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중국사

<천국의 가을>, 스티븐 플랫

stingraykite 2026. 2. 2. 09:31

 
태평천국의 난은 근대로 접어드는 중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의가 있었을까. 한족 민족주의가, 외세의 개입이, 청 왕조와 향군의 건설은 이후 중국의 개혁에서 어떤 역동이 되었나. 그 많은 희생들은,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나.
1부. 황혼
1장. 선교사의 조수
테오도레 함베리와 홍인간의 만남으로 장은 시작한다. 객가인이던 홍수전이 과거에 여러번 낙방하고, 수험 실패의 좌절 속에서 환각을 보고, 교사생활을 하다 기독교 팜플렛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한다. 1844년으로부터 1850년까지 그는 배상제회를 세우고 지역의 객가들을 통합한다. 왜 배상제회는 생명력을 가진 정치운동이 될 수 있었을까.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의 작용이 그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적 서사구조와 세계관, 집단적 논리는 혈족기반의 부락들을 넘는 정치질서의 구축에 배경이 되는 공통이념을 제공하고, 상호호혜적 공동체는 기존의 혈족기반 공동체에 비해 외부 집단, 원주민 그리고 질병 등 당대 중국 내륙에 주기적으로 침범해오던 충격에 대해 강인한 인성을 갖는다. 전통 이데올로기와 신흥 이데올로기의 융합, 새로운 조직구조를 통한 정치적 확장성이 발흥의 씨앗이 된다.
홍인간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 본인의 유교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서양 문명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주위의 호감을 사며 안정적 관계를 구축하고 지식을 누적한 그는, 1858년 다시 태평천국으로 여정을 떠난다.
62, 67, 77p
2장. 중립
이야기는 제임스 브루스, 8대 엘긴 백작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웨스트민스터는 애로호 사건으로 2차 아편전쟁을 결의하고, 그는 연합함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떠난다. 식민지 관료들의 내면에서는 어떤 이중성이 발견된다. 주변부에 대한 경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에 대한 지배가 갖는 약탈적 성격에 대한 성찰, 출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갖는 정족적 성격에 대한 회의, 하지만 동시에 당대 주변부에서의 삶이 갖는 '야만'에 대한 혐오 등이 복잡하게 나타난다.
광저우에 대한 공격은 당시 광저우에서 일어나던 태평천국 동조자들에 대한 학살을 멈추는 부수적 효과를 냈고, 이들은 영국군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으로 만주족 왕조를 물리쳐달라는 기대를 보낸다. 다구포대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텐진에서의 조약을 통해 장강의 통행과 내륙에의 자유 여행, 개항장의 확대를 보장받는다. 장강과 내륙에의 침투가 왕조의 위엄에 미치는 영향, 황제를 숭상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중국 땅을 누빌 수 있다는 것이 끼치는 효과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경제적 침투만이 아니라, 외국인의 유입 자체가 통치 이데올로기를 부식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후 장강유역에서 이들은 태평천국과 조우한다. 그 조우가 평화롭지는 않았으나 과히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상호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태평천국은 이들에게 무기와 물자의 보급을 같은 '기독교인'으로써 요청하나 중립을 서약한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엘긴 경의 시선에서의 태평천국의 치세에 대한 묘사나, 당대 선교사들에 의한 태평천국의 인식은 그 모호성을 잘 보여준다. 다구포대 전투 뒤의 협상에서나, 만주족 관리들과의 접변에서 서양인들 역시 청 체제의 균열을 명징히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2차 다구포대 전투가 벌어지고, 승격림심의 준비와 이로 인한 원정의 실패는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다.
88, 100, 111, 121p
3장. 간왕
왜 홍인간에게 주목하는가. 그는 근대적 지식과 유교적 논리 하에 중국 체제를 분석하고 중국 체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선도적으로 제시한다. 서양 각국에 대한 지식 하에 법치와 시장,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양 제 국가와의 협력 속에 중국의 근대화에 매진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한족 민족주의를 골간으로 신정정치를 건설하고 청교도적 윤리 아래 중국 민족의 개조를 역설한다. 어떻게 보면 세계에 대한 인식 아래 중국 근대화의 청사진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다.
홍콩으로부터 장구한 여정 끝에 난징으로 들어선 홍인간은 난징에 포위되어 숙청을 거듭하며 지도력이 와해되어가던 와중 홍수전에게 간왕을 제수받고 2인자로 부상한다. 한족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청조 타도의 기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부상하던 서구인들에게도 합리적인 대안으로 비춰졌다.
그렇다면 태평천국의 현재적 전략은 어떠해야하는가. 포위를 해제하고, 난징으로부터 해안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고, 배후를 공고화하며 강남을 중심으로 한 남방제국을 수립하여 기초를 다진다. 서양 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안보를 구축하여 멸청의 길에 매진한다. 이와 같은 대전략 하에 이수성의 지휘로 포위 돌파와 항저우 점령이 시도되고 성공한다.
137, 151p
4장. 탐색
항저우를 함락한 태평천국군은 쑤저우로 진격하고, 이내 상하이를 궤적에 담는다. 조계지의 방어를 맡은 엘긴 경의 동생 프레더릭 브루스는 조계지만을 방어해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상하이 전체를 방어해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인도주의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는 상하이 상인들의 지원으로 외국인 용병부대 양창대를 결성한다. 군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웨스트포인트 입교가 거부된 그는 필리버스터(중미 미국 용병/개척자)로 활동하다 중국 대륙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지만 사관학교 짤린 사람의 지휘력 놀랍다 매복기동에서 술처먹고 고성방가하다가 걸려서 개털리고 성문 포격으로 함락시켜놓고 내부 치성에 포위당해서 부대를 전멸로 이끈다. 물론 이전 경력을 보면 지휘관으로써 능력이 부족했다기조다는 양창대에 충원된 인력들의 질적 수준이 조야했던 탓도 크고 고용주들의 조급함도 졸전의 원인이지만, 여하튼 달 안됐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총에 양볼이 관통되어 평생 하관장애를 달고 살았다고...
런던 선교회의 원로인사 조지프 애드킨스가 1860년 하반기 태평천국 당국과 접촉하기 위해 내륙으로 길을 떠난다. 홍인간의 홍콩생활에서 교우관계가 깊었던 친구 선교사 레그의 부탁으로 홍인간의 생사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애드킨스는 이내 태평천국의 중심부로 인도되고, 쑤저우에서 이수성을 만나 태평천국의 강령을 확인하고 그 운동의 열렬한 옹호자가 된다. 자유무역과 기독교 선교의 허용, 태평천국 치하에서의 도교 성상의 파괴, 그리고 외국인들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영국의 대중언론, <테이트의 에든버러 매거진>은 이를 반영하여 태평천국이라는 "새로운 권력과 평화를 모색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결론지었다.
162, 169, 179p
5장. 북방 임무
1860년의 보복이 결정되고 방대한 원정대가 다시 북경으로 출발한다. 동생 브루스는 태평천국군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역의 보장과 기독교의 전파, 상햐 공격에서 중국인 지구에 대한 점령과 평화적인 치안유지를 약속하지만 브루스는 중국에 대한 편견과 내란군에 대한 적대감으로 편지를 개봉하지도 않고 반송한다. 그러나 영국 영사 토머스 테일러 메도스는 중국 경험도 많고 중국을 오랫동안 여행했으며 자체적인 네트워크도 있었고, 태평천국의 성공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그는 저서 <중국인과 그들의 반란>에서 중국 역사는 지속적인 왕조 순환의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개입은 금기시되며, 천명의 이동을 중국인들이 순리대로 선택할 수 있게해야한다고 역설한다. 간섭의 실패는 '무정부상태 또는 내전의 연장'을 가져오지만, 성공한 간섭은 취약한 정부의 연장으로 이어지고, 취약한 정부는 부패한 정부이며 타락한 정주라고 역설한다. 이후 청조의 흐름을 보면 정확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 태평천국군의 상하이 공격은 서신에서 언급된대로 중국인 지구를 향해 이루어졌지만, 브루스는 이들을 막아세웠고 공격은 성공적으로 격퇴된다. 그러나 이는 태평천국에 우호적인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초래한다. 내전에 대한 영국의 개입은 즉각적으로 부패한 왕조에 대한 수호이기도 한 것이다.
새롭게 준비된 병력이 다시 다구포대를 공격하고 다구포대는 함락된다. 화약고의 폭발에도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고, 연이은 포격으로 포대는 침묵한다. 아무도 탈출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포대 문이 밖에서 막혀있었던 것이다. 이내 협상이 준비되지만 함풍제는 협상단을 납치하라고 명령하고, 연합군은 만주팔기를 맞아 처절하게 패퇴시킨다. 함풍제는 열하로 파천하고, 고위 귀족들은 저마다 수단을 구해 베이징을 빠져나간다. 시민들만이 남겨져 약탈에 대비한다. 전제 왕조국가는 왕조만 남으면 산다. 백성이야 살건말건 알바냐 이거지.
베이징을 점령하고, 이화원을 약탈하고, 포로를 돌려받았으나 26명이던 포로는 수감기간중 15명이 죽는다. 포로간수 참 잘했다 그죠. 연핮군른 이에 대한 포상으로 이화원 방화한다. 과연 청조는 이 이후로도 중국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실원림과 수도를 지키지 못한 왕조는 생존할 가치가 있나. 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의미를 글을 읽으면서 새삼 되새겨보게 된다.
191, 197, 207, 215p
2부. 질서의 재건
6장. 다루기 힘든 장군
증국번이다. 소년대성하여 한림원에 들어가고, 지방 시험감독 한번에 수험생활 빚 청산하며 학사로써 일한다. 모친의 상에 고향으로 내려가고, 후난에 태평천국군이 흥성한다. 황상은 그에게 교지를 내리고, 그는 무거운 책임에 반려의 상소를 쓰지만 그에게 기대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의 만려는 상소를 찢게한다. 무거운 책임에도 그는 친족들을 중심으로 군을 구성한다.
태평천국에 대항하는 증국번의 논리는 유학, 전통의 수호와도 맞닿아있었다. 한족 민족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는, 태평천국이 담지한 기존질서의 파괴, 유학으로 대변되는 향촌 자치질서의 붕괴와 무정부적 약탈로부터 지역을, 자치질서를 수호하자고 호소한다. 그의 군 역시 향촌의 가족을 기반으로 모집된다. 강변 사람과 도시 사람에 대한 그의 편견은 어느정도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다.
향촌사회를 기초로 한 동질성과 책임감이 그의 군을 구성하는 주요 원리였고, 지도부는 혈족으로주터 혈족으로, 신사층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전통 네트워크를 그대로 준용했다. 철저한 신상기록은 전장에서 도망치면 필히 처벌이 따르리라는 향촌질서를 일깨워줬고, 그에 걸맞는 공정한 포상 역시 그의 군을 승리로 이끄는 주요 원동력이었다. 기존 녹영군의 자급자족적 행태와 지역에 얽매인 관할의 행사 역시 증국번의 호남군이 전통 군에 비해 유의미한 결과를 거둘 수 있는 원인이었다. 물론 천생 문사인 그가 반드시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기반한 연대감은 그의 군을 강인하게 유지시켜주었고, 우창을 점령하며 이는 빛을 발한다.
증국번은 군율의 중요성을 알고, 문자를 모르는 보병들을 위해 이를 노래로 만들어 전파한다. 민사작전의 중요성이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한 호남군이 병력을 전개하고 보급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사안이었고, 결국 군이 장기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역민의 지지가 뒷받침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군이라는 것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될 수 없는 저간의 사정 역시 갖고있다. 자기 고향인 호남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총칼을 들지만, 호남성 밖으로 진출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설득작업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가능한 명령은 받고, 불가능한 명령은 의뭉을 피우며 뭉게면서 증국번은 대전략을 설계하고 이를 자신의 호남군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납득시킨다. 호남을 지키기 위해 징더전과 장강 전체에서 방어를 굳힐 필요가 있고, 그에 따라 병력이 배치되어야 하며, 태평천국군과 염군 등 각각의 반란세력에 대한 맞춤형 전략으로 이를 진압해야한다고 통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희생은 불가피했다. 동생과 고향사람들의 죽음과 여러 실패는 그를 여러차례 자살시도로 몰아넣는다. 그의 동생들 역시 장렬히 산화한다.
안칭에 대한 포위를 굳히고 태평천국에 대해 봉쇄를 구축하던 그에게 한가지 소식이 전해진다. 1860년 11월 6일 오후, 황실원림은 불타고 황제는 몽진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제는 팔기도 녹영도 패퇴하고, 중화 전토에 관군 비스무리한 건 그의 군 뿐이라는 사실을.
242, 251, 258, 267p
7장. 교리의 힘
태평천국의 기독교제국으로써의 가능성은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남경에 머물던 이서카 로버츠는 태평천국의 선전가가 되어, 기독교 제국으로써 태평천국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증국번의 지적, 전통적 요소를 결락한 태평천국의 이질성에 대해서도 홍인간은 반박한다.
함풍제의 청은 막대한 배상금과 전통적 수입원이었던 토지세의 5분의 4가 태평천국군에게 막히며 개항장을 통한 관세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된다. 이는 청과 외세 간에 이해관계의 일치를 구축하고, 공존의 가능성을 드리운다.
프레더릭 브루스는 반란군에 대해 경멸적인 시선을 고수하지만, 그의 형 엘긴 경은 그에게 더 열린 마음을 갖기를 권한다. 2차 아편전쟁의 전개와 그 과정에서 드러나 청 제국의 이질성은 엘긴 경으로 하여금 태평천국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했고, 반군과 접촉하지 말라는 청군의 요구를 무시할 것을 촉구한다.
태평천국의 확산은 무질서의 확산이기도 했다. 태평천국군의 군율이 타이트했다고는 하지만 질서의 개편은 필연적으로 치안의 붕괴와 이에 부화뇌동하는 탈영병들의 난행을 불러온다. 농민들은 질서의 복원을 염원한다. 태평천국군은 전족의 금지와 변발의 금지, 아편의 금지를 미롯한 생활의 규율을 다시 썼지만, 그 엄격한 적용이 이루어지기에는 향촌사회의 완고성이 더욱 강했다. 누구나 아편을 피우는 시대에 아편을 사형으로 다스린다면 다스릴 사람이 남지 않을 것이었다.
태평천국의 향촌질서는 기존의 과거제에서는 지배 엘리트에 편입되지 못하던 사람들을 포섭하여 동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농민 상인 두부장수 직조공 무술사범등이 이들의 새로운 관리였고, 태평천국의 과거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이 등용된다. 초기에는 성경에 대한 이해력을 중점적으로 확인했지만, 이후 유학 경전에 대한 시험 역시 체제 내로 편입된다.
홍인간은 다양한 팜플렛을 통해 태평천국의 지도이념을 재정립하고 친서구적인 근대화를 목표로 제시한다. <영걸귀진>에서 그는 유학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족 민족주의와 전통적 체제에 대한 융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어 그마저도 전장으로 출진하게 된 날, 그는 선교사 뮤어헤드에게 귓속말한다.
"뮤어헤드씨,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이제 앞부분을 넘겼다. 태평천국의 중심적 인물들과 이에 개입했던 영국과 서구의 인물들, 선교사들 개개인에 대한 사적인 증언을 조합하여 그들의 내밀한 일면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태평천국이 중국 근대사에서 갖고있는 의미를 재조명한다. 그 많은 사람들은 어떤 뜻을 품고 싸웠으며, 그것은 이후 중국의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나. 홍인간과 증국번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근대의 수용이 어떤 방식으로 체계화되었는지, 동도서기와 탈아입구는 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었는지 따라가보는 여정이기도 하다.
엘긴 경과 프레더릭 브루스, 선교사들의 양자에 대한 인식 역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궤 안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틀로 저마다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를 넘어서, 내전이라는 비극에 대한 각자의 입장이 각각에게 영향을 미치며 복잡하게 얽혀들어간다.
279, 304p
8장. 문명의 위기
이화원의 참변에 대해 비난이 쏟아진다. 요는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빅토르 위고를 위시한 지식인들, 반대파들의 비난 속에서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는 논한다.
"장담하는데, 여름 별장과 정자들로 이루어진 그곳, 내가 어떤 행동 을 취하기도 전에 이미 내용물을 약탈당한 그곳. 중국 황제의 여름 궁궐이라는 위엄 있는 이름을 가진 그곳을 파괴한 것에 대해 저보다 더 진심으로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중국에 또 1년간의 전쟁이라는 재앙을 안겨주는 것 말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제가 품고 있는, 영국군이 품고 있는, 그리고 이 모임에서 감히 말씀드리는데 우리 나라 국민이 품고 있는 느낌 -만약 우리의 응징이 없었다면 극악무도한 범죄가 중국에 있는 모든 유럽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을 것이라는 느낌ㅡ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저는 부자언스럽지 않은 어떤 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어려운 의무률 이행할 것인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 선택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지만, 책임있는 위치에서 국왕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가 제시된 상황에서 망설일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공친왕이 나타난다. 황제의 형제로 친왕이 된 그는 위기의 상황에서 정부를 위임받는다. 조약을 마무리하고 황제의 귀환을 요청하지만 함풍제는 이를 거부한다. 오히려 조약에 대해 그를 탓하며 열하에서의 체류를 늘린다. 이 틈을 타 러시아는 공친왕에게 접근하고, 파병을 제안한다. 점령한 반군 도시의 재물을 반으로 나누고, 절반은 제국에, 나머지 절반의 3/5는 자신들에게, 2/5는 향군에게 주기를 제안하고, 공친왕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증국번은 이를 신중하게 검토한다.
그레이 백작(3대)의 영국의 개입에 대한 의견 역시 중국의 상황과 태평천국에 대한 인식에서 중립에 가까운 불개입을 표방한다. 프레더릭 브루스가 쑤저우에 대한 청의 파병요청에 응하지않은 것은 칭찬하지만, 이후 상하이에 도착한 태평천국군을 향한 그의 공격은 비판한다. 민란이야말로 전제정부에 대한 중국의 역사적 견제였다는 점에서, 청의 편에 선 개입은 결과적으로 무정부적 비극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사업가들 역시 자유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태평천국을 지지하기도 한다. 존 스카스는 중국에서 10년간 상업활동을 하다 귀국하며 "우리 전쟁은 만주족과의 전쟁인가 한족과의 전쟁인가?"라는 팜플렛을 통해 정복왕조로써 만주족의 지배와 이에 대한 대중적 반란, 혁명으로써 이를 민족주의적 저항으로 연결시킨다. 윌리엄 헨리 사이크스 대령 역시 같은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충왕은 "상업과 종교 모두에서 디할 수없이 큰 우정과 화합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태평천국은 "중국의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고. 타타르족 축출과 우상 숭배 폐지와 기독교 도입을 서약한, 반기를 든 민족 집단"이라고 그는 결론 내렸다. 즉, 그 모든 것이 영국이 옹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태평천국의 치세는 어떠하였나. 파크스는 양쯔강 유역에서의 무역을 위해 난징을 방문하고, 포레스트는 태평천국의 영토를 걸으며 느꼈던 바를 적는다. 강변의 해골을 넘어 내륙으로 갈수록 대체로 방임되고있는 농민들이 있고, 향관에 의해 질서가 새로 구축된다.
315, 328, 339, 348p
9장. 인내

안칭공방전을 두고 양군의 기동, 주요 장수, 사건의 전개, 파크스와 프레더릭 브루스의 개입을 통해 태평천국군의 특성과 응집력, 이에 대한 호남군의 대응, 그리고 영국의 개입이 전세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안칭은 장강 물류의 핵심으로, 난징으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지키기 위한 맥점이었다. 증국번은 안칭에 대한 포위를 시도하고, 다륭아는 기병들을 이끌고 이를 보조하며 증국전과 증국번의 군이 포위와 태평천국군과의 대응을 주도한다.
징더전으로부터 안칭 강안까지 이어지는 호남군의 보급선과 안칭을 넘어 황저우, 한커우, 한양까지 이어지는 장강 상류에 대한 통제권을 두고 양군은 격돌하고, 다륭아의 기병대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찬단을 내린 영왕은 몇만단위의 군세로 11일만에 320km를 행군하며 거대한 우회기동을 성공시키고 황저우를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파크스의 한커우, 한양에 대한 공격의 제지는 기세를 놀리던 태평천국군이 승기를 살리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안칭에 대한 외국 선박의 지속적인 보급은 태평천국군의 수비를 지속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증국번은 이에 대해 프레더릭 브루스에게 상인들의 이적행위를 제지할 것을 요청하고, 프레더릭 브루스는 이를 수행한다. 증국번은 여러 공방에도 불구하고 증국전과 함께 안칭에 대한 포위를 굳히고, 이윽고 안칭은 점령당하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주륙당한다. 긴 포위의 결과 안징의 시장에는 인육이 걸려있었고, 그 가격은 한근에 은화 반냥이었다.
10장. 하늘과 땅.
함풍제의 죽음은 왕조의 쇠망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군주국가에서 군주의 짧은 수명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말기 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소한 후계자의 원할한 통치를 위해 고명대신으로 숙순, 재원, 목음, 단화 외 8명이 선택되고, 성모황태후인 예허나라씨, 서태후와 모후황태후인 동태후가 인장을 쥐고 거부권을 갖는다. 고명대신들과 양 태후의 불안한 동거는 환궁과 함께 청산되고, 서태후의 주도 아래 공친왕이 수석고문을 하는 새로운 통치체제가 수립된다.
실패한 원정 이후 홍인간의 지위는 위협받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홍수전의 명을 출납하는 직위로부터 홍수전의 아들에게 밀려나고, 이내 선교사들이 일으키는 사건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고 외교 담당에서도 직위해제된다. 조사이아 콕스와의 만남에서 그가 그간 겪었던 세월의 풍상과, 내부 권력투쟁이 남긴 상흔이 드러난다. 홍인간은 종종 홍콩에서의 만남에서 보여주었던 명민한 모습들을 드러냈지만, 그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콕스의 지적에 대해 씁쓸하게 대답한다.
"땅에는 왕이 많이 있지만, 하늘에는 그들의 자리가 없지요."
410, 417p
11장. 교차
마르크스의 불길한 예언처럼 태평천국의 난이 영국의 지배적 지위를 교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확실히 그러했다. 남북전쟁으로 목화 수급이 교란되고 면포의 생산단가가 올라가자 중국과의 교역에서 문제가 생겼고, 섬유 무역의 가치는 1861년으로부터 1862년까지 가치의 3분의 2를 잃고 계속 감소한다. 미국 시장의 교란은 미국 차 수요의 감소로도 이어졌고, 영국 상업세계의 충격으로, 섬유산업의 대량실업으로 나타난다.
남부연합에 대한 교전국 지위 부여는 태평천국에 대해서도 동일한 지위를 부여해야한다는 논란으로 이어진다. <타임스>로부터 스코틀랜드 하원의원 알렉산더 던롭까지, 무기의 거래로부터 대등한 상대국으로써의 인정을 포함하는 일련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이어지지만, 파머스턴과 러셀은 기존의 중립에 대한 입장을 고수한다.
한편 이수성은 절강성을 장악하고, 항저우를 함락하며 개항장인 닝보를 향해 나아간다. 프레더릭 브루스는 이에 대해 대처하고자 호프 제독을 파견하여 닝보의 방어태세를 점검하지만, 결국 닝보는 태평천국군에게 떨어지며, 이들이 개항장을 점령하면서 외국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교전을 관리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그러나 해리 파크스 경은 개항장에 대한 태평천국군의 접근 금지를 요구하는 협상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받았고, 프레더릭 브루스의 태평천국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와 함께 본국으로 귀환한다.
2부 내내 태평천국에 대한 묘사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은 이들이 폭넓게 신병을 모딥할만큼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11일간 320km의 우회기동을 통해 청군을 격파하고 거점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대 태평천국군의 응집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장장 십오년을 이어진 운동이라는 것이, 난징을 그 오랜기간 유지한 통치라는 것이 지닌 저력에 대해 되새겨볼 수 있었다. 내전은 양 진영에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근대성을, 중화민족을 주조해나간다.
427, 444p
3부. 위대한 평화
12장. 배수의 진.
유일하게 기능하는 부대로써 증국번의 위상이 높아지고, 서태후와 공친왕은 그에게 안휘, 강서, 강소의 총독자리를 준다. 세 성의 순무에 대한 임명권한이 증국번에게 집중된 것이다. 세수로부터 행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종심급을 부여박으며, 그는 이홍장을 그의 후계자로 낙점하고 안휘군을 구축하도록 허여한다.
왜 좌종당이 아니라 이홍장이었는가. 이홍장은 그의 직계 제자였고, 부모로부터 이어지는 연이 있었다. 증국번은 그의 스승으로써, 가족간의 연으로 아어지는 의삼촌으로써 그에게 의발을 전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망을 누르고자 군에서 다년간 수련을 거치게한다. 안휘성에서 이홍장은 호남군의 조직원리에 따라 안휘군을 전통적 질서체계에 따른 책임있는 군으로 조직했고, 좌종당과 함께 군의 일익을 담당하며 난징에 대한 포위를 전개한다.
이 시기에 중국같은 이역만리로 선교를 온다는 건 투철한 신앙심과 옹고집으로 무장한, 전통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독특한 품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반군의 질서에 순응하고 격식에 맞춰 행동하기를 자라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홍인간의 지위 추락에 맞춰 마지막 선교사 이사카 로버츠마저 그의 곁을 떠나가게 된다. 그 결말에 대해 이사카 로버츠는 홍인간의 포악함을 강조하지만, 드러난 사실은 이와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해리 파크스의 증언과 더불어 상해에 대한 점증하는 반군의 위협은 여론을 돌아세우기에 충붐했다.
양창대의 필리버스터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 역시 지난 실패를 딛고 상해 자본의 협력 하에 은행가들과 혼맥을 맺고 중국인을 기반으로 한 상승군을 조직하며 군사적 역량을 재고한다. 충실한 훈련과 튼튼한 무장으로 전투력을 혁신한 상승군은 상햐 방어에서 전과를 올리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왜 상해였는가. 상해의 역사는 다른 중국의 도시에 비해 짧지만, 장강의 말단이자 1차 아편전쟁의 개항장으로 지목되며 장강 벨트를 관통하는 상업의 중심으로 도약하고, 관세수입만으로 장강 벨트를 지탱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증국번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1000만의 인구와 100억의 재물, 구체적으로는 한달 50만냥의 세수가 그 단편으로 드러난다.
태평천국군과 외부와의 우호가 단절되고, 호남군과 안휘군, 상승군이 조직되고 전력을 갖춰나가며 전세는 비로소 역전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전략 역시 혼란 끝에 한 방향으로 맞춰지고, 그 변곡점은 닝보에서의 충돌로 드러난다. 예포사격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지고, 러셀 경이 태평천국의 개항장 점령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여 서신으로 보내며 로더릭 듀 대령은 외국 정착지를 겨냥한 포대를 철거하지 않으면 영국과 태평천국 사이에 전쟁의 상태가 있을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시작된 포격으로, 전쟁 상태가 시작된다.
463, 479, 486p
13장. 뱀파이어
닝보의 점령은 태평천국군과 동조자들에 대한 청국군의 학살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학살을 목격한 영국군들의 증언은 인구에 회자되며 영국에 의한 무력개입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러셀과 파머스턴에 의한 개입은 지속되고, 태평천국군은 안칭에서의 패퇴와 닝보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전선이 축소되어간다. 영왕 진옥성은 휘하 장수의 배반으로 잡혀 처형된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기 대오에 대한 책임을 아는 사람의 유언이었다.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하늘의 뜻이며, 내 과거에 대해서는 말할만한 것이 없다. 나는 오랫동안 승전의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누려왔지만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고 싶다. 태평천국에게는 나 한 사람을 잃는것이 마치 그 왕국의 산과 물이 반으로 줄어든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내 왕국에 큰 은혜를 입었으며,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패배한 장군은 목숨을 구걸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취하의 40명의 병사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백전노졸이고. 나는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너회는 내가 저지른 죄를 들어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아도 되지만, 이 죄는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국과 청, 호남군과 안휘군간의 연계가 강화되고, 증국전은 증기선을 주문하며 자체적인 기술력으로 외륜선에 대한 복제을 시도하여 1년만에 완성한다. 동부 전선과 서부전선 양편에서 포위가 조여가며, 상승군과 이홍장, 영국군의 협력은 강화되고 영국군의 포함에 의한 중포사격은 도시들에 대한 전격전의 핵심이 된다. 더하여, 태평천국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주류적 시각에 의해 정련된 정보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청 왕조는 영국에 함선 구입을 요청하고, 파머스턴 정부는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규제를 조정하여 영국군이 청 제국 내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법적 예외를 설정한다. 자유당의 사이크스 대령등은 이를 비판하지만, 영-중 연합함대는 중고선 개수를 포함하여 1년만에 유효한 전력으로 구축되어 파병된다. 소위 '뱀파이어 함대'의 결성이었다.
512, 522, 537p
14장.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곳
태평천국은 수만은 피난민을 발생시켰고, 이들은 상하이나 다른 조약항 등 안전한 지역으로 피난한다. 인구밀도가 올라가고, 물가의 상승과 함께 역병이 덮쳐온다. 조계지와 그 외곽에서 매일 수십, 수천의 사상자가 나고, 콜레라는 북으로, 서로 퍼져나간다. 상대적으로 조방적인 태평천국 점령지대는 역병으로부터의 피해를 적게 받을 수 있었지만, 호남군과 안휘군의 주둔지는 높은 감염률과 사상률로 전체 인원의 30~50%의 손실을 기록한다. 콜레라가 끝나고, 상해 주변 60km 반경 내의 인구는 이전에 비해 1/8이 줄어든다.
충왕 이수성은 다시 수습한 병력으로 난징에 대한 포위망의 중핵인 증국전의 위화타이에 대한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태평천국군은 다대한 인원에 대한 보급을 지탱할 수 없었고, 증국전의 호남군은 지속적인 보급과 탄탄한 요새의 방어력에 힘입어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45일간 분투를 이어나간다. 증국전은 동생에 대한 걱정에 만주적 기병 지휘관 다륭아로 하여금 이를 보조하도록 권하지만, 그는 사천과 청해에서의 회족 반란을 진압하도록 배치된다. 길고 긴 분투는 여러번의 고비를 거치며 연락을 기다리던 증국번의 정신을 마모시켰지만 증국전은 결국 버텨내었다. 그러나 그의 또다른 동생 증국보가 장티푸스로 사망한다.
543, 552p
15장. 피와 명예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는 꽤 오래 살았고 상승군의 지휘에도 후반에는 꽤 역량을 발휘했지만 행운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유언으로도 돈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필리버스터들의 기상 알만하다. 이후로 몇몇 지휘관이 거론되지만 에드워드 포레스터는 포로로 잡혔을 당시의 혹독한 고문으로 반 폐인이 되다시피했고, 헨리 앤드리아 버지빈은 훌륭한 필리버스터답게 임금체불이 몇달간 지속되자 쩐주인 상해의 은행가 양방을 정면에서 후려치고 돈을 강탈해서 현상금이 걸리고 이홍장에게 추적당한다. 그러고도 북경까지 기어가서 미국대사에게 사정하여 그에게 상승군의 지휘권을 주여해달라고 하지만, 프레더릭 브루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프레더릭 브루스는 태평천국군에 대한 반군이라는 인식과 웨스트민스터로부터 온 무역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치안유지라는 정언명령을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찰스 고든이 장교로 임명되고, 그는 이내 3천명의 기강 해이한 상승군을 바람구멍도 내주고 기강도 잡아가며 벼려내고, 이윽고 상해 전선에서 큰 진전을 이루며 주요 맥점인 쑤저우를 향한다.
증국번의 안칭 사령부에는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은 중국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예일대학 졸업생인 용굉은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태평천국 치하의 장강 상류로 침투하여 홍인간과의 대면으로 통행증을 얻어내고 성공적인 무역루트를 개척하기도 했던 그는 증국번과의 면접을 통해 지휘부에서의 일을 담당하게 되고, 호남군에 필요한 무기제조를 위한 설비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한다. 매판자본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겠다.
뱀파이어함대는 중국에 도착하지만 오즈본의 제독 지위는 증국번에 의해 박탈당하고 그는 부장의 지위를 허여받는다. 백인 장교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뭐 어쩔꺼야 함대는 증국번이 접수한다. 함대를 장악한 증국번은 이를 통해 양쯔강 전체의 수운을 통제한다.
고든은 쑤저우로 진출하고, 포위의 과정에서 태평천국군의 주요 지휘자들과 접촉하여 모반을 종용하고 그들의 신변을 보장한다. 음모는 성공하고 쑤저우의 성문은 열리지만 이홍장의 진입과 함께 성내에서 총성이 들린다. 협력자들은 처형당해 토막나고 고든은 명예의 상실과 배신에 분노한다. 이는 영국 본토로도 전해져 파머스턴 정부의 개입에 대한 거대한 반대여론을 형성한다.
이는 중국 전선에서의 최종결정권이 중국에게 있음을(당연하게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중국에 대한 개입이 단순한 조력과 이를 통한 무역의 확장이 아니라 직접적인 지배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반대이기도 했다. 참 식민지 가성비있게 굴리려고들 용들을 쓰고있다. 과도한 개입에 족쇄가 걸리고, 프레더릭 브루스의 계획은 실패한다. 여하튼 대중국 무역 총수입 액수는 세배로 튀겨졌으니 파머스턴 보시기에 좋았더라.
561, 572, 584p
16장. 산을 넘다.
서부전선에서,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태평천국군은 지속적으로 패퇴한다. 전선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손에 그러모은 증국번의 지휘아래 이홍장은 동부전선을 정리하고 증국전은 난징에 대한 포위를 굳힌다. 주요 전장이 된 안휘로부터 강서, 절강, 호북, 강소성은 잦은 내전으로 초토화되어 기근이 일상화되고 잔인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동시에 농민들 역시 고갈되어 더이상 반군을 지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말라비틀어졌다.
1863년 연간 난징에 대한 포위가 완성되어가고, 이내 난징에 대한 공략이 시작된다. 난징에 남은 인구는 3만으로, 이전의 성세에 비하면 텅 비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병사는 1만으로, 텅 빈 난징 성 북부를 개간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한다. 지속적인 땅굴 공격, 성안을 감제할 수 있는 고지의 확보와 포격, 땅굴작전을 통한 성벽에의 공략이 이어진 끝에 1864년 7월 19일 성벽은 무너지고 상군은 난징을 점령한다. 홍수전은 이미 죽은지 몇주가 지나있었고, 난징의 주민들에 대한 초토화가 시작된다. 충왕 이수성은 홍인간과 함께 유주를 챙겨 도피행에 나서고, 이수성이 먼저, 홍인간은 강서성 남부로 수백km를 도주한 끝에 광동성에 거의 다다라서 잡힌다. 홍인간은 도주했지만 도주한 곳에 더는 길이 없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1850년으로부터 1864년까지 15년간 지속되었고, 난징을 함락한 1853년으로부터 보아도 12년간 장강 유역에 대한 통치력을 행사했다. 전체 과정에서의 사망자는 그간 2-3천만으로 추산되었으나, 기근, 역병등을 포함한 직접사망자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5,700만까지, 전란으로 태어나지 못한 인구통계상의 공백을 포함하면 1억 가까이의 생명에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1850년의 인구는 20세기 초반이 되어서도 회복하지 못한다. 호남으로부터 안휘, 절강, 강서, 강소, 호북 6개성은 이후로도 피해에서 복구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다. 찰스 고든,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가 반군 진압을 위한 동서 연대의 상징으로 표상되는 것에도 일말의 정당성은 있다.
그렇다면 영국은 이 개입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전쟁기간동안은 양측에 물자를 판매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이후 평화기에 접어들며 무역흑자는 축소된다. 파머스턴의 개입 역시 답은 아니었던 셈이다. 전쟁을 통해 구축된 군벌은 이후로도 청 왕조의 통치를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전통적 체제 하에서 근대화를 위한 노력들은 사산되고 청일전쟁을 거쳐 신해혁명에 이르르며 지속적으로 역량은 분산되고 지방에는 상계군벌로부터 북양군벌, 그리고 기타 등등까지 저마다 군벌이 득세하고 대륙은 혼란으로 빠져든다.
왜 증국번은 스스로 황제의 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사실상 강남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고, 그가 주창한 한족 민족주의, 전통을 존중하는 동도서기의 정신으로 왕조를 쇄신하는 것은 가능했고, 또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선택하지 않는다. 이 또한 유교적 '당성'이리라. 지난 내전의 상처가 그에게 남긴 흉터와, 황제라는 지위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는 그의 긍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왕조는 그의 충성을 모욕하고 결국 회한속에 증국번은 죽음이라는 안식을 맞는다. 그의 두 제자, 좌종당과 이홍장은 각각 왕조를 위해 멸사봉공하지만, 이후의 군벌들에게도 그런 지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시대는 이로부터 서서히 다음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평은 태평천국에의 개입을 반대했던 이들, 선교사들로부터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 자유당의 사이크스 대령까지 이 전쟁을 스쳐간 많은 이들에 맞닿아있다. 그는 말한다.
"서양인, 특히 영국인들이 중국과의 모든 관계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만주족을 도와 태평천국의 반란을 진압한 것입니다."
600, 610, 623p
태평천국의 난은 청조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한계에 달해 일어난 일이면서, 그 자체로 근대성의 맹아를 품고있기도 했다. 민중의 자발성 없이 태평천국 규모의 반란이 그토록 오랜 기간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초기의 승세 이후 자체적인 내분과 통치능력의 한계는 그 확산을 위축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지만, 홍인간으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 작업은 언어화되지 못했던 태평천국 운동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치적 격변이 낳은 참상은 신사계층과 향촌사회의 반발로 나타났고, 이들 역시 자신들의 관점에서 군벌로, 매판자본으로 근대성의 씨앗을 품고 내전을 통해 서로를 벼려간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청조의 권위를 수습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는 다양한 인자들, 제임스 브루스로부터 프레더릭 브루스, 선교사들, 본토의 반대파들과의 역동 속에서 결정된 과정이었다. 결코 파머스턴과 러셀의 대계가 집행된 결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식민 제국으로써의 영국은 어떤 나라였나. 동인도회사의 인도 경영으로부터 세포이항쟁과 인도에 대한 직접 지배는 다양한 층위의 사건이 겹친 결과이기도 하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이는 재차 드러난다.
이를 집행하는 식민지 관료들 역시 복잡한 관점의 총체들이다.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는 오리엔탈리즘을 강하게 갖고있으면서도, 인도주의적 관점, 그리고 한명의 공복으로써 국가의 대사를 대행하는 사람으로 의무를 다한다. 이화원에 불도 좀 때고. 태평천국에 대한 정책의 집행은 결코 일방적인 과정도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여론의 요동에 따라 대응 역시 달라져왔다. 개입의 요는 프레더릭 브루스와 헨리 파크스에 의한 정세판단이었고, 이들의 관점 역시 나름의 경험과 편견의 혼합물이었다.
다른 세계는 가능했을까. 태평천국의 난을 홍인간과 증국번, 그리고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세계적 차원의 역동으로, 인도 세포의 항쟁의 후속이면서 남북전쟁과 교차된 사건으로 바라보며 그 세계와의 관계를 짚어가는 부분들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개인의 아집들의 총체로써, 갈등과 오해의 산물로써, 드하여 구조의 결과로써 존재한다. 오늘날 점증하는 세계의 안보적 위기 앞에서, 개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 19세기를 뒤흔든 태평천국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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