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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부터 전국시대까지 일본의 역사를 20쪽 남짓으로 요약하며 시작하는데 기술에 허투른 부분이 없다. 저자의 일본사에 대한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2권짜리 책인데 아무래도 내용이 어떨지몰라 1권만 덥썩 샀는데 바로 주문함.
동아시아 해양교류사 또는 해적사는 독자적인 주제로 역사 전반을 걸쳐서 한번 확인해볼만한 과제이다. 백제와 신라를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a.k.a 해적질), 여진족의 해상무역으로부터 고려 후기와 조선조까지의 왜구의 침략과 그 실질적 구성은 그 중요성에 비해 간과된 측면이 많음.
당대 통치 체제의 실질과 구성을 제도의 변화로 압축적으로 스케치한다. 센코쿠시대의 성립과 다이묘들의 영지 통할의 집적도를 짧은 문장으로 간명하게 그려낸다. 노부나가가 일본이라는 국가에 가져온 변화, 히데요시에 의한 보편적 적용, 그리고 이에야스에 의한 완결까지.
후다이와 도자마의 구분 이후로 잔당을 완전히 정리하기까지 5대 1300만석의 석고 변동이 있었다. 이후로 영지의 변동 자체는 다이묘의 품위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참근교대는 인질과 다이묘의 충성을 확인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획되었지만, 전체 사무라이 계층의 공통경험을 구축하고 문화를 정규화하는 도구로써도 기능했다. 그 필요가 사라진 시점에서도 참근교대인원은 유지되거나 증가했다는 점이 제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기독교와 주민등록제도. 절이 일종의 주민센터로써 호구관리의 책임을 맡게된다.
에도막부의 대외관계. 막부 초기의 다양한 대외정책은 시간이 지나며 일부 특권층의 독점이라는 형태로 축소된다. 에도막부와 조선 관계.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부터 포로로 잡혀간 도공들이 각지에서 자기문화를 꽃피운다. 통신사는 유학, 한학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지만, 일본 내부적으로 자체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고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선전의 대상이기도 했다.
에도 막부 시기의 기독교 탄압은 종교적 열정에 의한 사건이라기보다는 막부의 질서를 번에 강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목적의 중심을 통치력의 현시와 세밀한 통제수단의 도입이라는 쪽으로 보는 편이 더 맞지않을까. 그 와중에도 신앙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보여준다.
천황으로부터 공가와 다이묘, 사무라이와 농민, 그리고 조닌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의 계급구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도쿠가와 막부의 사회질서를 역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다양한 역이 그 계층에 맞게 분화되어 서로 상보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사회로도, 고착된 계급구조 하에서 사회적 모순이 때에 따라 분출하는 사회로도 바라볼 수 있을 듯.
천황과 그 공무는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 새롭게 정리되고 기존의 전통을 복원하며 안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공가는 이를 보좌하며 다이묘들과 문화적/인적 교류로 이어지고 이는 근대로 접어들며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사무라이는 지배계급으로써 특권을 누렸지만, 당대 사회현실이나 사무라이의 계급에 따른 봉록을 봤을 때 그 생활형편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전체 인구의 5-6%를 차지한 사무라이들은 계층별로 분화되었고, 조카마치 내에서 농민과 분리되어 관료 계급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다. 도사번을 기준으로 보면, 가로와 주로들은 각각 1500-1만석, 45-1500석의 봉록을 받았고 그 이하 계급들은 100-700석의 봉록을 받았음. 실제 수입은 그 절반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을 규율하는 건 명예와 사회적 존중, 그리고 자기희생으로써의 할복이다. 일본문화를 보면서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어려운 듯. 할복은 대체 무엇일까...
당대 농민의 생활상은 노동수용소와도 같은 집단농장에서 가혹하게 수탈당했다는 입장에서 촌로를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리며 사무라이들이 조카마치에 갇힌 것을 계기로 자율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다방면으로 분화되었다는 쪽으로 관점이 분화한다. 근면혁명 책 담아놨는데 관심이 가네.
조닌들의 구성과 분화. 미쓰이나 스미토모같은 상가들이야 어련하랴마는 모든 조닌들이 그와 같은 위상을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떠돌이 행상으로부터 개별 직인, 의사같은 전문직까지 조닌의 구성은 다양했고 시대적 수요와 경제의 발전에 맞추어 분화되었다.
이런 다종다양한 각각의 계급구조를 역과 각 직역간의 존중과 감사의 표시, 역간의 위계에 따른 구분으로 통합되어있던 구조로 접근한다. 사농공상이라고는 하지만, 그 직역간의 위계, 그리고 개인간의 우열은 단순히 직업으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데 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 부분들이 있음.
참근교대와 일본사회. 참근교대는 주기적으로 번의 다이묘와 그 수행원들을 에도로 빨아들이고 뱉어냄으로써 국가 전체의 교통망을 지속적으로 정비할 유인을 주고, 도로망의 숙역을 발전시키며 유통망을 활성화했다. 에도로 모여들고 하가하는 행렬들을 통해 개별 번의 영민들에게도 번 밖의 세계와 국가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는 연극적 장치로도 기능했고. 에도를 통한 문화적 통합도 그 기능의 하나였다. 참근교대를 통해 에도시대 일본사회는 그 이전의 새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민족적 실체를 형성하게 된다.
에도의 도시설계, 에도성을 중심으로 다이묘들의 저택이 자리잡고, 상급 사무라이와 하급 사무라이, 그리고 조닌들의 구역이 배치되고, 성민 모두가 각 구미에 소속되어 소방부터 치안까지 각각의 역에 따라 책임을 나누고 기능을 수행한다. 역으로 구성된 사회구조의 단면이 다시한번 드러난다.
미쓰이와 미쓰비씨, 시로키야, 마쓰자카야 등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상업의 발달과 오사카가 당대 경제에서 수행했던 경제중심으로써의 역할, 오사카가 갖는 미곡거래의 중심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며 파생된 거래의 양상들을 소개한다. 각 다이묘들의 곡창을 통해 미곡거래가 모아지고, 미곡에 대한 선물거래를 통해 금융과 파생시장이 발전한다. 전 일본의 미곡이 출입하며 물산 또한 오사카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이는 오사카, 에도 축선을 통해 활발히 유통된다. 오사카 상점의 교토 지부들이 갖는 유통망으로써의 성격은 현대에도 다양한 점포들을 통해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미쓰이 가의 가훈이 인상깊다. 가문의 경영을 위해 신의를 다할 것, 능력위주로, 딸에게도 열려있는 경영권의 계승, 관가와의 거리유지와 업의 본질에 대한 강조, 그리고 종교에 대한 투여를 통한 부의 과시보다는 기민에 중심을 둘 것이라는 명제들은 오늘날에도 상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준다. 역에 따른 본질의 구분이 갖는 전통의 계승과 업의 발전이 에도 시대 각 분과의 변화발전에 핵심적으로 작용한다.
지카마쓰 몬자에몬을 통해 인정(人情、にんじよう)과 의리(義理、ぎり)와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가 당대 정서의 핵심을 관통함을 그의 세사극(世話物)과 시대극(時代物)을 통해 비춘다. 세사극에서는 불륜에 빠진 상가의 인물과 유곽의 인물, 그리고 그 배우자를 통해 당대 사회가 인물들에게 강요했던 의리, 남편의 불륜을 알면서도 양자 모두에게 자신에게 요구되는 의리를 지키는 배우자의 모습과 자신에게 강요되는 의리와 불륜 상대자와의 인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우, 그리고 의리를 지키는 배우자에 대한 수오지심과 인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정과 의리라는 테마가 어떻게 작용하여 동반자살로 마감되는지 보여준다.
추신구라의 원전이 되는 작품에서도 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추신구라를 생각하며 실제 사건이 어땠는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 듯. 그보다는 인물들의 정동을 보는 게 맞게 보는 방법이겠다. 아사노의 할복과 개역으로 가신들에게는 복수라는 의리 또는 의무가 부과되었고, 인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가신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 또는 업을 한줄기로 수행해낸다. 여기에서 할복은 인정과 의리를 자기희생으로 끊어내는, 가치간의 모순을 돌파하는 자기희생으로 해석된다. 할복으로 스스로를 희생하여 책임을 다하고 가문으로 그 업을 잇지 않으며 자기 선에서 매듭을 짓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할복이 갖는 의의가 조금 더 잘 와닿는다.
일본의 보통교육의 발달. 상업의 발달과 국내 연결성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전반적인 삶의 복잡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에 대한 수요가 촉발되기 시작했고, 번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의도를 갖고 시작된 교육사업은 다양한 형태의 보통교육기관의 설립과 수학인원의 증가로 나타났다. 에도시대 말기의 추산에 따르면 전체 남아의 40%, 여아의 10%가 수학중이었다고 하니 민생의 발전과 그에 따른 교육의 수요가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하다.
송학의 전래와 지배 이데올로기로써 송학의 채택은 막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나 항상 원하던 결과를 낳은 건 아니었다. 충과 효라는 개념은 일본적으로 전유되어 착근했고, 아코 번 사건에서 드러나듯 일상적인 차원에서 온전히 자리잡지는 못했다. 소라이 의율서의 유명한 말이야말로 이 모순을 잘 보여주는 듯.
만약 사론(私論)으로써 공론(公論)을 해치면 차후 천하의 법은 설 수 없다.
若し私論を以て公論を害せば、此れ以後天下の法は立つべからず。
외래사상에 대한 국학의 반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만엽집에 대한 연구와 고문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일본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시작된다.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를 통해 표상되는 단순화와 압축적인 정서의 표현, 미감에 대한 극단적인 추구는 국학자들에 의해 재해석되며 고유의 사조로 자리잡아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추상화와 유미주의적 관점이야말로 현대 모더니즘 사조와 잘 어울리는 듯. 국학자들은 농학 등 다방면에서 실생활에 접목되는 부분들을 찾아가 현실에 착근을 시도하고, 이는 성공적인 정착으로 나타난다.
오규 소라이에서 스기타 겐파쿠로. 난학의 시작과 인체 해부를 통해 실사구시와 번역을 통한 지식습득체계는 자리잡혀간다 35개 쿠니에서 온 다양한 제자의 구성은 난학의 뿌리가 일부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조류를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일본의 번역현황을 보며 한국 번역 현실의 빈한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역사성과 사상적, 물적 기반을 생각하면 저정도 번역기반을 갖추는 데 오랜 역사와 전승이 끼친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역과 업의 구축과 계승이 일본 문화의 저변에 잔잔히 자리하고 있다.
에도 막부에서 불교는 체계적인 통제의 대상으로 국가기관의 일부가 되어 호적을 정리하고 기초행정기관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관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었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역동성이나 본연의 기능은 퇴색되어갔고, 이는 승가에 대한 비꼼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 신도는 무정형의 존재로, 민간 영역에서 전통적 기능을 수행하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형태로 자체적인 규율에 따라 느슨하게 분산되어있으면서도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하여 주요 신사를 통햐 그 전국적 조직력을 유지해왔다. 에도막부의 종말이 다가오며 국학파와 토막파들이 신토를 반정립의 대상이자 체제의 일부로 포섭하게 되는 데에는 신직에 대한 조정의 관할 이외에도 이런 점들이 있지않나 싶음.
에도 시기를 정적인 시대로 묘사하거나, 주요 기근과 사건사고들의 문제를 인구의 문제로 접근하는 건 일견 합리적이나 현대의 연구결과는 다른 면을 시사하고 있다. 기존의 인구추산은 센코쿠시대 이후의 인구에 대한 과대추산의 경향이 있다고. 에도시대 초기(1600년)를 1200만 정도로 추산한다.
에도시대가 진행되고 무라 단위의 경제발달, 번 단위의 결속 강화와 각 번의 쿠니로써의 이윤추구 경향의 강화, 물류와 유통의 진화와 그 중앙 시장으로써의 오사카, 에도의 역할은 체제와 실질의 균열로 이어졌다. 후기로 갈 수록 막부의 그립은 약화되었고, 번주의 속민에 대한 예속도 풀려나간다.
시장 발달과 정보전달 속도의 발달, 실제 생산량과 막부 기준 석고의 차이등이 이런 불일치를 보여준다. 관가의 파발이 6일 닿는 거리를 민간 파발이 5일, 4일, 3일로 줄여내는 것이나, 생산량이 증가했음에도 기준석고를 못 올려서 증세를 못하는 것들을 보면 각 쿠니의 생산력 증대를 막부가 포괄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일례로 도사번 제지공들에 대한 번주의 세금 부과 시도에 저항해 500명의 제지공이 타 번으로 도망가며 17개조의 요구를 제출한 사건에서 번주는 요구안을 모두 받아들이고 도망친 속민들을 다시 받아주게 된다. 주모자 세명의 목숨망을 취하고. 촌민에 대한 번주의 수탈시도나 번들에 대한 막부의 수탈시도는 대개 좌절되거나 타협으로 끝났다.
이에나리가 자기 서자를 번주 만들어주려고 보냈다가 촌민들 항의와 도자마 다이묘들 23인 연서명 받고 빠꾸먹은 거 보면 양식있는 이들이 체제의 종말을 예감한 것도 지나친 우려는 아니다.
요시무네는 이런 경향성에 대응하여 인재등용 절차의 강화, 검약의 강조, 실용성에 기반한 체제 정비를 통해 막부 체제를 일신한다. 능력있는 인재의 선발과 공론의 취합, 행정의 재조직과 법치의 진일보를 통해 막부 체제는 합리성과 실용성에 기반한 체제의 재정비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그의 경제정책은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고, 이는 말기 일부 정책들의 철회로 나타난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볼 때마다 참 시대를 잘못 만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다이 중심의 지배구조를 일신하고 당대 경제 흐름에 맞는 정책을 포착하고 추진하려 했으나 텐메이 대기근과 그에 따른 여파로 실각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걸 보면 관료로써의 관운과 시기가 불러오는 운때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듯.
이후 1800년대부터 1830년까지는 상대적인 풍요와 발전이 계속되지만 체제 내 모순은 지속적으로 그 크기를 키워나가고, 이는 일면으로는 텐포 대기근과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반란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미즈노 타다쿠니와 텐포 개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미 권력의 균형이 분산된 상황에서 텐포 개혁은 막부와 후다이 다이묘와의 결합마저 깨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많은 이들이 예감한 것처럼 체제는 외부의 세파에 노출되게 된다.
막부 체제 내에서도 해외의 지식은 열도로 계속 유입되었다. 백과전서의 번역, 해국도지의 전래, 아편전쟁의 소식등은 열도 전역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불안감과 변화와 발전에 대한 필요성을 불어넣었다.
난학이나 외부 지식에 대한 막부의 태도는 혼란스러웠다. 동도서기적 관점에서 막부 체제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이를 체제 내화하려는 시도는 곧 사산되거나 내부의 중상에 의해 무화되어버리곤 한다. 이는 역풍과 외풍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도와 좌절의 반복은 역설적으로 막부 체제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축적한다.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의 대옥과 이어지는 혼란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들. 정한론의 주창자로만 다뤄지는 경향이 적지 않지만 요시다 쇼인은 당대 일본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가쓰 가이슈가 막부측에서 역할을 하며 메이지유신을 열었다면, 요시다와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영걸들이 되었다. 이와쿠라 토모미를 비롯한 공가와 국학파들, 사무라이 정신에 사는 지사들까지, 유신의 정치적 토양은 그 방향성이 다양하기 그지없어 아사리판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서 니시기노미카타가 정확히 어떤 의미였나. 말이 천황의 깃발이지 실질적으로는 당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고있던 시대정신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천황은 이 국면에서 기표로만 존재하지 기의로써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일본 사회에서 요구되어왔던 군주 본연의 목적에 맞게 충실히 기능한 것일지도.
이윽고 토막이 시작된다. 토막의 구체적인 여정이나 세부적인 관계들이 기술되지는 않는다. 그런건 101에서 다 떼고 오는거고, 대신 큰 흐름에서 영향을 미친 주요한 인자들의 상세가 서술된다. 왜 토막이었는가. 막부는 지닌바 실질에 비해 드리운 위세가 컸고, 더이상 막부 체제로 다가오는 세대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막부의 여러 퇴행과 개혁의 실패로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는 여전히 지닌 위세에 기대어 통치행위의 흉내를 내지만, 한번 새어나가기 시작한 권세를 다시 그러모을수는 없고 이는 결국 파국에 이르르게 된다.
사쿠라다몬의 변이 갖는 의미를 조금 더 당대 지사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안세이 대옥이야말로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는 막부의 퇴행이었고, 따라서 사쿠라다몬의 변은 그러한 막부의 폭력적 독점에 지사들의 의기로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난세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사건이었다.
일본에 들어온 외국인들. 왜 일본인들은 외국인들을 그렇게 죽여쌓나. 당대 일본을 지배했던 배외감정에 더불어, 민족지적 연구열정에 넘치는 백인들의 느자구없는 행동이 그 많은 폭력사건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결국 수많은 외침과 수탈로 매듭지어졌지만 문화적 갈등의 에피소드와 동시에 교류의 에피소드들이 교차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견서행이 이어진다. 일찍부터 난학을 통해 해외 지식을 습득했던 가락에 맞추어 공식 관할을 가진 어소의 계획에 따라 수많은 일본인들이 견서행에 나선다. 일본 친구들이 산업발전이 근대의 원동력임을, 군사문화의 핵심은 국민개병에 있음을 빠르게 파악하고 순식간에 적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조선 자본주의 맹아론은 사실 일본 사회에 적용하면 훨씬 말이 되는 이론이다. 역내 경제망의 통합과 경제중심, 정치중심의 구성, 그리고 개별 지역경제권의 발달과 경제구조의 복잡화, 정교한 분업의 발달과 국민 교육수준의 향상 등 에도시대는 전체 일본인의 역량축적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고, 쇄국이라는 말과 다르게 어느정도의 지식전달과 정보습득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시기기도 했다.
지방의 부농과 숙역들도 대외정황과 국제정세에 관심을 갖고 뜻을 정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 전체의 정치적 성숙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그에 반해 막부의 권력은 에도와 교토로, 에도 내에서도 이에모치와 요시노부로, 천황은 천황대로 누구도 다가오는 시대 앞에서 강단있게 자신의 비전을 제시할 깜냥을 갖추지 못했다.
다가오는 시대의 조류를 타고 국가가 나아갈 비전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제시할 수 있는 이들과 혼란스러운 세태 속에서 지닌바 권력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급급할 뿐 더이상 시대와 불화하는 구체제를 개혁할 비전도 의지도 없는 이들간의 갈등은 그 세부적인 디테일에 차이가 있었을지언정 결국 결말이 정해진 여정이 아니었을까.
메이지 정부 수립 초기에는 체제를 갖추는 과정이 필요했다. 인재를 발탁하고, 정관을 갖추고, 무력을 확보하고 행정을 건설한다. 한번 가다가 잡히고 나서는 거침없이 전진한다. 판적봉환으로 토지를 틀어쥐고 폐번치현으로 행정권을 국가에 귀속시키며 불교를 탄압하고 국가신토를 통해 종교를 국가의 통제 아래로 들이며 절과 신사의 토지를 국가로 귀속시킨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는 각 계층에 어떻게 작용하였나. 다이묘들은 이 정치적 변화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유신을 이룬 지사들은 대부분 유신웅번의 하급 사무라이였고, 그 과정에서 다이묘들은 위세로 사용될 뿐 실질은 지사들에게 있었다. 이후 화족이 되며 경제적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번주로써의 지위와 권세는 시대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다양한 역을 구성하고있던 대부분의 농민은 어떻게 되었나, 무라를 구성하던 전통질서는 세제의 개편과 토지제도의 변경을 통해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는 형태로 바뀌었고, 토지에 부과된 조세는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촌의 권력을 전통적인 자치질서로부터 개인적인 부를 소유하고 교육등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었던 호농들에게로 이양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변화에서 사무라이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존에도 인구에 비해 과도한 수를 점유하던 사무라이들은 번정의 봉환과 함께 생계에 어려움을 맞닥뜨리게 되고, 사족과 졸족으로 구별되어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폐도령은 이들 계급의 재정적, 정치적 기반을 거세해버렸고, 결국 이는 세이난 전쟁으로 연결되며 사무라이 최후의 저항으로 나타난다. 세이난 전쟁이 마무리되며 일본은 하나의 근대국가로 완성되고, 그 키는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일본 근세사를 보면서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이 종종 있었다. 어째서 요시노부는 그렇게 쉽게 항복했는지, 이이 나오스케는 왜 사쿠라다몬에서 그렇게 죽었으며, 그게 대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는지, 아코번 사건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기저에는 무엇이 깔려있는지, 할복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일본은 성공할 수 있었고 조선과 청은 그 문턱을 넘지 못했는지.
에도사회는 천황 아래에서 위세를 수립한 막부 아래 각 번이 실질적으로 통치를 수행하는 단위로 기능했던, 사회 각층이 촘촘한 역으로 조직되어있는 사회였다. 역과 업이 일본인의 미시생활을 지배했고, 이는 사회적 분업으로 기능하며 각 분야에서 역량촉진과 전문화를 통해 전반적인 수준 향상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역과 업은 인정과 의리라는 정동을 통해 그 간극을 보인다. 동반자살로 끝나는 닌교조루리 대본에서 주인공은 업으로 구성된 전통관계와 인정으로 맺어진 불륜관계 속에서 인정과 의리 사이의 모순으로 번뇌하다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아사노의 할복과 개역 속에서 가신들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정을 내려놓고 쿠라노스케를 따라 키라의 목을 딴다. 인정에 연좌된 책임을 할복으로 끊어내는 지점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건 그런 전차이다. 할복은 자기희생을 통한 최종적인 책임완수의 표상이다.
에도막부의 위세와 실질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불일치하기 시작했다. 사회는 경제적 역량발전과 오사카를 통한 시장 형성을 통해 그 복잡도가 높아지는 반면 석고와 시장에 대한 통제수단은 사회적 발전을 추종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균열을 낸다. 요시무네의 개혁이나 다누마의 시도들이 이 변화를 포착하고 이에 대응하고자 했지만 결국 요시무네도 시장을 손 안에 넣지는 못했고 다누마 역시 세파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본이 정적 평형 속에 변화하고있는 동안 외세의 변화는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 사회로 전해지고, 막부의 위세와 실질 사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신학문의 전래와 이에 대한 막부의 비일관적 대응은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덴포 대기근과 덴포 계혁의 실패로 막부의 균열은 한계를 드러내고, 그 위에 흑선 출몰을 시작으로 한 열강의 개입이 시작되며 시대는 요동친다.
유신웅번의 사무라이들, 쇼인의 제자들, 수도의 공경과 야심에 찬 다이묘들이 위기에 대한 대응을 놓고 막부와 격돌하고, 안세이의 대옥으로, 그리고 공무합체를 통한 지배권의 재확립으로 정국은 혼탁에 혼탁을 거듭한다. 막부의 대응이 부족하다면 부족했지만 막부 역시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음에도 시대의 흐름이 유신지사들에게로 기운 것은 결국 비전의 문제다.
다가올 시대는 어느시대이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 유신지사들이 모두 한 방향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지속되는 갈등의 와중에서 국가의 비전은 한쪽으로 모아졌다. 막부의 위세와 실질사이의 괴리는 권력에 대한 보수성으로 그 크기를 더해갔고, 결국 흘러가는 세태 속에서 파열음을 내며 시대를 다음 이들에게 넘기고 만다.
누수되기 시작한 권력은 돌이킬 수 없고, 낡은 체제는 부서지기 전까지 개선되지 않는다.
작가의 서술방식이 흥미롭다. 쇼군 하나하나를 소개하고 그 계서를 이야기하고 당댜의 변화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시대 전체를 통으로 묶어 통치, 제도, 계급, 문화, 사상, 종교 각각의 각을 뜨고 이 변화의 누적으로 전체의 흐름을 짚은 후 핵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제 분과를 묶어 결론을 낸다. 압축적으로 정제된 문장이 글의 맛을 더한다. 다만 이 책만 봐서는 연대기상으로는 비는 곳들이 많이 생기니 첫 책으로 추천하기는 어려울 듯... 오랜 고민에 답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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