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일본사

<포스트 전후 사회>, 요시미 슌야

stingraykite 2026. 1. 30. 09:53

 
일본 사회를 전후, 포스트 전후로 나눠보며 그 분기점을 1970년대로 잡는다. 분기점 전후의 체제, 좌파운동, 산업, 가족, 주거로부터 범죄까지를 통해 일본 사회의 변화를 비교하고, 포스트 전후사회와 신자유주의의 발흥, 이에 대한 사회의 변화를 추린다.
 
1장. 좌파의 종말
 
아사마 산장사건으로부터 전후 사회에서의 좌파의 발흥, 그리고 산장사건의 배경이 된 조직들의 변화와 당시 좌파들이 겪었던 이념과 현실의 괴리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나타내고, 이들의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통해 그 변화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전후 사회에서 강고한 노동운동의 형성은 공산당의 지도와 성장을 통한 고용환경의 탄탄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경제주의에 경도된 조직들이 이탈하여 별도의 노동조합을 구성하고, 경제의 발전은 개인화, 소비사회화를 부추긴다.
 
극단적인 좌파들은 폭력혁명을 추구하며 적군파로, 범죄를 통한 활동자금의 조달과 무장투쟁론의 극한 추구로 치달으며 개인의 '공산주의화'를 추구하지만, 그 결과는 소비적 성향에 대한 탄압과 '총괄'을 통한 12명의 죽음, 그리고 산장사건으로 귀결된다.
 
노조의 경제주의로의 경도, 소비사회의 전면화는 전국적으로 90%를 찍은 대규모 리조트 개발단지 가루이자와의 외곽에서 일어난 아사마 산장사건에서 구 좌파의 종말로 귀결된다. 그러나 소멸하는 것이 있다면 태어나는 것도 있다. '베헤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과 같은 보통의 시민들이, 지속가능한 형태의, 결과적인 문제의 해결과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시민운동으로 모여들고, 기존의 논리로부터 개인의 문제들에 집중하며 여성해방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오키나와에서의 기지 반대, 본토 반환 문제 역시 집중된 미군기지와의 갈등 속에 실마리를 얻지만, 성과와 한계를 안고 다음 세대로 나아간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젊은이들의 집단적인 자기 폐색이었다. 젊은이들은 ‘ 권력 ’에 대한 이의 제기에 더욱 열중하면서 이것을 자신들의 세계를 넘어선 어떠한 층, 조직, 정치 역학과 연결하여 사회를 변혁하는 힘으로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실효성 있는 전망을 상실하였다."
 
2장. 풍요로움의 환상속으로
 
일본 경제는 대장성과 경산성의 인도하에 집중적인 산업투자와 수출의 도약으로 거대한 성장을 이룬다. 이자나기 경기동안 연간 성장률은 명목 17.3%, 실질 11.6%을 기록하며 총류 중산층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세계 2위의 수출대국이 되고, 이는 오사카 만박을 통해 재차 드러난다. 오사카 만박은 전체 일본인의 참여와 경험을 통해 소비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이정표가 되어준다. 총 관람시간 6시간 30분 중 대기시간이 4시간 30분이었다는 것, 일간 평균 관람객이 50만명, 말기에는 85만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경험의 폭이 충분히 일본인 공통의 역사로 자리잡을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큰 건물이 있고 사람이 북적이고 뭘 사든지 비싸네”라는 군마(群馬)에서 온 남성과 “무엇을(보았는지) 뭐라고 묻든지 무리다. 나는 ‘ 박람회 ’를 보러 왔다” ( <読売新聞> , 9월 7일)라는 시즈오카(静岡)에서 온 남성의 발언은 당시 일본인의 평균적인 박람회 체험을 보여준다. -
 
만박을 기점으로 구성된 언론매체의 홍보, 당대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가, 산업역량의 현시는 도심의 재개발, 슈퍼마켓을 통한 소비환경의 현대화, 파루코에 의한 쇼윈도우의 병렬적 구성을 통한 '극장'의 구축을 통해 도시 공간을 재구성하는 흐름으로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극장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디즈니랜드이다. 단일입구는 입장으로부터 퇴장까지의 동선을 공통적으로 기획하고 고객경험을 극대화하기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개별 관에서 관람객은 각각의 씬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의 경험을 내화한다.
 
이와 같은 경기의 팽창과 소비사회의 구축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금 태환 중지, 환율 젼동이라는 경기충격과 함께 위축된다. 환율이 1973년 2월 14일 달러당 360엔에서 264엔으로 1년만에 대폭절상되고, 오일쇼크가 덮쳐오며 물가인상은 전방위적으로 나타난다. 62%의 지지율과 함께 일본 열도 개조 계획을 야심차게 내세웠던 다나카 내각은 록히드 사건으로 붕괴하고, 자본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흐르기 시작하며 신자유주의 시대를 예비한다.
 
3장. 가족은 해체되었는가.
 
중후장대에서 경박단소사회로의 이행이 시작되고 총류 중산층이 형성되며 자가소유율이 올라가고 차로부터 가전이 생활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일단의 핵가족화는 가족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시킨다. 가정 내 가사준담과 부모의 역할에 대한 인식변화가 일어나고, 70년대 들어 정규직 아버지와 시간제 어머니라는 형태의 고용 형태 변화가 일반화된다. 부부별성에 대한 인식 역시 1973년의 26%에서 1993년의 34%로 증가한다. 물론 여전히 혼인, 육아 시기의 경력단절과 남녀간 임금격차(60%)는 현격했다.
 
대가족의 해체가 가족의 해체로만 이어지지도 읺았다. 오히려 가정의 규모 감소는 내적 응집성의 강화로, 가부장의 권위에서 가족의 우애로 이동해간다. 물론 가족의 실질적 결합력은 핵가족으로 이동하며 약화된다. 특기할만한 사항은 혼전순결 인식의 변화다. 1973년만 해도 혼전순결에 상관없이 관계를 맺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19%였다. 1998년에는 이 비율이 48%로 증가한다.
교외화 역시 이 시기 하나의 특징이다. 교외를 따라 생긴 새로운 상점들이 도로 연변 비즈니스를 형성하고, 농촌의 교외화가 촉진되며 도시와 농촌 간 인식의 간극이 좁혀진다. 마이홈 붐은 교외 주택단지의 개발로 이어지고, 전 국토의 교외화를 통해 공통의 생활환경이 마련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자가보유율의 상승으로도 나타난다. 1984년 도쿄와 오사카에서 37%였던 자가보유율은 1995년 각각 42%와 48%로 나타난다. 당시 전국의 평균 자가보유율은 60%였다.
 
1968년 도쿄, 교토, 하코다테, 나고야에서 일어난 N.N의 연속 권총 사살사건, 그리고 1988년 도쿄와 사이타마에서 일어난 M의 연속 유괴 사건은 이 기간중 일어난 변화를 상징한다. 실물적 격차감각이 유발한 전자의 사건과 실물로부터 유리된 허구적 자아에 의한 후자의 사건은 이 기간 중 일어난 사회의 해체와 실물로부터의 이반을 드러낸다. 미야자키의 사건에서 특촬물과 아니메, 사진을 통한 세계와의 연결이 표상하는 허구적 가상에 대한 집착은 이후에도 히키코모리로, 같은 리듬으로 잔복되며 퍼져나간다. 쇼와 천황의 죽음과 그 추모의 물결에서 느껴지는 국가의 '할아버지'에 대한 상실의 애감과 '내폐화'는 이를 가일층 점증시키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4장. 지역 개발이 남긴 것.
 
미나마타병과 이에 대한 소송, 정부의 은폐와 사실의 인지에도 불구한 묵살은 전후사회의 산업중심적 면모가 보여주는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외에도 이타이이타이 병, 도카이만의 폐수 오염 등은 당시 산업의 발전이 환경과 농촌을 어떻게 개척하고 소외시켰는지 보여준다. 이는 환경에 대한 운동으로, 환경청의 설립으로 나타난다.
 
환경청은 그간 시민사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환경문제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구축한다. 환경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방 행정에서 제도적으로 구축되어 의미있는 성과를 내고, 그것이 환경청에서 제도화되어 전국적인 틀로 자리잡힌다. 그러나 오일쇼크와 경기의 반전은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76년 이시하라 신타로에 의해 개방적 소통의 후퇴, 전면적인 규제의 완화로 역진하게 된다.
 
전후와 포스트전후를 가르는 열도 개조 계획에서 그간 소외되었던 지방에 대한 짖약적 산업정책이 기획되며 부동산 상승과 원주민의 소외로 나타났지만, 오일쇼크와 환율 변동은 자금수축을 통해 이와 같은 생산투자를 중단시켰다. 그 과정에서 마을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 주민들의 반대운동도 거세졌다. 이를 신전총 하에서의 무쓰오가와라 개발을 통해 확인해본다.
생산투자가 위축되자 중앙은 지역의 의견을 반영한 3전총을 구축하고 인프라와 환경 정비를 한 축으로 가져가지만, 역설적으로 지역에서 산업투자에 대한 요구가 올라오며 도시와 농촌에 대한 횡적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러나 80년대 나카소네 정권의 4전총으로의 이행과 함께 제정된 민활법은 민간의 개발을 활성화하며 도심의 고도개발과 지방의 리조트개발이 추진된다. 이는 10년간 600만 헥타르, 전 국토의 16%에 영향을 미친다.
 
도심의 고밀개발은 서비스 산업으로의 이행에 영향을 미치고, 지역의 무차별개발은 교외화를 촉진하기도 했지만 키치의 범람으로도 나타난다. 지역의 관광산업으로의 중심이동은 유바리 시의 과잉 관광투자와 지자체 재정으로 인한 철수사업 인수로, 결과적으로는 지자체의 도산으로 연결된다. 고용의 유지를 통한 지역 쇠퇴 방어라는 점에서 이를 방어하지만, 정말 필요했던 것이 탄광에서 관광으로의 산업 이전이었을까. 때로는 수축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일본의 지방소멸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2006년부터 07년까지 이루어진 775개 시정촌 앙케트 조사 결과는 전체 7,873개 집락이 고령자가 50% 이상인 한계집락으로, 그중에서도 2,917집락은 기초적인 공동체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집락은 대부분 송금에 의존하여 삶을 꾸려나가며, 농지와 산지에 대한 관리 역시 방기된다. 이는 환경의 황폐화로 이어진다.
 
이에 대응하여 촌락 차원의 '마을만들기'도 이어진다. 유후인의 습지보전운동이 그 예이다. 유후인의 습지에 골프장 개발계획이 들어서고, 여관업자들과 지역주민들에 의한 '유후인의 자연을 지키는 모임'이 이에 반대하며 전국의 황경운동과 연대하여 개발을 막아낸다. 이후로도 수차례 개발시도가 이어졌으나, 촌락 차원의 특성을 강화하며 관광 명소로써의 풍광을 지켜내고 지역의 독특함을 가꿔나간다. 오타루의 운하 역시 결과적으로는 복개되었지만, 지역의 역사를 유지하며 역사를 중심으로 행정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니가타시 서쪽 마키마을의 원전 반대 운동 역시 도호쿠 전력의 원전 설립에 대해 69년부터 반대운동을 전개해왔지만, 지속적인 포섭과 정체에 직면해왔다. 90년대 들어 자역정치의 활성화와 함께 압도적인 주민투표로 전기를 맞고 2003년 최종적으로 백지화된다.
 
5장. '잃어버린 10년'속에서
 
옴진리교와 고베 대지진, 버블의 붕괴로 헤이세이의 시작은 하나의 분기가 된다. 급격한 금리인상과 LTV의 축소는 이미 충분히 팽창한 부동산과 주식의 버블을 일거에 상각시켰고, 이후 일본 경제는 긴 대차대조표 불황에 접어든다. 경기가 양의 국면에서 음의 국면으로 전환하며 신규투자가 일어나지 않고 비용절감과 부채상환, 신용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인한 화폐의 순환 사이클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고베 대지진은 개발 위주의 정책이 낳은 결과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포트아일랜드와 롯코 아일랜드 등 인공 섬의 액상화와 고가의 붕괴는 개발경제의 지속불가능성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옴진리교 사건 역시 1장의 아사마 산장사건과 함께 대구를 이루며 미디어를 통해 학습된 종말론을 받아들인 신도들에 대한 최종 해설자로써의 교주의 명령이 낳은 참극이었다. 전자가 현실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유리되고 극단화된 분파가 벌인 참극이었다면, 후자는 현실에서 유리된 분자들이 종파를 이루어 이미지의 늪에서 응결되고 사회로 분출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의 해체는 국철 민영화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신보수주의 학자들을 적극 영입한 나카소네 내각은 규제개혁과 민활법으로 민영 경제의 활성을 목표로 움직였고, 이는 '작은 정부'라는 목표를 향한 전진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의 활용과 '극장정치'는 이후 고이즈미 정부에서도 보이는 특성이다. 국철, 전전, 우정 등 3공사 민영화를 천명하고, 개발 경제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부설된 철도의 부실화에 의한 적자가 누적 30조엔에 달했던 국철은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1987년 제2임조와의 의견교환을 통해 6개 회사, 여객, 화물의 분리, 회사의 청산을 포함한 37조 5천억엔 적자 처리와 20만의 직원삭감을 포함하는 국철의 대전환이 시작된다.
 
노조는 국철개혁공투위원회를 조직하고 총력투쟁에 나서지만, 이미 경제주의로 경도된 노조들의 분열은 노동운동 전반의 여력을 위축시켰고, 관공로 중심의 총평, 동맹, 그리고 전일본 노조연합의 출범은 이와 같은 경향을 강화시킨다. 희망퇴직 성격의 노조 파괴와 국로대회에 대한 분열공작은 성공을 거두었고, 20만의 고용계승과 8만에 대한 모욕적인 주변적 직무배치로 국철의 분할은 마무리된다.
 
1980년대의 민활화와 자산가치 상승은 자산격차를 낳고 총중류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마다는 SSM 조사의 분석을 통해 55년부터 65년까지는 학력, 직업적 위신, 소득의 모든 조합에서 지위의 비일관성이 진척된데 반하여, 75년에는 학력, 직업적 위신의 조합을 제하고 상관성이 높아졌으며, 나아가 85년에는 모든 조합에서 상관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말인즉슨 총중류사회의 완성은 85년이었고, 이는 고도성장의 결과였으며, 성장의 완화가 계층의 분화로 이어졌다는 함의를 담고있다.
 
격차 확대의 담론은 80년대로부터 90년대로 진전하고 통계로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정설이 된다. 특히 비정규직의 증가속도는 고용과 소득에서의 격차를 확대한다. 1984년 시점에서 15%였던 비정규직은 업종구분이 1999년 사실상 무한히 확장되며 90년에 20%, 99년에는 25%를 넘어서고 2008년에는 35%에 육박하게 된다.
저출산 역시 1973년 2.14를 2차 베이비붐 시대의 분기점으로 하며 1989년 1.57로, 2005년 1.26으로 출생수 1,062,530명을 기록한다. 격차의 확대는 미혼율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1985년 생의 미혼율은 여성이 23%, 남성이 30%로, 무자녀율은 여성이 37%, 남성이 45%로 예상된다. 일본친구들 사정 나쁘지않군?
6장. 아시아에서 본 포스트 전후사
 
자본의 확장에 따라 일본의 자본은 세계로 뻗어나간다. 70년대까지 10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일존의 햐외투자는 73년 35억달러로 급증하여 한국으로부터 대만, 말레이, 타이 등으로 확산된다. 미국으로의 생산투자 역시 증가일로를 걷는다. 1972년 소니로부터 74년 마쓰시타, 혼다는 82년, 도요타는 86년 진출을 시작하고, 대미수출은 감소하지만 미국 내 생산이 그 자리를 채운다. 연간 해외투자는 엔화 절상과 함께 증가일로를 걷게되고, 1989년 675억달러로 1970년으로부터 거의 70배 팽창한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이들 신흥공업국에게 치명타를 안겼지만, 중국의 약진과 빠른 회복은 이들 국가들에게 제2의 기회를 부여한다. 일본의 고부가가치 제품이 아시아의 집약적 공업능력과 만나 상품이 되고, 이 상품들이 서구의 시장에서 팔려나간다. 동아시아 '삼각무역'이 구축된 것이다. 2005년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의 37.1%, DVD 생산의 92.2%, 컴퓨터의 96.8%가 동아시아에서 생산된다. 이중 중국의 비중은 DVD가 78.1%, 컴퓨터가 87.3%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생산의 이전, 제조업 공동화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 70년대로부터 85년까지, 저부가가치 공정의 해외 생산이 진행되며 생산 다변화가 시작되고, 이후 90년대 전반까지 가전과 자동차의 수출기지 구축과 공정 전반의 현지화가 진행된다. 90년대 후반 이후로는 주력 기술마저 해외로 이전되고, 국내에는 잔여 부분만 잔류한다. 이는 결국 지역의 붕괴로, 제조업 단위기반의 약화로 나타난다.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이정도를 빼고도 저만큼이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외로의 투자 증가와 80년대 축적된 일본의 부는 해외여행의 증가로도 나타난다. 1972년 연간 백만명에 달하던 해외여행 인구는 80년에 4백만명, 99년에 천오백만명에 달하며 정점을 찍는다. 익히 알다시피 여기부터는 정체구간이다. 2000-2010년대 2000만을 찍고 현재는 1300만 정도.
 
해외로의 생산투자가 활발해짐에 따라 주재원 역시 증가한다. 그러나 이들 주재원은 아시아와 유럽에서의 다른 입지로 서로 상이한 거동을 보인다. 특히 아시아의 생산거점들에 파견된 직원들은 자신들만의 타운을 구축하며 현지에 녹아들지 못했다. 문화적 이민 역시 증가일로로, 서구권에 대한 동경과 문화적 경력을 위한 이민이 증가한다.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국외 종업원 수 역시 증가하지만, 산업연수생 제도를 통한 국내 이민 유입 역시 증가한다. 80년대 후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정주 외국인 수는 1991년 122만명, 2007년 215만명으로 두배 가까이 증가한다. 이는 현지 에스닉 커뮤니티의 구성으로, 포스트 전후사회을 유지하고있던 일본 사회의 해체와 제구성 과정에서 주체의 확장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경제적 위상이 상승하며, 90년대 일본 문화가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경제적 확장에 더불어 문화적 침투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이는 다시 경제적 침투를 가속화한다.
 
종군위안부, 이에 대한 국제적인 연대, 그리고 오키나와까지. 일본의 위상은 세계화가 진행되는 90년대를 맞아 변화해왔고, 전후에 형성된 일본의 정체성은 포스트 전후사회를 맞아 내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외부로부터의 유입과 국제적 접변의 강화로 개방적인 성격을 차용하였다. 이에 더해 미일관계의 변화와 세계 정세의 전환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고이즈미 시기 네오콘의 대두, 이후 아베 정권의 헌법 9조 개헌은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의 반영이며, 전후 질서의 전환점으로의 약진이다.
 
헤이세이 30년에 이어 요시미 슌야 2권째. 헤이세이를 이룬 쇼와 후기의 역동은 헤이세이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이를 다면적으로 검토한다. 산업으로부터 정치, 경제를 포괄하고 문화, 공간, 범죄, 가족을 통해 당대의 흐름을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응축된 일본의 경제력은 70년대 정점을 찍었으나 오일쇼크는 일련의 구조개혁을 촉발했다. 변화의 맹아적 형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활벚과 주동산개발, 인프라투자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그 비율이 크지는 않았다.
 
헤이세이를 통해 구축된 격차사회의 씨앗이 서비스업으로의 이전과 제조업 공동화, 그리고 자산시장의 팽창이라면 그 근원은 포스트 전후사회의 시작으로부터 배태된 것이기도 하다. 가정이 재구조화되고 소비사회가 기존의 관계를 형해화시키고 현실로부터 유리시키며 이후의 아노미와 사회의 해체가 구체화된다. 총류중산층으로 재구성된 사회는 격차가 발생하고 자산격차가 소득격차로 고용의 분리로 점증하며 강화되는 상황과 함께 90년대의 아나키로 빨려들어간다.
 
쇼와로부터 헤이세이를 단절적으로 볼것인가 연속적으로 볼 것인가, 연속적인 과정이었다면 그 변곡점은 어디이고 왜 기울기가 역전되었는가. 이에 대해 인구통계로, 인구통계의 변화를 낳은 근원으로 한번 더 딥다이브해보는 과정이었음. 이게 이와나미 일본 근현대사 총서 10권 중 9권이다. 한번 다른 책들도 찾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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