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일본사

<일본 총리 열전> 우지 도시코 외 편저

stingraykite 2026. 4. 20. 17:06
 

유신으로부터 고이즈미까지, 일본 총리들의 짤막한 생애사와 총리로써의 주요 업적을 통해 각각의 인물들을 비춘다.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야마가타 아리토모, 하라 다카시와 다카하시 고레키요까지 전전 총리들의 업적과 정치적 이합집산, 인물평과 거래의 과정들은 과연 다른 일본은 어떻게 가능했을지 상상하게 한다. 전전 일본 정치가의 경력이라는 게 민선은 드물고 육군과 해군은 각각 하나의 정당이고 관료 출신은 대장대신이 끝발이 좋군. 하라도 그렇고 다카하시도 그렇고 민선 총리에게 암살은 일상이다. 유신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피를 피로 씻는 과정이기도 했고 그 속에서 참 잔혹한 유산을 남기며 이후 정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번벌들의 성향을 보면 이토는 유화적인 축이 맞았다. 동시에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기여들을 보았을 때, 그의 내각이 한 일들은 근대화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요는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군부의 정치간여, 원훈공신들 내의 권력다툼, 야마가타와의 갈등, 외교정책을 둘러싼 노선차이였다. 최후는 부러 말끝을 흐린다.
미쓰이, 미쓰비시의 정경유착의 역사가 참 오래되었다. 입헌정우회로부터 헌정회까지, 다방면으로 개입하거나, 번벌과 유착하거나, 정당에 통치자금을 대가며 이해를 관철하는 통로로 쓰는 등의 연계가 19세기 말로부터 이어진다. 군수산업, 인프라, 시장진출까지 재벌들은 이해관계 속에서 군부와, 정당과 얽혀들며 사업을 확장시킨다.
이토만큼 메이지시대를 좌지우지한 사람이 있었으니 야마가타 아리토모다. 군국주의로의 길에 초석을 놓고, 현역무관제로 지속적인 개입의 통로를 트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본인의 전망을 관철하고 따갚되 정신을 심어놓는다. 초연주의 하에 번벌들의 이해와 의지를 관철하지만, 그 역시도 메이지로부터 다이쇼로 넘어가며 시대의 흐름은 이겨내지 못한다. 대신 넉넉하게 키워놓은 후계자들이 그의 길을 마저 걷는다. 가열찬 군국주의의 길을. 신분제에 대한 부정과 근대화에의 지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국의 패권에 대한 추구는 이후 일본의 경로를 노정한다. 왜 이토가 아니라 야마가타였느냐. 야마가타의 노선이 일본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도 있으나, 그가 이토에 비해 조직관리를 잘 했다. 아시가루의 아들에서 총리대신까지. 그의 입지전적인 성과 속에 명암이 교차한다.
12, 30, 35p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대장성 경력이 참 화려하다. 주요한 경기변동에서 오쿠보와 그의 경제적 판단은 다소간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안정적인 경기운용을 보여주었다. 13남 6녀... 참 화려하게들 사시는구만. 대장경으로써 대장대신으로써 세제를 구축하고 통화를 관리하며 혁혁한 성과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총리 재임기간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가쓰라 다로가 2866일을 총리대신을 한다. 야마가타와 이토 양자에 끈을 대고, 야마가타 파벌의 일원으로써 정치에 파벌의 뜻을 관철하며, 초연주의, 즉 의회가 뭐라든 알바냐 관료와 번벌에게는 자신의 길이 있다며 나아가지만 동시에 의회의 납득을 그만큼 잘 조율해낸 사람도 없었다.
소소하게 가쓰라-태프트 밀약도 찍어주고 조선도 병탄하고... 이토 내각에서 육군대신도 하고(군 출신이었음) 야마가타 후원으로 총리도 하고 러일전쟁 전과로 사기는 사기대로 치고 폭동나서 사임하고... 그러다가 야마가타 뒤통수치고 자기 파벌 만들고 궁내청으로 유배당하지만 재기했다가 결국 의회에서 사자후 맞고 칠공분혈하며 총리대신 사퇴하고 7개월만에 위암으로 사망한다. 근대적으로 보자면 지지율 드리즐을 잘 하면서 정파들간의 이합집산 속에서 자기 세력을 잘 모아내 입장을 관철해낸 총리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은 이겼고 조선은 병탄했고 ... 하지만 그 역시도 의회권력의 증가와 사회적 각성 속에 밀려나고 명을 다한다.
사이온지 정도가 메이지 최대 리버럴 아웃풋이다. 그는 국수주의적 노선에 저항하고, 헌정질서 하의 통치를 경주한다. 파리코뮌도 다녀오고 나카에 조민과 교류하며 특명전권공사로 오스트리아로부터 헝가리, 독일을 거친 후 문부대신이 되고, 정우회를 기반으로 총리에 오른다. 가쓰라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총리를 하고, 하라 다카시 등 후임들을 육성하며 지속적으로 군부의 발호를 견제하지만, 후임들은 암살당하고 군부는 팽창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44, 66, 77p
데라우치... 헌정 무시하고 맘대로 한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또 부하 병문안가고 뽀찌 찔러주고 와인 선물하고... 참 이런 에피소드들 볼때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불상을 좋아해서 총독부 미술관에 (조선)불상 거액으로 구매해서 기증하고... 참 불자 나셨다.
1918년 하라 다카시 내각이 정당내각으로는 처음으로 집권한다. 여전히 총리는 국회의 선출이 아니라 천황의 임명으로 지정되는 '대명강하'방식이었지만, 중의원 출신으로 '최초'!로 총리가 된다. 그는 대의 민주주의를 중시했지만, 동시에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 임기는 길지 않았으나, 임기내에 정력적으로 정책들을 입안하고 추진하며 정치적 과업을 완수하고 총리직을 내려놓는다. 그는 일존의 군국주의화를 경계하며, 군부와 대립하고 반도의 무단통치를 문관통치로 전환한다. 하지만 쇼와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스캔들과 책임공방 속에서 흉탄을 맞고 사망한다. 민간인 총리는 흉탄에 가는 것이 전전 일본정치사의 법칙인지 ㅎㅎ..
102, 110, 115p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참 빈한한 환경에서도 악착같이 살았다. 강운 역시 그를 지켜주었고. 오랜 기간(8년 10개월, 7번) 대장대신으로, 은행장으로써 금융인으로,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아나가며 운을 키우지만, 흉살을 피할수는 없었다. 1936년 2.26에서 기개를 떨치다 칼을 맞는다. 나라를 대공황에서 건져내고도 소위 '우국충정'으로 암살당한다.
가토 도모사부로는 햐군 출신으로, 러•일 전쟁에서 연합함대 참모장으로 참전한다. 이후 정치적 경력을 축적하고 다카하시 고레키요 다음으로 취임하여 정우회의 지지 속에 입각한다. 내각은 군축에서, 그리고 보통선거에서 실무력있게 의제를 밀고나갔다. 초연내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해군 출신과 워싱턴 회의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군에 대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단호하게 일을 밀어붙인다. 배심법과 보통선거를 향한 일보 진전 역시 그 성과이다. 육군 역시도 야마나시 군축에 의거 대량 감축된다. 물론 공산당은 악착같이 잡는다. 그러나 그는 대장암으로 사망한다. 말 그대로, '잔촉'내각이었지만, 사를 것은 다 살랐다.
그리고 가토 다카아키가 있다. 미쓰비씨로 커리어를 시작하여 영국에서 생활하고 부사장으로, 주영 일본공사로, 그리고 외무대신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간다. 원로와 번벌에 의한 정치보다는 관료들의 독립적인 정치를 지향하며 영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외교 정책을 뻗쳐나가지만, 이는 동시에 제국주의로의 길이기도 했다. 21개조 요구 던졌다가 크게 역풍맞고 원로들의 반발 속에 사임하지만, 이후 총리로 입각하여 보통선거법을 통과시킨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다음해에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켜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포함한 제사회세력을 가차없이 탄압한다. 그리고 폐렴으로 사망한다. 총리자리가 영 건강에 안좋음... 누구는 흉탄에 가고 누구는 대장암 누구는 폐렴... 전전 총리 건강잔혹사도 쓸 수 있겠다. 이때 중선거구제 역시 확립되어 이후 1996년 선거개혁까지 유지된다.
121, 130, 148p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없다. 총리를 거저 두번을 한다. 커리어 시작도 독특하다. 제대 법학과 수석졸업을 했는데 농상성이랑 내무성에서 퇴짜를 맞고는 대장성에 들어간다. 이게 가능? 정치인으로써는 나쁘지않았지만, 자기 의제를 끝까지 물고나갈 강단이 부족했고, 그것이 두차례의 사퇴로 이어진다.
1999년 일어난 시정촌 통합에 대한 논의 자체는 1927년의 도주제 검토로부터 연원한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전국을 6주로 나누고 기존 부현은 자치제로 만들며 주청, 주장관이 관할을 통할하게 하는 계획이었다. 결국은 인구가 감소하며 기층자치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서야 이는 실행된다. 한국의 광역특별어쩌고를 보고있으니 기시감이 든다.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 이르러 대공황이 일본을 덮쳐온다. 그는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주장했으나 이는 결국 디플레이션과 경기충격으로 이어져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누카이나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지적, 금본위제로부터의 탈피라는 전략이 맞았다. 그의 실각 이후 들어선 이누카이 내각에서 다카하시는 금본위제로부터 탈피하며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히 군부는 그 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마구치가 특별히 무능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때 유럽 정부들도 비슷한 뻘짓거리 많이 했다. 당대 일본정부 정도면 빠르게 정책노선을 변경하고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일치시킨 편이다. 그러나 사세가 부득이했다.
하마구치가 참 난 사람이다. 대장성에서 선임이 원로들 부탁 좀 했다고 거부하다가 결국 패버린다. 이후 한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출세가도에 올라 결국 총리까지 되지만, 하복부를 찔리고도 꿋꿋이 자기가 어떻게 찔렸는지 글로 기록한다. 그리고 사망한다. 실로 기개가 있다.
154, 168, 173, 179p
소위 말하는 아시아주의, 왕도정치에 대한 지향은 일본에서도 뿌리깊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역시 헌정운동으로부터 김옥균, 캉유웨이와 쑨원에 대한 지원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선린우호를 추구한다. 1차, 2차, 3차에 걸친 호헌운동을 통해 민간의 저변을 넓혀나간 끝에 그는 결국 총리에 올라 위기의 일본을 경영하지만, 결국 5.15사건에서 암살당해 그의 삶은 끝을 맺는다. 계속 보면서 새삼 느끼지만, 더 나은 선택지들이 없지도 않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일본사회의 여력은 여러번 집중되며 성과를 쌓아나간다. 그러나 진일보하려는 때마다, 총리들은 죽음을 맞이하거나 암살당하고, 정치는 혼란을 거듭한다. 그것이 과연 반도에 좋은 일이었을까. 어차피 식민지배당하던 처지라고 백안시하기에는, 아까운 가능성들이었다.
군이 하도 지랄을 쳐대니까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에 오른다. 이누카이의 사망 이후로도, 군부의 난동은 계속되고 통수권 구조와 양 군의 내각개입은 정부를 지속적으로 교착상태에 몰아넣는다. 사이토는 난국을 해결하며 군을 조율하고자 하지만, 장작림의 암살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는 수습할 수 있는 국면을 넘어버렸고, 국가는 급속도로 전쟁으로 끌려들어간다. 총리에서 사퇴하고도, 2.26에서 현상유지파로 다카하시와 함께 암살당한다. 해군이라 죽었다.
사이온지도, 사이토도, 오카다도 군과 마찰을 빚지 않으면서 정국을 조율하고자 했지만,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봉천 암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후과는 만주국으로, 노구교로, 수습할 수 없는 국면으로 빨려들어간다.
"열두 명의 총리대신과 13기의 내각으로 구성된, 제3기를 포함한 약 18년 사이에 테러롤 당한 것은 여섯 명이다. 그중사망자는 오카다를 포 함, 하라, 다카하시, 하마구치, 이누카이, 사이토 등 여섯 명이다. 하라, 다카하시, 이누카이는 역대 정우회 총재이고 하마구치는 민정당 총재였다.제임 중 병사한 사람도 가토 도모사부 로, 가도 다카아키 등 두 명이다. 더구나 이 기간에 등장한 총리대신은 헌정사상 특필할 가치가 있는 인물들로, 테러와 병마는 난순히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호헌체제와 민주주의의 싹을 잘라버렸다."
189, 193, 201, 207p
그리고 2.26이 일어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국체 명징보다 군칙 명징이 시급하다고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일부 국민이 5 . 15 사건 범인에게 과도하고 맹목적으로 또 뇌화부동하듯 찬사를 보내면 모방을 초래한다고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군부의 망동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측량할 길이 없다고
그래서 우리는 평생 군부와 정부에 고언을 했고 수차례 판매 금지의 고난을 겪지 않았는가
1936년 3위 9일 발행된 지역 사회의 잡지 [타산지석]에 발표된 기류 유유 평론의 한 구절이다. 기류는 1933년 8월 11일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 지상에 평문 [관동 대연습을 비웃는다]를 쓴 뒤 주필 자리에서 쫓겨나 고향 나고야로 돌아갔다.그는 고향에서 자신이 발행하는 개인 잡지 <타산지석>을 통해 평생 군부와 싸움을 계속한 언론인이다."
2.26은 정부와 군부의 긴장을 급격하게 무너트린 분기점이다. 문민통제는 무너지고 육군이 정부를 좌지우지한다. 이후 중일전쟁으로,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은 군국주의로 맹진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책임 역시 없다말할 수 없다. 군국주의, 국체는 비단 육군만의 사건이 아니라 일본의 신민들과 정부, 그리고 재계가 함께 이끌어간 일이다. 반대한 이들이 있다고 해서, 군부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히로타 고키는 본인 재임기간동안 군부에 굴복하고, 고노에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전쟁 확대에 승인하고 외교적 해결을 포기하며 전후 문관중 유일하게 A급 전범이 된다.
그래도 사람들이 기개가 있어. 소위 할복문답이 이런 사건이군. 데라우치는 하마다에게도 기개로 밀리는구나.
- 마침내 하마다는 "당신은 무책임하게 모욕 했다는 말을 해놓고, 이번에는 모욕하는 듯하다고 말을 바꾸고 있다. 일본의 무사는 원래 명예를 중시한다. 시정의 불랑배처럼 근거도 없이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는가 . 속기록을 조사해 내가 군대를 모욕한 발언이 있으면, 할복을 통해 당신에게 사과하겠다. 없다면 당신이 할복하라" 고 말하기에 이른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아주... 확신범이네.
- 1919년 사이온지를 따라 베르사유 조약 조인식에 참가하고, 구미 자유주의를 배운 고노에가 왜 영•미가 아닌 독일•이탈리아를 선택한 것일까.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1년 잔인 1918년 12월 15일자 잡지 <일본 및 일본인>에 고노에가 발표한 [영•미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는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영•미의 평화주의는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주의 주장이며, 하동 정의 인도와 무관한 것이다.일본의 논자들이 그들의 선전의 빠져 평화가 곧 인도라고 생각한다.국제적 지위를 감안할 때 일본은 독일과 같은 입장이며, 현상 타파를 제창해야 한다. 그런 일본이 영•미 본위의 평화주의에 빠져 국제연맹을 하늘의 복음과도 같이 찬양하는 태도는 실로 비굴한 것이다. 정의 인도적 견지에서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한 평이 신랄하다.
"그러나 전쟁 전과 전쟁 중 고노에는 결코 연약하지도 평화운동가이지 도 않았다. 군부독재를 막아내지 못한 것만 놓고 불 때는 연약했고, 군 부와 타협했다는 점에서 평화운동가였다.원로 사이온지처림 대국관 세계관을 갖추고 영ㆍ미와 협조하며 중국과 융화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내각총리대신 실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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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전범들이 있지만 전범의 일등은 역시 도조 히데키다. 왜 육군은 그렇게 질주할 수 있었나. 청일과 러일전쟁으로 승리를 거머쥐었고, 자체적인 경재를 운용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했고, 정계와 재계를 주무르며 국가안의 국가가 되었다. 1910년대로부터 1920년대 사이의 어느순간, 자르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지속적인 경기충격과 정체가 동시기 세계적으로 유달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음에도, 현상 유지에서 현상변경으로 나아간다. 고노에의 진단은,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도쿄 재판 중 면회 온 부인에게 건넨 하이쿠에 도조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50년말 위에서 보낸 꿈의 뒤
문자 그대로 '말 위에서 지낸 인생(=군인)' 이었다면 도조 히데키란 인물이 그토북 악평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세계로 끌려들어 옴으로써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의 독재 정치가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후 반세기를 지나면서 도쿄 재판 비판, 자학 사관 비판이 종종 얼굴음 내밀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등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인근 국가 국민들 입장에서 도조 히테키의 이름은 영원히 '전쟁 범죄자'로 기억될 것이다.
스즈키 간타로가 인물은 인물이다. 57세에 해군의 수위를 찍고 시종장의 명을 받들어 황국에서 일하다 2.26에 총을 다리, 가슴, 머리에 맞고도 산다. 이건 확인사살 안해서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간 자체가 강한 것이다. 전쟁은 다 조져놓고 총리를 시킨다. 때는 1945년 이미 사세는 기울었다.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결국은 그놈의 국체가 문제다. 핵을 맞고도 육군놈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1억 총옥쇄같은 소리나 지껄인다. 수일간의 논쟁끝에 천황의 재가로 항복이 이루어지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육군은 총리암살과 쿠데타를 시도한다. 이걸 사네... 패전이라는 상황을 목도하고, 그는 종전내각의 총리로써 할 바를 다한다.
시데하라 가주로는 전후 평화헌법 9조를 발안한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으켰던 전쟁의 연쇄는, 맥아더와 군정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한다. 패전도 패전이지만, 전후질서의 수립을 위해서는, 비상한 조치가 필요했다. 다시 9조 개정에 대한 이야기가 끓어오르고 미친 자위대놈들이 중국대사관에 침입하는 오늘날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第9条 【戦争の放棄、戦力及び交戦権の否認】
① 日本国民は、正義と秩序を基調とする国際平和を誠実に希求し
  国権の発動たる戦争と、武力による威嚇又は武力の行使は、
  国際紛争を解決する手段としては永久にこれを放棄する。
② 前項の目的を達するため、陸海空軍その他の戦力は、これを保持しない
  国の交戦権は、これを認めない。
일본국 헌법 제9조 【전쟁 포기, 전력 및 교전권 부인】
①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초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바라고 추구하며,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요시다가 요괴는 요괴여. 자기 세력을 불리며 관료로 활약하다 반 도조 세력을 모아 모의를 하고 이로 처벌당한다. 이는 전후 까방권으로 작용하며 군정과 맥아더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된다. 경제성장을 중심으로,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논란을 종식시키고 자기 심복들을 내각으로 올리며 이후 정계의 발판을 쌓는다. 세부득이할때는 물러나고 필요한 경우 재선거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확보하며 장기간 총리로 재임하고, 보수의 우위를 확고하게 정립하며 전후 일본의 노선을 그려나간다.
297, 314, 326, 339p
요시다 시게루 보수정치가고 전후체제의 기틀을 잡았고... 동시에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보수본류를 구축함으로써 자민당의 안정적 정치기반을 구축하고 이는 이후의 폭발적 성장으로 이어졌음. 세계 2위의 GDP는 무엇으로 가능했는가. 전전체제가 헌법 9조와 경제본위의 정책지향으로 굳어지며 관 주도하에 경제가 배열되었다. 그 개입의 강도는 한국에 비추어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간접적이었으나, 성과는 분명하다. 미일안보조약이 그 초석이 되었고.
- 요시다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말이야 마쓰노 군. 미국이 영원히 주둔하지는 않을거야. 계속 이용당하리라곤 생각 안 해. 반드시 바뀔 때가 올 것이야. 미국이 철수하겠다고 말할 시기가 반드시 올 것이네. 그때 미국과 일본의 지혜 싸움이 벌어지겠지."
새삼 되새겨볼 말이다. 과연 앞으로 서태평양에서, 일본의 위치는 어떻게 될지.
사회당도 집권을 했네 놀라워라. 가타야마 데쓰 인상부터 좌파구만. 변호사 출신으로 농민총동맹에서 일하고 사회대중당에서 군부에 반대하다 탈탈 털리고 지하조직에서 활동하고 하토야마의 동교회에도 소속된다. 요시다가 정국 우이를 못잡을 것 같아 발을 빼자 얼덜결에 총리가 되자 그가 한 말은,
"이거 큰일났네."
그리고 큰일났다. 딱 9개월 집권했다. 정국도 정국이지만, 시기가 너무 이르게 찾아왔다. 그리도 전후의 혼란을 틈타 형법개정부터 내무성 폐지까지 평소의 개혁입법들은 잘 밀어붙였다.
하토야마 이치로도 참 인물은 인물이다. 전전에는 군부에 반대하고 전후에는 자기 파벌을 이끌며 중량감있는 인사로 자유당과 결합과 탈퇴를 반복하며 민주당을 만든다. 요시다의 실각 이후 제1당에 이르지만, 사회당의 약진은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점유하며 보수 양당에 위협을 가하고,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이 탄생하며 55년 체제가 구축된다. 이후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구도는 계속 유지된다. 쭈욱...
꼭 자기 목표를 이루기위해 총리가 될 필요는 없다. 이시바시 단잔은 아시아주의에 입각하여 조선, 대만, 만주의 독립을 지지하고 좌파들과도 폭넓게 교유하며 전후 정치에 나서지만 일본의 자주와 케인즈주의적 경제정책, 산업정책의 추구는 재벌을 해체하고자 했던 군정의 반발을 샀고 전범 혐의로 공직에서 추방된다. 이후 하토야마 내각에 입각하고 이후 전당대회에서 기시 노부스케를 누르고 총리가 되지만 65일만에 뇌경색을 맞고 총리자리를 기시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이후로도 중일수교를 염원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제를 밀어붙이고, 결국 1973년 죽기 전 중•일 수교를 목격하고 숨을 거둔다.
전후 총리들의 면면을 보다보면 뚜렷하게 전쟁에 대한 부채의식이 느껴진다. 전전의 활동경력이나, 전후의 정치적 의제들은 일본이 전쟁의 책임에 대해 어느정도 통감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한•일 관계나 중•일 관계나, 마냥 적대적인 것 만은 아니었다. 이후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과의 연계가 강화되는 것 역시, 감정적 부채감과 학연과 공통의 경험으로 맺어진 동류의식이 어느정도는 작용했다.
344, 350, 366, 373p
기시 노부스케의 역정이 참 특이하다. 대장성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농상성에 들어간다. 2차 산업혁명의 변화가 일본으로 전파되고, 그는 농산성에서의 경력을 발판삼아 만주국에서 압축근대화를 진두지휘한다. 총력전 체제를 빠르게 포착하고 그 단초를 탐구하는 모습도 인상깊다.
55년 체제는 비단 보수 정당간의 정략적 결합만은 아니었다. 제 혁신정당의 약진을 우려한 재계의 요청이 있었고, 그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각 파벌의 수장들의 판단이 있었다. 사회운동의 성장 역시 이를 가속화했다. 민주당 총무회장 미키의 양보와, 주요 위원을 중신으로 한 '대행위원제'의 설립, 그리고 이를 통한 선거에서의 승리는 이후 자민당의 통치를 공고히하게 된다. 이시바시에게 당냐선거에서 밀리고 그 내각에서의 외무대신 직을 수락하지만 이시바시가 병으로 쓰러져 그는 총리 자리에 오른다. 이 기반 하에 기시는 산업정책을 밀어붙이고, 친미 반공 노선을 확고히하며 자리를 수성한다. 그러나 1958년의 경직벚 파동과 이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놓고 곤욕을 치른 끝에 강행체결을 결의하면서, 그의 총리직 역시 막을 내린다. 당시 안보조약 개정은 쌍무성의 강화에서 군국주의로의 회귀에 대한 우려를 자극하며 극렬한 반대를 낳았지만, 냉전의 종결과 점증하는 안보위협은 이를 재평가하게 한다.
이케다 하야토는 대장성에 들어가 지방 세무서장이 되었으나 병으로 휴직하고 패전 당시에는 주세국장을 역임한다. 출세는 늦었지만 그 덕으로 공직추방을 면했다. 이후 민자당 출신으로 중의원이 되고, 요시다의 지명을 받아 대장대신이 된다. 대장대신이 된 후로는...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기록적인 특수를 맞이하게 된다. 1950년으로부터 1954년까지 5년간 누계 16억 1,873만 달러가 일본에 쏟아진다. 물론 이 와중에
"업자들이 도산해 자살하더라도 별 수 없다. 닷지라인이란 거대한 정책 전환 앞에서는 별수없다."라고 기자회견에서 답변한 것이 2년 반 후 다시 문제가 되어 패전 후 최초로 불신임을 맞는다. 다시 질문을 받아도 "(지하경제에 종사한) 경영주들이 구조개혁으로 인해 도산하고 자살하는 건 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한다. 총리 어케한겨...
기시 노부스케가 안보파동으로 사임하고 이케다는 서민적인 매력(골프를 안친다든지 기생이 나오는 요정에 출입을 하지 않는다든지)를 내세우며 친근한 이미지와 소득배증정책으로 패전 후 최대인 296명(63%)의 당선자를 내며 집권에 성공한다. 1961년을 기점으로 10년내에 소득 두배 올린다고 했는데 이런 경제가 연 10.9%씩 성장해서 7년만에 달성해버렸다. 수출이 1960년 40억 달러에서 1970년 193억 달러로 증가한다 1963년에는 GATT에 가입하고, 이듬해 IMF, OECD에 가입하며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다. 총리 임기말에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중소기업, 농림•어업의 근대화로 포커스를 옮기지만, 도쿄 올림픽 폐막 이후, 그는 건강악화로 총리에서 사임하고 1년 뒤 암으로 사망한다.
전후로 총리 재임기간들이 나날이 길어지는데 사토 에이사쿠는 특히 길다. 아베가 기록을 갱신하긴 했지만, 7년 6개월 연속재임은 장기간의 안정을 의미한다. 그의 재임기간 오키나와는 반환되었고, 박정희 정권과의 협력 하에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케다로부터 사토에 이르는 시기는, 경제발전에 있어서나 정치적 안정에 있어서나 전후사회 최고의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이양반이 구제5고 이케다 동창이구만... 심지어 동경제대 다닐때는 기시 노부스케 집에서 하숙을 했네. 입직을 철도성으로 한다. 오키나와 반환에서 비핵 3원칙을 적용하여 핵무기를 빼는 부분이 인상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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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키나와는 반환되고, 오키나와 반환을 정점으로 사토 내각도 막을 내린다. 총리에서 사임하고 2년 뒤인 1974년, 그는 노베루평화상을 받는다 평화상 수상 후 반년뒤, 그는 뇌출혈로 쓰러져 임종을 맞는다.
장기재임하고 업적도 이룰바는 다 이루었지만 대중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관료적 배경, 엄근진한 태도가 거리감의 원인이었다. 사람들에게 '에이짱'으로 불리길 원했으나 그런 꿈은 이뤄질 수 없었고, 마지막 기자화견에서 국민들에게 직접 대면해서 말하고자 했으나 기자들의 존재에 역정을 낸다. 그건 기자 탓은 아니지않나 싶은데...
그리고 포스트 전후사회를 상징하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가 된다. 그는 농가에서 자라나 도시로 나와 자신의 삶을 개척했으나, 대단한 학벌도 배경도 갖지 못했다. 만주국으로 가 삶을 개척하고 본토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다 중의원으로써의 삶을 시작한다. 의원으로써 건설행정에 깊이 관여하며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이 되게 입법으로 조조하는 사업가적 마인드를 유지한다. 당연히 어느정도는 정경유착이면서 어느정도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 한 인터뷰에서 다나카는 이렇게 말했다.
"민쥬정치는 투표정치이며, 투표정치는 정당정치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정치인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 정치인은 선거인의 의지를 위임받아 입법 활동을 해야 한다. 입법은 의원 입법이어야만 한다. 신한 법에서 입법권은 앙원(=중참의원)에 속하며, 정부는 의안 제출권만 인정 받고 있는 데 불과하다.... 행정부는 외교 예산 등 전권 안건 이외에는 입범부에 입법을 맡겨야 한다. 그러나 입법부가 하려고 마음먹어도 지금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역사가 짧고, 정당에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전후 정치가이며, 전전 체제와는 관련 없는 정치인 다나카는 전후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이 주인이란 점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대중민주주의는 그로부터 태동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 이를 바탕으로 정치인 개인 후원회가 등장한다. 정치의 힘에 의해 지역발전을 추구하려는 지역구와. 표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된 정치인의 유착 및 결속이 후원회인 것이다. 정치인은 자신이 "지역구에 도약이 되는 인물" 이라고 호소하거나, 실제 지역에 도움을 준 뒤 표를 얻었다.한 편 선거민은 지역의 민원 부탁에 열을 올렸고, 중앙에서 공공사업과 보조금을 얻어오는 정치인을 써먹을 수 있는 정치인 이라며 환영했다. 다나카는 써먹을 수 있는 정치인으로서 지역구의 기대에 부응했다.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력이 있었다. 다나카 후원회 조직인 월산회'는바로 이런 시절인 1950년대 초부터 선거구 구석구석 으로화 장된다. 다나카는 1932년 10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1등 당선했고, 이후 1등을 놓치지 않는다. -
소위 말하는 후원회 구조를 통한 지역 유지들의 여론취합과 정치자금 구축 역시 그로부터 출발한다. 이 월산회는 이후 지속적인 정경유착의 고리가 되며, 최대 9만5천명의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한다. 우정대신을 거치며 방송국과 언론의 민원을 해결해주고 언론에 자기 편을 심는다. 이후 대장대신이 되어 대장성에도 지도력을 행사한다. 무학의 대신이지만, "잘 아시다시피 나는 무학이다. 여러분은 천하의 수재들이다. 마음껏 일해 달라. 책임은 내가 진다" 고 말하는 대신에게 대장성의 관료들은 성의를 다한다. 경영인으로써 그의 감각과 본신의 능력, 결단역 역시 대장대신으로써의 경력을 순조롭게 이끌 수 있던 요인이었다. 크게 해먹으려면 머리가 비상해야한다. 이 시기 이후 이자나기 경기에 접어들며, 그는 고스란히 그와 사토의 성과가 된다.
1965년 야마이치 증권에 대한 무담보 보증이 독특한데, 당연히 대관업무를 통한 민원해결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무담보보증이 이후 야마이치 증권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생사 기로에서 대관으로 목숨건진 경험이 이후 야마이치증권의 지배구조를 대관에게 쏠리게 함으로써 버블 붕괴라는 충격 속에서 유연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전후에 셋업된 시스템이 결국 버블 붕괴로 인한 구조개혁의 희생양을 낳은 것이다.
자민당에서 3역이란 게 있는데 간사장 정조회장 총무회장이다. 간사장이 선거대책을 총괄하고 총무회장이 의사결정을, 정조회장이 정책결정을 담당한다. 다나카가 간사장 하면서 선거성적이 꼭 좋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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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왜 나가리났는지 아시는 사람들은 잘 아시겠지만, 열도개조론으로 부동산 폭등했는데 오일쇼크 크리맞고 물러난다. 이후 록히드 사건에서 미키가 그를 수탁수뢰죄로 기소하지만, 막후실세는 막후실세라 시이나 오히라 내내 버팅기다 결국 풍맞고 파벌에게 배반당하며 그의 영향력도 막을 내린다. 결국 자민당의 정치는 파벌정치이면서, 파벌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흐름이기도 하고, 그 정치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야당에게 약점을 노출당해 수권에 실패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총리로써는 짧은 재인기간이었지만, 막후 실세로써는 오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것이 포스트 전후사회의 헤게모니를 쥐었던 사람의 힘이며, 동시에 그의 쇠퇴가 전후질서의 해체를 알리는 조종이기도 했던 이유이다.
미키 다케오가 참 당에서 이역할 저역할 하며 비주류로 꿋꿋이도 정치를 해온 사람이다. 학생때부터 학교의 불분명한 예산전용에 항거하며 전학당하다니 싹수가 노랗구만 정치인의 싹이다. 뭘했다고 모리 집안에 장가를 들었대... 대단하네.
"모리(森)도 미키(三木)도 인수분해하면 똑같이 3개의 나무니까, 시집이 아니라 그냥 똑같은 집에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일 거다"
전전부터 군부에 반대하고 전후에는 하토아먀 내각의 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자민당 비주류 파벌로 안보협약 개정에도 표결에 불참하는 등, 주류와 불화하는 사람이었다. 이러니까 다나카 이후로 구원투수로 등장하지. "보수의 지류"라 불릴만하다. 다나카가 금권정치에 대한 지적과 경기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도 자파인 오히라를 후임으로 올리려고 하자 시이나가 중재하여 그는 총리에 오른다. 정치다금 규제법과 공직선거법 개정을 치르고 포드에게 록히드 사건 전말을 요청하며 기어코 다나카를 체포하고 구속시킨다. 총리 열전 보다가 종종 이런 대목들이 나오는데, 그래도 총리정도 되면 기개있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물론 다나카 파벌은 영수의 구속에 격분하여 미키 퇴진운동을 벌이고 그는 곧 사임한다.
후쿠다는 쟁쟁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총리 취임이 늦었다. 1차 가쿠-후쿠분쟁으로 밀린 탓이기도 하지만, 후쿠다 다케오 본인의 부족 역시 크지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일 외교에서 진전을 보고, 동남아시아에도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수교하며 '후쿠다 독트린'을 통해 이후 동남아시아와의 관계를 노정한다. 오히라도 나쁜 총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급사는 스즈키 젠코에게로 정권을 이양시킨다. 그는 '행정개혁'과 적자재정 탈피를 통해 국면을 전환시키고 다음 총리를 위해 정책을 운신할 수 있는 룸을 만든다.
다나카로부터 미키, 후쿠다, 오하라, 스즈키까지 긴 선발들의 시대를 지나 총리들의 재인기간이 짧아진다. 오일쇼크 이후 전반적으로 불어오는 구조개혁의 바람속에서, 일본은 이전 시대에 비해 낮은 성장률과 변화하는 시대에 맞춘 새로운 틀을 구성할 것을 요구받는다. 영미로부터 불어오는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시대에, 일본 역시 조응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가정의 개인화와 소비사회로의 전환은 일본 사회를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키고 있었고, 이는 1980년대에 들어서며 새로운 흐름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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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제대 나와서 내무성으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후 대전기 해군으로 옮기는데... 왜 이런 선택을 했지? 특이한 일이다. 전후 중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생활을 시작하는데, 이 지역구에서 20번 당선되는동안 1위로 의원 되본 적이 없다. 1위는 후쿠다 다케오가 했다... 1차 가쿠-후쿠 전쟁 때 다나카 편을 들면서 승리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고, 이는 이후 총재선에서의 지지로 보답받는다. 후쿠다는 총-총 분리를 꺼내들며 권력 분점을 압박하지만 다나카의 지지를 받은 나카소네는 이를 물리치고 권력을 독점하며 각료 중 여섯자리를 다나카 파에 배분한다.
나카소내는 국철을 민영화하여 분리하고, 전전공사와 전매공사 역시 민영화한다. 당시 국철의 적자는 심각한 수준으로, 그 해체는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이 되었다. 적자의 원인에서 정치의 책임을 빗겨낼 수는 없다. 과잉투자와 과잉고용은 국철의 부채를 가중했고, 운수비용의 통재는 그 해결을 어렵게 했다. 민영화 과정에서 당연히 국철 노조는 반발했지만, 오일쇼크와 저성장, 그리고 사회세력의 약화와 분열은 저지운동의 실패로, 국철의 분리와 민영화로 귀결되었다.
이외에도 나카소네 시기 자율적인 정책의 구성과 개발의 허여는 부동산 광풍과 교외 개발로 이어졌고, 버블의 단초가 된다. 정작 필요했던 산업의 구조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이는 이후 국가적 부채가 되어 돌아온다. 나카소네의 정치활동애서 특출난 것은 TV 등 미디어의 활용이다. 그의 풍채는 일-미 정상회담에서 레이건과 대비되며 이채를 자아낸다.
다케시타 노보루는 파벌의 성격을 연구회로 전환하며, 다나카 파를 벗어나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며 그의 지배에 종언을 고하고 새 시대를 구축한다. 다만 다가올 시대라는 것이 총리를 하기에는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 헤이세이 시대의 첫 총리로, 나카소내도 실패했덩 소비세를 도입하지만 이내 리쿠르트 사건으로 물러나고 만다. 이후의 버블 붕괴에서, 과연 그의 시기 대장성의 정책이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 뒤로 총리가 몇명 등판했다 사라지고, 기어코 자민당 체제가 붕괴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에 오른다. 자민당은 리쿠르트 사건을 정치개혁으로 돌파하고자 했고, 호소카와는 이를 이어받아 기존의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비례제로 개혁하며 국민복지세(7%)를 입안하지만 내부적 협의의 분재로 내흥을 겪고 이후 NTT 도코모 사태로 사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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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이 딱 두번 집권하는데 그 마지막 집권은 비극으로 귀결된다. 무라야마는 점증하는 안보적 위기에 대해 자위대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냉전 이후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각각 국기와 국가로 인정한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명문화하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창설한다. 그러나 한신 아와지 대지진에서 방재대책 등 정부의 기능에 결한이 있음이 드러나고, 옴진리교 사건은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한다. 버블로 인한 부실채권문제가 폭발하며 그는 사임하고, 이후 일본 사회당도 분열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하시모토가 소비세를 5%로 올린다. 헤이세이 30년을 이야기할 때 소비세는 빠지지 않는 주제지만, 과연 소비세 인상이 정량적으로 그만한 충격으로 귀결되었는지는 논란거리이다. 부가가치세 세율이 오른다고 디플레이션이 지속된다는 게 과연 맞는 얘기일까. 부가가치세 충격은 일회성이고, 심리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어도 지속적인 충격을 가하지는 못한다. 요는 인구축퇴압과 대차대조표 불황에 가깝다. 어땠든 그렇게 하시모토는 왔다가 간다.
오부치 내각은 방향을 성회하여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경기부양에 나선다. 물론 잘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내각에서 시도된 정책적 아이디어들은 이후로도 이어지며 결실을 맺는다. 요는 구조개혁이고, 순조로운 이행이었다. 우정민영화로부터 노사관계법 개정과 고령화 사회에 맞는 체제의 개편 등, 많은 아이디어가 사회로부터 유입되어 정책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 역시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이후 모리를 거쳐 고이즈미로, 총리는 바뀐다.
전전으로부터 전후, 고이즈미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총리를 역임하며 일본을 이끈다. 유신지사들로부터 육해군 출신, 관료(거의 대장성)들로부터 시작하여 다나카 이후 민간 출신의 정치인들까지, 장구한 흐름 속에 총리의 역할도, 권력도, 성격도 시대에 맞춰 변화한다. 전전에는 군부와 조율하며 최소한의 브레이크를 했어야했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선거로부터 정당의 확립까지 기초를 쌓아 전후를 준비한다.
전후 요시다 시게루에 의한 일본 구상은 일본을 궤도에 올리고 기시로부터 다나카까지 일본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지만 그 모순들 역시 폭발한다. 그러나 좌파는 아사마 산장사건을 기점으로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빗겨나 쇠하고, 거대한 성장 속에서 개인화와 소비주의의 약진은 버블로, 나카소네 시대의 자유화로 이어진다. 버블이 붕괴하고, 내각은 다시 혼란에 빠지며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계투라고 해서 공을 던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혼란기에도 다음 시대를 위한 발판들은 차곡차곡 마련된다. 대차대조표 공황이라는 드문 사태와 인구축퇴압은 일본 사회를 지난 30년간 옥죄어왔고, 점증하는 안보위기와 세계체제의 변화는 오늘날 서태평양의 일본에게 시대적 질문을 던진다. 전전의 군국주의는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지만, 이제는 전후의 평화주의가 다시 시험대에 오르고있다. 과연 오늘날 일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그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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