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물질세계와 교환의 체계를 지나 세계의 시간으로 접어든다. 세계경제와 세계-경제를 정의하고, 세계-경제의 극점들과 그 이동으로부터 장기 지속의 콩종크튀르들을 짚어나간다. 오랜 축적이었고 탄탄한 전개였다. 슘페터를 좀 깊이있게 읽어야겠다.
세계-경제는 그 극점인 초-도시를 통해 단적으로 순환을 표현한다. 도시 자체가 근대 자본주의의 담지자로 낙후한 주변을 지배하며 세계-경제의 중심에서 순환의 최종심급으로 이익을 수취한다. 이는 물질세계의 변동과 그에 따른 시장경제의 중심이동 속에서 하나의 순환이 마무리될 때 마다 다음 중심지로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이 이동은 중심지가 그동안 누리던 지배영역의 쇠퇴로, 신용의 이동으로 물질세계에 반영된다. 다양한 층위에서 중심지와 주변부간의 관계는 신앙의 변화로부터 건축양식의 확산, 이동거리의 등시간선과 역사에 따른 변화양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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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환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안보상의 지속적인 갈등상황 속에서 경제적인 낙차는 필연적으로 자국의 안보에 대한 실패로 이어지고, 중심의 이동은 패권의 쇠퇴와 기패권국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의 상실로 재차 발현된다.
그렇다면 이 변화는 어디까지 동시적인가. 유럽 내의 빈곤층과 식민지의 노예의 삶에 대한 비교는 그 단면을 드러낸다. 변화는 본질적으로 불균형적이고, 세계-경제의 강역 내에서도 경제적, 사회적 계서제에 의한 낙차는 고립되고 낙후한 지역의 지체를 보여준다. 중심국가 내의 주변부에서도, 바다 건너 식민지의 이중 구조 아래에서도 착취는 저마다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경제적 구심과 문화적 구심의 이심 역시 하나의 경향을 보여준다. 프랑스사람 영국 놀릴 때 진심모드 나온다. 왜 이렇게 런던에 프랑스 하인이 많냐는 지적으로부터 영국인들이 프랑스 풍을 너무 좋아해서가 아니냐는 반박까지 거를 부분이 없다. 경제적 구심의 이동과 문화적 중심의 천이, 베네치아로부터 암스테르담으로, 그리고 이탈리아로부터 프랑스로의 변화는 경제 우위의 장기지속이 모든 층위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국이 경제를 지배한다면 프랑스는 지적 문화와 유행을 지배한다니 뭐 쌤쌤이라고 칠 수 있겠네.
콩종크튀르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물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범위의 변화율에 대해서 논의의 틀을 좁히는 것은 개념 자체의 적확한 적용을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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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적인 사이클로부터 장기적인 사이클로 각각의 경기변동 사이클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쥐글라르 사이클, 라브루스 사이클, 쿠즈네츠 사이클과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의 주기와 이에 따른 등락을 자료로 짚고 넘어가며 장기지속되는 경향에 대해 정의한다.
장기추세의 전환이야말로 중심 이동의 수치적 현현이다. 장기 추세 속에서 콩종크튀르의 전환이 일어나고, 각각의 전환이 야기한 일련의 정치적 파동은 시장경제로부터 물질세계로, 중심으로부터 주변부로 동시적으로 파급된다. 콘트라티예프 사이클의 전환점과 장기추세의 변곡점이 겹치는 부분들에서 역사의 리듬이 맥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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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세계-경제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축되었는가. 태초에 도시가 있었다. 유럽의 강역이 북으로 동으로 확장되고, 그 과정에 폭발적인 도시화가 일어나며 교환경제의 기틀이 잡힌다.
왜 바나나는 굽어있는가. 세계 -경제의 구별되는 권역들이 각각의 결절점에서 응집되기 때문이다. 남쪽의 지중해로부터 북해와 발트해, 이후로는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바다야말로 교역권을 묶어내는 원거리교역의 산실이고 물류 이동의 핵심 축이다.
서로 다른 물산이 생산되는 두 바다가 육로로, 해양으로 만나는 점들을 따라 결절이 형성되고 최초의 초-도시가 응집된다.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어 동맹을 형성하고 동맹의 물산이 중심도시로, 그리고 중심도시들의 중심도시로 빨려올라가고 다시 내뱉어지며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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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생님의 못말리는 샹파뉴 사랑... 선생님 아무리봐도 그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베네치아의 우위를 확정한 사건들 이후로 지중해와 북해를 잇는 물류의 중심으로 샹파뉴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니 이때 지브롤터가 안뚫려있었지... 지리적 변동과 그에 따른 교환세계의 확장과 수축이 경제적 구심을 응결하는 동학이다. 샹파뉴의 우위는 이후 지브롤터의 개통으로 인한 지중해와 북해의 연결, 동쪽으로의 육로수송의 이동, 프랑스 영토로의 편입과 콩종크튀르의 전환등을 맞이하여 다음 중심지로 그 패권을 이관시키게 된다. 쇠퇴는 했지만 프랑스가 되었으니 조아쓰!
그리고 베네치아가 중심지로 부상한다. 석호에서 시작한 베네치아는 근교의 수상도시들과 경쟁하며 십자군 전쟁을 통해 결정적 흥기의 기초를 잡는다.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며 지중해무역의 패권을 두고 제노바와 경쟁하고, 경쟁의 와중에도 불어나는 파이를 소화하며 최종적으로 승자의 지위에 오르고 막대한 부가 베네치아에 축적된다. 콩종크튀르의 변화에 따른 전반적인 국가예산의 축소라는 흐름에서도 중심지로써 베네치아가 갖고있던 위상은 경기침체의 여파를 분산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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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기추세가 전화된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 넘어가고 레반트무역의 질서가 뒤바뀐다. 베네치아는 패권의 유지를 위해 분투하지만 이는 피로스의 승리로 이어지고, 강요된 국가적 구조조정과 계획경제는 패권의 상실과 중심지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바야흐로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베네치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소수의 통치가문과 지속적으로 등장한 신흥세력들이 있었고, 일상을 채운 아르테의 길드원들과 그 외의 임노동자들이 도시를 구성했다. 가구 단위로 대표되는 임노동자들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이 도시를 지탱했다. 중심 도시의 부는 불공평하게 분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까지 흘러들었고, 길드인 아르테를 중심으로 한 이들 임노동자의 우월한 고용조건은 이후 콩종크튀르의 변화 속에서 위기를 맞이한다. 결국 고용유연화와 노동조건의 후퇴가 있고나서야 산업도시로써의 베네치아는 다시 자생적 경제 생태계를 재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타석에 다음 타자 안트베르펜이 등장한다. 왜 항로는 포르투갈이 개척하고 리스본이 꼴아박았는데 과실은 안트베르펜이 따먹었는가. 합스부르크에 그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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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봉 루트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저력은 어디에서 왔는가. 엔리케가 개척하라 뿅 한다고 루트가 개척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과의 접변으로부터 선진 상업기반이 발달하고, 충분한 단위질량을 기반으로 농업을 선진화시키며 하나의 거대도시로 주변지역과 물산, 식량을 교환하며 교환경제가 발달한다. 해안가를 통한 항해기술의 축적 역시 희망봉 루트 개척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체 유럽 경제의 순환이고, 그 과정에서 입지의 적합성이었다. 런던과 홀란트가 산업과 시장경제의 중심으로 발달할 수 있었던 건 북해와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한자동맹의 흥기, 이로 인한 경제적 중심의 재조정,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전쟁-물류-신용 중심으로써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래서 안트베르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때문에 안트베르펜은 경기의 하강과 합스부르크 정치의 전선이동에 따라 다음 도시 제노바에게 패권을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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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국가의 응집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배경이 되는 지역의 낮은 부양력이 도시로 모인 사람들을 개척에 뛰어들게 한다. 타 지역에 대한 식민지 건설로, 상업이윤에 의한 도시의 부양으로 도시는 구획된다.
베네치아나 제노바 역시 지속적으로 식량을 수입해야했고, 도시 자체의 부양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업이윤의 극대화가 지속가능한 성장의 필수요소였으며, 신산업의 개척과 풍흉에 영향받지 않는 산업사이클의 구축을 통해 도시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담보해나간다.
도시는 근본적으로 교외에 대한 지배 위에 성립되며, 교외가 부양가능한 인구를 넘어서며 교역망에서의 이윤이 도시의 운영에서 핵심적인 분율을 넘기는 순간 상업도시로써의 면모, 사업의 개척과 식민지의 확장을 통한 도시국가로의 전화가 일어난다. 흑해의 식민지 개척, 베네치아와 지중해 무역을 둘러싼 분쟁, 시칠리아의 종속과 북아프리카의 개발, 사금무역의 개척 등 제노바의 우위를 만든 조건들이 하나하나 맞아떨어진다.
베네치아에서 안트베르펜, 제노바로의 이양은 유럽의 세계-경제에서 각 해양 권역이 차지하는 비중의 이동과 왕조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었다.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홀란트와 네덜란드를 통한 영향력의 투사, 북해에서의 후퇴와 반도에서 제노바-베네치아 세력균형의 이동이 제노바를 다음 세대의 초-도시로 내정한다. 피아젠차 정기시의 흥망성쇠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그리고 제노바 역시 흥망성쇠의 갈림길로 접어든다. 유럽의 세계-경제의 중심이동, 북구로의 쏠림은 상업의 균형을 뒤흔들었고, 합스부르크의 재정난은 이 분기에 쐐기를 박았다. 금융위기가 닥쳐오고 제노바 경제는 이에 맞춰 재편되지만 이미 흐름은 다음 타자, 암스테르담에게로 이동한다.
암스테르담의 부양능력 역시 특기할만하다. 묘사만 보면 똥땅중의 똥땅이 따로없음. 25%의 식량자급률과 낮은 인구는 이 땅에 모여든 사람들을 바다로 내몰았다. 암스테르담, 홀란트의 우위 역시 그 기반 아래 건설된다. 상업도시로써 지속적으로 임금노동자를 끌어들이며 모여든 인구에 대해 부양력을 유지하고, 북해의 어업을 통해 시초축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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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연안국가의 경제적 발전이 이어지고, 내부 시장경제가 팽창하며 네덜란드 역시 배후지역의 부를 연결하는 상업도시로 발돋움한다. 북구와 남부 사이의 교역의 중심으로 교환경제 속에서 잉여가치를 축적하며 꾸준히 임노동자를 끌어들이고, 이는 인구의 증가로 나타난다. 암스테르담의 인구증가세가 바로 그 국력의 증명이다.
밥도 안주고 부려먹는다는 말을 유지비가 싸다는 말로 고상하게 포장한다. 발트해의 재원은 선박의 건조비를 낮출 수 있는 유인을 제공했고, 북구적 양식과 남부적 양식의 융합, 생산성의 향상은 건조와 유지보수에 드는 시간을 현격히 줄였다. 선박의 대량 생산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밑바탕이 되어 도시로의 집중을 강화한다.
과연 국가로써의 네덜란드는 어떤나라였나. 홀란트와 나머지 지방간의 긴장이 오라몌가와 도시의 지배계급간의 갈등으로 드러난다. 연방제와 주의 권리간의 충돌은 그 매개가 되는 논제였다. 지속적인 안보위협과 이에 대한 응집된 대응, 그리고 그 표상으로써의 오라녜가와 상업가문들의 갈등은 결국 국가의 돈줄을 누가 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타협의 역사이기도 하다.
문명의 교차점인 변경에서 새로운 문명이 응집된다는 터친의 이론은 네덜란드에도 적용된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네덜란드의 안보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양자간의 외줄타기로 나타난다. 부양력이 낮고 요새화도가 높은 안보적 특성은 긴 보급선과 결합하여 네덜란드의 독자적 행보를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를 구성한다. 파르네세가 있어도 질 전쟁은 지는 것이다. 문제는 군대의 응집성이나 안보적 요소만이 아니라 보급, 결과적으로는 자금동원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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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의 경제에서 네덜란드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펠리페 2세로부터 시작된 장구한 여정은 제노바로부터 암스테르담까지, 자기 제국 스스로에 대한 자해로 나타났다. 모리스코의 축출로부터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이후로도 계속된 지중해에서의 전투와 영국에 대한 침공, 네덜란드에 대한 공격은 제국의 역량에 대한 자기포식으로, 제국의 기능부전으로 귀결되었다. 말하자면 의지의 패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세계-경제와 세계경제의 융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쇠퇴하는 포르투갈의 자리에 네덜란드가 개입하기 시작하며 산발적인 탐사에서 회사의 설립으로, 동인도회사를 통한 적극적인 시장 개척과 플랜테이션 수립, 식민지배로 이어지며 최초의 주식시장이 구성되고 근대 자본주의의 정식화가 시작된다. 네덜란드의 포르투갈 상업체제로의 침투와 대체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으나, 장기적인 시점에서 연속적으로 확고하게 일어났다.
그렇다면 회사의 이윤율은 어떠했나. 액면가 기준으로는 20%, 40%의 배당이 발생했지만, 시가 기준으로 이는 3-4%에 그쳤다. 심지어 이들 배당을 지급하기 위해 회사채를 발행하고 정부의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동인도회사의 재정상황은 기간내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자본투여가 이루어지며 식민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요는, 도둑들이 많았다. 오늘날에도 컴플라이언스 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당대 회사에서 현지에서 일어나는 횡령과 배임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회계장부의 복식부기에도 불구하고 장부조작과 현지에서의 일탈은 흔한 일이었고, 이에 대해 유럽 사이드에서의 대주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이를 조장하고 방조하면서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익을 수취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지배가문들이야말로 이 사업에서 가장 이익을 사유화한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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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영이란 일정한 기술들의 집합을 필요로 한다. 원거리의 사업장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 통신으로부터 경영관리기법, 회계기법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일관된 회사의 운영이란 기능하지 않은 일이다. 현장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물품의 하역지에서는 대주주들이 저마다의 이익에 따라 딴주머니를 챙기고, 그 손실은 사회 전체에 전가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금융현황을 보면 남는 장사였다.
그 인프라가 되는 상업활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대량의 창고를 통한 물류의 집적과 회전, 거기에서 기인한 위탁매매와 인수거래가 신용의 회전과 팽창을 가속한다. 위탁매매 이거 사실상 통신판매 아니냐...
전반적인 이윤율 저하와 잉여자본의 축적은 수익률을 쫓는 자본의 해외유출로 이어진다. 돈이 너무 많으면 투자할 곳을 찾는 것도 일이라... 자본의 지대추구적 성향이 강해지고 내부 산업에 대한 투자보다는 해외로의 유출이 점증하며 도시는 가을을 맞는다.
316, 325, 331, 339p
암스테르담의 지배는 어떤 방식으로 주변부에 관철되었는가, 북해에서 그것은 물류에 대한 장악이었다. 스웨덴의 광대한 영토와 낮은 인구밀도는 네덜란드의 우월한 해운이 한자동맹을 이어 발트해를 지배하게 했고, 스웨덴의 통치세력은 이 인프라에 올라타 북해 연안에 대한 통치를 관철한다.
암스테르담의 돈으로 전쟁을 벌이고 통치를 구축하고 그 이윤은 통치계급과 암스테르담의 대상인들이 나눠갖는다. 이는 그단스크에서, 리가에서 반복된다. 배후지역을 수취하는 지역의 상업중심으로써 그단스크와 리가는 암스테르담의 하위 파트너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프랑스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프랑스의 북해무역은 많은 경우 네덜란드를 거쳐서 이루어졌고, 이로부터의 독립은 오랜 세월이 흐르고서야 가능했다. 영국만이 유일하게 이 지배로부터 저항하며 네덜란드로부터 패권을 쟁탈한다. 여러번의 영란전쟁은 네덜란드에 심대한 피해를 누적시켰고, 대서양 시장의 발달은 세계 경제의 무게중심을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이동시킨다.
네덜란드의 쇠퇴는 필연이었는가. 문제는 상업활동으로 축적된 네덜란드의 잉여자본의 규모에도 기인한다. 제노바에서, 네덜란드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잉여자본은 과도한 금융화의 단초가 된다. 더이상 단위지역 내에서 추가적인 생산적 투자가 불가능하고 잉여자본이 축적될 때 잉여자본은 출구를 찾아 해메게되고, 자본의 유출이 시작되며 산업의 낙후도 뒤를 따른다. 가을의 끝은 안보위기로, 내전으로 그 조종을 울린다.
345, 357, 362, 367p
일련의 경제위기가 주기를 갖고 암스테르담을 타격하고, 해당 위기들은 누적되어 암스테르담의 패권을 약화시킨다. 영국, 그중에서도 런던이 성장하며 시대는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바타비아 혁명이 일어나고, 네덜란드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는 내전을 국제적인 갈등으로 비화시키며 기어코 영토국가로써의 독자성을 위협받게 한다.
네덜란드의 패권 상실을 기점으로 시대의 주역은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넘어간다. 마을이 모여 읍이 되고, 지방이 되며, 주를 이루고 주들이 모여 국가가, 그리고 세계-경제가 된다. 영토국가의 핵심 주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의 강화가 일어나며 교통망이 구성되고 전국시장이 형성되어간다.
전자본주의 사회, 15세기로 18세기동안 네덜란드로부터 라인강을 따라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축선은 유럽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이 경로를 따라 상품과 신용이 유통되고 초-도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경제적 패권을 계승한다. 이 패권이 도시국가로부터 영토국가로 넘어가는 분기점으로 전국시장의 형성과 중앙집권체제의 완비, 그리고 근대국가의 출현이 있다.
375, 381, 395, 400p
영토국가와 도시국가의 차이는 왜 발생하며, 도시국가의 우세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결국은 통치를 행사해야하는 지배면적의 차이이고, 해당 영토를 통할할 수 있는 국가기구를 구축하기까지 누적되어야하는 기술과 인력의 질적 도야까지 필요한 기간의 차이이다. 도시국가는 빠르게 체제를 완비하고 비상할 수 있었지만, 그 부박한 외연은 1차 산업이라는 거대한 부양력을 도외시한채 2차와 3차 산업에 치중되어있다. 산업국가의 시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선천적인 체급의 문제가 있다. 영토국가는 그 영토를 통할할 체계를 갖출 때까지 지난한 과정들이 걸렸지만, 핵심 주를 중심으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국시장을 통치의 궤도 안에 넣게 되고나면, 국가의 총력을 다해 성장과 발전으로 경주할 수 있다. 결국은 통치의 범위와 성장의 잠재력, 그리고 거기까지 축적해야하는 임계질량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국시장의 규모는 무엇으로 추산하는가. 임노동자 임금을 기준으로 인당 총소득을 계산하고, 이를 통해 국민 총생산을 추산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임금에 180-260정도의 계수를 부여하여 연간 총소득을 추산한다. 이때 계수는 노동일에 해당한다.
도시국가와 영토국가의 차이는 총생산 대비 국가예산에서 두드러진다. 추산한 총생산과 국가예산의 비는 영토국가에서 5%, 도시국가에서는 평균 10%에 이른다. 만년의 도시국가에서 이 비율은 16-20%까지 올라간다. 앙시앵 레짐 세제 자체의 구조적 문제, 소비세 기반의 역진적 특성을 감안해도, 역설적으로 높은 세제는 도시국가의 통치력이 영토국가의 그것에 비해 꽉 짜인 체제였음을 반증한다. 만년의 높은 세율 역시 총생산 증가량 자체의 쇠퇴를 증거한다.
410, 420, 431p

파리를 중심으로 도로망이 정부 주도하에 개선되며 프랑스 전역의 교통이 개선되고 전국시장이 태세를 갖춘다. 지역들은 파리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뉘며 대서양 교역이 흥행하던 시기에는 서부가 우선적으로 발전하고, 이후 혁명기에는 다시 남북으로 나뉘며 북부의 산업이 전반적인 성장을 견인한다. 이후에는 다시 동서로 나뉘며 이번에는 독일 경제의 부상에 따라 동부의 경제가 우위를 갖는다.
이처럼 접변의 경제권이 어느쪽으로 가울어지느냐에 따라 프랑스의 경제는 파리를 축선으로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각각의 지역에 흥기를 가져오게 된다. 접변하고있는 경제권들이 흥망성쇠를 겪으며 개개 지역 역시 전국시장 내에서 우위가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내의 주도권이동이 세계-경제의 하나의 지표 역할을 한다. 전국시장의 형성과 세계-경제와 전국시장의 조응을 잘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좋은 사례 선정인 듯.
이 책을 보면서 새삼 느끼지만 잘 짜여진 도식과 도표가 주는 물질감이 있다. 인간세상의 다양한 삶들은 수치로 환원되어 전체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고, 그 장구한 추세 속에서 개개의 삶이 비교되며 각각의 삶을 다채롭게 채색한다.
442, 443, 472, 473p
이야기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영국을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섬나라라는 점이다. 영-불 연속체가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대륙과 브리튼섬의 단절이 성립되면서부터 근대를 향한 영국의 여정은 시작된다. 영국의 고립은 국내 영토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증가하는 대서양무역과 발트해의 상권은 영국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였다. 상시적으로 외적의 침입이라는 공포에 노출되어있는 나라라는 점이 바로 영국의 국체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BOE의 설립, 네덜란드와의 패권 다툼, 국채의 개발등은 영국의 성장이 지속되는 동력이 되어준다. 런던을 중심으로 교역망이 조밀해지고, 수로와 교통의 발달로 음영지역이 사라지며 영국의 전국시장은 빠르게 성립된다.
496, 509, 512, 513p

영국의 막대한 국채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영국 경제 자체에 매재한 심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영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윌리엄이 도입한 공채는 네덜란드 놈들의 사악한 수작이라든 대중적 인식 하에 반발을 맞이했다.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전략적 우위의 물질적 배경이 되어준 것은 국채를 통한 예산확충이었고, 그 신용은 영국 경제의 지속적인 높은 성장률과 그로 인한 정부의 확고한 재정정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영국의 세계 패권은 언제 확립되었는가, 영란전쟁의 승전과 동인도회사의 동남아시아 무역에 대한 침투, 플라시 전투(1757)를 통한 인도에서의 기반 확립, 아메리카 시장 전체에 대한 해운의 장악은 그 초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고, 1786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대한 장악력에서의 압도적인 우위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당대 다른 세계들은 어떻게 세계경제에 통합되었을까. 아메리카로부터 하나하나 확인해간다. 아메리카의 특징은 풍부한 자원과 낮은 인구밀도였다. 스페인의 남미 정복과 유럽-아메리카의 접변은 막대한 인구의 감소와 남미에서는 남은 인구에 대한 봉건제의 구축, 북미에서는 개척민의 투입을 통한 대농장의 건설로 나타난다.
521, 529, 535, 548p
낮은 인구밀도는 노예의 유입을 통한 플랜테의션과 엔코미엔다의 활성, 북미에서는 개척민의 유입과 지속적인 개척, 개척토지에 대한 매입을 통한 대농장의 건설로 나타났다. 19세기까지도 아메리카에서는 농업이 우세했으며, 중남미의 광업과 그 생산량은 교환경제를 통해 유럽으로 귀금속이 빨려들어가며 종속적 체제의 단면을 드러낸다.
어마어마한 양의 이주민이 매년 유럽으로부터 북미로 유입되고, 이들은 계약하인으로 정해진 기간동안의 봉사를 마친 후 변방으로 개척에 나선다. 유럽의 빈민들이 미국의 하층민이 되어 노동을 하고 독자적인 농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북미로 올 수 밖에 없었던 물적 조건이 북미의 지속적인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원주민의 후퇴에 기반한.
북미와 영국이 구성한 대서양의 세계-경제는 식민모국에 유리한 형태로 자유무역 환경 아래에서도 영국으로 화폐의 이동을 촉진하는 형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식민지에 대해 보호무역 조치들을 취하고, 식민지는 삼각무역을 통해서만 이 적자를 벌충할 수 있었다. 신용의 창출 면에서 영국에 완전히 종속된 식민지는 캐나다에서의 승리를 통해 안보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이는 이후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식민지는 스페인이 운영하고 돈은 서유럽이 번다. 개척 초기부터 스페인은 식민지에 필요한 물산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댈 수 없었고, 이는 시대가 지나며 더욱 심화된다. 식민지로부터의 물동량은 이 교역에서 진정한 승자가 누구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치는 스페인이 하고 비용도 스페인이 내지만 꿀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다 빨아간다. 남미의 종속성은 이처럼 정치와 경제에서 스페인과 기타 서유럽 국가들의 이중 착취구조하에 놓여있는 것이다.
566, 571, 578, 583p

아프리카를 화이트/블랙 아프리카로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분류하며 아프리카에서의 식민통치의 실상을 추적한다.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이슬람의 영향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사하라 루트와 동부 아프리카는 노예의 주요 집결지이자 이동경로로, 많은 노예들이 이 루트를 타고 팔려나가며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동주 아프리카의 자원이 고갈되고 대서양 연안의 서부 아프리카가 발달하며 대륙 전체로 봤을 때 균형의 이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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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동아프리카는 전통적으로 이슬람 노예무역의 중심지였고, 서아프리카 역시 사하라를 통한 노예유통이 교환경제의 한 축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정치체들은 지역에 대한 자해적인 노예무역을 통해 교역에서의 주도권을 차지하고, 지역의 수요에 따라 가격결정력을 갖는다. 종속관계는 다분히 상호적이기도 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러시아라는 또 하나의 세계-경제 역시 유럽과의 관계를 통해 세계경제의 주변부로 기능한다. 러시아와 동유럽을 가르는 것은 강한 국가의 존재이다. 러시아의 군주와 관료제는 경제와 정치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전제적인 통치를 구축한다.
그리고 거대한 변경으로써의 시베리아가 있다.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진출, 그리고 핵심 산출물인 부드러운 금, 모피의 교역은 러시아가 이른 시기에 느슨하고 방대하지만 인성이 있는 전국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러시아의 전제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유럽화, 산업화를 추구하고 1차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적어도 18세기까지는 지속적인 상품수지의 흑자와 성장을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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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스만 튀르크가 있다. 발칸으로부터 아랍에 걸친 제국의 영토는 개발도가 높은 발칸으로부터 이스탄불, 아나톨리아로 갈수록 개발도가 낮았다. 튀르키예에서 정치적 부침과 경제적 성장을 다른 궤로 나타난다. 술탄의 정치적 권력은 1550년 이후 내리막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절대권력의 부재와 무관하게 경제는 지속적으로 활성화되며 성장한다. 바자경제라는 지역단위의 교환체계와 이를 묶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전국시장의 형성은 신용에 이르지 못한 단계에서 그러나 강고하게 전국시장을 형성한다.
술탄체제의 오스만 투르크에서 술탄의 권위상실과 재정적 여력 악화는 당연하게도 정치적 기능부전으로 이어졌고, 실질적 아나키상태가 오랜기간 오스만튀르크를 지배한다. 성장의 역전과 종속의 심화,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침체가 가시화되자 내적으로 문제에 대한 대응책들이 나오지만, 한번 무너진 권위를 수습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세기 초에 일어난 발칸의 상실은 그 쇠락의 정점이었고, 이후 지속적인 영토의 상실, 경제의 낙후라는 악순환으로 접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제국이 완전히 붕괴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시아는 그 자체로 광대하고 폭넓은 땅이다. 이를 세계-경제로 나눠보자면 이슬람권-인도권-그리고 동아시아권이 각각의 중력을 갖는 하나의 구성체가 된다. 그리고 이 삼자간 교역의 중심은 저마다의 질량변화에 따라 동으로 서로 이동한다. 15-18세기에 이르러 이들 경제 간 교환의 구심은 말레이반도가 되었고, 화교로부터 인도인, 무슬림 상인들까지 아시아 각국의 상인들이 서구의 회사들과 거대한 교환경제를 이루며 서로 교차한다.
인도의 마을로부터 마을들을 관리하는 자지르, 무굴 술탄에 이어지는 정치체계와 이를 뒷밭침해주는 시장경제, 화폐를 통한 자원의 수취와 순환체계를 조망한다. 인도의 조세비율이 생산물의 절반에 이르렀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농가의 생산성이 충분했고, 상대적으로 소비가 덜 일어나기도 했다는 뜻이다. 17세기 인도의 생산성은 지력이 좋은 토지에 대한 집중적 투여로 인해 인당 생산성에서 오히려 19세기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인다.
660, 678, 681, 698p
인도 경제는 중국 경제에 비해 원거리교역에도 일찍 동참했고, 이슬람권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아시아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작지 않았다. 믈라카에 대한 이른 진출이 그 예이다. 신용 역시 마찬가지로, 다양한 신용의 수단이 발달했었고, 무굴제국에서도 이들 상인집단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렇다면 왜 인도의 자본주의는 이후로 나아가지 못했는가.
인력의 문제, 즉 단위 인구밀도의 포화가 하나의 예로 제시된다. 생산량은 많았으나 단위 생산성의 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철에 있어서도 인도산 강철의 품위는 충분히 높았으나, 그 품위와 생산량은 무차별적인 노동투입의 결과였다. 카스트를 예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카스트 자체는 상당히 유동적인 하나의 사회구조였다. 실제 작동례를 보면 산업 수요의 변화에 따라 임노동자층이 하나의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유연하게 전환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종종 문제로 지적되는 경직된 카스트체제는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인 것이다.
무굴제국은 왜 붕괴했는가. 무굴제국의 붕괴사례는 다른 아시아적 전제주의의 붕괴와 궤를 같이하는 면이 있다. 지역의 통치를 전담하는 지배계층이자 행정관료로써의 통치계급이 오랜 왕조의 지속으로 인해 기강을 잃고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전락하며 국가는 기능부전에 빠진다. 부패와 착복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왕국 전체의 부의 순환을 막는 동맥경화를 낳고, 국지적으로 고착된 자본은 물질세계의 계절적 변동과 이로 인한 기근에 따라 빈부격차와 삶의 조건을 악화시킨다.
잉여엘리트가 증가하고 제국의 지배체제가 흔들리는 순간에도 오히려 국지적으로 축적된 자본은 전체적으로는 성장의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제국의 지배체제는 착실히 잠식되어간다. 결국 균열이 무력갈등으로 비화하고 민란과 이에 따른 통치체제의 와해가 가속화된다. 외부의 개입이 없었다면 이 시점에서 새로운 통치체제가 들어섰겠지만 시대는 19세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시아적 사회에 대한 전형으로 인도의 예를 선택한 것은 적절한 차용으로 보인다.
704, 708, 718, 726p
왜 말라카인가, 지리적 위치 외에도, 범선의 시대에 말라카가 갖는 이점이 있다. 몬순과 무역풍을 따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나가다보면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병목이 바로 그곳인 것이다.
유럼의 우세가 언제부터 확정되었나. 국제 GDP비교를 통해 전체의 비를 확인해나간다. 선진지역, 서유럽, 소련, 북미, 일본의 GDP는 1700년대만 하더라도 350 대 1200으로, 압도적 비중을 점하지 못했다. 인당 GDP로도 중국과 인도의 그것이 유럽에 비해 현격히 차이나지 않는다. 그러나 1860년대 이 비는 1760억 대 1690억으로, 1900년대에는 2900억 대 1800억이 된다. 1970년대에는 3조 달러 대 1조달러로 격차가 벌어진다. 산업혁명이야말로 오늘날 근대의 불평등을 구축한 핵심 요소였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났나. 농업생산성의 발달과 사회구조의 변화, 경제적 축적을 중심으로 영국의 사례를 통해 그 여정을 추적한다. 기술결정론은 오늘날 수많은 반박에 직면해있다. 그리스의 사례로부터 13세기 동력혁명, 밀라노와 이탈리아의 16세기 기술발전은 기술의 축적과 다원적 발달이 반드시 폭발적 산업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제는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을 장기적인 성장의 궤도로 올려줄 수 있는 경제적 토대, 인구 부양능력, 농업생산성과 상부구조, 자본주의의 발달에 있다. 17세기 영국 농촌의 발달은 단위 경작면적의 증가와 선대제를 통한 농촌의 임금노동자 계층의 확산, 이들의 숙련축적을 통한 거대한 예비 노동자계급의 형성으로 그 다음의 변화를 예비한다.
물질세계에서 농업생산성의 발달에 기초하여 교환경제가 활성화되고, 전국시장이 교통과 상업의 발달을 통해 구축되며, 상업자본주의가 원거리교역과 신용의 창출, 화폐경제의 발달을 통해 이윤을 축적하고 지속적으로 투여할 자본을 찾는 과정에서 자본투여를 통해 시장을 확장하고 지속적으로 자본이 생산적으로 환류될 수 있는 선순환을 만들며 이런 선순환이 다음의 선순환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진 과정이 바로 산업혁명이었다. 농업의 발전이, 상업의 발달이, 그리고 바로 첫 물꼬가 되었던 면직물 산업의 무한한 확장이 그 시작을 열었고, 이후 철도로 제철로 연결되며 제 산업이 발전하고 이는 다른 산업의 창출과 재투자로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한다.
731, 745, 763, 780p
기술사에서 시대를 앞선 발전이 반드시 산업의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산업의 도약은 기술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충분히 숙련된 광범위한 임노동자의 형성, 도시화율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 결정적으로 자본의 축적이 산업발전의 터전이 된다.
왜 면직물이었을까. 고래로부터 직물이야말로 원거리교역의 주요 상품이었다. 필수재이면서 가벼워서 다량의 적재가 가능했고 화폐로 사용될 정도로 단가가 높았으며 소비재이기때문에 지속적인 수요가 세계 보편덕으로 존재했다. 면직산업에서 방적과 직조의 기계화와 분업은 방대한 생산량과 원가절감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의 포문을 연다.
교통의 발달, 세계시장의 구축, 자본주의적 침투는 결국 지배국가의 시민들에게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원인이 된다. 계절적 변동에 따른 풍흉과 기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국제적 유통망이 싼 가격에 식량을 공급해줄 수 있게 된 이후부터 가능했다. 선진국의 인류가 기근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다. 1800년에 영국에서 원거리교역의 수송비가 밀 1캥탈(100kg)에 12프랑일 때 브르타뉴에서 로렌까지 1캥탈의 수송비가 40-50프랑이라는 것은 역량의 격차가 민생으로 드러남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장기지속적인 복합진화 과정이다. 성장의 길은 균형적인가 불균형적인가, 양쪽 모두 국면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오늘날의 산업혁명과 전지구적인 근대화는 결국 19세기로부터 나타난 하나의 장기추세이기도 하다.
787, 795, 811, 815p
사회적으로 분업이 조직되고, 선대제에서 산업기술의 발전에 따라 단위조직이 집약적으로 변화하며 노동의 구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화되기 시작한다. 성인 1명에 아동 9명이 기계 한대를 운용했다는 뜻이다. 노동이 분업화되면서 자본의 조직도 새로운 직종의 창달로 이어진다. 산업가(industrialist, entrepreneur)의 등장이다. 그것은 기업의 경영, 그리고 산업의 조직 그 자체가 전문화된결과로, 기존의 통합적인 상인과는 다른 새로운 전문직의 출현이었다.
상업으로부터 산업으로의 이행, 그리고 금융으로의 진화는 결코 단선적인 이행이 아니다. 상업과 산업, 금융은 언제나 공존해왔다. 다만 콩종크튀르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이윤율이 변화하고, 그에 따라 자본의 이동으로 인해 서로간의 비중이 변화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에 있어서 영국이 치러야했던 대가는 무엇이었나. 광범위한 실질임금의 하락이다. 기술혁신과 창조적 파괴가 낳은 마찰실업이 거대한 불안정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이들은 산업혁명의 재료가 되어 실질적인 생활수준의 하락을 경험한다. 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건 자체가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에 비해 나았고, 이후 거대한 도약에 따라 후생의 발전이 이어졌지만, 장장 두 세대에 걸친 삶의 질 하락은 또 하나의 비극으로, 또한 다양한 대안이론이 갈등이 낳은 모순을 탐구하게 되는 동기로 작용했다.
824, 840, 849p
"역사책이란 결코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며, 영구히 타당한 것을 쓰는 것도 아니다."
"긴 여행을 마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차라리 문과 창문을 열어서 환기를 하고 집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이다."
알겠냐 역덕들아 환기하고 산책해라...
"역사의 비밀스러운 목적, 그 심층적인 동기는 현재에 대한 설명에 있지 않은가?"
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인가. 물질세계의 기초에는 무엇이 있는가. 물질세계와 작은 단위의 교환시장, 대단위의 전국시장과 세계경제, 그리고 자본주의는 반드시 일관되게 운용되는가. 작은 기업, 그리고 거기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사장들로부터 이야기의 단초를 발견한다.
세계는 꽉 짜여진 것 같아도 엉성한 부분들이 있고, 그 틈 속에서 대안은 탄생한다. 계층을 나눠서 보고, 계층간의 연결을 탐구하고, 미세한 단위간의 갈등과 모순을 탐구하는 일은 결국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858, 874p
정말 긴 여정이었다. 그래도 책의 분량에 비하면 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던 듯. 평소에도 늘 관심있던 주제였고, 다만 이 장구한 시간을 설명하는 개념들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이었다. 차라리 지금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읽었으면 잘못읽어서 체했을 듯...
그래서 결국, 자본주의란 무엇이냐, 근대는 어떤 기반속에 형성되었고, 그 실질적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다. 왜 물질문명과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구태여 구분하고 그들간의 관계로 이 긴 시기를 설명하였는가, 그 셋이 개념적으로 구분된 실체임을, 그리고 그 속에서 상호간의 긴장이 존재함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우리들의 현재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세계와 그 속을 살아나가는 물질세계의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를 세우기 위함이다.
좋은 원전을 읽는 것은 양서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바라본 세상의 풍경은 그 자체로 볼 가치가 있다. 바라폰 풍경 위로 무엇을 그려낼지는 결국 사람에 달린 일이다.
물질세계로부터 탄탄히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작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나심 탈렙이 역사의 본질에 대해 했던 말들, 전쟁과 격변은 역사의 일부일 뿐이며 대부분의 역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이라는 말이 새삼 이해되는 여정이었다. 역사를 바라볼 때 그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조명해야만 한다. 결국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되고 사회를 구성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미시 레벨에서 사람들의 거동과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고, 경제는 수량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며 쌓아갈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그리고 그 물질세계는 시장경제라는 교환체계를 통해 순환된다. 물질의 순환이 사회 구성의 기초가 되고, 정치적 체계의 밑거름이 된다. 신앙, 정치의 변천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시장의 약동은 그 순환을 통해 전체 물질세계의 균형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증거하는 좋은 지표가 되고, 순환의 중심이 되는 권역들을 통해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숙련과 교환의 경험인 상업활동의 암묵지들이 축적되고 전수된다.
숙련의 축적 역시 문명의 변화발전에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충분한 역량이 축적되지 못하면 장구한 경기의 팽창과 수축 속에 도시의 흥망성쇄 역시 그에 조응할 뿐이다. 운명을 개척하는 힘을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의 손에 쌓이는 숙련이 운명을 개척하는 연장이 된다. 숙련은 생산성의 향상으로, 상업문화의 축적으로, 기술발전의 원동력으로 암암리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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