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쾨터랑 일본책을 봤으니 중국 책으로도 한번 떼보겠음. 1장에 사회주의 경제체제 사례조사가 빽빽하다. 분량이 충실하고 절목이 세세한게 정말 각잡고 읽어야할 듯. 이제 한 절반 읽었다. 여기까지가 농업, 산업, 금융, 국가의 각론이었고, 이후로는 사회복지 등등의 지출항목들임. 14기 3중전(1993)이랑 15대 전대(1997)이 장마다 빠짐없이 나와서 외울 지경이다.
결국 각각의 장을 이끌어가는 역동은 다음과 같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은 생산성을 둘러싼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대립이었고, 다양한 제반 모델들은 생산성 혁신과 유기적 구성이라는 명제 속에서 완전정보가설과 단일이익주체 가정의 현실적 구현과 비중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에 닿게 된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 사이에서 민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과정이었고, 이를 촉발하는 과정에서 지방정부에 대한 권한의 이양이 일어나지만 이는 지역의 지역 보호주의로 연결된다. 민간부문의 성장이 당의 결정을 밀어올리며 연속적인 개혁개방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개혁개방의 노선을 둘러싼 논쟁이 여러번(85~88, 95~97, 03~05) 이어진다.
농업에서 이는 문혁 이후 포산도호와 포간도호의 일반화와 추인으로, 시장 경제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과 이를 통한 물가의 안정, 산업의 유기적 발전으로 드러난다. 개별 농민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우회적 허용과 생산 전 과정에 대한 온전한 책임의 부여가 결과적으로 농촌의 개발과 성장으로 드러난다.
산업에서는 민영기업과 국영기업, 그리고 이에 대한 당의 영도가 관철되는 과정이 민영기업과 당 간의 긴장으로 드러난다. 고용에서 그리고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성장하며 민영기업의 권리를 폭넓게 허용하고, 국영기업의 비효율을 자율적 경영과 청부제로 돌파하려고 하지만 감독책임의 부재는 방만으로 연결된다. 민영화를 통한 국영 관할 영역의 축소가 결과적으로는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금융이야말로 당의 산업과 국가에 대한 영도의 도구였다. 재무부로 제반 은행과 보험이 통합되고, 문혁 이후 인민은행과 보험이 생겨나지만 그 운용은 결국 당에 귀속된다. 지방과 중앙의 대립이 중첩되며 은행업 전반은 첩첩산중으로 들어간다. 증권시장에서의 해태는 가히 전설적이다. 매출의 99%를 뻥으로 신고하고 주가를 튀긴다. 상하이 지수를 보다보면 이친구들은 지수로 운전을 함. 외연으로는 국제적 기준을 어거지로 맞춰나가지만 원초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민영은행의 설립이나 금융개방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세제를 두고 중앙과 지방이 대립한다. 전체 세제가 하나의 재정으로 통합된 문혁기의 구조로부터 중앙과 지방의 관할을 정하고 이개세를 통해 재정 분리를 시도한다. 14기 3중전을 통해 분개세 개혁이 시도되고, 부가가치세와 법인세에 대한 중앙과 지방의 분리를 통해 재정통합이 강화된다. 그러나 재정외 수입이 재정내 수입의 110%를 넘나들고 1000종류의 수수료를 걷어들이는 등 지방의 지역보호주의는 여전히 강경했고, 2000년대까지 이와 같은 재정 외 수입을 재정 내 수입 대비 0.28 대 1까지 수정하며 규범을 통해 전체 세제의 통일성을 갖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에 비해 공공에 대한 투여는 여전히 부족했다. 9년제 보통교육은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보편적 보급이 어려웠다. 중앙정부의 현/향에 대한 재정투여와 공공위생을 책임지는 지급/현급시에 대한 지도를 통해 전반적인 공공복리는 개선되지만, 인민대표대회를 통한 지방정부 재정의 감독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과연...?
국제무역은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성장을 향한 유일한 길이었지만, 국제무역의 성과와 그 한계는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다.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이로 인한 주기적 통화량 증가, 인플레이션의 문제,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가공무역의 포지션은 원자재가와 무역구도의 진동에 따라 경제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산업의 고도화와 정부주도적인 지역균형발전, 독자적 기술발전 축적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국의 사회복지는 낮은 잉여수준과 성장중심적 재정배치에서 지속적인 문제가 되었다. 개별 단웨이(團位)를 중심으로 구성된 종합적 사회복지체제는 그 자체로 이중노동시장의 장벽으로 기능하며 노후기업들의 인건비와 생산성문제로, 노후기업에 대비한 신흥 기업의 장점으로, 그리고 국유기업 구조조정과 노동자 하강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양로보험과 의료보험, 그리고 고용보험 요율과 지급기준이 보여주는 중국 사회보험의 실태는 사회안전망의 부재라는 냉혹한 현실을 일깨운다. 돈 벌어서 어따쓰냐?
거시경제의 흐름, 통화의 팽창과 긴축은 정책 조절의 실패를 실업으로 하강으로 노동자에 전가한다. 과도한 재정투여와 무정부적인 사업계획은 자산가격과 물가의 상승으로 나타나고, 중앙에 의한 긴축이 일어나고, 몫없는 자들이 몫을 빼앗긴다. 이는 내재적으로는 지대추구와 연결된 과잉투자에도 기인하지만, 외생적으로는 무역구조와 산업성장에 따른 진통이기도 하며, 세계 경기 변동에 따른 충격파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공산업 중심의 중국은 이 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였다.
'전능국가'로써의 당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를 만기친람하는 무소불위의 조직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드러났고, 이후 개혁개방의 흐름은 민간의 역량을 육성하며 사회와 경제의 진보를 견인했다. 그러나 관료는 견제받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지대추구 행위는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부패와 비효율, 공공에 대한 침해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하부구조의 변화에 맞는 상부구조의 전환이 제기되지만, 법제도의 정비와 민주적 선출,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인신의 자유와 정보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구조 하에서 이는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의 중국은 저서가 묘사하는 과제들에 대해 일정정도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어떤 문제들은 더 심화되어 극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무역불균형의 문제는 결국 자유무역의 재구성으로 구현되었고, 견제받지 않는 당의 부패는 제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헌정, 법치, 민주는 오늘날 중화 인민과 세계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과제이다. 봉건적 체제의 잔재를 털어내고 미래로 나아가는 그 한발을 중국 인민은 내딛을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은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다원적인 주체들의 경합속에 성립되는 국가이고, 개별 주체들은 저마다의 방향에 따라 진동하며 당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중공중앙의 지도는 이와 같은 영향력이 실물로 드러날 때 사후적으로 추인하거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형태로 지시되고 그 실질은 물질세계에서 조합되며 완수된다. 교과서적인 당론이라 말하는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분과별로 정리하여 적층시키는 구조를 통해 전체 흐름에 대한 이해가 도모된다. 좋은 책임.
중화 이론가의 기상이 대단하다. 토마스 모어에서부터 시작하며 사회적 공유와 화폐와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이라는 두가지 정수를 추출하고 생시몽 푸리에 로버트 오언으로 달려나가며 과학적 사회주의까지 한 큐에 꿰어버린다. 이윤율 저하경향과 과잉인구로 인한 자본의 종언을 독점법의 제정, 기술진보와 효율화에 의한 이윤율 저하경향의 극복, 도시화로 인한 인구의 증가는 자본의 종말이라는 예언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거기에 더해서 서비스업의 발달과 규모에 따른 적응성의 차이는 독점 대기업으로의 귀결이라는 명제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결정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의 창발적 생산성 향상이라는 명제는 사회 속에서 이익이 충돌이 발생하지 않고 부가 무한히 솟아나는 보편적 조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 사회 왔으면 일 4시간만 노동하겠다. 물론 안왔다.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 역시 이후의 전시경제와 생산성 향상 속에서 노선전환을 선택한다. 국가에 의한 세수의 증대와 복지정책으로의 체제 구현은 각국의 현황에 따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다.
레닌은 국가를 '국가 신디케이트'로 규정하고 국가 사회주의를 주창하지만, 잘 안된다. 온전한 국가통제는 당대 역량으로 구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다양한 종류의 혼합경제의 구현이라는 명제 하에 시장적 요소가 도입된다. 그리고 레닌이 죽는다.
스탈린, 트로츠키, 기타등등간의 노선투쟁 끝에 '중도파'인 스탈린이 승리하고 볼셰비키 '좌파'보다 급진적인 정책을 입안하며 전시공산주의 체제 하에 국가경제를 정렬한다. 반대파를 숙청하고 추진된 대단위의 집산화와 이를 통한 중공업 육성이라는 '사회주의 공업화 노선'은 이후 거대한 성장으로 이어진다. 집산화가 그렇게 평화적인 과정은 아니었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경제를 구축하고, 운용과정에서 드러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가치법칙의 보조적 작용'인 '재무회계 제도'를 도입한다. 생산량에 따라 성과급도 좀 주고... 시장의 역할은 공식적으로 부정되지 않았다. 다챠랑 시장 없었으면 소련 인민들 굶어죽었음. 경제의 이원화와 비공식 경제부문 역시 오래도록 존속했다.
미제스와 하이예크의 반론들이 이론의 모순과 실질적 구현의 불가능성을 지적한다. 따라서 시장 사회주의 모델이 시도되었지만 이 모델이 성공적이었으면 동유럽에 공산당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파레토의 소련에 대한 분석과 과학적 계산에 의한 계획경제의 최적배치 가설은 몇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완전정보 가설, 다른 하나는 단일 이익주체 가정이다. 제조와 교환과정의 모든 정보가 중앙에 취득되고, 그 부는 중앙으로 흡수되어 적절히 재분배될 때 계획경제는 성립의 가능성이 있다. 되겠냐...? 거래내용 분석의 완전정보 취득 과정의 비용 계산을 통해 그 불가능성을 논증한다. 이해주체 간 갈등의 통합 역시 마찬가지로 현실적 구현은 유토피아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이거 오스트리아 대머리 슘모씨가 한번 나올 타이밍인데 이상하게 언급이 없음. 시장체제는 경쟁을 통한 적정비용의 정보취득, 이윤체계의 인센티브와 재산권의 보장 통한 감시비용 최적화를 통해 정태적/동태적 자원배치 효율을 구비한다.
소련의 경제성장률 자체는 수로만 보면 높았다. 비록 그 수를 위해 치렀던 희생은 강압적이었고 가혹했지만 말이다. 1913년과 1950년의 기간동안 공업 생산액은 12배, 국민소득은 7.2배 성장했다. 모수가 낮기도 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괄목할만한 성장이다. 그러나 통제경제가 창출한 비효율과 자원 분배의 정체 및 부족은 소련의 민생을 짓눌렀고, 흐루쇼프에 의해 지방분권적 개혁이 시도된다. 하지만 핵심 문제는 중앙계획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의 분배제도가 교란되며 경제의 비효율은 팽창했고, 다시 수직적 관리체계가 복원되며 재정책임제에 기반한 개혁이 추진된다. 그런다고 계획경제의 수행자들인 관료집단의 모순이 달라지진 않는다. 물론 묘하게 서술 내내 당과 관료얘기는 안하심. 여하튼 문제는 계획경제다 이말이다.
소련의 성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한 것이었으면 소련 안망했겠죠? 같은 얘기는 동유럽 타국 사례에도 적용가능하다. 조방적 성장이 무엇이냐, 개척할 영역이 많았다. 요소투입의 대량증가는 무슨 뜻이냐, 이반을 밭에서 뽑아 공장에 넣으면 투입이 증가한다. 자본투입의 증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농민의 자산을 추출하여 공업화를 하면 Profit! 그럼 농민은? 집산화 했으니 ㅇㅋㄷㅋ... 이러니까 흐루쇼프가 1956년 <인격 숭배와 그 결과>를 써서 세계 공산당이 아사리판 나는 것이다.
계획경제라는 게 기술발전으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한다고, 계획경제 모델링의 과학적 고도화를 이룩한다고 멀쩡히 작동하는 모델이 아니다. 소련에서 다 해봤다. 물론 당대 기술수준의 문제를 지적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공공의 몫과 시장의 몫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물론 중국이라고 그걸 잘한다는 말은 아님. 그럼 소련만 그 길을 걸었냐, 유고 슬라비아도 '기업 자치' 하자고 했고, '자치기업 제도'로 시장경제 도입해봤고, '계약 사회주의'도 해봤다. 정말 이악물고 당과 관료 얘기는 안하신다. 하지만 바이트의 인용이 암시하는 바가 있다.
'일정 정도 봉건적 방식의 경제 관리와 유사하다.' 행간에 다 써있다.
폴란드의 집약투자? 잘 됐으면 자유노조가 뒤집지 않았다. 폴란드의 사례에서는 종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건 경제사니까.. 프라하는? 사태났죠. 대처 잘 했나요? 못했죠. 여기에서 스탈린주의니까 상관없다 소비에트 자발경제 하면 문제없다는 분들은 평생 집권도 못하셨으면서 여하튼 말은 잘하신다. 대중의 지지 하에 이루어지는 시장화 개혁은 필연적임을 네개의 명제로 정리하며 1장을 마무리짓는다.
(1) 경제 시스템의 저효율은 계획경제 고유의 제도적 결함에서 비롯되어 구체제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진행하지 않으면 이러한 상태의 개선은 불가능하다.
(2) 어떤 진정한 개혁이든 모두 시장화 개혁으로 자유로운 기업제도와 경쟁적 시장 시스템 건립이 개혁 성공의 관건이다.
(3) 개혁은 시장경제 제도 건립을 목표로 전체적인 설계를 해나갈 필요가 있으며 각 개혁 조치는 체계적으로 실행하고 충분한 실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4) 경제개혁은 반드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거시경제와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아울러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대약진운동이 지방분권을 통해 완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음. 이건 문언과 실질이 맞지 않는 부분이다. 계획지표를 문서상으로는 달성했지만 대약진운동의 성과는 다들 알다시피 총체적 파괴였다. 이 부분을 한줄로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당의 입장이다. 팽덕회가 반동으로 몰려 처분당하고, 대약진운동은 마지막까지 달려나간다. 그런 중국 공산당의 추산도 2천-4천만이다. 문혁 전 기간에 우파로 찍힌다는 건 진정한 의미에서 비교적(보수파-우파, 중국 기준) 인민을 위해 복무했다는 훈장이 아닐까.
1976년까지 지역정부를 중심으로 경제적 다원화는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이 당 중앙의 입장이 될 수는 없었다. 1차 천안문은 정말 스리슬쩍 넘어가는군.
지역 중심의 경제발전이란 지역 정부에 전권을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업의 자주적 관리'가 이루어져야 하며, 계획경제의 틀에서 지방정부의 자율은 계획 수립과 시행에서 복잡성을 더한다. 더하여, 지방 정부를 중심으로 한 분권은 역내 유착관계를 형성하여 지방보호주의와 지대추구로 나타난다. 부패가 시작된다.
민영 경제에 대한 개념어가 정말 생경하다. 비국유 경제부문이라니... 증량개혁이란 무엇인가. 문혁의 경험은 수억 대중에게 화인을 남겼다. 희생자는 대약잔운동보다 많지 않다지만 고문과 폭력과 혹형은 사람의 마음에 흉터를 남긴다. 1차 천안문과 자유의 벽, 그리고 양개범시와 진리기준 논쟁에서 등소평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인민의 집단적 기억이 구체제와 구노선을 거부했던 것에 기인한다. 쓰촨성으로부터 기업자주권 확대실험이 시도되고, 전국적으로 확대되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국 당의 지배하에 있는 기업의 자주운동이라는 것이 당의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나오지만 개혁개방이 단선적으로 꾸준히 진행된 과정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등소평의 기여를 과소평가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후적 해석의 한계를 인식해야만 한다. 당 내 보수파 (우파- 공산주의자)와 개혁파 (좌파- 수정주의자)간 갈등은 개혁개방의 과정 가운데에서도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당 내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면서, 이념적 논쟁이었고, 자원과 이해관계의 배분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국가개입에 의한 관 주도의 경제모델이 채택되고, 농가 책임제와 향진기업으로부터 개혁개방이 시작된다. 빅푸시 산업화 모델은 항상 농업에서 시작한다. 농업의 생산성 향상이 도시로의 집중을 유발하고, 중공업으로부터 경공업까지의 전과정 순차진행과 기술축적을 통한 역량발달은 산업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며 클러스터를 구축한다.
사유기업의 고용수 제한이 해제되고, 사유기업의 경제적 약진이 시작된다. 개혁개방특구와 향진기업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전체 생산량 중 사유기업의 비율이 증가하고, 제조업의 고도화가 진행된다. 같은 기간 진행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국가들의 개혁과 중국의 방법론은 결국 비국유(민간) 부문에 대한 통제와 평가의 정도 차이였다. 중심을 완전히 이원시키며 국가가 민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후퇴한 결과 시장의 효율성이 산업의 유기적 연결을 촉진하고 자원의 효율적 분배와 생산성 향상을 달성한다.
소련의 붕괴가 진행되고,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체제 이행이 시작된다. 이를 사적 부문의 자발성, 민간의 약진을 포커스에 두는 '유기발전전략'과 정부 영역의 민영화를 중점적으로 진행한 '국유기업사유화 가속전략'으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폴란드, 체코 등이고 후자는 소련이다. 결과가 전략의 우월성의 증명이다.
이중가격제를 둘러싼 논쟁 역시 당내 좌/우파간 갈등의 한 분기를 보여준다. 이 동네는 우파가 빨갱빨갱이 좌파가 덜 빨갱이임. 이중가격제는 그 자체로 지대추구의 수단이었고,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와 수정주의, 국가통제의 강도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와 같은 지대추구 비율이 총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 자체로 부패의 지표이기도 하다.
당의 경제적 결정에 대한 총론은 공산당 치하에서 결국 정치에 관한 총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정치경제학이다. 1984년 중공중앙 결정은 개혁개방의 성과에 대한 당의 노선이 합의되었음을 보여준다. 상품경제를 중심으로 생산력 향상을 지표로 삼아 경제 건설에 매진하자는 노선은 경제적 성장으로 나타난다.
세제가 변화하고, 경제적 변화에 맞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과잉팽창으로 인한 생산력의 과잉은 시장의 역효과, 침체를 가져왔고 침체와 이에 따른 천안문 사건은 등소평의 지도력을 약화시켰다. 천안문 사건을 1989년의 정치적 위기로 요약해서 묘사하는 실력이 당 이론가 짬밥이란 이런 것인가를 새삼 상기시킨다. 천안문 사건에 대한 반동으로 또! 당내 좌 우파간 노선투쟁이 일어나고, 등소평은 남순강화로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중공 14기 3중전회에서도 사회보장체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기수랑 중전 회수로 몇년도가 되는지 다음에 한번 떼고만다 연도가 안붙어있으면 몇년인지 짐작이 안됨. 1997년 중공 15대에서 다양한 소유권, 즉 사유재산권의 보장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본경제제도'로 승인되고, 이후 자본가(!)의 입당이 허용된다.
2004년에도 재국유화, 국진 민퇴에 대한 요구안이 제기되며 당내 좌우파 노선투쟁이 또!제기된다. 허가증을 가지고 장난치거나 정부에 의한 다양한 규제장벽으로 사업을 접게 만들거나 인수를 하거나 아예 '거시경제 조절' 이라는 명분 하에 행정간여를 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당은 기업들에 마수를 뻗친다. 이건 중공의 당과 기업의 권력관계를 생각하면 마수 맞다. 후진타오애 의해 일련의 공작들은 제지되지만, 물론 나중에 또 보시라이가 한건 한다...
경제발전에 비해 등소평이 주장했던 정치개혁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자기 권력을 내려놓는 일이 쉬울리 없다. 물권법과 반독점법은 97년에 제기되고도 시행되기까지 1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대 총액과 GDP대비 비율로 부패 총량을 추정한다. 지대가 전체 총량의 30%라니 이게 단순히 쓱싹으로 나올 수 있는 숫자인가...
총론을 다 봤는데 어떻게 보조금 얘기가 한번을 안나오냐. 정치개혁으로 우회적으로 관료를 언급하지만 절대 당 얘기가 안나온다. 주요 중전 결정문을 소개하며 흐름만을 짚는다. 특히 천안문을 1989년의 정치문제로 약술하는 능력은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차원에서 설명하는 관점이 보여주는 통찰이 있다. 요는 민간의 자율을 보장하고 시장의 팽창을 용인하는 것이 발전의 근간이며, 그 과정에서 당의 역할은 동아시아적 모델의 구성, 핵심 사업의 관리와 거시적 개입이라는 것이 포인트인 듯.
3장은 농업개혁이다. 농업이란 무엇인가. 자연으로부터 직접 생산물을 취하는 일이다. 대개의 저개발국은 농업국가로부터 시작하고, 따라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초기 자본축적과 물가안정, 도시 임노동자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중국 농업의 특징은 무엇인가. 토지에 관개가 있어야만 성립한다. 여름철에 집중된 강수량은 홍수로, 이를 이용한 수리와 관개 없이는 농업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하여, 쌀 문화권이다.
전통 맑스주의적 견해는 산업에서처럼 농업의 집산화, 규모화의 달성을 통해 생산성을 개선항 수 있다고 보았으나, 현대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농업경영을 위한 적정 단위는 소농을 기초로 하며, 지리환경에 따라 최적단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소농경영이 인민공사 등 집산화단위에 비해 유리한 것은 의사결정의 효율성, 즉시성, 주인의식에서의 차이이다. 그리고 이 차이에 따른 결과를 중국은 국가 전체로 대단위로 실증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의 지배가 시작되고 토지개혁을 거쳐 마오쩌둥은 급속한 집산화를 지시한다. 농민들은 처음에는 합작사로, 그 다음에는 인민공사로 거대한 규모를 이루며 집산화되었고, 중국의 농업은 당의 영도 하에 대약진 운동이라는 처참한 실패를 겪고야만다. 하나의 인민공사에 평균 4500가구가 소속되어있는데 이게 관리가 잘 될 수 없음. 중국 공산당의 시책이 하나같이 염병떠는 소리였던 건 차치하고라도 규모 면에서 당대의 역량으로 관리가 되는 단위가 아니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농업생산성에 대단한 진전은 없었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경영은 이루어졌지만 인구증가로 인한 인당 경지면적의 감소는 농가소득의 증가를 지지부진하게 했다. 저가수매에 의한 농촌의 빈곤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농가로부터 추출한 잉여가 1951년부터 1978년까지 세수로 978억위안, 농산물 가격차이에 의해서는 5100억 위안이다. 국가에 제공한 순저축이 4340억 위안인데 이 기간동안 농민의 일인당 평균 수입은 73위안에서 133.6위안으로 증가했다. 물가상승률을 빼면 매년 1위안 증가한 것이다. 재정 수입 절반이 농업에서 나왔다.
1978년 기준으로 전체 농민 2억5천만 중 30%가 극빈상태였다. 이에 대한 개혁, 개인 자영농에 대한 요구는 이미 문혁 이전에도 여러번 제기된 적이 있다. 1955년 원저우를 비롯한 지역에서 '포산도호'가 실행되고, 총수의 15%의 가구가 참여한다. 우경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고 인민공사로의 결집이 시작되지만, 이후 작황이 나빠지며 1959년 다시 '포산도호'에 대한 요구가 각지에서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약진운동은 지속되고, 마침내 1962년에서야 중앙서기처에서 등소평이 '검은 고양이든 황색 고양이든 쥐만 잘 잡을 수 있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발언으로 이에 대해 일단락한다.
'포공도조'와 '포산도호', '포간도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포공도조는 개별 작업에서 투입된 생산력의 정량평가에 따라 차등지급되는 성과급이다. 포산도호는 전체 과정에 대한 책임하에 생산된 작물에 따라 구별되는 성과제이고, 이때 잉여 생산물에 대한 재산권이 인정된다. 포간도호는 온전한 단위책임제로, 청부토지에 대한 가정경제의 운용이다. 이는 토지에 대한 권리가 확보된다는 차원에서, '분전단간'으로 불리기도 한다.
1978년 큰 가뭄이 닥치며 안휘성에서부터 시작된 포산도호는 사천, 귀주, 감숙, 내몽골, 하남으로 번져나간다. 결국 중앙의 결정문으로 공인된 생산양식으로 포함되며, 1982년 1월 공식 문건을 통해 청부제가 승인된다.
1982년 전국 생산대의 93%가 그해 포간도호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이중경제 구조하에서 이미 포간도호가 주류적 생산방식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밑의 변화가 물 위로 드러난 것이다. 이후 식량 총 생산량은 1978년으로부터 1984년까지 33.6% 증가하고, 면화 생산량은 동기간 약 두배 증가한다. 목축업의 생산량 역시 1978년으로부터 1988년까지 1.56배 증가한다.
이는 농가의 연간 평균소득 증가로도 나타난다. 1978년의 134위안이라는 평균소득은 1990년의 686위안, 그리고 2010년의 5919위안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도시와의 격차이다. 원래도 존재했던 격차는 갈수록 증가한다. 이것이 삼농의 문제로 이어진다.
농촌의 빈곤률은 78년의 30.7% 에서 2007년의 1.6%로 분명히 줄었다. 그러나 도농격차는 시초부터 78년까지 유지되었고, 이후로도 더 벌어졌다. 개혁개방의 초기 단계에서 향진기업은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흡수하며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고, 노동자들을 현지에 묶너놓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문언과 실질에는 언제나 차이가 있다.
1992년 남순강화 이후 '타공'의 실질적 순연이주를 강조한 정책은 그 흐름을 공식벅으로 인정했을 뿐이다. 책 외의 내용이지만, 출신지역별로 대도시에서 구성된 지역별 방회는 농민공들이 도시에 진입하고 견제활동을 하고 자기 고향과 현금흐름을 연결시킬 수 있는 기초사회기관으로 역할하며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밀려들어온다.
결국 삼농의 문제다. 농민의 빈곤, 농촌의 정체, 농촌의 쇠퇴라는 문제 아래에는 현재 중국 농촌이 겪는 모순들이 자리해있고, 이것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순연과 농민공의 도시 호구 편입이라는 도시화로만 풀 수 없다. 그렇다고 농촌의 자강만으로 이 과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지속적으로 농촌의 인구압을 낮춰 인당 경지면적을 확보하고 이를 협동조합 등 큰 단위로 묶어 생산성을 개선하여 개개 농가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것과, 도시 호구로 농민공을 편입시켜 사회복지체계를 통해 균등성을 확보하고 생활수준을 안정화 시키는 것 두가지의 병진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이란 무엇인가, 적정 기업규모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시장 내부거래 가격과 운용 코스트가 외부거래 가격과 같은 지점 근처를 진동하며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이다. 기업의 성원은 누구인가. 유한계약에 따라 요소투입을 하는 성원(임노동자)와 리스크를 지고 잉여권과 잔여소득 수취권을 누리는 성원(주주 및 경영진 등)으로 구성된다. 왜 갑자기 교과서적인 회사 총론이 나오냐, 뒤에 중국 기업 실태를 보면 알게된다.
업주제기업으로부터 합자기업으로, 회사로, 무한책임과 유한책임의 문제에서 유한책임 회사의 설립으로, 그리고 주식회사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단위인 회사의 종류는 그 단계가 고도화됨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한다. 유한책임 회사가, 그리고 주식회사가 주류화되며 금융과 신용이 단위회사를 통해 막대한 자본투자와 산업구축으로 이어지며, 근대적 산업자본주의의 골간이 된다. 이때 누가 기업을 지배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주인-대리인 관계의 니해충돌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수립은 그 갈등의 과정에서 다다른 하나의 합의의고 오늘날의 보편 구조이다. 여기에 더하여 독일의 노동자 참여제, 노조 대표의 이사임명권과 노무관계에서의 결정권이 소개된다.
사설이 왜 이렇게 길었는가. 중국의 기업은 국가 신디케이트로부터 출발한다. 국유기업의 시초는 기층 생산 단위로, 현대적인 기업과는 이름만 같다. 이들은 단위 기초 조직으로 생산의 조직화에서부터 성원의 전 방위적 사회서비스를 취급하고, 그 조직자는 당의 간부로 당위 의지를 관철하는 최종 단말이었다. 말 그대로 이름만 기업이었던 것이다.
소유권은 당연히 당에 종속되었다. 심지어 경영으로부터 소유까지 중앙과 각급 지방 성청에 종적으로 횡적으로 연결되고 분할되어 수많은 이해관계가 기업 내에서 얽히고 설켜있다. 말 그대로 사공도 너무 많고 숟가락도 너무 많다. 더하여,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이 적자를 내건 흑자를 내건 이에 대한 정성적, 정량적 평가는 필요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오직 계획경제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 중요할 뿐이다.
당연히 이 꼴을 하고 기업이 잘 굴러가리라고 생각하면 도둑놈 심보고, 잘 안됐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방권양리' 기조하에 '기업하방', '기업 자주권 확대', '기업 청부제' 3단계로 시기에 따라 진행된다. '기업 하방'은 운융주체를 지방정부로 이양하는 형태로 1950년대 시행되었다. 연대를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잘 안됐다. 계획경제 체제 하에서 지방정부로의 권한이양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고,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총 생산액에서의 비중이 39.7%에서 13.8%로 하락하고, 이에 따라 1970년대부터 '자주권 확대'라는 기조 하에 경영 제반사항에 대한 자주적 판단이 가능하도록 구조를 조정하는 '방권'과 기업이 자체적으로 이득을 수취하여 소속된 노동자와 생산투자에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양리'로 구성된다. 놀랍게도 원래 기업에서 이윤이 나면 다 중앙으로 들어가서 정치적으로 조정되던 것이 '이개세' 세제개편으로 기업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이윤축적은 흑자가 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주권을 강하게 실행하면 기업 내부자가 이익을 편취하고, 중앙의 통제가 들어가면 이윤동기가 약해져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이 여러차례의 방권양리 시도에도 국유기업 효율의 개선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성공하지 못하는 걸 넘어서 다수의 기업은 이윤이 마이너스로 꼬라박힌다. 이에 따라 개혁개방의 진전에 맞춰 농업에서의 변모와 같은 '기업청부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이게 잘 됐으면 이 제도가 아직도 있었겠죠...?
10년 굴려봤더니 알쪼다. 청부에는 연한이 있고 청부자는 청부 연한 내에 최대한 이익을 뽑아먹는 것이 목표가 된다. 단기적 이윤추구는 기업의 장기지속성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애초에 청부가격 자체가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 당중심의 구조에서 청부제는 실질적인 뇌물공여의 동기가 된다. 저가에 매매된 청부권으로 이익을 편취하고 생산시설 홀랑 팔아다 쓱싹 정리하는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고, 1990년대가 되자 다른 개혁의 필요성이 압도적으로 요구되었다.
1988년 이전 국유기업의 손실이 20%가 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 손실이 저정도였는지 장부의 분식이 훌륭했던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이후 삼분지 일은 적자, 삼분지일은 '장부상' 흑자, 삼분지일만 수익권이라는 것은 국유기업의 방만한 운영실태를 보여준다. 1993년에는 33.3%가, 1997년에는 43.9%가 적자기업이었다.
1999면 15기 4중전에서 현대적 회사체계로의 정립을 목표로 당 중앙의 결정이 내려진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이 시점에서야 기업에서 행정 기능이 별도의 국가국으로 이임되고 경제무역위원회의 각 직능사로 편제된다. 이전까지는 기업이 곧 동사무소였던 것이다. 불량자산에 대한 정리와 핵심자산을 위주로 한 분할상장, 통합상장 등을 통해 일단 현대적 회사의 틀을 갖추기도 한다. 일단 틀은 갖췄다. 하지만 그럼 지분을 누가 샀느냐, 결국 당의 기금들이 산다. 그럼 지배구조는... 똑같다.
14기 3중전에서 삼층체계를 통한 국유자산 관리방안이 도출된다. 일층으로 정부차원의 국유자산 관리위원회, 이층으로 '국가가 권한을 부여한 투자기구 (국가투자회사, 국가지주회사 등)', 이들이 만나는 세번째 층에서의 주주권리 행사가 새로운 지배구조가 되고, 어차피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대표의 능력에 따라 윗선은 눈을 감아줄 수 있고, 실질적인 국유기업에 대한 사유화가 진행된다. 여하튼 돈은 국내에서 도니까 조아쓰! 그리하여 2003년 국유자산 관리위원회 (국자위)가 출범한다.
국!자!위! 이름만 들으면 강해보이지만 당대 점증하던 사회적 갈등을 빌미로 또! 당내 보수파(빨갱빨갱이)가 출몰한다. 방권양리의 과정 진행 속에서 기업청부제와 자주권 강화 역시 각각의 모순을 배태했고, 따라서 관리(즉 반부패)에 대한 요구와 개혁개방이란 흐름에 따른 국유기업 해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 흐름이 거세진다. 이에 따라 '국진민퇴' (국유기업 짱짱맨 민간기업 붐따) 추세가 나타나며 자원의 균형이 국유기업으로 쏠리고, 국자위의 자산 총액은 2007년 2002년에 비해 두배로 증가한다.
2008년 10월 관리자의 선발 권한을 이사회로 넘기는 중공중앙의 결정이 내려진다. 현대적 기업으로 국융기업을 전환하려는 시도는 이처럼 다양한 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 예로 독립이사제를 통한 기업의 경영건전성 확보, 배임에 대한 규정과 이해충돌의 방지 등 다양한 정책이 입안되고 시행되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개별 기업의 독립적인 경영판단과 생산성 향상에 어느정도 도움을 줄 지는 결과로 증명할 수 밖에 없다.
초반에 기업구조와 현대 기업에 대해 사설이 길더라니만 방권양리의 각 단계와 내부자 횡령 및 배임 사례들을 보고있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국 당 중앙의 영도 하에서 국유기업의 경영은 내부자 전횡이라는 원천적 한계를 가진다. 이에 대한 감시는 감시비용의 증폭이라는 딜레마를 갖는다. 어느정도의 관리와 통제는 필요하지만, 방권양리의 과정은 그 통제가 적정선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증명하는 경로이기도 했다.
왜 소유권이냐. 놀랍게도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이고,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소유제가 지배적 지위가 된다. <정치경제학 교과서>가 고전으로 자주 인용되는데, 1)국가 전민소유제, 2)협동농장의 집체농장 소유제로 소유제에 대해 기본을 정리한다.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체제로의 완만한 이행과 신민주주의를 설파하며 집권했지만, 실제 적용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 모택동의 우파비판 이후 사적 소유는 빠르게 철폐되어 2년만에 전체 경제의 집단소유를 달성했다. 그리고 이 시점이 1950년대이다.
1957년부터 1978년 까지는 대체로 없는 기간으로 취급한다. 1979년 2월 개체노동의 종사가 허용된다. 개인들의 사적 노동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문언과 실질에는 차이가 있고, 문언의 반영은 실질의 비가역적 변화로부터 기인한다. 자본론으로부터 개체 자영업자의 소규모 노동자 고용을 논증했다는 것은 당대의 이론적 지형을 잘 보여준다. 대놓고 시장소리 했다가는 잡도리당하기 딱 좋았다.
또! 원저우와 타이저우로부터 자본주의 미풍양속이 발현된다. 이정도면 원저우야말로 현대 개혁개방의 원형이고 시초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원타이 모델의 향진기업은 명백한 사영기업 모델로 구축된다. 주장강 삼각주에서는 화교에 의한 외자유치로 수출주도의 향진기업들이 설립된다. 그리고 사천을 중심으로 국영주도적인 향진기업들이 설립되며, 비국영 경제 부문이 약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소유권에 대한 중공중앙의 입장은 단호했다. 오직 전민소유, 집체소유만이 당의 길이라는 점이었다. 향진기업의 약진속에 당내 보수파(빨갱빨갱이)의 비판이 이어지고, 등소평은 이를 무마하며 시간을 끈다. 증량개혁이 비국유 경제부문(민간)의 파이를 늘리며 약진한 결과, 14기 3중전(1993년, 이쯤 보다보면 외운다.)에서 "공유제는 주체적인 지위를 차지하나, 지방별, 산업별로 다소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다소의 차이'라는 말로 사적소유의 실마리가 풀린다. 마찬가지로, 실질이 문언에 선행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당 중앙의 결정은 보수파(빨갱빨갱..)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만언서라는 일련의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기업의 방만과 적자는 전장의 동시기에 대한 묘사에서도 드러나듯 더이상 방관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고, 이에 따라 중공중앙은 15차 전대에서 국유기업 관할영역의 축소와 사유부문의 발전을 공식적으로 의결한다.
국유경제의 문제는 단순히 누가 경영하고 누가 이익을 얻느냐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 운영이 지나치게 조방적이어서 부적합한 분야에 많이 진출한 것, 운영실태의 방만으로 생산성 개선을 위한 투자를 할 자본이 부족한 것, 개혁개방 초기부터 구축된 국영 향진기업들의 규모와 경영전략의 난항들이 기업경영 측면에서도 복합적으로 굴레로 작용하고 있었다.
쑤난모델이 개혁개방 초기에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해관계의 일치에서 가능했다. 지대수익의 투자처로, 단위고용의 담당자로 성세를 누렸던 쑤난 모델 향진기업은 개혁개방이 고도화되고 타 민영기업들이 생산성 향상을 이루며 약진하자 이내 뒤처지게 되었고, 기업구조와 경영에 대한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매매가를 조정하거나 차익거래를 통하여 개인에게 사유화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생산시설을 땡처리하는 등의 무한한 방만으로 이어진다.
15차 전대에서 사유화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여러차례 언급했듯 실질이 문언에 앞선 결과였다. 문언으로 추인된 실질은 민영기업의 다수를 차지하던 중소기업을 통한 고용의 성장과 혁신의 활력을 반영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효율적이고 독점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19세기 후반의 명제는 대전기를 지나며 깨지기 시작했다. 기업의 규모는 그만한 고정매출과 운영비를 낳으며 의사결정의 복잡도를 올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모든 기업이 대기업일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산업의 고도화와 제조업의 수평적 네트워크로의 전환은 다양한 중소기업의 산업구조 요소요소에서의 참여로 나타난다. 중소기업의 매출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지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용이다. 전체 고용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새로운 고용의 창출에서 두드러지게 들어난다. 더하여, 연속되는 산업구조개혁의 과정 속에서 민활한 사업전환과 기술창출을 통한 혁신은 중소기업의 규모가 갖는 강점을 보여준다.
이는 1997년의 결정 이후 중국에서도 드러난다. 2001년 말 3천여개의 중소기업이 1억74백만을 고용하며, 중국 GDP의 50.5%를 차지하고 신규 취업 총량의 75%를 담당하며 43.2%의 세수를 납부한다.
국영합작이라는 쑤난 모델과 민영기업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며 이에 대한 일대 구조조정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유사한 과정에서 몇번이고 드러났듯, 구조조정은 내부자의 이익독점으로 귀결된다. 시장평가의 부재에 의한 저가 매수와 매도 과정에서 노동자의 몫을 가로채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보수파(좌파)의 반동을 초래한다. 행정허가법을 통해 관료들의 개입력을 제한하고,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다급 법인구조가 나타난다.
이 챕터에서 제일 의뭉스러운 부분이 이 다급 법인 구조다. 문언으로 드러난 부분만으로는 이 구조의 장점이 잘 캐치되지 않음. 대체 이 짓거리를 하면 무슨 이득이 있길래 이와 같은 구조가 폭넓게 확산되었는지... 체면의 문제거나 신용의 문제거나 합법적 뽀찌의 문제거나 지원정책에 따른 보조금 최대화 전략이거나... 드러나지 않은 동인들이 있어보인다.
화인 회사의 일반적인 지배구조는 다각도의 산업확장과 가족에 의한 지배이다. 가장에 의한 경영과 가족에 의한 보조, 그리고 지배지분의 승계를 통한 권력의 이양이 다수 화인기업에서 발견된다. 화인기업은 강력한 응집성과 꽌시 네트워크를 통한 대관업무로 높은 효율을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내재적인 한계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원타이 모델의 한계는 무엇인가.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것은 특별한 기술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어발식 확장과 덤핑공세를 주력으로 하는 경영전략은 품질하락과 과잉투자로 시장 전체의 이윤율을 악화시키며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하이테크 산업으로의 약진을 통해 품질과 이윤율의 고도화로 신규 고용을 창출하며 산업 전반의 수준을 재고하는 것이 요구된다. 소기업의 유연성, 신속성은 연속적인 기술투자와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고, 오늘날 시대가 요구하는 산업의 변화 속에서 이는 세상과 조응하는 핵심 역량이기도 하다.
화폐 금융 일반, 중앙은행과 주식시장과 현대 금융업 전반에 대해 정리하고 들어간다. 이 정리가 왜 필요하냐, 사회주의 중국에는 이런거 없거든... 인민폐는 화폐가 아니다 노동에 대한 크레딧 바우처다. 이름부터 인민폐임. 화폐는 교환의 보조도구다. 당연히 신용도 없다. 신용이 없는데 중앙은행도 존재이유가 없다. 민영은행은 타도대상이다. 전부 인민은행으로 합쳐버리고, 문혁기간동안 재정부로 들어간다. 신용없고 화폐없는 당의 완전영도사회... 이러고도 굴러간게 신기하다 물론 잘 못굴러갔음^^...
(1) 화폐 외에 기타 금융자산이 없다.
(2) 화폐는 단지 가격 계산의 도구로 이른바 ‘소극적 화폐’다.
(3) 자원배분의 ‘자발성’을 방지하기 위해 ‘현금 관리’ 등의 수단을 이용해 현금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통제했다.
(4) 은행은 단지 국가 정부의 출납 기구로 존재할 뿐이고,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이 통합된 단일한 은행제도를 운영했다.
(5) 은행은 단지 미미한 자금의 시간적 배분 기능을 담당할 뿐, 기업 융자는 ‘비정액非定額 유동자금(즉 유동자금의 비상년非常年 점용 부분)’ 대출로만 제한했다.
은행이 없는데 보험도 있을 필요가 없겠죠? 공적부조가 나오면 되는데 보험이 왜 필요함. 그래서 1952년 보험업이 재정부로 편입된다. 1958년에는 보험업무도 즉시중지된다. 대약진운동이 하나만 하지 않는다 사회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변혁운동이다...
문혁 오와리하고 그래도 은행은 있어야겠지? 인민은행이 재무부에서 분기된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같지만 그래도 기관은 생겼다. 보험업도 마찬가지로 일단 간판은 단다. 말 그대로 간판만 달았다. 이런 자본주의 반동들이 공산중국에서 독립적으로 운용되면 그게 개그다. 어음도 생기고 1996년 전국 통일 콜시장도 생기지만 생기자마자 사고가 많이나서 접는다. 2015년 말 일단 금리 시장화를 달성은 하는데... 전반적으로 구색을 맞춘다는 느낌이 강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성이라는 게 개혁개방 이후로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외환에서의 이중가격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은행체계나 외환관리에 있어서 변동환율의 채택 역시 내재적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외생적 요구에 따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진행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1993년 '관리'변동환율제도로 기조를 잡고 1996년 IMF 8조 규정 수락을 정식으로 선포한다.이후 2015년 위안-달러 공시 매커니즘을 수정하여 더 시장적으로 현실을 반영할 수 있게 한다고는 하는데 말이 그렇다는 뜻인듯.
1983년, 기업의 유동자금 부족분을 국고에서 메우는 게 아니라 대출로 때워주기 시작한다. 1985년 인프라투자대금 역시 은행을 통해 중개된다. 그냥 택갈이하는거 아니냐...? 당연히 공식 금리는 택도없이 낮았고, 따라서 2차 시장이 활성화된다. 2차 시장에 대해서는 딱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금융 전반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변화과정만 언급하고 사고사례에 대해서는 유달리 말을 줄이는 느낌이 있다. 금융 자체가 당의 영도수단으로 활용되어온 과정을 생각하면 원론적으로만 지적하는 이유가 이해가 안되지는 않음.
일단 증권시장도 생기고 채권거래도 활발해지고, 2015년 기준으로 전체 발행량은 16조위안, 거래액은 675조 위안을 기록한다. 그러나 이중 대부분은 정부채권 또는 준정부 채권으로, 채권시장을 통한 자본조달은 서구에 비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제 증권시장 잔혹사가 펼쳐진다.
1990년과 1991년 상하이와 선전의 증권거래소가 개장하고, 말 그대로 야수들의 시장이 시작된다. ‘충민위안瓊民源’ 사건이나, ‘중커촹예中科創業’, ‘인광샤銀廣夏'는 개중에서도 특기할만한 사건들인데, 1996년 상장해 1059% 성장했지만 놀랍게도 이윤 5억 7100만 위안 중 5억 6600만 위안을 조작했다. 장부에서 이윤을 100배정도 뻥튀기하면 당연히 주가는 오르고 누군가는 이익은 보겠지... 이런저런 광기들이 주가지수 추이를 봐도 눈에 띄지만 개중에서도 2008년의 광기는 특출나다. 2년만에 6배를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1년반이 걸림. 개별 잡주가 아니라 지수가. 그리고 2015년 이후...
1999년부터 2005년까지의 상해종합지수 주가추이도 특기할만하다. 17ㄷ9.2포인트에서 출발하여 2001년 2245포인트를 찍고 2005년까지 우하향하여 998포인트에 주차한다. 그 다음에는 2008년에 여섯배찍고 또 비슷한 위치에 주차함. 이친구들은 지수를 운전을 하고다녀...
칼럼으로 우징롄이라길래 다른 사람 나온줄 알았음. 저자양반의 주식시장에 대한 견해를 2001년 논쟁을 통해 소개한다. 결국은 투기와 투자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이다. 투기와 투자는 시초에서 구분될 수 없고, 그 자체로 자본의 역동성을 갖는 분야라 쉽게 규제할 수 없으며, 투기인지 투자인지는 사후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자본시장의 불투명성과 정보의 비대칭, 적극적인 조장을 이용한 투기는 제도적으로 근절되어야 한다고 피력한다. 금융에 대해 사회화 투자 체계로 접근하는 의견이 특기할만하다. 오늘날 사회의 금융화에 대해 나오는 이런저런 논의들보다는 이쪽이 깊이가 있음. 투기와 투자 그 자체가 갖는 자본주의에서의 역동이 있다.
상해 주가지수가 4천포인트를 찍고...
"그러나 이후 찾아든 주가 대폭락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왜 이런 꼴이 나느냐, 기본적으로 주식시장의 원칙이 '증권시장은 국유기업을 위해 복무한다.'이기 때문이다.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구성된 IPO 절차와 신주 발행과 상장 후 증자통해 얻는 프리미엄은 결국 국유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소하게 뽀찌도 떼먹고... 이런저런 시장적 개혁들이 이루어지고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금융이 당의 영도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해보면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중국에도 보험 있고 선물 있음. 구색은 다 갖췄다니까. 14기 3중전 인용이 장마다 나오는데, 원칙적으로야 시장주의적인 내용을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 문제는 실제의 운용이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이와같은 관치금융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시금석이 된다. 감시받지 않는 금융의 운용은 전 업종의 채무초과로 드러난다.
은행을 정리를 하기는 한다. 하지만 금융 전반에서 행정지도의 영향은 미미하고, 역으로 지대추구 성향을 조장하며 그 폐단은 특히 주식시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2002년 말 상업은행의 부실채권이 2조 770억 위안인데, 이게 국유은행 대출 총액의 26.12%였다. 신규대출액 기준으로는 1.61배고. 당연히 [바젤협약] 자본충족률을 달성할 도리가 없다. 2003년 기준으로 외환보유액을 투입하고 상업은행으로주터 1조 9천억 '달러'의 부실자산을 분리하지만, 과연 건전한 지배구조를 갖췄을지는 오늘날에도 되짚어볼 부분이다. 금융부분의 '내부자 통제'와 행정-은행의 복잡한 관계는 민영 은행의 설립을 지연시키는 원인이 된다.
총론에서는 보수파(좌파)와 개혁파(우파)의 대립으로, 농업에서는 실질과 문언으로, 산업에서는 국영과 민영, 금융에서는 당과 은행의 독립성이라는 테마로 양자간의 역동을 보여주었다면 재정 부분에서 역동의 주체는 중앙과 지방이다. 공공재란 무엇인가. 배제성과 경합성을 중심으로 사분면으로 나누어 재화의 유형을 구분한다. 재정은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다시 지방으로부터 중앙으로 환류된다. 공공과 민간의 구분은 계획경제 하에서 무의미해지고, 모든 민간은 공공의 관할 아래로 들어가 재조직된다.
‘생산수단 공유제 기반 위에서 건립되었고 전국의 경제를 국가가 통일적으로 영도함으로써 재정은 생산 영역 외의 분배 관계뿐 아니라 생산 영역 내의 분배 관계도 포괄하여 국가예산, 은행 신용대출과 기업 재무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재정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물건을 의무수매로 싸게 구입해서 도시에 비싸게 풀어놓으면 어차피 이익은 당이 먹는데 세금이 왜 필요하겠음. 초기 당의 재정은 앞전의 농업에서 봤듯이 공농업상품협상가격차에 의해 지탱된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농산물 싸게 사서 '당'이 비싸게 팔면 이윤은 다 당으로 간다. 기업 이윤 역시 장부 까보고 합리적 기업이윤을 남긴 나머지는 당에서 뚝딱하면 다 재무부 자산이다. 이윤을 그냥 가져가면 되는데 세금이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이 분배율은 당에서 선택한 산업의 육성방향에 따라 산업마다 다르게 적용된다.구체적으로, 1980년 경공업이 납부해야 할 공상세의 평균 세율은 18.9퍼센트(그 가운데 담배는 31.7퍼센트) 였으며 중공업이 납부해야 할 공상세의 평균 세율은 4.6퍼센트였다. 1950년 중앙과 지방이 관할할 수 있는 세목을 분기하고 그중 농업세, 상공업영업세, 상공업소득세는 중앙과 지방간에 비율에 따라 분배하기로 한다. 이윤이 있어야 세수를 걷지 않나 생각하겠지만 어차피 세금은 붙이기 나름이다. 이후 대약진, 문혁의 과정에서 지방정부는 점점 자율권을 축적하게 되고, 제후자본주의의 원형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1979년 '방권양리' 방침에 따라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성장을 유발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얼개가 다시 짜인다. 이것이 향후 추진되는 '이개세' 개혁이다. 그전까지는 장부도 안쓰고 나눠먹었다면 이제는 장부를 쓰고 구체적인 책임 하에 재정을 분기한다.
수입과 지출의 책임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재정 상황을 검토하며,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종류로 재정이전 방법을 설정한다. '정액상납'은 상해, 산동, 흑룡강이 선택하는데 이에 따른 세수차이가 크다. 상해가 1980년대까지 국가재정을 떠받쳐왔다는 말이 새삼 실감된다. 납부액이 상하이 105억 위안, 산동과 흑룡강이 각각 2억 8900만, 2억 9900만이다.
1984년 이개세 개혁이 시행된다. 법린세율은 일괄 55%로 조정된다. 이로인해 기업은 세후 이윤을 자체 계정에 축적할 수 있게 된다. 그 전까지는 다 뜯어갔다. 하지만 어차피 손해를 봐도 세수로 메꿔주는데 구태여 이윤을 볼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하에서 ‘수익이 초과 발생하면 최대한 남긴다超收多留’는 것은 실현이 어렵지 않았으나 ‘수익의 부족분은 스스로 보충한다歉收自補’는 것은 반대로 거짓 약속이 되어서 ‘이익은 책임지나 손해는 책임지지 않는包盈不包虧’ 것이 통례가 되었다."
기업 손실의 37%를 기업이 '스스로 보충하여' 나머지는 세수에서 떼먹었는데, 저 스스로 보충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앞장에서 봤듯이 대출 땡겼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이 덮쳐온다. 1988년의 지방세수중 중앙수입액은 6.5% 증가하였으나 물가는 18.5% 오른다. 은행 파트에서 어쩐지 화폐랑 외환 얘기하면서 물가 얘기가 안나온다 했다. 통화량 조절 조지고 인플레 터져나오고 난리난다. GDP대비 중앙예산 수입비율이랑 전체 예산 수입비율이 세수의 흐름을 보여준다. 저 변곡점이 매번 인용되는 14기 3중전이다.
14기 3중전(1993)에서 '이개세' 개혁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방에 대한 청부제에서 '분세제' 개혁이 실행된다. 중앙과 지방의 세제관할이 재편되고 책임범위가 재규정된다. 부가가치세로 영업세를 비롯한 제반 판매세의 통합이 시행되고 부가가치세에 대한 지방과 정부의 분배율이 75 대 25로 정해진다. 이때 세율은 항목에 따라 13-17%로 정해진다. 증권거래세는 50대 50으로 나뉜다. 그간의 재정청부제는 지방관원들에 대한 개혁개방에의 저항을 감소시키는 동기의 원천을 제공해왔지만, 개편을 통해 잡다한 세제가 통합되며 효율이 증가하고 중앙의 통제력이 강화된다. 세제의 통일과 합리화가 추진되며 전반적으로 활력이 돌게 된다.
1983년 처음 도입된 이개세에서 법인세는 최고 세율이 55%였으나 그 대상은 중대형 국영기업이었고, 점증적 청부, 고정비율 상납, 조절세 징수, 정액 상납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이후 1994년부터 대개의 기업에 대해 명목 33%의 통일적인 세율로 징수한다. 지방정부의 예산외수입은 1000개에 달하는 각종 수수료를 통해 징수되었으며, 전국 재정수입의 110.67%를 기록한다. 법적으로 기록된 정당한 수입이 이정도였다. 이후 예산외 수입에 대한 폐지, 통합, 조정을 거쳐 2000년 예산 외 수입과 예산 내 수입은 0.28:1의 비율을 보인다. 통합적인 정리규범화로 지방의 추가수입이 차단되고 이 재정은 중앙으로 집중된다.
당이 1990년대에 들어와서 체계를 갖추며 지방에 대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경제성장에 기인한다. 꽌시와 인맥으로 일관되는 비규범적 행위와 부패는 지속적으로 단속의 대상은 되지만 체제 자체의 특성상 면면하게 남아 오늘날까지 이르른다. 그래도 관리의 정도가 꾸준히 올라가긴 한다... 재정수입의 GDP 비중은 하락하다 1996년을 기준으로 반등하며 적정 수준을 찾아가고, 이에 따라 재정적자 역시 관리수준으로 유지되게 된다. 이전지출을 통한 공공서비스의 품질과 양 역시 증가하지만, 그 실행양태에 있어서는 괴리가 있었다.
1990년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 대량의 재정투하는 경쟁영역의 국유기업과 '이미지 쌓기''정치적 업적 쌓기' 작업에 계속 투입된다. 그 와중에 정작 투여가 필요한 공공안전, 의무교육, 공공위생등의 서비스는 외면되었다. 21세기 초반까지도 '9년' 의무교육의 보편적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열악한 공공위생은 SARS로 그 심각한 상황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재정권의 하방은 민영기업의 육성과 경제의 활성화로 이어졌지만, 제후 자본주의, 지역 보호주의로 나타나며 중복투자와 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중앙의 침투와 관제는 이를 규제하는 방편이 되었으나, 여전히 그 긴장은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정감독을 위한 인민대표회의의 기능강화라는 명제는 사뭇 희망적이다.
정부조달금액의 증가는 전체 경제에서 재정과 정부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1년 653억 위안에 달한 전역 정부의 조달규모는 2015년 2조위안을 돌파하며 재정지출의 12.1%, GDP의 3.1%에 달한다. 지급시와 현급시는 사회보장방면의 모든 지출, 양로금, 실업급여 및 복지항목을 담당한다. 현/향은 기초교육과 공공보건을 책임지는데, 이들은 정부 교육지출의 70%, 보건지출의 50%를 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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