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극항로는 좀 물음표가 떠서 묵혀놓고 있었는데 내공이 있다. 패권이란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하여 농경제국로부터 상업제국, 산업제국을 일관하며 농업과 상업, 산업의 차이를 중점으로 각각의 한계와 이행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한다.
독서노트 인용이 안되니 별 수가 없다. 패권, hegemony란 무엇인가. 역내에 자신의 의사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이다. 이는 경성과 연성 패권으로 나타나며, 실제의 양상에서 이 둘은 혼재되어있다. 시대정신을 이고있기에 물리적 패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상징적 패권으로 권역 내를 지배하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맑스는 이야기한다.
"첫째, 어떠한 사회 구성체도 그 내부에서 성장한 생산력이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둘째, 사회는 그 해결을 위한 필요조건들이 이미 싹터있지 않은 과제를 스스로 제기하지 않는다."
그람시가 차마 틀렸다고 할 수 없어서 숙명론적, 기계론적으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이게 다 맑스가 역사공부가 덜되서... 19세기 사람 역사 모른다고 너무 놀리지 않기.
그렇다면 이 패권은 어떻게 이동했는가, 농업제국에서 패권의 형성은 농업의 한계에 기인한다. 농업은 그 자체로 기술진보를 통한 생산성의 향상에 제약을 느끼고, 슐츠의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농업생산이 확대균형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농업이 갖는 불확실성과 낮은 소득이 위험회피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업국가에서 성장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영토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확장한계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확장 한계에 이른 제국은 내부의 이윤율 강하로 파국에 이르른다. 구조개혁은 스스로의 힘으로 시도되지 못한다. 기존의 구조와 지배계급이 구조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진과 로마가 그 전형으로 제시된다.
스페인 제국은 과도기적 제국의 한 사례로 제시된다. 레콩키스타와 이 과정에서 수립된 확장체제는 식민 제국, 세계 제국의 건설로 나타났다. 그러나 제국의 무리한 확장과 전선의 유지는 제국 자체의 존립기반을 갉아먹었고, 상업제국으로써의 도약을 저지하는 재정적 곤란으로 나타났다. 결국 장기추세의 반젖에 따라 제국은 패권을 상실하고, 이는 다음 국가인 네덜란드로 계승된다.
네덜란드는 상업 제국의 전형을 보여준다. 상업사회의 확장과 재정개혁은 전쟁과 경제의 선순환을 이루며 이미 발트해의 무역을 장악하고 북해의 청어 어업과 조선업에서 성세를 이루던 네덜란드가 국공채의 발행을 통해 전쟁의 승리를 이윤으로 치환하는 구조를 형성하도록 한다. 이는 네덜란드의 짧은 전성기로 이어졌지만, 상업사회는 그 자체의 한계가 있었다. 지속적인 기술발전과 이를 통한 생산성 향상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상업사회는 무역상품의 이윤율저하와 이에 따른 확장한계의 돌파에서 좌절을 겪고 장기추세의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산업사회란 무엇인가. 에너지의 혁신, 기술 혁신으로 경기의 계절적 변동으로부터 벗어난 사회이다. 공급부문의 기술 혁신이 생산성 향상을 추동하는 사회이고. 영국은 재정개혁과 전국시장의 성립, 영국은행을 통한 신용의 수급을 통해 상업-군사 복합체로 네덜란드에 비교우위를 보여주었고, 식민지 확장으로 상업자본을 확충한다. 자국에 대한 생산성투자는 당대 영국인 평균임금이 세계 최고 수준을 구가하게 한다. 높은 임금은 기술발전의 촉매가 되고 풍부한 에너지와 축적된 기술은 에너지 혁명으로, 그리고 산업 혁명으로 연결되며 항구적인 성장의 레일을 놓는다.
이후 독일과 미국이 산업혁명의 새로운 메타를 쓴다. 기업의 규모화, 효율화, 표준화는 대량생산 체제 구축을 통한 생산효율 최적화로 이어졌고, 자유시장이라는 바탕 하에서 미국은 영국을 넘어 폭발적인 제조업 생산력으로 패권을 쟁취한다.
그 첫 장으로써의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복합왕국(composite monarchy)이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동군연합으로 구성된 에스파냐는 고유의 체제를 유지하며 한 순주를 섬기는 다원적인 체제였고, 이는 에스파냐의 빠른 확장와 체제안정성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
레콩키스타는 이후 식민제국 체계의 원형을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계약에 의해 정족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하고, 군사원정을 통해 영지를 수립하고, 식민활동으로 영지를 경영하며 출자자에게 수익을 배분한다. 계약에 의한 정복과 수익배분이 에스파냐 정복 모델의 핵심이었다. 이는 농업사회적 전통에 기반하며, 상업사회의 면모를 차용한 모델이었다. 바로 이것이 이후 해외 정복 활동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유대인과 모리스코를 추방하며 카스티야의 다양성을 한줄기로 통일시킨다. 카스티야의 내분은 이로써 잦아들고 한층 강력한 국왕의 통치가 펼쳐지며 재정수입 역시 회복된다. 내분이 심했던 1474년의 세수는 국가 수입이 이전에 비해 3분의 1로 감소했으나, 이후 1504년에는 1406년 수준으로 회복된다. 주요 세수는 매매세로, 전체 세수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겐트의 카를이 집권한다. 카를과 그의 플란데런들의 지배는 카스티야에 정권으로부터 소외라는 공포를 불러왔고, 합스부르크의 재정정책, 지역간 잉여재정의 배분은 납세자들의 저항을 불러온다. 1520년 코뮤네로스의 반란은 이러한 저항의 표출이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개척이 시작되고, 포토시로부터 은이 쏟아져들어온다. 1540년대에 연 18톤이던 포토시의 생산량은 1560년대에는 연 94톤, 1590년대에는 연 217톤이 유입되며 부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와같은 제국의 팽창은 무역적자로 나타나고, 자본의 생산적 투자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자본의 축적이 자국에 대한 확대 재투자로 이어지지 못하고 방만한 재정운용이 국가의 내실을 기르기보다는 외부와의 전쟁에 소모되면서 스페인의 명운은 변곡점을 지나간다.
확장 초기 국가의 재정수입은 증가한다. 모든 영토 중에서도 가장 잘 정비되어있던 카스티야가 재정 부담 역시 무겁게 진다. 카를 5세는 카스티야의 각종 이권을 담보로 1521년부터 1555년까지 2800만 두카트의 부채를 일으킨다. 이중 64%는 독일, 제노바 등지의 7개 은행가 가문으로부터 나왔다. 이돈은 다 지중해와 신성로마황위의 계승과 수많은 분쟁들에서 소모된다. 재정-군사 복합체로써 군사적으로 투여된 재정이 국가경제에 선순환되는 구조는 형성되지 못한다.
결정적 타격은 펠리페 2세 시기에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물려받은 부채에 본인의 정책에 따른 추가지출로 스페인의 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고, 이는 소유 영지에 대한 세율의 인상으로 나타났다. 카스티야에 대한 착취는 메디나 델 캄포에서 소비세가 1575년 이후 기존의 1.2%에서 10%로 인상된 것처럼 가혹한 세수증가로 나타난다. 1571년 390만 두카트로부터 1596-1600년 1300만 두카트에 달했던 아메리카로부터의 귀금속 수입이 재정악화를 지탱해주지만, 이미 하락세로 접어든 스페인 제국에 필요했던 것은 재정과 산업, 결정적으로 전선의 구조개혁이었다.
세금을 쥐어짜고 산업이 쇠퇴하면 도시인구부터 감소한다. 16세기 초 600만에서 1580년대 800만까지 증가하며 특히 제조업 중심지 코르도바는 1530-1587년 83%의 인구증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세고비아는 1580년 2만 5천이던 인구가 17세기 중반 절반으로 감소하고, 톨레도는 1571년 6만명이던 인구가 1631년 2만명으로 감소한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개척했지만 식민지 시장의 수요조차 자국 제조업으로 충당하지 못하면서 그 상품 또한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는다. 17세기 이후 모직물과 견직물은 영국과 네덜란드에 밀려나고 바스크의 제철업 역시 스웨덴과의 경쟁에서 패배한다. 아메리카와 네덜란드의 조선업이 발달하며 스페인 내에서 건조된 함선의 수요가 줄어들고, 국내 조선업은 퇴조한다.
농업 사회의 자체적인 한계로 인해 기술투자와 생산성향상을 통한 발전이 지체되고,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의 전국시장을 이루지 못하며 스페인 경제는 변곡점을 친다. 카를과 펠리페가 수행한 전쟁들은 재정부담으로, 높은 세율을 통한 경제적 잠재력의 부식으로 나타났고, 이윽고 사회구조 자체의 한계에 부딪치며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네덜란드는 생산성이 좋지 않은 땅이었다. 노동투여가 필요했던 네덜란드 땅은 시민들의 주도하에 자발적인 간척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런다고 생산성이 특별히 나아지지 않는다. 낮은 토지생산성은 사람들을 도시로 모았고, 청어잡이로부터 조선업, 발트해 무역까지 상업이 융성하며 저지대 땅의 특징을 구축해나간다.
간척사업과 운하의 발달은 지역 중심지를 긴밀하게 연결시켰고, 분권화된 도시들은 이윤으로 뭉치며 경제적인 연결망을 구성한다. 도시화와 상업의 발달은 평균소득을 높여주며 전반적인 교육수준을 도야시켰고, 발트해무역을 장악해가며 저지대의 경제는 지역의 중심적 위치로 나아간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청어 평균 어획량은 2만 라스트(약 1만톤)으로, 1,500척의 어선으로 12,000명의 어부를 고용하는 산업이었다. 어선단과 상선단의 신규 조선 수요는 조선업 역시 발달시켰다. 1625~1700년의 기간동안 매년 400~500척의 선박이 건조되었고, 조선업의 고용수준은 연 1만명에 달했다.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고, 카를 5세의 치세동안 안트베르펜은 경제적 중심이 된다. 그러나 왕조와 긴밀하게 연결된 도시는 왕조의 흥망에 좌우되고,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확장재정은 경기위축으로 이어진다. 1565~1566년의 흉작과 기근, 1570년의 대홍수와 1571, 1572년의 흑사병과 혹한은 이러한 고난을 가중시키며 물가를 천정부지로 올렸다. 그리고 알바공작이 등장한다.
소비세를 갑자기 전 상품에 10%를 물리면서 1540년에 73만 두카트를 거두던 저지대에서 예상세수 1300만 두카트를 뽑으려했던 그의 조세개혁은 당연하게도 엄청난 반발을 초래했고, 1579년 위트레흐트 연합이 결성되며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불이 오른다. 전쟁 초기에는 스페인 특유의 테르시오에게 잦은 패전을 겪었지만, 국공채를 통한 자금의 조달과 나사우 판 마우리츠의 군제개혁은 차츰 전황을 네덜란드에 유리하게 바꿔놓는다.
스페인도 이 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출혈을 겪었지만, 이에 맞선 네덜란드의 재정부담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육군의 비용소모는 1580년 말 연평균 300만 길더에서 1600년 900만 길더로, 1621년에는 한해에만 1400만 길더로 증가한다.
이에 따른 홀란트의 조세부담 역시 증가한다. 당대 대부분 국가의 재정은 관세와 소비세등으로 충당되었는데, 홀란트 역시 재정의 3분의2를 소비세로 충당했다. 인당 소비세 부담은 1584년 3길더에서 1630년 10길더로 증가한다. 여기에 더해 국공채 발행이 독립전쟁의 재원을 충당한다. 1621년으로부터 1647년까지 총 1억 1,500만 길더를 조달하며 이자율은 역으로 4%까지 떨어지게 된다.
네덜란드는 자체 제조업기반과 상업기반으로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떨쳐내고 독립을 이룩한다. 그 핵심에는 국공체 시스템과 이를 통한 군사력 전개, 그리고 양자의 결합을 통한 군상복합체의 형성이 있었다. 정부지원 하에 시장을 개척하고 동인도 회사 등 주식회사를 통해 자금조달과 무역확장의 선순환을 이루며 자본의 생산적 투자를 구축한 것이다. 전쟁을 하면 할수록 재정을 꼬라박는 합스부르크와 전쟁을 통해 재정적 독립과 시장개척을 이루는 네덜란드의 갈등은 패권의 이동으로 상업사회의 부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상업사회의 한계는 무엇인가. 네덜란드가 확장한계에 도달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국시장을 구축하며 중상주의로 네덜란드에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하며 그 한계가 드러난다. 상업사회의 주요 산물은 농업, 광업, 수공업 등 1차산업의 산물이고, 이들의 교환은 지속적으로 수확체감에 도달하며 이윤율이 저하된다. 이처럼 팽창한계에 도달한 상업은 자체적인 재투자로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다. 좁은 국토, 상대적으로 영국에 비해 낮은 인구수, 인구수의 감소추세는 이와 같은 패권의 상실을 상식적으로 드러내준다.
자국 내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들이 해외로 유출되고, 제조업이 쇠퇴하고 세수가 줄어들며 국공채에 대한 이자지불도 어려워진다. 재정-군사의 선순환은 영국의 도전에 직면하며 깨지고 악순환으로 진전된다. 스타트하우저와 연방 각 주, 특히 홀란트와의 갈등이 정치적 분환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게하는 핵심 모순으로 작용하며 안보비용의 증가에 따라 조세부담은 증가하지만 경제적 활력은 떨어지며 네덜란드는 짧은 전성기를 끝내고 그 패권을 영국으로 이양한다.
영국에 대해 얘기하면서 영불연속체의 종식이나 섬나라로써의 지정학적 조건, 노르드의 침공과 윌리엄의 정복으로 형성된 민족적 경험을 짚지 않을 수 없다. 백년전쟁의 끝으로 인한 영불연속체의 단절과 장미전쟁은 대귀족들을 씨몰살시키며 젠트리 계층의 대두로 이어졌고, 한사상속제와 다양한 전문직으로의 분화는 이들의 지평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호송법과 항해법 등 중상주의적 개혁과 모직업의 수직계열화를 통한 국부의 팽창 등 일련의 중상주의적 개혁이 시도되고, 영불연속체의 단절에 따른 국내 투자의 활성화는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토대가 되어준다. 해외 식민지의 개척, 해운의 성장은 서서히 형성되는 전국시장과 맞물려 상업의 발전을 촉발하고, 스페인과, 그리고 내덜란드와 이어지는 전쟁은 전쟁-상업의 선순환에 바탕을 둔 확대 재투자 체제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행은 신용 창출의 중심으로 국공채를 비롯한 다양한 금융상품을 취급하며 자본 순환의 심장이 된다.
영란전쟁에서의 승리, 지속적인 식민지의 확장, 유럽에의 지속적인 개입과 7년전쟁 등은 군사-상업 복합체로써의 영국 체제가 재정적으로, 군사적으로 확장되는 분기점들이 된다. 이 과정 속애서 영국의 국가부채는 1688년 100만 파운드에서 10여년만에 1,500만 파운드로, 1750년에는 7,800만 파운드, 1790년에는 2억 4,400만 파운드로 증가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도 총 자본의 74%는 농업부문의 자본이었고, 상공업은 7%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술과 국내시장의 발달은 자본의 재투자가 다다를 수 있는 시장의 확장한계를 크게 넓혀놓았고, 이는 아메리카에서, 그리고 1757년 플라시 전투를 통해 침투한 인도에서 지속적으로 팽창하며 드러난다. 우리가 로프에 걸린 노동자들을 보며 당대 영국 노동자의 참담한 현실을 비웃지만 놀랍게도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18세기 후반 세계 최고였다.
이와 같은 성장은 수치적으로 1700년부터 1800년까지 한 세기동안 수출이 568%, 재수출이 908% 증가한 것으로 드러난다. 동인도회사의 차 수입은 18세기 초 동인도회사 수입 총액의 1%에서 1760년 40% 이상으로 증가했다. 금액으로는 1721~1740년 880만 파운드(61만 파운드 스털링)에서 1751~1760년 3,700만 파운드(169만 파운드 스털링)로 증가했다.
이와 같은 상업의 팽창은 제조업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특히 캘리코의 열풍과 캘리코 법을 통한 내수시장 보호 의지는 직물업의 발달을 추동하고, 이는 1750년을 기점으로 해외 시장에 수출되는 직물의 원산지에서 영국산의 비중이 증가한 것으로 드러난다.
기술에 대한 생산적 투자와 높은 임금이 추동한 지식의 축적, 특허법등을 통한 기술개발에 대한 인센티브 체제의 발달은 높은 임금으로 인한 석탄 등 에너지원의 공급과 자동화와 맞물려, 산업혁명으로 이어진다. 초기 산업혁명을 견인한 면직물의 경우 1784~1786년부터 1814~1816년까지 수출가치가 20배 상승한다. 석탄 생산 역시 1700년 이미 200~300만톤에 이르렀지만, 1800년레는 무려 1,300만 톤에 달한다.
농업인구의 감소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현격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7세기로 18세기 내내 변동아 없던 농업인구의 비중은 1700년 55퍼센트에서 1820년 40퍼센트로, 1851녕 25퍼센트 이하로 감소했다. 반면 공업과 광업에 종사하는 안구는 1801년 30퍼센트로, 1841년 40퍼센트로 증가한다.
플라시 전투로 시작된 식민지의 확장은 핵심 요충지에 대한 직접지배와 영향권에 대한 자유무역계약을 통한 간접지배로 이원화되며 경성과 연성 패권의 교차가 일어난다. 주요 초크포인트에는 직접적으로 무력을 투사할 수 있고 보급이 가능한 거점을 구축하고,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산업상의 우위를 활용한 자유무역의 강요와 최혜국 대우를 통해 경제적인 종속을 유도한다. 페르시아와 1836년, 1857년 조약을 맺고, 1836년과 1861년에는 튀르크, 1858년에는 일본과 최혜국 조항을 핵심으로 하는 조약을 맺었다. 오늘날 이들 국가가 지역에서 차지하는 역량을 생각하면 영국의 선구안이 놀랍다. 이는 해외 투자의 증가로도 나타난다. 1850년 국부 총량의 6.8%를 차지했던 해외투자는 1870년 14.4%, 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35.2%에 달할 정도가 된다.
그렇다면 1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영국은 왜 2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했나. 1873년의 대불황은 트렌드의 변화를 알리는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1871년의 도매물가를 100으로 할 때 1876~1880년에는 92, 1881~1885년에는 83.5, 1886~1890년에는 70.6, 1891~1895년에는 68.3까지 하락한다. 무엇이 이 거대한 디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나.
미국과 독일의 산업적 약진이 거대한 생산성 투자를 통한 산업에의 약진으로, 원가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공학을 하나의 분과로 끌어올리며 엔지니어링을 정식화하고, 방대한 내부의 전국시장을 기반으로 기업을 대형화하며 동시에 효율화한다. 카네기로부터 록펠러까지 거대 산업자본가가 출현하고, 대기업이 전국의 생산과 유통과 판매를 관장한다. 대량생산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전국단위의 기업활동을 관장하는 대기업이 하나 둘 등장하고, 제조업의 꽃인 자동차 공업이 등장하며 경영의 과학화, 정식화가 구축된다. 산업가들(Industrialist)의 시대가 시작된다.
영국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뒤처진 것은 강력한 식민지 시장의 우위로 인한 소비재 기업들의 우세, 지리환경적 요인으로 인한 최적 기업규모의 차이, 그리고 현장중심적 기술 풍토에 의한 집중적 공학교육, 엔지니어링 문화 도입의 지체등이 지적된다. 여기에 더해서 젠트리들의 현업 경시 풍조, 지대추구에 대한 지향, 자본의 해외 유출 등이 영국 제조업 자체의 역량을 부식시켰다.
중상주의에서 자유무역으로의 전환은 이념적 전환이기도 했지만, 국가 역량의 변화에 따른, 국익에 맞춘 정책전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1차 산업혁명이 2차 산업혁명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영국의 총요소생산성 성장률은 1840년 0.4%에서 1870년 0.75%로 상승했으나 1913년 0.45%로 하강했다. 동기간 영국의 총생산 증가율이 1890~1900년 2.1%, 1900~1907년 1.5%, 1907~1913년 1.6%일 때 미국은 3.5%, 5.2%, 2.8%, 독일은 3.9%, 2.7%, 3.3% 성장한다. 영국의 영토와 인구가 그 성장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미국과 독일은 성장의 한계까지 끊임없이 내달렸던 것이다. 각각 시장중심적/국가주도적 산업최적화의 과정을 통해.
대불황이 반드시 세계 전역의 동반침체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영국이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동안 독일과 미국은 각각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정책과 숙련 구축 체제를 완비하고 기업 규모의 거대화를 통한 효율화를 달성하여 산업 총생산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이룬다. 철도와 전신이 세계를 압축하고, 강철, 화학, 전기, 전자, 자동차 등 신산업이 생성되며 산업이 고도화되고 생산재가 팽창한다.
식민지 시장으로 보호받고, 현엊 중시 풍토 속애서 공학교육을 박은 젊은 인재들이 부족했던 영국은 금융화의 길로 나아가며 국내 제조업 역량의 쇠퇴를 겪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해외로 투자된 자본을 국내로 전환할 경우 1인당 자본투입량 증가를 통햐 국내총생산이 38.8% 높았을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국가 단위의 산업정책 부재가 영국 제조업의 상대적 위축으로 이어졌고, 이어진 세계대전에서 패권국으로써 영국의 위치는 미국으로 이양된다.
초기 식민지경제는 정말 담배팔아 먹고살았구나. 담배가 원시화폐로 활용될 만 하다. 1630년 연간 40만 파운드에 이르른 담배교역은 1700년에는 3천만 파운드, 1760년대에는 1억 파운드에 달한다. 지속적인 인구의 유입과 영토의 확장이 식민지의 성장을 추동했고, 무역량의 증가에 따라 조선업 등 자체 제조업도 발전을 거듭한다. 메사추세츠 조선업의 생산은 1769년으로부터 1771년 150% 성장한다.
영미관계는 표면적인 무역적자는 150만 파운드였지만, 세금은 4만파운드, 식민지 관료들의 봉급(4만파운드)과 군사비(40만 파운드), 기타 서비스수지와 이전수지를 보면 경상수지는 균형에 가까운 경향을 보였다. 미국 식민지마저 지속적인 적자무역의 산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7년전쟁 전비로 1억 2,600만 파운드를 썼는데 세금 안낸다고 뻗대다 독립하다니 레전드다. 물론 헌정적 위기와 안보위협의 해소, 지속적인 인구압의 증가와 프론티어 정책에서의 차이 등 다양한 원인이 있었지만, 과연 독립은 필연적이었을까. 웨스트민스터의 주권에 대한 해석과 식민지에 대한 완고한 입장이 결국 독립으로 이어진다.
독립 이후 미국의 국민소득은 절반 이하로 급전직하한다. 공화국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할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해밀턴의 <연방은행에 관한 보고서>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는 이후 미국의 청사진이 된다. 물론 연방은행 이후 잭슨이 화끈하게 해체함^^...
미영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의 주요 수출이 급전직하한다 수입 역사 1807년 1억 3천만 달러에서 1814년 1,300만 달러로 하락한다. 이는 미국 경제애 큰 타격을 입혔지만, 역설적으로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해 자체 제조업 역량이 발달하게 된다.
북부를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하고 남부의 농업 역시 노예제를 바탕으로 상품작물, 목화를 통해 자체적인 생태계를 구축한다. 농업 생산물을 기초로 한 수출주도형 성장이 시작되고, 내수 수요를 기반으로 제조업이 육성된다. 1790년 12월 미국 최초의 면 방적공장이 지어지고, 1808년 15개의 면직공장은 이휴 1814년 243개로 팽창한다.
1817년 709만달러의 예산으로 착공한 이리 운하의 개통과 그 높은 수익률은 일련의 운하 붐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미국의 자본시장은 인프라 투자에 대한 수요를 충당할만큼의 역량을 보여주었고, 이후 마구잡이로 생겨난 운하는 모두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주들을 하나로 연결하며 국내시장의 통합성을 한단계 도약시켰다.
노예제와 관세를 두고 남부와 북부는 대립한다. 북부는 보호무역에 기반한 고관세를, 남부는 농산품 수출을 위한 저관세를 주장하며, 노예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갈등이 이어진다. 추가로 획득한 영토가 노예주가 될 것인지 자유주가 될 것인지에 대해 분쟁이 이어지고, 누적된 갈등은 결국 링컨의 당선으로 폭발한다.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국시장이 형성되고, 그동안 노예제 문제로 정체를 겪고있던 정치적 현안들이 북부 공화당에 의해 결정되며 미국의 잠재력이 팽창한다.
미국식 제조업의 메타는 과학적 노동관리, 집약적 기술발전, 수직계열화를 통한 비용의 효율화, 수평적 네트워크 확장을 통한 규모의 경제 달성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팽창한다. 국민 총생산 중 제조업의 비중은 1869년으로부터 1899년까지 24%에서 33%로 성장한다. 공산품 중 수입품의 비중은 1869년 14%에서 6%로 감소한다. 제철과 철강 산업에서는 동기간 12%에서 1.25%로 극적인 하락을 보인다.
미국의 철도는 1870년대 8만 킬로미터, 1880년대 14만 9천 킬로미터, 1890년대 26만 킬로미터로 팽창하며, 1900년대에는 총 연장 30만 킬로미터에 달한다. 공장의 확산과 기계 사용의 증가, 경영관리의 과학화와 이를 통한 현장 통제권의 경영으로의 이동, 초창기부터 진행되어 하나의 틀로 자리잡힌 산업 일반의 표준화는 팽창하는 전국시장과 맞물려 거대한 2차 산업혁명, 미국식 대량 생산 체제의 구축으로 나타난다. 하긴 인치파운드에 집착할만 하다. 미국은 미국 단위계로 자체 산업 전체를 표준화해서 대량생산에 접어들었으니.
표준화와 과학화, 수직계열화와 독점자본의 탄생이 반드시 독점적 이익수취로 이루어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제품 전잔의 가격은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하락했고, 독점 대기업간의 경쟁은 시장이 정태적이지 않고 동태적임을, 언제나 다른 기업에 의한 대체는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일련의 경제에 대한 혁신주의는 8시간 노동법과 반독점법등 정부에 의한 견제기능을 강화하며 독점 재벌에 대한 규제로 작용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시장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강력한 쐐기가 되었다.
남북전쟁이 정치적 동맥경화를 해소하며 미국적 대량생산체제의 포문을 여는 사건이었다면, 1차 세계대전은 국가주도적 총력전의 예행연습으로 경제 전반의 효율화와 재정 및 정부구조의 공고화로 이어진다. 총력전 체제에서 정부조직을 통한 민간기업의 동원경험은 이후 계승되어 적극적인 재정, 산업정책의 토대가 되고, 1913~1915년 1.5%에 머무르던 소득세를 1918년 22%로 인상한 것은 전체 경제에서 정부의 비중을 늘렸다. 1917년 전시 재정수입법은 기준이 되는 자본이윤율의 초과이윤에 대해 20-60%까지 차등적으로 과세했다.
석유, 철강, 자동차, 전자, 화학 등 새로운 분야에서 미국의 약진이 시작되고, 생산력은 무한히 팽창한다. 1919년 연산 90만대 규모였던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1929년 연간 2,670만대를 생산하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 앗 1929년이네 조지겠습니다...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저자는 생산의 과잉팽창을 지적한다. 1차대전 전후 유럽의 경제가 충분히 재건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제적인 자본이 미굿으로 몰려들었고, 이는 생산력의 과잉팽창을 유발했으며, 작은 위기가 트리거가 되어 거대한 거품이 사라지고 긴 불황이 도래한다. 요즘은 대공황에 대해 대차대조표 불황이었다는 지적 쪽으로 관심이 가는 편인데, 2차대전 전후의 불사조경제를 보면 특정 시기에는 확장재정 정책으로 인한 수요의 부양이 결과적으로 경제 전반의 지속성장을 위한 트리거이기도 하다. 신용팽창 말고 재정정책... 그러나 본질적으로 양자가 과연 그렇게 다른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음. 어떤 전개경로와 변수추적을 통해 구분이 가능할지.
어쨌든 조졌고, 뉴딜했고, 그래도 영 신통치않았지만 따단 2차대전이 터졌고 마왕 루즈벨트가 소득세를 90%를 비틀어짜내며 총력전 형태로 재건한 산업에 기반하여 무제한 물자공급에 들어간다. 2차대전 이전에도 총생산 대비 정부지출 비중은 12%에서 20%로 증가하고 정부 고용 노동력이 0.3에서 0.8%로 증가했지만, 참전 이후로는 전시생산위원회가 세워지고 1942년 상반기에만 국내 총생산을 넘는 1,000억달러 이상의 군사계약이 체결된다. 전쟁 기간중 해군 선박 6,500척, 항공기 29만 6,400대, 탱크 8만 6,630대, 포탄 4,700만톤이 생산된다.
2차대전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국가주도적 숙련투자와 기술개발이다. 1940년 연방정부의 연구개발 지출은 8,300만 달러 정도였으나 1945년 4억 2,300만 달러로 증가했다. 그 중심에는 과학 연구 개발국이 있었다. 이와 같은 국가주도적 연구개발의 성과물은 이후 기업들에게로 이전되며 미국 경제의 기술적 우위를 지탱하는 밑바탕이 된다.
여차저차해서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전전질서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던 전후 경제의 취약성과 냉전에 따른 안보 구축의 필요는 미국으로 하여금 마셜플랜을 통한 빠른 회복을 결정하게 한다. 자유무역 체제 하에서 자국 산업의 기술우위를 활용하여 시장이 될 국가들의 빠른 경제회복을 지원한 마셜플랜은 이후 미국 제조업의 시장장악으로 나타났다.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업구조는 동맹의 구성원들에게 상호호혜적인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번영으로 이어졌다.
대호황기 제조업 제품의 세계무역은 GATT 체제 아래 1951~1953년부터 1969~1971년까지 349% 성장한다. 그러나 이는 1960년대 이후 베트남전과 독일과 일본의 약진으로 인한 반전으로 그 허실을 내보인다. 기존의 미국적 메타, 대량생산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브레튼우즈 체제로 인한 구조적 문제로 무역적자의 신화로 나타나며 균열을 보인다. 베트남 전쟁과 린든 존슨의 복지정책은 이 상황에서 재정위기를 가속화시키고, 결국은 금태환위기와 닉슨의 금태환 정지, 이후의 신 브레튼우즈 체제로 전환된다.
오늘날 미국경제는 오일쇼크와 위기를 신자유주의로 돌파하며 이후의 IT혁명으로 겨우 그 위치를 유지해왔다. WTO체제 이후 미국으로의 자본유입은 고도의 기술혁신을 불러왔고,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자본시장의 유동성에 힘입어 전세계적 정보 인프라 시장을 선점하며 영향력을 끼치고있다. 그러나 세계화 이후로 미국의 제조업 역량은 기축통화로써의 지위와 국제적 메타에 조응하지 못한 내재적 문제, 후속국가들의 약진으로 기초 단위질량이 깨져버렸고, 세계화로 인한 수평적 제조 네트워크의 확산은 보토 뿌리산업의 역량을 급전직하시키고 있다.
문짝 하나 판금뜨고 도장하고 후가공하는데 국경을 세번 넘어야하는 체제는 효율적인 체제는 아니다. 결국 요는 미국이 구축했던 자본의 확대 재생산 체제에 균열이 간 것이다.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진입하며 확대 제투자 체제가 구축되고, 상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며 확대 재생산 체제가 기술투자와 산업발전에 의한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는 시스템이었다면, 국가주도적 기술개발이 민간으로 이양되고, 구조적 문제들이 제조업을 유출시키며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자국의 제조역량이 쇠퇴한 지금은 그 순환이 깨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미국 패권의 다극 체계로의 이양이라면, 확대 재생산 체계로의 복귀야말로 미국의 지위를 다시 굳힐 수 있는 방법이다. 미국이 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유럽이 깨강정나서 예외적으로 높았던 1950년대를 제외하고 보면 대체로 글로벌 기준 20%선이었다. 오늘날 진행되는 블록화와 정부정책의 전면화는 결국 자국 제조업 단위질량의 복원을 통한 선순환으로의 복귀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반드시 평화롭지 않다는 점이다.
농업사회와 상업사회, 산업사회로의 변화, 그리고 확대 재투자 체계에서 확대 재생산 체계로의 진화가 결국은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핵심이다. 각각의 단계는 저마다의 한계가 있었고, 이를 극복한 국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 패권을 걸머쥐었다. 그 이양과정은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 동시에 문명의 진보이고, 엄청난 착취를 수반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최종적으로는' 보편적인 삶의 질 향상의 과정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어떤 사회이며, 지금의 방향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우리가 직면한 한계들을,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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