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 존 엘리지

stingraykite 2026. 1. 27. 20:57

 
국경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국경의 개념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나. 다양한 경계에서 일어난 국경 획정의 사례를 통해 국경의 의미와 영향, 근대적 국경의 획정과 그 결과를 세계적 규모에서 바라본다.
Part 1. 역사
1. 이집트 통일 왕국
역사적으로 확인된 최초의 국경은 어디일까.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경계이다. 고고학적으로 양자는 남부의 왕국이 북부로 팽창한 것으로 드러난다. 북부에 구별되는 정치체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골풀과 벌의 왕'이라는 통치적 정통성은 이후로도 다양한 왕조에 의해 반복되어 재현된다. 이는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고 통치의 와해로 인한 시기적 구분이 명확한 이집트에서,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 상-하 이집트의 통합이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2.만리장성, 통합의 역할을 하는 국경
동쪽으로는 만리장성이 문명의 구분선 역할을 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만리장성은 총 연장 5만 킬로미터의 거대한 구조물이다. 성벽 구조물의 기원을 전국시대 초나라로 가져가는 것은 국경 획정의 수단으로써의 성벽에 가깝다. 읍성의 형태는 이전에도 관찰된다. 상나라 시대 토성에도 판축 기법의 방어구조물은 등장함.
연후 진의 천하통일이 시작되고 야만과 문명의 경계로써 만리장성이 건설된다. 진이 구축한 토성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명대의 합장식 구조는 아니었고, 판축식으로 구축된 얕은 구릉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때의 국경은 차단의 목적보다는 교류의 집적화에 더 가까웠다. 국경은 구분선이면서 동시에 문명이 교통하는 선이기도 하다. 장성의 목적은 이후 집권하는 왕조들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르게 활용된다. 때로는 합구필분의 원인으로, 분구필합의 배경으로, 그리고 새외와의 장벽이자 교통로로. 이것이 경계가 가진 이중성인 것이다.
3. 아시아 대륙과 선을 그은 유럽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 역시 흐린 변경에서 시작된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초 헤카타이오스의 <세계 일주 여행>에서도 확인되듯 그리스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동편과 서편을 구분되는 세계로 나누었다. 물론 이때 주변부는 서편의 에우로파였다.
이후 로마제국이 성립하고 쇠망을 겪으면서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두 양식이 혼재된 혼종의 지대였다. 이 경계선이 뚜렷해진 것은 무슬림의 약진과 이에 대한 기독교의 응집이었다. 이베리아로의 전진과 카를 마르텔로부터 샤를마뉴로 거대한 응집이 시작되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진한 선으로 구분된다. 그런에도 아나톨리아는 여전히 중층적인 공간이었다.
4. 로마식 경계와 주변부의 힘
국경은 혼종의 지대이다.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라인-다뉴브 라인은 제국의 강력한 국경이 된다. 그러나 국경의 획정은 팽창의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 시민권의 보편화와 국경으로부터의 부의 감소는 로마 제국의 내권을 심화하는 요인이 되었고, 군권과 시민의 분리, 군의 이질화는 이후 이어진 군인황제시대의 혼란으로 나타난다.
'3세기의 위기'는 경제, 군사 한두가지 요인으로 인한 위기라기보다는, 제국 사회구성체 전반의 쇠퇴로 인한 복합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국경의 획정은 국경에 있던 집단들에게 지대를 추구할 수 있는 원초적 권력, 무력을 응집시키는 결과로 나타난다. 변경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잉태하는 변화의 중심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군제개혁을 이후 정국의 안정으로 연결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분열의 단초가 결과적으로 내전의 빈도와 규모 감소로 이어졌는지는 따져봐야 하지만, 이후의 사건을 제외하고 본다면 어느정도의 기여가 없지는 않은 듯. 또한 이후 동서제국의 분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그의 경계 획정이 갖는 의의가 있다.
5. 샤를마뉴의 유산
카를마르텔로부터 피핀, 샤를마뉴에 걸쳐 이루어진 정치와 종교의 결합은 메로빙거의 축출로 인한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였으며, 제국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와 긴 재위기간은 유럽을 특징짓는 보편적 특성의 맹아적 구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게르만 상속법 특으로 왕국은 동, 서, 중 프랑크 왕국으로 나뉜다.
로타링기아로부터 반도로 이어지는 중프랑크 왕국의 경계 획정이 참 미스터리였는데 이 지역이 유럽 바나나의 코어이고 아헨이 포함되어있는 지역이라는 점이 그 결정의 근거가 되었다는 부분을 보니 납득이 안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가차없이 짜갈라진다.
이후로도 봉건제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봉건제는 절대 결코 정식화될 수 있는 규범에 의한 통치가 아니었다. 규범을 뒷받침하는 질서(무력)에 의한 통치와 이에 대한 규범으로의 사후정당화에 가까웠다. 프랑크 왕국의 분할, 중 프랑크왕국 상속 과정에서 국가의 난립은 게르만 상속법의 아사리판을 그냥 두면 정말 개판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후 장자상속제의 우위로 증명된다. 물론 수많은 반례와 사건사고를 동반한 과정이었다.
이 중프랑크 왕국의 강역, 저지대로부터 라인란트를 포괄하는 로타링기아의 땅은 이후로도 동, 서 프랑크 왕국을 계승하는 국가들, 프랑스와 독일의 꾸준한 분쟁지역이 된다는 점에서, 중세 프랑크 왕국의 분열이 이후로도 이 강역에 끼친 지정학적 영향을 새삼 실감케된다.
6. 영국의 국경
하드리아누스 성벽이 거기 지어진데는 다 이유가 있다. 북부는 로마시대에도 수익비가 안나오는 영역이었고, 로만브리튼의 땅과 웨일스 역시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특성을 갖는다. 앵글로색슨이 밀려들어오고 노르드인들이 정착하는 과정 속에서도 브리튼 각 지역의 경계는 공고히 문화적 구분선으로 존재한다. 노르드 사람들도 스코틀랜드 가서 살기는 싫었을 듯.
당시 왕국의 경계선이란 오늘날의 국경보다는 이동하는 읍성국가의 영향력의 반원에 더 가까웠고, 그 면 역시 듬성듬성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와 같았다. 초기 봉건제는 좋게 말하면 유적 체제고 사실대로 말하면 무력 조직간의 나와바리 구분이다. 7왕국이라는 것도 말이 7왕국이지 시기적으로 그 실체가 확인되는 왕국들과 존재의 기간은 차이가 있었다. 아서가 로만브리튼인지 뭔지 알바아닌 것도 어느정도는 당시 질서의 모호함에 기인한다.
알프레드와 애설스틴의 시대에도 북부와 웨일즈를 비롯하여 다양한 정치체가 병존하고 있었다. 웨일즈의 통합된 정체성이라는 것도 어느정도는 근대의 투영이다. 에드워드 롱섕크가 웨일즈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웨일즈의 지배집단 간의 균열을 포착한 것에 어느정도는 기인한다. 이후로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일부는 잉글랜드에 편입되고 일부는 지배박으며 브리튼이라는 섬의 정치적 연속채를 구성하는 구분되는 일부로 기능한다.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지리도 하나의 원인일 수 있지만, 그 배경에는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믿음이, 그리고 그 믿음을 셩성하게 되는 공통의 경험, 특히 공통의 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의 필연성과 우연의 누적으로써의 역사는 국경에서도 발견된다. 이루어진 결과로 필연성을 재단하는 건 쉽지만, 당대의 현실에서 필연성을 검증하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우연의 누적이 필연적 결과로 발현한다고 해서 다른 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7. 봉건제, 후작, 변경백, 그리고 변경 영주
봉건제라는 모델은 당대 현실에 대한 과도한 추상화이다. 실제로 초기 중세로부터 발현된 일련의 봉신관계는 일원화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날과 같은 명확한 경계로 구회되는 것도 아닌, 유적 권리관계의 집합이면서 규범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집단의 합이고 실체적 권력인 무력의 종속항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와 공작과 백작과 '대(arch)'라는 수식언으로 일련의 체계를 틀에 넣어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명문화된 질서는 절대 아니다.
여기에서 변경백, 또는 변경후는 무엇인가. 일련의 관계 속에서 변경이라는 속성이 갖는 기능이 있다. 거리의 근원이 종속성의 강도를 결정하는 만큼, 변경은 왕국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인 원리를 갖는 공간이었다. 노르망디와 아키텐이 영불 연속체의 변경으로, 앙주 제국의 심장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변경의 독자성과 자율성에 기인한다.
부르고뉴와 바르셀로나, 브란덴부르크와 오스트리아의 정체성과 독립적 성격 역시 같은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양 권역간의 경계지들이 갖는 장벽으로써의 기능, 그리고 교류의 중심으로써의 기능이 지역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응집성을 강화한다.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하나의 통치체로 발전하며 변경들은 저마다의 길을 걸어간다. 물론 계서제가 발달하고 중앙집권이 강화되어 변경백들이 사라지며 가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 하도 망해서 사칭범들이 족보조작하기가 용이한 대상이기도 하였음이다.
8. 징기스칸의 국경개방정책
러시아의 시베리아로의 약진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유라시아 대초원은 퉁구스, 몽골, 알타이, 우랄로 구분되는 두개에서 네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흉노로부터 돌궐, 선비와 에프탈까지 초원을 누볐던 유목왕조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초원을 나누던 느슨한 경계선을 지우개로 지우고, 그 과정에서 탕구트같은 민족도 좀 지우고, 시베리아를, 유라시아를 하나의 연속체로, 자유무역시장으로 재편한 것은 징기스칸 이후 몽골의 몫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라시아의 유목민족 왕조들은 변경의 사람들로, 문명세계의 선 밖의 사람들이면서 문명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는 그들이 지닌 물적 조건이 필연적으로 농경문명과의 연속적 관계를 요구하면서도,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실력(무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흉노와 돌궐로부터 몽골과 티무르까지, 교역이야말로 유목민족의 부의 원천이었고, 상인은 이들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핵심 자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목민족이야말로 최초의 장거리교역인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통합된 행사는 동서를 잇는 가교가 되었다. 가교가 좀 폭력적일 수도 있다.
9. 에스파냐 vs 포르투갈
알렉산데르 6세가 거하게 한탕한다. 교황칙서로 포르투갈이 가진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확인해주고, 또 '아조레스 제도와 카보베르데에서 서쪽과 남쪽으로 100해리 떨어진 모든 비기독교 지역'에 대한 에스파냐의 독점적 권리를 팔아넘긴다. 여기에 더해서, 에스파냐가 서쪽에서 도달할 수 있는 모든 땅에 대한 권리를 절찬리에 판매한다.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 명분 세일즈하는 솜씨가 가히 특출나다고 할 수 있다. 경계를 흐려놓았으니 경계를 획정해야만 하고,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희망봉의 발견이 1488년이고 콜롬버스의 발견이 1492년인데 세일즈를 이렇게 빨리하다니 참 시장선점능력이 훌륭하시다. 자기들이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를 대고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자본과 정치적 역량을 투여한다.
무엇이 그 과정을 추동했을까. 동서의 연결이 콘스탄티노플의 낙성으로 끊어지고, 대안 루트의 모색이 대양으로 사람을 나가게 한다. 무슬림들에 대한 레콩키스타로 구축된 식민지 확장 체제와 항로개척이 가져올 부에 대한 욕구가 한번 나가면 27%에서 50%가 죽는 장거리 교역의 길로 사람들을 내몬다.
가보지도 않은 지역에 대한 명분의 획득은 이후 적극적인 식민지의 개척으로, 진정한 세계-경제의 구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선은 역사에 긴 흔적을 남긴다. 실제의 구성에서 이런 모호한 경계가 정확히 인도되지는 못했지만, 포르투갈-에스파냐 문화권의 구분은 이 근방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이후 포르투갈의 자리를 차지하는 네덜란드와 영국 역시 때로는 이에 침투하고 빗겨나가며 정복하지 못한 세계를 '보편적'기준으로 재단해간다.
10. 신성, 로마 그리고 제국
볼테르의 비아냥으로만 남은, 560킬로미터의 여행에서 18개의 서로 다른 주교령과 공국과 기사영지와 자유도시를 넘어다닐 수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왜 그렇게 갈가리 나뉘었을까. 봉건제는 규범으로 정의된 일련의 체계가 아니었다. 이 속에서 수도원들이 독립적인 국가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건 수사님들 수녀님들 무력 역시 만만치않았다는 증거기도 하다.
911년 어린이 왕 루이의 사망 이후 신성로마제국을 규정짓는 선제후 선거가 구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요새화와 분권화로 인한 지방 귀족들의 독립성이 원천적으로 이 지역 권력의 동학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유럽과 구별되는 중부유럽의 지리적 특성이 이와 같은 변화를 촉발한다. 선제후 선발규정은 이후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12세기 후반 세명의 대주교(마인츠, 트리어, 쾰른)와 네명의 세속 영주(보헤미아의 왕,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의 변경백, 라인의 카운트 팔라틴), 총 일곱명이 선출권을 갖는 구조로 변화했다. 이후 금인칙서와 바이에른, 팔츠 등 소소한 변경이 있긴 하지만 7인의 선제후라는 틀은 유지된다.
룩셈부르크도 가고 비텔스바흐도 가고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오며 신성로마제국을 통한 오스트리아의 독일에 대한 개입은 점증한다. 막시밀리안의 더블부킹이 양타를 내며 이윽고 합스부르크는 제국의 반열에 오른다. 당대 프랑스와 재정비교를 해보면 실속은 없지만 어쨌든 영토는 넓혔으니 조아쓰!
하지만 카를 5세의 즉위 2년전 따란 마르틴 루터 등장! 독일의 제후들은 안그래도 귀찮게 굴던 막시밀리안과 합스부르크의 간섭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했고, 이는 종교개혁과 이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한번 붙은 불 재속에 파묻는다고 꺼지지 않지요. 펠리페 2세와 알바공작이 플란데런과 저지대에 불을 지르고, 지역별로 혼재된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은 누적되어 전쟁을 예비한다. 신교도 제후와 군주들의 이해관계와 반종교개혁의 반동이 맞물려 프라하에서 사람도 좀 던져주고 30년 전쟁의 방아쇠가 당겨지고, 이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을 맺는다.
500만, 당대 독일 인구의 3분의 1, 마그데부르크의 경우 90%가 죽어나가는 전쟁이 독일 전토를 휩쓸고, 이후 개별 국가의 주권을 보장하는 맹아적 형태로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진다. 종교와 정체성, 통치권을 기반으로 한 근대적 국경의 규범적 원형이 규정된 것이다.
11. 영국과 아일랜드, 지도 제작 식민주의의 발명
메르카토르 도법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지를 고정시켰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대한 몰이해와 이에 대한 질서의 부여로부터 촉발되었다. 구체성을 갖는 근대적인 지도는 그 자체로 정교한 식민활동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다운 서베이 지도가 그 예이다. 다운 서베이 지도는 정확한 형태를 갖고 지역에 대한 깊이있는 정보가 상세히 기입된 근대적인 지도였다. 마을, 도로, 성곽, 수로, 남작령과 교구 단위의 상세한 정보를 수록한 이 지도는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식민화 전략의 한 결과이다.
1169년 폐위된 랜스터의 왕 디아르마이트 막 머르카다가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영토와 충성을 바치며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식민지배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후로 식민활동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유의미한 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잉글랜드의 식민활동은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아일랜드 식민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국가재정의 투여는 결국 왕의 권리에 대한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후 찰스 1세의 처형으로 이어진다. 아일랜드의 혼란은 크롬웰의 정벌로 나타났고, 당대 인구의 10~40%에 대한 학살로 이어진다. 다운 서베이 지도는 정복한 땅에 대한 전체 토지대장을 구축하는 결과를 낳았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원형이 출현한 것이다. 더이상 토지는 자연적인 경계로 구분되는 복잡한 권리관계의 종합이 아니라, 등기대장과 그 소유권으로 구분되는 상품으로 구분된다.
12. 억울한 메이슨-딕슨선
메이슨-딕슨 선은 노예주와 자유주를 가르는 경계로, 남부와 북부의 구분선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식민지 정착 초기로 거슬러올라간다. 1632년 찰스 1세는 어딘지도 모르는 땅을 2대 볼티모어 백작 세실리우스 캘버트에게 팔고, 경계 획정도 안된 상태에서 1682년 그 아들 찰스 2세는 퀘이커 윌리엄 펜에게 1만6천 파운드의 '사소한' 부채에 대한 대가로 120만 제곱킬로미터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팔아넘긴다. 사소한 문재는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경계 획정이 안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정착지가 구성되고 당연히 소유권에 대한 갈등이 폭발하고 특히 해안선의 영유권에 대한 모호한 기술이 이 갈등의 핵심이 된다. 이는 실력행사로, 법원으로 이어지며 근대적인 경계선 측량에 대한 필요가 발생한다.
천문학자 찰스 메이슨과 측량사 제레마이어 딕슨에게 이 의뢰가 맡겨지고, 이들은 원주민 안내인들과 함께 수 마일마다 경계비를 구축하여 조약으로 규정된 경계를 정확히 획정한다. 그러나 모든 프로젝트는 기간과 예산의 정함이 있고, 원주민 안내인들은 다른 부족의 영역 앞에서 더이상의 안내를 거부한다. 이렇게 구축된 임의의 주간 경계선은 독립 이후 자유주와 노예제를 구분하는 선을 필요로 하며 다른 개념으로 전화된다. 불완전한 경계선은 대륙을 관통하는 직선이 되고, 이 선을 따라 자유주와 노예주가 나뉘며 이후의 분쟁을 가름하는 하나의 구분선이라는 개념으로 변화한다.
13. 나폴래옹 황제의 지방정부 개혁
프랑스 대혁명은 앙시엥 레짐에 대한 타도로, 국가의 과학적 운영에 대한 다양한 시도로 나타났다. 데파르트망 역시 그 산물이다. 전체 프랑스를 81개의 과학적 경계로 나누려던 이론적 시도는 실제의 지리환경 앞에서 좌초하고, 인문환경에 대한 고려를 기초로 모든 사람이 하루 내에 지역 중심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하여 지역간의 경계선이 획정되며 83개의 데파르트망으로 범주화된다.
이는 기존의 봉건적 지배질서를 혁파하는 동시에 인문환경에 기초하여 지역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제국의 확장은 이와 같은 시스템의 유럽적 구축이라는 야심찬 시도로 이어졌지만 우리의 황제폐하가 그만 러시아에 꼬라박고 이 시도는 좌절되게 된다. 사부아와 니스, 저지대, 스페인을 포함하는 130개의 데파르트망은 이후 빈 조약을 통해 현재의 프랑스로 줄어들었지만, 이때의 구분은 여전히 지방행정의 기초단위로 기능하고 있다.
14. 미국의 멕시코 침공
트럼프는 미-서 국경에 장벽을 세운다고 하지만, 루이지애나 저편은 원래 누에바 에스파냐의 일부기도 했다. 영국령 아메리카와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의 식민구조의 차이는 양국의 식민지정책과 모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통제력의 차이로부터 비롯하여, 미-서 변경의 정치적 응집성의 차이로 이어졌다.
미국의 독립과 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 그리고 멕시코의 수립은 북중미 경계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루이지애나로의, 명백한 운명이라는 테제에 의한 미국인들의 서부로의 확장은 이윽고 텍사스로의 침투로, 텍사스 공화국의 수립과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나타났다. 오늘날의 시각과 달리 당시 미국과 멕시코의 국력, 그중에서도 직접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무력의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양국의 국가로써의 응집력의 차이였다. 21개월의 전쟁기간동안에도 적게는 네번, 많게는 11번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승리란 난망한 일이다.
이렇게 획정된 국경은 이후 미국의 팽창과 2차 산업혁명, 그리고 두 대양을 아우르는 제국으로써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한한 이민자의 공급과 서부의 개척, 농업의 발달과 산업의 발달, 두 시장으로의 접근성과 이를 가능케 해준 대륙횡단철도의 개통까지, 명백한 운명의 지리적 완성으로부터 20세기의 많은 것이 규정된다.
15.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은 독일과 덴마크의 영유권이 혼재된 지역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시대에 이 지역의 영유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부유럽은 다양한 민족체가 교차되어있는 땅이고, 이 지역의 영유권은 군주에게 있지 민족들의 구성에 따라 갈리지 않았다. 1460년의 리베조약에서 이 지역은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원칙 하에 슐레스비히 공작이자 홀슈타인 백작으로 크리스티안 1세의 지배아래 놓인다. 이 조약은 독일어로 쓰인다.
요는 전국시장의 발달과 민족주의의 발흥으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대혁명과 이에 따른 전 유럽적 통합과 해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은 민족적 구분선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구축했고, 프로이센이 월경지를 통합하고 소독일을 구성하며 독일 민족을 주조하기 시작하며 이 지역 역시 민족간의 경계선에 따라 하나의 변경으로 영유권 분쟁의 장이 된다.
1848년의 전쟁과 런던 의정서는 일단의 영유권분쟁을 종식시키고 이 지역에 대한 통합시도를 금지했지만, 1863년 승계권의 모호성이 발생하며 다시 분쟁이 촉발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개입에 따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독일의 성원이 된다. 이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차례로 격파하며 독일제국의 성원이 되지만,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는 덴마크계가 살던 북부 슐레스비히를 분할하며 오늘날의 국경이 매듭지어진다. 그 과정에서 국경 너머에 남게된 덴마크인들은 덴마크 국게를 연상시키는 '항의 돼지'를 사육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16. 그 어떤 백인도 밟은 적 없는 곳
키니네의 발견은 열병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아프리카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산업혁명은 시장, 그리고 정치적 영토의 확장애 대한 욕망을 배양한다. 그리고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트 2세가 즉위한다. 스탠리는 무주지를 개척하며 족장들을 당대 기준으로 봐도 심히 비열한 행위로 매수하고, 실효적 점령 원칙의 수립은 아프리카에 대한 활발한 식민활동을 촉발한다.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열강의 진출은 그 대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저마다의 영토를 경도와 위도에 맞추어 직선으로 분할해갔고, 솔즈베리 경은 이와 같은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는 지도 위에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백인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곳에 말이죠. 우리는 서로에게 산과 강과 호수를 나누어주었지만, 단 하나의 작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우리가 나눈 산과 강과 호수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식민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과에 대해서도. 고무, 팜유, 상아에 대한 열망은 콩고인들에 대한 공공군의 가혹한 착취로, 전체 인구 60%가 감소하는 결과로 나타났고, 이에 대한 고발과 폭로는 당대 식민 제국들 사이에서조차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식민지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식민지를 '더 책임있는' 정부에게 위임하고, 진정한 콩고의 독립은 그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찾아온다. 이처럼 마구잡이로 그어진 국경선은 민족간 경계에 의해 구분지어진 국경선에 비해 국가적 응집성의 약화와 피를 피로 씻는 갈등으로 나타났고, 그 차이는 더 많은 분쟁과 피해로 드러난다.
17. 수단-우간다 국경위원회
이름은 거창하지만 수단-우간다 국경위원회는 두명의 영국 육군 대위와 현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집트에 대한 영국의 개입은 보호령의 수립으로, 그리고 나일강의 발원지에 대한 식민활동의 확당으로 나타났고, 그 과정에서 수단과 우간다의 경계에 대한 획정의 필요가 발생한다. 그 일이 각각 수단과 우간다를 대표하는 두명의 영국 육군 대위에게 맡겨진 것이다.
해리 켈리와 터프넬은 긴 국경을 헤치며 다양한 적대부족을 만났고, 터프넬은... 그냥 집에 가고싶었다. 원주민에 대한 폭력과 무장해제의 시도, 부락에 대한 진압과 방화는 안그래도 어려운 여정에 위험을 가중시켰고, 탐사팀이 마디알에 도착하자 휴가가고 싶어서 철수한다. 이 난장을 피워놓고. 켈리 대위는 그래도 사명감으로 모길라산까지 국경을 획정하지만, 탐사팀의 피로는 더이상의 진전을 곤란하게 했다. 그래서 나머지는 긋는다. 직선으로.
수단은 1955년, 우간다는 그로부터 7년 후, 그리고 케냐는 다시 그 다음해에 독립한다. 수단은 이후로도 내전에 휩싸였고 남수단이 사실상 독립했지만 여전히 분쟁중이다. 이따위로 그어놓은 국경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분쟁의 씨앗이 된다.
18. 유럽 민족주의와 대 오스트리아 연합국
합스부르크가 발칸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는가. 식민주의의 시대에 합스부르크는 소유한 영토의 통합과 개발을 통해 국가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것은 합스부르크의 비원인 다민족 영토에 대한 보편적 지배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상과 부합하는 동시에, 다른 민족국가들의 팽창과는 다른궤적의 대안이기도 했다. 그 행사는 다원적으로 이루어졌다. 카톨릭을 통한 종교적 통일성의 구축, 관료제를 통한 영토의 통제, 로코코라는 문화적 영향력을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축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어느정도 영토 내의 지배계급에게 합스부르크 치하에서의 세계시민주의를 설파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관료제의 침투가 민족적 스펙트럼에 단층선을 부여하고, 발흥하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의 요구는 독립에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경제적 통합의 시도는 격차의 문제를 낳았고, 독일계와 헝가리계의 슬라브계에 대한 통치의 관철은 반감으로 민족주의의 연료를 제공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치세는 신 절대주의로, 타협으로, 우유부단으로 이어지며 루돌프의 죽음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로 이어진다.
결국은 오스트리아 연방제, 또는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슬라브 구심의 구축이 페르디난트의 대안이었다. 체코를 중심으로 한 소 슬라브주의 역시 하나의 방안이었지만, 이미 페르디난트의 시대에 많은 기회는 사라져있었다. 헝가리 이중제국의 수립 역시 많은 용긱가 필요한 결단이었지만 씨씨의 부재는 이와 같은 종류의 통합의 가능성을 질식시켰고, 프란츠 요제프의 시대 하에 질식한 가능성들은 그의 제위 기념 퍼레이드의 지리멸렬함으로 나타난다. <다누비아>의 저자 사이먼 윈더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계획은 각 민족이 합스부르크 연방주의 내에서 단순한 민속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만족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의 독일인들이 왜 작은 삼림 지방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했을까? 왜 그들은 2제국(비스마르크 체제하의 독일제국)과 통합되기를 원하지 않았겠는가?”
19. 영국과 프랑스가 만든 모래위의 선
사이크스나 피코나 그렇게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경계 위에 그은 모래위의 선은 지역의 민족들을 선을 기준으로 나눠버리고, 프랑스가 가졌던 대 시리아의 꿈은 아타튀르크에 의해 분쇄되며 계획은 엉크러진다. 맥마흔과 후세인의 서한, 그리고 밸푸어 선언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주권의 대상을 이리저리 오가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근원적 반감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사이크스-피코 선이 오늘날까지 호출되는 적대감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 공개의 방식에 있다. 러시아제국 역시 이 합의에 참여했지만, 이후의 혁명은 그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했고, 아랍인들은 그들이 배신당했다는 것을 정면으로 기억하게 된다. 드러난 음모는 배신의 기억이 되어 역사적 반감의 원천이 된다.
20. 얼스터의 분할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식민활동은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민자는 지속적으로 유입되었지만 식민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정도는 못되었고, 플랜테이션의 확장과 부재지주의 만연을 통해 얼스터를 구심으로 경제적 종속을 확립하는 형태로 구축된다. 절대적인 인구 비율로 보면 적은 수의 개신교도들이 다수의 아일랜드인을 지배하는 형태가 수립된 것이다. 이후 웨스트민스터는 아일랜드인을 정치적으로 편입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지만 그 통치의 방법이라는 게 익히 알다시피 대기근을 낳고 지속적인 차별로 이어졌다. 자치권은 확대되얶지만 결국 신페인당의 독립선언으로 이어지고, 그 와중 얼스터와 아일랜드를 구분짓는 선이 민족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어진다.
그러고 잘 살았으면 이야기가 지속되지 않았겠지요. 익히 알다시피 개신교의 우위는 카톨릭에 대한 차별로, 그리고 탄압으로 나타났다. 실질적인 '오렌지 질서'의 통치는 반발로, 테러로 드러나며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1998년 굿 프라이데이 협정으로 폭력은 종식되었지만, 그 감정의 골은 국경이 유럽 연합의 틀에 양자가 공존하며 차차 녹아들기 전까지 쉬이 가시지 않았다.
21. 인도의 분할
영국은 인도에 대해 별 대책이 없었다. 전후처리에서의 대응을 보면 그 흔적이 드러난다. 영국의 식민통치는 인도에서나 다른 곳에서나 좋게 말하면 유연한 지배였고 사실대로 보면 가성비 식민통치였다. 동인도 회사에 의한 인도 병합도 생각해보면 황당한 일이지만, 그 이후 인도 식민당국 역시 원할한 지배였다기엔 무리가 있었다. 애초에 인도는 땅이 너무 넓고, 지역이 분절적이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식민모국의 사이즈에 비해 너무 크기도 했고.
그런에도 불구하고 마운트배튼에 의한 국경의 획정은 환상적인 비극이었다. 네루와 진나와의 코드 차이도 차이지만, 개장적인 결혼관계에서 네루가 미남계로 마운트배튼 부인과 연인이 되는 건 봐도봐도 놀랍다. 도장찍고 10주만에 독립이라니. V.P.메논의 훈작 거부에 대한 코멘트가 식민지인들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내 나라를 분할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으로서 기사 작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펀자브에서의 획정 역시 환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인도 땅을 밟아본 적 없는 행정가 시릴 레드클리프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당연히 잘 안됐다. 1,200만에서 1,8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어진 국경을 따라 양편으로 이동했고, 이 과정은 캘커타에서의 폭동처럼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마운트배튼은 희생자가 많아야 25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희생자는 100만에서 300만으로 추정된다. 이후로도 인도-파키스탄 분쟁이 이어지고, 서벵골 역시 지속적인 분쟁을 겪게된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인도에는 수많은 무슬림이 살고있으며, 나렌드라 모디의 힌두트바는 인도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일하고자 꿈틀댄다.
인도는 근대적 국체를 건설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대륙이었다. 한번도 통일된 적 없는 영토를 하나의 국가로 완성하겠다는 것 자체도 하나의 반식민적 반편향이었고, 이는 이후의 지속적인 저개발로 나타난다. 네루는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가늠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자랑스럽다는 인도의 민주주의 역시, 보통교육의 완전보급이라는 목적을 여전히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초등교육 보급률이야 명목상으로 맞추지만 실질적 문해율을 보면 과연 인도는 인민의 이해에 부응하는 국가인지. 식민주의가 인도 민족이라는 틀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인도는 다원적인 대륙이다.
22. 철의 장막과 베를린 분단.
1부의 마지막 장이다. 국경의 역사 마지막 장에 베를린 분단을 놓았다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분지어진 선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저마다의 민족성에 따라 라벨링하고 국민으로 주조한다. 그리고 주조된 의지들이 부딪쳐나간다. 자로 그 변경에서. 베를린장벽이야말로 사장 근대적인 형태의 국경이다. 교통을 통제하고 이주를 막으며 양측의 교류를 차단하는 철의 국경은 철의 장막이라는 말을 가장 물질적으로 구현한 사례이다.
베를린을 순환하던 열차의 동베를린측 역은 폐쇄되어 유령역이 되고, 프리드리히슈트라세 역만이 일방통행의 창구로 남아있었다. 250만을 기록했던 이주의 물결은 장벽의 건설 이후 28년간 5,000명에 불과했고, 그중 200명은 장벽에 핏자국을 남겼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장대한 동구와 서구 사이의 국경은 사람과 물자의 교류를 막아세울 수 없었고, 소련이란 기계의 녹 사이로 서구의 자유가 기름처럼 스민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시대의 종막을 알리는 종이 되어 동유럽 연속혁명으로 울림을 전파한다. 철의 장막의 물질적 현현과 그 잔해는 유럽 그린벨트가 되어 갈등의 와중에도 긍정적인 무언가가 남음을 증거하지만, 점증하는 안보위기는 다시 과거의 망령들을 불러온다. 이 시대의 끝에도 평화가 있을까.
2부. 유산
다양한 국경의 현재적 상태를 짚어가며 그 실질적 양태를 보여준다. 월경지로써의 칼리닌그라드부터 이집트와 수단 간 국경인 비르 타윌, 한반도, 남중국해까지 주요 분쟁지역들을 둘러본다. 비르타윌에서 우리 영국 친구들이 국경선을 두번 그어놓는다든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역사와 필리핀의 승소사례, 중국-대만 간 주장과 말레이시아로부터 베트남까지 정치적 갈등과 국경 획정의 과정을 통해 국경의 본질이 무엇인지 재차 확인된다. 국경은 정치적 갈등의 산물이다. 때로는 식민제국에 의해, 때로는 양자간, 다자간 협정과 실력행사에 의해 그 실제의 양태가 결정된다.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올 수 있을까. 새삼 벨푸어 선언으로부터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 그리고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을 떠올려본다. 이집트와 요르단의 입장이 결국 오늘날 이 비극의 주요 인자이기도 하다. 과연 두 국가 해법은 누구에 의해 집행가능한가. 모호한 국제연합이 필요한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유럽의 다양한 국경은 국경의 실제 양상이 색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경계에 있는 바를레는 필지단위로 영유권이 나뉘어 실제로는 한 마을이지만 마을 곳곳에 월경지가 존재한다. 이게 실제로 작용하는 양상은 더 독특하다. 양국간의 규제 차이는 개별 필지에 대한 규제차익을 구축한다. 일요일 상점규제가 네절란드 영토에 적용되면 벨기에 영토인 필지에서 우회하고,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한 봉쇄조치도 필지마다 다르게 적용된다.
미국-캐나다 국경도 잘 보면 반듯하죠? 반듯한 국경이 항상 문제다. 위도선으로 그어놓으면 경계의 획정이 잘 된 게 전혀 아니다. 과거의 측량기술이 모호성을 만들고 국경의 이곳 저곳에서 예외를 낳는다.
스위스 역시 독립 이후 일부 월경지들에서 관할 문제가 생긴다. 캄피오네는 이탈리아 영토로, 카지노를 유치해서 경제를 유지한다. 카지노의 붕괴 이후 이에 기대어 생활을 영위하다 카지노의 붕괴와 함께 곤란을 겪는다. 담배판매 면허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담배사러 국경을 넘어야하다니 너무 비극적임...
오스트리아령 슈바벤이었던 뷔징겐의 관할 역시 순수한 합스부르크의 '앙심'의 결과다. 꼬우면 스위스를 잘 통치하든가. 개털리고 밀려나고 나서도 쥐고있던 영토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가지만 경제적으로는 스위스의 관세망에 들어와있는 묘한 중첩상태가 유지된다. 이 사례는 이후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에 대한 참고사례로도 활용된다.
안도라로부터 모나코까지, 많고 많던 유럽의 소국들은 이후 국민국가의 팽창과 함께 하나둘 정리되어 이제는 다섯이 남았다. 이들 소국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리히텐슈타인의 사례는 이후 스위스와의 국경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침공'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유적인 국경의 존재를 보여준다. 안도라야 고립된 곳이라 그랬다고 쳐도 모나코는 대단히 독특한 케이스이긴 함. 정확히 이야기하면 인접 국가간의 합의 아래에 기능적 존재로써 존속이 허여된 것에 가깝다.
에식스 주의 수워드스톤은 런던 관할이다. 지역번호도 런던 번호다. 도시의 경계 역시 역사적 과정에 따라 복잡하게 형성된다. 파리 역시 티에르 성벽 안쪽만으로 보면 전체 인구가 200만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뉴욕 역시 멘하탄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오늘날과 같은 다섯개의 구가 생긴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래서 트럼프가 올드머니들한테 무시당했군... 퀸즈 출신 내려까는 게 일종의 사대문 안쪽 사람의 프라이드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만하다. 경제가 대광역으로 묶이고 관할이 조정되며 그 경계는 흐려졌지만, 여전히 그 흔적은 대중교통에, 거리명에 알알이 남아있다.
디트로이트의 쇠퇴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경기변동으로 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도시계획의 실패이기도 하다. 1950년으로부터 2000년까지 디트로이트의 인구는 절반으로 감소한다. 이후로도 감소가 지속되어 2010년에는 인구가 71만 4,000명 수준으로 줄어들고, 이는 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 75만에도 미치지 못한다. 건물 열채 중 한채에만 사람이 사는 도시는 유령들의 도시다.
디트로이트의 문제를 경계의 무한한 확장과 이에 따른 교외의 팽창으로 바라본다. 당대 도시계획 결정과정에서 경계로의 편입은 간소한 절차를 거치면 이루어지는 일로, 190ㅔ년 미시간주의 '자치도시벚'으로 확정되었다. 1925년 도시 전체의 면적이 88제곱킬로미터 증가하여 두배가 된 것은 그 반영이다. 무한히 팽창하는 도시 인프라는 유지비용을 한도끝도없이 증가시켰고, 인프라 자체가 산업의 쇠퇴에 선행해 노후한다.
워싱턴 D.C의 역사 역시 미국인들의 알뜰한 절약정신을 잘 보여준다. 군인들 봉급 안주다 포위당하고 봉변 안당할 한적한 곳을 찾아 연방정부는 헤메인다. 펜실베니아에 보호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광야를 헤메이다 지금의 위치에 정착한다.
호주의 주간경계 역시 위도와 경도를 중심으로 그어진다. 말 그대로 보더랜드다. 경계를 따라 관할권이 비고 프론티어를 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호주-뉴질랜드 관계가 독특하다. 여전히 헌법적으로는 통합이 가능하군.
리히텐슈타인-스위스 관계에서 포격 오사 국경침범은 연례행사구만... 국경이 완전개장되어있으먼 독도법 실수로 국경침범도 좀 할 수 있고 그렇구나... 국경선을 강으로 잦아놓으면 강안의 친식에 따른 변화가 국경분쟁을 유발하기도 한다. 현대 인터넷 지도와 그 인프라가 갖는 현실에 대한 영향력은 지도 데이터에 대한 정치적 개입 역시 필요불가결하게 만든다.
3부. 외부효과
본초자오선의 결정으로부터 시간대의 구획, 국제 날짜 변경선의 역사와 해양의 경계에 대해 설명한다. 해양의 경계, 해리와 배타적 경제수역이 합의가 된지 정말 한세기도 지나지않았군. 대륙붕 경계의 모호성과 군도수역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다. 포클랜드 제도가 영국령이라고 포클랜드부터 영국까지를 군도수역으로 설정할 수는 없다^^...
- 마지막으로 이번 논의 전반에서 사용된 ‘해리’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익숙한 킬로미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보려 한다. 1해리는 약 1,852미터로, 육지의 킬로미터보다 약 15퍼센트 더 길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해리가 위도 1분에 해당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즉 북쪽이나 남쪽으로 60해리를 이동하면 정확히 위도 1도를 이동한 것이 된다. -
해리가 정말 과학적인 단위계군 60해리가 위도 1도라니... 모든 단위계에는 이유가 있다.
남극의 영유권, 유로비전을 통한 각 국의 화합과 그 참여자격에 대한 자의적인 규정, 그리고 공중의 경계와 우주까지. 인간에 의해 그어진 지구위의 선들을 역사와 현황, 각각의 개념을 통해 일관한다. 백과사전식 나열이 개개 챕터에 대해 깊이있는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 대략적인 흐름과 현재적 의의를 짚어볼 만큼은 묘사한다. 이집트로부터 전후, 냉전까지. 한반도로부터 미국과 유럽까지, 땅으로부터 바다와 공중, 남극과 우주까지 경계와 국경에 대해, 거기에 얽힌 권리와 그 획정에 대해 짚어보는 과정들이 국경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차단의 선으로써, 권리의 분할로써, 그리고 교통의 장으로써 국경은 지리적, 인문환경적, 그리고 정치적 합의의 산물이다. 누구의 관할이냐에 따라 분쟁이 발생하고, 또 국경을 따라 흐르는 부와 인력이 변화의 단초가 된다. 변경에서 축적되는 정치적 변화가 중앙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중앙에서 변경으로 환류되는 과정들을 선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경험이 독특하다. 국제적 현상변경의 시대에 경계의 의미를 되짚어보기 좋은 책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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