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경제 내부의 사정을 넘어서, 세계 전반에 대공황은 어떤 의미였는지, 전간기의 경제적 거동은 왜 발생했는지, 전쟁과 헤게모니의 이양이라는 건 실제 어떤 과정으로 나타났으며, 전후체제와 냉전 이후의 사회는 어떤 원칙을 유지해야만 하는지 고찰한다. 오늘날 다시 2차 세계대전 전후질서가 무너지고 패권이 흔들리는 와중에서,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할까.
전간기 세계경제를 표 여섯개로 정리하시는군. 전체 기간, 1차대전 전, 전간기, 오일쇼크까지, 그리고 그 이후 냉전까지. 이전 책의 주인공이 독일이었다면, 이번 책의 주인공은 일본이다. 일본 전후경제의 부흥은 확실히 기록적이다. 1950년으로부터 1973년까지 23년간 연평균 8% 성장이란 어떤 것인가. GDP 세계 2위를 찍고야마는 능력이다. 서유럽과 파생지역(미국, 캐나다 등)의 19세기 후반 안정적인 경제성장(1.74%, 1.87%)과 전간기의 저성장(0.76%, 1.55%), 전후의 고속성장(4.08%, 2.44%)과 이어지는 저성장이 특징이다. 아래로 일본과 일본 외 아시아가,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가 놓인다.

1913-1950 유럽과 비유럽국가의 경제성장을 개관하며, 1차 대전 전후로부터 대공황까지, 대공황 이후로는 금블럭과 금본위제 이탈국으로 군집을 나누어 성장률을 바라본다. 금본위제가 기능한 방식과 그것이 내포한 이데올로기가 통화정책을 구속하고 재정정책을 규정짓는다. 그리고 이는, 구조개혁의 정체와 지속적인 침체로 나타났다.
인당 실질 GDP의 증가는 지속적인 생활의 개선, 그리고 생산성의 향상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1913년으로부터 1950년까지 일본의 꾸준한 성장이 괄목할만하다. 일본은 통화 패러다임의 변모에서도, 시장의 확장에서도 적절한 대응으로 위기를 돌파한다. 물론 만주국도 만들었고.

1870년으로부터 1998년까지의 상품수출액 증가경향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은 전후로부터 1차 오일쇼크(1950-1973)까지 러시아의 상품수출 증가(9.98%)와 이후 시기의 급격한 하락(2.95%)다. 동시기 일본의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15.54%이다. 이후 시기(1973-1998) 중국의 약진(11.81%) 역시 특기할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절대량으로 보면 서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확장이 지배적이다. 동시기 양국의 상품수출액 증가율은 각각 (1950-1973) - (8.03%, 6.27%), (1973-1998) - (4.55%, 5.98%)로 나타난다.

역설적으로 유럽의 평균실업률은 견조한 경제성장률과는 상반된 경향을 보인다. 오일쇼크 이후 만성화된 고실업률은(1982-9 - 8.8%, 1990-3 - 9.2%), 이전 시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실업률(1960-73 - 2.5%)과는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생산성 증가율은 유럽이 미국에 비해 꾸준히 선방했지만, 그것이 고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전의 통계들과 마찬가지로 1950-1973 일본의 생산성 증가율은 연 7.73를 보인다. 노동시간당 GDP로 봐도 엄청난 성장이다.

전전의 세계시장에서 견조하게 성장하던 세계 경제(서유럽, 기타 서유럽-미국 등)는 세계대전으로 좌초하고, 세계대전의 결과가 붐절적인 시장을 만들고 대전 과정의 총력전이 남긴 유산이 과잉투자로 공황의 단초를 만들었지만 금본위제의 구속과 분권화의 경향 속에서 시장은 나뉘고 다시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통합적 체제 아래에서 각국은 다시 성장으로 나아가고, 경제의 확장은 일본과 아시아를 성장의 궤도에 올린다. 오일쇼크는 하나의 분기가 되고, 그 속에서 동구권과 나머지 세계는 교차한다. 성장은 지속되지만, 3차 정보화 혁명은 불안정노동괴 만성실업의 불씨를 남긴다. 요는 구조개혁이었다.
전간기는 어떤 시기인가. 1차대전 이후의 시기이다. 1차대전이라는 사건이 각국의 경제적 구조에 강한 화인을 남긴다. 군수산업 중심으로 국가 경제가 열배씩 팽창하며 총 GDP의 절반을 차지하고, 집중투자된 생산설비가 전후 잉여로 남으며, 팽창한 신용이 이후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참호는 각 지역 출신의 징집병들은 하나로 연결시켜주며 새로운 프로파간다와 조직에 노출되게 만들었고, 이는 전후의 강력한 정치적 운동으로, 노동조합의 활성화와 대중 민주주의로의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로 이어졌다.

많은 부분은 전작에서 나온 유럽의 대공황과 겹치지만, 남미와 미국, 일본에서의 상황들이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있다. 1920년으로부터 1922년까지 독일 오스트리아의 인플레이션은 참 봐도봐도 새로움. 그러나 그 길이로 보면 차라리 초인플레이션으로 한번 터트린 게 낫지 프랑스나 벨기에, 이탈리아처럼 1914년을 100으로 볼 때 1926년까지 소비자물가지수 560-604정도로 인플레이션이 끈적하게 지속되는 편이 꼭 더 나은 결과라고만은 보기 어려울 듯.
이 과정에서 금본위제와 그에 대한 대응들 역시 경제의 구조개혁과 회복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다. 이미 패권은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이양되는 전환기였지만, 미국은 그 책임을 받기를 거부한다. 그게 자기 책임이라는 인지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히키코모리같은 고립주의로 돌아가며 신용은 칼같이 수거되고 전쟁 당사국들의 경제적 회복은 더뎌지며 유럽 경제는 정체된다. 바로 이런 교훈이 2차대전 후의 마셜플랜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와 미국의 금본위제에 대한 태도 역시 통화제도의 셩직성을 보여준다. 일본은 용케 잘 빠져나간다 진짜...

유럽대륙의 국가를 농업과 공업의 고용에서의 비율에 따라 구분하면 4개정도의 그룹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와 같은 선진 공업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스웨덴과 체코 슬로바키아같은 후발 공업국,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헝가리와 같은... 개발도상국... 그리고 나머지들. 선진 공업국에서의 서비스업 비중이 독특하다. 영국의 경우 1930년 이미 농업의 비율이 10% 미만으로 나타난다. 여타 1군 국가들도 20% 이하의 농업고용을 보여준다.
반면 높은 서비스업 비중은 이 시기에도 이미 서비스업, 그중에서도 고숙련 서비스업이 유의미한 규모로 존재했음을 드러낸다. 물론 교통으로부터 운수 역시 서비스업으로 포괄되지만, 인당 GDP, 노동시간당 GDP가 드러내주는 높은 생산성은 서비스업의 구성 역시 고도화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2군 3군 4군으로 갈수록 서비스업 비중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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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말로부터 다양한 발전을 낳고 1차대전을 통해 고도로 완성된다. 테일러주의로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주식회사, 콘체른과 포드주의가 경영 측면에서의 고도화를 불러온다. 슬로언의 복수사업부(M형) 조직은 군사적 조직구조를 기업에 이식함으로써 경영의 효율성과 진취성을 배가시킨다. 구매로부터 생산 여눅개발 등 각 부서의 조직과 미전실, 기획실로 통칭되는 참모조직의 구성은 이후 보편적인 조직양태가 되며 현대적 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조직전략의 초석이 된다. 일본 또한 미쓰이, 미스비씨, 야스다, 스미토모 같은 재벌 집단의 구축을 통해 전쟁기간 확장한 시장으로부터의 이윤을 공업에 재투자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낸다. 유럽을 옭아맦던 금본위제의 그림자로부터 일본은 성공적으로 회피기동한다. 금본위제로의 벅귀 노력이 일정정도 디플레이션을 낳기도 했으나, 재정정책과 확장적책, 1930년 금본위제로의 합류와 급속한 이탈(1931)은 그 영향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만주국을 세운다^^...
전쟁과 이로 인한 과잉투자, 이후 국면애서 이의 해소는 기존 산업의 부실로도 이어졌다. 영국의 석탄산업이 그 예이다. 전전에는 막대한 수출로 성황리에 유지되었던 영국의 석탄산업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기간 인프라산업의 자국화 경향으로 수출이 중단된 괴리를 집중적인 군수산업 투자로 메우며 채산성이 낮은 광산의 개발로 이어졌으나, 전후 수출시장이 회복되지 않고 더 집약적인 경쟁자(루르)의 출현으로 그 경쟁력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걸 1980년대까지 끌고간다 이거지... 다른 영국의 전통산업, 면직물 등도 같은 곤란을 겪는다. 전쟁으로 야기된 공급의 단절은 수입대체 산업화와 시장 잠식을 통한 전통산업 경쟁력 약화로 나타났지만, 이들에 대한 구조개혁은 지연되었다.
신산업, 석유화학으로부터 전자, 자동차등이 약진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소득 준배율이 상승한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에서 이는 동시에 자본재투자의 감소로도 나타난다. 이미 자본 측면에서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있던 독일 자본은 내생적 축적의 지연으로 생산성 향상이 더뎌지고, 그나마 건축, 특히 공공건축 등 '비생산적' 자본투자로 새어나간다.
전반적인 식량의 생산과잉이 일어난다. 이것은 생산성 증가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경지면적의 확대와 자국 농업에 대한 보호주의의 결과였다. 평균 에이커당 밀 생산량은 1094년-1914년 18.8부셸이었는데, 이는 전후 1924-1929년 18.5부셸에 그친다. 전체적으로 생산성 향상은 더뎠고, 그 지역적 편차는 컸다.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는 전전에 단위면적당 산출량이 이미 에이커당 40부셸, 벨기에, 영국,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는 에이커당 30부셸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부터 프랑스,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에서 이는 20부셸 이하로, 이탈리아, 스페인,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남유럽에서는 에이커당 15부셸을 넘지 못했다. 농업의 생산성 저하가 공업의 미발달로, 서비스업의 미진함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토지개혁이 아니다. 농업 그 자체에 대한 집약적 투자와 산업의 미성숙이다.

생산성, 인당 GDP와 노동시간당 GDP 는 전쟁 전으로부터 전쟁 이후 대공황 이전까지 꾸준히 상승한다. 당대만 해도 노동시간당 GDP를 신뢰성있게 산출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국력의 증명이기도 했다. 유럽 대륙은 전쟁 이후의 혼란과 생산성 과잉, 시장 재편 속에서 인당 GDP와 생산성 향상 경향이 감소한다.
영국의 평균 인당 GDP는 1890-1913, 1913-1929 기간동안 연평균 0.9%에서 0.3%로 정체하고, 시간당 평귱 GDP 성장률은 1.2%에서 1.4%로 증가한다. 그러나 이는 고용 사정의 악화와 함께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생산성있는 부분 외에는, 잘 버텨주지 못했다. 프랑스의 경우 동기간 평균 인당 GDP 성장률은 1.7%에서 1.9%로, 시간당 성장률은 1.7%에서 2.3%로 나타난다. 독일은 인당 GDP가 전전 1.8%에서 0.8%로 반토막난다. 반면 미국은 2.0%에서 1.7%로, 일본은 1.4%에서 2.4%로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한다. 패전국들은 큰 후과를 치러야했지만, 승전국들 역시 시장재편과 산업의 변화 속애서 꼭 좋은 일만 겪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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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이 연쇄적으로 작욕하면 신산업에서 누적적인 기술진보로 나타난다. 석유화학의 발달은 녹색혁명으로부터 기계재료의 발달로, 공법과 제어의 발달로 생산성을 견인한다. 세계를 더 긴밀하게, 신속하게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은 그러나 시장의 확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제강으로부터 석화가 발달하고, 기계공업이 진전하고, 식품공업이, 소비재가, 내구소비재가 등장하며 현대 산업의 기초들이 닦인다.

동기간 미, 영, 프로부터 자본이 유출되고 유출된 자본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으로 투입된다. 그 구성을 보면 전체 4,190 중 국채와 지방채가 630으로 1/7, 회사채가 980으로 약 1/4, 증권 및 실물자산 투자가 1,350으로 30%가량으로 드러난다. 독일과 기타 유럽 채무국의 투자비중은 동등하며, 이것이 독일 경제의 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기부채 차입규모가 3,450으로 정말 어지간하다. 당대 채권구성의 특성이 요즘과는 사뭇 다른 듯. 이게 이제 1929년이 되서 작살난다는 거지... 골로 갈 만 하다.
무엇이 독일이 맞이한 대공황에서의 침체의 원인이었을까. 대공황 자체가 가져온 신용의 경색과 디플레이션, 무역의 침체는 전역조건이었지만, 독일의 생산 위축은 1927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배상금의 규모는 적지않았지만, 외부로부터의 자본투입은 그 세배에 이르며 이를 상쇄해왔다. 요는 1927년으로부터 시작된 국내 생산적 투자의 감소요, 분배갈등으로 인한 생산성대비 고임금이다. 보하르트(Borchadt, 1979)는 국내적 원인으로 인한 침체 국면으로의 전환을 지적한다.

그리고 대공황이 다가온다. 1929년(=100)을 기점으로 1930, 1931, 1932 매년 무역량은 93, 85, 75로, 가격은 87, 68, 52로 떨어진다. 총 무역액은 양자의 곱으로, 81, 58, 39로 하락한다. 세계, 북미, 유럽으로 나눠 본 식료품과 원료, 공업생산 비율은 공산품과 원재료의 극적인 하락을 보여준다. 식료품과 원료는 1929년 대비 1932년 각각 50, 44로 가격이 하락한다. 상대적으로 공산품의 가격은 63으로 우위를 보이지만, 생산량에 있어서의 감소는 동기간 64로 현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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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생산과 수출액 감소는 유럽이라는 스코프 내에서의 편차를 보여준다. 독일의 공업생산은 1929년 대비 61로, 수출액은 45로 감소한다. 반면 덴마크의 공업생산은 90으로 감소하지만, 수출액은 47, 평가절하로 인한 자국환 기준 수출액은 67로 방어된다. 평가절하를 통한 수출에서의 가격경쟁력이 침체기의 경제적 급락을 완충한다.
독일의 대공황 대응은 잘 봐줘도 좋았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미 형성된 구조적 요인으로 안한 생산투자의 축소와 실업의 증가 위에 은행들의 파산으로 인한 신용경색과 국제적 공조의 부재는 독일의 신용을 벼랑끝으로 몰아넣고, 1931년 8월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그러나 통화정책의 반전과는 달리 브뤼닝은 긴축정책을 유지한다. 금본위제를 포기하고도 금본위제 하에서의 재정정책을 유지한 결과는 디플레이션과 침체의 심화였다.
구질서의 이데올로기가 반전의 걸림돌이 되고, 파펜 역시 일련의 확장적인 정책으로 경기의 반전을 노렸지만 이는 흐름을 뒤집기에는 미미했다. 나치는 집권하고 1933년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시행하고, 완전고용의 지향은 경제적 회복으로 나타났다. 정책의 방향 자체는 브뤼닝 정부에서 통화정책으로, 파펜과 슐라이허 정부에서 고용과 확장 정책으로 이미 노정되었지만, 이를 밀어붙여 성과로 드러낸 것은 나치였다. 완정고용을 지향하는 고용정책으로, 세금감면을 통한 내수 활성화로, 그리고 그 이면의 군수경제로의 집중으로. 방향의 전환은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의 비극이었다.
위기 속에 영국은 스털링 파운드 체제를 지키려고 분투하지만 대공황과 지속된 침체는 결국 스털링 체제를 부러트리고 영국마저 금 본위제를 포기하도록 압박한다. 프랑스는 푸앵카레 정부에서 환의 평가절하와 내수경제에 대한 부양전략으로 1920년대의 위기들을 순조롭게 극복하며 금 보유고를 재고하고 대륙에서 신용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영국에서도 역시 금본위제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긴축 정책들이 계속 시행되며 그 회복을 더디게한다. 금본위제가 포기되었으면, 신용화폐에 기반한 적극적인 신용의 확장과 공격적인 재정정책, 고용으로부터 산업에 이르는 국가를 기반으로 한 재편성과 투자가 병행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영국의 정체로, 부진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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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국가별 농업비율에서도 알 수 있듯,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에도 전업 노동자라는 건 그렇게 보편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건설로부터 제조업까지, 농한기 계절노동을 통한 교차양상은 보편적이었고,도시와 농촌의 거리 역시 가까웠다. 실업 역시 기존에도 경기순환에 따라 종종 나타나긴 했지만,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에서 본격적인 구조적,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게 된 것은 대규모 실업이 장기간 나타나게 된, 대공황 이후로부터이다.
따라서 실업률의 산출 역시 다양한 각도로 접근이 필요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실업부조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업률로부터, 도시-농촌의 저고용 전반을 고려한 수치와의 비교를 통해 1930-1938 평균 실업률의 양상을 확인해본다. 그나마 프랑스가 10.2%로 양호한 고용현황을 보여주고, 영국의 15.4%로부터 독일의 21.8%, 노르웨이의 26.6%까지, 고용현황은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
영국에서 전통산업, 철강, 탄광, 조선, 직물 등의 영역은 시장잠식과 경쟁국가의 성장, 수입대체산업화로 타격을 입고 신산업으로 전환된다. 사람이 장기 실업상태에 머무르는 것은, 결국 새로운 산업을 통한 고용이 창출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과 토지는 신산업으로 전환되지만, 전통 산업에서 쌓은 숙련은 그렇게 되기 어려웠다. 40세를 기점으로 새로이 고용될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물론 잉여노동력을 농촌으로 방출해버릴 수 있는 프랑스같은 경우 실업으로 인한 문제가 상대적으로 완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당대 인구통계를 생각해보면 2차대전에서 젊은이를 그렇게 갈아넣었는데도 불구하고 실업이 이렇게 폭발했단말이지.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은 결과적으로 실질임금의 상승으로 나타나고, 이는 신규 고용에 대한 축소로 이어지며 고용 현황의 개선을 저해한다. 총고용을 생각한다면 조직노동의 양보와 고용의 증가를 통한 전체 계급의 이해를 도모하는 일들이 필요했지만, 1군 노동시장의 '인사이더'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명목임금의 조정을 통한 고용의 확장은 저지되었고, 실업은 만성화된다. 보하르트 논쟁에서 지적되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높은 실질임금은, 1929년으로부터 1933년까지 다른 유럽지역과 다르게 중립화된다. 이탈리아 역시 무솔리니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낮은 실질임금을 보여준다.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나서도 금본위제 하에서 구축되었던 균형재정에 대한 믿음은 오래도록 정책 엘리트들을 지배한다. 공공의 역할은 결과적으로 구축효과로 돌아온다는 믿음 하에 실업대책은 지지부진해진다. 적극적인 공공 인프라 투자와 고용 확장이 당대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는 주장은 케인즈등을 통해 당대에도 제기되었지만, 심리학적, 금융적 구축효과에 대한 믿음은 확장적 정책의 시행을 가로막았다. 실업자가 100만 300만 쌓여나가도, 이데올로기는 쉬이 변화하지 않는다.
181, 192, 198, 203p
나치독일의 경제정책, 외환으로부터 고용, 공공 인프라에 대한 지향은 파펜 그리고 슐라이허를 통해 그 기초는 완성되어 있었다. 다른 것은 완전고용에 대한 지향, 적극적인 적자재정, 동시에 부르주아에 대한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정치적 응집력이었다. 고용과 신용을 연계시켜 인센티브를 창출한다. 기존 노동자 임금을 낮추며 신규 고용을 연계한다. 이 정책의 조각들이 모여 대규모 고용 창출 프로그램의 청사진이 된다.

결국은 평가절하를 언제 진행하면서 통화주권를 가져갔느냐, 그 과정에서 자국 시장을 어떻게 구축하며 경제적 영토를 키워나갔느냐, 금본위제와 경직적인 신용정책과 언제 이별하고 고용과 적자재정을 통한 경기주양으로 나아갔느냐는 것이다. 금블록과 미국의 회복세가 가장 더뎠고, 소련의 외생적 성장은 이 기간(1930-1938)동안 유의미한 성장을 거둔 드문 사례였다. 영연방 국가들 역시 스털링의 금본위제로부터의 이탈과 영연방 내의 무역 강화를 통해 빠른 회복을 보인다. 인도만 빼고. 영연방 다 잘나가는데 파운드화 페그시켜서 디플레이션과 경제침체 일어난다.
스털링의 금본위제 폐지를 전후로 영불의 희비가 엇갈린다. 상대적으로 대공황 전 안정적으로 경제를 운용했던 프랑스는 금블록제 잔류하녀 디플레이션과 경기침체로, 회복의 정체 속에 놓이고 영국은 영연방 내 교역의 증가를 통해 침체를 안정적으로 완화한다. 재정적자는 연금 등 복지지출을 잘라서라도 제정여력을 확보할 필요로 이어졌지만, 지금도 연금 못짜르는데 1930년대에 잘도 짤랐겠음. 금블럭은 유의미한 결정을 도출하고 집행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 프랑스 역시 매년 정부가 세번 네번 갈리는 아노미로 빠져들며 혼란은 가중된다.
207, 212, 230, 224p
결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선택은 군산복합체를 활용한 외생적 확장이었다. 대공황 이전 일본응 통화팽창을 통햐 생산과 고용 둘을 견인하며 성장해나간다. 만주국 침공 이전의 일본의 경제정책은 금본위제에 잠시 복귀했다 이를 빠르게 포기하고 확장적으로 나아갔지만, 군사적 드라이브가 걸리자 경재의 중심은 빠르게 확장정책에 쏠리게 된다.
소련은 급속도로 집산화를 추진하며 거대한 기근을 낳는다. 그러나 집산화는 동시에 산업에 대한 외생적 발전이기도 했다. 전전까지 소련의 제강량은 독일을 넘어서며 거대한 성장률을 기록한다. 500만에서 천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남겨두고. 집산화를 시작하면 농민들은 가축부터 잡아먹는다. 농산물과 공산품의 협상가격차가, 어느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축적의 원동력이다.
전력, 내연기관, 석유화학, 미디어의 발달이 전간기 미국의 성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전후의 호황을 예비한다. 매스미디어가 국가를 하나로 묶고, 전력기술의 발달은 내구소비재로부터 산업 생산성까지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며 그 사이를 석유화학 제품을이 채워나간다. 내연기관은 산업과 산업을 연결하며 전 국토를 긴밀하게 짜낸다. 그 본격적인 발전은 전후가 되어야 보편적으로 퍼져나갔지만, 그 기술적 해자는 이미 전간기에 닦이고있었다.
프랑스가 속한 금블록은 지속적으로 디플레이션을 겪으며 정체 속에 놓여있었고, 결국 평가절하를 선택한다. 이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대응은, 상호호혜적인 범주의 것은 아니었다. 각자 자국 통화에 대한 이해관계가 교차하며 삼국협약은 불완전연소된다. 금본위제 자체의 태생적 한계가 다시 한번 노출되며 다자적 협상의 원천적 불능을 드러낸다. 상호호혜적 제도가 자리잡기에는, 여전히 공통의 인식이 부족했다.
241, 246, 263, 273p
전간기란 어떤 시기였나, 패권의 이양기였고, 변화한 산업과 시장의 조건에 따라 정치와 경제질서가 변해야만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기존의 헤게모니는 하루아침에 눈녹듯 사라지지 않고, 블록화와 각개격파 속에 수많은 진통을 낳다 결국 대폭발과 함께 소멸하고 잿더미에서 새 세계질서가 구축된다. 공통의 규범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공통의 경험이 필요했다. 마이어(Maier, 1987:162)의 인용이 적절하다.
"누적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전시혼란으로 제도가 와해되어야만 했다."
1920년대, 1950년대, 그리고 1990년대 미국 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다우존스 주가지수 수익률 패턴은 10년간의 호황이 거대한 성장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익히 알다시피, 각각의 호황은 대공황으로, 오일쇼크로, 그리고 버블의 붕괴로 조정을 겪어왔다.
오늘날의 2차 세계화 역시 과거의 세계화들과 다르면서도 같은 문제들에 노출되어있다. 거대한 양극화는 당시에도 감지되었지만 오늘날 심각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정치적 불안정으로, 기술진보와 세계화에 대한 거부로, 갈등과 마찰의 증가로 나타난다. 기존 패권의 이양이라는 것이 마찰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중국의 성장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패권은 어떻게 변화할 것이고, 그 속에서 단층에 선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지. 격변기고, 현상변경의 시기이다. 정치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질서 역시 변화한 구도에 맞춰 뒤틀린다. 그 속에서 답을 찾아야한다.
277, 289, 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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