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경제사

<공장의 역사>, 이영석

stingraykite 2026. 2. 4. 09:23

 
전산업화 시대로부터 1차 산업혁명, 중후장대 산업화와 이후의 탈산업화까지 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과 산업혁명의 과정과정을 돌아보며 산업혁명의 의미를 공장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노동과 기술, 경영과 자본의 비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무엇이 혁신을 낳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동하는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떤 변화를 겪을까. 시대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1부. 전산업시대의 유산
1장. 전산업적 생산조직의 변화를 보는 시각
마르크스와 레닌은 전산업화에서 산업화로의 이행을 협업을 기초로 생산의 사회화가 고도화되는 단계로써 협업의 전개를 농촌경제와 선대제, 단순협업으로부터 매뉴팩쳐, 기계제 공장으로의 단선적 성장으로 규정한다. 돕은 이를 기초로 전산업화의 길드제와 선대제에 대해 양자간의 긴장과 농촌 제조업의 발달로 그 구체성을 더하지만, 이는 전산업화에 대한 일면적 해석으로, 선대제 자체에 내재된 자본주의적 속성과 길드수공업과 선대제 수공업간의 연속성을 간과한다.
2장. 수공업 길드와 농촌공업
길드의 성립에 대해서는 상부구조의 통제를 위한 조직이었다는 설과 자발적인 이익수호를 위한 조직이었다는 설이 교차하는데, 후자쪽에 더 무게를 둔다. 실제 도시에서의 분쟁사례는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된다. 길드는 중세 내내 노동, 생산, 거래를 관장하는 생산조직이자 분배조직으로 기능한다. 자체적인 양성시스템과 품질기준으로 상품의 생산과 품딜을 책임지며 생산에서 추출된 가치를 통해 시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적인 집단이었던 것이다.
길드는 생산과 소비에 대한 지역적 독점, 역내 정치구조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통해 지대추구적 성격을 갖기도 한다. 그 독점적 지위는 도제 생활을 마친 직인들로 하여금 자체 시장을 찾게 하는 동인을 제공했고, 이는 교외와 농촌에서의 생산활동으로 연결되며 선대제가 출현할 기반을 제공한다. 국가적인 중상주의는 이런 생산저변의 활동을 촉진하는 마중물이 되어줬고, 이는 17세기 들어 도시 수공업길드의 쇠퇴로 귀결되었다.
멘델스는 도시-농촌의 공생관계와 경기변동에 따른 경기 사이클과 인구 순환의 톱니바퀴식 상관관계를 요로 원산업화와 단순한 농촌공업을 구분한다. 공생관계의 형성, 농-공업 양자의 전문화, 상호 의존관계의 심화와 외부 시장과의 연결이 그 특징으로 제시된다. 인구 증가와의 상관성의 부재나 원산업화 지역들의 쇠퇴라는 역사적 반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괴팅겐 그룹은 이 개념을 발전시켜 봉건사회로부터 발원하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한 단계로 파악한다.
요크셔 모직업의 사례는 길드 수공업과 원산업화 간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외부수요를 통해 자극된 이 지역의 모직산업은 농촌수공업과 선대제의 결합을 통해 수요의 증가에 따라 성장하며 전통적인 도제 양성식 숙련축적구조로부터 탈피하여 자율적인 고용형태로 전화한다. 이와 같은 발전은 제도의 변화를 통해 확인된다.
랭커셔 면업 역시 영국령 아메리카의 성장, 아프리카로의 무역 확장이 초래한 수출산업 시장의 변동 속에서 성장한다. 1700년 영국의 총 수출에서 아시아는 3%,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는 각각 12%였던 것이 1770년대 초 각기 18%, 43%로 증가한다. 미주시장의 성장은 수출항 리버풀의 배후지로써 랭커셔가 갖는 지경학적 이점이다. 모직물 산업과 면직물 산업의 차이는 원면 공급망에 대한 선대제 상인의 통제권에서 온다. 원재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면 산업이 모직물 산업에 비해 선대상인들의 통제력이 강했다.
개별 농가 각각에 면산업이 침투하며 실톳대와 물레, 제니방적기와 뮬기는 농촌 가구의 일부가 된다. 자본주의로의 약진이 가져온 생활의 시장화와 산업화는 동시에 농-공업 양자에의 진출을 통한 생활의 자유 획득이며, 농업을 통한 생활의 안정성의 추구이고, 공업을 통한 잉여가치의 축적이기도 했던 것이다.
3장. 근면혁명과 산업화로의 길
왜 영국이었나, 정치적 안정, 제도적 누적, 두터운 중간계급 등등... 농업의 발전과 풍주한 에너지 역시 필수적인 요소로 지적되지만, 동일한 요건들이 다른 국가에서는 갖추어지지 않았는가 하면 한두군데에서 찐빠는 나도 얼추 비슷한 조건의 국가들이 없지는 않다. 요는 국제 무역에서의 헤게모니고, 그를 받쳐줄 수 있는 전국시장과 국민국가, 결정적으로 중앙은행과 신용이었다. 조엘 모키어 한번 읽고만다...
더 내재적으로 들어가면 삶의 태도의 문제가 있다. 근대적 근면성, 노동윤리는 어떻게 구축되었는가. 18세기로부터 19세기까지 영국 상업 자본주의의 팽창은 제조업으로 하여금 지속가능한 장기적인 성장을 구축할 수 있는 저변이 되어주었다. 그 속에서 개인의 삶은 시장과 농업으로 또 공업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접촉한다. 도시에서, 그리고 농촌에서 노동이 기초적인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더라도 추가적인 노동투입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기대와 열망이 전 사회적으로 퍼져나간다. 근면혁명의 시작인 것이다. 이는 어느정도 공장에서 노동감독과 종소리, 시계 등 제도적 강제와 인센티브를 통해 유도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원산업화 지역에서의 자발적인 노동과 이에 따른 인센티브를 통해서도 형성되었던 것이다.
2부. 산업혁명과 공장의 원형
4장. 기계와 증기력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자체는 당대에도 사용되었다. 해당 구조변동의 '혁명성'을 동시대 사람들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쟁적 시장, 공장제도, 기술혁신과 증기력, 경제성장 등 산업혁명을 특징짓는 여러 요인이 있고, 이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조엘 모키어는 이들을 사회변동학파, 산업조직학파, 기술중심학파, 거시경제학파로 분류한다.
점진론자들은 산업혁명을 분절적 과정이라기보다는 연속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기술의 변화는 조건의 성숙에 따라 누적적으로 변화하였으며, 비엘리트출신 숙련공들의 독자적 연구가 시장에서 상호교차되며 축적되었다. 기술발전 역시 그 확산에는 시간이 걸렸고, 전역적으로 큰 편차가 존재했다. 기술진보가 수공업을 대체하고 보편화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나 가능했다는 것이다. 더하여, 공장제도와 수공업은 '공생관계'를 이루며 장기간 공존했다. 결국은 비율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면직물공업이었는가. 전통적으로 영국의 기간섬유산업은 모직물 공업이었다. 18세기 전반 내내 모직물공업은 면직물공업에 비해 현격한 생산량을 자랑했다. 그러나 대서양 삼각무역의 발달, 식민시장 개척의 성과로 면직물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인도산 면직물의 유행은 면직물 시장의 수요를 검증해주며 대체수요를 자극하는 유인이 되었다. 전통 수공업길드의 제도적 규제가 미비했던 것 역시 면직물공업의 유적 성장에 원인이 된다.
직조기 자체의 발전 역시 주요한 기술발전이었지만, 당대 면직물공업의 생산병목은 방적이었다. 제니방적기는 방추를 여럿 두어 제사하는 방식으로 생산성을 재고했고, 크기가 작아 가정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었다. 이후 아크라이트 방적기가 등장하며 롤러간 장력 조절을 통해 제사작업에서 면사의 굵기를 섬세히 조정할 수 있게 되었으나 기계의 규모와 작동 동력은 증가하였고, 수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제니 방적기와 아크라이트 방적기의 장점을 혼합하여 뮬(노새/혼종) 방적기가 개발되고,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뮬 방적기의 확산과 보편적 활용은 이를 운용하는 숙련 방적공과 끊어지는 실을 잇고 개재물을 처리하는 계사공의 존재를 필요로 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기업주들은 기술진보로 이들 숙련의 가치를 우회하고자 한다. 유지보수 소요가 떨어진 자동 뮬기는 숙련의 가치를 떨어트렸고, 당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철인(iron man)'으로 불렸다.
증가하는 동력수요는 엔진에 대한 수요를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뉴커먼식 증기기관은 그 비효율로 인해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었고, 크기 역시 문제가 되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열효율에 대한 해석을 통해 분리응축으로 효율을 대폭 개선했고, 이 과정에서 숙련된 제철공들의 기여는 기관의 개발과 대량양산에 핵심적으로 기여한다. 분리응축과 회전굴대엔진을 통한 회전운동의 전달은 증기기관에 대한 수요를 폭발시켰고, 와트와 볼턴의 합자회사는 1775년부터 1800년까지 496기의 증기기관을 주문받아 제작한다. 이 과정에서 특허법과 이를 통한 법적 독점권의 확보는 장기간 시장지배적 위치를 굳히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스티븐슨의 로켓호가 기적을 울리며 철도의 구축과 확장이 전국시장의 거리를 혁신적으로 좁혀나간다.
5. 면공장의 계보와 구조.
면공장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형태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기술의 발전은 공장의 형태를 어떻게 바꿔왔는지, 증기기관의 개발과 뮬 방적기, 방적, 직조의 연속과정이 단속적인지, 연속적인 변화였는지 층위별로 하나하나 밝혀가며 전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산업화 시대에 방적공(spinner)과 직포공(weaver)은 같은 의미였다. 이는 양개 직군이 분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니 방적기의 도입은 가구 내 분업을 촉발하고, 아크라이트 방적기의 등장은 이와 같은 경향을 강화하며 방적을 공업화하고 직포를 외주화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아크라이트가 1771년 크롬퍼드에 방적기 50개 규모의 수력 방적공장을 세우고 3년만에 투자금을 회수한다. 10년 후에는 총 자산 50만 파운드, 고용인원 5,000명의 대자본가로 성장한다.
이와 같은 수력 제사공장들은 동축에 기계를 연결하여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수직적으로 배열되었다. 동력실, 기계실, 계단을 제하고 직기를 올려 단일면적에서 최대의 동력효율을 낼 수 있도록 엔진을 중심으로 공장이 디자인 된 것이다. 이는 이후 증기기관으로 엔진이 교체된 이후에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아크라이트 식 공장의 보급과 관련해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커훈Patrick Colquhoun의 보고서다.'5 이 보고서에서 그는 아 크라이트 식 공장이 전국에 걸쳐 143개소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그 의 계산에 따르면, 이들 공장은 랭커셔 39개소(27%), 더비셔 25개소(16.1%), 노팅엄셔17개소(1.9%), 요크셔13개소(9.1%), 체셔 7개소(4.9퍼센트) 등의 분포를 보여준다.16 이 통계는 그동안 대부분의 면업사 연구에서 그대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산업고고 학의 탐사와 육지측량부 지도를 검토하면, 1788년 당시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208개소의 수력방적공장을 확인할 수 있다."
동력에 대한 수요와 수력 이용의 지리적 제한은 증기기관에 대한 수요를 촉발하지만, 기존의 수력 공장들이 일시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공장으로 전환되기는 어려웠다. 3~4층 규모의 1000추 방적기를 설치한 수력방적공장의 고정투자액은 3,000파운드로, 동일 규모의 증기력 공장은 10,000파운드를 요구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환은 세대의 전환에 따라 이행기를 거치게 된다. 기존의 수력 공장이 증기기관을 양수기로 이용하여 수력-증기력 하이브리드 형태로 전환되고, 신규 공장이 증기력을 채용하고, 공장의 대형화가 증기력의 채택과 함께 진행된다. 이와 같은 전환은 18세기 후반으로부터 19세기 초반, 1770년으로부터 1820년에 걸쳐 세대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분화되어가던 방적, 직포 공정은 카트라이트 역직기의 발명과 동력에의 연결을 통한 자동화를 통해 다시 통합된다. 역직기의 생산성은 기존의 수직기에 비해 3~4배 높았으며, 이는 동력원인 증기기관의 보급, 뮬 방적기의 확산과 함께 남부 랭커셔를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면 및 전면, 소면, 정소면, 연조, 조방, 정방등의 예비공정 역시 기계화되며 전 공정의 기계화가 진척되고, 전체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이런 면공장의 공장주들은 어떤 사람이었나. 랭커셔 인근의 수력장적공장 경영자 43명의 이전 커리어에 대한 조사는 이들의 면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멘체스터 면상 12명, 농촌 가내수공업자 10명, 캘리코 날염업자 및 상인 4명, 기계공 및 직인 출신 3명, 모직이나 견직 등 타 섬유업 종사경력이 있는 사업가 8명, 런던이나 미들랜드 같은 외지출신 6명으로 구성된다. 아크라이트, 스트러트, 데일 같은 이들은 기술의 이행기, 아크라이트 장적기로주터 뮬 방적기와 증기기관의 시대로의 전환기에 계급상승의 기회도 열렸던 것이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들 산업가의 면면에서 구 토지귀족과 신사계층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영국의 토지 80%를 7,000명이, 1만 에이커 이상을 소유한 360명이 전체 토지의 25%를 점유하고 있던 기성계급이었다. 물론 이들은 금융으로, 상업에의 투자로 부를 축적하기도 했지만, 산업의 숙련은 신사의 업이 아니라는 생각에 매여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면공업의 팽창으로 인한 산업가들의 발흥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형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방직기의 확산은 아동노동의 증가로 나타났다. 원산업화에서도 아동들은 집에서 부모인 방적공의 감독을 받아가며 실을 잇는 노동을 해왔지만, 공장은 이들을 가족관계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화의 틀로 이행시켰다. 이중 교구도제의 비율은 당대 구빈원을 통한 인력수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1815년 의사록을 통해 런던, 미들섹스 등 50여 교구의 도제 이동경로를 부석해보면 5,815명 중 2,026명이 공장으로 들어가고, 이중 75%가 면업에 종사한다. 18세기 말 면업 종사자 중 교구도제의 비율은 일반적으로 25% 내외로 나타난다.
제니방적기로부터 아크라이트 방적기, 뮬 방적기로 이어지는 기술의 이행기에서 가내 수직포공들의 수입은 꾸준히 상승하다 19세기를 분기로 변곡점을 지나 하락하기 시작한다. 역직기의 보금과 확산은 가내 수직포의 생산성을 떨어트렸고, 이에 따라 수직포공의 수입이 하락하며 가구 성원들의 공장진출이 시작된다.
뮬 방적기는 기구의 무게와 운용, 품질의 미세조정의 어려움으로 숙련된 방적공과 조수를 필요로 했다. 이들 방적공은 담당 직기의 생산량에 기초하여 공장주와의 협상을 통해 수입을 분배받았고, 이를 조공들에게 분배하며 자기 라인의 생산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생산량에 따른 성과급이 일반적인 분배형태였으며, 이는 노동 조직, 조공의 고용과 해고에 대한 외주화 경향이기도 했지만, 라인과 생산 장악에 대한 방적공 개인의 욕구이기도 했다.
이들은 수직조로부터 이동한 숙련 방적공이 아니라, 공장에서부터 숙련을 쌓아온 직공이기도 했다. 기계의 발달이 실잇기공이라는 조공의 필요성을 대폭 축소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련공의 생산과 노동에 대한 장악은 1830년대까지도 작업을 수행한다. 600추 뮬기 2대에 대해 최소 작업물량을 할당하고, 추가 생산물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며, 방적공은 이를 자신이 직접 고용한 조공들에게 분배하고 남은 이윤을 자신의 몫으로 한다. 1819년 방적공과 조공의 수입을 기록한 자료에서 이 관계가 드러난다. 주간 면사 20파운드 생산을 기준으로 성과급이 520펜스이고, 실잇기공 1, 2, 3에게 각각 110펜스, 86펜스, 68펜스를 지급한다. 양초값 18펜스, 기타비용 18펜스를 합쳐 지출이 300펜스로, 성과급은 220 펜스가 된다. 주급이 11실링이라니 꽤 벌잖아? 물론 평균 노동시간이 60-70시간정도라는 걸 감안해야한다. 역사적으로 1790년부터 1810년까지 성인 남성 평균 주급이 9.3에서 11.3실링정도이니 중위값 생각해보면 수입이 적진 않은 듯.
6장. 기계와 공장의 언어.
당대에도 이런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있어왔다. 산업의 발달이란 역설적으로는 전통의 몰락이기도 한 것이다. 기존의 향촌질서가 붕괴되고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농촌은 낙후한다. 산업화와 분업의 발달은 소외와 질서의 아노미를 낳고, 찰스 디킨즈로부터 토리까지, 다양한 지식인들이 이를 비판한다. 리버럴 토리부터 복고적 토리, 토리-'래디컬'까지 복고적 감정에 기반하여 급진파 노동운동과들과 연대 끝에 노동시간 단축, 동력기 가동시간 제한(소음공해!), 기계에 대한 과세(로봇세!), 수직포공 임금 규정(최저임금!)과 같은 반자본적인 요구들을 내세웠다.
토리 래디컬들은 아동노동에 반대하며 이를 공장-노예제로 규정하고 아동고용규제와 아동 노동시간 단축, 작업장의 도덕화등을 호소하며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다. 반산업과 반기계가 19세기 전반의 실질임금 감소와 맞물려 정치적 응집력을 구축한다. 개스컬의 <장인과 기계>(1836)는 이 과정에서의 전통주의와 복고주의를 기저에 깔고 산업화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과 윤리관의 상실에 대한 대안으로 총체적 삶으로써 목가적인 원산업화 시대의 농-공업 공생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기계의 도입으로 인한 산업화는 전통사회를 해체하고 사회에 도덕적 아노미를 가져왔지만 이를 대체할 건전한 노동-사회 윤리의 창출에는 실패했음을 역설한다.
또한 토리파 지식인들은 숙련과 긍지의 회복을 위한 도덕교육과 차티즘같은 '흉폭과 광기'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조건 향상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일련의 반산업, 반문명 담론이 그렇듯 이들도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주장했던 기계에 대한 과세와 국가의 간섭, 그리고 이를 통한 노동조건의 향상은 다른 집단들과의 연대 속에 일부 관철되었지만, 그 사상은 계승되지 못하고 다른 형태로 재전화한다.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 같은 학자들에 의해 정치경제학으로 구체화된다. 17세기 프랑스로부터 국민국가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된 정치경제학은 영국 지식인들, 맨체스터 학파로 불리는 이들의 활동을 통해 대중저변을 획득하고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된다. 분업과 기계화에 대한 탐구는 총고용을 시장시킬 것이라는 스미스의 나이브한 견해로부터 기계의 노동절약적 성격을 지적한 리카도의 통찰로, 생산투자는 임금의 잉여가치로부터 추출된다는 메이틀랜드의 지적으로 연결된다. 머컬리크는 기계공업이 다른 공업발전의 기반임을 지적하며 산업화와 원자재 공급망의 확보, 특히 탄광이라는 막대한 에너지원의 존재를 강조한다. 거대한 지속가능한 성장의 핵심을 산업화로 짚으며 그는 산업혁명을 옹호한다. 1830년대의 통찰이라기에는 시대를 확연히 앞서나갔다.
중간계급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숙련축적과 지식 향상을 위한 기술강습소 운동이 시작된다. 이는 이후 기술 전문학교와 공학 교육으로 이어진다. 이는 노동자들 스스로 독서와 토론을 통해 자신을 함양하려는 자조운동의 하나인 상호 향상회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감리교 계몽주의 등 개신교적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읽기, 쓰기, 셈하기 등 기초지식의 함양으로부터 과학, 역사, 외국어까지 학습분야를 넓혀나간다. 이는 기술 및 과학지식과 정치경제학의 대중저변을 넓히는 단위기관이 되었다. 한 예로 리즈 기술강습소의 경우 장인층에 대한 과학지식 교육과 그들의 도덕적, 정신정 함양을 목표로 산수, 수학, 기계제도, 기계공학 및 화학원리를 교수했다. 이에 더하여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정치경제학이 영국 경제의 우월성을 설명하는 과학으로, 이데올로기로 성장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학과 산업, 경제에 대해 천착한 이들로 베비지와 유어가 있다. 베비지는 수학자로, 그리고 계산기의 발명가로 알려져있지만, 동시에 공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공장 운영원리를 체계화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유어는 의학적 배경을 갖고 글래스고의 앤더슨 기술강습소에서 자연철학 담당교수를 역임한다. 베비지의 <기계 및 공장의 원리에 관하여>(1842), 유어의 <공장의 철학>(1835)은 당대 산업 현실에 기반하여 산업의 현상과 미래를 조망한다.
이들은 기계를 동력기/작업기, 동력기/전달기/작업기로 분류하며, 숙련을 대체하고 균일한 품질로 대량 생산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본다. 베비지는 숙련의 대체가 결과적으로는 총고용의 팽창으로 나타남을 역설하며, 스탁포트 수직포공의 경우를 예로 든다. 1822~32년 사이 스탁포트의 수직포공은 2,800명에서 800명으로 줄어들지만, 역직분야의 고용자 수는 657명에서 3,059명으로 증가한다. 반면 유어는 "사람의 노동을 대신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기계개량의 항구적인 목적이자 경향"임을 절감하며, 이와 같은 경향이 노-자 관계에서 노측의 열위를 초래할 것이라 전망한다.
베비지는 대공장으로의 집중의 분업의 고도화와 생산비의 절감을 통해 사회 전체의 총 효용을 높이고 성장을 일구는 길임을 역설한다. 유어는 여기에 더해 공장의 엄격한 정의를 통해 그 미래상을 현시한다.
"나는 이 공장이라는 이름이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는, 동일한 대상을 생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협조하며 작용하는 다양한 기계적•지적 기관으로 구성된, 그리하여 그 기관들 모두가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동력애 종속되어 있는, 거대한 자동장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자동화로 구현되었다.
당대 산업의 현실과 오늘날 전체 산업의 업종별 구성형태는 여전히 유어의 전망, 숙련이 배제된 자율적 생산시스템에 이르기에는 많은 변화가 필요함을 보여주지만, 이후 중후장대 산업의 발달과 자동화의 고도화는 정확히 이 지향점을 향해 달려왔다. 결국 제조업은 베비지의 분업론과 그 과정에서의 숙련, 그리고 유어의 온전한 자율적 자동화를 통한 숙련의 배제 사이를 끊임없이 요동한다. 자동화의 고도화 속애서 분업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숙련의 축적이 고용의 형태 전환으로 이어진다.
생산의 통제에 대해서도 양자의 의견은 비교된다. 베비지는 협동조합적 소유형태를 통해 노자간 화해와 공존이 가능함을 전망하지만, 유어는 오히려 노동 전 과정에 대한 기업의 지배를 통해 이를 하나의 권위로 구축하고 그 과정에서 숙련공의 거만함을 깨트리고 숙련공과 보조공이 도덕경제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에서 자본과 자동장치는 동의어다.
7. 공장법, 자본, 노동
1802년 '도제의 건강 및 덕성보호법'은 근대적 공장제도에 대한 최초의 국가간섭이었다. 공장순시관제 도입이 명시는 되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 자신이 면공장주였던 로버트 필 의원과 오언을 비롯한 계몽 공장주들의 활동은 1819년 면공장에 한정된 수정안을 통과시키고, 1825년과 1832년 휘그파 의원인 홉하우스가 제안한 공장법이 입안되지만 마찬가지로 유의미한 효과는 없었다. 법안이야 좋은 말들이지만 감독, 처벌기능이 없다면 이는 유명무실하다.
1830년대 토리-래디컬들은 시간단축위원회를 조직하고, 1831년 18세 미만 연소자 및 어린이에 대한 일 10시간 노동제한과 근무기록부 비치, 위반 공장주에 대한 200파운드 벌금을 골자로 하는 10시간노동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는 공장주들의 지연전술에 걸려 회기를 넘겨 폐기되고, 1833년 휘그당 정부에 의해 공장조사를 위한 왕립위원회가 구성된다. 다양한 사회조사와 통계방식, 공장주에 대한 설문조사, 어린이를 포함한 노동자와의 인터뷰, 구빈감독관이나 의사와 같은 관계자 증언 청취, 어린이에 대한 건강진단 및 신체검사등으로 종합적인 조사를 통해 내린 결론을 내린다. 그 골자는 아동/성인 노동시간이 동등하며, 어린이들의 만성질환과 지적/생활교육의 기회가 박탈되었고, 아동들은 부모에 의해 강제로 노동에 내몰리고 있으며, 기존 공장법은 무력하다는 것이었다.
1844년 공장법은 그 대상에 18세 이상의 여성노동자도 포함시키며 아동노동을 반나절로 제한하며 교육에 대해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안전사고에 대한 방지조항과 감독책임, 벌금 역시 입안된다. 1847년에 들어 1831년 10시간노동법의 골자가 실질적으로 구현된다. 이는 토리-레디컬의 복음주의, 대중주의의 발흥과 여론의 압력, 자유주의의 개혁 열정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이 복합되며 나타난 결과였다.
공장법과 아동노동 제한은 자본 내에서의 이해관계 역시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이었다. 다수 중소 공장주의 반발과 달리 일부 대공장주들은 이를 지지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대공장들이 증기 동력을 채택하였고, 기술 진보를 선도적으로 받아들이며 아동노동의 필요 자체가 감소한 것에 기인한다. 반면 중소 공장주들의 수력 설비는 실잇기로부터 여러 예비작업에서 여전히 높은 아동노동 투입을 필요로 했다. 교육에 대해서도 대자본가들은 전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833년 공장법 제정 이전에도 공장 아동을 위한 야간학교, 주일학교, 유치원등을 통해 이들에 대한 교육을 제공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교육을 통해 이들을 통제하고자하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유니테리언적, 감리교적 소신의 천명이기도 했다. 대공장주 스트러트A. R. Strutt는 이렇게 증언한다.
"두 사람이 원래 타고난 능력이 똑같다고 하더라도, 유아 때부터 계속 노동에 종사했으면서 어떤 학교 교육도 받을 기회가 없던 사람보다는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 규율을 더 잘 지키고 더 나은 사회성원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더 쓸모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분명 그렇지요."
랭커셔지역의 면방적공과 노동조합 지도자들 역시 공장법 개정의 주요 지지세력이었다. 이들은 아동의 노동시간 단축에 초점을 맞춘 토리-래디컬과는 달리 면공장 노동자 전체의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했다. 이는 부자간 노동시간 일치를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어느정도 복고적 성격 역시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산업에 대한 인식은 토리-래디컬의 복고주의와는 거리를 두며 발전한다. 산업의 발전과 숙련의 이동은 이들의 지위를 유적으로 변화시켰지만, 뮬 방적기의 도입과 새로운 숙련의 축적,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성과급제를 통한 생산에 대한 장악은 기술 발전에 의한 실질적 종속의 내재적 경향과 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대응이라는 긴장의 요동으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생산과의 유기적 결합은 이들 계급에게 산업화의 병폐를 직시하게 하면서도 기술진보와 성장을 통해 전체의 몫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방적공 지도자 도티 또한 기계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대하지 말고 기술 진보의 정당한 몫을 차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소생산자적 총체적 삶과 산업사회의 규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중성의 단면이면서, 산업사회의 미래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인지한 결과이기도 하다.
3부. 무거운 근대성과 공장제도
8장. 2차 산업혁명과 공장
철강, 화학 등으로 대표되는 중후장대산엊의 약진은 1차 산업혁명의 선도국이었던 영국이 후행하고 미국과 독일이 약진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영국 역시 양국에 나타난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채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성장의 기울기는 달랐다. 1870년 영국, 독일 미국의 공업생산지수를 100으로 놓고 1900년과 1913년과 비교해보면 영국이 199, 249, 독일 321, 526, 미국 401, 730으로 나타난다. 1870년으로부터 20년의 대불황은 미국과 독일의 근린궁핍화와 영국의 지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1895~99년간 영국의 강철 생산량은 세계 강철 생산량의 20%를 차지한 반면 독일과 미국은 각각 23%, 35%에 이르렀다.
이는 영국 기업가 정신의 쇠퇴와, 산업혁명기 완성된 제도의 2차 산업혁명에서의 지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만한 공학, 경영학 고도화의 낙후로부터 기인한다. 그리피스Robert Griffiths의 독일 기업가들의 아시아 시장에 대한 진출 노력에 대한 상찬은 상대적으로 안주하려는 태도를 보인 영국 기업가들에 대한 조롱으로 나타난다.
"소아시아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독일인은 50만 평방마일에 이르는 그 지역의 무역을 경쟁을 치르지 않고 장악할 수 있었다.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기업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회사와 단순히 거래하는 데 만족할 뿐이다."
2차 산업혁명과 대불황은 생산비 절감을 위한 규모화를 촉진하며 미국과 독일에서 수직적 통합, 산업과두제, 생산 및 작업과정에 대한 경영자 통제, 위계적 경영제도, 금융-산업자본의 융합을 특징으로 하는 거대기업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영국의 제도는 가족기업을 중신으로 한 중소기업에 맞춰져있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분야에서의 거대기업의 형성이 지체된다. 이는 상대적인 시장 경쟁압의 차이에서도 비롯한다. 기존 식민지시장에 대한 접근권이 있던 영국에 비해 양국의 기업가들은 시장 개척을 위해 더 높은 경쟁압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법인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지체된 것 역시 수직적 통합, 수평적 통합, 기업 합병 등 규모의 형성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런던-미들랜즈-스코틀랜드 철도회사(22만 2천명)나 유니레버(6만명)에서 보듯 영국의 거대기업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연되었을 뿐이다. 1912년과 1937년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시총 상위 25개사의 생산액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면 1912년 미국은 9.3%, 영국 9.2%, 프랑스 6.3%이고, 1937년 이는 각각 19.5%, 21.8%, 6.4%로 나타난다. 다만 이중 중공업 분야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다.
면공업에서 기술도입의 지체와 이로 인한 비중의 축소는 제도주의적 접근이 잘 들어맞는 실례가 된다. 1870~80년대의 기술적 발달은 신형 기계인 링 프레임 등의 도입과 생산성의 증가로 나타났지만, 1913년 미국에서 신형 방적기가 87% 보급되었을 때 영국에서의 보급률은 13%로 나타난다. 영국의 중소 면공업은 규모 면에서 성장하지 못했고, 기술투자로 돌파해야 할 생산성향상을 노동감독과 외주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20세기 이후 인도와 일본의 진출에 따라 그 자리를 내주고 만다.
철강산업 역시 수요 구조에 따른 기존 공정에 대한 고수로 공급망 재편과 생산투자가 미뤄지며 미국과 독일의 연속제조공정에 자리를 내준다. 염기성 평로법과 산성 평로법의 차이에 의한 원재료 선택폭의 차이는 요소 생산비 증가의 원인이 되었고, 세계 철강 시장에서 점유율의 하락으로 나타난다. 1870년 영국은 세계 선철의 50%, 연철의 37%, 강철의 43%를 생산했다. 이는 1913년 선철 및 강철 생산량이 10%로 떨어지며 극적으로 하락한다. 기술투자의 지체와 숙련의 고집에 따른 산업의 낙후는 결국 총 고용의 축소로 돌아온다.
가족기업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체제가 유리하게 작용하는 업종도 있다. 기계가공업이다. 밀링, 선반, 연마기가 도입되고 부품의 표준화가 보편화되며 기계가공업의 생산성은 증가한다. 기존의 숙련은 반자동기계의 도입으로 새로운 숙련으로 대체되었고, 기존의 숙련공이 빠진 자리를 새로운 일반공들이 채워나간다. 숙련집약적 산업과 노동집약적 산업의 차이, 기업 규모의 차이가 시대에의 적응을 다르게 한다.
9장. 생산에 관한 새로운 담론,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
테일러Fredrick W. Taylor(1856~1915)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주형제작patternmaking 분야의 견습도제로 일하고, 펄프 제조공장에 입사한 후 제강공장의 기술자를 거쳐 수석 엔지니어가 된다. 이후 공과대학에 등록하여 통신학습느로 기계공학 학위를 받는다. 1893년부터는 독자적인 기술자문활동을 펼치며 베들레햄 철강에서 고속강 개발을 주도하고 이로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다.
그가 주창한 과학적 관리는 인간 노동의 각 요소에 대한 과학의 발전, 과학적인 선발, 훈련, 교육, 과학적 원리에 입각한 협동작업,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의 작업과 책임의 면확한 구준으로 요약된다. 요는 감으로 진행되던 숙련의 영역을 정량화하고 그 인과관계를 규명하여 문서화하며 이를 관리하는 경영체제를 통해 확장과 고도화를 비용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성이 향상되고, 생산성 향상을 통해 축적된 잉여가치는 노자간 갈등이 아니라 협동이 토대가 되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만든다.
이는 생산성의 증대, 사무실과 작업장의 조직구조 개편, 인센티브와 성과급을 통한 임금체계의 표준화로 나타나고, 미국 산엊계에 커다란 자극을 주며 전반적인 경영의 변모를 유발하며 성장의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유럽 역시 20세기 초부터 테일러주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었으나,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그 도입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2차 산업혁명은 내구소비재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상품을 만든다. 자동차로부터 청소기, 세탁기, 축음기 등은 장기간 사용을 염두에 둔 기계제품으로, 그 재료는 금속이 주를 이루며 정교한 매커니즘을 갖는다. 이들은 사치품으로 시장에 자리잡기 시작했으나, 그 유용성은 폭넓은 시장 수요로 나타났고, 이에 대한 생산성 혁신이 요구되게 된다. 그리고 헨리 포드가 등장한다.
포드Henry Ford(1863~1947)는 미시간 주의 기계공장에서 견습생 시절을 보내며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에디슨 조명회사의 기술자를 거쳐 1893년 수석 엔지니어가 되고, 1903년 독립하여 T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포디즘의 요체는 일관연속생산과 부품의 표준화, 기술적 분업이다. 조립라인을 통한 집중화와 중앙화는 공정별 표준화와 함께 생산속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 테일러주의의 물질적 구현이자 유어가 말했던 자동공장으로의 한걸음이 포드의 컨베이어벨트였다.
1908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T모델은 1927년까지 1,500만대 이상 생산되었다. 이는 그만한 시장저변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장의 확장과 그에 따른 숙련노동력의 필요성은 포드사의 임금인상으로도 이어진다 1914년 그는 업계 평균 일당 2.34달러이던 당시의 임금을 일당 5달러로 인상하며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근대란 무엇인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라는 생산양식으로 드러나는 '무거운 근대성', 또는 중후장대식 근대성이다.
10장. 영국에서 새로운 생산조직의 수용.
전간기 영국의 산업은 어떻게 변화하였나.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영국의 기업구조는 전쟁 이전 대기업을 중신으로규모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업종에 따라 달랐지만, 전반적으로 성장의 과정애서 독, 미에 비해서는 지연되었음에도 꾸준히 드러난다. 기선 산업의 쇠퇴와 신산업의 약진이 교차하며 전후와 대공황 시기를 제외하면 꾸준한 성장을 보인다.
전쟁을 통한 전시 동원체제, 1915년 군수물자법의 제정과 군수물자부에 의한 경영 효율화는 산엊 전반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강화하며 생산의 과학적 관리, 생산의 효율화를 기층 레벨까지 촘촘히 침투시킨다. 자동차, 항공기, 전기와 같은 신산업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가 이루어지며 생산의 규모화가 이룩된다. 군 인력 동원과 함께 여성으로부터 연소자, 빈민층에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은 다 공장으로 가서 고용되어 완전고용이 달성된다. 중후장대한 근대성이 비로소 보편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신용의 팽창과 통화량의 증가는 전후의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고, 일시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임대료애 대한 국가의 통제가 이루어지지만 실효성은 크지 않았다.
대공황은 전 세계적인 충격을 안겼지만, 독일과 영국에서 그 피해는 다르게 나타났다. 1929년으로부터 1933년까지 미국, 독일, 영국의 산업생산은 각각 46%, 47%, 17% 감소한다. 특히 중공엊분야는 더욱 심각하여, 3국의 철강생산은 62% 감소한다. 이에 따라 실업자는 국가별로 미국이 1,283만명, 독일이 430만명, 영국은 256만명에 이르른다. 이는 20-30%의 실업률에 해당한다.
전간기동안 영국의 수출은 일본, 이탈리아 등의 신흥국의 도전에 따라 위축되어 산업의 공수교대가 나타난다. 소비재에서 내구재로 산업의 변동이 일어나고, 자동차 산업 등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1924년에는 전체 산업 생산에서 수출산업 중심지의 비중이 49.6%, 신산업 중심지의 비중이 28.7%였으나, 1935년에는 전자가 37.6%, 후자가 37.0%였다. 이에 따라 랭커셔, 요크셔, 남부 웨일즈, 스코틀랜드 지역은 쇠퇴한 반면, 미들랜즈와 런던 그리고 동남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번영한다.
군수물자부에 의한 테일러주의의 확산은 대기업의 성립으로 연결된다. 내구소비재와 식품공업, 전기, 화학, 자동차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이는 일관생산과 규격화를 통해 달성된다. 그러나 이는 기존의 숙련노동 시스템과 혼화되어 나타난다. 컨베이어 벨트같은 일관작업 공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1~2%에 지나지 않았다. 기존의 숙련공들은 수직계열화와 전통적인 성과급 체계로 조직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 전반에 대한 수직계열화는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당시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편이면서 동시에 비용 증가의 원인이기도 했다.
자동차 공업의 사례에서 이는 간명하게 드러난다. 모리스, 오스틴, 험버, 스탠더드, 포드, 폭스홀의 6개 자동차 회사는 미국과의 가격경쟁력이 뒤처지는 상황에서도 시장의 까다로운 특성과 다양한 차종에 대한 요구를 만족하며 1922~1939년간 8.5%의 이윤율을 보이며 미국의 5%에 비해 우월한 비용효율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관세와 숙련노동에 기인한 유연생산에 힘입은 것으로, 숙련노동자들에 의한 주요 공급망의 수직계열화는 동일 생산규모에 비해 높은 노동투입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산업에서 숙련노동자가 차지하는 지중은 산업의 합리화가 진전되며 1917년 35%에서 1933년 18.3%로 낮아져간다. 이는 미숙련공의 충원과 공정의 간소화로 나타난 결과였다.
포드의 단일모델 생산모델은 영국 시장의 다양한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지 못하며 관세와 함께 시장 장악력이 감퇴된다. 이는 단순히 전간기만의 일이 아니라, 이후 미국 제조업의 쇠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경향이다. 포디즘의 강고함이 역설적으로 다품종 소량시대로의 전환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간기의 산업구성과 유럽 시장에서의 전개에서도 드러난다.
11장. 노사동거체제와 복지국가.
산업발전과 이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형성, 중간계급의 정치적 확장과 계급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공장법 제정에서부터 19세기 말 빈곤 실태가 부각되며 신자유주의new-liberalism 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자유당은 1892~95년 누진소득세를 적용하고, 이를 재원으로 1906년 집권당이 되며 학교급식으로부터 노령연금까지 일련의 복지제도를 구축한다. 1908년의 노령연금은 70세 이상이고 20년간 영국 시민이었던, 연간소득 31파운드 10실링 이하의 이들에게 주당 5실링을 지급하는 형태였다. 당시 영국의 평균 연소득은 70파운드로, 하위 50%의 평균 연소득은 50파운드였다. 평균연령은 45~50세로, 70세 이후의 기대여명은 남성 8.4년, 여성 9.3년이었다. 70세 이상 인구의 비율은 3~4%였다.
전간기 영국의 실업률은 NIS 통계에 따라 추산된다.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실업률이 10%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딱 한번 1927년에 있었는데 이때 실업률은 9.7%였다. 단기실업과 장기실업, 빈민구제제도에 의한 대응이 각각 이루어졌으나, 장기실엊자에 대한 실업급여는 재정적 여력부족으로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재정정책과 긴축정책을 둘러싼 설전이 벌어졌으나, 재정정책을 화끈하게 썼다면 실업율은 좀 떨어졌을 것이다. 이는 화폐정책의 불확실성과 대공황에 뒤이은 침체, 그리고 이 기간동안 일어난 영국의 산업 구조개혁에 기인한다.
1918년 처음 도입된 실업보험제는 제한적인 수급조건을 가진 이들에게난 적용되었으며, 1920년 국민조험법의 제정과 함께 보험의 테두리 내에 있는 이들에게 이를 기준으로 급여를 지급하게 개선된다. 이후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출간되고, 장애인고용법, 가족수당법, 국민보험법, 국민보건법, 아동법, 국가부조법, 고용 및 직업훈련법의 제정을 통해 영국식 사회보장체계가 완성된다. 이 체계의 배경에는 완전고용에 가까운 고용현실이 있었고, 노동당은 이를 유지하고자 대대적인 국유화와 고용보장에 나선다. 1946년으로부터 1949년까지 국유화 비율은 석탄, 철도, 항공, 가스, 전기, 제철 등 분야에서 진행되며 국부의 20% 수준에 달한다. 이와 같은 정책기조는 1950년으로부터 1964년까지 집권한 보수당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대서양 양편에서 뉴딜 질서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영국의 제조업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국유화 비율이 20%인데 경제가 잘도 굴러가겠다. 1950년 영국의 공업생산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1.4%였으나, 이는 1975~7년에 평균 9.1%, 1980년대에는 5%로 하락한다. 이는 서비스산업으로의 이동과 전통 제조업의 쇠퇴라는 산업의 교차로 나타난다.
내구소비재, 자동차로부터 각종 가전제품은 공급망의 구축을 통한 산업생태계의 발전과 일관생산을 통한 중후장대한 근대성의 산실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는 세계화와 함께 산업 클러스터가 해체되고 선진국에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지며 종말을 맞는다. 중후장대한 근대성에서 출발하여 시대는 경량화된 현대로 진입한 것이다.
12장. 현대 영국 경제를 보는 시각.
세계화가 진전되며 1960년대부터 다국적 기업이 발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1970년대를 지나며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바야흐로 진정한 세계화의 시대가 열린다. 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하며 서비스업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전통의 산업은 화폐가치의 변동과 생산비의 악화를 맞으며 스러지고, 고도화로 부가가치를 높이거나 중소규모에서 민첩하게 거동하며 형질을 변화시킨다.
전후의 마셜플랜과 복구를 통한 호황은 1950년대로부터 1960년때까지 지속되었다. 영국 역시 산업을 온존한 국가로 상대적 우위를 누리며 성장을 지속하였으나, 일본과 독일의 약진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신흥국들에게 지속적으로 성장을 잠식당하며 영국의 제조업은 정체하고, 고용 역시 위축되다 오일 쇼크로 기점을 맞는다. 1984~8년 사이 영국 전체의 고용인구는 2.9% 증가하지만 이는 서비스업에서의 고용 증가가 견인한 것으로, 제조엊의 고용은 동기간 6.1% 감소한다. 이는 지역적 차이로도 나타난다. 전통적인 제조업 지역, 북부, 북서부, 미들랜즈, 요크셔는 연평균 실업률 10%보다 현저히 높은 실업률을 보인다. 수출산업과 제조업의 쇠퇴가 지역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청년 실업률이 20%에 육박하고, 저숙련 실업률은 고숙련에 비해 다섯배 높게 나타난다.
대처가 집권하며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과 클로즈드 숍 금지, 고용보호제도에 대한 철폐가 이루어지고, 1984년 전국 탄광노조 위원장 스카길Arthur Scargill은 2만명 고용 감축에 대항하여 전후 최대의 광부파업을 52주간 진행한다. 잘 안됐다. 전반적인 제조업의 침체 속에 다수 대중이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고 불안정노동에 종사하는데 100% 영국 석탄공사 소속이고 연간 8억파운드의 적자를 보던 탄광 노동자들이 생산을 멈춰봐야 정부재정만 아껴주지 무슨 변화를 만들 수 있나. 52주를 파업을 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거다.
뒤로 갈수록 끝발이 좀 떨어지시는군. 영국 제조업은 왜 망했나. 자동차와 철강의 사례로 확인해본다. 재무부의ㅡ스탑 앤 고 정책에 따른 화폐가치 조절과 이로 인한 장기 투자계획의 부재, 단기적 성과 집착, 그리고 생산투자의 지체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금융 중심의 영국경제에서 화폐가치 안정이야말로 1순위였고, 이 과정에서 제조업은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조다는 국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이 우선시되며 낮은 1당 설비투자, 생산성 개선을 위한 장기투자에 난항을 겪게 된다. 도요타를 중심으로 린 생산방식이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며 영국 제조업은 1970년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몰락한다.
오일쇼크외 이어진 정보화 혁명, 그리고 세계 시장의 구축과 초국적 기업의 등장은 중후장대적 근대성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경량화된 연속생산, 아이디어의 가치가 더 중요한 시대로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포디즘을 지나 포스트 포디즘의 시대에서, 노동과 숙련의 자리는 증가하는 자본의 비중에 대해 어느 위치에 서야만하나.
요는 베비지와 유어의 논쟁에서 단초를 보인 분업에 따른 전문성 강화와 자동기계로써의 근대 공장 사이의 긴장이다. 여전히 숙련의 영역은 존재하고, 휴머노이드의 도래가 목전에 놓인 오늘날에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기술의 발전은 산업구조의 재편과 숙련 형태의 변환으로 이어졌고, 앞으로의 세계에서도 노동의 자리는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충분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이들은 무엇을 해야하는지이다. 거기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공공의 역할이요, 사회의 공공성을 지키는 길이다.
제니 방적기로부터 아크라이트 방적기, 뮬 방적기로의 변환은 대량의 숙련전환과 노동투입의 감소를 불러왔지만, 결과적으로 총고용은 증가했다. 역직기의 개발 역시도 결과적으로는 부대산업의 성장으로, 전체 제조업, 전체 산업의 고도화로 이어졌다. 2차 산업혁명에서 신흥국은 약진하고 영국은 후행하지만, 이는 동시에 서비스업의 고도화로 전체의 성장을 견인한다. 전간기의 대기업, 신산업 위주의 성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1970년으로부터 1990년까지의 장기실업은 사회적 격차를 확대하고 지역의 붕괴를 촉발했지만, 동시에 서비스업의 고도화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전문화로, 강소기업의 출현으로도 이어졌다.
경기에는 음이 있다면 양이 있고, 구조개혁이 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새로 진입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격차사회가 다양한 갈등을 낳았지만, 그래도 영국의 총류중산층은 그 질량을 유지하며 미래로 나아갔다. 블레어의 제3의 길 역시 정치운동에서 정치질서로 전환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동당 버전의 수용이었다. 1984년의 광부파업이 결의가 부족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어떤 변화는 인내하고 받아들이며 다른 대안을 통해 나아갈 바를 모색하는 것이 최선의 해이기도 하다.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몫을 지켜나가며 미래로 연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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