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근대 향촌질서란 상당히 강고하고 예속적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신분질서의 해체는 향촌사회를 과거의 영역으로 몰아넣었지만, 해방전후와 한국전쟁의 시간에서 그 갈등은 여전히 생생했다. 민간인 학살은 마을 단위에서 어떤 동기로 일어난 일인가. 그 하나하나를 단편으로 모아본다.
전쟁이전 한국사회는 복합갈등 사회였다. 종가 내에서 본가와 분가, 마을 내에서 양반과 상민, 머슴(노비), 마을과 마을간의 반상의 구분, 종교의 차이가 복합적으로 나타났고, 해방전후의 갈등의 증폭과 학살 역시 이 선을 타고 흐른다 최소 10만으로부터 최대 수십만에 이르는 민간인 피해자는 왜 발생했는가. 최종 책임은 국가로 귀속되지만, 그 갈등의 장에서 가해와 피해는 얼마만큼 구분될까.
마을간의 갈등 속에서 이 구조를 파악하고자 한다. 문맹률 90%의 한국 사회에서 과연 이념은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을까. 동성마을과 각성마을로, 반촌과 민촌으로 당대 향촌사회의 구분을 나눈다. 마을 내에서도 지주와 소작농, 호외집(협호)라 불리는 예속농민, 머슴으로 노비까지 다양한 신분이 섞여있다. 노비는 1894년 이후 사라졌지만, 그 형태를 달리하며 반상의 구분은 길게도 지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신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가 유입되며 마을의 구조는 변화를 겪는다.
한국전쟁기 신분간의 갈등은 이와 같은 전근대적 구조 속애서 형성된 차별과 멸시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동성마을내에서의 갈등은 그 물적 토대의 차이와 종가와 방계 사이의 갈등에서도 비롯한다. 마을 내부의 갈등 역시 마을 구성하는 성씨, 그 역학관계의 차이와 전복에서 나타난다. 신앙 역시도 갈등의 요소가 된다. 개신교도들이 보인 우익 성향은 인민군 점령 이후 이들에 대한 학살로, 다시 인민군 패퇴 이후 보복 학살로 나타나며 극단적인 충돌과 이후 마을에서 지속되는 핍박으로 이어진다. 전통적인 소외계급이었던 머슴과 박수무당들 역시 학살에 앞장서고, 또 학살당한다.
좌익 인사들의 활동은 해당 마을에 대한 탄압과 학살로 나타났고, 이는 남은 사란들에게 양가적 감정을 갖게한다. 각을 뜰 때는, 자기 어깨에 얹힌 사람들의 무게를 생각해야한다. 월북 인사들 사례가 종종 나오는데, 과연 그들이 가문에 내려질 무게에 대해 인지했을지. 봉건적 관계에 대한 증언들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신분제의 잔재들을 곱씹게한다.
“농민들 입장에서야 좌익분자들 빨갱이 말이 맞지. ‘다 같이 공평하게 먹고살자’ 그러니. 없는 사람들이 왜놈들 밑에서, 있는 사람들 밑에서 학대받고. 쌀 한 말 갖다 먹으면 일을 엿새씩 해주고. 이런 세상을 겪은 사람들은 다 공산주의가 옳다고 했지.”
우익청년단 간부들에 대한 학살과 재 보복의 과정들에서, 간부뿐만 아니라 가족들에 대한 학살 역시 두드러진다. 총을 들 때에는 맞을 각오도 해야만한다. 남의 가족에게 쏠 때는, 그 총알이 자기 가족에게도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인지했어야만 한다. 그 책임을 얼마나 국가에 돌릴 수 있는가. 중앙정치의 분화가 기층에서의 분열로, 마을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군의 진주는 갈등을 폭발시키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선후관계와 전쟁이라는 상황의 원인을 탈각시킨 채 양자의 동일한 국가폭력으로 치환시키는 것이 오늘날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민군의 마을 주민을 동원한 학살, 국군의 보복 과정에서 마을간의 편차가 나타나는 것은 역설적으로 당대 국가기구의 마을에 대한 통제력의 강도를 드러낸다. 국가기구의 개입이 갈등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본저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미시적 갈등의 누적과 상호간 폭력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학살로, 보복으로 나타났다. 그 주체는 결국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이고, 표적을 지목한 사람들이다. 갈등의 깊이 차이가 학살의 규모 차이로, 과정에서의 적극성으로 나타났다. 국가의 책임만큼, 가해자 본인들의 주체성 역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학살은 보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을에서의 추방은 오늘날 인지되는 것에 비해 심각한 처벌이었다. 성묘를 하지 못하고 태어나 살아온 동리를 밟지 못한다는 것은, 향촌사회에 발대본 적 없는 이들에게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금제가 계속되고, 여전히 마을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깊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요는, 전근대로부터 전해진, 강점기와 해방 전후사의 맥락 속에서 미시적으로 형성된 복합적 갈등구조이다. 이 과정에서 가해와 피해는 중첩되고, 개인과 국가의 책임은 융합되어 나타난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난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 이 글을 읽는다.
1. 친족간 학살의 비극, 진도 동족마을 X리
전남 진도의 곽씨 동족마을의 사례로 시작한다. 이 마을에서는 한국전쟁기 몇달동안 160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된다. 밤촌 성씨 중 창녕 조씨, 밀양 박씨, 무안 박씨, 김해 김씨 등 네 성씨는 조선시대로부터 큰 세력을 유지해왔다. 곽씨의 장파와 중파는 해방 이후 면장을 맡으며 이름을 드러내나, 계파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순지주인 지주(갑)은 12명, 자작 겸 지주인 지주(을)은 139명으로 전체의 1.6%를 차지하며 전남 평균인 2.1%보다 작게 나타난다. 반면 자작농과 소작농 비율은 전남 평균보다 많게 나타나고, 순소작몽 비율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다. 토지의 집중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고, 일본회사 및 개인 소유 토지가 전체 토지의 7분의 1로, 이를 소작받아 부치는 이들의 수 역시 상당했다.
소농의 연대에 따른 증가비율 역시 특기할만하다. 3천평, 15마지기 이하 토지소유자의 비율이 전체에서 계속 증가한다. 이는 인구증가에 따른 인당 경지면적의 저하를 보여준다. 순지주도 만평인데 45마지기짜리 지주도 지주인가... 강점기 해방전후 경지면적 좀... 낮설다. 해방이후 중파외 계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뉜다. 이는 강점기 중파 인물들이 신학문을 배우며 좌익 활동에 가담하고, 농민회 등을 통해 기층 조직을 구축한다. 그 구성은 중농으로부터 소농, 빈농을 포괄한다.
기층 조직 강령이나 슬로건을 보면 당대 현실에 대한 이해와 현장밀착적인 측면들이 돋보인다. 이들의 조직전략은 기반한 향촌사회를 중점적으로 목표로 하고있고, 이웃한 반촌은 그 대상에서 제외된다. 당대 정치활동의 기반이 그 정치적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로 한정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해방 이후 건준이 결성되고 인민위원회가 되고 민전이 되는 과정에서 진도 좌익들의 결합력은 생각보다 약하게 나타난다. 핵심 인물들은 월북하고, 1946년 11월 전남지역의 봉기에서도 두드러진 행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1947년 이후 권씨 계파들은 우익에 가담하고, 청년단으로부터 경찰을 통해 정치적 노선을 결정한다. 보도연맹 사건에서 좌익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지고,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인민군이 진주하며 우익 인사들과 그 가족들 역시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다. 경찰, 청년단과 가족들을 합하여 진주시 37명, 철수시 73명이 골로 간다. 총살로, 장살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인민군 철수 뒤에는 이들을 따라 입산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보복이 이루어진다. 직계 가족들과 사촌들은 큰 희생을 치른다. 이와 같은 갈등의 기저에는 지역 내 권력관계에서의 열위, 그리고 동성마을 내 계파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이는 지파별로 중심인물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파 내의 정치노선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혼재의 양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 계파의 구도와 가담양상은 중지가 모인 이후 집단적 가담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문중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고, 이후로 남은 사람들 역시 부역자로 처단되고 또 견제받으며 문중의 영향력은 붕괴되었다. 전후 정치적 진출빈도의 격감은 이를 보여준다. 이들이 받은 피해는 전후로도 오래도록 지속된다.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2.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마을의 시련
영암의 구림과 영보, 두 마을을 통해 강점기와 해방전후 서로의 다른 선택들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바라본다. 영보는 최씨와 신씨로 구성된 반촌이었고, 영보의 핵심은 영보정을 둘러싼 내동, 서당동, 관곡, 은행정이다. 중심으로부터의 배치에 따라 가문의 격, 민촌의 위치가 드러난다. 최씨와 신씨는 마을의 운영에서 상호 협력하며 마을을 경영한다. 그러나 이는 고종 때 뇌물 먹이고 벼슬은 안준 사건으로 상호간의 화합이 깨지며 균열이 드러난다. 영보는 의병으로, 위전척사로 강점기에 저항하고, 구림은 신교육과 신학문에 편승하며 3.1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낸다. 이후 영보 역시 교육에 뛰어들며, 좌익 청년들을 배출하며 정치적으로 경도된다.
지주계급 젊은이들이 노동절 행사하다 삘받아서 신소작농이니 구소작농이니 나누며 소작농들 뺨 때리고 곤봉으로 구타하는 게 참 훌륭한 운동이다 그쵸? 사고치고 입산했다 경찰한테 잡혀온다. 해방이후 구축된 건준과 인민위원회는 진주한 미군에 의해 해산되고, 소위 11월 봉기에도 이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정지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신탁통치와 선거국면이 지나며 영암의 빨갱이들은 입산도 하고, 추곡미 탈취도 하고, 빨치산 활동도 하고, 그러다가 반동도 척살한다. 이후 한국전쟁이 개전하고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일어난다. 의외로 인민군 점령기간 토지개혁이나 보복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민군이 철수하자, 입산한다. 보다보면 ㅇㅇ의 모스크바 소리를 듣는 마을이 참 많다. 유격대와 경찰간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유격대가 밀려나고, 경찰이 마을을 장악하고, 청년단 역시 이 과정에서 큰 희생을 낸다. 완전히 마을이 경찰에 장악되자 일부 입산자가 먼저 내려왔지만, 이들은 처형당한다.
유격대는 보급투쟁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추적당하자 민가를 습격하고 인명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이후 일부 입산자들은 자수하여 자진입대하거나 형무소에 갇히는 등 고초를 겪지만 그래도 살아남기는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입산자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영보 사람들은 전체의 5분의 1인 205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구림마을은 좌익들의 교회방화학살사건으로 32명이 희생당한다. 이는 구림이 영보에 비해 전근대적 습속이 더 강고했던 탓으로 짐작된다.
전후 영보는 전쟁간의 피해와 낙인효과로 이후 지역사회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지낸다. 그러나 응집성에 있어서 이들은 출향민들까지도 하나로 묶는 결속력을 보여준다. 전전의 통합적 성격이 전쟁이라는 참화와 이후의 고초를 겪고도 살아남은 것이다.
3.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여군의 두 동족마을
금강 변의 A마을과 B마을의 사례를 통해 반상의 갈등을 풀어본다. A마을은 강씨 집성촌으로, 대부분 영세 소농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순지주(갑)이 한 호도 없다. B마을은 풍양 조씨 반촌으로, 민촌인 A마을과는 예속관계에 있었다. 이는 A마을에서 민족운동가가 나오며 뒤집히기 시작한다. 마을에 낙햔한 서생이 학당을 차리고,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A마을의 입지 역시 상승한다. 그리고 좌익으로 경도된다.
B마을은 조선시대에도 생원, 진사를 15명 배출했으며, 조선 후기 풍양 조씨 권세기에는 꽤 위세를 과시할 수 있었다. A마을 사람들은 B마을 근처를 지날 때면 종종 쌀도 삥뜯기고... 아니 양반들이 왜 상민들 삥을 뜯어... 근데 사실 이게 기본이다. 신분질서가 제도적으로 사라졌다고 기존의 권력관계가 하루아침에 녹아나지 않는다. 1934년만 해도 술집주인이 양반에게 외상값 내놓으라고 한마디만 해도 동네 양반들이 몰려와 어디 상놈이 떽떽거리냐며 몰매를 놓고, 양반 청년이 70대 노파를 불경스럽다며 폭행하고, 양반 자위단이 불손한 상민을 징치한다.
향약도 잘 보면 노복을 부릴 수 있는 자가 조건이다. 반대로 말하면 부릴 노복이 없으면 향반도 못된다. 하시도 하고, 불손하면 불러다 볼기도 때리며 두 마을은 살아온다. 이게 향촌사회 특이다. 양반 빠는 사람들은 양반이 뭐였는지 잘 알아야한다. 대개의 한국사람은 거진 다 상민들이니까. 이 꼴을 겪고도, 해방전후 양 마을간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불거지지 않는다. A마을의 강성구는 해방 이후 종교적으로 경도되며 이승만과 김일성을 모두 비판하는 책을 쓰고, 인민군이 들어온 후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처형된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4명이 처형되고, 인민군이 진주한 이후 인민재판으로 두명의 조씨가 각각 B마을과 C마을에서 처형된다.
사람을 패죽이고 냇가에 머리만 남겨놓고 질식시켜 죽였는데 여기에서 어디에 국가권력의 개입이 있나. 있다면 개인들의 악의가 있는거지. 이후 인민군은 퇴각하고, 부역자들은 입산하거나 인민군과 함께 철수한다. 경찰이 진주하고, 마을 사람들을 잡아가며 B마을 사람들은 A마을에서 약탈을 한다. A마을의 장로는 린치를 당하고 그 동구나무는 베어진다. 그래도, 보복의 과정에서 더이상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조씨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일을 그 수준에서 덮어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토지개혁 과정에서의 모습들, 찢어줄 땅이 없어서 개혁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에서 그 경제적 동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둘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다. 이 과정에서 물론 머슴들은 소외되었고, 이는 1950년대 이후 머슴들의 이촌향도로 나타난다. 전후 시간이 흐르며 두 마을은 강변의 강둑을 쌓는 등 협력해야 될 문제를 두고 상호협력의 토대를 쌓는다. 이 동네도 이제 산지기가 없어서 제사를 안지내고 선산을 정리하는군. 이게 요즘 종가들 특이다.
강둑으로부터 지역 정치까지, 양 마늘의 접변은 강화되어가며 갈등은 수면 아래로 흐른다. 그러나 반상의 법도는 아직도 양 집안간의 결혼 문제에서 그 흔적을 보여준다. 조씨는 강씨랑은 결혼 못한다. 이게... 시골가면 아직도 있다. 이웃마을 돌쇠 손주놈이랑 장손녀랑 결혼한다면 집안 어른들이 쌍수들고 반대해요. 제도와 습속이 많이들 사라졌어도, 우리의 어떤 면은 여전히 전통의 굴레를 띄고 무의식적으로 이를 재현한다.
4.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합덕면은 우익도 250명 희생되었지만 좌익계열은 그보다 더 희생됨으로써 당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난 곳이다. 지주와 소작민, 천주교 마을과 좌익, 마을 내 씨족간의 문제가 얽혀 수많은 갈등과 학살로 드러난다. 합덕면은 동족마을이 별로 없는 곳이다. 말인 즉슨 상놈마을이다. 합덕면은 전국에서 세번째로 넓은 예당 평야의 가장 넓은 지역인 소들강문평야에 자리잡고있다. 그 경지면적은 1920년경 1,400정보, 즉 21,000마지기에 해당한다.
이중에서도 천주교회는 모두 195정보를 소유하며 최대 지주로 나타났고, 그 대부분은 합덕 면에 있었다. 대개의 마을에서 땅은 부재지주의 소유였고, 그에 따라 소작농과 마음으로 구성된 농가가 마을의 농사를 주관한다. 일제 강점기 이들 소작농들은 좌경화되고, 자체 소작조합을 결성한다. 반면 주로 천주교회 소작인들로 구성된 합덕리에서는 별도 조직인 '합덕리소작회'를 만들고 이들과 노선을 달리한다. 이후로도 제방의 수리, 용수의 사용등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마름들의 수탈에 있었다.
"충남 당진군 합덕, 범천 두 면은 평원광야로 본래 밭이 없고 전부 논뿐이므로 일반 농민들은 연년이 조도早稻를 심어 먹고, 논에 보리를 심어 어려운 생활을 하여 왔었는데, 점점 착취 수단이 늘어가는 지주들은 보리까지 타작하여 달라고 하며, 또 논에 보리를 심으면 소출이 작다고 고압적으로 보리를 심어 먹지 못하게 함으로 각 소작인들은 할 일 없이 보리를 심지 못하고 늦은 벼를 심게 되어 해마다 여름과 초가을이면 양식이 떨어져 혹 풀잎과 풀뿌리며 이자 비싼 곡식과 돈을 얻어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여 왔는데, 금년에도 여름부터 양식이 떨어져서 수천 호 농민은 풀잎과 좁쌀되씩 얻어서 연명하다가 초가을을 당하여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견딜 수 없어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보리에도 지조를 걷고 빌린곡식 이자물리고... 이모작을 하면 잡곡은 소작료를 안받는 게 일반적이다. 아주 신박한 수탈방법이다. 이러고 살면 좀 ...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해도 업보려니 해야지 별 방법이 없다. 여기에 더해 소작료 상승을 노린 소작권의 이동 등 마름들은 소작인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는다. 반면 마을에 장학금을 주고,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는 등 동리에 인심을 산 재지지주 역시 있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보도연맹으로 시작된 학살의 연쇄는 인민군 진주 이후 지역 우익인사에 대한 학살로, 철퇴시의 추가 학살로, 이후 국군 진주와 함께 이루어진 부역자에 대한 처분으로 이어진다. 인민군의 진주와 철퇴과정에서 면 전체에서 250명이 학살되고, 이후 국군의 재수복과 보복 과정에서 400명이 처형된다.
인망있는 재지지주는 좌익들의 야간 습격에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를 지켜준다. 머슴들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이 때문에 머슴에게도 토지를 주는 북한의 토지개혁을 더 지지한다. 그러나 꼭 좋은 결과가 따르지는 못했다.
천주교 조선교구는 교구 명의로 카톨릭의 세가 강하고 토지로써 투자가치가 있는 합던면의 토지를 대량으로 매수하여 소작을 주고, 이들은 신자로 개종하게 한다. 합덕 성장의 신자는 매년 증가하여 1898년 101명에서 1920년에는 427명에 달한다. 소작 조건은 균등했으나, 탈곡을 꼼꼼히 보지 않고 흉년에는 소작료를 감해주는 등, 성당의 토지 소작은 소작인들에게 그나마 나은 일자리였다. 그러나 인민군은 합덕에 진주하며 신부로부터 수녀들을 끌고가 처형하고, 이외에도 면 전체에서 36명을 처형한다. 그 근원에는 천주교 마을과 좌익 마을 간 논의 용수문제, 그리고 합덕리 천주교 소작인들로 인한 소작권 박탈의 문제들이 자리해있었다. 이후 정부가 다시 진주하고, 이 부역자들은 끌려가 처형당한다. 오늘날에도 해당 마을의 주민들은 당대의 사건들에 대해 인터뷰를 거절한다.
남씨와 오씨의 갈등 역시 전쟁 속에 참화로 나타난다. 강점기 구장으로 면서기로 일하던 남씨 그리고 남정갑은 해방 이후 오씨들에 의해 조리돌려진다. 이후 우익이 된 남정갑은 다시 오씨들에게 보복하고, 인민군이 진주하자 오씨들은 남정갑과 그 가족들을 남씨 집안의 머슴들까지 동원하여 숙청한다. 인민군이 철수하자, 경찰이 진주하고 오씨들과 머슴들이 처형된다. 처형당하지 않은 이들은 마을에서 추방된다.
합덕에서의 일은 마름-소작농, 종교와 소작인간의 관계, 강점기와 해방 전후 씨족간의 갈등의 누적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인망을 얻어 후환을 모면하지만, 다른 이들은 갈등이 극에 달해 상호간 학살로 처형으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기여는 얼마만큼일까. 저자는 남과 북의 국가가 갈등관계를 이용하여 기층까지 국가권력을 수립하였다고 진단하지만, 당대 국가의 능력이 그 정도였다면 왜 학살은 마을의 갈등양상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까.
부재의 리바이어던 상태에서 파편화된 사회의 갈등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치상황 속에서 가해와 피해의 중첩으로 나타났다는 쪽이 더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갈등 속에서 양극화된 사회의 일원들은 서로에게 주체적으로 폭력을 투사한다. 그 수위를 조절하는 것도, 보복과 보복으로 비극에 다다른 것도, 구조와 국가 이전에, 개인들의 주체적인 결정이었다.
5.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복합적 갈등구조에 더해서, 산간지역에는 입산이라는 변수가 더해진다. 한국이 다 산악지역 아니냐지만, 진짜 산간지역이 있기는 있다. 부리면의 길씨와 양씨는 마을을 좌지우지하는 설씨로 조선조로부터 이어져내려온다. 식민지시기로부터 1950년까지 양대 씨족은 길씨가 주로 면장을 하며 양씨가 참여하는 형태로 유지되다 1952년 선거에서는 양씨가 의원선거에서 역전하고, 이후 균등하게 의원을 배출한다. 길씨들은 신학문을 빨리 받아들였고, 강점기 다른 향촌사회에서 그렇듯이 공산당에 투신한다. 반면 양씨는 우익에 서게된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자가 나왔지만, 그래도 양대 씨족은 서로 촘촘히 사돈관계로 얽혀있었고, 갈등은 어느정도 봉합된다. 문제는 '빨치산'이었다.
인민군의 입산 이후 우익 청년단들은 마을을 지키고, 그 과정에서 우익들에 대한 숙청이 자행된다. 결정적인 사건은 11.2일 새벽에 일어난다. 전날 개최된 면민대회를 노리고 빨치산이 내습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이를 주최한 주역들의 집에 찾아가 보복한다. 많은 희생이 있고, 경비대가 조직되어 빨치산과의 전투에 나선다. 입산 전까지 상호간의 관계로 인해 유지되던 아슬아슬한 긴장은 길씨들의 입산과 이어진 학살로 깨져버리고, 서로 총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전후 이는 어느정도 복구되지만, 여전히 한국전쟁과 11.2사건은 이를 겪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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