으로 성장한다. 양모의 공급으로 섬유산업이 발전하고, 플랑드르와의 교역을 통해 수출선이 확보된다. 메리노 품종의 독점은 18세기까지도 이어진다. 양 얘기만 줄줄이 이어지는 걸 보니 모직물과 섬유산업의 중요성이 새삼 실감난다. 이제 축융이라는 글자만 봐도 찌린내남... 이게 다 중세직업 잔혹사때문이다... 대항해시대 교역소는 완전 고증이군? 그리고 흑사병이 닥쳐온다.
흑사병의 전염성과 치명률도 문제지만, 다른 중세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이미 과포화된 인구와 이로부터 비롯된 저영양상태가 흑사병의 폭발적 확산의 배경이 되었다는 지적이 공통적으로 나온다. 흑사병은 인구에 치명타를 가했고, 이에 기인하여 마을과 산업의 최적화가 이루어진다. 전반적인 인구감소는 역설적으로 더 나은 생산성을 보이는 지역으로의 인구이동과 노동조건의 향상으로 연결되었고, 지배계급은 이에 대해 임금과 물가의 통제로 접근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두 정책이 성공했던 적은 없다.
트리스타마라의 엔리케가 페드로와의 골육상쟁 끝에 직접 페드로의 몸에 칼을 박아넣고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트리스타마라 왕가는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군주계통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이는 엔리케4세에게로 이어진다. 엔리케 4세는 통치의 기반을 닦고 산업을 융성시킨다.
계승권 다툼끝에 이복여동생 이세벨을 혼인으로 탈각시키려고 하지만 이세벨은 재치를 내 사촌과 혼인한다. 둘간의 사적인 관계와 상관없이 현실판 크킹을 마구 찍어주신다. 이내 엔리케는 갈등 화합의 과정속에서 정성이 가득 담긴 비소?스프를 먹고 영원히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그 뒤로 스페인이 탄생한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스페인이 펼쳐진다. 그라나다를 밀어내어 레콩키스타를 완성하고 콜롬버스의 항해에 후원하여 신대륙을 발견한다. 콜롬버스의 2차 항해까지는 충분한 후원을 해주었으나, 그의 통치능력에 대해 의구심이 든 이후에는 기존 스페인의 관료들을 보내 식민지배체계를 빠르게 구축한다.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거대한 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레콩키스타의 과정이 이질적인 지역에 대해 지배체제를 수립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끊임없는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내에 식민지의 권력관계를 파악하고 지배체계를 구축하고 안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경험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라나다의 함락과 함께 스페인 반도에 대한 종교재판과 유대인,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다. 개종이 아니면 추방이라는 선택지 아래 반도에 살던 25만 유대인 중 절반은 개종을 선택하고 절반은 부동산은 남겨놓고 추방된다. 그 와중에도 유대인의 습속을 유지하는 이들에게는 종교재판의 칼날이 내리친다. 초기 몇십년동안 1만5천명에서 2만명이 재판에 회부되고, 그중 1/3이 모형이든 본인이든 화형에 처해진다.
이사벨 페르난도의 결혼대전략이 펼쳐진다. 잉글랜드로는 카탈리나를, 후아나는 필리프에게, 이사벨 사후 페르난도는 나바라의 제르멘 드 푸아와 재혼하고, 우연과 우연의 연속 끝에 독일로부터 스페인까지, 누에바에스파냐와 플랑드르까지 모든 영토가 겐트의 카를, 카를로스 1세(스페인), 카를 5세(신성로마제국)의 손에 들어온다.
카를로스 1세에게 주어진 영토와 권한은 방대했으나 그의 목적을 이루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재위 초기 카스티야에서 일어난 반란과 수습과정은 그 모든 영토에 대한 지배에서 필연적으로 타협이 필요함을 상기시켜줬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이후 종교개혁과 신교 제후들의 이탈, 술레이만 1세와 무슬림들의 지속적인 세력투사, 영토의 통치는 그를 지속적으로 시험해왔다.
카톨릭 세계의 통합과 무슬림에 대한 방파제로써 그의 분투는 성숙한 관료제와 형제자매들의 지역장악력 없이는 성립불가능한 것이었고, 그정도의 체제와 영토로도 지속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고군분투는 누에바 에스파냐로부터의 자금으로도 감당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독일지역의 봉토를 페르디난트에게 분가해주고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시대와의 불화를 마무리한다.
펠리페 2세의 치세가 이어진다. 메리와의 혼인, 카톨릭 신앙의 수호자로써 영토 내에서의 이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그에게 수많은 전쟁을 부여했다. 플랑드르의 반란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전비를 소모했고, 오랜 적대자였던 오스만 투르크와 지중해에서 몇번이고 맞붙게 된다. 레판토 해전으로 오스만투르크의 흥기를 꺾어놓지만, 다른 전선은 여전히 그에게 출혈을 강요한다.
후계자는 결코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북유럽과 영국과의 관계는 메리 사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카톨릭들에 대한 지원으로 악화일로에 치닫는다. 무적함대는 플랑드르 전선에서 지상군을 싣고 진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북해의 풍랑 아래 함대의 절반, 병력의 대다수를 잃으며 귀환한다. 이후로도 영국과의 분쟁은 다방면으로 지속된다.
마닐라 갈레온에 투자하고, 식민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정수입을 확충했어도 그가 바랬던 카톨릭의 흥기는 오지 않았다. 카롤루스 1세나 펠리페 2세나, 시대와 불화하며 종교적 신념 아래 세상을 제 뜻대로 조각하려 했지만 시대가 따르지 않는다. 에스코리알 궁에서 서거할 당시의 그의 주변 풍경, 창문 너머로 보이는 대성당은 그의 재위기간에 대한 은유이다. 펠리페 3세는 선대의 전쟁들을 마무리짓고, 제국 전체에 대한 만기친람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제도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렇게 하나의 시대에 전환점이 도래한다.
펠리페 4세의 마지막 시대가 시작된다. 예술을 애호하고 다양한 편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올리바레스 백작-공작과 함께 쇠락하는 제국을 지탱한다. 집권 초기의 성세는 오래가지 않고 플랑드르에서 프랑스에서 전쟁은 이어진다. 이미 구멍나있던 재정을 보수하려는 시도는 아라곤과 카탈루냐, 포르투갈에서의 반발에 직면하고, 로크루아에서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의 양보와 함께 매듭을 짓는다.
인구의 유출, 전쟁으로 인한 소모로 농업이 쇠퇴하고 산업 역시 쇠락을 면치 못한다. 전체 인구의 20%가 줄어들 정도로 역내의 경제는 파멸적으로 치닫는다. 가격혁명과 과도한 전비 소모가 다방면으로 영토를 소유한 제국에 더욱 큰 치명타를 가한다. 카롤루스 2세의 즉위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을 의미하듯 의미심장한 조종을 울렸다.
겐트의 카를로부터 펠리페 4세까지 합스부르크 스페인 4대의 역사는 신대륙의 개척, 플랑드르 전쟁, 무슬림과의 대치, 그리고 카톨릭과 종교개혁이라는 주제 앞에서 스페인이 어떻게 분투하고 발전하며 결국엔 쇠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기간이다. 독일을 분가하고 레판토 해전으로 분기를 짓고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일단락을 냈어도 종교개혁과 신구교도간의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카톨릭의 수호자로써 합스부르크가 감내했던 의무는 이내 제국을 감당가능한 범위로 구조조정했다. 본토 경제의 쇠퇴 역시 제국의 운명과 그 흐름을 같이한다.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모리스코의 추방은 과연 종교가 무엇이길래 그 많은 희생들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인지 묻지않을 수 없게한다.
카를로스 3세의 집권과 함께 스페인의 고질적인 문제들, 지방분권과 이에 따른 권력의 누수,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지않는 구제도들에 대한 칼질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조선반도 사람들이 세금내기 싫어하는 것으로는 어느나라 못지 않지만 스페인 반도 사람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왕들이나 부르봉 왕조의 선왕들 모두 목적한 만큼의 세수확대에는 항상 난항을 겪어왔다.
목축업을 누르고 농업기반을 강화하고, 일련의 수입대체 산업화를 시도하면서 불만은 누적되고 이는 결국 저항으로 나타난다. 강한 저항운동에 직면하여 관료를 후위로 둘러내고 진용을 정비하며 예수회를 정리하여 마침내 스페인에서도 종교에 대한 수위권을 확보하고 대외 정책을 전개해간다. 미 연방에 대한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누에바 에스파냐는 미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너져내렸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인 듯.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고 혁명의 바람이 몰아친다. 고도이는 왕비의 총신으로 국정을 농단하며 프랑스와 협력관계를 추구하고, 스페인의 함대와 숙련된 인력을 모조리 수장시킨다.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의 갈등은 깊어져가고, 결국 나폴레옹의 손길이 뻗쳐온다.
카를로스 4세로부터 프랑스 통치기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불꽃같이 치솟았다. 부르봉 왕가에 대한 충성심과 민족감정이 합쳐져 스페인은 거대한 프랑스의 늪이 되었고, 나폴레옹의 패배와 함께 권좌는 페르난도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카를로스 4세가 어떻게 나폴레옹에게 권좌를 넘겨주었는지, 그리고 그의 치세동안 이루어진 제국의 해체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잊지않았고, 페르난도의 반동적인 통치는 이내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승계와 지배는 왕권을 넘긴 그 순간으로부터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페르난도의 사망과 함께 이세벨과 카를로스의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된다. 부르봉왕가 이전이었다면 살리카 법 외의 지역이었으므로 자연히 이세벨에게 승계가 이루어졌겠지만 부르봉의 집권 이후 들어온 살리카법은 계승구도의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스페인의 우파와 좌파가 저마다 꼭두각시를 앞세워 내전에 돌입한다. 내전이 종식되고 이세벨로의 승계가 마무리되었으나, 이미 스페인은 나폴레옹 전쟁과 이후의 반동, 그리고 내전으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렸다.
이세벨의 통치가 훌륭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3살에 즉위해 13살에 친정을 시작하고 섭정을 끼고 살았던 군주의 정치력은 기대할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다. 더불어 이어지는 난행은 적어도 계승자 풀은 충분히 넓혀놓았지만,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갈등의 폭발과 축적되는 모순, 체제 자체의 부패를 가리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이윽고 공화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외부에서 왕가를 수입해오고 또 오랜 혼돈을 거치다 알폰소가 왕위를 승계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도 비극적이었지만 부르봉 왕가의 면면들을 보다보면 군주제는 군주 그 자신에게도 비극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공감된다. 통치계급의 건전성, 그 중에서도 군주의 건전성은 대를 이어 유지하기 어려운 특성이다. 군주제에서 군주는 곧 국체이고, 그의 생활은 모든 것이 공적인 영역에 속한다. 시대의 변화와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물결이 확산됨에 따라 군주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져가고, 사회적 모순의 폭발하는 시기가 되면 화점은 곧 국체인 군주에게로 모인다. 이사벨의 하야와 망명, 다른 혈통 군주의 수입, 공화제, 부르봉 왕조의 복위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혼돈기의 스페인에서 정치적 아노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후 알폰스 13세가 즉위하지만 산업화의 후발주자로써 제국의 하락은 손쓸틈없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스페인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돈을 낳고 결국 1898년 미서전쟁의 패전으로 쿠바와 필리핀을 상실하며 해양제국으로써의 마지막을 알린다.
이 충격은 일련의 98세대를 양성하며 스페인이 놓인 현실에 대해 성찰하게 하지만, 이후 이어지는 정치적 혼미는 스페인을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몰아넣는다. 고도이로부터 1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스페인은 국가전략의 부재하에 역사의 조연으로 주변 강국의 등쌀에 이리저리 휩쓸려만 간다.
오르테가의 지적이 새삼 뼈저리게 느껴진다. 사회를 이루는 제 집단이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핵심적인 가치와 프로그램-강령-이 부재한채 '무척추동물'이 되어 역사의 흐름에 운명을 내맡긴다.
지연된 구체제가 유발하는 갈등은 좌파와 무정부주의자의 흥기를 낳는다. 스페인의 분권적 체제는 무정부주의가 흥기할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이 되었고, 아나키들은 대책없이 국왕을 쏘고 이사람 저사람 쏴대며 혼란에 기름을 붓는다. 그런다고 딱히 대책이 있지도 않고... 어느 한쪽도 다수파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는 와중에 알폰스는 군부와 손을 잡고 프랑코는 모로코에서 입지를 다져나간다.
근대로 올수록 스페인의 경로에 한국의 현황을 비추어보게 된다.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없다면, 어떤 조연이 될 지라도 결정해야 한다.
프랑코의 대두에 맞서 공화파의 저항이 이어진다. 하지만 원래도 모래알같던 단결이 어느날 갑자기 생길리 만무하다. 사회문제에 대한 개혁, 소련에의 지지여부, 소련의 편의적인 지원과 전선에서의 이탈, 총체적인 전략의 부재와 내전 상황에서의 분열 등이 맞물려 공화파는 하나하나 지역에서 함락당하고, 전투에서 양측 10만, 이후 이어진 숙청에서 20만의 희생자를 내며 프랑코 정권에 자리를 내준다.
프랑코의 정권은 팔랑헤당과 카톨릭, 근왕주의자, 지역의 기득권, 군부의 지지에 기반하여 사회를 한 줄기로 다듬어나가고, 나치 정권과 거리를 두며 유럽 각지의 대사관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탈출시키고 연합군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전후의 고립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근대화를 통해 도시화율을 높이고 인당 경지면적을 증가시키며 농업 생산성 개선에 나선다.
60년대 이후로는 유럽과 교류하며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경제성장과 함께 팔랑헤당의 전통적 지지층이 이반되고, 바스크 독립주의가 폭력적인 투쟁으로 분출하는 가운데 좌파 정당들이 오랜 혼미를 끝내고 공공연하게 세를 다시 결집한다. 공화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프랑코에 대한 반대가 국민 과반수를 넘나드는 가운데 옥좌를 차지한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을 거둔다.
부르봉 왕가 부활 이후 사회는 급격히 민주화로 선회하고, 공화주의를 부르짖었던 정당들도 카르테스에서의 당의 위치를 위해 선거로 결집한다. 1981년의 쿠데타 시도는 의회에 모인 제 정당들에게 헌법 수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경종이 되었다. 이후 제 정당의 집권을 통해 스페인 경제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EU의 일원으로 자리잡고, 높은 성장률과 고등교육률의 증가를 통해 저력을 일구어나간다.
구 식민지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개선하며 이민의 문호를 열고, 솅겐 조약의 체결과 함께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스페인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소의 경제적 혼란 속에서도 스페인은 과거의 혼미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다. 후안 카를로스 1세와 그 후계자의 결혼은 입헌 군주국의 장래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된다.
스페인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지배왕조와 정부에 맞춰 일관되게 정리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로부터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의 식민지 활동, 카르타고와 로마의 쟁패로부터 로마의 속주화, 제국의 붕괴와 서고트족의 틈입, 우마이야조의 지배로부터 레콩키스타를 거쳐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공화국과 프랑코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지리적 환경과 지역의 형성, 경제의 발달과 쇠퇴, 유럽 역내에서 지위의 변화가 반도의 삶에 미친 영향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낸다.
로마 속주 이후 합스부르크조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널리 다루어지는 주제가 아니라 잘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일국적 입장에서 이 부분을 정리하고, 이후 콜롬버스와 누에바 에스파냐 확장의 내재적 역량이 되는 부분들이 어떻게 축적되었는지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한 지방분권적 사회로써 스페인이 갖는 지역적 특성이 제국을 수립하는 기초적 역량을 축적하는 밑거름이 되어 누에바 에스파냐 전 지역에 대한 지배의 빠른 확립에 보탬이 되었다. 최초의 근세 제국으로써 스페인은 그렇게 성립된 것이다.
합스부르크조의 카톨릭 신앙의 수호자로써의 희생은 역사의 반동으로써 지닌바 역량을 모두 투입해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두번 증명함으로써 끝이 났다. 무슬림의 침공으로부터 수행한 방파제로써의 역할과 분열되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분투는 결국 스페인 본토의 내재적 역량마저 소진시키고, 강력한 지방자치를 국가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쓰였어야 할 역량을 외부로 투사하여 이후 이어지는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다.
부르봉 조에서의 중앙집권화 노력들은 시대에 조응하려는 스페인의 갈망을 잘 보여주었으나, 나폴레옹 시기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완패와 이어진 반도의 혼미는 누에바 에스파냐 대부분의 독립과 해양패권의 상실을 통해 반도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고, 할거한 지역과 정치는 누구도 패권을 쥐지 못한채로 오랜 세월 반도의 쇠락을 가속했다.
1898년의 미서전쟁의 패배는 이러한 쇠락의 마침표를 찍었고,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은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했다. 군부와 왕가의 밀착, 군부에 의한 지배는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화답이었고... 참혹한 내전과 패배를 통해 프랑코의 집권으로 이어진다.
공화파에 대한 프랑코의 숙청과 이후 이어진 2차대전, 그리고 전후의 고립과 경제성장, 유럽에의 편입을 통해 스페인은 다시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지만,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와 근래의 이민 유입은 새로운 우려를 낳고 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위치로써, 지역주의가 강한 국가로써 스페인이 역사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지리적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권 국가로써 군림할 수 있었던 내재적 역량, 그리고 오늘날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이후의 과정까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독서였음. 역사의 조연이 되어버렸다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