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야오방의 실각으로 민주파와 개혁파의 흥기는 막을 내리고, 다시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된다. 책을 읽으면서 깃발 선명하게라는 말을 참 여러번 목격하게 된다. 선명하게 보이는 깃발의 붉은 색은 혁명의 과정에서 희생된 이편과 저편의 사람들의 피로 물들어있다. 그 깃발이 이제는 인민을 내려친다.
1장. "1988년, 잊을 수 없는 한 해"
여전히 계획경제의 구조는 중국을 옭아매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이중가격제이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는 1998년 상하이 석탄가격에서 1톤당 계획가격 70위안, 시장가격 120위안, 실제 인수가격 170~210위안이었다. 아니 입찰권만 따면 세배장사가? 따라서 관다오官倒가 성행한다.
이는 비단 상품만이 아니라 신용, 외환에도 적용된다. 전매회사가 30만개, 3차산업 종사자의 43%가 이에 종사한다. "10억 인민중에 9억이 장사를 하고, 모두가 함께 중앙을 속이네"라는 말처럼 적절한 비유가 없다. 따라서 베이다이허 회의애서 이중가격의 처례와 시장화에 대한 방향이 정해지고, 이에 따라 사재기가 성행하며 물가를 밀어올린다. 그간의 고성장 역시 물가상승을 유발했지만, 이번 인플레이션은 격이 달랐다. 통화량 역시 급격히 증가한다. 1987년 통화량은 전년대비 174% 증가하여 물가상승에 기름을 붓는다. 이는 지방정부의 무분별한 국책사업에도 기인한다. 1988년 물가상승률은 18.5%, 1989년은 17.8%에 달한다. 따라서 '치리정돈治理整顿'에 들어간다. '치리'는 신용 팽창을 억제하고, '정돈'은 '관다오'를 비롯한 유통질서를 바로잡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국무위원이며 중국인민은행 행장이던 리구이센의 말에 당대의 엄혹함이 잘 나타난다.
"현재 화폐 및 신용 대출의 상황이 낙관할 수 없고, 금융 형세가 매우 엄중하다. (……) 일부 지방은행의 동지들이 말하기를, 1988년은 잊을 수 없는 한 해(難忘的一年)이고, 1989년은 지내기 힘든 한 해(難過的一年)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실제 상황이 되었다."
자오쯔양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물가정책의 실패는 그를 노리던 보수파들의 반격으로 나타났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사상해방과 학생운동에 대한 유화적 태도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이는 1989년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채소가격이 50%, 식료품가격이 30~60% 오르는 건 답이 없다. 이는 1985년부터 이어진 농업생산성 정체의 결과이기도 했다. 경지면적의 축소와 화학비료의 남용이 생산량과 생산성의 저하로 나타났다. 실업률 역시 팽창한다. 1988년 상하이의 실업률은 18~25%로, 전체 대도시 평균 실업률 역시 2~3.5%로 나타난다. 지금 관점애서 보면 자연실업률이지만, 계획경제 하의 중국인민들에게, 성장의 가도 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는 큰 불확정성으로 다가왔다. 덩샤오핑 장남 덩푸팡 역시 이 와중에 중국캉화공사에서 관다오로 한몫 챙기시면서 이 흐름에 불을 지른다.
치안 상황 역시 악화한다. 뇌물수수사건은 1989년 1분기 전년 동기대비 26.6%, 강도와 절도 등 중대 사건도 50.7% 증가한다. 특히 묘지도굴이 성행하는데, 총서기 모친 무덤도 예외가 없다. 자오쯔양 모친 무덤도 치안악화로 도굴당하다니 세태를 알만하다.
1988년 서커우에서 '교육전문가'와 '채금자'사이의 논쟁도 고압적인 당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조국애, 체제 문제에 대해 좌담회에서 논쟁이 붙고, '교육전문가'는 이 논쟁에서 드러난 사상적 차이를 보고서로 올리고 공중파에서 비판한다. 서커우 영도간부들도 지역 청년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지역지에 반박문을 게재하고, 사태는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결국 인민일보까지 사건이 올라가고 이는 대중적 논쟁으로 비화한다. 당의 위기관리능력 대단하다... 저급홍색선전으로 사단내고 일 키우고 전국적으로 사고를 친 저 '교육전문가' 누구냐.
문화적으로도 당의 지배를 되새겨보는 사건이 발생한다. 1988년 6월부터 방영한 다큐멘터리 '하상'은 그간의 '문화열'과 '상흔문학'이 결합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중국의 내부지향적인 '황토문명'을 보수주의, 무지, 수진성으로 규정하고, '청색 해양문명'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을 학습하여 시장경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다큐멘터리가 방영이 된다고? 영상매체인데? 광파사업국(구 광전총국)이 이걸 보고도 틀어줘?
주요 대도시의 대학을 중심으로 '연구회', '토론회', '살롱'등이 등장하며 사회담론은 확산 전파된다. 그 중심에는 베이징 사회•경제•과학 연구소, 통칭 사경소가 있었다. 사경소는 담론의 허브 역할을 하며 지식인들의 주장을 유통하는 허브로, 천안문 항쟁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당내 보수파들이 발작할 만 하다.
언론에서 자유주의를 선전하고 자유주의 소조가 대학마다 생기고 사경소는 허브역할을 하고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계급투쟁에 평생을 바친 보수파들 눈 뒤집어지는 소리 잘 들린다. 그렇다면 그것이 현실적 국면과 잘 조응했는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후야오방은 소통과 견인을 이야기했지만, 그 전에 있어서 담론의 확장과 인텔리의 팽창이 사회 제반과, 물적토대의 성숙과 조응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일체양익이라니 사회운동도 당 표어처럼 제시하는군. 새로운 사상과 정책을 제시하며 민간 반체제 활동을 육성하고 정책 토론회를 통해 여론을 반영한다.
학생들의 시위 역시 팽창일로였다. 1988년 25개 도시 77개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대학을 급격하게 불려놓으니 그 질이 통제가 되기 어렵다. 급식부터 생계비, 취업까지 불만들이 저마다 산발적으로 투사된다. 1988년 6월 1일 베이징 대학에서는 학생이 노상강도에 찔려죽고, 이를 계기로 [위기! 중국!]이라는 슬로건으로 대중시위가 일어난다. 이는 금새 진압되었지만, 이후 천안문 항쟁으로 이어지는 전략을 예비한다.
당 역시 이에 기민하게 대처한다. 당 간부들은 대학생 1만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당 권위의 하락, 사상적 이탈, 부정부패에 대한 환멸과 비판의 흐름을 감지한다. 개혁개장에 대한 환멸 역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당대의 유행구에서 그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문혁 10년은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개혁 10년은 무주의정부(無主義政府)”, “문혁 10년은 10년 동란(動亂), 개혁 10년은 10년 난동(亂動)”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 흔들리는 청춘들에 바치는 송가다. 누군가는 토플을 공부해서 유학갈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마작과 카드에 몰두한다. 대학 수는 1977년 404개에서 1988년 1975개로 5배 증가하고, 대학생은 동기간 62만 5319명에서 206만 5923명으로 3.3배 증가한다. 원래는 대학만 가도 나오던 생계비가 장학금으로 바뀌며 공부 못한 놈은 못받는다. 당연한 거 아니야?
취업자리 역시 문제가 된다. 졸업만 하면 당정기관이나 국영기업에 꽂히던 시대는 지나가고, 자동으로 직업을 분배받던(!) 방식에서 쌍방향 선택제가 되면서 직업을 못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그래서 실업자가 얼마냐? 연 3천명이다. 대학생이 2백만인데.
1989년이 참 여러 날들이 겹치는 해이다. 5.4운동 70주년, 건국 40주년, 개혁개방 10주년. 학생들은 이에 따라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한다. 당대 사회의 풍광을 겪은 이들 역시 차오르는 사회적 불안을 몸으로 느낀다. 개혁개방이 진행되며 사회적 마찰은 점증하지만 당은 이미 후야오방의 퇴진에서 그 구조적 수용을 거부했고, 사회적 불만은 거리로 응집되고 있었다. 구체적인 세계관도, 전략전술도 없는 상황에서의 갈등은 극한 대립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부. 텐안먼 민주화 운동
2장. 후야오방 추모와 민주화 운동의 시작(4월)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한다. 实践是检验真理的唯一标准, 실천은 진리의 유일표준이라는 명제로 개혁개방의 사상적 기초를 세우고, 사상해방으로 다양한 지의 탐구를 보장하며, 지식인과 학생들의 편에서 소통과 인도를 강조했던 그의 죽음은 학생, 지식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전통적으로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의 시위는 이와 같은 공인된 대중적 결집으로 시작했고,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덩샤오핑의 이에 대한 반응은 아래와 같았다. 덩의 비서 왕루이린은 말한다.
"샤오핑 동지는 야오방 동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에 피우고 있던 담배를 껐다. 열 손가락을 힘없이 교차하여 가슴에 대고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얼마가 지나고, 다시 담배를 들어 맹렬히 피웠다. 자오쯔양이 방문할 때에는 이미 평정을 찾았다."
후야오방도 그가 선택한 후계자였다. 인민성과 당성 중에 후야오방은 인민성을 쫓았고, 덩은 그를 당성으로 내친다. 학생들은 분향소를 차리며 대자보로, 현수막으로 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한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
야오방은 이미 죽었고, 좌파가 또다시 번성하니, 국민이여 깨어나라, 투쟁을 잊지 말라.(베이징대학)
87)
야오방 동지는 민주운동의 최전선에 선 강한 투사다. 그의 서거는 중국 인민에게 메울 수 없는 대손실이다. 우리들의 비할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상하이 푸단대학)
보수파에 대한 반감, 그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인격에 대한 존경이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의 동인이었다. 후는 고지식하면서도 청렴한 사람이었고, 그런 성품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4월 18일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 왼편의 인민대회당에서 100명이 연좌농성을 벌이며 7개 요구안을 전국인대와 당 중앙 판공청, 국무원 판공청 신방국에 접수한다. 아래는 그 요구안의 내용이다.
1 후야오방의 시비공과(是非功過)를 다시 평가하여, 그의 민주·자유·관대함·조화의 관점을 긍정하라.
2 정신오염 제거 및 부르주아 자유화 반대를 철저히 부정하고, 억울하게 박해받은 지식인을 사면 복권하라.
3 국가 지도자 및 가족의 연봉과 일체의 수입을 인민에게 공개하고, 탐관오리를 반대하라.
4 민간 신문을 허용하고, 보도 금지를 해제하여, 언론 자유를 실행하라.
5 교육 경비를 증액하고, 지식인 대우를 제고하라.
6 베이징시 정부가 제정한 시위와 관련된 ‘10조(條) 규정’을 취소하라.
7 정부 지도자는 정부 실책에 대해 인민 앞에서 공개 검토(檢討)하고, 민주 형식의 선거를 통해 일부 지도자를 교체하라.
후야오방 재평가, 지식인 사면복권, 부패 반대, 언론자유, 교육비 증액, 집시법 폐지, 감독권과 일부 직접선거.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요구안의 수준은 대단히 높지 않았다. 당의 정책에 반기를 든 것도 아니요, 전면 민주화와 인신의 자유, 소유권의 확립을 요구하며 체제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그간의 사회운동으로 인한 탄압에 반대하고, 사회적 공간을,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당에게 이는 다른 문제로 다가왔다. 4월 19일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2만여명의 학생들 중 베이징대학, 런민대학, 베이징 사범대학, 정법대학 학생 2000~3000명이 중난하이의 출입문, 즉 신화먼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한다. 중난하이는 중국 당 중앙위원회, 국무원, 최고지도자 관저가 있는 곳이다. 청와대 출입문을 뚫은 격인데 중국 공안놈들 뭐했냐...? 이래서 후야오방이 말할 때 싸게싸게 무경 만들고 핵심지 방어를 잘 했어야지 황당하다. 리펑은 이와 같은 일은 문혁때에도 없었던 것으로 매우 큰 충격이었다고 기술한다. 맞는 말이다. 이건 한국 기준으로도 큰 사건이다. 당은 이를 기점으로 태도를 변화하고, 운구차 행렬에 군을 대동한다. 이는 중앙군위 주석 덩샤오핑의 비준하에 부주석 양상쿤이 결정한다. 4월 21일 추도사는 후야오방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기린다.
"동지들, 오늘 우리는 침통한 심정으로, 오랜 시련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戰士),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자 정치가, 우리 군의 걸출한 공직자(工作者)로서 장기간 당의 중요한 영도 직무를 담당한 탁월한 영도자인 후야오방 동지를 추모한다."
그의 가족은 후를 평가하는 칭호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붙여줄 것을 요청한다. 그의 사상적 기여를 생각하면 안될 말도 아니지만, 당중앙, 정확히는 덩은 이를 거부한다. 당성을 버린 이에게 그는 자비가 없다.
리펑은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기다리는 학생들을 길바닥에 세워둔 채 쌩하니 지나가버리고, 이는 국민적 공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월 23일, 고자련(베이징 고교학생 자치연합회(고교=대학))이 출범한다. 여러 대학이 한데 모인 조직이 구성된 것이다.
고자련은 학생운동의 중심부로 활약했다. 4월 27일 시위, 5.4운동 기념시위를 조직하고, 대표적인 소통의 창구가 되어 의견을 종합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 자오쯔양은 상황 컨트롤을 리펑에게 맡기고 4월 24일 약속된 방북일정을 수행한다. 그에게 자리에 남아야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사건이 곧 종결될 것으로 판단하고, 또는 책임을 리펑에개 넘기기 위해 북으로 가는 여로에 오른다. 그리고 리펑은 학생운동의 성격규정을 당 중앙에 요구하고, 덩샤오핑은 결정한다.
"이것은 계획적인 음모고, 그 실질은 근본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전 당과 전국 인민에게 분명히 말해야 하는데, 이것은 전 당과 전국 인민 앞에 펼쳐진 엄중한 정치투쟁이다. 반드시 깃발 선명하게 동란을 반대해야 한다. (……) 이번 학생운동은 자유화 반대가 철저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고, 정신오염 반대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운동은 동란으로 규정되고, 당의 결정은 내려졌다. 민주집중제 하에서 한번 결정이 내려지면 다른 목소리는 있어선 안되고, 당은 그에 복무해야한다. 4월 26일 <반드시 깃발 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하자>는 사설이 인민일보에 게재된다.
必须旗帜鲜明地反对动乱.
"그들은 민주의 깃발을 들고, 민주와 법제를 파괴하고 있다. 그 목적은 민심을 흩트리고, 전국에 혼란을 일으키며, 안정과 단결의 정치 국면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획적인 음모고 동란이다. 그 실질은 근본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 당과 전국 인민 앞에 펼쳐진 엄중한 정치투쟁이다."
사설의 목적은 운동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전선은 그어졌고, 저편에 있는 것은 계급의 적이다.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이라면, 문언을 읽고 그 행간을 유추할 수 있는 이라면 누구나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대한다.
“4·26사설은 마치 중성자탄이 대학 상공에 터진 것과 같았으며, 학생들의 반응은 10일 중 최고조에 이르렀다.”
4.27시위로 사람들이 운집한다. 당대 베이징 인구 천만 중 400만은 근교의 농민으로, 630만 만이 도심 거주 인구였다. 그중 백만이 천안문 광장으로 운집한다. 당의 행사가 아닌 자발적인 시위에서 이정도 인원이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외친다.
“중국의 앞길을 위해 아홉 번 죽어도 후회는 없다!”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어머니, 우리는 잘못이 없습니다!”
“청렴한 중국공산당 만세!” “당의 정확한 영도를 굳건히 옹호한다!” “공산당 옹호, 사회주의 옹호!” “신문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 “평화적 청원은 결코 동란이 아니다!” “깃발 선명하게 탐관을 반대한다!” “학생운동을 진압하면 결코 끝이 좋지 않다!”
반당적 행위라는 규정에 대해 그들은 이야기한다. 이것 역시 사회주의이고, 인민의 외침이라고. 인민성과 당성은 선행하는가 후행하는가. 인민성의 전진 앞에, 당성은 그를 인도할 것인가 추종할 것인가. 그 관계는 항구적인가? 인도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리펑 등 보수파 지도자들은 학생들과의 좌담회를 추진하지만, 이는 그저 허례허식에 지나지 않았다. 소통의 장이라기보다는 당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리였고, 전달된 당의 의사라는 건 아래와 같다.
1 부패 문제에 대한 답변: 공산당은 전체적으로 보면 좋다. 만약 완전히 내부에서 철저히 부패했다면 당은 변질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당을 옹호할 필요가 없고, 나도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2 신문의 진실 보도 문제에 대한 답변: 우리 국가는 현재 신문 검열제도가 없다. 현재 실행하는 제도는 각 신문의 편집장 책임제다. 그런데 편집장이 만약 어떤 항목의 보도, 어떤 문장, 어떤 사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유관 지도자나 부문에 봐달라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3 ‘4·26사설’ 문제에 대한 답변: 우리는 대학 내에 ‘배후 세력’이 있으며, 그들은 직접 파괴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해롭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조성하는 동란은 더욱 크다. 현재의 많은 수법과 문혁 때 사람을 놀라게 한 수법이 상당히 유사하다.
이렇게 성의없게 고압적으로 답변을 하면 집에 가고싶은 사람도 돌아나오게 된다. 당은 옳고 너희는 틀렸으며 배후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면 누구라도 배후세력이 되고싶게 만드는 일이다. 이건 시위를 정리하고 싶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위안무구어(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조롱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자오쯔양은 원칙적으로 당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중가격제 개혁의 실패와 기록적인 대중운동은 총서기로써의 그의 입지를 위태롭게 한다. 사상해방에 대해 보였던 유화적인 태도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학생들과 함께할 것이냐 당의 총서기로써 자리를 보전할 것이냐. 어차피 총서기직은 이런 사태 앞에서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 뒤는 당의 이면으로 들어가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당을 저버리는 것은, 그간의 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오쯔양 역시 공산당원이었고, 지방당료에서부터 올라와 토지개혁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 문혁기간에는 은닉재산 찾아내기로 농촌을 들쑤셨다. 당에는 훌륭한 인재요 인민에게는 종종 재앙이었다. 그에게 선택의 순간이 온다. 당성이냐 인민성이냐? 이면의 복잡한 정치적 계산과, 서늘한 당의 무력 앞에서 그는 선택을 한다.
시위는 장기화되고, 요구조건은 점차 모여간다. 그 투사방식 역시 다양해진다. 정치협상 또한 그 방식의 일부였다. 동란 규정의 철회, 부패 반대와 정치개혁,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보장, 고자련의 합법성 인정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핵심은 동란 규정의 철회와 고자련의 합법성 인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성이고, 당의 결정의 무오류성이다. 그리고 자오쯔양은 5.4담화를 통해 그 무오류성에 균열을 낸다. 당의 입장을 견지해야 할 총서기가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당의 원칙에는 어긋난다. 하지만 동시에, 인민의 편에 서는 일이다.
"그들[학생들]은 절대로 우리의 근본 제도를 반대하지 않으며, 우리 업무 중 잘못된 것을 개혁하여 없애라고 요구할 뿐이다. (……) 학생의 행동을 이용하려는 혹은 이용하고 있는 시도는 없는가? 이처럼 방대한 중국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동란의 출현을 희망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 이런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경계해야 하고, 내 생각으로는 절대 다수의 학생도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다."
당연히 당정간부와 일선 관계자들은 당혹감을 표한다. 일단 결정이 되면 당의 입장에 복무해야한다. 그게 당의 원칙이다. 유화적 입장을 취하려고 해도 절차와 방식이 있다. 차라리 진압을 해서 해산시키는 것이 인도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물꼬를 트는 것이 문제가 된다. 특히 폴란드 자유노조가 정국을 뒤흔들고 동유럽이 흔들리는 국면에서는 더더욱. 깃발 선명한 태도를 굳건히 견지하자는 것이 당의 입장이다.
기치선명, 旗帜鲜明
네 글자 아래 완리는 전국인대에서 집시법 개정을 입안하고, 덩샤오핑은 다시 한번 이를 강조한다. 특히 5월 중순 고르바초프의 방중일정 전까지, 천안문 광장의 치안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천안문 광장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심후하다. 공산당의 중국 해장으로부터 문화대혁명까지, 광장은 당의 것이었고, 당에 의해 인민에의 영도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중국 공산당의 심장인 것이다. 5.4담화에 대한 질책이 이어지고, 단호하게 대응한 장쩌민과 리루이환에 대한 치하가 계속된다.
3장. 단식 농성과 계엄령 선포(1989년 5월)
5월 11일 우얼카이시, 왕단, 차이링 등 6명의 학생 활동가가 단식을 시작한다. 이들은 고자련 지도부였지만, 고자련의 전술은 정부와의 대화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지와는 다르게 단식으로 국면을 돌파하고자 한다. 이는 당시 대중운동이 소강국면이었던 것,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방중이 근시일 내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을 예정하고 일어난 일이었다. 이로써 고자련은 분열되고, 양자는 각기 다른 선동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단식의 호소는 아래와 같다.
"우리가 굶주릴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슬퍼하지 마시라. 우리가 생명과 이별할 때, 삼촌과 이모는 마음 아파하지 마시라. 우리에게는 단지 하나의 바람이 있으니, 바로 여러분이 더욱 잘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하나의 부탁이 있으니,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죽음이 아니다! 민주는 개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 사업은 결코 한 세대가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다른 세대를 위해 필요한 선택이 단식이었을까? 생긴지 얼마 안된 조직의 통일성을 존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필요한 일 아니었을까. 단식이라는 전술을 선택함으로써, 양자는 극한대치에 들어간다.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었으면 전경 투입해서 연행하고 감옥애서 단식시켰다.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 공산당이 대중시위 대응에 서투르다. 인민이 항상 당의 영도에 복종하는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탓일까. 말하자면, 개혁개방이 낳은 새로운 세대에 대해 공산당의 노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의 방중일정이 5월 15일로 17일에 잡힌 상황에서, 중국의 체면은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었다. 대립의 강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말 그대로 모든것을 걸고 필사적인 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자신들을 지지해준 사람들을 위함만이었을까. 투쟁이 극한대립으로 치달으며, 자오는 막다른 벼랑에 몰린다. 기존에 내세웠던 자신의 입장이 스스로를 옭아맨다. 천안문 광장의 점거가 고르바초프 방중행사의 격을 떨어트린다는 것은 당 원로들에게 치욕적인 일이었다. 말 그대로, 당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기도 한 것이다. 천윈은 덩에게 따진다.
“학생들이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활동으로 당을 핍박하고 있는데, 혁명을 위해 피를 흘린 수천만 명의 열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노인들이 지고있는 삶의 무게와 청년들이 이고가는 삶의 무게가 광장에서 충돌한다. 통전부장 옌밍푸는 5월 13일 정부와 지식인,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호소한다. 합리적인 요구를 충실하게 해결할 것이니 중소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게 협력하자고. 그러나 학생들은 귀를 닫는다.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통일되지 못했다. 언제나 대중운동에서 의견의 통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면 자신들이 지고있는 대의와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의 마음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야한다.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이 대안을 내세울 수 없다. 이것은 이후로도 반복되는 당의 회유전략이지만, 이미 수많은 군체사건을 통해 정립된 당의 대응방식이기도 하다. 당이, 채찍만 쓰지는 않는다. 의사는 암중으로 반영된다. 당의 체면을 상하지 않게 한다면, 개선은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선택을 내릴수는 없었다. 스스로들 책임을 지고 중지를 모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험이, 협상 테이블에서 필요한 선에 합의하고 그걸 대오에 관철시킬 정치력이 없었다. 지식인들 역시 이에 동참하여 대화와 타협을 촉구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들의 주장에 귀를 닫는다.
“너무 늦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팔아먹는다.” “어떤 사람이 이미 정부와 거래했다.”
너네 팔아먹어도 이득도 안된다. 상투적인 자의식 과잉이다. 무엇을 위해서 거리에 나서나. 단식은 분명히 대중적 성원을 불러온다. 그러나 모인 열기를 어떻게 정치로, 제도로 풀어낼 것인가. 미리 준비하지 못한 사회적 폭발은 방향을 잃고 해메인다.
결국 중소 정상회담은 공항에서 약식으로 개최되었다. 떨리는 덩의 손이 젓가락에서 음식물을 떨어트리는 장면은, 전세계에 중계되었다. 그날 저녁 자오쯔양과 고르파초프가 중난하이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자오쯔양은 13차 당대회에서 이루어진 '비밀결의', '덩샤오핑의 특수한 지위', 즉 원로회의에서의 최종결정권에 대해 발설한다. 이는 명백히 덩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었고, 당의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식정치 이면에 있는 원로정치의 실체를 폭로하는 일이기도 했다. 견제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며 의견을 관철하는 원로정치야말로, 사태의 근원이기도 하다. 덩리췬도, 후차오무도 결국 보수파 원로들의 말에 불과하다. 학생들은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덩은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자신의 집에서 개최한다. 그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전선을 긋고 태도를 분명히 한다. 그는 말한다. 결코 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역사적 성과는 퇴보한다고. 동란을 저지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공산당과 정부가 져야하는 사양할 수 없는 책임이라고.
그리고 자오쯔양은 자리에서 물러나 사표를 낸다. 그의 의견은 덩샤오핑 동지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으며, 더이상 총서기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이미 국면은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고, 그는 결연하게 선택한다. 미꾸라지처런 굴어온 세월이 있지만, 선택의 순간 그는 자기 앞에 온 잔을 피하지 않는다. 규율도 없고 신의도 없는 무책임한 총서기라는 비판을 받아도, 그는 인민의 편에 선다.
우얼카이시는 리펑과의 대담에서도 시종일관 건방진 태도로 일관한다. 논제는 우리가 정한다니. 책임있는 사람의 말은 아니다. 리펑은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다. 단식을 중단하고 해산하라고. 그리고 대화는 끝난다. 이것이 당의 최후 통첩이었다. 계엄이 발동하고, 군의 배치가 시작된다. 일부 장성들은 자신들에게 알리지 않고 병력배치를 논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뿐이었다. 오직 38집단군의 군장 쉬친셴만이 명령의 집행을 거부하고 항명한다. 그는 구금되었다.
5월 19일 새벽 4시에 자오쯔양은 원자바오, 뤄간을 대동하고 광장을 방문한다. 그의 마지막 공개활동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호소한다. 사태가 엄중하다고. 단식을 중단하라고.
"학생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다.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를 비판했는데, 당연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 현재 가장 중요한 일은 빨리 이번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다. 나는 안다. 여러분의 단식은 당과 정부가 여러분이 제시한 문제에 만족할 답을 제시하기를 바라기 위한 것임을. (……) 그러나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여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단식이 이미 7일째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여러분이 반드시 만족할 답을 얻어야만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안 된다. (……)
여러분은 아직 어려서 앞날이 길다. 여러분은 건강하게 살아서 중국이 네 가지 현대화를 실현하는 그날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이미 늙었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국가와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을 길러 대학에 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현재의 상황은 이미 매우 엄중하다. 여러분도 안다. 당과 국가는 매우 조급하고, 전체 사회는 모두 매우 우려한다. 게다가 베이징은 수도다. 각 방면의 상황이 하루하루 엄중한데, 이런 상황은 계속될 수 없다. 학생 여러분은 좋은 생각으로 국가가 잘되기를 원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발생하여 통제를 잃으면, 각 방면에 엄중한 영향을 조성할 것이다. (……)
결론적으로, 나는 이 바람뿐이다. 만약 여러분이 단식을 중단하면, 정부는 이로 인해 여러분과의 대화 문을 닫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 마지막으로, 학생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간청한다. 냉정하게 금후의 일을 생각하라고. 매우 많은 일은 결국 해결될 수 있다. 여러분이 단식을 빨리 종결하기를 바란다. 학생 여러분 감사한다."
새삼 그의 연설을 보면 그는 공산당원이라기보다는 대중정치인의 적성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학생들은 그에게 성원을 보내고, 사인을 요청하기도 한다. 당 간부들은 그의 체통을 잃은 행동에 재차 분노한다. 국가경제체제 개혁연구소, 국무원 농촌연구센터 발전연구소, 중신공사 국제문제연구소, 베이징 청년 경제학연구회 3소1회는 시국성명을 발표하며 인민의 선택을 강조하고 특별대표대회로 상황을 해소할 것을, 단식을 중단하고 인민의 의사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한다.
"국가는 인민의 국가고, 정부는 인민의 정부며, 군대는 인민의 군대로서, 중국 현대화의 역사적 조류는 어떤 역량으로도 막을 수 없다."
다시한번, 인민성과 당성이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국가를 전면 영도하는 전위당이다. 이 사람들이라고 그걸 몰랐겠는가. 인민성으로 당성을 관철하고자 했던 것이다. 5월 19일 저녁 계엄이 실행된다는 사실과 자오쯔양이 실각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단식중단과 연좌를 호소하며, 노동자는 파업하지 말 것을, 다른이들은 학교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어떤 파란이 닥칠지,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리펑은 5월 20일 저녁 10시 베이징 8개 구역에 대해 계엄을 선포한다. 계엄의 선포에 대해 베이징과 전국은 비판으로 들끓어오른다. 다수의 지식인, 당정간부, 시민은 이를 반대하고, 전국의 132개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5월 20일 천안문광장과 북경 시가지에는 항전의 분위기가 만연했고, 군집한 10만 군중은 주요 길목을 막아서고 베이징에 진출한 1만8천명의 인민해방군을 돌려세운다. 그리고 국명에서 처음으로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대한다. 경험적으로 학생들과 노동자가 연대한 결과는 당의 거센 탄압을 불러왔고, 더해서 학생들의 엘리트주의는 그 공조에 대한 거주감으로 나타났다. 계엄의 선포는 그 선을 넘어설만큼의 결속력을 부여했다. 5월 20일무렵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이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했고, 이들의 참여는 비호대라는 오토바이 전령부대로도 나타난다.
한 자영업자의 증언은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우리는 돈은 있지만 학벌이 없어 낮은 계급이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돈을 기부했지만, 존경을 살 수는 없었다. 관료들은 부패했지만, 우리도 멸시받는 사람들이다. 베이징 시민들이 우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들은 실제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존중했다. 오토바이를 탈 때마다 그들은 ‘비호대 만세!’라고 외쳤다. 이것은 기꺼이 죽을 만한 일이다."
그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모르고 나온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이다.
당 지도부는 자오쯔양의 사임에 따라 재구성된다. 장쩌민이 차기 총서기로 리셴넨과 천윈의 추천을 받고, 덩샤오핑의 동의 하에 선임된다. 그는 보수파 원로들의 자장 속에서 당성을 인정받고, 이후로도 '치리정돈'을 통해 보수파의 의제를 밀고나간다. 계승서열로 보면 리펑이 차기 총서기가 되어야했지만, 리펑은 천안문 항쟁 국면에서 사고를 너무 많이 쳤다. 문제의 첫 담화문으로부터 학생 청원을 무시한 일, 대결 국면에서 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며 고압적으로 일관한 점이 대중의 공분을 샀고, 그를 낙마시킨다. 완리는 상하이에서 5월 25일 당의 입장에 동의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전국인대 상무위원회를 6월 20일로 결정한다. 이는 천안문 광장의 요구를 거부한다는 것을 재차 선언한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총서기 인선을 결정한다. 이에 대해 장량은 논한다.
"원로들이 거리낌 없이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능가하여 모든 현직 정치국 상무위원을 배제한 상태에서, 완전히 「당헌(黨章)」을 유린하고, 공공연히 중국공산당의 당내 생활 준칙을 파괴하며, 불법 수단으로 공산당 중앙의 최고 정책 결정 집단을 교체함으로써 무혈 정변을 완성했다."
장쩌민은 상해에서 불려와 원로들과의 면담을 거치고, 덩은 리펑과 야오이린에게 개혁개방의 견지를 재차 당부한다. 결정적으로 그는 본인의 은퇴를 천명하며 장쩌민을 3세대의 핵심으로 인준한다. 사실상 최종 결정권을 승계한 것이다.
4장. 텐안먼 광장의 진압과 정리 (1989년 6월)
운동진영은 재편을 요한다. 그러나 여전히 분열과 권위의 분재는 판단을 정체시킨다. "의지와 격정이 소진되어, 진압당하는 것 말고는 명확한 목표가 없다."는 평이 틀리지 않다. 연석회의가 설립되고, 지식인으로부터 학생들까지 의견을 모아나간다. 철수를 준비하고, 대화의 의제를 모아나가며, 당내 개혁파를 지원한다. 당 내 개혁파 다 죽었는데 무슨... 물론 여전히 연석회의 인고 영지연석회의 있고 광장지휘부 따로있다. 통제가 되는게 이상하다. 무력진압이 없을거라는 기대는 인민해방군에 대한 무한한 믿음에 근거한다.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해할 리 없다고. 문혁이 20년 조금 넘은 시점에서 기억들은 쉽게도 잊혀진다.
“인민해방군은 인민 자제(子弟)의 병사이지 특정인의 군대가 아니며, 인민군대는 인민을 진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베이징 주둔 군대를 대상으로 선전을 진행하여, 이미 군대의 동정과 이해를 얻었다.”
“우리는 군의 베이징 진주를 환영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군대는 주로 질서 유지를 돕기 위해 진주하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배반당한다. 더해서, 5월 30일로 예정된 철수 역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미 광장의 다수는 외지학생들이었고, 이들은 원지에서 온만큼 결의도, 진압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이미 광장의 규모가 5월 20일의 30만명에서 5월 말의 1만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아무도 상황은 통제할 수 없었다. 더해서 재정문제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다양한 경로로 전달된 투쟁기금은 방만하게 사용되어 바닥을 보였고, 물자 역시 무분별하게 낭비된다. 아주... 흔한 일이다. 이 상황에서 소위 4군자는 6월 2일 단식을 선언한다.
'민주의 신', '4군자'... 이미 운동이 기울고 탄압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무엇이 향후를 위한 최선의 전략이었을까. 협상에 최적인 국면은 지나갔고, 군은 다가온다. 계엄령이 선포된 후 전국적으로 132곳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는 줄어든다. 5월 28일에는 36개 도시에서만 시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최종 결정을 내린다. 6월 2일 저녁에 정리계획을 실시하여 6월 4일까지 완료한다. 이를 시민에게 알리고, 남는 자들은 자기책임이다. 양상쿤은 덩샤오핑의 발언을 전달하며 당부한다. 그의 발언이 참... 기만적이다.
"최대한 무기 사용을 피하고,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발포하지 말라. (……) 광장에서는 절대 단 한 명도 살상하지 말라. 이것은 나 개인의 의견일 뿐만 아니라, 샤오핑 동지의 의견이기도 하다. 만약 모두가 동의한다면 또한 우리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다."
천안문 '광장'의 무력진압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장안가에서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헬기가 하늘위에 떠있는 상황에서 밤9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10시, 계엄군이 도심 구역으로 진입한다.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사이에는 장안가가 동서로 뻗어있다. 서장안가는 푸싱먼가를 지나 푸싱로로 이어지고, 무시디라는 지역에서 만난다. 이곳에서 계엄군은 저지하는 군중을 향해 해산을 권고하고, 총을 겨누고, 기관총을 공포로 쏜 후 총을 발사한다. 사람들이 죽었다.
계엄군은 시시각각 진공하고, 광장 중앙에는 1만명이 남아 최후의 항쟁을 준비한다. 베이징의 수만명이 광장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이들은 인터네셔널을 부른다.
"나는 선서한다. 조국의 민주화 진전을 추진하기 위해, 조국의 진정한 번영 창생을 위해, 위대한 조직이 한줌의 음모가에 의해 전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10억 인민이 백색 공포 아래 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젊은 생명으로 톈안먼 광장을 보위할 것을, 인민공화국을 보위할 것을 맹세한다. 머리는 자를 수 있고, 피는 흘릴 수 있으나, 인민광장은 잃을 수 없다. 우리는 젊은 생명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하기를 원한다."
몰아치는 군홧발 앞에 4군자는 호소한다. 평화적으로 철수하자고. 최후의 최후에 몰려서야, 그들은 선택한다. 5시 40분, 천안문 광장의 정리는 완료되었다. 사망자는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광장에서는.
“여러 방면의 조사와 실증에 의거하면, 모든 정리 과정에서 계엄부대는 광장에서 단 한 사람도 총으로 살해하지 않았으며, 탱크가 사람을 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6월 4일 내내 베이징 시내에서는 지속적으로 저항과 그에 따른 계엄군의 진압이 이어지고, 총성이 다발한다. 류부커우에서 귀가하는 시민과 학생들은 총을 맞고 탱크에 밟혀 사망한다. 11명의 사망자가 있었다. 대낮에도 도심 곳곳에선 총성이 울리며, 불타는 군용차가 방치된다. 각 대학은 천안문 광장의 진압에 항의하고, 사망자의 수는 제각기 계상된다.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전국적으로 181개 도시에서 다양한 항의활동이 진행되었고, 저장성의 항저우에서는 도로의 봉쇄, 기차운행의 저지등이 일어난다. 연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처벌이 뒤따른다.
덩샤오핑은 이를 국제적 대기후인 평화적 전복과 중국의 소기후인 부르주아 자유화가 결합하여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으로 규정한다.
장쩌민에 댜한 권력의 승계가 이루어진다. 그를 3세대의 핵심으로 지정한 것은 암묵적인 최종 결정권의 부여다. 1989년 11월 중앙군위 주석직을, 1993년 3월 국가주석직을 이양하며 승계는 완성된다. 영도집단에 대한 하나의 핵심. 그것은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 공산당의 원칙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오쯔양은 권력은 잃었지만, 민심은 잃지 않았다.
덩은 은퇴의 의사를 밝힌다. 그와 양상쿤과의 대담에서 천안문 사건에 대한 괴로운 심정이 드러난다. 이것은 악어의 눈물인가, 아니면 무의식의 발현인가. 후야오방을, 자오쯔양을 후계자로 지정했던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진압을 결정했던 것은, 그의 과거가 형성한 그의 당성의 발현이었고, 동시에 시대적 형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의 결정이고, 그가 책임져야 할 그의 과오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에 대한 영향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덩이 애초에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도, 최종 결정권을 암묵적으로 득한 것도, 군을 빼고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당과 군은 분리되고 명목상으로 당은 군에 대해 절대영도 관계에 있지만, 군의 동학은 다르게 돌아간다. 이는 남순강화에서 재차 드러난다. 천안문 항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이어지고, 이후 민주파는 크게 쇠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담자들에 대한 철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당 내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 우호적 시선, 그리고 더이상의 분란을 원치 않았던 마음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동유럽의 연속혁명 역시 중국공산당의 보수적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민주선거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는 폴란드의 사례를 통해 확고해진다. 하나를 내주는 것은 모든것을 내주는 것이라는 사고는, 이를 계급투쟁으로 해석하고 전선을 그은 것에서 드러난다. 부르주아 자유화는 욕 맞다. 심한 욕이다. 어떤 사건을 부르주아 자유화라고 규정한다는 건, 상대를 계급의 적으로 규정한 것이기도 하다.
학생운동 진영 역시 미숙함을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의사결정 구조의 권위가 약했고, 동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지 못했으며, 결정을 집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미숙함이, 자만심이, 치기어린 행동들이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럴만한 경험은 축적될 수 없었다. 사회의 공간이 제약된 사회에서, 경험의 축적을 통한 원숙한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진정 아쉬운 것은 이후의 전개이다. 민주파는 이후 탄압속에 전진적으로 사그라든다. 이는 분석의 부재이면서, 계승의 단절이고, 탄압의 영향인 동시에 개혁개방의 승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이다.
전후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는 중국 공산당이 범한 최고의 정치적 오류이고, 덩샤오핑이 범한 최대의 잘못된 결정이다. 언젠가 이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당장은 그 과정이 요원해보인다.
결국은 개혁개방이다. 천윈, 리셴넨, 왕전 등 당의 다른 원로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의 정책집행은 명백히 역진적이었다. 1989년의 국면은 치리정돈의 유구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천윈의 주장처럼 균형재정을 유지하며 점진적 성장으로 나아갔다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다. 당의 집권의 정당성은 결국 성장을 통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에서 나왔다. 당의 권위가 다시 살아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생산력의 해방이 사상의 해방으로부터 과연 영원히 자유로운지. 바로 이 시점에서 제사회세력의 성장을 막아버린 것이, 결국 당의 집권화로, 견제없는 독주로, 당원의 특권화로 이어지며 오늘날에 이르른다. 요는 단순히 완급의 조절이었을까.
5장. 개혁개방의 위기(1990~1991년)
천안문 항쟁 이후로 중국의 이념교육은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모한다. 덩은 천안문 이후로 권위가 하락했고, 당내 입지도 약화되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연이은 낙마는 그의 핵심으로써의 지위를 뒤흔들었다. 둘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그의 무의식적 지향이 아니었을까. 다만 때가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둘의 낙마와 이어진 보수화는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이들이 상무위원회에서 열세에 처하는 형국으로 나타났고, 좌경화가 시작되었다. 1989년 9월 사영기업가의 입당이 금지되고, 그들의 재산은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본과 당의 결합은 발산과 수렴을 반복해왔고, 이때는 발산하는 국면이었다. 농가 생산책임제가 이념적 악영향을 끼치고 '공동부유'에 대한 지향을 흐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당 내 보수파들의 반동이면서, 동시에 총서기 장쩌민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인민성이 우선하는가, 당성이 우선하는가. 그는 당이 당성으로 인민성을 영도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좌경화는 치리정돈 정책의 지속으로 나타난다. 물론 인플레이션의 영향이나 그 원인인 방만한 지방정부의 신용팽창을 생각하면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치리정돈의 장기화는 성장률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좌경화는 동구권의 붕괴에도 기인한다. 특히 차우세스쿠의 죽음은, 얼마전 같은 억압을 자행했던 원로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공유제와 계획경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1년 내내 기세를 올리고, 인민일보 역시 공유경제와 사회주의를 강조한다.
경제성장률은 1988년 11.3%에서 1989년 4.1%로, 1990년 3.8%로 하락한다. 당대 중국의 경제규모(인당 310$)에서 이는 역성장이나 마찬가지이다. 통화팽창의 축소, 수요와 공급의 일치, 산업 구조조정은 결과적으로 경제의 역동성을 줄여나간다. 경제성장 목표 역시 10%에서 5%로 조정되며, 농업 생산투자가 강조된다. 덩은 상하이에서 겨울을 보내며, 다시 반격을 준비한다.
덩은 개혁개방의 속도를 높이고 경제특구를 확대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덩은 당에 개혁개방을 지속할 인물을 심으며, 사설을 통해 그의 주장을 알린다. 여든 중반을 넘긴 노구에도 그는 다시 당 건설을 시도한다. 그의 유일한 유산인 개혁개방을 위해서. 지역언론에 '황푸핑'이라는 필명으로 그의 사상을 담은 글을 게재하며 언론전을 시작한다.
이에 대한 반박들이 나오며 '성자성사'논쟁이 시작된다. 개혁개방 정책의 자본주의적 성격, 사회주의적 성격을 구분하며 사회주의적 지향을 명확히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이한 것은 해방군보의 동태이다. 양바이빙은 해방군보를 통해 개혁개방을 충실히 옹호한다. 이는 동시애 군의 입장이기도 하다. 중앙군위 주석직은 물려줬어도, 덩의 군에 대한 장악력은 확고했다. 양상쿤 역시 말한다.
“경제 건설의 이 길은 시종일관 굳세게 움켜쥐고 대규모로 외적이 쳐들어오지 않는 한 모두 끝까지 추진해야 한다.” “모든 다른 업무는 경제 건설이라는 한 개의 중심에 복종하고 기여해야 한다. 이 중심에 충격을 가하거나 방해할 수 없고, 결코 자기의 주의력을 분산 및 전환시켜도 안 된다.”
하지만 장쩌민 역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공유제에 대한 강조,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다시 평균주의로의 회귀인 것이다. 이때 소련은 붕괴하고, 덩은 베이다이허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소련 붕괴의 영향을 분석한다. 그는 '경제건설'을 강조하며 소위 16자 방침으로 그의 입장을 요약한다.。有所作为(유소작위)가 붙어 20자 방침으로도 알려진다.
冷静观察냉정관찰
稳住阵脚온주진각
桃光养晦도광양회
决不当头결부당두
有所作为유소작위
桃光养晦。아마 덩이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하고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그의 삶 역시 이 네 글자에 녹아든다. 생의 마지막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다시 빛 속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보수파의 준동은 거세었다. 이론지 <구시>에 다시한번 '성사성자'의 강조가 실린다. 그리고 남순강화가 시작된다.
6장. '남순강화'와 덩샤오핑의 승리: 공산당 14차 당대회 (1992년)
천안문 항쟁 이후 덩의 권위는 당 내에서, 그이고 대중 앞에서 크게 하락했다. 이어진 좌경화와 국제제재는 중국의 성장률을 급전직하시켰고, 이러한 흐름은 중국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그의 유일한 휴산인 개혁개방 역시도 사산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마오쩌둥처럼, 그 역시도 대중속으로 들어간다. 그가 구축한 개혁개방의 경제특구, 광둥성으로. 일개 평당원으로 지방을 시찰하는 것은 그에게도 큰 리스크였다. 이미 성자성사 논쟁으로 양측의 긴장이 한껏 당겨져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를 만류한다. 그는 만류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걱정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험을 하겠다. 모험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성장이란 리스크를 감수하는 마음이다. 고통없이 이룰 수 없는 일이 없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의 말이 새삼 삶의 자세를 되새기게 한다. 그는 위험을 감수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에 책임을 다하기위해. 그 길에 같이 섰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1992년 1월 17일 베이징을 떠난 그의 열차는 1월 18일 후베이성 우창, 후난성 창사를 들르고 1월 19일부터 23일까지는 광둥성 선전, 23일부터 29일까지는 주하이를, 30일부터 2월 11일까지는 상해에 머물며 춘절을 지낸다. 그의 여행은 표면상으로는 가족여행이었지만 인민해방군이 그 일정을 계획하고, 양상쿤이 그와 동행한다. 이 여행은 세가지 질문을 품고 나아간다.
"첫째, 지난 10여 년간 진행된 개혁 개방의 성과는 무엇인가? 둘째, 현재 국내에서 개혁 개방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어떤 관점인가? 개혁 개방에 가장 방해가 되고, 가장 혼란스러운 관점은 무엇인가? 셋째, 국제 정세, 특히 동유럽의 최근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보수파의 주요 논점을 현장에서 반박하고, 주요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여론을 구축하며, 일정의 선전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끌어올리고 당에 대한 견제구를 던진다. 정석적인 외곽 공격이고, 세 확보를 통한 의견의 관철이다. 노혁명가의 관록이다. 다시한번, 실천은 진리검험의 유일표준이 된다. 만약 이 일정을 시종해야 할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후야오방이 아니었을까. 韬光养晦。
후베이성애서는 당서기르루불러놓고 중앙영도동지에게 알리라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우리의 지도자(領導)들은 마치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값어치 있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회의와 행사뿐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텔레비전 스타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전과 주하이에서는 일개중심(一个中心)과 양개기본점(两个基本点)을 재차 강조하며 경제건설과 개혁개방이 대중적 지지의 기반임을, 이를 견지하지 않는 이는 타도될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또한, '세개의 유리함'(三个有利)으로 '성자성사'를 되받아친다.
"요점은 ‘성자’ 아니면 ‘성사’의 문제다. 판단의 기준은 마땅히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지,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 국력 증진에 유리한지, 인민의 생활수준 제고에 유리한지 여부가 되어야 한다. (……) 선전의 건설이 거둔 성취는 이리저리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답한다. 특구의 성은 ‘사’[즉 사회주의]이지 ‘자’[즉 자본주의]가 아니다."
더하여, 그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핵심은 생산력 발전임을, 생산력의 해방을 통한 경제 건설과 이를 통한 '공동부유'(共同富裕)만이 사회주의의 본질임을 재천명한다. 격차도, 고속성장으로 인한 마찰 역시도 본질, 즉 성장의 추구를 위한 과정이며 이에 대응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지 이를 규제하는 것이 그 길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속도는 곧 정지(停步)이고 심지어 후퇴다.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현재가 좋은 기회다. 나는 기회를 잃을까 걱정이다. 잡지 않으면 눈앞의 기회는 날아가고,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요는 경제성장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기회는 언제나 열려있지 않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해 경제건설을 경주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배를 제대로 할 수 없다. 홍콩의 언론으로부터 텔레비전까지 그의 일정을 보도하고, 이는 상하이의 <해방일보>로부터 개혁개방의 지지와 그의 사진 게재로 국내로 옮겨붙는다. 3월 말 <선전특구보>로부터 일정에 대한 기사가 실리고, 결국 신화사를 통해 전국에 게재된다.
군부가 그의 뒤에 서있음을 그는 사진으로 나타낸다. 장쩌민은 태도를 바꾸어 남순강화를 영도간부 중심으로 학습하여 숙지할 것을 촉구한다. 서우두 철강에서 덩의 발언은 그의 불안감을 자극한다. 주룽지 등 대안에 대한 강조는 그 현실성을 자극하며 장쩌민을 행동에 나서게한다. 여기서 보이보의 덩에 대한 비판이 소소한 재미를 준다.
“삼세번 이상은 안 된다(事不過三). 너는 이미 세 명의 지도자를 바꾸지 않았느냐?”
장쩌민은 그에게 춘절에 전화를 하고, 당 내 학습기조를 바꾸고, 공개연설을 통해 재차 충성맹세를 하며 접견으로 다시금 인정을 받는다. '남순강화'의 메세지가 관철되는 순간이었다. 지방으로부터 올라온 메세지 또한 당 중앙의 태도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1992년 8월까지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메세지가 1800건 중앙으로 상신된다. 텐지윈의 연설은 이 과정에 대한 개혁파들의 입장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개혁 개방의 방해가 되는 ‘좌경화(左)’의 묵은 습관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려고만 들면 그들은 ‘성사’인가 ‘성자’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일도 모두 감히 할 수 없게 하고,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좌’적인 것은 여기저기에 존재하는데, 혁명의 색채를 띠고 있어서 사기성(欺騙性)이 농후하고 위험성(危害性)이 크다. 우리 역사에서 그랬고, 실생활에서도 이렇다.
좌파들이 좋아하는 정책이 실시되는 지역을 만들어 보자. 예를 들어, 그곳에서는 어떤 외국 투자도 허용되지 않고, 모든 외국인은 격리된다. 그 지역의 거주자들은 해외에 나갈 수 없고, 자식도 해외로 보낼 수 없다. 그곳에서는 전면적인 계획경제가 실행된다. 필수품은 배급 방식으로 공급되고, 시민들은 음식물과 다른 소비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야 한다."
결국 문제는 무엇이냐, 누가 성장을 가져다주었냐는 점이다. 성장은 물질세계의 풍요로, 인민생활의 발전으로, 상부구조로의 연결로 이어진다. 성장없는 삶의 기억이 남아있는 이들에게, 좌경화가 가져온 정체는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계획경제와 당조가 삶을 옭아매고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은 성장을 경험한 현재와 대비되며 개혁개방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다. 좌파를 하려면, 결국은 성장에 대한 답을 내어야한다. 무엇이 성장을 만드는지, 어떻게 성장해야하는지에 대한 로드맵이 없다면, 대안적인 성장 역시 불가능하다. 물론 선을 넘는 발언이었지만, 이에 대한 보수파의 항의에 대해 덩은 말한다.
“녹음테이프를 들어 보았는데 별거 없던데.”
천윈 역시 남순강화로 당론이 결정된 이상, 이를 수용한다. 당이 결정을 했다면, 그 역시 따르는 것이다. 리셴넨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에서, 그의 성찰이 드러난다.
"리셴녠 동지와 나는 비록 경제특구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우리는 계속 특구 건설에 주의했다. 또한 특구는 잘해야 하고, 반드시 끊임없이 경험을 총괄하여 특구를 잘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 동안 선전 특구의 경제는 수입형(進口型)에서 수출형(出口型)으로 이미 초보적으로 변화했고, 고층건물이 일어나는 등 발전이 확실히 매우 빨랐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건설 규모는 과거에 비해 매우 크고 복잡하다.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이 개혁 개방의 새로운 형세하에서는 이미 적용될 수 없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노력할 것,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평생 계획경제를 고민하고 실천했던 노좌파 역시, 개혁개방의 성과 앞에, 실천으로 검험된 유일표준 앞에 스스로의 이론을 다시 돌아본다. 이미 세상은 변화하였고, 그에 따라 당의 노선 역시 변화해야 함을, 그는 인정하고야 만다. 1992년 3월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남순강화를 수용하기로 공식 결정한 이후, 그해 GDP는 14.2% 성장한다. 10월에 개최된 14차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과 '덩샤오핑 이론'이 당헌의 개정을 통해 당의 역사에 영원히 남는다. 개혁개방이 그간의 진퇴 끝에 지도이념의 위치를 공고히한다.
덩샤오핑의 중국특색 사회주의 건설이론은 모두 아홉개의 절로 구성된다. 이는 개혁개방의 정수임과 동시에, 당이 나아갈 방향을 견지하며 이후 경제 정책의 골간이 된다.
첫째, 사회주의 발전의 길(道路) 문제에서, 공산당은 ‘자기의 길(自己的路)’을 갈 것이다. 중국은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본받지 않을 것이고, 외국의 모델을 들여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추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발전 단계의 문제에서,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놓여 있다. 이는 적어도 100년은 지속된다.
셋째, 사회주의 근본 임무의 문제에서,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이며, 착취의 소멸과 양극분화의 해소이고, 최종적으로는 공동부유에 도달하는 것이다. 현 단계의 주요 모순은 물질문화에 대한 날로 증가하는 인민의 요구와 낙후된 사회 생산력 간의 모순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반드시 생산력 발전을 우선 지위에 놓고,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사회의 전면적인 진보를 추동해야 한다.
넷째, 사회주의 발전 동력의 문제에서, 개혁은 혁명이며 생산력 해방이고, 중국 현대화의 필연적인 길이다. 경직화와 정체에는 출구가 없다.
다섯째, 외부 조건의 문제에서, 평화와 발전이 시대의 양대 주제(主題)로서 반드시 독립 자주의 평화 외교정책을 견지하고,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위해 유리한 국제 환경을 쟁취해야 한다.
여섯째, 정치적 보장의 문제에서, 4항 기본원칙, 즉 사회주의의 길, 인민민주 독재, 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
일곱째, 전략 단계의 문제에서, 사회주의 현대화의 세 발걸음(三步走) 발전 전략을 실현한다. 2000년까지 ‘소강(小康)’을 달성하고, 21세기 중엽에는 ‘중등발전 수준’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지역,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허용한다. 즉 ‘선부론(先富論)’은 계속된다.
여덟째, 사회주의 영도 세력의 문제에서, 노동자계급의 선봉대인 공산당이 사회주의 사업의 영도 핵심이다.
아홉째, 통일의 문제에서, ‘하나의 국가와 두 종류의 제도’, 즉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창의적인 구상을 제시한다.
교조적 태도를 지양하고, 중국의 상태를 규정하며, 그 본질은 생산력의 해방에 있음을, 경직화는 이를 저해하므로 지양해야 함을 재차 밝힌다. 이를 견지하여 궁극적으로 양극화를 해소하고 공동부유에 이르는 것이 목표요, 그 과정에서 격차를 인정하는 것이 동시에 생산력의 해방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 노선 하에 구 자오쯔양파가 정치국에 다시 진입하고, 좌파는 중앙위에서 자리를 잃는다. 이론과 선전분야 역시 좌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허직과 실직이 구분되고, 실직 중심으로 단위에 대한 대표성을 갖도록 구성된다. '구성규범'이 적용된 것이다. 차기 후계자 역시 상무위원에 진입함으로써 후계구도가 확정된다. 집단지도와 격대지정이 규범으로 자리한다. 양씨 형제의 군에 대한 지배력 역시 덩샤오핑이 스스로 해체한다. 190명의 장성이 물갈이되며 진정한 의미에서 군에 대한 당의 영도가 구축된다. 종신직인 '일급상장'을 폐지함으로써 군의 연소화 역시 이루어진다.
중앙군위 주석직을 현역군인이 할 수 없게 함으로써 '문관영도'의 규칙을 수립한다. 물론 여전히 군은 당군분리에 따라 별도의 질서로 구성되어있었고, 따라서 이후 시진핑은 4총부의 폐지와 전구개편을 통해 군의 구조를 바꿔놓는다. 원로정치 역시 원로들의 죽음과 중앙고문위의 해소를 통해 정리되고, 공식정치가 유일한 정치구조로 자리잡는다. 중앙고문위의 폐지는, 덩샤오핑의 결정이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잃고서라도 고치는 사람이 그나마 현명한 사람이다. 그렇게 2년간의 공세는 군제개평과 정치구조 개편, 14차 당대회에서 덩샤오핑 사상의 당헌 편입을 통해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장장 15년간의 공방전에 매듭이 지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3부작을 마무리하는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이처럼 이제 세 박자가 갖추어짐에 따라 중국은 공산당 14차 당대회 이후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여세를 몰아 2000년대에 들어서는 세계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덩샤오핑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위인(偉人)은 떠났지만 유산은 영원히 남는다. 물론 오점(汚點)도 함께."
개혁개방 3부작을 보면서 결국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구호들이다. 여러 구호들이 머리에 남는다.
两个凡是。
实践是真理的唯一标准。
旗帜鲜明。
一个中心,两个基本点。
思想解放。
自由,民主。
人民性,堂性。
삶이 구호가 되고 다시 구호가 삶이 되어 마찰 속에 갈등한다. 양개범시로부터 진리기준논쟁으로 촉발된 개혁개방은 농업에서의 호별생산제로, 개방특구로 성장을 일으키고, 문혁 이후의 사람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자유화에 대한 요구 역시 성장과 함께 팽창한다. 4항 기본원칙은 소위 '부르주아 자유화'를 억압하고, 좌파는 개혁개방의 '속도'를 조절하자며 계획경제의 원칙을, 공유경제를 재차 강조한다.
좌우의 요동 속에서 원로정치는 공식정치를 구속하고, 후야오방이, 자오쯔양이 그 제물로 바쳐진다. 인민성과 당성의 논쟁이, 인도주의와 인간성에 대한 추구가 이어지지만, 당은 국가와 인민을 영도한다.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관철이, 마냥 인민성을 존중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샤오핑은 이어지는 보수화 속에 자신의 사상을, 일개중심 양개기본점을 끝까지 관철한다. 노구를 이끌고 외곽을 돌며 선동을, 조직을 계속하여 당 중앙에 개혁개방을 당론으로 정하고, 구업을 청산하며 스스로의 일을 매듭짓는다. 업적도 오점도 그의 삶에서 교차한다.
韬光养晦。
이 네 글자에서 그가 후나 자오에게 가졌던 감정이 읽히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둘을 후계자로 세웠던 뜻도, 개혁개방을 견지한 것도 그의 의지였다. 당의 영도하에 성장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평균주의를 에둘러 지판하며 선부론을 주창한 것 역시 같은 의미이다. 그는 신권위주의가 무엇인지, 생산력의 해방이 사상해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무의식적으로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순을 안고 세상을 돌파한다. 천안문 항쟁 역시 그 과정에서 그가 책임져야 할 중대한 오류이다.
중국 공산당 현대사를 보면서 항상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당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당이 모순을 돌파하게 하는 힘이다. 인민성을 수용해야 할 당성이, 인민성을 영도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힘이다.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4항 기본원칙을 지킨다는 것 역시 모순이다. 그러나 이론적 도약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관념과 현실의 차이를 이어붙이고 납득시키며 종합하는 힘, 그것이 당성이다. 당성으로 중국 공산당은 모순을 돌파한다. 그러나 당성은 무엇의 함수인가. 바로 지난 당의 업적의 자장하에 있는, 지대수익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의 지대수익이 줄어들고, 당의 영도역량이 한계에 달할 때, 모순은 그 자체로 충돌하게 된다. 달은 차면 이지러지고, 기울면 차오른다. 당의 권세 역시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권화가 가속되면 분권화로 흐른다.
合久必分,分久必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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