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의 1권이다. 당 체제 3부작을 읽기 전에 읽으려고 했는데 깜박 잘못하고 그만 체제 3부작을 먼저 사버림. 뭐 잘됐네 잘됐어... 디쾨터 책이나 우징롄 선생 경제사 책을 보고 읽으니 느낌이 새롭다. 덩의 처세술이나, 당대 논쟁의 생생한 목소리들이 시대의 고민을 일깨우고 그를 헤쳐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한 문언으로 묘사한다.
시중쉰이나 보이보나 후야오방의 글과 행동들이 당대 중국을 이끌어가던 사람들의 고민과 생각을 잘 드러내주는 듯. 그 최종 조율자로 덩샤오핑이 있다. 개혁개방은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당 내 개혁파와 보수파의 긴장 속에서 지역으로부터의 성과가 올라오고 전파되고 갈등을 빚고 이를 조율해나가며 당의 방침으로 확정되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들이 당대 중국의 역동을, 그리고 시대적 요구를 재차 드러내며 그에 조응하는 흐름을 잘 보여준다.
서문. 중국은 어떻게 개혁개방에 성공했을까?
1장. 중국은 어떻게 개혁개방에 성공했을까?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거둔 성장은 입지전적이다. 빈곤국에서 G2까지, 경이로운 성장률은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며 인민을 빈곤으로주터 탈출시킨다. 다른 동구권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 왜 중국에서는 가능했을까. 그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베리 노튼은 외생적 성장의 조율과 내재적 역량의 호응, 기업가적 전통의 부활과 이에 조응하는 정부, 계획과 시장의 병행이라는 이중 체제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계획으로부터의 성장을 그 핵심으로 꼽는다. 요는 자율성이고, 그를 백업하는 정부이다. 중국 정부의 점진적 접근, 점-선-면으로 대표되는 정책전략 역시 주요 포인트로 꼽힌다. 일개중심 양개기본점에서 개혁개방과 사항기본원칙의 견지는 상호길항하며 경제성장과 제도개혁의 발을 맞춰나간다.
통찰력있는 정치 리더십, 능동적으로 전개되는 당정간부, 시대적 흐름에 조응하는 개혁개방 정책이 국가로써의 중국이 성장하는 틀을 제공한다. 일개중심 양개기본점으로부터 사회주의 시장경제, 삼개대표 중요사상으로부터 과학적 발전관까지, 당의 중심노선 변화는 이와 같은 시대적 필요를 반영한다.
정치개혁과 정치변화 역시 수반된다. 책이 시정부 전 발간이라 현재와는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엘리트 정치의 변화, 정치제도의 정비와 발전, 국민의 정치참여, 통치이념의 변화와 새로운 정책•노선의 결정을 그 주요 항목으로 짚는다. 이 젼화 속에서 중국의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인민공사와 단위로 꽉 짜여진 집체적 사회에서, 공사와 단위가 해체되며 인민들은 호별영농으로, 농민공으로 자율적인 공간을 찾아나간다. 그 삶이 충분했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그것 역시 인민의 선택이었고, 자율성으로의 전진이었다.
중국의 정치개혁은 민주화의 과정은 아니었다. 반복적으로 당의 영도와 사항 기본원칙의 견지라는 입장 아래 직접적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저지당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당은 의법치국을 통해 구조를 정비하고 체계 속에서 이를 녹여낸다. 그것이 억압적이지 않냐면 별문제지만, 그 속에서 모순을 수용할 수 있느냐 하면 여태까지는 그래왔다. 지방의 자율성과 창발성 역시 개혁개방의 과정에서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혁 이후 당 중앙은 지방을 규율할 수 없는 상태였고, 대약진과 문혁이 낳은 집권화와 그 참상 위에서 분권화된 형태로 중국 공산당은 다시 건설된 것이다. 개혁개방은 그런 과정이었다.
2장. 중국이 직면한 과제 1976년
마오쩌둥 사후 1976년 10월 6일 화궈펑, 예젠잉, 왕둥싱에 의해 4인방이 체포된다. 이는 단순히 궁중 쿠데타였나. 맞다. 이후 드러나는 전모들을 보면, 4인방에 대한 체포는 월권적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가 있었다. 이는 문혁의 유산으로부터 기인한다.
경제성장률 자체는 나쁘지는 않았다. 1952년부터 1977년까지 수치상으로는 연평균 6%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장의 근원은 높은 자본축적률에 의한 것이었다. 그 시초축적은 어디로부터 이루어졌나. 농촌이다.
인민공사 체제에서 정부의 일방수매는 곡가를 고정시켰고, 농민의 생활을 궁핍으로 몰아넣는다. 곡가에서 본 차익은 그대로 설비에 투자된다. 그렇다면 도시는 나았나?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70%의 도시노동자가 최저생계 수준을 유지하며 근근이 생활한다. 1978년 농민 일인당 연평균 식량은 320근, 160kg이었다. 일일 1600kcal이었다. 완리는 이를 보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런 낮은 요구도 아직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실행한 지 곧 30년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빈궁할 수가 있는가!”
문혁 역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수많은 피해자를 낳으며 상황을 가중한다. 문혁으로 나뉜 계급은 궁핍한 경제상황과 맞물려 사회적 갈등을 극대화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신원의 요구로 이어진다. 4인방은 그래서 가야만 했던 것이다.
1부. 개혁개방의 탄생.
3장. 개혁개방 정책의 준비 1985~1978년
일반적으로 개혁개방의 분기점은 1977년 11차 당대회로 잡는다. '경제 건설'이 중점 업무로 들어오고, 전반적인 정치구조의 변화와 지방의 자율성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기반이 되는 정책은 1975년부터 진행된 정돈 정책이었다. 덩샤오핑은 철도를 핵심 고리로 판단하고 완리를 국무원 철도부 부장으로 임명하며 철도의 정상화를 촉구한다. 덩은 그를 임명하며 강력한 영도체제를 구축하고 파벌을 철폐하며 군중노선과 규율에 의한 운영을 통해 쉬저우로부터 철도를 되살려간다. 연착은 줄어들고 시간표에 맞춰 정상운행되며 수송량은 개선되었다.
해당 정책은 점-선-면으로 확장되며 전반적인 인프라 운용현황을 정상화한다. 1975년 공업생산량은 15.1% 증가하며 그 효과를 증험한다. 문제는 모주석이 등소평의 정책이 갖는 본인 성과에 대한 절하의 의미를 알아챘다는 점이다. 일을 잘해도 견책을 당한다. 그것이 주석의 뜻이니까. 덩은 소위 <공업 20조>를 기초한다.
농업의 현대화를 핵심으로, 공업에 의한 농업의 보조, 해외 기술 도입을 통한 생산역량의 증대, 기업의 과학연구역량 강화와 관리 개선, '품질'에 대한 강조, 그리고 이의 제도화와 규격화, 마지막으로 일한만큼 받는 원칙, 즉 노동에 의한 분배를 강조한다. 농업 생산성 향상을 기반으로 공업과의 상보적 발전과 인민 생활 향상이라는 기초를 수립한 것이다. 이처럼, 개혁개방의 원형은 덩샤오핑에 의해 정초되고, 마오 이후에도 화궈펑등에 의해 부침을 겪으면서도 견조하게 전진해간다.
개혁개방 과정에서 해외 사례의 수집 역시 정책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고슬라비아 등 동구권에 대한 견학, 일본의 기술입국에 대한 탐구, 홍콩과 마카오에 대한 탐구가 이어진다. 싱가폴과 한국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정책 모델 연구가 이어졌다. 싱가폴 사례가 누락된 것은 특이하다.
홍콩의 사례는 수출특구, 이후에 경제특구로 이어지는 특구 모델의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경제개발구 건설의견이 당 중앙에 제출되고, 당 중앙은 이에 "원칙적인 동의"를 표시한다. 서방국가에 대흔 견학 역시 이루어진다. 사업에 앞서 덩샤오핑은 말한다.
"외국과 사업을 크게 하라. 한 500억 달러쯤 하라.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용해야 하고, 형세를 놓칠 수 없다. 배포를 대담하게 하고, 발걸음을 더 크게 하라. 계속 논의만 하지 말고 정확히 보았으면 바로 하라. 내일 바로 시작하라. 수백 개의 항목을 추진하라. 탄광, 유색금속, 석유, 발전소, 전자, 군수공업, 교통운수부터 사료 가공 공장까지 내년에 바로 착공하라. [외자는] 분기별로 지불하지 말고, 구상무역과 [외국의] 은행대출을 이용하라."
왜 외자냐. 돈이 없으니까...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개발계획은 다른 전례를 참조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바닥에서부터 만들어가야했다. 덩과 천윈의 말이 이 과정을 잘 요약한다.
‘돌을 더듬으며 강을 건넌다.(摸着石頭過河)’
결국 주요 정책은 지방에서부터 기업과 농민의 자율성을 살리며 현실에서 검증되고, 전국으로 확산되며 성장을 불러일으킨다. 요는 자율성과 자발성을 끌어내는 일이다. 특구의 성과가 중앙위원회로 전달되고, 이는 다시 정책으로 다듬어져 전국으로 내려간다. 1984년 12기 3중전에서 <도시 경제체제 개혁 결정>이 나온 것 역시 이와 같은 과정에서였다.
덩 샤오핑이 과연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였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개혁개방의 과정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이 생산성을 증대하고 상호간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었다. 그의 역할은 마중물을 부어주고 정책의 확산을 지원하며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반대들을 조율해나가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그를 '총지휘자'로 명한다.
4장. 개혁개방의 '돌파':농촌개혁 1978~1979년
왜 돌파냐. 말 그대로 당의 원칙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왜 개혁개방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이 추동한 과정이었을까. 절실한 삶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인프라 쇠퇴는 대가뭄을 맞은 안휘성의 사람들에게 절박한 삶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농민들은 당의 방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별영농'을 시작한다. 그래서 '돌파'다.
기존 체제에서 농촌은 집산화되어 인민공사-생산대대-생산대 체계로 운용되었다. 단위 생산대는 약 25호 100명의 농민으로 구성되어 공동으로 경작하고 공동으로 분배했다. 원칙상으로야 협동하여 생산하고 공평하게 분배하여 풍요롭자는 의미였지만 실제 작업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당대의 현실을 아래 다섯개 항목이 잘 보여준다.
"공산주의 풍조(共產風: 완전한 공동생산과 공동생활), 허위 과장 풍조(浮誇風), 강제 명령 풍조(強迫命令風), 생산의 눈먼 지휘 풍조(生産瞎指揮風), 간부 생활의 특수화 풍조(幹部生活特殊化風: 간부의 특권 현상)가 그것이다."
생산량이 잘 나오고 잉여곡물이 풍족해서 잘 먹고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잘못된 정책의 하달, 인프라의 쇠퇴, 만연한 당의 경직성은 문제를 가중시켰고 노동인구의 사망과 유출로 인한 30% 이탈, 경작용 가축의 63.4% 감소, 곡물 생산량의 96.4% 감소로 나타났다. 이는 책임전이라는 생산성에 기반한 분배를 통해 만회된다. 전반적으로 산출량이 38.9% 증가한다. 그러나 이는 개별경작이라는 소농경영으로, 집단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폐기된다.
대약진 이후 정책은 유화되어 생산량은 소폭 회복되었지만, 1978년 시점에도 농촌의 삶은 처참했다. 특히 안휘성은 더 심각했다. 농민의 1인 최저생계비는 100위안이었으나 안휘성의 평균수입은 60위안으로, 전체 생산대의 13%만이 겨우 100위안선을 넘기며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생산대에서의 작업행태는 아래 기록된 것처럼 책임없는 기강해이를 보여준다. 어차피 밥도 안되는데 뭐더러 일하겠나.
"[일의 시작을 알리는 생산대 대장의] 첫 번째 호루라기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두 번째 호루라기에는 머리를 들어 쳐다본다. 세 번째 호루라기에는 천천히 움직인다. 밭에 도착해서는 호미를 잊고 왔다고 하면서 다시 집에 갔다 온다.
남자들은 카드를 들고 일하러 오고, 여자들은 꿰맬 신발을 들고 일하러 온다. 퇴근할 때까지 한편에서는 일하고, 한편에서는 놀면서 시간을 보낸다. [퇴근 시간이 돼서는] 빨리 집에 돌아가서 텃밭(自留地)을 열심히 가꾼다."
이와 같은 현실, 특히 농촌 빈곤에 대한 완리의 한탄이 절절하다. 삶의 빈곤은 통치체제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절감하는 사람만이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옛날 해방구[老區: 이 지역은 공산당이 혁명 근거지를 세웠던 곳 중의 하나였다.]의 인민들은 혁명을 위해 많이 희생했고 공헌을 했다! 그들이 없었으면 우리 국가는 어디서 왔겠는가! 우리의 오늘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해방하고도 이렇게 많은 해가 지났는데도 농민들의 집안에는 벽밖에 없고(家徒四壁), 씻은 듯이 가난하며(一貧如洗), 옷은 몸도 가리지 못하고(衣不遲體), 먹어도 허기를 채우지 못하니(食不果腹), 우리들은 어찌 얼굴이 있어 촌의 어르신들을 볼 것인가! 부끄럽기 그지없다(問心有愧)!"
완리는 6개 조항을 통해 생산의 원칙을 재수립하고 기층 생산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며 간부에게 일을 시킨다. 이걸 명문화한다는 말은 즉 원래는 안했다는 의미다. 노동에 따른 분배를 기준으로 부업으로부터 부담의 감소, 자주적 판단의 존중으로 전반적인 자율성이 상승하고, 이는 1978년 라이안 현에서 세가지 도급과 한가지 보너스라는 형태로 구현되기도 한다. 동시기 쓰촨성에서 자오쯔양 역시 12개조를 통해 생산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천부지국 쓰촨성의 농업생산성이 하락하면서 이는 쓰촨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고, 개별영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그 역시 농가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1978년 안휘성의 대가뭄을 맞이하여 완리는 9월 1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차지도황(借地度荒)', 즉 토지를 빌려주어 가뭄을 극복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이를 실천한다. 그리고 펑양현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위해를 각오하고 원칙을 세우고 촌민들이 단결하여 연판장을 쓴다.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호별영농의 실시는 당 위원회에 보고되지만, 현 당서기 천팅위안(陳庭元)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들은 이미 가난해 빠졌는데 어떻게 자본주의를 할 수 있겠는가? 전 현에 2000여 개의 생산대가 있는데, 하나가 자본주의를 한다고 해봤자 어디 갈 수 없다. 이미 [토지와 생산도구를] 호별로 나누었으니 그냥 하게 두고, 가을걷이 후에 다시 논의하자!"
생산실적은 훌륭했다. 생산량은 13만 3천근(약 66.5톤)으로 전년대비 5배 증가한다. 여기에서 절반을 국가에 반환하고 800위안을 값고 생산대대에 1000근과 150위안을 쪼개주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는다. 문제는 이에 대한 이념적 공격이다. 당이 그간 농민의 생산력을 억압해왔다는 사실 앞에서, 당은 이를 부정하며 호별영농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한다. 그것이 문혁의 성과라면 성과겠다. 경직된 당성으로 삶을 억압하는 것. 이에 안휘성 농업위원회 부주임 저우웨리는 보고를 통해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낙후된 지역의 농민들이 강력하게 호별도급제를 요구한다. 이런 지역에서는 호별도급제가 실시된 이후에 대 변신이 일어났다. 또한 호별도급제는 소유제 성질도 노동에 따른 분배의 원칙도 바꾼 것이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 성질의 책임제이지 토지 개별경작(分田單幹)은 아니다. 끝으로 낙후 지역에서 농민들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단지 극좌노선이 초래한 엄청난 고난뿐이다."
이와 같은 쟁점은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당 내 분열로 나타난다. 그러나 생산성의 증대가 가져온 결과 앞에 방향은 자명했다. 논쟁이 끓어넘치며 여론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다, 덩샤오핑은 당내 주도권을 쥐고 입장을 정리한다. 이는 이후 그의 치세를 특정짓는 운용의 묘이기도 하다. 덩이 당권을 장악하며 서기처가 신설되고 낙후지역을 중심으로 호별도급제가 도입되며, 이후 이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확대시행된다.
천원 역시 책임전을 지시했던 경력이 있으니만큼 호별도급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명백히 성과가 있음을 알았음에도 당론 앞에 침묵했던 것이 그의 죄였고, 당론이 다시 바로잡히는 과정을 묵묵히 지원한 것이 그의 공이었다. 그가 자오쯔양에게 했던 질문, 홍수피해에 농민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집단영농의 단점과 호별영농의 장점이 압축되어 드러난다. 자기 것이 아닌 작물을 위해서는, 아무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이념적 논쟁은 이념 그 자체에 대한 논쟁이면서, 역사적 평가에 대한 논쟁이기도 하다. 잘못된 지도로 사람들의 삶을 구렁텅이에 빠트린 이들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중앙 75호' 문건으로 낙후지역에 대한 호별도급제가 공식화된다. 당과 같은 거대한 조직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하루아침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1982년 '중앙1호'문건은 호별영농을 사회주의 생산체제로 공식화하면서 농민의 자발성을 국가적으로 승인한다.
"각급 당의 지도부(領導)는 간부와 군중에게 [다음과 같이] 선전 해명하고 설명해야 한다. 즉 우리나라는 반드시 사회주의 집단화의 길을 견지해야 한다. 토지 등 기본 생산수단의 공유제는 장기 불변이고, 집체경제의 생산책임제 수립은 장기 불변이다.
[이와 함께] 현재 실행하는 각종 책임제, 즉 호별도급제와 조별도급제(包產到戶·到組), 호별영농과 조별영농(包幹到戶·到組) (……) 등은 모두 사회주의 집체경제의 생산책임제다. 어떤 형식을 채택하건 상관없이 군중이 바꾸기를 원하지 않으면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는 그간 당의 노선이 실패했음에 대한 완곡한 인정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생산양식에 대한 승인이기도 하다. 호별영농은 자본주의 맞다. 다만 기구적 장치로 그것을 이데올로기에 일치시킨 것이다. 그것이 당성이다. 그리고 이는 실천이 진리의 유일 검험기준이라는 실사구시 논쟁으로도 연결된다. 호별영농의 급격한 확산은 그 증험이다. 1983년 호별영농은 전국적으로 97.8%의 생산대에서 시행된다. 중앙1호 문건의 군중노선이 전역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이후 인민공사-생산대대-생산대 체제는 해체되고, 촌민위원회로 재구성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자역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통제를 방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당의 무게를 덜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기도 했다. 권력을 놓아주어야 그 자리에서 자율성이 발생한다. 그 위에 당 조직이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그간 농가소득을 억압해왔던 일괄수매 일괄분배 제도 역시 해체된다. 일괄수매를 통한 협상가격차는 1952년부터 1984년까지 8천억 위안으로, 이는 1979년 GDP(4038억 위안)의 두배에 달했다. 생산책임제, 인민공사의 폐지, 일괄수매제도의 폐지는 1980년대 농촌개혁의 3대 기둥(支柱)가 된다.
이후 농산물생산량은 증가하여 1978년 3억 480만 톤에서 1998년 5억 1230만 톤으로 1.7배 증가한다. 농가소득도 따라서 증가하며 동기간 133.6위안에서 2162위안으로 16배 증가한다. 그러나 도시와의 격차는 2.5배로 일정 수준을 유지한다. 이는 생산책임제에 의한 생산성 증대와 주요 농산물 수입가격의 증가를 통해 이루어졌다. 또한, 생산성의 증대에 따른 잉여노동력의 생성은 향진기업으로, 농민공으로 아어지며 수입 증대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개인 소유의 향진기업이 1985년 전체 1200만개 중 1000만개(83.3%)로 나타나며, 1988년 전체 수출입 총액 중 15.2%를 차지한다.
이 기간 중 비약적인 생산성 투자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혁신적인 농법이 보급된 것도 아니다. 다만 지역에서 당의 무게가 가벼워졌고, 생활에 대한 필요가 당의 노선을 돌파할만큼 강하게 올라왔다. 그것이 호별영농으로, 이에 대한 논쟁으로, 노선의 관철로 확산되었고, 낙후지역으로부터 전국으로 생산책임제가 보편화되며 생산력의 분출로 나타난다. 제도와 계획이 규율하던 곳에서 권력을 비우자 자발성이 차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성장으로 연결된다. 지난 30년동안 당이 주지 못했던 풍요를,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쟁취한다.
5장. 경재특구와 도시개혁 1979~1980년
홍콩과 신계는 중국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었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에 가기위해 강물에 몸을 던지고, 그들의 시체가 강안에 떠내려오면 이를 건지는 사람만 200명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강을 넘는다. 연간 11만 9274명이 강을 넘고 그중 6만 157명이 도강에 성공한다. 양 뤄팡촌의 소득격차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전 뤄팡촌이 연간 134위안을 벌 때 반대쪽 뤄팡촌은 1만 3천위안을 번다. 100배의 소득차이다. 결국 문제는 다시, 성장이다.
선전에 경제개발구를 설치하자는 주장의 근원은 1962년 마오쩌둥 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안은 다 있었다. 다만 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후 1978년 시찰단이 홍콩, 마카오애 파견되고, 광둥성 제2서기인 시중쉰과 광저우시 당서기인 양상쿤이 함께 특구의 건설을 주창하고, 화교 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이를 지정하기로 의견을 낸다. 시중쉰은 1978년 11월 중앙 공작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광둥은 자연조건이 천부적으로 좋다. 식량의 자급자족을 전제로 (……) 정책을 완화하여 대외무역을 위한 수출 공업을 발전시키고, 홍콩과 마카오 및 화교와의 각종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구상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 중앙이 이 구상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전 성의 인민을 동원하여 성과를 내고, 국가를 위해 거대한 공헌을 할 결심이 섰다. (……) 광둥이 홍콩에 사무실을 내고, 홍콩 및 마카오 사업가들과 직접 연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가공무역과 구상무역 등 여러 경제 업무는 광둥이 처리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어 불필요한 단계(層次)와 수속을 줄이게 해 달라."
덩샤오핑은 그가 참가한 조장회의에서 해당 안건에 대해 4항 기본원칙은 변함이 없고, 광동성이 먼저 부유해져도 나쁠 것이 없다며 지지를 표명하고, 특구라고 이를 이름한다. 혈로를 뚫으라며 그가 한 말은 당대의 정치적 험난함과 재정적 빈곤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담고있다.
"특구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 산시(陝)·간쑤(甘)·닝샤(寧)[근거지]도 시작할 때 특구라고 불렀다! 중앙은 돈이 없다. 정책을 줄 수 있을 뿐이니, 너희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봐라. 목숨을 걸고 혈로를 하나 뚫어 봐라."
섬서, 감숙, 영하에 대한 강조는 혁명의 요람이자 대장정의 도착지였던 섬강령 근거지에 대한 강조이기도 하다. 시중쉰의 업적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혈로라는 말로 그가 감내해야 할 일들을 상기시킨다. 말 그대로, 나라에 돈이 없다. 줄 수 있는 건 정책적 지지 뿐이다. 나머지는 인간의 의지가 만드는 일이다. 특구가 갖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덩샤오핑이나 시중쉰이라고 몰랐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에 견지하고 관철한 것이다. 인민에게 끼친 업보를, 인민에게 값았다.
실행보고비준은 특구의 원칙을 수립한다. 핵심 인프라, 철도 우편 민항부터 군 외의 모든 것은 자율에 맡긴다. 재정은 세입과 세출로 나눠 정률로 걷고 남은 것은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소용한다. 이외로도 무역, 금융, 시장제도, 고용 전반, 세율에 대한 과엄위한 자율권이 부여된다. 큰 성장으로 특구는 실적을 증명하고, 광동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와 복건성의 샤먼이 경제특구로 공식 결정된다.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시찰단이 말레이, 싱가폴 등을 돌며 제도와 정책, 자율성과 숙련 배양을 요로 특구모델을 고도화할 것을 주문한다. 특구의 재정은 중앙정부로부터 보조를 잗을 수 없었고, 따라서 세제로부터 부동산, 투자유치등을 통해 정책적 자율성으로 승부를 보게된다. 화교자본을 유치하고 부동산으로주터의 임대, 개발수익으로 인프라를 정비하며 기업의 세금으로 가공산업과 노동집약적 산업을 유치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서커우 개발 모델 역시 하나의 전형을 제공한다. 시간과 돈에 대한 강조로,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서커우 모델'이 탄생한다. 볼테르의 유명한 인용, '그러나 목숨을 걸고 너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겠다.'는 표어는 그 실험정신과 자유에 대한 강조를 잘 보여준다. 요는 행정의 간소화, 권력의 축소와 그 위에서 고용과 기업활동의 자율성의 강조이다. 농촌개혁에서도 드러났지만, 이는 중국식 신자유주의의 수용이기도 하다. 소유권의 다변화와 기층으로부터의 자발성과 자율성의 강조, 제도의 혁파를 통한 사회적 활력의 증대는 중국에서 거대한 성장으로 드러난다. 1979년으로 2007년까지 선전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33.8%로, 1인당 GDP 역시 동기간 606위안에서 7만 9200위안으로 131배 성장한다.
하지만 성장을 해도 문제가 된다. 보수파의 지적은 이와 같은 개혁개방이 집체주의에 대한 역진이라는 것이다. 당 간부는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특구는 조계로 기능하며 기업가들의 착취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다. 맞는 말이다. 특구는 착취이고, 동시에 국가 자본주의적 기구이다. 그런데, 착취도 못당하는 상황이 더 가혹하다. 그것이 군중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군중이 원하며, 실질적인 성과로 나타난다면 구부러져야할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론이다. 실천은 진리의 유일한 검험기준이고, 실천을 이론으로 연결하는 것이 유물론적 사고인 것이다. 명백한 모순을 연결하는 것이야말로 당성이다.
선전조차도 당 중앙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념의 뿌리는 강고하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이득이었는지, 왜 그 착취에도 불구하고 사란들이 선전으로 달려갔는지, 그 마음들을 이어받아 논쟁은 계속된다. 이윽고 덩은 1984년 1월 선전을 방문하고 시중쉰이 뚫어낸 혈로를 지킨다.
"경제특구는 내가 제의하여 중앙이 결정한 것이다."
그의 글씨는 선전에 남아 당의 방침을 정한다. 이후로도 경제특구는 해외를 향한 '창구'로, 경제 건설의 '기지'로, 그리고 정책 돌파의 '실험장'으로 그 역할을 다한다. 농촌개혁과 경제특구로 이어진 개혁개방의 물결은 다시 도시로 몰려든다. 사회주의는 '공유제의 기초 위에 계획이 있는 상품경제'로 재정의되고, 12기 3중전에서 <도시 경제체제 개혁 결정>을 통해 도시개혁이 시작된다.
계획경제 체제에서 소비는 증표 소비이다. 원하는 물건마다 표가 있고 표로 교환한다. 그 실태가 아래 일례에서 풍자된다.
"밥을 먹으려면 양표(糧票), 요리를 하려면 기름표(油票), 임산부가 몸을 풀려면 흑설탕표(紅糖票), 아이를 낳으면 분유표(奶粉票), 기저귀를 빨려면 비누표(肥皂票)가 있어야 한다. 아침에 양치질을 하려면 치약표(牙膏票), 설을 쇠려면 고기표(肉票), 명절을 쇠려면 계란표(雞蛋票)가 필요하다. 두 다리를 쭉 뻗으려면[즉 잘 죽으려면] 관표(棺材票)를 받아야 한다."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획되고 관리되는 사회인 것이다. 집중적인 자원동원 능력은 인민의 빈곤으로 현시되고, 체제의 무거움은 자율적 생산능력을 잠식한다. 소유와 생산 권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의 부재는 기업에서, 그 말단인 생산의 현장에서 책임의 부재로, 생산성의 하락으로, 생산 전반의 연쇄에서 거대한 정체로 드러난다. 외생적 성장의 단점인 것이다.
자오쯔양은 1978년 봄 이와 같은 문제를 정리하여 당 중앙의 관련부서에 제기하고,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권한 이양과 이윤 허용', 즉 방권양리(放權讓利)를 중심으로 한 기업의 개혁을 추진한다. 그 핵심은 자율적 생산과 이에 대한 이윤추구의 허용이다. 그러나 기본은 공기업이다. 비용은 나라에서 땡겨오고 매출은 내것이 된다. 구조 자체가 태만을 조장한다. 제도의 고도화가 이를 억제하지만, 근본 모순은 해갈되지 않는다. 리턴이 있다면 리스크도 있어야하는 법. 적용대상은 1400개로, 6000개로 확대되며 총 생산액의 60%에 해당하는 기업이 대상이 되고, 1980년으로부터 1981년까지 총생산도 6.8%, 이윤은 11.8%, 납부이윤은 7.4% 증가한다.
국유기업 개혁은 내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겉을 맴돈다. 도급책임제도, 이개세 개혁도 이윤을 보장해주는 형태로 생산성은 높이지만, 결국은 리스크의 문제다. 국유기업의 하방을 국가가 지지해주고, 단위로 묶인 노동을 감당하며 이윤을 내는 것은 쉽사리 지대추구의 길로 빠지게 된다. 결국 국유기업이 1990년대 정리되는 것은 이와같은 문제에 기인한다. 누가 경영에 책임을 질 것인가. 리스크를 안고 경영을 할 수 있는 자원을, 당은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이 국유기업의 문제였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채택되고 기업의 현대화, 즉 주식회사화가 진전되지만, 하방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마오주석 기간동안 개체기업은 도시에서 자취를 감추고, 기존의 기업들은 모두 국가로 통합된다. 건국 초기 900만에 달하던 개체노동자는 1978년 무렵에는 15만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상산하향당했던 청년들이 도시로 귀환하고, 농촌에서 농민공이 올라오며 도시경기의 침체로 불안정노동이 증가하자 결국은 고용을 담당할 기업의 존재가 필요해진다. 1981년 국무원은 이에 대해 개체경영을 허용하지만 그 인원은 5인 이하로 제한한다. 어디까지나 조수를 쓰는거지 개별고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1983년에 이는 개정되어 7명 이하로 폭이 변화한다. 이유가 재미있는데, 자본론에 나온 노동착취의 예시가 8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는 법. 광대한 프롤레탈리아의 존재는 실질적인 편법고용으로 이어진다.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에 의거하여 사영기업이 허용되고, 장려의 대상이 된다. 이후 사영기업은 1989년 9만 581개에서 2004년 243만 5282개로 13년간 27배 증가한다.
2부. 화궈펑 과도채제의 등장과 소멸
여차저차해서 마오쩌둥은 죽고, 화궈펑이 예젠잉, 왕둥싱과 함께 전격적으로 4인방을 체포한다. 그는 공식 후계자로써의 직위, 당내 영향력을 갖고 이들을 정리하며 대중적 인기를 획득한다. 해야하는 일을 제때 마무리짓는 것도 능력이다. 이후 마오주석의 공인을 무기로 자신의 지위를 선전하며 4인방 처단의 과정으로 성급 간부와 기층 간부에 대한 대대적인 교체에 나선다. 29개 지역에서 9명을, 당중앙에서 23개 부서의 부장을 날려버린다. 기층에서도 40만명의 당정간부를 교체한다. 전체 영도간부수가 당원수가 두배된 오늘날에도 200만이니 말 그대로 기층 간부들은 다 갈려나갔다.
화궈펑 체제의 특징은 무엇이었나. 그의 지위는 마오주석의 인정으로부터 왔다. 이에 따라, 마오 주석의 권위는 곧 그의 권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그의 강점이자 약점이었고, 또 모순이었다. 양개범시(两个凡是)는 그 모순을 집약한 문장이다.
凡是毛主席作出的决策,我们都坚决维护;
凡是毛主席的指示,我们都始终不渝地遵循
무릇 마오 주석이 내린 결정은 우리가 모두 견결히(확고히) 옹호하고, 무릇 마오 주석의 지시는 우리가 모두 변함없이 준수한다.
국가의 압력이 사회를 짓누르는 상황에서, 그가 경제건설을 주창한다고 해서 과연 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인민에게 정말로 풍요를 가져다줄 수 있었나? 저자는 화궈펑 체제를 덩샤오핑 체제와 연속선상에서 설명하고, 그 정책적 연결성을 강조하지만, 결국 당의 문제는 지도노선의 문제이기도 하다. 화궈펑과 그의 지지자들은 마오주석의 노선을 권위의 기반으로 삼았고, 군중은 그 선택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생산성을 강조하며 성장에 대한 대책으로 신약진정책을 구체화한다. 이름부터 글러먹었다. 대약진으로부터 2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신약진이라니 당정간부들 제정신인가... 신약진 3단계의 목표들 역시 비현실적이다. 참고로 2000년 중국 곡물생산량은 5억톤이었다.
문혁 10년간 벌어진 아시아 국가들과의 격차, 현실적 조건들이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 작용한다. 자본축적률을 높여 성장을 달성한다는 것은 외생적 성장을 지속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기반으로 중화학공업 투자를 통해 성장률을 달성하는 것은 마오의 시대를 답습하는 일이다. 그 골간이 덩샤오핑의 '공업 20조'로부터 나왔다고 해서 이것이 개혁개방과 연속성을 갖는 정책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까. 덩샤오핑이 중집에서야 좋은 게 좋은거라고 웃어넘겼겠지만 그것이 본심이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 정책이 1975년 덩샤오핑에 의해 실현된 '정돈'을 외양적으로 계승했다고 해서, 그 본질이 같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7장. 덩샤오핑의 복직과 세력결집 1977~1978년
덩은 어떻게 마오 주석의 배척을 이겨내고 재집권했나. 화궈펑 역시 그의 복직에 찬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텐안먼 광장에서 사람들은 작은 병을 뒤집어놓으며 그의 복귀를 기원한다. 화궈펑은 주석의 위광을 업고있긴 하지만, 정치적 판단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1976년 시점에서 덩이 72세(1904년생), 화궈펑은 55세(1921년생)이었다. 이처럼 나이 역시 화의 권력을 보증하는 한 요인이었다. 그는 경제 발전에 덩샤오핑만한 인물이 없음을 인지하고, 절차에 맞춰 그의 복귀를 추진한다. 덩샤오핑 역시 서신 젇치로 본인의 복귀를 소원하며 낮은 자세로 임한다. 그의 편지를 보고있으면 이래서 그 많은 하방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오뚝이처럼 제 자리로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래는 편지의 내용이다.
‘둥싱 동지를 통해 궈펑 동지와 중앙에 전달’
"화궈펑이 당 중앙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도록 한 중앙의 결정을 충심으로 옹호하며 당과 사회주의 사업에 위대한 의의를 갖는 매우 중요한 결정으로 매우 환영합니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화궈펑 동지는 마오 주석의 가장 적합한 후계자일 뿐만 아니라 연령으로 보았을 때 프롤레타리아(無産階級) 지도의 안정성을 적어도 15년에서 20년 보장할 수 있는데, 그것이 전체 당과 전체 군 및 전체 인민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어떻게 기뻐 춤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덩같은 노간부가 본인의 즉위에 기뻐 춤추시겠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심지어 편지를 공개하여 그의 지지를 중인환시리에 밝히겠다는데. 상당히 강력한 제약이었고, 동시에 화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직을 둘러싼 절차적 문제에서 몇번의 지연이 있었고, 이에 덩은 재차 편지를 보낸다. 두 편지를 공개하자고 제안하고, 예젠잉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의 정치국 상무위원회 직과 중앙위 부주석, 중앙군위 부주석과 해방군 총참모장 직이 복원되지만, 우선적으로는 과학과 교육을 전담하게 된다. 그러나 이내 외교, 그리고 국방으로 그의 담당영역은 넓어진다.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다른 간부들의 신원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문혁기간의 오류에 대한 시정의 요구는 드높았고, 이는 원로와 당정간부만이 아니라 많게는 1억명, 적게는 천만명이 넘는 실질적 피해자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후야오방이 1976년 중앙당교의 부교장이 되고, 양개범시를 비판할 준비를 하며 신원의 준비에 착수한다. 1977년 그는 조직부 부장이 되며 당 내 기풍을 일신한다. 조직을 당원의 집, 간부의 집으로 만들며 노간부들의 민원을 존중하고자 한다. 이 부분이 특이한데, 후야오방에게 조직부장을 준다는 건 사실상 당의 실권을 넘겨주는 일이나 다름없다. 당관간부의 인선은 결국 실무위원회를 거친다지만, 결국 조직을 통솔하는 건 인사와 예산이고 당시 중국 공산당 기풍에서 인사는 곧 예산이었다. 즉 당의 인사를 관장할 권리을 후야오방에게 넘긴다는 것은 화궈펑이 스스로 자기 목줄을 쥐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 모를 사람도 아닌데 왜 그런 선택을 했었을까.
억울한 피해를 재조사하라는 명령에도 지방의 간부들은 저항한다. 결국 그 결정을 내린 사람은, 자신의 죄업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제될 사람은 구제되어야한다. 중앙의 53개 당정기관에 5344명의 간부가 재배치된다. 총원의 87.2%에 달하는 숫자이다.
결국은 양개범시 논쟁이다. 기존 문혁 기득권들과, 문혁으로 하방당한 당 간부와 주자파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갈등이며, 동시에 지난 마오 주석 시기의 일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다. 양개법시에 대응하여, 후야오방은 <실천은 진리 검증의 유일한 기준이다>를 중앙당교 이론지 이론동태에 발간한다.
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진리의 기준은 단지 하나고 그것은 바로 사회적 실천이다. 이런 과학적 결론은 인류가 몇천 년의 모색과 탐색을 거쳐 비로소 얻은 것이다. (……)
그러나 어떤 동지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과학적 결론을 인정 혹은 만족하지 않고 실천 밖에서 다른 진리 검증의 기준을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이론의 시비, 사상의 시비를 판단할 때 사회적 실천의 결과가 어떤지에 상관없이 책이 어떻게 말했는지를 본다. 이런 동지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설사 책이 말한 것이 진리일지라도 ‘진리’와 ‘진리의 기준’은 2개의 다른 개념임을. 마르크스주의는 진리이고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가 진리 검증의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가 진리인 까닭은 인류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진리임이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인식과 이론 그 자체는 스스로 증명할 수 없고, 그것의 진리성은 최종적으로 단지 사회적 실천의 검증을 통해서만 확정될 수 있다. 만약 이론을 진리 검증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2개의 기준이 있게 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상노선은 당의 정책방향과 역동을 결정하는 핵심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유물론으로, 실천으로 노정하고 그것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승인하며 실천을 기준으로 이론을 재정립할 것을 촉구한다. 이는 지난 과오에 대한 반성이면서, 새 시대를 열어나갈 이론의 무기가 되어준다. 현실의 실천으로 검증하여 재구되는 사상이야말로 대지에 뿌리박고 미래를 노정한다. 덩샤오핑 역시 자기의 입장을 밝힌다.
"어떤 동지들은 날마다 마오쩌둥 사상을 말하면서 마오쩌둥 사상의 실사구시, 모든 것은 실제에서 출발, 이론과 실제의 결합 등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관점과 근본 방법을 왕왕 잊어버리거나 아예 방기하고, 심지어는 반대하기조차 한다. 이뿐 아니라 어떤 사람은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실제에서 출발하고 이론과 실제를 결합하는 사람을 큰 잘못을 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관점은 실제로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의 말을 그대로 베끼고, 그것을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위반하고 중앙의 정신을 위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며,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 정신적 족쇄를 타파하고, 우리의 사상을 대대적으로 해방하자!"
실천파는 중앙당교로부터 간부들에게 지지를 얻고, 범시파의 반박에도 재결집하며 논쟁은 확산된다. 후야오방이 내심 말하듯, 논쟁에 쏟아지는 압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한다. 학계로부터 지지가 이어지고, 지방 지도자와 군 지도부가 해당 입장을 중심으로 결집한다. 인민해방군 지도부 중 예젠잉, 류보청, 쉬샹첸, 녜룽전 등 10명의 원로급 장성들이 이를 지지하고, <해방군보>역시 실천파의 곁에 선다. 이에 대한 범시파의 변명은 초라하다.
“당 중앙의 방침과 위배된다.” “마오의 깃발을 부러뜨린다.” “당의 단결과 통합을 해친다.”
애초에 양개범시 자체가 경직된 사상이고, 기존 마오 노선의 실패가 현실의 참극으로 나타났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방법은 없다. 당 간부들의 지지는, 역설적으로 기층의 지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8장. 두 세력의 충돌: 중앙공작회의와 공산당 11기 3중전회
1978년 중앙공작회의와 11기 3중전은 일반적으로 개혁개방의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중앙공작회의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의제를 정하며, 사실상 두 회의는 연계되어 일어났다. 이미 진행되고있던 양개범시와 실사구시 논쟁 역시 역사문제의 제기를 통해 불이 붙는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으로 촉발된 텐안먼 사건(1976)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보이보 사건을 비롯한 사건들에 대한 재조사와 복권이 결정된다. 화궈펑은 지난 역사에 대한 부채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주석으로 선택될만큼의 명철함은 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리가 갖는 모순 역시 인지할만한 감각이 있었고. 그런 사람이 후야오방을 조직부장으로 넣으면서 닥쳐올 운명을 몰랐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상무위원회에서 원로들의 무게가 있었다고는 해도, 주석은 최종심급으로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화궈펑은 왜 이 흐름을 받아들였나.
중앙공작회의에서 양개범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구 당간부들의 신원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는 당의 노선,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노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난 당의 과오는 없었던 일로 하고 마오주의 노선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그간 노선의 과오를 인정하고 성찰하며 현실에 발을 딛고 나아갈 것인가. 양개범시파는 자아비판을 하게된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비판이 이어진다.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발전도식을 따르지 않고 무리한 자본투자로 이어진 결정에 대한 분석과 요구된다. 아니 다 알면서 왜 안했대? 물론 마오주석 때문이다. 농업정책의 '좌경화'가 비판받는다. '소유권'의 부정이 '자발성'의 저하로 나타난 점에 대한 지적 역시 경이롭다. 다 알고 있었네. 어떻게 알았을까.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여 인민을 그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눈이 있다면 하방당하면서 봤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개혁개방이란 무엇이냐. 생산력의 발전을 저행하는 생산관계에 대한 개혁이요, 생산관계의 빌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부구조에 대한 개혁이다. 개방은 왜 필요한가. 해외의 선진기술과 장비를 습득하여 물적 토대를 개혁하기 위함이다.
그 방법론으로 사상해방, 정치 민주와 경제민주, 역사 문제의 처리를 제시한다. 실천을 중심으로 노선을 재정립하고, 모자를 씌워 조리돌림하는 행태를 엄금하여 최소한의 인신의 자유를 확보한다. 물론 이때 인신의 자유는 당간부에게만 적용된다. 일반인은 공안에 잡혀가면 땡이다. 기업의 자율성 확대, 제도를 통한 법치의 확보가 강조된다. 역사문제의 처리 역시 문혁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당대의 억울함을 국가적으로 해소할 것을 목표로 한다. 더하여 변화한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정책으로 미래로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여기에서 선부론 역시 주창된다. 부의 격차를 허용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전체 부의 증대로 나타난다. 이 현실을 이론에 정합적인 형태로 구현한 것이 선부론이다. 다시 한번, 모순을 넘어서는 당성이다. 경제학, 과학기술, 관리에 대한 학습을 강조하며 이는 막을 내린다. 이렇게 논의된 주제들은 공보를 통해 공표되며 당의 입장으로 생명력을 갖는다.
장수를 쏘려면 말을 쏴라. 왕둥싱이 실각한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직은 유지하지만 중앙판공청 주임부터 군 정치위원, 당교1부교장 등등의 직함이 다 짤린다. 당대 중국공산당도 겸직이 심각하고 실직과 허직의 문제가 컸다. 직함 줄줄이 달면 이게 다 운용이 되냐고요. 천윈이 부상하고, 경제 정책의 대전환이 시작된다.
정책적 흐름 자체는 연속적이라고 볼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11기 3중전에 이르러서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은 그를 수행할 수 있는 이들의 손에 쥐어졌다. 양개범시 노선으로 개혁개방을 이룰 수 없고, 신약진 정책으로 성장에 닿을 수 없다. 문혁 세대와 마오 노선은, 새로운 시대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중국 공산당이 노선에 대한 논쟁 끝에 바른 방향을 견지한 것, 그것이 11기 3중전의 의의다.
'역사청산', 그리고 '사상해방'이라는 상부구조의 변화가 당의 분권화로, 창발성의 터전으로 자리한다. 물적 토대는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다. 당이 그립을 놓았을 뿐이다. 진정으로 거대한 인간의 역사는 그 틈에서 발아한다. 노동자-농민의 자발적인 창조적 정동이 경제와 사회를 건조했고, 당은 그 뒤를 따라간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다. 대자보가 붙는다고 무슨 의의가 있나.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데.
3부. 덩샤오핑 체제의 확립
9장. 사상 통일과 역사 청산 1979~1981년
11기 3중전에서 이론공작 토론회의 개최가 확정된다. 지도부가 재구성되었으니 노선 통일부터 시킨다. 이미 실천파가 승리한 이후 일어나는 이론공작 토론회란 무엇인가. 실천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널리 펼치고, 범시파가 와서 자아비판하는 자리이다. 더하여, 당의 영도체제에 대한 개편 역시 필요하다. 마오 시기의 올 들을 바로잡으려면 영수체제를 집단지도체제로 개편하며 필요한 제도적 정비를 뒷받침할 이론적 기반을 구축해야한다.
이론공작 토론회에서의 사상해방은 덩샤오핑에게 사항 기본원칙의 견지가 필요함을 일깨워줬다. 양개 기본점은 개혁개방과 이에 대한 사항 기본원칙의 피드백 작용이다. 한마디로 선을 넘었으니 다시 우겨넣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베트남 침공의 실패, 민주벽에서의 비판은 드로 하여금 당의 영도를 재수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민주벽은 탄압하고 당의 이론노선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정돈'하는 것이다. 후야오방은 꼴이 우습게 되었다. 4항의 봉으로 실천의 동지를 두드려패는 일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그러나 후야오방은 이를 이용하여 반우파투쟁같은 숙청을 벌이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덩은 일시적으로 이에 동의하지만, 양자간 균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진리기준논쟁이 확고한 정치노선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군, 기층에 대한 학습이 필요했다. 광범위한 진리기준논쟁 '보충수업'은 이를 메워주며 개혁개방 시대에 필요한 노선의 정신무장을 보급한다. 이런 점이 중국 공산당의 일사분란함을 일정부분 설명해주는 기제이기도 하다. 문필로 당원들의 정신을 가다듬고, 그 틀에 노선으로 나아갈 방향을 '견지'시킨다. 물론 문자로 일이 어찌 완벽하게 되랴마는, 관료제의 매력은 그 과정에서 실천의 수정•보완을 통해 이를 가다듬는 '정돈'에 있기도 하다. 당성을 못깨치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깨치게 한다^^...
역사문제의 해결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기층 간부들이 자신들의 과거의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에는 우파투쟁으로 밀려났던 사람들에 대한 긴요긴급한 수요가 있다. 지방이 저항한다? 정량적 지표를 할당하고 안되면 다양한 수단으로 되게 한다. 중앙에서 직접 나가서 조지면 안되는 일도 다 이루어진다.
당정간부의 충원과 당원의 복직도 중요하지만, 우파라고 모자씌워서 조리돌림한 사람들, 그리고 '계급의 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 대한 사면 복권이 이후의 성장에서 특히 중요했다. 사형당한 2만 3921명에 대한 재조사도 이루어진다.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으나, 산 사람으로써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밖에 도리가 없다. 2000만명의 '계급의 적'은 성장에 필요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지식자원을 낙인찍어 처박아놓으면 근대국가가 굴러갈 수 없다. 문혁기의 정체와 쇠퇴는 당연한 일이었다.
왜 천윈이 경제정책에서 신뢰받았나. 1차 5개년(1953~1957) 계획에서의 성과가 그 밑바탕이었다. 그는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성장을 주창한다. 그러나 이는 덩샤오핑의 노선과는 맞지 않았다. 그는 불균등을 포용하고, 원자재에서 나오는 담보가치가 있는만큼 적극적인 신용확장과 외자유치를 통해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것을 피력한다. 지역의 당간부들 역시 기존의 외생적 성장이라는 방법론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고, 조정이라는 틀로 성장을 억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천윈과 덩샤오핑은 정치 노선에 있어서는 견해를 공유했지만, 경제정책에서의 이견은 양자를 갈라놓는 원인이 된다.
역사문제에 관한 역사문제의 결의로 지난 역사문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 역시 요구되었다. 물론 크게 조진 건 다 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 권력의 기반은 마오 주석의 혁명이고, 이를 기각하는 것은 본질에 대한 망각이자 자기 기반에 대한 침식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판단은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어디까지를 잘못된 사상으로 규정하고 어디까지를 계승할지는 현재적 조건에서 재검토되어야만 한다.
화궈펑은 실책을 범해서 물려난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의 외생적 조건들과 내재적 역량이 필요에 다할 수 없었다. 이를 납득하고 순종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역량이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가 숙청된 것 역시 오류로 꼽힌다. 대약진 운동 역시 극좌적 실책으로 규정되며, 이를 수습하기 위한 경제'조정'은 신원되어 류샤오치로부터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의 행보는 정당화된다. 정당한 거 맞지. 문혁은 오류로 규정된다. '혁명'도 '사회진보'도 아닌, '내란'일 뿐이다.
마오의 공헌은 인정하지만, 문혁 이후의 잘못도 그의 과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 공7과3. 마오 사상 역시 갈래를 거쳐 계승된다. 실사구시, 군중노선, 독립자주, 자력갱생이 그 사례로 제시된다. 마오 사상의 '과학적 가치'를 부정하는 태도와 마오 말년의 오류를 성찰없이 그대로 견지하는 것 모두, 지양해야 할 태도가 된다. 역사 결의에서 다 검토된 문제들을 다시 제기하고 싶으면 그만한 소양을 갖춰야한다. 그게 논쟁의 기본 태도다.
이렇게 마오의 시대는 구분되어 정리된다. 당의 필요에 따라 그의 사상은 계승되었지만, 실천 논쟁은 당의 방향을 이전과는 반대로 틀어버렸다. 그 분절성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 근자의 흐름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진리기준논쟁은 내재적으로 그 방향성을 바꿔놓았다. 이념이 주고 실천이 종인 경직적인 당은 해체되고, 실천으로부터 이념을 연역하는 당성이 배양된다. 그 개개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전후의 결과를 설명하는 열쇠이다.
10장. '베이징의 봄':민주화 요구와 정치 참여 1979~1981
중국이라고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겠는가. 농촌에서 도시에서 변화의 바람은 불어오고, 민주벽을 중심으로 '베이징의 봄'이 시작된다. 민주벽, 민간 간행물, 민간 조직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이 지방인대로 나아간다. 1978년 11월부터 소자보가 출현하고, 자보들이 하나씩 벽을 메운다. 300미터에 달하는 벽이 사람들의 의견으로 뒤덮이고, 변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 서로 토론한다. 마오를 비판하고, 덩을 지지하고, 또 이를 비판하고, 마오를 옹호하는 의견들이 모여 공론을 형성한다. 상산하향되었다가 귀환환 이들로부터 도시로 진출한 농민공까지, 삶의 현장을 이겨내던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를 두고 고민하고 열망한다. 정치개혁을. 문혁의 실상을 알게 된 사람들을 지배한 감정은 '속았다'였다.
민주벽은 민간 간행물과 민간 조직으로 이어진다. 전국적으로 87개, 베이징에 21개, 상하이에 61개의 조직이 결성된다. 자유, 민주,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입장에 따라 '개량파'와 '혁명파'로 나뉜다. <탐색>의 발간성명이 참 웅대한 기상을 보여준다.
“헌법이 부여한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근본 지도 방침으로 삼는다. 또한 어떤 이론의 절대적인 정확함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절대적인 정확함도 인정하지 않는다. 일체의 이론은 본간(本刊)의 토론 대상이고, 분석·탐구·토론의 도구다. 관료주의와 독재 파시스트주의를 옹호하는 어떤 언론과 이론도 반대한다.”
대자보는 덩의 개혁을 지지하는 여론이 주를 이루었고, 그의 정치적 행보에 도움이 되었다. 덩 역시 대자보운동을 지지하고, 이는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당의 영도를 흐트러트리는 것은 당의 금기를 건드리는 일이다. 운동이 분출하며 청원이 증가하고 신방국으로 서신이 날아든다. 모순이 오죽했겠는가. 대충청원운동과 민주벽 운동은 결합하며 단체들의 연대로 나타나고, 연합 시위가 시작된다. 그 슬로건은 아래와 같았다.
“기아 반대” “억압 반대” “온포(溫飽: 등 따습고 배부름)를 원한다!” “인권을 원한다!” “민주를 원한다!” “자유를 원한다!"
따라서 4항 기본원칙의 견지라는 노선에 따라 탄압이 시작된다. 잡지는 폐간되고, 주요 인물에 대한 체포가 진행된다. 1979년 선거법 개정은 현급 지방인대까지 직접선거를 하도록 바뀌었고, 경쟁선거가 도입되었다. 이들은 지방인대 선거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시위로 인한 정치적 긴장이 해소되자 다시 전국인대에서 자발적 논의들이 올라온다. '범시파'(문혁좋아사람), '환원파'(당 보수파), '개혁파'(덩 지지)로 나뉜 구도속에서, 정치적 역량의 축적과 사상해방, 그리고 의회제도의 발전을 걸고 이들은 선거에 출마한다. 베이징 시에서 8명의 학생대표가 당선되고, 의안을 통해 제도 개혁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작은 변화라도 당시의 당은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후 이어진 정치개혁의 과정은 이를 보여준다. 경쟁선거의 제한을 통해 후보는 다시 당의 영도 아래로 들어오고, 이후로 민주파가 다시 당선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와 같은 억압은 거리시위로의 분출로 이어지고, 이후의 정치적 격변을 예비한다.
11장. 권력 재편과 정치제도의 복구 1977~1981년
자오쯔양이 정치국 후보위원은 먼저 되었지만 후야오방이 정치국 정위원은 먼저 되었다. 둘은 개혁개방의 쌍두마차로 서로 기량을 경주한다. 1978년 11기 3중전에서 천윈은 부활하고 왕둥싱은 몰락한다. 후야오방이 차세대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주요 인물들이 링에 올라온 것이다. 당무는 후야오방이, 정무는 자오쯔양이 단당하고 덩샤오핑이 이를 지도하는 삼각체제가 성립된다. 화의 용퇴 역시 이 과정에서 신세대에 대한 양보로 포장된다. 원로들은 1980년 11월 10일부터 개최된 정치국 확대회의 이전 화에게 사퇴를 촉구한다. 그는 승복하고 대세에 따르기로 하고 사직서를 제출한다. 10월 23일 사직서가 공표되고, 확대회의는 이를 인준하며 공식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막을 올린다. 이 과정에서 예젠잉은 화가 사퇴하지 않으면 본인이 사퇴하겠다며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자아비판을 한다. 자아비판이 정치적으로 다양한 기능을 갖는다.
"만약 화궈펑 동지가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지난 4년 동안의 모든 잘못은 내가 조성한 것이니 나를 원망하고 나를 비판해도 좋다. 나는 일찍이 사직을 요청했는데, 오늘 이 회의에서 다시 한 번 중앙에 사직을 요청한다. 이것은 벼락이 쳐도 바꿀 수 없는 내 생각이다."
그의 자아비판은 화궈펑의 태도를 바꾸었고, 그는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며 책임있게 일의 매듭을 짓는다. 그도 무의식적으로는 알았을 것이다.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에게 가해진 비판과 경청의 과정은 이를 의식적으로 합일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의 퇴진이 길어진 것은 원로들의 동의를 얻고, 이를 대중적으로 공표하며 간부로부터 대중까지 합의를 이루고, 일을 절차에 맞게 진행하며, '정치적 패자'에게도 물러날 길이 있음을 보이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자를 씌우고 조리돌림을 하며 물리적인 보복과 탄압을 가했던 시대와의 작별이었고, 당의 완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었다. '동지를 살상하지 않는다'가 새로운 당의 불문율이 되었다.
화궈펑은 활동명으로, '중화민국 항일구국 선봉(中華民国 抗日救国 先锋)에서 각 한자씩을 가져와 '화국봉(華国锋)이 되었다. 초년부터 항일유격대로 참전하고, 현서기로부터 탄탄대로를 걸으며 문혁에도 적극 나선다. 말인즉슨 악업에도 적극적으로 손을 댔다는 뜻이지만, 당료들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당 주석, 국무원 총리, 중앙군위 주석을 모두 겸임한 이는 그가 마지막이었다. 우리 시주석이 당주석에 오르면 두번째겠지만. 은퇴한 이후로도 처신에 주의하며 입을 닫는다. 평생 모주석 기일과 모주석 생일 두가지 공식행사에만 참여하며 가족들은 평범한 삶을 살도록 한다. 그의 묘비명이 삶의 검박함을 잘 드러내준다.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 오랜 경험을 거친 충성스런 공산주의 전사,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당과 국가의 중요 직무를 역임한 화궈펑 동지."
담백한 삶이었다. 그라고해서 어찌 권세가 기우는 것을 몰랐겠는가. 자신의 지도노선이 가진 한계 역시, 알만큼 알았던 사람이다. 대약진의 참상에 대해 마오에게 직언했던 것도 그였다. 당의 악업도, 선업도 그의 일이었다. 다만 마오 사후 요구된 시대적 사명이 그가 걸어온 길과는 달랐을 뿐이다. 후야오방을 당교에, 조직국에 임명하며 닥쳐올 운명을 예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석의 후계자가 될 수는 없다. 덩의 편지가 그의 긴장을 늦추었다 해도, 원로들과의 세력관계가 가팔라지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더이상의 갈등을 감당할수는 없었던 것이다. 행한 업에 대한 인지와 시대의 필요가 그의 용퇴로 이어진다.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는 이의 결단은 아름답다.
간부를 치워도 양로보험을 넣어줘야한다. 간부고문위는 밀려난 간부들의 양로보험이다. 구 간부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줬지만, 구태를 거듭한다. 양로보험으로 고문위 넣어줬더니 정책에 개입한다면 정책기능은 없어지는 것이다. 정치를 잘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1980년 11기 5중전에서는 서기처가 복구되며 후계자 양성 기능이 부여된다. 민주집중제에 의한 집단지도체제와 상호 견제 기능 역시 서기처의 주요 역할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서기처 잘 안보이죠? 후야오방이 내려가면서 권한 역시 축소되었다. 서기처 외에도 문혁때 폐지된 중앙당교, 통전부, 선전부, 그리고 정법위원회가 재건된다. 문혁이 당 조직에 큰 혼란을 불러왔다. 다른 조직도 조직이지만 정법위가 없다는 건 새삼 쇼킹하다. 공식적으로 법이란 게 없는 세상이었다.
<당내 정치 생활 준칙>역시 당 조직을 재건하며 주요 원칙을 제시한다. 당내민주, 파벌의 지양, 당원 권리의 강화와 집단지도체제에 의한 당내 가부장제의 근절이 강조된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당대회의 상임제가 실시되며 정치의 제도화가 진전된다. 어쩐지 당대회 숫자가 연차에 비해 좀 비지요... 중국 집권 하고나서도 당대회 좀 꼴리는대로 했음. 이 이후로 연차맞춰서 딱 딱 치뤄진다.
7기: 1945년 4월~6월 (옌안)
8기: 1956년 9월 (베이징)
9기: 1969년 4월 (베이징)
10기: 1973년 8월 (베이징)
이런 새끼들이었다^^... 마오쩌둥이 이런 사람임... 규율이 없다.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 역시 여러차례 강조된다. 말 그대로 피로 새겨진 교훈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진핑 총서기는 ㅎㅎ... 마오 시대에 일어났던 모자씌우기를 비롯한 린치행위에 대한 엄금 역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말이 공7과3이지 실질적으로 역사 결의는 마오 시대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는 문건이 아니라 당규와 준칙으로 드러난다. 상호 견제 없는 권력집중과 당 기구의 기능정지는 결국 자의적인 권력행사로, 당 간부의 군주화로 나타났다. 겸직과 부직의 과다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당시 간부들 보면 직함이 여섯개 열몇개인데 다 허직이다. 허직을 정리하고 실직 중심으로 정리하며 이는 엄격하게 제한된다. 당정이 분리되고, 후계자의 양성이 재차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은 다 어기고 있다.
덩은 권력 집중을 제일 경계했다. 이미 당의 전면 영도가 낳은 폐단으로 신음하는 상황에서, 당의 집권화와 그 권력의 일인 집중은 반드시 패하는 길로 가는 방향이다. 그래서 민주집중제와 집단영도체제를 세심히 설계한다. 반드시 후계자를 지정하게 하고, 제도로 이를 규율하고자 했다. 비록 3대만에 다시 영도소조정치가 나오며 시 총서기가 주석되게 생겼지만. 당의 영도에 대한 그의 강조는 4항 기본원칙의 견지에 의한 민간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난다. 폴란드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가 독특하다. 초기 당 간부들이 이걸 긍정적으로 봤다는 게 신기하다.
"폴란드 노동운동에 대해 중국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다. 즉 일부는 지지하고 일부는 비판했다.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폴란드 노동운동을 지지했다. 첫째, 폴란드 노동자의 투쟁은 정의롭다. 둘째, 이들의 교훈은 반드시 개혁 방침을 철저히 추진하라는 것이다. 셋째, 이번에 소련은 쉽게 침공할 수 없다. 넷째, 중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12장. 덩샤오핑 체제의 확립: 공산당 12차 당대회 1982년
덩샤오핑은 화궈펑의 사퇴 이후 12차 당대회에서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제를 최초로 제시한다. 중국이 달성해야 할 임무로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이 정해지고, 경제발전 목표가 제시된다. 제시된 목표는 2000년 국내 총생산 2조 8천억 위안이었다. 개혁개방은 이 목표를 8조 9404억 위안으로 세배 초과달성한다. 새천륀은 "먹는 것이 첫째고 건설은 둘째"로 규정하며 국영경제와 개체경제의 발달을 주장한다. 개체경제는 발달하지만 국영경제는 오락가락하며 잘 안됐다.
간부의 혁명화, 연소화, 지식화, 전문화가 강조된다. 이는 이후 당교 교육체계의 완비를 통해 실현된다. 지속적인 교육, 세계정세 파악, 기술트렌드 학습을 통해 중국의 당료들은 뛰어난 테크노크라트로 거듭난다. 공부못하면? 승진 못한다. 한번 공부한 걸로 개길 수 있나? 못 개긴다. 당교가 이 원칙에 따라 구축한 간부 학습 시스템은 강도높은 학습과 자아비판으로 간부들을 정련하고, 이는 정책집행과 성과로 실천에서 검증된다. 신규 간부들의 정치국-서기처 진입을 통해 실무 간부들의 연소화 성과가 드러난다. 그러나 주요 정무기구, 상무위원회와 중앙군위 등은 오히려 고령화가 진행된다. 원로정치의 단면이다.
당대의 지도체제는 어떠했나. 덩-자오-후로 대표되는 삼각체제를 이야기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국면에만 적용될 수 있다. 1987년 후의 낙마, 1989년 자오의 낙마는 그 증거이다. 천윈과 덩샤오핑 간의 긴장으로 이를 설명할 수도 없다. 양자는 경제정책에서는 갈등을 빚었지만, 정치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그렇다고 덩의 집권을 이야기할 수도 없다. 중요한 국면, 주요 인사의 임명으로부터 천안문 사태에서 덩은 원로들의 중의에 따라 결정을 집행한다. 그래서 원로정치와 공식정치의 이중구조로 이를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원로정치는 내재적인 문제점이 있다. 원로정치는 비공식 정치로, 제도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더하여, 원로간의 긴장은 공식 정치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낙마는 그 결과이기도 하다. 결국 이 문제는 집단지도체제의 온전한 성립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었다. 원로들이 은퇴하고, 장쩌민으로부터 후진타오 시대에 이르러서야 집단지도체제는 온전히 국가를 통할한다.
요는 농촌개혁이고, 농촌개혁으로부터 촉발된 도시개혁이고, 경제특구의 설치이며, 이 모든 것은 범시파와 실천파의 대립으로, 덩과 화의 대립으로, 그리고 시대의 요구로 응축된다. 일개중심 양개기본점이다. 군중의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 물질적 발전을 이루고, 삶의 풍요에 다다르는 것. 지난 세기의 궁핍으로부터, 새로운 세기의 번영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개혁개방의 시작이었다.
저항이 없지도 않았고, 그 과정이 마냥 아름다운 것 만도 아니었지만, 국가는 그 무게를 덜어내고 제도를 이루며 그 속에서 인민의 자발성이 발현된다. <역사 결의>와 <진리검험 유일기준으로의 실천>이 시대의 흐름을 노정한다. 사람들이,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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