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

<코뮤니스트>, 로버트 서비스

stingraykite 2025. 12. 29. 10:30

 
원시 사회주의로부터 맑스주의, 레닌으로부터 아옌데까지 세계를 일관하여 제 공산주의 세력의 흥망성쇠를 통해 이 운동의 동학을 짚어본다. 20세기 초 공산주의의 강력한 확산력은 어디에 기인하며, 이는 왜 전체주의적 사회의 구축과 이후의 쇠퇴로 이어졌는가.
맑스와 엥겔스가 주창한 이후로 공산주의는 세계적인 이념이 되었다. 이는 어느정도 그 이데올로기가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2차대전 이후 세계 곳곳에 공산주의 국가가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구축된 공산주의 사회가 그 이상과 같았다면 생존력이 좀 좋았으련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획경제는 유기적 연계를 갖는 체계를 구성하고 자생적 생산력 도약을 일궈내는 데 실패했고, 그 체제에서 종교, 민족, 관료 등 전근대적 관념은 끈질기게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비공식 사회의 일부로 공산주의 사회를 굴리는 기름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맑스주의는 주창된 시점에서도 완벽한 이론은 아니었지만, 그 추종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급변한 사회와 그로부터 지적된 비판점들, 사회에 대한 복합적 해석, 지식노동과 기획노동의 경제에 대한 기여, 중간계급의 존재와 선진국 내 제도권으로의 편입 및 체제 내에서의 전술 문제, 그리고 민족 문제등을 이론에 내화시켜 개선하기보다는 교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특히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들이 혁명에 성공하며 더 강해졌다. 더하여 공산주의의 통치는 현실적 조건과 이념 사이의 모순을 낳았고, 이를 폭압적으로 돌파하며 묻은 피는 결국 명분의 중요성을 퇴색시킨다. 지정학적 조건애 따른 타협 역시 통치로부터 오는 곤란이었다. 세계혁명이 좌절된 시점에서 일국 사회주의 국가로써 소련은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다른 국가들과 거래를 해야만 했고, 이념적 비타협성은 이 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론의 서커스를 해내게 된다.
 
생시몽 푸리에 등등등 기타 사회주의자들이 여러 사상적 토대를 남기고, 그중에서 루소의 기여가 특기할만하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에서 필요에 따라 사적 공간 역시 공적 목적에 따라 배치될 수 있다는 루소의 주장은 이후 다양하게 활용된다.
 
맑스 엥겔스 콤비가 이론을 정초한다. 맑스는 다양한 방면을 분석하고 이를 하나의 틀로 부어내려고 했지만, 그러기에 그의 재능은 불균등하게 분포되어있었고 완성을 향한 집착은 작은 것 하나 완결짓지 못하게 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사람이 알아먹게 글을 쓰는 재주가 훌륭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엥겔스가 기여한다. 엥겔스는 그래도 둘 중에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써, 글을 보통 사람들도 알아먹을 수 있게끔 요약하고 가공했다. 우리가 오늘날 접할 수 있는 이게 그나마 가공한 정도임 .. 포이어바하 테제 11번 중요하니까 외우자.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을 하고 경제학 이론을 답습하고 현대 실물경제의 구성을 이해하고 나서야 그 위에 정치를 엮는 것이다. 세상이 문언으로 돌아가지 않음. 누가 경제학 박사 따랬냐 기초 교양 지식으로라도 좀 익히고... 여하튼 당대 기준으로나 누진소득세 보통교육이 급진적인 주장이지 이거 전후에는 에지간하면 다 된다.
 
23, 25, 44, 53p
 
싱부구조와 하부구조의 관계, 노동가치론, 이윤율 저하경향 등 많은 요소들이 일반이론을 구성했고, 계급경직성이 강력했던 사회에서 맑스주의는 계급상승의 욕구가 집결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치적으로 빈칸이 여전했고, 세계체제에 대해, 역사발전에 대해, 혁명의 단계와 당대 사회에서도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의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사회구조와 경제 이외의 요인들에 대한 베버의 반박, 노동가치와 잉여가치에 대한 뵘바베르크의 지적들이 나오고, 20세기 초의 지적 발견들이 이어지며 이론은 변화하는 세태에 대한 해명의 의무를 진다. 베른슈타인의 계급론과 수정주의, 특히 에두아르트 다비트의 농업의 규모에 대한 지적들은 이후 혼합경제로 이어지는 고리가 된다.
 
기본적으로 이 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고집세고 승복하지 않고 고도로 추상적인 사람들이기도 한데, 개중에도 러시아의 활동가들은 좀 달랐다. 거칠고 교조적이고 극단적으로 비타협적이다. 도토리중에 누가 더 빨간지 가려봐야 도토리지만 그중에도 독특한 도토리들이 있는 법이다.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그런 종류였다.
 
블라디미르 대머리 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맑스주의를 재정의하는 작업이었다. 단계혁명론, 폭력혁명, 비타협적 프롤레탈리아 독재를 통한 권력의 장악은 이후 러시아 혁명을 통해 실전으로 구현되며 이후 볼셰비키식으로 불리는 하나의 정부전복공식을 구축한다.
 
63, 74, 97, 110p
 
크렘린은 새로이 구축된 국가의 심장이 된다. 정치국, 조직국이 성립되고 그 아래 서기국이 만들어진다. 역량있는 당원의 희소성은 권력의 집중을 유발했고, 결국 조직의 실권은 인사와 예산에 있다. 경제가 없다면 예산도 없고 따라서 결국은 인사가 만사를 관장한다. 스탈린의 수권이라는 건 당의 운영체제 구축의 과정을 보면 조직론적으로 필연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음.
 
간부들의 명부가 작성된다. '노멘클라투라'의 등장이다. 등록간부로의 기입이 이후의 당 생활을 가르고, 체계화된 계서제가 서열을 부여한다. 특권 역시 서열에 따라 분배된다. 수직적 구조와 진입의 장벽 속에서 후견주의는 필히 태동한다. 신경제정책이 입안되고 당의 관료들이 지방으로 퍼져나가며 일견하기에 소련은 국가의 모습은 갖춰나간다. 그러나 그 국가는 아직 하나의 통일된 실체는 아니었다. 지역마다 다양한 민족의 방향성이 저마다의 실체를 이루며 당 중앙과의 사이에서 긴장하고 요동한다. 혼합경제 하에서도 산업에 대한 영도는 주요 국유기업에 의해 조정되었다. 지방의 당부는 후견주의에 의해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 균형을 이루며 지역을 관할했고, 이는 민족주의를 비롯한 제반 분파적 경향이 당으로 침투하는 통로가 되었다.
 
세계혁명의 씨앗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해, 벨라 쿤에 의해, 바이에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폭력혁명을 위해 준비하고 봉기한다. 어쨌건 동은 떴다. 잘 안되서 그렇지. 사민당에 의한 배신이라고 하기에는 선젖포고 다 해놓고 결단력있게 움직이지 못한 게 로자와 스파르타쿠스 당의 명운을 갈랐다. 헝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위기가 정치적 위기로 연쇄되고 잔혹한 탄압이 집권의 정당성을 훼손하며 백군의 침입이 당의 파멸로 나타난다.
 
128, 130, 137, 147p
 
동유럽에서 폴란드는 항상 격변기의 구심이 된다. 3국분할 이후로 세력을 키운 폴란드는 각국의 억압적 통치 하에서도 민족적 역량을 육성하며 사건만 있으면 십만이고 이십만이고 자국민으로 구성된 조직을 구축하며 독립을 향한 열정을 불태운다. 특히 러시아 소비에트 빨갱이들이 강역을 넘어오다니... 폴란드 전역이 실패하는 건 이후의 역사를 돌아봐도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2차대전 전후의 역사에서도 폴란드인들이 구축한 미시적 이중체제는 굳건히 유지된다. 세계 혁명의 불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봉기의 국면은 언제나 그렇듯 짧은 틈을 열어줄 뿐이다. 그리고 그 틈은 지나가버린다. 레닌은 실패를 인정하고 스탈린의 조인트를 깐다.(왜?) 다 업보다. 나중에 욕 좀 먹어도 할 말은 없을 것...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희소한 상황에서 통치역량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향의 사람들이 통치계급의 성원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근대화주의자로부터 출세주의자까지 글줄만 읽을 줄 알면 입당하고 관료가 된다. 러시아정도 되는 광대한 영역을 제로베이스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실무적으로 요구되는 자원을 영입하는 데 많은 것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은 교육을 통해 인력풀이 넓어지지 않늗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엘리트의 부족과 잉여라는 국면에서 보면, 당대 러시아의 엘리트는 상대적으로 희소자원이었던 것이다.
 
후견주의, 봉건 잔재, 즉 종교와 민족주의, 민족적 전통과의 혼화, 지역 지배 엘리트들과의 유착은 러시아라는 광대한 영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현상들이었지만, 이후 주변부와 반주변부로 확산되는 공산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게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결국 통치의 구축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 위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덮어씌우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혼재와 중첩은 필연적이고, 통일성에의 강한 추동이 이를 지우는 것처런 보여도 전통은 수면 밑으로 내려가 이중체제를 구축한다. 상부구조는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상부구조에 새로운 요소가 혼입되어 비율적으로 강하게 나타날 뿐이다.
 
러시아 혁명의 승리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흥기는 코민테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코민테른은 수직적 구조 하에서 각 국가별 당부에 대한 통제와 지도를 기본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러시아 친구들은 세계운영에 있어서 이미 처참한 실적을 보인 바 있다. 코민테른 역시 마찬가지다.
 
154, 163, 170, 179p
 
코민테른의 지시는 시기에 맞지 않았고 현장의 판단을 기각하며 당의 노선을 관철했다. 코민테른의 맹동주의는 지역의 소모로 나타났고 전반적인 파국으로 이어졌다. 원래의 러시아 제국이 그러했듯이, 세계전략에서 파멸적인 성과를 자랑했던 것이다. 물정모르는 오판과 전략 급변의 연속에도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을 찾아보자면 어쨌든 세계전략을 꾸준히 관철했다는 부분에 있다.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확장될만한 충분한 저변은 갖고있었다. 미국의 노동조건은 열악했고, 정부와 기업의 탄압은 혹독했다. 사회당이 이런 저변으로부터 성장했고, 미국 공산당 역시 같은 경로를 답습한다. 그러나 그 성장세는 유의미하지 않은 수준에서 정체했다. 경제호황은 산업 생산력을 배가시켰고, 미국 특유의 계급유동성은 노동계급의 지속적인 이탈을 불러왔다. 이민의 유입 역시 계급의 형성을 가로막은 요인이었다. 유럽 각지로부터의 지속적인 이민은 계급의 이질성을 강화했고, 계급유동성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응집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홀 서기장이 41년 종신으로 미국 공산당을 운영했다는 것이 보여주는 것이 있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순응하며 세대교체를 이루어내지 못한 미국 공산당은 그대로 늙어 스러질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국제주의적 지향과 근대화의 외면적 성과가 보여주는 미래적인 지향이었다. 다수의 유대인들이 소수민족으로, 사회 하층민으로 겪는 억압적인 상황으로부터 느끼는 모순에 이끌려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고, 이는 다른 소수민족들에게도 동일한 동기로 다가왔다. 동남아시아의 화인들로부터 인도의 공산주의자들까지, 공산주의는 근대화에 이르르는, 식민 제국주의와는 다른 지표를 제시해주는 사상으로 비춰졌고 주변부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끓어오르는 계기가 된다.
 
188, 193, 207, 221p
 
스탈린주의의 모순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많은 회의가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친구들의 민족에 대한 견해도 그렇고, 그람시의 헤게모니와 진지전, 기동전에 대한 고찰 역시 주목할만 하다. 죄르지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 역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지노비예프가 이놈! 하자 깨갱하긴 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이념적 해석의 좁은 폭이다. 결국은 경제적 변화, 노동가치론으로 해석할 수 없는 서비스업에 대한 이론으로의 편입과 이윤율 저하경향에 대한 반론들, 침체와 공황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대안의 제시, 창조적 파괴와 복합적인 요소로 결정되는 생산성이라는 요소에 대한 수용과 재해석이 나와야만 했다. 혼합경제와 농촌의 문제에 대한 이론적 탐구 역시 당대 기준으로 필요한 작업이지만 구체성있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론의 전체가 단지 오늘날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대체 5개년 계획은 어떻게 완수될 수 있었나. 목표달성은 차치하고라도 소련 공산당이 러시아를 일사분란하게 통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교육을 하고 간부를 선발하고 기술자를 양성했다. 계급이동의 장이 크게 열리면서 당료가, 기술 엘리트가, 기층 간부가 양성되며 엉성했던 당의 통치구조가 단단히 굳혀져간다. 광대한 러시아의 영토에 대한 조방적 투자 역시 초기 성장률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굴라그 역시 빠질 수 없고. 국가가 국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하다. 그 당위에 대한 비판과 성장의 동력에 대한 검토는 양립할 수 있음.
 
별개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의 향촌사회에 대한 혐오는 향촌사회에 대한 무지보다는 오히려 그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발원한 혐오에 가깝지않나 싶음. 향촌사회의 생산구조와 전근대성에 대해서 레닌보다는 스탈린이 잘 알았을 것이다. 생산구조상 네프의 혼핮경제가 합리적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해서 집산화를 한 것이라기보다는,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이념적으로 필요하고, 그 방법이 아니라면 지방의 구석구석까지 당의 통제를 미치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집산화로 농민들을 몰아넣었다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의 마음이랄까. 향촌사회를 가만 두면 결코 농촌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둘 수 없다는 마음의 발로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대테러, 또는 대숙청은 일사분란하게 진행된 거대한 정치적 폭력이었다. 중앙당에서, 군부에서, 지역당에서 목록이 작성되고 1(총살), 2(굴라그 10년), 3(임의 처분)으로 명단이 나뉜다. 지역별로 정해진 할당량은 빈 자리를 채우려는 이전투구로 나타나고, 엔카베데는 수를 채우기 위해 마구잡이로 고발만 들어오면 죄인을 만들어 집어넣는다. 할당량의 지시와 그로 인한 모순과 이후의 재검토까지, 온전히 스탈린의 책임이다. 150만 중 살아있는 80만에 대해서는 나중에 신원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총살닫한 사람들도 그 재심은 받고싶었을 것이다.
 
226, 231, 235, 243p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정량적 지표가 지속적인 견제와 감시 속에 공정성을 획득할 수 없다면 결국 권세있는 사란이 부의 분배를 결정하고 사회적 계급을 나눈다. 노멘클라투라가 지배하는 사회란 당으로 표상되는 개인의 자의에 의해 직장으로부터 삶의 질까지 주어지는 사회인 것이다. 공식적인 삶이 당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면, 그 너머에는 개인의 세계가 있다. 이중 체제 하에서 인센티브가 자의적으로 결정되는 공식 체계는 피동적인 수행이 일반화되고, 생산성은 사적 구조 내에서 극대화된다. 계획이 삶을 결정한다면 창의성은 사적 세계로 도피한다. 그 와중에 성직자는 직업을 받지 못했다는 언급이 흥미롭다.
 
통제구조는 소비에트 사회의 골간을 구성하는 주요 기제다. 전체 지역의 여론과 동향을 조사하여 보고로 올려보내고, 중앙의 판단에 따라 하부에서 집행한다. 그러나 인식과 달리 엔카베데는 소련 전역을 감시하기 위해 충분한 자원을 획득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프라우다>를 활용한 선전활동 역시 중앙의 의사를 관철하는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인구조사에서도 유신론자가 55%로 나타난다. 이게 눈치를 보고 설문을 해도 이정도를 찍어준다는 건 종교가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삶의 공간을 터주는 중요한 미시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결국 기층까지의 온전한 행정적, 제도적 장악은 이후로도 요원한 일이 된다.
 
파시즘의 대두와 이에 대한 영, 프의 뜨듯미지근한 반응은 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상징되는 타협에 대한 배경으로 제시된다. 우리 시대의 평화가 상징하는 타협적이고 굴종적인 태도는 스탈린의 편집증을 자극하는 데 충분했고, 독-소간의 타협은 반파시즘 전선을 결성하고 이에 협력했던 유럽의 공산당들에게 배신이었다. 코민테른이야 이 전환을 현란한 서커스로 설득하지만 그런다고 설득이 되나 이게...?
 
프라우다의 <단기 강좌>는 대중 일반에 이념적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한 보통 사람들의 수준에 맞춘 이념교습이었다. 이 속에서 스탈린주의는 맑스-레닌주의의 정당한 승계자로, 스탈린 개인의 이념적 배경을 사상에 녹여내며 다시 한번 '러시아화'된다. 이분법적 구도의 강화와 외세로 상징되는 이념 바깥에 대한 배격이 강조되며, 종교적 요소와 상징, 구도가 차용된다. 스탈린주의의 정교회적, 음모론적 성격 역시 이로부터 발원한다.
 
250, 256, 277, 291p
 
모택동도 나면서 주석자리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크렘린의 견제, 스탈린의 다른 지구당에 대한 통제와 집착이 꾸준히 중국 공산당의 노선에 개입하고, 본인 책에야 당차게 저항한 것처럼 썼지만 모택동도 스탈린에게 면종복배한다. 외부적 간섭과 지도력에 대한 견제는 역설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응결성을 높여준다. 응결성을 어떻게 높이냐, 자아비판 좀 당하고 호랑이 의자에 앉다보면 사상이 통일된다. 이후 중공중앙의 중국 수권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단호한 폭력성은 이미 대장정 시기부터 당의 기풍으로 배태되었던 것이다.
 
달링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당은 항상 옳은가?"
 
지적 호기심을 가진 이들이 공산당에 이끌리는 것, 자신의 나라와 세계의 상황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일반이론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때로부터 오늘까지 유구한 현상이다. 문제는 당의 이념적 폐쇄성이다.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을 납득시키려면 그만큼 이론이 세계와 구조에 대해 설명력을 갖춰야한다. 이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이론적 도야를 이루거나 당 내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사람을 조직에 순종하고 명령에 따르게 해야한다. 보통 전자는 안하고 후자는 한다. 하지만 후자로 사람을 단속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제명이 곧 운동의 장에서의 방출을 의미하는 20세기 초에야 의미가 있지 오늘날 이런게 무슨 의미가 있나. 웃기는 콩밭들의 덜떨어진 엄포가 누구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겠음.
 
영국공산당이 당원들을 지도하는 양태는 코민테른 제 조직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간관계로 사람들을 얽어메고, 수상한 건 비밀로 취급하고 당 내 계서제를 통해 대안적인 권력을 차등적으로 분배하며 불리한 일에 대한 선별적인 침묵을 강요한다. 사실을 숨기고 뻔뻔한 거짓말을 내부에게도 되풀이한다. 20세기 초에는 개인이 취득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고 확인이 어려웠으니 그렇다고 쳐도, 오늘날에도 이런 개수작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이미는 걸 보면 종종 어처구니가 없다.
 
대체 지식인들은 소력의 전체주의적 성격으로부터 어떻게 눈을 돌릴 수 있었을까. 월리스가 굴라그 방문할 땐 재소자들 다른데 보내고 엔카베데 놈들 집어넣어서 속였다. 결국 지식인들의 소련에 대한 찬양은 본인들의 정치적 포지션에서 기인한 합작이다. 자신의 이념적 지향으로 인한 맹목이고. 국가의 중앙집중적 계획에 대한 이념적 경도, 문화개혁에 대한 입장, 권위주의에 대한 지향과 독선, 그리고 자의식과 실제 권력간의 낙차가 복합적으로 결합한다. 여기에 더하여 러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더해진다.
 
306, 310, 316, 326p
 
1939년에서 1941년까지 2년 걸렸고 코민테른의 입장은 전격적으로 전복된다. 이념 서커스가 각국별로 돌아간다. 이런 위기를 지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은 그렇게 됐다. 그나마 전격적인 협력과 대나치투쟁은 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서방과의 관계도 극적으로 회복된다.
 
여차저차해서 심대한 피해를 입고난 후 반격에 성공한 소련과 연합군은 승리했지만, 전후 체제 내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저마다의 계산이 돌아간다. 안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던 집단농장은 전쟁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었지만 전쟁을 통해 입증한 군사력이 냉전에서 필요해지자 무장에 우선한 5개년계획이 입안되고, 전쟁포로에 대한 처벌과 전쟁 과정에서 서구를 접한 이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이라도 국가 전체를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재개된 종교에 대한 관용은 결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었고, 더 나은 생활에 대한 요구들은 마냥 억누를 수 없었다.
 
영향권 내에 들어온 국가들에 대한 공산화가 시작된다. 외피는 자유민주적인 선거를 차용했지만, 실질은 크렘린의 지배를 받는 공산당의 권력장악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자와 체제의 반대자들은 잡혀갔고, 소련의 본을 받아 집산화와 계획경제가 입안되었다. 당을 중심으로 한 통치구조가 정식화되며 동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운다.
 
341, 356, 359, 368p
 
그리고 스탈린이 모택동이랑 김일성이랑 반도에서 사고를 친다... 이제 기밀문서도 플렸는데 남침유도설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냉전이 어떤 전쟁인지 결정지은 사건이 반도에서 일어난다. 트루먼은 중국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점은 실수로부터 배웠다.
 
폴란드에서 '민주적' 선거로 정부가 수립된다. 다른 어떤 민주주의가 아니라 '폴란드식' 민주주의가. 시민권이 정지되고 보편복지가 제공되지만, 그 차등은 당이 결정했다. 산업과 농업은 집산화되고 계획경제가 실시된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은 독립 자체도 독자적으로 성취하였고, 그 과정에서 양자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는 이후 티토가 독자노선을 추구할 수 있는 기틀이 된다. 경제체제는 소련식으로 이식했고, 유고슬라비아와 같이 남북의 개발도가 차이나고 잉여가 충분하지 못한 국가에서 이는 경제적 경직성을 낳았으며 이내 큰 피해를 초래했다. 소련과의 노선투쟁과 집산화의 폐해는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독자적인 경제체제에 대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지역별로 경제적 자율권이 주어지고, 농업의 집산화는 중단된다. 물론 일당 독재 하에서 민영의 성장이 원할히 이루어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견제받지 않는 당이 존재할 때는 더욱더. 자주관리라는 이름 하에 경영의 부식리 누적되고 생산성은 정체를 맞이하며 전반적인 성장 또한 침체된다. 독일에 대한 이주노동의 유입과 이를 통한 교류는 서구에 대한 희구로 나타난다. 민족적 갈등은 티토 아래에서 잠재되었을 뿐, 대 세르비아주의와 여타 민족들간의 갈등은 켜켜이 쌓여간다.
 
381, 390, 398, 406p
 
코민테른의 지도란 결국 소련의 이해에 따라 여타 공산당을 통제하고 지도하고 필요하면 거스름돈 취급하는 것이다. 그리스 공산당에 대한 지도가 바로 그러했다. 봉기를 지원 했다가 안했다가 접으라고 하다가 일어나라고 하다가 인민의 의지를 주머니칼 취긎하며 희롱한다. 지속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유고슬라비아와의 갈등도 갈등이지만, 의도의 모호성이 결국은 극단적인 내전으로,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이념에 대한 맹목이 눈을 가려서 자기 자신만 절벽으로 고꾸라지면 자기책임이지만, 자기를 믿는 사람들까지 끌고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아 총칼을 들었다면 그 결과 역시 공동의 몫이다. 잘못된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건 그런 일이다. 남의 몸을 조준선에 넣으면 제 머리통도 조준선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한다.
 
서구에 대한 프로파간다 작전이 시작되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소련을 방문한다. 이념과 진영으로부터 독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건 지난한 일이다. A.J.P. 테일러의 연설은 드물지만 그런 순간이었다. 인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견제와 균형 역시 작동할 수 없다. 코민테른의 제 정당에 대해서는 관신이 쏟아지고 서구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프로파간다가 펼쳐졌지만, 대사건은 피식민지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린뱌오의 만주 작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포적인 사건이었고, 인민해방군의 전격전이 화북 전선에서 국민군을 씹어먹은 것이 승리의 분기였지만, 국민당의 졸전은 그 이상의 업적이었다. 미국의 지원도 지원이지만, 항일투쟁과 전후의 경제 운용에서 국민당 정부는 차마 눈뜨고볼 수 없는 마적떼였고 그 파국적인 국정운용은 결국 국부천대로 끝난다.
 
418, 422, 437, 443p
 
공산주의 혁명은 가속된다. 중국 공산당은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배우고 교훈을 신속히 적용했다. 일단 숙청부터 돌려서 당을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신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올려두고 국유화도 속도감있게 진행한다. 민영기업들 쓱싹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사장들은 반동으로 몰리거나 다른 선택들을 하거나 했다. 홍오류와 흑오류의 구분이 생기고 이 출신성분은 앞으로 모택동이 죽을때까지 사람들을 구속한다.
 
동유럽이 다 소련 치하에 들어갔다고 중부유럽과 동유럽의 민족들이 갑자기 손을 잡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역을 두고 치열한 물밑다툼이 벌어지고 민족간의 교차는 불화의 원인이 된다. 이 와중에 폴란드는 인종 청소와 독일인 추방, 강역 축소의 여파로 얼떨결에 단일민족 국가가 된다. 안그래도 강한 민족주의 국가가 반러감정은 역사적 패시브인데 민족적 응집성이 터져나갔다? 폴란드가 그 기간동안 큰 사고 안나고 붙어있던 게 기적적인 일이다.
 
너무 단점만 비출수는 없으니까 장점도 있기는 있다. 중국에서도 (대약진운동 전까지는) 공공성이 보장되고 교육과 의료가 보편적으로 제공되고 여성들의 봉건적 악습이 철폐되고 물가가 내려가고 기대수명이 늘어났다. 아직 1950년대 초반이니까 ^^... 동유럽 국가들의 국유화와 5개년계획이 추진되지만 기본적으로 종속국으로써의 과중한 의무는 이 국가들의 산업발전과 복리후생을 저해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공업 위주의 드라이브가 민생에 끼치는 악영향도 마찬가지이고.
 
한두 국가에서만 비슷한 경향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특수한 일이지만 농업의 쇠퇴, 중공업 위주의 외연성 발전으로 인한 산업구조의 불균형, 산업의 비효율로 인한 생산성 악화와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경제적 취약성은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1917년에는 평가받기 이른 체제였지만 이제는 그 대조사례가 지리적 경제적 조건을 넘어 보편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성적표가 날아오기 시작한다.
 
447, 459, 467, 472p
 
흐루쇼프가 일을 다 잘한 사람은 아니었다. 리셴코를 기용하고 처녀지 개간 운동에 나서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는 카스트로의 광기에 밀려 배를 돌리고 헝가리의 혁명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그의 통치에는 많은 질곡이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소련 공산당의 거대한 과오를 직시하고 진실 앞에 솔직했다. 진실함을 추구하고 역사 앞에 바로설 수 있는 건 많은 옹기를 필요로하는 일이다. 정적을 물리적으로 숙청하지 않고 은퇴시키며 당의 문화를 바꾼 것 역시 그의 공이다.
 
데탕트는 소련과 미국의 접촉으로도 이어졌다. 중국이 먼저 수교했지만, 소련 역시 유화적인 접촉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브르즈네프 시기 이미 소련 경제는 변곡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농업의 실패는 낮은 식량자급률로 기초생활에 대한 수입의존으로 나타났고, 경제의 근본적인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과도한 중공업비중과 원유 수입에 의존하는 재정체제는 재정지출이 증가하면 할수록 취약성이 강화되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정부의 정당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취약해진다. 인민들의 이념에 대한 충성은 당연히 떨어지고, 부패는 만연하고, 체제에 대한 저항은 점증한다.
 
모택동은 국가에 대한 장악 이외에는 업적이랄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한 직시가 그를 광기로 내몰았다. 권력에 대한 집착, 업적에 대한 갈망이 중국을 급격한 집산화로(부작용이 심했다),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과 소약진운동으로(숙청과 기근으로 500-1000만명이 사망), 대약진 운동으로(3000-5000만명이 사망),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을 내몬다. 중국인을 너무나도 사랑한나머지 이승에서 승천시키는 게 목적인마냥 중국인들을 갈아대었다.
 
참 대단한 업적 세우셨다 단일인으로는 중국인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으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갱신하셨으니. 문혁이 모택동의 업적 중에서는 사상자수가 적어서 오해할 수 있지만 문혁하신분들은 너무 알뜰하셔서 총살하고 유가족에게 총알값 청구함. 사상자가 100만이고 수용소행이 100만이지만 일반에 대한 폭력은 그 이상으로 모든 인민에게 잔혹한 경험을 남겼다.
 
카스트로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건 익히 알만한 얘기지만, 아이젠하워가 독대 안해준다고 삔또나가서 쏠랑 소련으로 붙은 건 참 놀랄 노짜다. 피그스만 침공같은 꼬라지를 보고있으면 남미인들이 느끼는 반미감정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지만, 결국 한번의 선택이 운명을 가른다. 그래도 쿠바는 개중에는 경제가 멀쩡히 돌아가는 편이다. 보편교육과 공공복지 역시 원할히 제공되고. 농업이 잘 돌아간다는 게 참 쉽지않은 일인데 그게 되네. 하지만 쿠바가 낙후하지 않았다면, 경직된 체제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목숨걸고 플로리다 만을 고무보트로 넘지는 않을 것이다.
 
484, 504, 526, 540p
 
결국 이행기국가의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중 무엇이 우선하는가, 그리고 정치개혁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통한 끊임없는 질문의 여정이다. 쿠바가 개중 양반이라는 건 그 비교군 중에 그렇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혼합경제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은 무역에 접속할 수 있어야하고, 그것은 일정정도의 정치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르쿠제, 알튀세르 등등등. 문제는 정치경제학이고, 경제학의 이론적 축적은 이미 20세기 초에 정체했다. 문제는 전형문제나 계급문제가 아니다. 생산의 본질과 무역과 화폐와 신용, 궁극적으로는 침체와 침체로부터의 회복이다. 이론이 정치에 종속되고 이론은 생명력을 잃으며 방향성을 상실한다. 그 본래적 목적을 향한 진지한 시도는 길을 잃고 표류한다.
 
<뉴 레프트 리뷰>나 <흑색 왜성>을 픽한 것은 사심이 들어가있는 듯. 이 저널들 그정도는 아닙니다...
 
동유럽의 경제적 곤란이 계속되고 형편없는 삶의 조건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지속적으로 갈등으로 치닫는다. 고무우카가 낫냐 기에레크가 낫냐, 도토리 키재기지만 그래도 고무우카가 낫지 않을까? 애초에 사람들이 고무우카를 원해서 뽑았는가는 차치하더라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소비에트의 꼭두각시 야노시 카다르가 놀라운 유연함을 발휘하여 혼합 경제로의 한 발을 내딛는다. 이행기의 동유럽에서는 다양한 경제적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결국 그 본질은 통제경제냐 시장경제냐, 그 사이의 혼합경제에서 소유권을 얼마나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소련의 통제와 착취는 세월이 지날수록 점감해갔지만 동유럽이라는 위치와 이주노동과 접변의 증가로 인한 서구에 대한 동경, 잇다르는 경제적 실패는 동유럽 정권들의 취약성이 점증하는 계기가 된다.
 
547, 580, 583, 593p
 
기개란 무엇이냐. 목에 총칼이 들어와도 뜻을 관철하는 마음이다. 야밤에 납치되서 잠을 못재우게 해도 브르즈네프 앞에서 의정서에 사인하기를 거부하는 프란티세크 크리겔의 마음이다. 프라하의 봄은 헝가리 혁명의 진압과 함께 소련 체제의 억압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분기가 된다.
 
구조 자체의 건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채유입을 통한 외연적 성장을 한다고 경제 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폴란드 사람들이 참지 않아요. 기에레크의 경제계획은 한계에 봉착하고, 지속적인 저항이 분출한다. 동유럽의 국가들이 외채 도입이라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사운데 차우셰스쿠는 외채를 상환하고 국가재정을 흑자로 유지한다. 그런다고 차우셰스쿠가 운용을 잘한건 아니고..
 
구공산국가들이 혼란에 휩싸인 가운데 피식민지 국가들의 공산당은 약진한다. 남아프리카 민족회의로의 편입을 결정한 남아프리카 공산당은 지도적 위치를 포기하고 필요한 일에 나선다. 케랄라의 공산당 역시 지역 자치에서 유의미한 역량을 보여준다. 남부디리파드의 총리 집권과 토지개혁, 최저임금의 도입, 보통교육에 대한 투자는 역내 인적자원의 역량 축적과 전반적인 환경개선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역 중심 전략 역시 일정정도 성과를 거둔다. 문화적 경향을 당의 담론으로 포용하며 진지를 구축한 이들은 토스카나의 시에나에서 지자체를 차지한 후 인구통계에 맞춘 공공복지 전략으로 지속가능한 정치적 토대를 확보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에밀리아로마냐의 주도 볼로냐에서 시장 주세페 도챠에 의한 공공성 전략, 대중교통과 공원 등 공공 공간의 접근성 증대 및 주택과 교육정책을 통한 사회공공성의 증대로 현시되었다.
 
596, 601, 610, 615p
 
영국에서는 프락션을 투사경향이라고 하는군? 영국의 오만 잡탕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이 세세한 이니셜 기입에서 독특한 익숙함이 느껴진다.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이정도 볼륨을 차지하면서 소개를 시켜줘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데...
 
크메르 루주는 도시를 소개시키고 대량의 학살을 저지른다. 전 인구의 1/5라는 인구통계학상의 재난은 이후로도 국가를 회복시킬 수 없게 하는 큰 상흔을 남겼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개입하고, 크메르 루주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아옌데의 정책들을 보고있으면 초인플레이션과 이후의 정치적 변동, 그리고 쿠데타로 인한 비극에서 그의 책임은 어느정도인지 자문하게 된다. 산업체를 국유화하고 공무원을 짧은 기간 내에 다섯배나 뽑고 물가통제를 도입하면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인플레이션은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이다. 이와 같은 급진적인 정책을 입안할 때 그의 지지율이 높지 않았다는 것도 정치적 곤란에 한몫한다. 30여%는 1위를 하기에는 충분한 지지율이었지만 압도적 우세를 점치기에는 부족한 지지율이었다.
 
여기에서 대외부채 변제를 중단하고 구리광산을 국유화한다는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디폴트가 남미 특이기는 한데 부패 정권의 외채를 민중이 감내하지 않겠다는 결정의 후과는 결국 누가 감당하느냐. 미래의 인민들이 감당한다. 세계경제체제의 룰을 지키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고립을 이겨낼 용빼는 수가 있어야한다. 충분한 대안 없는 급진성은 결국 파국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농지개혁을 할거면 생산량이라도 받쳐줬어야한다. 도시로의 식량공급이 원할하게 이루어졌어야하고. 구체적 역량에 대한 검토 없는 개혁의 강행은 행정 실무에 대한 이해 없는 주의주장이 어떤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주변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공산혁명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막을 내린다. 카불의 폭력혁명과 줄타기는 소련의 개입으로, 그리고 불곰덪으로 귀결된다. 주변부의 갈등상황은 공산주의에 대한 이끌림을 강하게 만들었지만, 그 전근대성은 갈등의 외피를 확장하고 증폭하며 더 거대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무차별적인 파괴 위에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고, 이는 이념에 대한 거대한 증오로 되돌아왔다.
 
621, 632, 635, 641p
 
그리고 고르바초프가 등장한다. 그의 시도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동시진전이 결과적으로는 파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방향전환은 서구에서, 그리고 소련 내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흐름은 반전된다. 동유럽 제 국가가 소련에서 이탈하고 경제는 위기로 치닫는 와중 부시는 고르바초프의 15억 달러에 대한 차관요청을 거절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계기가 된 폴란드의 변화를 이끈 건 카톨릭과 자유노조였다. 폴란드는 처음 편잊될 때부터 고무우가를 둘러싼 다양한 분기점에서, 그리고 기에레크의 오만 삽질 속에서 그 저항의 강도를 키워왔다. 분할 이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제정 아래에서도 지속적인 이중체제의 구축으로 민족적 역량을 축적해 온 폴란드 민족주의야말로 동유럽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얻을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저항 속에 조직되고 벼려진 폴란드의 민중들은 소련의 압제를 떨쳐내고 자주정부를 건설하고, 이는 다른 동유럽 제 국가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도미노 이론은 잘 맞아떨어졌다. 반대 방향으로. 폴란드의 성공이 연쇄적인 정권붕괴를 촉발하고, 소련의 안보와 정권보장이 걷힌 동유럽에서 공산당 정부는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쓰러진다. 한번 체제에 대한 공포가 걷히고나자 드러난 알량한 실체는 분노의 파도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657, 660, 670, 676p
 
등소평의 여정이 시작된다. 76년 국무원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장년도 아니었다. 73세의 나이로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을 후견하며 장대한 여정에 나선다. 그 모든 모순과 폭압에도 불구하고 여태 중국 공산당이 통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등소평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을 빈곤에서 건져내고 국가를 건설한 것은 그의 업적이다. 중공중앙의 중국 장악과 국유화, 대약진운동에서 등소평의 참여를 부인할수는 없지만, 권좌에 올라 최종적으로 인민을 위해 한 일들이 낳은 성과를 부정할수도 없다. 스탈린도 공7과3이요 모택동도 공7과3이라지만 말이 그렇지 공이 7이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등소평이야말로 공7과3이라는 말의 진실성을 잘 보여준다.
 
경제개혁은 일관되게 지속된 과정이 아니다. 경기의 수축과 하강이 이어지며 하강의 때마다 이에 대한 반대가 집결되었다. 끊임없는 타협과 역진에의 시도가 이어졌고, 후야오방이, 천안문에서 자오쯔양이 실각하며 그의 후견인들은 중앙에서 탈락한다. 위기의 순간 남순강화로 뜻을 다시 세우지만, 그의 죽음을 추도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장쩌민이 그를 이어받아 1993년 14기 3중전의 결정과 1997년의 15대 전대의 결정으로 흐름을 공고히하지만, 개혁개방이 성장을 낳았다면 모순도 낳았고, 정치개혁의 미완이라는 숙제 역시 여전히 남아있다.
 
왜 고르바초프는 실패했는가,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농업개혁은 늦어도 1960년대에는 완수되었어야했다. 1980년대 콜호스는 이미 활력을 잃어버린, 무너져내린 곳이었다. 스탈린의 집산화로부터 콜호스가 위치한 지방은 서서히 활력을 잃어버렸고, 흐루시초프의 시대에 이루지 못한 농촌의 자활은 이후로는 다만 난망한 일이었다. 정치개혁 역시 마찬가지로, 쌓인 모순이 한김에 조절되지 않고 터져나왔다. 연방에 대한 지지의사 역시 경제의 급진적 추락과 함께 사그라든다. 그가 쓸쓸히 정치의 여정에서 내려올 때, 그에 대한 인민들의 지지는 싸늘한 시선으로 자뀌어있었다. 결국은 그 역시 관료였고, 물질세계의 일원은 되지 못했다. 소련이라는 캐비닛은 열어젖혔지만, 그 안에 진정으로 도사리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민주적이고 안간적인 레닌에 대한 열정을 품고있었지만, 그런 레닌은 역사상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683, 693, 701, 710p
 
산디니스타도 있고, 사파티스타도 있고, 간헐적인 움직임들은 이어진다. 나름의 한계를 극복한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으로 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했다. 낡은 이념은 농담이 되고 증오의 대상이 되어 먼지처럼 흩날린다.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동지들은 자국의 자본주의와 양키 제국주의에 맞서 전쟁을 수행했다. 대부분의 유럽 동지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체주의적 관점과 완전히 결별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동지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항시 다양한 형태로 억압이 나타난다. 그러나 다당제 민주주의와 인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국가에서 억압은 더 거대하고 업혹하게 견제받지 않는 당에 의해 집행된다. 시장이 없는 사회에서 관료는 견제받지않고 후원-피후원 관계망에서 부패의 탑을 쌓고 생산성의 향상은 정체되며 이는 결국 내재적 산업의 유기적 연결을 저해하고,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자본의 독점이 무산계급의 한없는 빈곤을 낳긴 했다. 바로 공산주의 사회에서. 세계전쟁과 대파국의 예언은 몇번이고 이연되었다.
 
러시아 중심의 서술은 한번 봤고 중국은 요즘 한 다섯바퀴 돌아서 다른 사례가 더 없나 하고 봤는데 결국 이 이야기는 소련을 중심에 놓고 전개될 수 밖에는 없다. 그래도 소개된 동유럽 사례나 유고슬라비아, 간략하게 나왔던 케랄라나 아프리카 사례들이 전반적인 전개상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음. 시간순에 따른 세계적인 발전양태를 관찰할 수 있었다.
 
한두번 조졌어야 아모른직다하지 이렇게 다양한 세계 곳곳의 지역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공통적으로 조져놓고 여전히 낡은 레퍼토리를 틀고있는 건 지적 게으름을 넘어서서 시대적 비극에 대한 외면이고 자기만족이다. 왜 PT독재가 근본적인 한계를 내포한 체제인지에 대한 이해 없이 논의는 진전될 수 없고 계획경제가 아니라면 어떤 경제체제가 가능한지에 대한 검토 없이 이념도 전망도 정초될 수 없다. 결국은 정치경제학이고, 세계체제에 대한 분석이며, 그 안에서의 사회 공공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란 무엇인지 알고자하고 호기심을 갖고 갈등과 모순 속으로 뛰어드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더이상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조직들이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시대에, 독립적인 관점을 갖고 폭넓은 지식을 접하며 자기 길을 찾아나가는 이들에게 기도를 보낸다. 기개를 갖고 자기 길을 개척하는 이들에게 평안을 기원한다.
 
731, 7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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