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6
아니 키건선생님 다리가 편찮으셔서 병역을 안치르셨군. 군대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이 형성된 원인과 그의 여정에서 만났던 군인들, 연대로 구성되는 영국 군사문화의 부족주의, 공화국에 대한 미군 군인들의 충성으로부터 군사문화를 정의하고 그 변천사를 따라간다.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를 두고 전쟁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를 쌓아나간다. 여기서 의미하는 전쟁은 정규전인가, 비정규전인가? 실제 전쟁과 정식화된 전쟁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으며, 이는 실제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고, 그 간극은 좁혀져가고 있는가, 벌어져가고 있는가.
환원론과 독일 철학의 배경에서 전쟁론은 자본론과 겹쳐지고, 전쟁과 군사문화라는 주제와 연결되며, 샤카 줄루의 사례로 군사문화의 창달에 의한 내부 인구압의 해소가 외부에 어떤 파멸적 영향을 미쳤는지, 일본에서의 카타나가리(刀狩)가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유지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통해 사례와 사례로 군사문화와 전쟁을 이어나간다.
30, 40, 58, 80p
마오쩌둥의 지구전과 인민전쟁은 중국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알제리에서, 그리고 수많은 피식민국가에서 재현되었다. 비정규전으로, 그리고 지구전으로 전개된 이 전쟁은 필연적으로 내전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규전의 대상 밖에서 때로는 이해관계로 때로는 폭력으로 지역사회를 솎아내며 통치권력에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함으로써 권력 전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 죽음들 중 어느정도가 자발적이었고 바자발적이었는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가 과연 피값을 정당화할 정도의 번영을 그 땅의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는지는 평가해볼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보론1. 역사적으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난 강역을 인류 역사의 전체 지역 중 특정 부분으로 국한시키며 그 원인을 따라간다. 대규모 해전의 입지조건에서 신호체계와 운용의 한계가 그 전장을 연안지역으로 국한시켰고, 기술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건들이 반복되는 것이 전장의 지리적, 안보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해전으로부터 육전으로 이러한 지리적 한계에 의한 전장의 선정은 반복된다.
88, 105, 109p
키건 선생님 역시 브리튼인이셔 조크의 다크함이 폐부를 찌른다. 전쟁의 기원을 추적하며 호미닌으로부터 여러 수렵채집 부족들, 야노마미와 마링족, 마오리족, 아즈텍의 꽃전쟁 등에서 전쟁이라는 체계가 문화적으로 고착되어가고 고도화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석기시대 전쟁이 보여주는 폭력의 수준은 무기의 발달과 함께 고도화된다.
121, 138, 155, 179p
예리코 유적의 주거형태로부터 군사적 의미를 끌어낸다. 해자, 장벽, 망루의 존재는 요새화의 기초 원리들이 당시부터 발달했음을,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요새화를 통해 지켜야 할 잉여생산물과 이를 노리는 적들의 외침이 규모있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낮은 군사기술과 그 지리적 여건. 지도로 볼 때는 잘 잡히지 않던 부분들이 군사학적 설명을 곁들여보니 잘 이해된다. 이집트는 일견 사방이 트여있지만 역사적으로 두개의 병목을 잘 관리하면 외침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종의 항아리 상권이었음. 항해기술의 발달과 북쪽으로부터의 위협이라는 전제는 바다민족의 침입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그 전에는 멀쩡한 배로 하는 해적질이라는 게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군...? 해적 전문가의 말이라 신뢰가 감...
수메르의 안보적 입지와 전쟁기술발달에 따른 입지조건의 변화가 시기적으로 어떻게 이 지역의 군사문화 발달을 촉진했는지 사료와 주변 민족들간의 긴장관계, 결정적으로 유목의 발달과 전차의 출현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전쟁과 군사문화에 포커스를 두고 문명발달사를 섭렵해본 적은 없는데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고대사가 생경한 기분이다.
183, 196, 203p
보론 2. 요새화의 의미와 분포. 거점(Stronghold)은 방자에게 압도적 이점을 제공하며, 이렇게 구축된 거점에 대한 공격은 탄환의 직사가 가능한 화약무기의 발전 이전까지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승강을 통한 공성이나 충차 등 공성무기가 일정 효용이 있긴 했으나 역사적으로 포위공격을 제외하면 공성은 수득률이 안나오는 방법이었고, 따라서 거점의 구축여부에 따라 역내 권력의 집중과 분산이 결정되었다.
요새화와 중앙집중적 거점 구축으로 중국과 로마의 사례, 주변 접경과의 교류와 접촉이 두 문명에 끼친 외침에 대한 내성의 차이를 설명한다. 만리장성은 완결되지 않은 국경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다양한 개방과 접변을 촉진한 반면 로마의 접경관리는 일단 한번 외침을 허용하게되면 팍스 로마나 권역 전체에 대한 접근권을 허용하는 구조였고, 이런 안보적 취약성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거점 구축의 형태로 자위적 방어수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중세 봉건영주들의 할거는 이러한 경향의 반영으로도 볼 수 있는 듯.
219, 221p
말의 육종으로부터 유목민의 특징으로 푸주한(butcher)과 백정(slaughter)을 언급하며, 수렵채취에서 유목으로 가는 과정의 차이점을 백정의 존재로 특정짓는다. 수렵채취인들은 훌륭한 푸주한이지만 좋은 백정은 아니다.
수렵채취인의 사냥은 단칼에 목숨을 끊는 살육이라기보다는 상처를 많이 내는 지구력사냥에 가까움. 유목민은 짐승을 빠르게 도살하여 양질의 장기와 가죽을 얻어야하는 필요가 있으므로 숨을 단숨에 끊는 기술을 연마하게 된다.
그렇다면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전투력 차이, 전술적 능력차이는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는가, 바로 목축 경험의 차이가 그 차이를 낳는다. 유목민족은 전차라는 우월한 이동수단에 기초하여, 농경민족을 양떼처럼 몰아넣고 개중 반항적인 개체를 골라 침묵시키고 순종하는 개체만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능력을 목축을 통해 배우고, 이를 농경민족의 군대에 적용하여 사기를 깨트리고 항복으로 몰아넣는다.
전차를 활용한 기사의 살육능력이 새삼 대단하다. 분당 6회의 사격으로 순식간에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학살한다. 유목민족의 상인으로써의 속성을 감안하면 그들이야말로 최초의 자유무역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문헌과 유물을 통해 재구한 카데시 전투의 규모가.. 귀엽다... 50승에 5천명이면 후 미만 아닌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을 나눠 유목민족의 분포와 진로를 설명한다. 이런 식의 접근은 새로운 느낌이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의 접근과는 다른 방향임. 트란스 옥시아나의 지리는 이 편애서 보면 더 납득되는 부분들이 있다. 페르시아에서 발흥한 유목민족들이 아시리아를 점령하고 이후로도 메소포타미아가 지속적으로 페르시아 고원의 영향 하에 놓이는 것이나 트란스 옥시아나의 동학이 메소포타미아와 힌두스탄의 체제에 끼치는 영향등이 한 궤로 갈무리된다.
234, 242, 257, 263p
아틸라를 통해 전쟁 그 자체가 민족의 생계수단이 되는 군국주의의 출현을 짚는다. 훈족의 발흥과 게르만의 대이동, 그 과정에서 지속적인 유럽으로의 침투는 서구의 문명을 새로 그린 심대한 충격이었다. 유럽에 대한 침탈과 노획은 훈족에게 물질적, 사회적 진보의 도구는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 유목민족의 사회를 지탱해주는 경제잘전의 구조였던 것이다.
무슬림의 발흥에 있어 이 군국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띈다. 전쟁에 있어서 종교와 민족은 고대로부터 주요한 응집의 동인이었으나, 비로소 무함마드 이후에 이르러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포괄하여 제국의 기초를 건설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준다. 다르 알 이슬람과 그 외부의 구분이야말로 무슬림 제국이 그 짧은 시간동안 폭발적인 확장을 거듭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확장은 이후 압바스 왕조로, 압바스 왕조 하에서 다른 무슬림에 대한 전쟁을 위한 노예병의 채택으로, 그리고 그 구조속에서 투르크족의 부상으로 나타난다. 투르크족들은 제국의 무력으로 입지를 다지고, 이는 결국 술탄들에 의한 지배권의 이양으로 귀결된다.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킨 후, 중동은 투르크족의 지배하에 놓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나 살라딘 이후 결정적인 우열관계는 뒤집히게 된다.
그리고 몽고제국이 출현한다. 몽고를 다른 유목민족들과 구분짓는 것은 징기스칸의 야삭에 의해 정립된 개방적인 조직구조와 타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전략이다. 군사조직의 개방성과 유연함, 단합력이 몽고제국의 전세계적 지배 확립의 핵심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몽고제국 역시 유목민족의 근본적인 한계, 계승의 불안정성과 내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훌라구의 중동 정벌이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좌절되며 유목민족이 서구를 발 아래에 둘 수 있었던 시대는 역사의 저편으로 저물어간다.
정식화된 전쟁의 여러 요소들, 기동전, 투사무기,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는 이처럼 다양한 '비군사적'요소들로부터 근원한다. "전쟁은 자율적인 활동이며 전사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라는 것이 군사문화의 핵심을 구성하고, 그 연원은 정착민족으로부터가 아니라, 유목민족부터 정착민족까지 전쟁의 역사속에서 형성되어왔던 것이다.
277, 283, 313, 318p
보론 3. 군대의 종류별 구분과 각각의 장단을 역사속에서 돌아본다. 안드레스키는 군대를 그 군사참여율, 응집력, 예속력에 따라 여섯가지 구분으로 나눈다. 전사, 용병, 노예군, 정규군, 징집병, 시민병이 그것이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전사귀족은 필연적으로 잉여가치의 수탈을 요구한다. 분배할 잉여가치를 지속적인 확장으로 수급할 수 없게될 때 전사사회는 봉건사회로 전화되고, 영지에서 전사들의 군사문화는 부식된다.
용병과 노예군은 상대적으로 응집력의 지속가능성이 높으나 역설적으로 예속력은 낮을 수 밖에 없고, 그 자체로 정정 불안의 원인이 된다. 정규군은 높은 응집력과 예속력을 보여주지만 그 유지비용으로 인해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게 된다. 시민군은 전체 시민 중 재산을 기준으로 병역을 할당하고, 이는 전투병력의 제한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진정한 의미의 징병제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는 110만이라는 최대의 병력을 획득했고 이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그 위력을 증명했다. 그러나 결국 총력전과 각국의 전쟁파업에서 드러났듯이, 징병제 역시 자체의 한계를 노출하며 장단이 있는 체제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적정 비용에 적정 위력을 갖는 군대의 지속적 유지는 여전히 모든 국가의 딜레마인 것이다.
324, 329, 338p
기마민족을 통해 유럽 외의 군사적 전통과 군사문화의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간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했다면, 철기의 확산과 유럽적 군사문화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 형성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발전했는지 그리스로부터 출발하여 로마, 봉건시대를 지나 십자군 전쟁과 이후 국가의 형성까지를 따라가며 그 변천을 추적한다.
그리스적 시민군의 특징을 밀집된 근접전 집단, 팔랑크스 또는 호플리테스의 등장으로 정의한다. 그리스 폴리스들은 봉건제와 유사한 형태의 국지적 도시국가의 할거로 나타났다. 이는 그리스의 지리적 조건으로부터 유래하였고, 지속적인 외부 민족의 침입과 그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강화되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의 내구성과 밭에 대한 보호시설의 설치는 전쟁이 가능한 시기를 극도로 좁혔고, 이런 이유로 그리스의 전쟁은 최소 시간내로 최대 피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 귀결이 근접전에서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상대에게 최대의 피해를 강요하는 밀집대형의 시민군의 구성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전투능력은 마라톤 전투에서 5만의 페르시아군에 대한 승전으로 드러났지만, 그 국지성은 결국 도시국가 간의 항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한 전체 민족 역량의 쇠퇴로 나타났다. 각자의 역량이 소진된 틈을 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는 그리스 전체로 발을 뻗치고, 알렉산드로스의 대에 이르러 통합된 그리스의 힘으로 페르시아에 진출하며 민족의 전략선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더 동쪽으로, 동쪽으로 넓히게 된다.
밀집대형을 통해 셩성된 시민군의 군사문화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에게로 전해지고, 로마군은 필룸과 그라디우스를 채택하고 시민군과 장기복무, 그리고 백인장이라는 준장교계급을 통한 군사문화와 역량의 전승을 통해 제국의 기초를 닦게된다. 대를 이어 전승되는 군사문화는 로마인의 전장에서 극도의 호전성과 잔인성으로 나타났고 이는 포에니에서, 갈리아땅의 정벌에서 상대 군과 민간인에 대한 폭력의 투사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로마의 군사문화는 단순히 제국의 건설로 끝나지 않았다. 군사문화는 그 자체로 규율과 통합을 제공하며 도로로부터 수도교 등 인프라의 구축을 통해 문명의 기반을 닦고 또 제국을 건설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달이 차면 쇠하듯이 시민권의 부여를 둘러싼 갈등과 정치체제의 변화, 군사조직의 재편과 정치구조의 한계가 노출되며 로마는 혼미에 빠지고, 이윽고 군사력의 쇠퇴가 체제의 쇠퇴로 이어지며 로마 제국의 시대는 서유럽에서 종말을 맞이한다.
357, 377, 386, 407
시대는 왕들의 쟁패기를 지나며 군사학교가 생기고 화약의 발달과 함께 전통적인 무기들이 퇴조하며 화약병기를 위한 군사훈련이 발달하게 된다. 징병제 초기에도 용병 또는 상비군은 사회의 하류계층만을 대상으로 했으며, 많은 중산층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발달은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전 사회적으로 적용되었고,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이윽고 시대의 발달과 함께 무기체계의 발전이 이어지고, 1815년부터 1914년까지의 '위대한 평화(?)'는 끝을 고하고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1차 세계대전은 병기의 발달, 보편화된 군사문화, 국가간의 총력전으로 이전의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상자와 사상비율을 보여주었다. 연대규모로 증발하고 몇주만에 몇만씩 증발하는 목숨들은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겨주었고, 전쟁 말기에는 적극적인 군사파업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매듭은 다 지어지지 못했고, 전간기를 지나 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간다.
히틀러는 군사기술에 대한 이해, 군사문화의 적극적 차용, 정치의 연장으로써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공군의 창설, 탱크의 발달, 무엇보다 무선통신을 통한 전장환경의 즉각적 소통은 실시간(real-time) 전장의 구현으로, 전격전으로 나타났다.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에서 이는 즉각적인 효용을 보였으나, 바다사자 작전의 실패와 대소전 개전을 통해 독일은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서양의 군사문화는 그리스로부터 발원하여 로마를 거쳐 정형화되고 이후 십자군전쟁과 여러 유목민족과의 쟁패를 통해 비-유럽적인 요소들을 차용하며 발전해나갔다. 기사단으로부터 용병을 거쳐 상비군과 징병제에 이르기까지 단절과 연속을 경험하며 성장한 군사문화는 근대성과 상보적 관계를 형성하며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총력전의 핵심으로 기능하고 결국 세계를 불태우게 되었다. 유엔과 세계 질서 하에서, 오늘날 서구의 군사문화는 그 과오 속에서 타 문화권의 군사문화, 동양의 유교(?)적 중용, 수렵채집 사회의 대화와 타협, 포용성 등으로부터 앞으로의 세계에 필요한 새로운 역할을 발굴해나가야 할 것이다.
음... 군사문화에 대한 서술들은 좋았는데 마지막의 세계정부와 그 수호자로써의 군사문화를 호명하는 부분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납득은 좀 어렵다. 군사문화와 근대성의 상보성이나 군사문화의 자율성은 유용하게 고민해볼만한 주제인 듯.
320x100
'서평-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 페르낭 브로델 (1) | 2025.11.30 |
|---|---|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페르낭 브로델 (0) | 2025.11.26 |
| <The lifeways of hunter-gatherers>, Robert.L.Kelly (0) | 2025.11.07 |
| <제5의 기원>, 로버트.L.켈리 (1) | 2025.11.07 |
| <모든것의 새벽>,데이비드 그레이버 (0) | 2025.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