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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 완수되고 판적봉환과 폐번치현을 거쳐 폐도령과 세이난 전쟁으로 구체제는 일소되었다. 유신지사들은 암살로, 자연사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메이지 정부를 연다. 징병제와 국민교육, 근대적 재정이 국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다.
번별로 진행되었던 근대화의 유산은 정부의 손 아래 운용된다. 자체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건 국영화하고, 효율이 안나오는 자산은 민간에 불하하고, 수운 중심으로 나라의 교통망이 새로 짜여진다. 미쓰비씨 상회가 시작된다.
1권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지속적으로 당대를 살아가던 일본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역사의 일부가 되었는지 지속적으로 조명한다. 메이지유신과 근대국가의 수립은 지역의 호농들과 기존의 조닌들에게도 심대한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민권운동의 발흥은 이러한 토대에 기인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입헌. 식민지배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정부의 건설자이기도 하다. 대장대신 마쓰카타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모리 아리노리 등을 조율하고 지원하며 그는 메이지 정부의 밑그림을 그리고 국체를 건설한다.
대장대신 마쓰카타는 지조를 중심으로 세제를 개편한다. 토지보유세 3%. 전부 현금납부를 추진하다 거센 반발에 직면하고 물납 포함 2.5%로 세율이 정해진다. 여기서 디플레이션으로 농촌을 찍어누르고 산업화에 들어간다. 대장성의 시작을 새삼 돌아보니 어마어마한 역사들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일본 육군의 건설. 국민개병제를 기반으로 프랑스식 육군 건설을 목표로 하던 일본 육군은 프로이센 스타일로 방향전환을 하게된다. 조슈와 사쓰마의 육/해군 갈등은 군 초창기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세이난 전쟁과 사이고 다카모리의 몰락으로 육군을 장악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징병제를 통해 군을 통한 근대화에 이바지한다. 육/해군의 갈등과 육군의 주도라는 큰 틀에서의 구도는 메이지 초기부터 정립되었다.
모리 아리노리와 메이지 교육. 에도 시대로부터 사회적 복잡성의 증대에 따라 어느정도의 보통교육 수요가 있었고, 이는 수학인원의 증가로 나타난다. 메이지 문부성은 이를 국가 주도하의 공통교육이라는 틀로 엮어내고, 기존 교육체계로 포괄되지 않는 지역까지 국민교육의 틀로 포섭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기존 교육기관에 대한 통제는 예산의 부족과 민간의 반발로 원할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새로운 교육기관들이 자리잡고 남녀 모두에게 보통교육을 제공하기 시작하며 국민교육의 틀이 안착된다.
근대 일본의 세입구조. 토지세를 기반으로 구축된 일본의 재정은 산업이 발전하고 소득이 개선되며 소비세와 영업세, 관세를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이토를 비롯한 원훈공신들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메이지 시대에 양성된 후진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텐진조약과 청/일 관계.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일본에서 초기에는 지사적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한/일 관계에서 양국의 위상과 주변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그의 대접은 달라져가고, 그 와중에 홍종우가 김옥균을 암살하고 그 시체는 도성 저자에서 거열당한다.
개화파의 정변은 충분한 무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왕도 틀어쥐지 못한 그 순간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시기를 돌아볼 때마다 조선에 대한 상념들은 결국은 근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왜 자생적 근대화는 최종적 파국을 맞이했는가.
이토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그 간극을 잘 보여준다. 일본측에 대한 편향이 있음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일진회와 현양사와의 관계나 아시아주의적 이상에 따라 행동했던 인물들의 행적을 보면 이러한 기술이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의도가 아니라 행동과 그 결과에 있다.
청일 전쟁의 발단이나 러일 전쟁의 발단에서 조선의 위정자들의 기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행위가 조선의 백성들의 의사나 삶과는 관계없는 의도에서 결행되었다는 점도 마찬가지이고.
을사조약과 한일 병합의 장에서 과연 조선의 위정자들이 예정된 결과를 막기위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돌아보다보면 좋은 소리가 나올래야 나올수가 없네. 이승만이나 안창호나, 독립운동가들이 가지고있던 이왕가에 대한 환멸에 십분 공감하게 된다. 20년동안 총리가 27번 갈리는 행정부가 과연 정부인가?
메이지시대의 관료들은 구사무라이 출신의 유신세대 이후로 고시를 통해 뽑혀 동기생간의 유대를 바탕으로 정부조직의 실무를 장악한다. 요시다 시게루의 동기는 고작 12명이었음. 이들 관료가 점차 전면으로 나오며 메이지 정부는 기존의 정부와 다른 성격으로 전화한다.
러일전쟁에서의 결과를 두고 보상금의 여부에 대해 거센 폭동이 분출한다. 당대 일본 사회는 마냥 정적인 사회는 아니었음. 민권운동의 분출이나, 국수주의적 주장에 기반한 폭동, 이후로 이어지는 다양한 운동의 전개는 메이지 이후 발전한 민생과 이에 대한 다양한 욕구의 표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산업화가 완편되어가며 전반적인 민생역시 풍요로워진다. 여전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가에서부터 번화한 도회지까지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새로운 문화가 퍼져나간다.
어제 왜 미술사는 안나오나 했더니 두장으로 뚝딱 정리하시는군. 근대화와 서구에 대한 열정으로 미술학교가 교육구에 따라 설립되고 서양의 강사들이 초청된다. 이는 국학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반발을 불러오지만, 오리엔탈리즘 한줌을 들고 일본을 찾아온 이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메이지 시대 양식풍을 짓고자하는 이들은 동양적인 요소를 최소화하며 서구적인 풍의 도시환경을 만들어낸다.
문부성을 중심으로 입말에 기반한 현대 일본어의 기틀이 닦이고,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다양한 작가들이 일본 문학의 장르를 잡아나간다. 사회소설과 사소설이 등장하고, 특유의 미감이 자리잡힌다.
일본 근대화의 핵심에는 국수주의와 민족문화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서양문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과 갈등하는 구도가 자리해있다. 신도에 대한 비판과 구미 구니타케에 대한 사회적 이지메는 이 갈등이 개인에게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그 단면을 보여준다. 서구중심적으로 신도 비판하는 논문 하나 쓰고 집으로 항의방문이 오고 비국민이라고 매도당하고 교수자리 떼이고... 메이지시대 꼴 잘 돌아간다... 근데 한국도 여전히 종종 이럼 ㅎ..ㅎㅎ..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정당 지도자들. 하라 다카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유신 전에 태어나 신식교육을 받고 좋은 성적을 내지만 반골기질로 퇴학당하고 기자생활을 하다 외무성 관료로 입각한다. 총리가 되며 당대 정국을 제어하고 문민통제를 실현하려 시도하며 당대 기준으로는 때아닌 장기집권을 하고 중요한 업적을 세웠지만 미성년자에게 암살당해 끝을 맺는다.
하라, 하마구치, 이누카이를 보면 관에 의한 군의 제어나 다른 시도들에 대한 일본사회의 이해가 항상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았다. 유신으로부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의 경로가 필연적이지는 않았음을, 때로 이러한 시도는 거의 성공하기까지 했음을, 그러나 주어졌던 여러번의 선택에서 번번이 잘못된 길을 걸어갔음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범아시아주의의 결정적 분기점은 3.1운동과 5.4운동에 대한 일본의 대응과 그 여파가 아니었을까. 3.1운동이 명확한 분석과 역량에 기초한 운동은 아니었을지라도,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보여준 태도와 진압의 강도, 수많은 희생자들은 일본의 프로파간다와 실질적 통치의 강압성 간의 균열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로 만천하에 각인되었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에 대한 명백한 통제의도를 보여줬고, 5.4운동과 이후의 과정들은 중일전쟁을 예비하는 촉매로 민족감정의 고양과 확산을 불러일으켰다.
장작림 죽은거 보면 놀랍게도 만주국의 성립도 그렇게 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일련의 불순분자들이 만주로 사출되고 긴장이 고조되고 숙청의 칼날이 다가오자 사출된 불순분자들이 사고치고 이걸 또 커버친다고 용천지랄을 해쌓고 커버친다고 커버를 받아준다. 머저리새끼들인가...
일본의 노동구조. 초기에는 선대제로 근대공업의 기틀을 닦고 농촌의 변화와 인구성장으로 인해 도시화가 진행되고 방적으로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며 중화학공업의 기틀이 닦이고 이에 대한 집중투자와 고도화가 시작된다. 침체와 호황을 거치며 2차대전을 통해 전반적인 공업역량이 원숙해진다.
오야카타를 통한 하청조직의 원형이 나타난다. 공원들에 대한 구미의 구성과 오야카타를 통한 생산성경쟁이라는,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형태의 기초생산조직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고용되고 조직된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애우회를 중심으로 기업별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조직행동이 터져나온다. 전간기 가장 큰 투쟁인 미쓰비씨, 가와사키 중공업의 파업이 시작되고, 한달내내 지속된 파업은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패배했지만, 이는 때론 협조적으로 때론 강경하게 진행되었던 노사관계에 일종의 분기점이 된다.
일본 문화의 발달과 소비생활의 다양화. 시세이도 같은 브랜드가 생겨나고 고단샤(講談社)와 이와나미 쇼텐등의 출판사가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열어나간다. 고단샤가 강담사에서 유래한 사명이었구나. 경공업의 발달과 브랜드의 형성은 백화점 등 소비문화의 고도화로 결실을 맺는다.
만주국 아무리봐도 정교한 계획에 따라 입안되었다기보다는 얼렁뚱땅 사고쳤다 부랴부랴 막은 것 같은데... 계획이야 있었지 있기는 있었는데... 구성의 역동성이나 우연성등을 보면 한일합방 과정에서의 사건들이나 만주국 생성과정에서 우연성이라는 요소를 배제할수도 없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게 되어있다고 해석해야 할 지, 배경에 누적된 필연성들이 개개 사건에서의 판단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봐야할지... 고민이 되는 주제이다. 이 고민 중일전쟁을 봐도 든다... 일본놈들 전쟁으로 만담찍는 재능이 있음.
당대 중국 군벌들의 지도부구성과 황도파 장교들의 형성. 군벌들이 응집력도 낮고 지리멸렬하고 이런 점을 떠나서 참모진에 일본군 장교가 있는데 이거 맵핵키고 게임하는 거 아님...? 이건 방첩활동을 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닌데... 동아시아의 전쟁 언제봐도 놀랍다...
흑룡회 등 국수주의 단체들의 수립과 활약. 흑룡회와 조선의 일진회 등 대중동원은 당대 일본사회의 기층조직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단편이다. 흑룡회의 구성은 패배 거지 사무라이로부터 만주 마적 지망생 등등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는데 이친구들은 자본과 산업화에도 적대적이었고 어느정도 범아시아주의도 수용했고, 대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 전파하면서도 상당히 다면적인 모습들을 보여줌.
이쯤되면 패턴인데 멀쩡한 사람이 나와서 좀 멀쩡하게 굴려보려고 하면 암살당한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케인즈주의적 개혁, 그 성공과 2.26으로 인한 암살... 그리고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난징 대학살이 일어나고, 중일전쟁을 수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진다. 노구교 사건으로부터 중일전쟁이 시작된 과정을 다시 봐도 이 전쟁의 발단에는 군부의 공기와 우연, 그리고 팽배한 전쟁에 대한 열망들이 뒤섞여있었다. 그 정념들이 결국 난징대학살로 터져나왔고, 일단 이런 일이 일어나고나서는 돌이킬 수 없다. 사건 자체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퇴로를 막아버렸다는 점에서 이 사건으로 일본의 제국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경로로 접어든 것이다.
중일전쟁에 대한 여파로 금수조치가 결정되고, 금수조치에 대한 공포는 협상과정에서 증폭되며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에 이르른다. 영국, 미국 친구들은 일본이 감히 그런 결정을 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고려가 충분하지는 않았음. 결과적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은 패망의 길로 걸어들어간다.
오키나와 정역에서의 사상자를 보면 핵 투발이 불필요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당대 일본 제국군은 자국민에게도 적군에게도 잔학한 이들이었고, 오키나와 전역에서의 사상자와 자국민 학살을 봐도 미국의 결정이 부당하다고는 볼 수 없다. 한발을 맞고도 무조건 항복과 천황제 존속에 대한 우려로 빚어진 고민이 다음 투하를 불러왔다.
옥음방송 이후에도 군부의 광란은 멈추지않는다. 마지막 쿠데타 시도, 보위계획조차 서로 따로 짜는 육/해군의 모습은 36년 이래로 이어진 군국주의 사회의 희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요시다 시게루와 일본 관료들이 패전 이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전면으로 나선다. 군정청의 설립 이후 군정청과 직보되는 외무성 주축의 연락사무소가 주축이 되고, 이내 일본 정부는 재건된다.
군정청은 일본 노조를 활성화하고, 재벌을 해체하려하며 일본 경제를 재구조화하고자 했다. 요시다 시게루와 관료들은 이를 일본 현실에 맞게 조정하며 토지개혁을 통해 전체 토지를 매수하고 자영농 중심으로 농촌을 재건하며 도매물가지수가 240배가 되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맞서 경제구조를 재조정한다. 재벌은 해체되어 은행 중심의 계열사로 재조직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전후의 부흥을 이끈 혼다, 도요타, 소니같은 새로운 회사들이 등장한다.
전후의 폐허에서도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잿더미속에서 통계문서를 발굴하고, 새로운 경제의 윤곽을 그려나가며 전후문제회의 보고서를 발간한다. 그 서문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고자하는 메이지 유신 지사의 결기가 느껴진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절절히 공감된다.
전후 일본경제의 부흥에서 대장성은 자금을 통해, 경산성은 경제계획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아시아국가, 예컨대 한국과 중국에서 일어났던 것 만큼 관 주도적인 과정은 아니었다. 대장성의 자금집행은 사뭇 간접적인 과정이었고, 경산성의 구조조정이 항상 목표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장성과 경산성의 작업들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 듯.
히로히토의 붕어와 함께 쇼와시대는 막을 내린다. 다이쇼로부터 전면에 나선 히로히토는 전쟁 과정에서 때로는 주도적으로, 때로는 한발 뒤에서 전쟁 내내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천황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한 미군은 그를 터치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어진 경제부흥 속에서 쇼와는 가장 오래 사용된 연호로 자리매김했다. 천황이 일본 사회에서 갖는 역할과 위상에 대해 그만큼 확실히 보여주는 사례는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지않을까.
20세기 후반동안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크게 확장했으나 안보적으로는 미국에 종속되어 수동적으로만 움직여왔다. 역내의 정치적 주체라기보다는 미국의 대전략에 따라 배치되는 장기말이었고, 그 역할조차 잘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버도퍼는 그 분기가 대포동 발사와 일련의 대북관계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데, 일견 맞는 지적이다. 더해서 미국의 전략변화는 일본이 더 능동적인 국제관계를 수립하도록 밀어왔고, 아베는 그 과정에서 일본이 보여준 답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30년간의 인구축퇴압과 그로인한 장기침체는 일본사회의 정치지형과 대외전략을 많이도 바꾸어놓았다. 경제구조 역시 변화하는 환경에 맞추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변화해왔다. 고령화시대에 발맞추어 복지제도 역시 변천을 거듭해왔지만 높은 사회보험료율은 민생을 옥죄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있다. 하지만 이제 침체는 하나의 전환점을 돌았고, 다가오는 시대는 일본에게 더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에게 있어서도 일뷴은 가장 가까운 파트너로써, 앞으로의 국제 상황에서 이전과는 다른 한일관계의 수립이 한국을 위해서도 요구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같으면서도 다른 국가다. 걸어온 역사의 경로가 다르고 축적된 사회적 지반이 다르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상사할 대상으로써 한국에게 일본만큼 적합한 사례도 없다. 한국이 마주하고있는 문제들 역시 지난 일본의 사례에서 전범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이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이번의 영수회담도 그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분 전공이 근세일본사라서 그런가 2권 들어서는 힘이 좀 빠진다. 1권에서 보여준만큼의 통찰과 자료제시가 2권에서는 보이지 않음. 군부의 역할과 정동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는 부분들이 있다. 민생과 관의 역할에 포커스를 맞추고 나아가는 부분에서는 참고할 지점들이 있지만, 빠진 블록들이 전전 사회의 많은 경로를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빠진 단락으로 남아있는 게 아쉽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근세로부터 현대까지를 하나로 일관하여 다방면으로 비췄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정리가 된다. 추가적으로 확인해볼만한 고리들도 되새기게 된 점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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