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중국사

<파벌과 투쟁:1983~1987> 조영남

stingraykite 2026. 3. 12. 19:12

 
화는 내려갔지만 덩과 천이, 덩과 후야오방, 자오쯔양이 경제의 균형, 개혁을 두고, 정치의 보수, 개혁을 두고 진동한다. 여전히 정치권력은 공식정치와 원로정치의 이중구조에서 진동하고, 신세대의 약진은 원로들에 가로막힌다. 경제는 발전하지만 문제는 다발하고, 사람들의 열망은 주기를 갖고 진동하며 지속적으로 체제에 부딪혀나간다. 개혁과 개방이 삶의 자유로, 그리고 정치의 자유로 나아간다. 그래서, 파벌과 투쟁이다.
1장. 파벌의 분화와 좌우 파동
개혁개방기 파벌은 정책에 대한 입장에 따라 유동적으로 나타났다. 경제개혁에 대한 입장에 따라 보수와 개혁이 나뉘고, 정치개혁에 대한 입장에 따라 다시 나뉜다. 이들은 반드시 적대적 관계만도 아니었고,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동조에 따라 상호교차한다. 덩샤오핑과 천윈의 관계가 그 예이다. 양자는 경제개혁의 강도와 방향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정치에 있어서 당의 영도를 수호해야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1980년 무렵 이는 범시파(마오사랑단), 환원파(계획경제), 개혁파(성장중심), 급진민주파(자유주의자)로 나뉜다. 마지막 부류들은 당연히 당내진입 안된다.
천윈의 경제정책은 낙후한 중국의 현실을 토대로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시장조절을 병행하며 경제특구 역시 그 규모를 전체 경제에 맞추어 유지해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여 재정균형을 갖추고, 외자의 도입에 신중해야한다는 것이다. 요는 시장의 혼돈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가치이론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다. 노자간 균형에서 자본으로의 편향을 경계하고, 시장의 혼돈이 당 기구의 틀 내에서 조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개방과 외자유입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되, 당이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균형을 맞춰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의 핵심이다. 그의 입장은 아래의 말로 대표된다.
“돌을 더듬으며 강을 건넌다(摸着石頭過河).”
반면 덩샤오핑의 입장은 고속성장론과 선부론에 기반한다. 후야오방 역시 이 입장을 지지한다. 평균주의를 넘어서, 격차를 허용하더라도 성장을 가속하여 반봉건에서 탈출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그는 성장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시장의 혼돈은 제어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수용하는 것이 성장의 단초이다. 혼돈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것이 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탈피하는 것이 반봉건사회로부터의 해방이고, 이를 위해서는 전격적인 속도전이 요구된다.
결국 사회주의는 유물론이고, 물적 토대의 변화발전과 상부구조와의 역동이다. 물적 토대 그 자체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 따라서 그는 말한다.
“혁명은 생산력 해방이고, 개혁도 생산력 해방이다.” 따라서 혁명과 개혁을 위해서는 생산력 해방에 매진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 해방이고 생산력 발전이며, 착취의 소멸이고 양극분화의 해소이며, 최종적으로 공동부유(共同富裕)”이다.
생산력 해방이 성장의 본질이다. 그리고 성장 없이 물적 토대의 진화발전도 없다. 공동부유는 지속가능한 성장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성장은 사회 각 부의 유기적 발전과 생산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덩도 정치개혁이 필요함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와 천윈은 이 부분에서 입장이 일치한다. 이는 경제개혁에 복무服务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4항 기본원칙을 견지해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핵심은, 당의 영도이다. 후차오무와 덩리췬이 그 기수로 나서고, 덩과 원로들은 이들을 지지하며 정치개혁의 완급을 조절한다.
후야오방과 지식인들은 현행 당의 영도 체제 내에서 민주적 개혁을 추진한다. 완리와 시중쉰, 자오쯔양 역시 이에 공감한다. 사상해방이 필요하고, 이들을 소통과 인도를 통해 당의 영도 내에 머물게해야 한다는 점에서, 후야오방의 지향은 분명 민주적이다. 그래서 1987년 학생들의 대중운동에 대해 '냉정한 처리'와 '소통과 인도'를 주장하고, 원로들에 의해 낙마한다. 자오쯔양 역시 이 과정에서 체제 내 개혁파의 입장에 공감하고, 1987년 총서기가 된 후 적극적인 정치개혁, 학생들에 대한 사상의 자유를 주장한다. 그래서 천안문 때 마찬가지로 낙마한다. 낙마한 이후에도 그의 주장은 멈추지 않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으로 이어진다.
덩샤오핑의 정치개혁에 대한 보수적인 입장은 사회주의 체제, 프롤레탈리아 독재의 우월성, 당이 결심하면 인민은 한다는 것이 가져오는 장점과, 당대 중국 현실, 많은 인구와 전반적인 낙후, 이를 층층이 구속하는 인치의 문제에 기반한다. 정치개혁은 언젠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당의 영도가 굳건해야 물적 토대의 성장도, 안정적인 사회적 변화도 담보할 수 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전략이 있다면 당의 영도 하의 급속한 경제발전이었다.
정치개혁에서의 좌우파동은 짝수년, 홀수년을 주기로 발흥한다. 이는 당 내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에 의한 양상이면서, 경제적 상황변화의 함수이기도 하다. 경제성장은 인플래이션으로, 더 많은 기회로 이어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때로는 불만으로, 그리고 요구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당은 이에 대해 영도의 관철로, 폭력과 억압으로 화답하다. 그 과정이 일면적이지만은 않았으나, 최종적인 결과는 참혹했다. 이와 같은 요동은 1992년 원로정치와 공식정치라는 긴장이 해소되고 공식적으로 정치가 제도화되며 집단지도체제가 완성되어 정치질서가 자리잡음으로써 해갈된다. 인민의 열망이 어찌 사그라들었겠는가. 체제가 공고해졌던 것이다.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확정되며 당 내 노선이 통일된 것 역시 이에 영향을 미쳤다.
1부. 후야오방과 그 적들
2장. 젊은 간부 육성과 공산당 정리(1982~1983년)
간부선발의 기준으로 4화가 제시된다. 연소화, 지식화, 전문화, 혁명화이다. 연소화는 40~50대의 나이의 젊은 간부들이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배석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왜 이것이 필요했는가. 천윈의 한탄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 [공산당] 성(省) 위원회, 지구(地) 위원회의 주요 책임자 동지 다수는 60세 이상의 간부다. 그중 적지 않은 수가 70세 이상의 간부다. 정부 각 부(部)와 위원회의 영도 동지도 대체로 같다. (……)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없고, 항상 병을 달고 일을 하는데, 병이 나서 자주 입원하곤 한다.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나고, 그래서 죽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추도회를 연다는 소식이 매일 들린다."
당성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없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당성이 없다. 유능한 젊은 간부의 육성은 그 자체로 당의 영도에 필수적이다. 1965년 주요 지도자 평균 연령은 55세였지만, 1980년 이는 63세로 8세 증가한다. 이중 65세 이상자는 40%였다. 삼종인 문제 역시 빌목을 잡는다. 범시파 대 실천파 논쟁으로 주도권을 쥐었으나, 차기세대가 범시파가 된다면 개혁개방뿐만 아니라 당의 노선이 다시 과거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다. 천윈은 말한다.
"1975년에 [내가] 중앙 업무를 주재할 때, [4인방의 한 명인] 왕훙원(王洪文)이 ‘10년 후에 보자.’고 말했다. 현재도 10년 후에 다시 보자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린뱌오와 4인방의 영향을 낮게 평가할 수 없고, 너무 천진난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길게 생각해야 한다. (……) 조직노선 문제의 해결은 최대의 문제이고, 최고로 어렵고도 최고로 절실한 문제인데, [그것은] 후계자를 잘 선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직에 연령제와 임기제가 도입된다. 5년간으로 승진연한이 정해지고, 같은 직위에 연임할 수 없다. 즉 최대 재임기간은 10년이다. 이후로는 계급정년이다. 1979년 하반기 간부고찰조는 전국에서 165명의 간부를 선발했는데 이중 대졸자는 31명으로 18%였다. 대학이 다 문닫았으니 별수있나. 그래서 1983년이 되어 '제3제대'가 될 동량들을 선발한다. 1985년의 4중전과 5중전은 이들 후속세대가 중앙위원회로 진입하는 계기가 된다. 64명의 '제3제대'가 선출되는데, 이들의 평균연령은 50세 전후로 4분의 3이상이 대졸자였다. 후진타오, 우방궈, 우관정 등이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후보위원으로 선출된다. 중앙위원회의 연소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간부관리원칙 역시 간부직무명칭표의 관리가 아래이급관리에서 아래 일급 관리, 양급고찰로 변경된다. 이전에선 성급, 지급까지 중앙에서 관리했다면, 이제는 지급은 보고만 받고 성급에 대해서만 권한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분권화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당 중앙의 역량을 집중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홍2대 문제가 발생한다. 어쨌든 나이 맞으면 끼워넣는다. '인치人治'의 문제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술관료화가 진행되고, 대졸자 위주로 당의 구조가 재편성된다. 전문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12차 당대회에서는 '정당(整堂)운동 역시 진행된다. 삼종인에 대한 청산, 즉 간부에 대한 혁명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삼종인은 4인방 사상을 추종하는(문혁주의자) 사람, 파벌 사상이 엄중한 사람(개혁개방싫어맨), 긱종 파괴 활동을 일삼았던 사람(홍위병)을 가리킨다. 덩샤오핑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시험을 보고, 자아비판을 작성하게 하고, 민주생활회를 진행하며 당성을 가다듬는다. 못 가다듬으면? 일단 영도간부에서는 탈락한다.
1단계에서는 당 중앙과 당정간부를 대상으로, 2단계에서는 지급, 현급을 대상으로, 3단계에서는 기층을 대상으로 운동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3만 3896명이 제명되고, 9만 69명이 등록거부되고, 14만 5456명은 등록유보된다. 18만 4071명이 징계를 받으며, 현급이상 영도간부의 50%가 물갈이된다. 거의 당을 새로 쓰는 수준이다. 이는 이후 나오는 당과 정부 내 인력감축과도 연계된다. 또한 이는 이후 진행되는 일련의 정풍운동의 전형을 제시한다. 중앙당으로부터 층층이 내려가며 사상노선을 재수립하고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제도화된 과정으로 이는 자리잡는다.
천윈은 말한다.
"집정당(执政堂)의 당풍(堂风) 문제는 당의 생사존망(生死存亡)과 관련된 문제다."
곳간에 쥐가 드나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혁개방으로 나라에 부가 들어오니 이에 따라 간부들의 부패 역시 심화되고,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프롤레탈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전위당에 있다. 당이 권력을 쥐고있는 한, 당이 성장의 지대수익으로 연명하는 한 부패의 문제는 곧 당의 생존의 문제이다. 쥐새끼들은 여기에서 그 비율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당 자체가 지대추구자라는 점이다. 당의 통치자금이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는 것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 따라서 부패에 대한 당의 단속 역시 무한한 가지치기이다. 관리를 할 수는 있어도, 근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3장. 인도주의와 '정신오염 제거' (1981~1984년)
성장은 다양한 사상적 확장을, 사상해방을 요구한다. 지난 시대에 대한 회한 역시 그 공간에 몰아친다. '상흔문학'으로, '인민성'과 '당성'간의 논쟁으로 이는 나아간다. 범시파와 실천파의 논쟁은 실천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으나, 이제는 정치개혁을 두고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진행된다. 물적 토대는 꾸준히 성장하지만, 상부구조 역시 흐름에 맞춰 진동한다. 때론 더 강하게.
1980년 말 <짝사랑>이라는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고, 이는 상영 금지 처분을 받는다. 그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화가인 링천광(淩晨光)은 젊은 시절을 어렵게 보낸다. 그는 ‘반(反)기아, 반(反)내전, 반(反)박해’ 운동을 벌인 혐의로 국민당 특수경찰(特務)에 체포되었다가 겨우 외국으로 도망친다. 링천광은 미국에서 화가로 크게 성공했지만 조국이 그리워 귀국한다. 그러나 문혁을 맞이하여 큰 고통을 당한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조국을 사랑한다. 그래서 딸이 남자 친구와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할 때 만류한다. 이때 딸이 반문한다. “당신은 이 나라를 정말로, 정말로 사랑했는데, 이 나라는 당신을 사랑합니까?” 링천광은 대답이 없다. 이후 링은 다시 도망을 쳐서 야인으로 생활한다.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눈밭 위에 온 힘을 다해 크게 쓴다. “하나의 커다란 의문부호.”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시기적으로 예민한 시기인 점도 있지만, 매체의 특성 역시 영향을 미쳤다. 점통적으로 공산당은 더 대중밀착적인 매체를 강하게 통제한다. 소설 출판 자체는 가능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영화로 제작되어서 상영금지 처분을 당한 것도 없진 않을듯. 덩은 대체 작가놈 당성 어디갔냐며 선전부를 질책한다.
반면 1981년 <인민일보>에서는 편집장 후지웨이가 '인민성'과 '당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민성과 당성의 일치'라는 명제는 당 좌파대왕 후차오무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럴만하다. 당의 입장대로라면 전위당이 인민을 영도해야 하고, 따라서 당성은 인민성과 분리되는 대상이다. 소통과 인도, 또는 영도의 관철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견인될 뿐이다.
1983년 왕러수이는 <문회보>에 <인도주의를 위한 변론>을 싣는다. 이는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법치와 인신의 자유가 사회주의에서도 필요하며, 인간으로써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을 역설한다. 여기에서 공산당 선언의 문장을 치환하여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하나의 유령이 중국 대지를 배회하고 있다. (……)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사람이다.
이는 지난 역사,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회한이자, 정치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인신의 자유와 법치에 대한 요구, 사회주의 하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소외에 대한 비판은 이후 중국 정치개혁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제기되었어야만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후차오무와 덩리췬으로 대표되는 당 내 보수파는 이에 대해 이론적으로 반박하며 <인민일보>를 접수하고 공세에 나선다. '정신오염 제거'라는 슬로건으로 이들은 저우양과 관련인물들에 대한 압박에 나서고, 덩은 개혁개방에 대한 영향을 우려하며 이를 중재한다.
정신오염 제거는 후야오방을 지지하던 지식인들, 저우양, 후지웨이, 왕뤄수이 등을 당교에서, 인민일보에서 몰아내며 충격을 준다. 후야오방과 덩샤오핑 간의 관계 역시 멀어진다. 중앙당교의 인사는 크게 변동되고, 보수파 원로 왕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교육은 이미 개혁개방이 진전되고 있는 와중에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시장경제 하는 사람들에게 계획경제 강의를 하고 있으니 불만이 안나올 수 없다.
'진리기준논쟁'의 동지들을 떠나보낸 후야오방에게 재차 시련이 닥친다. 덩샤오핑과 교감을 나누고 "실제에서 출발하여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개혁하고, 굳건하고 질서있게 개혁하자"는 논지의 연설문을 발표했으나, 이내 천윈의 강한 반대에 부딪친다. 천윈은 직접 그를 상대하며 강하게 비판한다.
예를 들어 “후야오방이 전에 재정 적자는 가짜라고 말했다는데, 국가의 재정 적자는 확실하고 가짜가 아니다, 야오방!” 이런 식이었다. 또 천윈은 화가 나서 말했다. “1차 5개년 계획도 바꾸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12차 당대회의 결의도 바꾸어야 하나? 왜냐하면 12차 당대회의 결의 중에 조정·개혁·충실·제고의 방침이 있는데, 야오방!”
말 그대로 조인트를 깐다. 원로정치와 공식정치라는 이중구조의 문제 외에도, 원로정치 내에서의 갈등이 총서기에게 전가된다. 당의 원로들이 총서기를 시다바리 취급하는데 진정한 영도의 권한은 누구에게 있나. 보수파는 재차 후야오방의 지위를 흔들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제지한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사이에도 경제에 관한 노선차이가 있었다. 덩은 이들을 불러 중재에 나선다.
이중구조 내에서 진리기준논쟁을 같이 준비한 당교의 지지자들과 언론, 지식인들을 보수파의 공세에 하나씩 떠나보내며 원로들의 갈등 속애 소모되는 과정은 후야오방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범시파와 실천파의 갈등에서 그는 분명히 분명한 미래를 보여주었고, 그와 함께한 이들 역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세상은 쉬이 바뀌지 않고, 반동의 물결은 거셌다. 덩샤오핑 역시 그와 갈등을 빚으며 사이는 조금씩 벌어지고, 원로들의 질책은 그의 권한을 깎아내린다. 영도할 수 없는 총서기는 총서기가 아니다. 원로들의 비서일 뿐이다. 이중구조의 모순이 그를 내리누른다.
4장. 정치개혁 논쟁과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
(1985~1986년)
개혁개방의 성과는 특구의 확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개혁개방 초년, 문제는 산적해있다. 계획경제의 잔재는 팽창하는 경제에 비례한 국가기관의 팽창으로, 도장의 연쇄로 이어진다. 공장설립 필요도장 200개! 이난리에서 사업을 개척한 사람들의 역량이 대단하다. 일단 세워놓고 도장찍었나...덩샤오핑은 정치개혁이 경제개혁에 복무하길 바랬다. 그리고 현장의 실태를 보면, 이는 필요한 일이었다. 바야흐로 물적 토대가 성장하고 이로부터 국가의 제도에 모순이 쌓여가는데, 이에 대한 개선 없이 성장의 지속도 불가능하다. 그가 후와 자오에게 가졌던 불만의 일부는 여기에도 기인한다. 정말 필요하고 해야할 일은 정치개혁을 경제개혁에 복무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서, 그는 당에 의한 영도, 신속한 정책판단과 집행을 핵심적 역량으로 본다. 그는 1986년 6월 28일 정치국 회의에서 말한다.
"정치체제 개혁은 경제체제 개혁과 마땅히 상호 의존하고 상호 어우러져야 한다. 단지 경제체제 개혁만 하고 정치체제 개혁을 하지 않으면 경제체제 개혁은 제대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人)의 장애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너는 권력의 하방(放權)을 제창하는데 저 사람은 권력을 회수(收權)한다면, 네게는 어떤 방법이 있겠느냐? 이 각도에서 말하면, 우리의 모든 개혁이 성공하느냐 여부는 최종적으로 정치체제 개혁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은 소통의 문제요, 당성의 문제다. 당정분리와 권력 하방이 정치개혁의 주요 의제로 논의된다.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통치의 제도화, 법제화가 필수적이다. 인치를 배제하고 법치로 나아가는 것이 예측가능성을 높여주고, 그 과정에서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 지대수익의 관리 면에서도 용이하고,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덩의 개혁 기저의 심상은 반봉건적인, 인치로 구성된, 문해율이 낮고 빈곤이 만연한 중국 사회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인들과 덩의 인식에 균열이 발생한다. 그는 동아시아의 4마리 용,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사례를 참조한다. 그리고 후야오방은 지식인 방침을 전달하여 지식인들을 고무시킨다. 그는 사상해방이야말로 정치개혁의 핵심요소임을 피력한다. 맞는 말이다. 큰 줄기에서는. 하지만 항상 문제는 타임 프레임이다.
"사상 문제는 어찌 되었건 조직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방침을 견지해야 하고, 설득하고 인도해야 하며, 모두 진정으로 마음속의 말을 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또한 의론(議論)을 듣자마자, 특히 민감한 말을 듣자마자 바로 조사하는, 즉 입안(立案)하고 추궁하고 타격하고 억누르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와 같은 악랄한 작풍을 다시 해서는 안 된다."
상흔문학의 발달이나 인민성과 당성의 문제에서 당대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문혁의 심상은 당 내 개혁파들에게서도 공감을 얻는다. 후의 이 발언은 그 접촉을 잘 드러내준다. 문제는 민주, 사상해방이 어느 시점에 이루어져야하느냐는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대학생 입학정원이 200만이었다. 그것도 급격하게 세배 불어난 정원이었다. 당연히 교육의 질 역시 열악했고.
요는 신 권위주의다. 덩샤오핑도 드러내놓고는 말을 못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모델이 신권위주의임을 명확히 한다.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는 총류중산층의 건설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산업발전을 통해 총류 중산층을 구축해야만 한다고. 그 방법론으로써 당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필요하다고.
결국 문제는 무엇이냐, 인신의 자유, 정치적 의견수렴, 당의 영도에 대응하는 사회를 통한 견제기제의 구축이다. 덩은 그것이 정치적 의사결정의 효율을 저하한다고 봤지만, 지식인들은 문혁 이후 다시 국가의 역진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가 보장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요는 기본권이다. 소유권, 인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견제는 기능할 수 없다. 특히 중국처럼 이 두가지가 적극적으로 유린된 나라에서는. 지식인들의 외침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당대 중국의 경제적 환경을 돌이켜보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나 돌아보게 된다. 과연 당은 이들에 대해 경제건설의 필요성과 성과를 토대로 소통과 인도를 통해 견인할 수 있었나? 그것이 안되었던 과정이 1980년대의 좌우 진동이다. 정신문명 건설을 두고 당 내 개혁파와 보수파의 입장이 충돌하고, 덩샤오핑은 결론을 내린다. 후야오방의 정신문명 건설 결의 초안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첫째,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경제개혁을 끊임없이 진행하고, 정치개혁을 굳건히 추진하며, 정신문명 건설을 굳건히 강화한다. 둘째, 대외개방은 동요할 수 없는 국가 정책으로 물질문명 건설뿐 아니라 정신문명 건설에도 적용된다. 셋째, 반드시 크게 결심하고 용기를 내어 당대 자본주의 선진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선진적인 과학기술, 보편적인 경제 관리 경험과 그 밖에 유익한 문화를 배우고 실천 속에서 검증하고 발전시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매하게 되고 현대화를 실현할 수 없다. 넷째, 민주·자유·평등·박애의 관념은 인류 정신의 일차적인 대(大)해방이다.
당연히 당내 보수파는 반발하고, 덩은 노좌파의 입장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자유화 그 자체는 부르주아지(자산계급)의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자유화나 사회주의 자유화란 없다. 자유화 그 자체는 우리의 현행 정책과 현행 제도의 대항이다. 반대 혹은 수정이라고 해도 좋다. 실제 상황을 보면, 자유화를 하는 것은 우리를 자본주의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라는 표현법(提法)을 쓴다. 여기서 무엇을 쓰고 저기서 무엇을 쓰건 중요하지 않고, 현실 정치는 우리가 「결의」에 이것[즉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을 써 넣을 것을 요구한다. 내가 쓸 것을 주장한다. [내가] 보건대, 자유화 반대는 이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10년, 20년은 더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후야오방에 대한 실망이라는 것이 어떠한 결이었는지, 그의 입장에 서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결국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은 비례하여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관점에서는 후야오방이 옳았다. 다만, 시기의 문제가 있었을 뿐이다. 덩의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단지 미래에 대한 지침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안에는, 과거에 대한 회한 역시 있지 않았을까.
5장. 학생운동과 후야오방의 퇴진 (1986~1987년)
1986년 안휘성 허페이(합비)시의 과기대로부터 불이 붙는다. 지방인대 선거 과정의 정당성에 불만을 갖고 시작된 시위는 "진정한 민주를 위해 투쟁하자!"는 요구로 번지고, 과기대를 넘어 허페이 공업대학, 안후이대학 등에서 수천명규모로 퍼져나간다. 그들의 슬로건은 아래와 같다.
“내려 주는 민주는 필요 없다!” “진정한 민주는 우리의 투쟁으로!” “봉건 독재 타도!” “관료주의 타도!” “쑨중산(孫中山: 쑨원) 만세!” “민주, 민권, 민생을 원한다!”
학생시위는 상하이로도 번져나간다. 퉁지대학의 자보는 묻는다. 과대는 행동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학생시위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장쩌민은 대담을 통해 이를 무마시킨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후 일어난 가두시위에서 학생들을 '무마'시켜서 '버스'로 귀가 시킨다. 어떤 버스였을까. 12월 22일과 23일 퉁지대학, 자오퉁대학, 푸단대학 등 20개 대학에서 가두시위가 전개된다. 그들은 외친다.
“우리의 인권을 돌려달라!” “우리의 자유를 돌려달라!” “구타한 놈을 엄벌하라!” “파시스트를 타도하자!” “체포 학생을 석방하라!”
상하이 외에도 우한, 항저우, 난징, 청두, 시안, 텐진, 창사등의 대도시에서 4항 기본원칙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난다. 그리고, 베이징에서도 시위가 일어난다. 결국은 덩샤오핑이 나서게 된다. 그의 말은, 혁명원로들의 정세인식과 판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본인들이 대중시위로부터 무력투쟁으로 국가 한번 엎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시위의 슬로건과 이 운동의 폭발성, 이를 가만 내버려뒀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인지가 기민하다. 덩샤오핑은 1986년 12월 30일 강경대응을 지시하며 말한다.
"학생 시위는 큰일이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문제의 성질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무릇 [학생들이] 톈안먼[광장]을 뚫고 들어올 때는 굳건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베이징시가 이미 시위 규정을 공포했는데, 그것은 법률 성질이고 반드시 굳건히 집행해야 하고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우리가 이전의 학생 소요[1985년 9~10월 반일 시위를 말함.]에서는 주로 소통과 인도(疏導)의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필요한 조치였다. 소통과 인도는 법률 수단의 운용도 포함한다. 만약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형법에 저촉되면 반드시 굳건히 처리해야 한다. 무릇 일이 벌어지는 곳을 보면, 그곳의 지도자는 깃발이 선명하지 못하고 태도가 굳건하지 못하다. 이것은 한두 곳의 문제가 아니며, 1~2년의 문제도 아니다. 몇 년 동안 부르주아 자유화 사조 반대에서 깃발이 선명하지도, 태도가 굳건하지도 못한 결과다. 깃발 선명하게 4항 기본원칙을 견지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부르주아 자유화를 방임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덩샤오핑 선집』에는 없지만 원래 했던 말) [1980년대에] 폴란드 지도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태도를 굳건히 하여 노동연대(Solidarity)와 교회 세력이 결탁하고, 여기에 서방 세력의 지원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여, 군사 통제를 이용하여 국면을 통제했다. 이는 독재 수단(專制手段)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독재 수단이 없으면 안 된다. 독재 수단은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할 때에는 사용해야 한다. 당연히 사용할 때에는 신중해야 하고 사람을 붙잡을 때에는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유혈 사태를 일으킨다면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의 방침은 먼저 그들의 음모를 폭로하고, 최대한 유혈 상태를 피하면서 — 설사 우리 사람이 다치는 한이 있어도 — 사태를 일으켜 형법을 저촉한 사람을 의법 처리해야 한다. 이렇게 결심하지 않으면 이 사건을 제지할 수 없다. 만약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후퇴하는 것이고, 이후에는 더욱더 곤란해진다."
법률을 이야기하지만, 결정적인 장소로 천안문 광장을 이야기한다. 대중운동에서 광장이 갖는 의미에 대해 그보다 더 알고있는 이는 드물다. 광장의 돌파를 의법처리할 것을 이야기하며, 자유화 사조에 대한 간호한 반대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당의 영도를 뒤흔드는 일이며, 동시에 개혁개방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후야오방에게 실망한다. 그는 독재수단을 이야기한다. 말인즉슨 피를 보더라도 상황을 통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탈리아 독재는 피로 만든 강 위에 수립된다. 중국 혁명은 당을 위해 인간 백정이 될 수 있고, 되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혁명 원로란 그런 사람들이다.
다른 원로인 왕전 역시 말한다.
"반혁명 분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造反)! 민족의 패륜아들이 말을 만들고 일을 꾸미고 파괴하며, 공산당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 현재도 아직 우파(右派)가 있고, 현재도 아직 반혁명이 있다! 무슨 팡리즈(方勵之)인가, 반혁명이지! (……) 어떤 사람[후야오방을 지칭]은 무슨 냉처리인가를 말하는데, 열처리(熱處理)다. 열처리는 총을 쏘고 구덩이에 처넣는 것(一槍一窟窿)이고, 냉처리는 얼려서 아이스 바(凍成冰棍)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감옥은 장칭(江青)도 가두었는데, 왜 그따위 교수와 대학원생을 가두지 못하는가?
너희에게 300만 명의 학생이 있다면, 내게는 300만 명의 해방군이 있다. 내가 그 개자식들의 대가리를 치겠다! (……) 너희는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관제묘(關帝廟)에서 큰 칼을 들고 서 있는 저우창(周倉)[『삼국지』에서 관우를 호위했던 충성스런 무장]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와서 시험해 보라!"
혁명원로들은 기본적으로 조금씩은 다 인간백정이다. 중국 공산당의 중국 해방이란 그런 과정이었다. 그리고 당의 영도를 수호한다는 입장에서는, 혁명원로들의 입장이 일관성이 있다. 그것이 과연 중국을 위한 일이었는가에 있어서는 개혁파가 지향한 방향이 옳았을 수 있지만.
당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소요를 진압한다. 과기대의 관웨이옌과 팡리즈는 파면당한다. 상하이 기율위원회는 왕뤄왕의 당적을 박탈한다. 당 서기처는 현재 경제는 호경기이며, 실제 학생들의 생활에는 문제가 있고, 소통과 안도로 대응해야한다는 입장을 낸다. 후야오방 역시 이 원칙에 더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시위처리법(진압과 고소)로 대응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역시 관리를 이야기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원로들의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 후야오방의 사직서를 받고, 그에 대한 민주생활회를 조직한다. 보이보로부터 주요 중앙 간부들이 참여하여 6일간 진행된다. 이 민주생활회에서, 오직 시중쉰만이 이렇게 갑자기 회의를 개최하여 후야오방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자오쯔양으로부터 완리까지, 그와 뜻을 함께했던 개혁파들도 후야오방에 대한 비판에 동참한다.그는 회의가 끝난 후 회인당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대장정에 함께했던 19세 이하의 홍소귀로, 당에 바친 세월이 통째로 부정당한 것이다. 그는 이 민주생활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한을 밝힌다.
"[민주]생활회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최되어 나를 매장할 줄(搞臭)은 생각지도 못했다. 중앙 19호 문건은 치욕이다. 그중 많은 이야기는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떠도는 말이다. 예를 들어 3000명의 일본인 초청은 외교부에서 신청한 것이고, 1989년 말까지 1만 명이 왔다. [이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모두 동의한 것이고, 다들 동의해서 내가 3000명을 비준한 것뿐이다. 총서기가 그런 정도의 권력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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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의 [민주]생활회는 완전히 의외의 돌발적인 것이었다. 원래 사직서만 제출하면 일이 끝나는 줄 알았다. [민주]생활회에서 보이보가 개막사를 했는데, ‘모두들 서로 간에 어떤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라. 야오방이 먼저 시작하라.’는 정도다. 첫 번째 포문을 연 것은 위추리였다. 덩리췬은 대여섯 시간을 말했다. 이처럼 비판하여 나를 매장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찍이 이럴 줄 알았다면, [공산당 총서기의]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계속 초대하지만, 그는 1987년 12월 30일 단 한번 덩샤오핑을 찾아간다. 그리고 묵묵히, 브릿지를 한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덩이 그와 함께 진리기준논쟁으로 범시파를 제압하고, 총서기로 후야오방을 올리며 자신의 체제를 수립했지만, 결국 후는 낙마했다.
덩은 정치개혁이 경제개혁에 복무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경제개혁을 위해서는 당의 영도를 관철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후 역시도 당의 영도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사상해방이 이에 필수적이며, 소통과 인도로 영도를 확장하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당의 영도에도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둘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리며 갈등은 한번, 두번, 세번 누적되어간다. 보수파 역시 이 역동에서 후야오방을, 후야오방 너머의 덩샤오핑을 조준하고 공세를 거듭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과연 당대 중국에 민주화는 가능했는가. 1980년대 중국의 물적 토대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한 중산층을 구축할 수 있는 형태였을까. 나는 이부분에서 당대 민주화 인사들과는 궤가 갈린다. 중국의 산업화는 이제 막 시작했고, 당의 체제는 충분히 전역적이지는 못했으나, 동시에 시위를 진압할만큼의 역량은 있었다. 정세에 대한 판단과 개입도 빨랐고. 도광양회(韜光養晦)가 반드시 바깥을 향한 말은 아니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결국은 이중구조, 원로정치와 공식정치 간의 간극의 문제였고, 후야오방의 올곧은 성품의 문제였고, 덩샤오핑의 별명인 철공소(钢铁公司)가 보여주듯 완고한 그의 고집때문이기도 했다. 대나무와 강철이 부딪치면 어느 한 쪽은 깨져나가는 것이다. 또는, 인민성과 당성의 문제에서 인민성과 당성의 일치를 갈망했을수도 있다. 지나간 이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다만 짐작해볼 뿐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노인을 존중했지만 동시에 독립적으로 생각했다. 온 힘을 다해 두 노인[즉 덩샤오핑과 천윈] 간의 소통과 조정을 위해 노력했고, 큰일은 반드시 보고하여 지시(請示)를 받았다. 동시에 2명의 ‘좌파 대왕’(左王)[즉 후차오무와 덩리췬]의 공공연한 공격과 암암리의 중상모략(明槍暗箭), 그리고 그들의 각종 방해에 맞서야만 했다."
노인을 존중했지만 독립적으로 생각한 것이 후야오방의 비극이면서, 우리들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 국면에서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의 갈등, 소위 말하는 개혁파들이 민주생활회에서 보여줬던 배신 역시 정치개혁의 좌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물론 둘이 공개적으로 연합한다면 결국 둘 모두 빠르게 낙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런중이는 자오쯔양에게 묻는다.
“공산당과 국가 영도제도라는 큰 문제를 다루면서 왜 총리가 총서기와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는가? 왜 두 사람이 공동 명의로 덩에게 건의하지 않았는가? 만약 두 사람이 공동으로 건의했으면 효과가 더욱 크지 않았을까? 민주생활회에서 보이보가 이 편지를 언급했을 때 후야오방이 비로소 편지의 존재를 알았고, 그래서 당시에 그는 크게 놀랐다.”
일을 그르친 것이 어느 한명의 잘못일 순 없다. 다만 일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6장. 비운의 '정치개혁 청사진':공산당 13차 당대회(1987년)
후야오방의 사퇴는 좌경화의 시작을 의미했다. 보수파 왕런즈가 중앙 선전부장에 임명되고, '관송宽松•관용宽容•관후宽厚'의 3관 정책이 폐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위기는 외자유치와 개혁개방에 불리했다. 덩 역시 이에 따라 자오쯔양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한다. 그는 '5.13 담화'로 좌파가 계획하던 자유화 반대 정풍운동을 막아세우고 그 대상을 엄격히 제한한다. 또한 덩리췬이 주임을 겸직하던 서기처 중앙연구실을 폐지하고, 이론지 <홍기>를 폐간하며 <구시>를 1988년 6월 창간한다.
이처럼 자오쯔양은 후야오방에 비해 권력의 행사를 요령있게 구사했다. 원로들은 은퇴하고, 공식적인 직함은 가지지 않게 되었지만 당의 중대사는 합의에 의해 결정한다. 이때 덩에게 최종 결정권을 부여하여 합의의 교착에 의한 정체를 막는다. 자오쯔양은 덩이 가지고있는 최종 결정권을 이용해 위세를 부리고, 상대를 적절한 선까지 밀어낸다. 그러나 덩리췬의 밥줄을 끊은 것은 보수파 원로들의 반감을 산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인선에서 완리와 텐지윈이 잘린다. 5인 소조의 성원이었던 야오이린이 시국의 시급함을 틈타 개혁파의 손발을 자른 것이다. 덩은 대신 이들에게 적절한 직함을 주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중재한다. 완리는 이미 밉상이라 원로들 집 한바퀴 돌며 자아비판 좀 하고 결재 받아오라고 순회를 돌아야만 했다. 그래도 그렇게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장쩌민과 리루이환이 정치국에 진입한다. 장쩌민은 자오쯔양이나 후야오방과 무엇이 달랐을까. 장쩌민은 대학나온 공대생이고 자동차공학과였다.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의 실무경력은 문사의 것이라면, 장쩌민의 경력은 조금 더 산업친화적이었다.덩리췬은 선거에 떨어져서 중앙위에도 진입을 못하고 고문위 상무위원도 못한다. 당에서 조직해준 선거에서도 낙선하면 답이 없다. 좌파대왕 친구 후차오무도 턱걸이로 당선된다. 이미 당 내 분위기는 보수파로부터 등을 돌렸다. 아무리 원로들이 뒤를 받쳐줘도 선거 결과가 이따위면 소용이 없다. 반면 후야오방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다. 마음이 흐르는 게 표로 나타난다.
덩리췬을 총서기로 추천하다니 보수파 원로들도 제정신은 아니다. 중앙 조직부 상무 부부장 리루이가 잘 짤랐다.
“덩리췬은 중앙에서 영도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에 언행이 당과 국가에 매우 불리하여 당내외의 광대한 간부 군중에게 영향이 매우 나쁘고, 따라서 13차 당대회 이후 덩리췬은 중앙의 영도 직위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치국 상무위원 평균연령은 12차 당대회의 73.8세에서 13차 당대회에서는 63.6세로 10세가 낮아진다. 이후 14차에서는 61.3세로, 15차에서는 65.4세로, 16차에서는 61.3세로 이 이후부터 불문율로 7상8하가 적용되며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물론 우리 시 총서기가 요즘은 7상8하 씹고 맘대로 집어넣고 있어서 쫌 올라서 20대 기준으로 67세 됨^^...
13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중국의 현재적 상태를 이미 사회주의에 진입한 것으로 진단하고 반봉건도, 자본주의도 아님을 명확히 한다. 반봉건으로부터 벗어났으니 봉건분자라고 조리돌림 할 수 없고 자본주의가 아니니 주자파라고 뚜까팰 수 없다. 일종의 문혁 트라우마다. 이 단계의 주요 모순은 증가하는 물질문화 수요와 생산력 간의 모순이다. 따라서 생산력의 해방, 상품경제의 발전, 제반 기술의 현대화를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 상품경제는 시장경제 아니냐고? 그거 맞다. 잠깐 딱지만 사회주의적으로 붙여놓은거고 1992년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으로 진화한다. 여하튼, 그래서 포커스는 생산력 발전으로 모아진다. 이로부터 일개중심 양개기본점, 경제건설을 중심에 둔 개혁개방과 4항 기본원칙의 조화가 도출된다. 생산력의 해방 이거 다시봐도 모로봐도 차타고 가다가 봐도 슘페터적인데 혹시 덩샤오핑 좌파 슘패터리안인지? 물론 보수파는 일개중심 양개기본점에도 동의를 안한다. 4항 기본원칙이 주고 개혁개방이 종이라는 것이다. 어쩔 니 투표수 미달^^... 꼬우면 조직을 해라^^...
11기 3중전에서 제시된 목표는 1980년 GDP를 2배로 배가하여 온포문재를 해결하는 것이고, 2000년에는 이를 다시 2배로 늘려 인민생활을 소강小康수준에 도달케하는 것이다. 2049년에는 중등발전국가 수준으로 발전시켜 공동부유共同富裕를 이루는 것이다. 1978년 인당 GDP는 150-200불로, 1980년 300불을 달성한다. 2000년 이는 950~1000불로, 그리고 2019년 1만달러를 돌파한다. 과연 목표는 달성되었는가.
경제특구 역시 기존의 4개에서 연해를 중심으로 14개로 확장된다. 더하여, 정치개혁에서 당정분리를 핵심으로 주장한다. 당의 부패를 견제하고, 기능적 전문화를 이루며 개혁개방을 위한 법치를 가속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는 필요했다. 그러나 당정분리는 동시에 지대수익의 감소와도 직결된다.
결국은 소통과 견인이다. 민주파들이 전국인대 기어올라온다고 통롤르 웜천차단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거리 시위의 증가로 나타난다. 물론 자오쯔양의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00년대가 되서야 협상민주라는 키워드로 정치개혁의 물꼬가 트였지만 당의 전면영도가 강화되며 이는 다시 후퇴한다.당정분리 역시 당의 영도에 위협을 준다는 지적과 지방의 반발(뽀찌투쟁)으로 사실상 폐기된다. 이는 당시 동구권의 붕괴와 이에 대한 분석, 권력 독점의 포기가 원인이었다는 것으로부터도 기인한다. 서기처 역시 정책의 결정-집행기구에서 단순 집행기구로 그 위상이 하락한다.
2부. 국가제도의 정비
7장. 국가제도의 정비와 발전
11기 3중전에서 '사회주의 민주' 건설과 '사회주의 법치' 완비가 결정된다. 계획경제에서 상품경제, 즉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법과 제도에 따른 통치로의 변화, 인치에서 법치로의 변화이고, 이에 따라 정부의 독립적인 기능, 자율적인 입법부의 필요가 발생한다. 따라서 전국인대의 기능이 회복되고, 명문화된 당의 영도는 82헌법에서 삭제된다. 전국인대와 지방인대는 민주당파 포섭의 일환으로, 제사회세력을 체제내화하는 기구이기도 했다.
양원제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으나, 당의 영도를 유지하기 용이한 상무위원회 형태로 결정된다. 전국인대와 지장인대에 간독권한을 주어 최소한의 견제능력을 부여하고, 정책에 대한 청취기능을 통해 정책의 현실적합성을 제고한다. 현, 향급 지방인대의 직선제도 시범적으로 도입된다.
정부기관의 개혁 역시 도마위에 오른다. 경제개혁은 추가적인 행정수요를 창출하고, 이에 따라 정부 역시 팽창한다. 계획경제 내에서 경제 변화에 따라 기구는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수많은 제도와 관례, 행정절차를 남긴다. 복잡한 행정구조 속에서 지대는 수취하고 책임은 지지않는 행태가 반복된다. 덩은 중앙 1급의 3분의 1, 아래 1급에서는 그 이상의 개혁을 주문한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국무원 부총리가 13명에서 2명으로, 장차관급이 67%, 전체 정부 인원이 3분의 1 삭감되며 장차관급 평균연령이 64세에서 58세로 감소한다.
정부기구는 계획경제의 확장과 수축에 따라 팽창과 축소를 반복한다. 권한 역시 하방과 회수를 반복하고, 조직은 통합과 분리 속에서 공전한다. 당이 최종 결정권을 갖는 사회에서는 법치 역시 불필요한 일이다. 초보적인 법제 정비가 끝나고, 인치가 법제를 대신한다. 1957년부터 1978년까지 사실상 법없이도 사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후 1980년 법원제도는 복원되지만, 법제가 기능적으로라도 구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990년대 산발적으로 일어난 법원개혁은 이와 같은 필요에 따른 제도적 응답이었다. 왜냐, 1982년 제정된 민사소송법의 사례가 그 단적인 예이다. 법원에 증거수집과 조사책임이 있는데 예산이 안나와서 소송당사자 집에서 숙식하며 증거를 수집한다. 법제개혁과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제도적 발달은 법제 입안 건수로 증명된다. 1949년부터 1978년 말까지 전국인대에서 수정된 법률은 18건으로, 특히 문혁 10년 동안에는 하나도 제정되지 않았다. 반면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간 121건의 법률, 지방인대는 1037건의 지방성 법규를 제정 및 수정한다. 법제고적 변화가 왜 필요하지 않았겠나. 사실상 국가가 부재했던 거지. 물론 그렇다고 법원이 제기능을 다했던 것은 아니다. 이후로도 공안에 치여 당에 치여 제역할은 여전히 못한다. 그래도 구색은 갖췄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8장. 촌민위원회와 법률보급운동
펑전은 좀 독특한 인물인데,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그의 전인대에 대한 감독권한 부여에 관한 노력이 나온다. 촌민위원회의 성립과정에서 역시 그의 기여가 돋보인다. 인민공사 체제의 해체는 농촌에 있어서 기층 조직의 해체이기도 했다. 호별영농이 부여한 생산력의 해방이 있었다면, 그로 인해 초래된 행정의 공백도 있었다. 궈줘촌의 생산대로부터 자발적인 촌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이는 당 중앙으로 보고되며 사례조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구성형태는 직선제로부터 간선제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당의 영도는 이를 계층화하는 방식으로 서로 혼회되어 나타났으나, 실제로는 운영비용의 증가와 절차의 복잡함으로 구현되었다. 1987년 전국인대에서 권한과 의무에 대한 규정이 이루어지고, 적극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1989년의 천안문 항쟁 이후로 촌민위원회 역시 '부르주아 자유화'의 혐의를 받고 공세에 처한다. 그러나 이후 기층간부들과 촌민들의 갈등이 심해지고, 때로는 구타도 당하고 욕도 먹는다. 당대 농촌이 사실상 행정공백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펑전은 '군중노선' 견지의 원칙을 들어 이를 지지하고, 보이보 역시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 원로들이 농촌생활에 대한 동질감과 부채감을 강하게 갖는다. 펑전, 보이보, 쑹핑이 촌민위원회의 구조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아무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줘야한다는 생각이 아니었을지. 이때 중국 농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시범촌 정량조건, 치안, 조정, 공공위생을 충족시키면 인증을 해주고, 85% 비윻을 충족하면 시범향으로, 70%를 충족하면 시범현으로 승격한다. 정량적 평가기준이다. 그 결과 2000년대에는 31개성 전체에서 직접선거가 실시된다.
법률보급운동을 왜 6차에 걸쳐서 지속해야만 했는가, 그만큼 인치의 문제가 심각했다. 제도적으로도 필요한 일이었지만, 사회문화적인 측면의 심각성이 사례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법에 대한 인지는 인민에 의한 당권의 견제의 도구 역시 부여한다.
사실상 20년의 무법지대는 실질적인 치안의 주재에 의해 드러난다. 문혁기간에는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아서 범죄율이 1.6배씩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없을 때는 범죄도 아니던 것들이 드러난 것이다. 형사범죄가 증가하고, 랴오닝성 번시시에서 청소년범죄가 전체 범죄의 70%를 차지한다는 건 범죄자 꿈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뜻이다. 당 중앙의 보고문건에서도 전체 범죄 중 미성년자 범죄 비율이 34%라는 건 전국적으로 상황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과정이 교육만으로 바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제의 발달, 기초적인 치안의 구축, 문화적 변화는 장주기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던 곳에 질서와 구조가 잡혀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민주화는 가능했을까. 민주화는 결국 총류중산층과 법치, 제도화의 축적이다. 1989년의 국면은, 전역으로 볼 때 그 소양이 미처 다하지 못했던 시기이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축적되어 1997년의 의법치국으로 이어진다. 촌민위원회나 법률보급운동이나 결국은 당의 영도 하에 있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결국 당-국가 체제에서 최종심급은 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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