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한국사

돈 오버도퍼, 로버트 칼린, <두 개의 한국>

stingraykite 2025. 10. 29. 12:21

 

8/11

휴가오면서 두권은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싸왔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20년의 위기가 숙고가 필요한 친구기도 했고. 기자출신들이 확실히 글을 잘 읽히게 쓴다. 남한도 남한이지만 우리가 북한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아는지.
미국놈들 미국했다. 38선에 대한 러스크의 회의가 읽힌다. 정말 별 생각없이 선 그어놨다 피봤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하는군. 전후 통치에 대한 준비태세에서 반도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게 드러난다.
닉슨 시기를 한번 디비파보긴 해야할 듯.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 말고도,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결정되었구나 새삼 느낀다.
김일성에 대한 단평들에서 드러나는 그의 면모들이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생각케한다. 냉전후 기록봉인 해제로 한국전쟁의 개전에서 그와 스탈린간의 이야기들이 드러나며 기존의 설들이 폐기된 거야 주지의 사실이지만, 48년 그리고 49년과 50년에 들어 변화한 스탈린의 관점에 영향을 준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박정희의 성격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그의 내성적인 면모를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눈을 마주하지 않고, 말수가 적고, 속내를 드러내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개발독재의 드라이브를 이십년간 이어나갔는가.
박정희와 장준하의 운명이 교차한다. 87년의 대사건을 두고 386분들은 자기들이 다 했다고 주장들을 많이 하시는데 결국 629를 낳은 것은 당대 모두의 공이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60-70년대부터 학교에서, 교계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싸워왔던 이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6공화국이 설 수 있었을까. 유신 이후로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있었고, 탄탄한 전국조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당대 국본 구성을 보면 흐름과 면면이 보인다.
카터 진짜 어케 당선됐냐... 닉슨이 닉슨했다. 그린스펀 책에서의 닉슨의 다혈질적이고 편집광적인 성격에 대한 평가가 워터게이트와 그 이후의 난국들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당대야 그랬다쳐도 임기 후 인터뷰에서도 스스로 이유를 밝히지못하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 닉슨때의 철군이야 중미관계 개성을 위한 거라고 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 역시 현실에 대한 고려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음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 갯수가 새삼 당대의 긴장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이거 지금은 다 뺀거 맞지...? 맞지...?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기독교, 천주교와 개신교의 개입과 주도적인 역할, 미국과의 연계는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87년의 성격을 이야기하며 이 부분을 탈각시키는 건 의도적 고립임.
카터 저거 누가 뽑았냐... 카터 시기 한미관계나 그 이전 시기의 마찰들을 보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지도 않았고 적확하지도 않았으며,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음. 모든 것을 미제의 음모로 몰아가면 설명이야 편하겠지만, 한국 체제 자체의 자율성을 기각하는 논의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별문제다.
10.26에 대해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박정희가 한국에 드리운 그림자가 어떠했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거칠게 유신 이전과 유신 이후로 나누어봐도, 유신 이후 그에 대한 지지는 경제적 상황과 억압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10.26 이후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스케치는 그런 단면을 보여준다.
12.12에 대한 미국의 대응에서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갖고있던 그립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새삼 엿볼 수 있다. 입장에 따른 어느정도의 윤색을 감안한다 해도, 그것이 어떤 마스터마인드에 의한 철두철미한 조종은 아니었다.
전두환 그리고 광주. 미국이 이 사건에 얼마나 간여했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오늘날에도 논쟁의 영역이다. 당대 신군부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미국의 개입을 과장했고, 이는 그대로 미국의 개입을 중심으로 강한 반미감정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의 수동적인 태도 또한 어느정도 사실이었고. 미국이라는 우상에 대한 양방의 투사는 오늘날까지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필자의 입장을 덜어내고 보더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내재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문제들을 과잉으로 전이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노태우와 전두환에 대한 단평. 감정을 덜어내고 건조하게 본다면 이런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유신과 12.12를 다시 돌아보면 김대중이라는 사람과 그가 상징했던 가치들이 공포로 작용한 측면이 없지않다. 왜 박이 일본에서 그정도의 충돌을 감수하면서라도 김을 보내버리려고 했는지, 전이 이 지랄을 하면서까지 직선제만은 수용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대통령이 되고 나서의 김대중만을 기억하는 입장에서 깊이있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오히려 삼당합당으로까지 이어지는 김대중에 대한 필사적인 부인이 역설적으로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낳은 게 아닌가.
카터가 가니 레이건이 오는데 이친구도 ... 미국 대통령이 되려면 사람이 광기가 있어야 하는 듯. 신변을 두고 한 거래를 통해 전두환과의 대담으로 그에게 대관식을 내려주는 광경이 참 복잡한 심경이 들게 한다. 223p의 발언을 보니 새삼 레이건이라는 인물의 단면이 아주 잘 드러난다. 아무리 과거의 맥락에서 보려고 해도 이건 당대 기준으로도 말도 안되는 미친소리인 듯...
전두환이 단임의 결심을 했다는 건 별로 의미없는 기술이다. 결국 87년의 행위가 그의 의도를 증명한다. 의원내각제에 대한 언급이나 6.2일의 발표는 그의 퇴임을 기다리던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전국에 걸친 항쟁은 당대의 분위기와 맞물려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내었고, 마침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손발이 묶인 레이건 행정부는 비토를 보냈다.
80년대 내내 일어난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조류 변화와 국무부의 입장표명은 이러한 흐름에 유의미한 탄력을 주었다. 미국 시민사회에서 일어난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지지와 후원 역시 유의미한 팩터로 작용한다.
이후 직선제 국면을 맞이한 세 후보의 인상평이 독특하다. 노태우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준비된 비전을, 김영삼에 대해서는 확고한 카리스마와 투사로써의 이미지, 하지만 위정자로써는 부족한 일면들을, 김대중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비전과 그에 대한 기득권과 비호남인들의 반발을 조명한다.
특히 김대중을 서술하며 71년 선거에서의 유의미한 득표와 그의 우세가 불러일으킨 기득권, 특히 군부의 공포를 상세히 묘사한다. 동시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는 점에서 당대 기준으로 그의 준비성을 짚는다.
양김의 단일화 무산은 결국 노태우의 집권을 불러오고 말았다. 민주화 하면 뭐하나 단일화 하나 합의가 안되는데. 36%를 탓해봐야 의미없는 일이고 단일화가 무산된 그 시점에서 역사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북방정책의 장이 열린다. 앞 단락에서도 75년부터 진행된 소련의 태도변화와 한국과의 접촉들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시대에 접어들어 하나 둘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헝가리의 접촉과 88년의 대표단 참가에 이어 한-소 수교를 통해 북방외교의 한 축이 완성된다. 오늘날 돌아보면 고르바초프가 한국에 대해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북한의 경제에 목줄이 죄인다. 소련과의 상호호혜에 의존하던 북한의 에너지 공급은 한-소 수교와 함께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에너지가 근대국가에서 하는 역할을 생각해봤을 때 이 시점에서 고난의 행군은 예정되어 있었고, 그 방아쇠는 우리 손에 들려있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고립을 선택한 건 북한이지만 그 결과 앞에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지.
대중수교를 통해 북방전략의 마지막 단추가 닫힌다. 대만이 한국에 대해 가지는 감정의 본위는 단순히 마지막까지 수교관계를 유지해주었음에도 위계의 역전을 목도한 것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대만의 국가인정을 위한 마지막 포석을 덮어버린 데 대한 분노일 것이다. 한국은 이해에 따라 선택을 내렸고, 그에 대한 반작용도 마땅히 감내할 부분이다.
핵에 대한 북한의 시도는 매우 이른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중국과 다른 핵 보유국들에 대한 의사타진을 거쳐, 적어도 79년부터는 독자적인 핵 개발에 대한 비전을 갖고 한단계씩 차근차근 핵 개발에 착수해나간다. 경수로에서부터 재처리 시설까지, 이 와중에 핵확산 금지조약에 가입해가며 핵무력 향상에 사력을 다한다. 부시 행정부까지만해도 100기 가량 존재하던 남한 내의 미국 핵탄두는 92년을 기점으로 비핵화를 위한 사전포석에 따라 반도를 떠난다.
북한놈들 일처리하는 방식이 익숙한 조선식 후루꾸인데... 결국 핵사찰에서 후루꾸치다 걸려서 사단나고 NPT로 지랄나고 그 상황에서 김영삼은 곤조부리고 관료들의 에스프리는 이 시점에서 균열이 난다. 92년 안기부가 찔렀을 때 부터 이미 금은 가있었군. 민선 정치인으로써의 정무적 판단과 국익과의 균형이라는 밸런스가 참 어려운 과제인 듯.
북한이라는 국가가 우리가 익숙하게 가정하고 들어가는 근대 국가와는 많이 다름. 김일성에게 들어가는 보고자료의 윤색에 크게 분노한 김일성이 말년에 경제를 다시 챙기려다 비명휭사를 하는 것만 봐도, 수령중심 체제에서 권력의 획일화에 따른 관료조직의 불투명성이 문제를 악화시키고 결국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 와중에 각급 조직이 일을 잘 하냐 하면... 일본인 납북 문제에서의 북한의 대응은 성의가 없는 게 아니라 원래 북한의 일처리가 그런 것이다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쭉 읽다보니 느끼는건데 주한미군의 존재가 반드시 미국에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아이디어는 닉슨부터 카터까지 반복적으로 제기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기의 입지적 중요성이나 북한에의 위협을 근거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감제고지와 병력 투사의 발판으로써의 남한이라는 입지가 이제 기술발전과 교리변화에 따라 가치가 낮아진다면 어떨까.
90년대 당시에도 주한미군 전력유지를 위해 들어가는 예산투입을 생각하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경우 얻게되는 예산상의 이익은 적지 않았다. 지금 행정부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감축이 안되리라 보장할 수 없음.
94년 핵문제가 불거지며 전선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국애서는 개전여론이 기세를 올리고, 러시아와 중국은 개입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도 북한에 압박을 가한다. 극적인 상황에서 김일성과 카터는 회담을 가지고, 전쟁의 위기는 일단락된다. 하지만 김영삼의 묘한 직감처럼 김일성은 곧 사망하고, 다시 핵 협상은 안개속으로 들어간다.
북한의 핵에 대한 남한 정부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통일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두가지 방향으로 투사되었다. 반공주의를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취급하는 건 단견이다. 한국전쟁의 상흔은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에게 큰 각인으로 남아있었고, 핵 협상 과정에서 남한의 배제는 그만큼 강한 배신감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딱히 일관된 전략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다. 붕괴론을 채택했으면 거기에 발맞춰 적대감을 불식시키고 접변을 늘리든지, 정권이 지속될 것이라고 봤으면 핵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 협조하든지 일관적인 전략설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김정일과 제네바 합의. 김정일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북한은 사실상 70년대 후반, 80년대부터 그의 통치하에 있었다. 엽색행각이나 파티정치에 관한 내용들은 이런저런 증언들로 많이 풀렸지만, 지도자로써의 그는 어떤 스타일의 사람이었을까. 특권층으로 자라고 카리스마적이지는 않지만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면모는 강한 권력욕을 보여준다. 문서정치로 보여지는 면은 은둔자라는 칭호에 일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제네바 합의 이후로 대홍수 시기를 통해 북한의 기아실태가 전세계에 드러난다. 북한 경제는 92년 이후 외부 세계와의 무역이 단절되고 중국 역시 자국의 식량부족 사태로 인해 식량에 대해 경화 지불을 요구하며 지속적인 식량부족 사태에 직면해있었다. 200만톤의 공급부족은 지금 한국 소비량을 생각해봐도 택도 없는 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포항에 입항할 때 인공기를 걸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체제는 누구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김영삼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일견 이해가 간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진다. 전이 1조 노가 5천억... 액수도 액수지만 당대 GDP를 생각해보면 정말 천문학적 액수다. GDP의 0.1%가 대통령 지갑에 꽂히는 체제를 한국 사람들이 아 네 그러십시오 해야할까.
이 국면에서 잠수함 간첩사건이 발생한다. 협상국면에서 식량원조를 받아야하는 상횡에서도 잠수함을 파견하고 최종적으로 사상자를 내고야 마는 이런 류의 판단 뒤에 어떤 일들이 숨어있는지. 북한은 정말 누가 다스리는가.
경제난에 대한 김정일의 태도나, 권력의 군부에의 쏠림은 북한이 어떤 체제인지 여실하게 보여준다. 남한은 IMF의 파고를 맞는 와중 김대중이 당선되고, 북한과 화해 무드로 들어간다. 정주영의 방북이 진행되고, 금강산 관광의 대가로 현금이 건네진다.
다단로켓의 발사가 일본에 끼친 충격은 엄청났다. 94년의 위기와 대포동의 발사가 오늘날 일본의 재무장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보인다. 미국과의 미사일협정과 핵시찰의 대가로 미국의 식량이 북한으로 넘어가지만, 정권이 변경되며 다시 합의는 안개속으로 빠져든다.
결국 이 문제는 우선 관계당사자들이 너무 많고, 개별 국가의 정권이 외교를 통해 유의미한 현상변경을 이루기 전에 정권들이 교체되고 내부 정국이 불안해지면서 업앤다운을 반복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다자회담이라는 틀 자체에도 문제가 있고, 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국가의 뼈대에도 그 원인이 있음.
제네바 합의의 공은 부시 행정부로 넘어가고, 북일간의 접촉이 시작된다. 김대중과 부시의 정상회담은 파국을 맞고 북미관계는 급격히 냉각된다. 볼튼도 참 대책이 없다. 악의 축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북-일 접촉에 관한 이야기. 납북자문제에 대한 논의의 역사는 길다. 접촉 자체는 여러 선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낼만한 지점이 되면 꼭 사건사고가 생긴다.
96년의 잠수함 침투나 연평해전이나... 결정적 국면에 꼭 한건씩 도발이 간행된다. 표면적으로는 그것이 지도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감행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고 아니라면 아닌대로 섬칫하다.
미국 친구들 감당못할 전선을 열어젖히는대 대책은 없다. 그 와중에 노무현이 당선되고 핵 농축은 차곡차곡 진행된다. 제네바 합의의 파기와 중유 지원 중단이 핵 개발을 정말로 가속화했을까. 부시-노무현 관계에 대한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핵실험이 시작된다. 이 핵실험으로 지난 10년간의 정책은 최종적 파국을 맞이했다. 이후에 일어난 정권의 교체와 금강산 사건, 그리고 남북관계의 경색은 핵실험의 그날 이미 예비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명박 정부의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이나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을 핵실험과 이후의 대결국면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북-중간 교류가 활성화된다. 김정일의 잦은 중국 방문과 원자바오의 중국 방문, 그리고 나진•선봉지대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가 진행된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차단기조도 북한의 붕괴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김정일의 죽음과 김정은으로의 계승, 북한의 위성?발사와 후기로 책은 막을 내린다. 장주기에 걸쳐 한국과 북한의 관계를 주변 국가들의 태도 변화에 따라 돌아볼 수 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입장변화나 러시아와의 수교 모두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입장수정과 접촉들이 북방정책의 틀을 만들어냈지만, 이후 한국과 미국, 각국의 입장과 사정이 엇갈리며 대전략의 부재하에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일관하게 되었다.
햇볕정책이 나름 긴 호흡의 전략이라면 전략이었겠지만 그걸 끝까지 추구하기에는 시기도 상황도 받쳐주지 못했다. 핵실험으로 양국관계는 결정적으로 파국에 다다랐고, 이는 이후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다자간 협상이라는 틀 자체가 갖는 한계와 그 속에서 주체들의 입장이 서로 엇갈리는 와중에 누구도 그립을 쥐고 판을 주도하지 못했고,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끌려온 결과 오늘날에 이르렀다. 북한이 자체 핵무력을 완성하고 북러관계가 가까워지는 지금, 미국은 주한미국의 규모 축소를 고려하고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답은 어디를 향해야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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