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중국사

<중국의 엘리트 정치>, 조영남.

stingraykite 2026. 3. 17. 09:27

 
마오로부터 덩샤오핑,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지나 시진핑까지. 중국의 정치체제는 일인지배에서 원로정치로, 다시 집단지도체제로 변모해왔다. 그 과정에서 경제노선 역시 마오주의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국가는 의법치국에 의한 제도화로 나아간다. 실제 중국의 정치는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게 중국 전체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 지도자들과 그 주변과의 동학을 통해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1장. 중국의 엘리트정치
중국은 당-국가 체제로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나라이다. 당은 전형적인 엘리트 통치체제로, 권력운영, 권력 승계, 권력 공고화라는 과정으로 마오쩌둥으로부터 덩샤오핑, 그리고 그 이후를 짚어본다. 일인지배로부터 원로정치, 그리고 집단지도체제까지, 각각의 시대는 저마다의 특징을 보여준다.
 
일인지배로부터 집단지도체제까지, 각각의 체제는 권력의 제도화, 자의적 활용, 권력 구성기관 내부의 역학관계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일인지배와 집단지도는 시기와 인물에 따라 반복적으로 양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마오 시기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마오애 의해 실질적으로 엘리트 내에 마오를 중심으로 한 사승관계가 형성되었고,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숙청을 통해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어려운 형태로 변모해갔다. 제도 역시 유명무실해졌고, 당정기관은 문혁에 이르러 껍데기만 남게 된다. 이후 덩샤오핑 시기에 이르러 제도화는 진행되었으나 원로정치는 비공식정치로 공식정치를 좌우한다. 이는 장쩌민시기 당의 제도화, 당-국가 체제의 성립을 통해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잡는다.
 
소련과 베트남의 사례는 일인지배와 집단지도체제 사이의 요동을 잘 보여준다. 소련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으로, 집단지도체제의 지도자가 후임을 결정한다. 그 권력은 시기에 따라 집권화와 분권화를 반복하며, 관료적 위계에 따라 계서가 구분되지만, 제도적으로 미비하여 서기장의 능력 여하에 따라 일인지배가 될 수도, 집단지도체제가 될 수도 있다. 흐루쇼프, 브르즈네프 시절 과두제로 시작한 정권은 차차 시간이 지나며 일인 지배체제로 변화했다가 다시 분권화를 겪으며 양자 사이를 오간다. 이는 과두제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과두제에서 일인에 의한 권력집중은 강력한 집권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집단간의 권력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온전한 분권은 갈등 국면에서 교착상태로 빠져들기 쉽다. 따라서 최종 결정권을 누군가는 행사해야만 한다. 중국 역시도 이 자장 안에서 움직인다. 갓 집권한 총서기는 허약한 권력기잔으로 집단지도체제에서 움직이지만, 총서기의 재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축적된 권력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베트남은 호치민으로부터 총비서의 행사를 제한하며 제도화와 분권화를 도모했다. 당 총비서, 국가 주석, 정부 총리가 각각의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분권형의 구조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았고, 이를 삼두체제라고 부른다. 중집, 정치국, 서기국으로 구분된 업무와 임기의 제한 등 국가기구의 제도화는 안정적인 권력의 분점과 승계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총비서 후보에 대한 당내 민주화 역시 진전되었다. 그러나 "과대 제도화"역시 문제가 있다. 분절된 세력들간의 합의가 항상 적시에 도출되지 않는다. 당조직 내의 정채는 국가의 기능부전으로, 판단의 부재로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제도화된 집단지도체제가 일인지배로 향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할까. '충붐한 권위'가 필요하다. 이는 동시에 제도의 변경으로 드러난다. 7상8하 같은 암묵적 구성규칙의 파괴가 그 예이다(그리고 했다!). 더하여, 당 주석같은 정책 최고 결정권을 가진 직함이 명문화되어 수여되는지가 주요 포인트이다(아직 안했다!). 마오는 이 고비를 외곽 한바퀴 돌면서 홍위병 쓸어서 지도부를 포격해서 극복했다. 시진핑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쉽지않다. 그러나 책이 쓰여진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고 7상8하의 파괴와 3연임 등 집권화를 가리키는 사례들은 쌓여만 간다. 시진핑은... 당주석의 꿈을 꾸는가?
 
1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대의 엘리트 정치
2장. 마오쩌둥 시대의 일인지배
 
마오쩌둥은 그냥 주석이 아니었다. 쭌이회의 이후 그의 영도적 지위는 압도적이었고, 혁명 과정에서 개인적인 희생과 헌신은 그 권위를 절대적인 위치로 올려놓는다. 제도적 장치로는 제어할 수 없는, 독보적인 권력이 그의 손에 있었다. 이는 정풍운동으로 강화된 것도 있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역량의 검증이기도 했다. 진짜 저짓거리 어케했누... 루산회의(1959)에서 외교부 제1 부부장 정원텐은 마오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오 주석의 권위는 개인의 권위가 아니라 전당(全黨)의 권위다. 마오 주석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은 전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고, 당과 전국 인민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이다.”
 
즉 모주석이 곧 당이다. 그가 어떤 위치에 있건. 그리고 그가 곧 당이기에 그에 대한 부정은 당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보이보는 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 영향력을 소개한다.
 
[어느 한 혁명 원로가 나에게 충고했다.] “설사 마오 주석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도 절대로 말하지 말고 돌아가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천천히 마오 주석이 정확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뇌리에 하나의 생각 틀이 형성되었다. 마오 주석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고,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다. 모두들 마오 주석의 옳고 그름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1959년 8월 루산 회의에서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이던 보이보(薄一波)가 들은 충고)
 
공산주의 운동 자체의 구조적 문제도 이와 같은 독주를 강화한다. 민주집중제에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존재는 이를 실질적인 일인지배로, 합의에 대한 순종은 지도자에 대한 절대 복종으로 치환되게 한다. 당이 명하면 당원은 '예'하는 것이다. 1943년 정치국 회의에서 주석의 '최후 결정권'이 명시되며 이는 제도적으로 명문화된다. 1945년 7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 주석, 서기처 주석을 겸직하며 모든 권력기구의 최고 지고자가 된다.
 
이 권력이 어떻게 발현되느냐. 1차 5개년 계획(1953~1957)이후 2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던 중, 마오쩌둥은 기가막힌 발상을 한다. 흐루쇼프가 15년 후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하니 우리도 15년 후 영국을 넘어보자! 그게 되겠냐. 겠냐고. 그리고 거대한 계획이 입안된다. 대약진 운동이다. 3차 5개년 계획의 입안 과정에서도 마오의 의지는 당의 결정을 반전시킨다. 3선 건설이다.
 
중앙정치국은 사실상의 사승관계, 또는 군신관계로 마오의 지시를 토론하고 그에 맞춰 정책을 조율하는 기관이 되었다. 민주집중제의 개인숭배 금지는 무력화되고, 실질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규율하는 제도로 기능한다. 집단지도와 개인책임(集体领导 个人负责)이라는 원칙은 개인지도와 집단책임(个人领导 集体负责)으로 변질된다. 영도는 모주석이 하고 책임은 당이 지고. 일이 참 잘 되겠다.
 
마오가 규율이 없는 사람이에요. 정치국 회의 한달에 몇번 한다고 그걸 빠집니다. 지방 순회하면서 외유성 시찰 다니고요. 물론 필요하지만, 회의 자체가 이원화되고, 지속적으로 확대회의를 통해 당 중앙의 결정을 흔든다. 중앙공작회의가 생기면서 당 조직은 유명무실해지고 인치는 강화된다. '항저우 회의', '난닝 회의', '청두 회의'의 개최는 무슨 뜻인가. 당의 관료적 축적을 거부하고 새 물길을 부어넣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익히 아는 것처럼 막대한 인민의 피해로 돌아왔다.
 
개인지도 집단책임은 구체적인 형태로 귀결된다. 1-2선 체제가 그 반영이다. 1선 지도자들이 실질적인 행정실무를 보고, 마오는 핵심 정책만 담당한다. 이는 실무자와 결정권자 사이의 괴리를 낳고, 지속적으로 관료들을 비판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그 결과가 좋았냐? 좋았으면 개혁개방 안했다. 이는 이후 내부에 대한 숙청으로, 옆방에서 회의 듣고있다가 영도지침을 내리면 다시 그 영도지침에 맞춰 토론하고 상신하고 재가받고 집행하는 형태로 변화한다. 구중궁궐이 따로 없는데, 마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게 맞다고 봤다.
 
마오의 당에 대한 지배력은 '사승관계', 또는 군신관계로 정의된다. 마오는 당의 선생이 되어 개별 의견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사람들은 그걸 조용히 듣고있고 유념하고 자아비판을 한다. 권위가 자율을 질식시키고, 당 중앙의 구조는 지방으로 기층으로 내려가며 반봉건적 행태를 답습한다. 오늘날 마오주의를 이야기한다면서 이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것은, 이와 같은 실질적 구현태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마오주의 담론 자체에 내재된 수령론에 대한 지향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를 견제할 수도 없다.
 
루산회의에서 팽더화이가 마오에게 비판당하자 사람들은 손바닥처럼 자기의 의견을 뒤집는다. 류샤오치도, 저우언라이도. 그것이 회의정치요, 영수정치다. 마오와 저우의 관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를 강화하는 영향력을 갖는다. 저우는 쭌이회의 이후 마오를 자신의 주군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그에게 순종한다. 이는 마오가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마오는 1958년 '청두 회의'에서 정확한 숭배는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다. 자기는 과학적으로 당을 영도했으니까 자기를 개인숭배하는 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는 소리를 참 뻔뻔하게도 한다. 여기서 광동성 당서기 타오주의 발언이 참 압권이다.
 
“마오 주석에 대해서는 미신(迷信)해야 한다.”
 
저우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마오애게 헌신했지만, 그것이 당원으로써 가져야 할 당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은 합의를 이루면 이에 복종해야한다. 그리고 마오가 갖고있던 민주집중제에 대한 관점 또한 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결국 그는 곧 당이고, 당은 곧 마오주석이었다. 그리고 마오주석이 판단을 그르치면, 당은 그 그릇된 판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집행하며 중국을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이 전체주의다. 일원화된 권력이 이데올로기로 통합되고 대중동원으로 행사되는 사회.
 
3장.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확립 1935~1956년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상무위원이 결정되고, 그가 군권을 쥐며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된다. 대장정은 마무리되며 옌안시대가 막을 올린다. 4만명이라니 너무 후하게 잡으시는데. 대장정에서의 성과와 옌안에서의 가지치기(정풍운동)은 마오의 독점적 지위를 공고히했고, 이윽고 1945년 7차 당대회에서 이는 공식화된다. '마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당헌에 마오주의가 기입된 것은 이를 반영한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과 중국 혁명의 실천을 통일한 사상, 즉 마오쩌둥 사상을 우리의 모든 업무의 지침으로 삼고, 어떤 교조주의적 혹은 경험주의적 편향에도 반대한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 변증법과 역사 유물론을 기초로, 중국과 외국의 역사 유산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며, 어떤 유심주의적(唯心主義的) 혹은 기계주의적 세계관에도 반대한다."
 
옌안체제는 '홍구'를 대표하는 마오쩌둥과 '백구'를 대표하는 류샤오치의 연합체이면서, 여러 중앙국으로 구성된 '산봉우리'들의 연합이기도 했다. 서북 중원 화동 화북의 4개 야전군과 동북 화북 화동 중남 서북 서남의 여섯개 중앙국이 각기 지역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파벌을 형성하고, 이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권위를 행사한다.
 
화북국 당료들이 초기 당정애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류샤오치로부터 펑전까지 요직에 앉아 주도권을 갖는다. 마오는 파벌간의 균형을 고려하여 서로의 자리분배를 균등하게 맞추고, 그 속에서 핮의를 이끌어내며 최종 결정권을 갖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급진적인 공유화가 일어나며 경제성적은 내포적 쇠퇴를 경험한다. 저자는 이 시기의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지만, 항미원조전쟁(6.25)와 교역봉쇄로 인한 타격은 적지 않았다. 파벌연합체 구조에서 중앙의 권력은 희석되어가고, 각 파벌들은 지역에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분권화가 강해진다. 마오는 체제 개혁을 통해 이를 돌파한다. 저우언라이의 업무분장을 외교로 국한시키고, 류샤오치의 보직을 띄워버리고, 결재권을 마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집권화가 시작된다. 가오강에 대해 류샤오치 험담을 하고 가오강이 그를 비판하게 놓아두지만, 그 비판이 선을 넘으며 가오강 분파사건이 발생한다. 가오강은 자살한다.
 
이후 1956년 8차 당대회 류샤오치의 보고는 근본적인 계급적대는 해소되었으며, 물질문화의 미비가 인민의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모순에 대한 해결을 중점으로 놓을 것을 주장한다. 왜냐 사유재산 뚝딱 공유화 다 했거든. 말하자면 개혁개방으로 연결되는 이론적 분기인 것이다. 주석으로부터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치국, 서기처의 4중구조가 권력을 분립하고, 당내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 개인숭배 역시 당헌에 명시된다. 하지만 모주석 보시기에 좋지 않더라.
 
규정이 있어봐야 카리스마적인 개인이 삔또나가면 막을 방법이 없다. 이 와중에 덩샤오핑 승진 알차게 챙겨먹는다. 생각해보면 50세에 당중앙 재경위원회 1주임이랑 국무원 재정부장인데 당대 간부들의 연소화 경향을 생각해봐도 빠른 출세다. 1948년 제2야전군 최전선위원회 서기할때도 44세였음.
 
8차 당대회의 결과는 문민통치의 구축, 당 내 군부의 영향력 약화(정치국 민군비율 2:1, 중앙위원회 3:1), 당 권력기구의 제도화와 당내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졌지만, 모주석 보시기에 안좋으면 다 파토입니다.
 
4장.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발전 1957~1965년
 
마오 시기, 특히 대약진 이후 마오의 집권은 중국에 큰 상처를 남겼다. 루산회의 이후 '반당집단'의 처벌, '반우경투쟁', '사청운동'은 당의 경직성을 강화하며 마오의 운신폭을 넓혀줬고, 결국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발판들이 된다. 1981년의 역사결의는 마오사기를 평가하며 과도기 총노선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특히 문화대혁명은 완전히 부정하며 내란으로 규정한다. 근대국가는 결국 관료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관료제의 파괴는 국가의 파괴인 것이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마오는 10대관계론을 주장한다. 요는 소련의 기풍과 거리를 벌리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적 지위를 위하여 마오는 소련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고, 1957년 11월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대약진운동을 추동한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와 정원텐도 초기에는 마오를 지지한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역시 적극적으로 이에 영합한다.
 
이때 목표수치들 보면 항상 황당한데, 1967년 식량생산량 목표는 1조근(5억톤)으로 10년간 2배 증대가 목표다. 경지면적이 이렇게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을까?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집약적인 녹색혁명이 아니면 달성이 불가능한 수치다. 문맹률 역시 6~7년내 완전해소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2000년에도 문맹률은 6.72%에 달했다. 철강생산량이 제일 웃기는 부분인데 1958년 철강생산을 일년만에 620만톤에서 1070만톤으로 배가하잔다.
 
농업집산화는 초급 합작사에서 고급합작사로, 그리고 인민공사로 점진적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합작사 형태도 물론 문제가 적지 않았으나, 마오는 이에 집산화 속도를 높일 것을 지시하고, 불과 1년만인 1956년 말 93.3%가 농업 합작사에 포괄된다. 인민공사는 평균 5,000호를 포괄하며 농업부터 임업, 어업, 1차산업, 일부 2차산업을 포괄하는 자기완결적 단위가 된다. 물론 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볶아먹듯 진행하면 집산화 자체의 문제점만이 아니라 마찰 역시 다대하게 생길 수 밖에 없다. 1958년 전체 농가의 인민공사로의 편제가 완료되었을 때, 생산대-생산대대-인민공사의 3층 구조에서 간부가 차지하는 비율은 7%였다. 노동에 찬여하지 않고 분배의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간부들은 지방 토호나 다를바가 없었다.
 
인민공사의 문제 하면 4다4소로부터 여섯가지 패행 등등 아주 수많은 증언이 나오는데, 대체로 비슷한 경향들이 관찰된다. 간부가 옆에 붙어있어도 사람의 의욕을 자발적으로 돋궈줄 수 없다. 이것이 단순히 문해율이나 당성의 문제인지. 오히려 문화와 인센티브와 욕망의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
 
"‘4다 4소’는 밥 먹는 사람은 많은데 출근하는 사람은 적고, 병난 사람은 많은데 약 먹는 사람은 적고, 게으름을 배우는 사람은 많은데 부지런함을 배우는 사람은 적고, 독서하는 사람은 많은데 노동하는 사람은 적다는 말이다. ‘3화’란 ‘출근(出工)의 자유화, 식사의 전투화, 노동 집계(收工)의 집단화’를 말한다."
 
대약진으로 야기된 대기근의 사망자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공식집계로는 1,900만, 이외에도 3,600만에서 4,500만에 이르는 사망자 추정이 이루어진다. 이때 농업정책 하자는대로 실제로 다 했으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결과다. 경지면적 줄이고 심경 밀식하고 거기에 엉망인 유통인프라와 보관손실을 끼얹으면 자오쯔양이 광동성에서 악착같이 은닉식량 착취해서 사람들 굶겨죽인 게 특별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 꼴을 내놓고도 마오쩌둥은 '삼면홍기'는 옳고 90%는 성과, 10%만이 문제라고 말한다. 루산회의를 기점으로, 그의 카리스마에는 금이 간다.
 
펑더화이의 의견은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토론회 자리에서 그를 본격적으로 비판하며 우파분자로 몰아간다. 후사에 대한 집착이 문장에 드러나는데, 개인적으로는 본심에 가깝다고 본다. 이후의 활동들 역시, 제사를 지내줄 장자가 없다는 것에 대한 유교가부장으로써의 실존적 위기가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시작용자 기무후호(始作俑者 其無後乎)’라는 말이 있다. 내게 후사(後嗣)가 없는가? 중국의 습관에서 아들은 후사로 부르지만 딸은 후사로 치지 않는다. 내 아들 하나는 전사했고[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것을 말한다.], 아들 하나는 미쳤다[차남 마오안칭(毛岸青)이 일곱 살 때 국민당 군인에게 맞은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자가 된 것을 말한다.]. 내가 보건대 후사가 없다. 대대적인 철강 제련과 인민공사, 대약진의 발명권은 내게 있다. (……) 인형을 만든 자는 나니, 마땅히 자손이 절멸(絶滅)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외곽 가서 군이랑 인민 모아서 너네 숙청할거라는 말을 당의 지도자가 당료들 앞에서 한다. 이게 말이 되나?
펑더화이의 숙청을 계기로 당을 정돈하며 비판을 막아세우고 대약진운동을 밀어붙여보지만, 식량도 부족한데 러시아에 제3세계에 식량을 뿌려대는 게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다. 아사가 발생하고 인민이 유랑걸식하며 전국적인 비참함이 통제를 벗어나면서, 결국 대약진운동은 중단된다. 류샤오치는 이 결과에 대해 스스로를, 그리고 마오를 개인적으로 비판한다. 1961년의 농업, 공업생산은 전년대비 40% 감소한다. 사실상 당이 통제를 잃은 것이다. 류샤오치는 말한다.
 
"전국적으로 보면, 결점과 성과의 관계가 [마오 주석이 말한 것처럼] 한 손가락 대 아홉 손가락의 관계가 아니라, 세 손가락 대 일곱 손가락의 관계일 것이다[즉 결점이 30퍼센트고, 성과가 70퍼센트다]. 어떤 지방에서는 결점과 착오가 세 손가락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 내가 후난(湖南)의 한 지방에 갔는데, 농민들이 ‘삼분천재 칠분인화(三分天災 七分人禍)’라고 말했다. 여러분이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 전국의 어떤 지역에서는 결점과 착오가 주(主)고, 성과는 주가 아니다."
 
당연히 마오 주석이야 불편하시겠지만, 조진 건 조진거고 인정하지 않으면 일이 안된다. 물론 우리 모주석이야 실무를 안뛰니 모르시겠지만. 류, 천윈, 덩샤오핑은 개별영농, 호별영농을 합법화하는 문건을 작성하며, 흑묘백묘론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당 간부들도 무엇이 필요한지는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믿는 바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베이징시 당 서기 펑전 역시 마오를 비판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이후 문혁때 곤욕을 치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서 개혁개방을 봤다.
 
우리의 착오는 우선 [덩샤오핑이 총서기로 있는] 중앙 서기처가 져야 한다. 마오 주석, 류샤오치 및 중앙의 상무위원 동지는 여기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포함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착오는 어느 정도의 착오다. 마오 주석은 어떤 착오도 없는가? 3~5년 내에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過渡)한다는 문제와 공동 식당은 모두 마오 주석이 비준한 것이다. 마오 주석의 권위는 히말라야 산맥이 아니고 태산(泰山)일 뿐이다. 현재 당내의 한 경향은 감히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착오를 감히 검토하지도 못한다. 한번 검토하면 바로 붕괴한다.
 
이 시기를 들여다본다는게 참... 화가 많이 나는 일임. 몇번을 읽어도 사람들이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이 뒤로 문혁 가봐도 똑같다. 일을 이지랄을 내놨으면 아무리 모주석이라도 자아비판을 하셔야죠. 근데 삐진다.
 
"작년 6월 12일, 중앙이 베이징에서 공작회의를 열던 마지막 날에, 나는 내 결점과 착오에 대해 말했다. (……) 무릇 중앙이 범한 착오는 직접적으로 나의 책임이고, 간접적으로도 내 몫이다. 왜냐하면 내가 중앙 주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을 것이다. 기타 다른 동지들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제1의 책임은 마땅히 나다."
 
하지만 7천인대회에서 좀 쫄았다고 자기 주장을 굽히는 사람이 중국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 연속적인 계급투쟁을 8기 10중전(1962)에서 주장하며 숙청의 칼날을 간다. 대약진의 후과를 수습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말하자면 지 똥 치우자고 당중앙이 집행한 개별영농, 호별영농을 수정주의로 비판하고, 당내 투쟁을 선동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주장하며 전국적인 정풍운동을 시행한다. 당정간부들이 할당량 씌워서 사람들을 폭행하고 고문하고 '모자'를 씌워대고, 류샤오치는 전10조의 참상을 보고 후10조를 입안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안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급격히 "좌경화"되며 4청운동은 당의 기층조직에 심후한 갈등을 심어놓는다. 공작대가 파견되어 우파분자를 구타하고 비판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맞아죽고 자살한다. 연속적인 계급투쟁이란 다시 말하면 폭력의 만연이요 갈등의 누적이다. 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이 개혁개방의 필수 요목이었는지.
 
마오는 이 과정에서 중앙에서 파견되는 공작대를 비판하며 운동은 아래로부터 올라와야한다고 역설한다. 수정주의와 화평연변에 대항하기 위해 후계자를 찾아야한다는 마음이 급해지고, 그는 전 인민 대상 서기듀스 101을 개최한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5장. 마오쩌둥 일인지배의 비극 1966~1976년
 
1981년의 역사결의는 계속혁명이론을 부정하고, 문혁을 마오의 오판과 '반혁명 집단' 사인방의 이용으로 '내란'에 빠진 사건으로 규정한다. 이후로 일어난 일들을 보면 당의 입장에서도 이는 과장이 아니다. 해서파관으로부터 촉발된 논쟁은 5.16 통지로 문혁의 포문을 연다. 자산계급 학술권위에 대한 전면적 계급투쟁을 선포하며 시작된 문혁은 중앙 문혁소조가 구성되고, 홍위병들이 조직되며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해간다. 저우비판 지원소조를 통해 4인방이 구성된다. 화궈펑이랑 왕둥싱도 원래는 성원이었군.
 
1966년 8기 11중전에서는 그 대상이 확대된다. 당권파, 학술권위, 상부구조가 타도의 대상이 되고,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통해 당의 권위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시작된다. 홍위병으로부터 조반파, 인민해방군이 전폭적으로 참여하며 실질적으로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서기처는 기능을 정지하고 중앙 문혁 소조가 당을 지배한다. 이는 지방으로 확장되며, 각지에서 대중적인 동원과 권력을 향한 경주가 나타난다. 1967년 인민일보와 홍기에 실린 마오의 글은 이 운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무산계급 문화혁명은 인민의 영혼을 건드리는(抵觸) 대혁명이다. 그것은 인민의 근본적인 정치 입장을 건드리며(觸動), 인민의 세계관의 깊은 곳을 건드리며, 각 개인이 가는 길과 장차 갈 길을 건드리며, 모든 중국 혁명의 역사를 건드린다. 이것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가장 위대한 혁명이자 변혁이다. 그것은 굳건한(堅剛) 공산주의자의 한 세대를 단련시켜 낼 것이다."
 
무엇을 제물로 세대는 단련되는가. 기존 당의 구조가 장작불에 타오른다. 그렇다면 다른 구조는 생겨났을까. 그렇지 못했다. 이것이 당료들만의 일이었나. 거대한 대중동원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적대계급 규정과 조리돌림을 통한 사회적 분열의 만연이 1966년부터 1969년까지의 기간을 규정한다.
 
파벌간 폭력은 무력투쟁으로 이어지고, 일련의 정권탈취 운동이 일어난다. 상하이의 상하이 시위원회 기관 혁명 조반 연락점, 소위 기련점의 설립은 하나의 분기가 된다. 마오의 공식 비준 속에 혁명위원회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지지만, 결국 관료가 물러난 자리에 군인들이 들어온다. 이 기관이 본래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했다. 사실상 중국 공산당은 이때 해체된 것이다. 중앙군위와 중앙군위 상무위원회 역시 무력화되고, 중앙군위 간수소조가 업무를 대행한다. 군부를 들쑤셔놨으니 예젠잉으로부터 탄전린까지 장성들의 비판이 이어진다.
 
“당신들이 당과 정부에 난리를 일으키고, 공장과 농촌에 난리를 일으키는데, 그렇게 하면서 당신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문화대]혁명은 당의 영도가 필요 없어? 군대도 필요 없어? 상하이의 정권 탈취 이후에 상하이 공사(公社)라고 이름을 바꾸었어. 그런데 이처럼 큰 문제, 국가 체제에 관련된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도 하지 않고 당신들 마음대로 명칭을 바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야?”(예젠잉의 말)
 
"[당신들은] 항상 무슨 군중, 군중 하는데 당의 영도는 있어? 당의 영도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군중이 자기를 해방하고, 자기를 교육하고, 자기를 혁명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이상학(形而上學)이지! 당신들의 목적은 노간부(老幹部)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야. 당신들은 노간부를 하나하나 패 없애고 있어. 노간부가 하나하나 정리되면, 40년의 혁명은 집이 망하고, 사람이 흩어지며, 처(妻)는 떠나고 자식은 흩어지는 결과가 돼 버려. (……)
나는 평생 울어 본 적이 없는데, 최근에 세 번이나 울었어. 우는데 울 곳이 없어서 비서 앞에서도 울고, 아들 앞에서도 울었어. (……) 징강산(井岡山)[최초의 혁명 근거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신들이 한번 검토해 봐,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마오 주석에 반대한 적이 있는지. 나는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간부를 위해서, 전체 당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어지간한 노간부들에게도, 문혁은 가혹한 과정이었다. 당의 지배는 형해화되고, 실질적인 무정부상태가 이어진다. 지도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는, 지도부의 붕괴로 이어진다. 이것이 마오 대신 실무를 굴려왔던 당료들에 대한 마오의 대답이다. 그래도 입이 있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나선다. 2월의 정치국 간담회는 정치지도자들이 문혁에 대해 저항했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군이 반발하니 마오쩌둥도 수그러든다. 2월 사건의 비판을 일주 수용하며 <홍기>에 노간부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삼가도록 지시한다. 물론 그래도 많이들 모자를 쓴다. 이 시기로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운동은 마오의 손에서도 벗어나버린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마오는 문혁을 지속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1967년부터 지역의 각 파벌은 무장투쟁에 돌입하고, 이는 인민해방군의 개입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른다. 마오는 류샤오치 부부에 대한 비판을 어용함으로써 이를 제어하려고 애쓰지만, 되겠냐...
결국은 군이 출동하고, 1969년 9차 당대회를 통해 수습하려고 해보지만, 이미 불붙은 대중운동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결국은 피가 흘러야만 했다. 9차 당대회에서는 마오쩌둥 이념이 다시 당헌에서 주도적 위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는 지위를 차지하고, 린뱌오가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다. 그러나 린뱌오는 이를 피하고자 노력한다. 원래 건저가 위험한 일이다. 린뱌오는 이를 잘 알고있었고, 그중애서도 특히 마오쩌둥의 계승자가 된다는 일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마오쩌둥에 대한 단평이 마오 주석이라는 사람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그[마오쩌둥]는 당신의 의견을 조작한 다음에 당신의 의견을 바꿀 것이다. 그것은 진짜 당신의 의견이 아니라 그가 조작한 의견이다. 이런 기본 술책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고 자신을 맹신한다. 그는 자기 숭배가 너무 심해 모든 업적은 자신에게 돌리고, 반대로 모든 잘못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것으로 만든다."
 
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역시 대거 물갈이된다. 81%의 위원이 교체되었고, 이중 대다수는 군부에서, 일부는 대중조직에서 충원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비율 역시 역전되어 지방이 3분의 2를 차지한다. 그리고 소련 사태를 계기로 마오와 린뱌오의 갈등이 시작된다. 덩샤오핑 조지는 것도 그렇고,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된다는 건 편집증적인 의심병환자의 총체적 감시에 놓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린뱌오 사건이 일어난다. 571 프로잭트 요강을 보면, 정말 쿠데타를 하고자 했다면 계획을 이렇게 짜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군사적 역량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그러나 린뱌오 사건의 정치적 여파는 컸다. 이미 문혁이 당에 끼친 영향으로 기울어가던 마오의 권위는 인민해방군의 투입으로 변곡점을 찍고 린뱌오 사건으로 수직낙하했다.
 
주요 당료들에 대한 사면이 이어지며, 당이 재건되기 시작한다. 덩샤오핑이 올라와 정돈을 시행하고, 드러다 4인방에게 꼽먹고 또 쫓겨난다. 하지만 지닌바 관계망의 차이는 여실했고, 마오쩌둥은 죽어간다. 덩에게는 다만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중앙군위 판공회의에서 예젠잉, 리셴넨, 그리고 덩샤오핑과 다른 이들이 1973년부터 상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군과의 특별한 관계를 재차 드러낸다.
 
마오는 왕홍원을, 덩샤오핑을, 그리고 마침내는 화궈펑을 후계자로 삼는다. 1950년대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에서, 나르시스트인 자신의 위업을 수호해 줄 후계자를 찾는다는 것이 그의 동인에서 어떤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을까. 마오와 덩의 관계는 유달리 독특하다. 3번의 고속승진으로 덩의 입지를 다져준 것도 마오이지만,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그를 여러차례 하방시킨 것도 마오였다. 가만 보고있으면 마오와 덩은 참 닮은 쌍이다. 고집이 있는 것도, 당-군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도. 마오는 그래서 덩을 아끼면서도 밀어낼 수 밖에 없었다. 둘의 입장은 달랐으니까.
 
마오의 일인지배는 협의의 정치를 유지하는 무게추로 기능할때는 빛을 발했다. 그러나 1선-2선의 구분이 그를 관념에 잠기게 하고 스탈린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자 그는 폭주한다. 관료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러나 자기가 밀어둔 실무를 수행하고 있던 사령부를 포격하고 지역 당 조직을 해체하면서 중국은 사실상 분권화된 국가로 접어들고, 당은 형해화된다.
 
겨우 군으로 해체는 막았지만, 그 복원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일원화되어있고, 제도에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권력이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대중동원으로 투사될 때, 그 행사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다.
 
6장. 덩샤오핑 시대의 원로지배
 
진리 기준 논쟁으로 화궈펑의 손발을 떼고 1978년 11기 3중전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덩샤오핑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그의 시대는 원로정치와 공식정치의 이중체계로, 관시로 이어진 원로들의 자장 하에서 공식정치가 조율되는, 적층구조였다. 양자간은 공식 직함과 기구로 매개되면서, 규정된 권한 이상을 비공식적인 후원-피후원관계로 조율하며 파벌간의 갈등을 조정했다. 당대의 파벌은 인간관계보다는 정책적 대립선을 기준으로 그어지며 경제와 정치 양자에서 보수와 개혁으로 나뉘어 주제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덩샤오핑, 천윈, 리셴넨, 예젠잉, 펑전, 양상쿤, 보이보, 덩잉차오가 소위 말하는 8대 원로로 주요 결정은 이들의 합의 위에서 덩의 최종 재가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정-군을 모두 조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권력은 독보적이었으나, 사상적인 면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마오가 가졌던 것과 같은 영도적인 지위는 누릴 수 없었다. 원로 중의 장자로 그와 천윈, 펑전, 리셴넨은 정책에 따라 갈등과 화합을 반복했고, 그 속에서 후야오방도, 자오쯔양도 원로들의 총서기로써 갈등의 중심에 놓인다.
 
원로들의 중앙고문위로의 퇴진 역시 쉬이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 이는 공식 직함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관시는 암적인 영향력의 통로이지만, 공식 직함이 없이는 그 영향력 역시 확고히 유지된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비공식정치는 규범으로 정의되지 않음으로 분담이 명확하지 않고, 그 권력의 행사도 자의적이었다. 여기에 공식정치 내에서의 갈등선이 비공식정치와 얽혀들며 고난을 가중한다.
 
不放心,不取放手。
 
이중구조의 긴장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마음을 놓을 수 없고 손을 놓을 수 없다. 12차 당대회에서 4인의 원로는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고, 나머지도 정치국원에 포함된다. 이후 13차 당대회에서 이들은 상무위원에서 은퇴하고 덩은 중앙군위 주석, 천윈은 중앙고문위 주임, 리셴넨은 전국정협 주석, 양샹쿤은 국가주석이 되며 공식정치는 한발 더 전진한다.
 
중앙고문위 역시 해소되고, 원로들의 공식정치 직함은 시간이 지나며 젊은이들이 채운다. 그러나 후야오방의 퇴진으로부터 자오쯔양의 퇴진, 장쩌민의 임명에서부터 남순강화를 통한 후계구도의 지명까지, 원로정치는 이후로도 하나의 견제의 도구로써 그림자를 드리운다. 13차 당대회의 비밀 결정, 덩샤오핑에 대한 '최종 결정권'의 부여는 이런 원로정치 내 교착을 막기위한 장치이자, 이중정치 내 원로정치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후 집단지도체제에서도 원로들의 영향력은 음양으로 남아있었다. 장쩌민이 집권화를 이루면서 원로들의 영향력을 거세하지만, 후진타오의 시대에 들어서 그가 스스로 원로가 되며 여전히 당에 영향을 미치고, 후진타오가 시진핑에게 권력을 깔끔히 승계하며 비로소 해소된다.
 
2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정치:집단지도와 집단운영
7장. 집단지도의 등장
 
원로정치가 차차 해소되고 장쩌민 집권 2기가 되며 엘리트정치는 안정되고 장쩌민의 집권화가 강해진다. 후진타오로의 권력이양은 순조롭게 이루어지며, 파벌정치는 덩샤오핑 때의 정책대립으로부터 파벌간의 이권분배로 그 양상이 변화된다. 개혁개방과 계획경제 양자간의 대립이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지도노선으로 채택되며 해소되며 파벌간의 노선이 일치화되었기 때문이다. 장쩌민 1기동안 당의 제도화가 높은 수준으로 진전된 것 역시 공식정치의 안정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에는 모두 177건의 당규가 제정되어 전체 당규 369건의 48%를 차지한다.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의 의법치국,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의법집정 노선의 결정 역시 정치의 제도화에 큰 역할을 한다. 천안문 항쟁 이후로 안정이 당의 제1 목표가 된 것 역시 당의 결집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덩은 당부한다.
 
“안정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穩定壓倒一切).”
 
집단지도는 무엇이냐. 삼중일대(三重一大)는 반드시 논의하여 정하는 것이다. 정책, 간부의 임면, 프로젝트의 배정과 대규모 자금의 사용이 그것이다. 상무위원회의 주요 기능 역시 정책결정과 당관간부, 성급과 중앙 요직의 임면이다. 중대사는 결국 표결로 정한다. 리펑 좌파 빨갱이 곤조는 WTO도 반대하는데서 드러난다. 정말 확신범이야...
 
정치국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정책의 공표, 주요 업무보고의 청취와 심의, 중관간부의 심의와 임면의 최종 결재는 결국 정치국에서 공식화된다. 이놈의 민주생활회는 거의 당생활 필수요소야 정치국에 올라가서도 당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민주생활회 때 쓴 자아비판서는 당안에 차곡차곡 기록되어 저장된다. 주요 지도자들은 당안 쓰나?
 
후차오무의 인터뷰는 정치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간략한 묘사를 보여준다. 토론이 주고, 표결은 최후의 수단이다. 총서기의 역할은 주로 회의의 주재다. 그의 의견은 찬성 쪽에서 무게감을 갖지만, 결국 결과는 표결로 마무리지어지고, 반대자들은 표결 이후 토론을 통해 방침에 동의한다.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다. WTO때는 겐세이도 많이 놓았다. 요는, 정치국이 단순한 '투표기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1. 정치국은 ‘투표 기계’가 아니다. 즉 투표를 통해 다수파를 형성하여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 대신 집단 토론을 통해 합의에 이른 다음에 결정한다. 구성원의 찬성 혹은 반대 정도를 보기 위해 예비 투표를 하는 경우는 있다.
2. 총서기가 회의를 주재하고 의제를 정한다. 정치국원이 회의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각 회의의 의제는 관련 자료와 함께 사전에 회람된다.
3. 모임에서 정치국은 의제별로 토론한다. 첫 발언자는 대개 의제를 제안한 사람이다. 논의 내용은 회람된 문건을 통해 이미 다들 알고 있다.
4. 다음으로 그 주제에 대해 알거나 경험한 사람이 발언한다. 그런 사람이 근거 있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다음으로 의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이 발언한다.
6. 다음으로 찬성하는 사람이 보충 설명하면서 반대하거나 혹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설득한다.
7. 총서기가 발언한다. 일반적으로 총서기는 찬성 발언을 하는데, 그가 이미 동의해서 의제가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총서기의 의견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 매우 중요하다.
8. 마지막으로 총서기가 표결을 제안한다. 먼저, 찬성자가 거수한다. 다음으로 반대자가 거수한다. 만약 표결이 만장일치 혹은 반대자가 두셋 정도면 안건은 채택된다. 회의 후에 찬성한 사람들이 반대자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9. 만약 표결할 때 만장일치 혹은 압도적 다수가 형성되지 않으면 결정이 연기된다. 연기 여부는 단순히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 반대자의 의견이 얼마나 강한지, 또한 반대자가 어떤 책임을 맡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즉 반대자가 그 쟁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다면 그들의 의견은 매우 중요하다. 정치국은 정치국이지 단순한 ‘투표 기계’는 아니다.
 
정치국은 실직 중심으로 구성되는 규범을 갖는다. 정치국과 상무위원회 필수요소는 대개 당주석, 국무원 총리, 정협주석, 군, 지방 당서기를 포함한다. 상무위원회의 구성규범은 총서기, 국무원 총리, 전국인대 위원장, 전국정협 주석, 중앙기위 서기, 서기처 서기, 국무원 부총리 7석으로 구성되고, 후진타오 시기 9인구성으로 중앙군위 주석 또는 국가주석, 정법위와 선전담당이 일부 포함되었다. 정치국 역시 당, 국무원, 전국인대, 지방, 인민해방군에 일정수를 배정하며, 파벌간의 균형을 유지한다.

 

 
중앙위원회는 성급 당서기와 성장, 주석, 시장, 그리고 인민해방군에 정수를 할당하여 지방에서 30%, 해방군으로 20%를 고정한 후 당 중앙, 인민단체, 중관간부 등으로 정위원과 후보위원을 구성한다. 요는 구성규범과 제도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조직을 만들고, 그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분권화와 집권화, 그리고 후계세대의 교육과 선발을 통해 당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8장. 집단지도와 파벌정치
 
파벌이란 무엇이냐. 개혁개장 초기에는 인적 구성인 동시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였다. 덩샤오핑 노선이 확립되기까지 보수파와 개혁파가 정치에서, 경제에서 입장을 나누어 의견을 교환한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이 공식 채택된 이후, 이는 노선투쟁보다는 자리배분의 문제로, 후원-피후원 관계망 간의 분배 문제로, 집권화와 분권화의 요동으로 성격이 변화한다. 주석이란 '최후 결정권'을 갖는 자리이다. 덩샤오핑 이후 집단지도채재의 지도자들은 분권화된 당을 물려받아 자신의 영향력을 투사하며 집권화를 이루고, 그 권력을 승계하며 당을 유지했다. 장쩌민으로부터 후진타오,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분권화와 집권화의 요동에 따라 파벌이 구성되고 비중이 변화하며 권력이 흘러간다.
 
중국은 당이 영도하는 국가이고, 따라서 당 주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최고 결정권자이다. 마오쩌둥 이후로 화궈펑 말고 당 주석은 없었다. 총서기는 조율을 하고 의견을 제시하지만, 결코 주석은 아닌 것이다. 대신 덩샤오핑은 2세대의 '핵심'으로, 장쩌민을 3세대의 '핵심'으로 지명한다. 암묵적인 최종 결정권은 그에게 있다.
 
장쩌민의 집권화는 판공청의 강화로부터 이어진다. 서기처 대신 판공청을 강화하고 정족수를 100명에서 300명으로 늘리며, 영도소조를 통해 당 기구를 우회하여 자신의 장악력을 확장한다. 재경 영도소조에 의한 WTO 체결은 그 예이다. 지방 역시 중심조를 파견하여 자신의 통제하에 놓는다.
 
반면 후진타오는 당 총서기는 승계받았지만 중앙군위 주석은 승계받지 못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구성 역시 상해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그에게 불리했다. 따라서 그는 당 운영의 투명성을 재고하고 언론노출을 늘리며 9인으로 변한 상무위원회에서의 열세와 중앙군위 주석직을 승계받지 못한 것에 대한 지도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상무위원회보다 정치국의 형세가 유리하므로 정치국에서 주요 결정을 내리고, 중앙군위 주석직을 승계받으며 공청단파를 지역으로부터 끌어올리며 그는 자신의 집권화를 달성하고 시진핑에게 계승한다.
 
시진핑의 집권화는 후진타오보다는 장쩌민의 스타일과 유사하다. 그는 영도소조를 다수 구축하고 이를 통해 당을 종횡으로 연결하며 자신의 역량을 투사한다. 이는 영도소조라는 기구가 갖는 중앙집중적 특성에 더하여, 후진타오 시기 분권화로 나타난 폐해에 대한 당 중앙의 위기의식에도 기인한다. 후진타오 집권 2기 당의 분권화 경향은 매우 심각하여 중앙의 통제력은 약해지고 지방의 자율성은 도를 지나쳐 다양한 사건사고로 나타났다. 보시라이 사건에서 드러난 당-군간의 결합시도나 시진핑 초기 저우융캉 등 국가직에 대한 단속은 그 양태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예이다.
 
공식정치가 모든 정치를 규정할 수 없다. 이것은 규범화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에는 항상 여백이 존재하고, 개별 관료는 총체를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중국 정치체제 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료제 자체에 내재된 문제다. 다른 사회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이 틈을 메워준다면, 중국에는 그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파벌이다. 여기에서도 군의 개입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당과 군은 분리되어있고 당이 군에 절대영도를 수행한다지만, 군의 자율성은 역사적으로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시진핑은 정말 군을 영도하고 있는가?
 
파벌의 존재는 권력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파벌에 따른 정량적 자원 배분은 상호간 견제를 통해 건전성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7상8하 역시 장쩌민이 차오스를, 그리고 리루이환을 상무위원회에서 축출하고자 도입되었지만, 동시에 국가직 전반의 건전성을 강화하는 규범으로도 작용한다. 장쩌민이 상하이방, 후진타오 시기가 공청단으로 특징된다면, 시진핑 시기의 시진핑 세력은 학연, 혈연, 지연으로 엮인 다종다양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기술관료 중심 구성에서 인문관료 중심으로의 구성변화 역시 나타난다. 물론 여기서 인문관료란 건 사회과학 경제학이지 문사철이 아님. 2008년 성급 영도간부 학력 분포는 전체 270명의 구성 중 인문 사회 계열 출신이 81.5%로, 10년 전 1990년대 후반 동급 직위의 기술관료 비율이 75%에 이르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변화다.
 
9장. 집단지도의 실제
 
왜 연소화 지식화 전문화 혁명화 4화가 필요했는가. 엘리트가 정기적으로 순환하는 것이 당의 건전성 유지에 필수적이다. 파벌의 순환은 이 역동에 숨을 불어넣으며 규범과 제도로 이를 강제한다. 1982년 헌법에서 동일직위 1회 연임이 규정으로 강제되며 연소화가 시작된다. 이는 이후 2006년 동일직위 1회, 동일직급 15년 제한으로 변화하며 연소화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 장차관급에 대한 연령제한 역시 1982년 장관급 65세, 차관급 60세로 정해지며 정무직 전반의 활력을 유지하는 규정이 된다.
 
그러나 국가직에 대한 연령규제는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적용되었다. 우선적으로 중앙위원으로, 신입 중앙위원에 대한 62세 연령제한이 생긴다. 국가직, 즉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대해서도 70세 규정이 생긴다. 이는 자율적인 결의였으나, 70세 커트라인에 걸려있었던 차오스를 밀어내고 리펑을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하나의 규범이 된다. 68 커트라인도 마찬가지로, 자기 세대 간부이면서 장쩌민과 계속 대립했던 리루이환을 뽑아내기 위해 도입되었다. 좀 사적인 의도가 있긴 했지만 이후로도 아름다운 규범으로 나왔으니 잘됐네 잘됐어.
 
2007년 17차 당대회부터는 정치국 후보들에 대해 민주 추천제를 통한 선발이 이루어졌다. 이후 2012년 시진핑은 민주추천제를 통해 당 총서기에 오른다. 이것은 장쩌민과 찡칭홍이 그를 밀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2007년에도 민주추천제에 힘입어 상하이시 당서기에 오른바가 있다. 이미 당에서 널리 인심을 얻고 장을 하기 마땅하다고 평가된 인재였던 것이다. 민주 추천제는 지방의 당전간부 선발로부터 중앙으로, 국가직으로 그 층위를 높여간다. 그리고 시진핑이 민주추천제를 바꾼다. 면담식으로. 지가 뽑힌 제도 지가 수정한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인치의 구조에서 법치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도입된 민주추천제는 순수한 능력에 의한 선발이라기보다는 관시와 인정에 의해 결정되었다. 특히 쑨정차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이 벌인 부정투표공작이 발각되어 이 셋은 부패혐의로 골로 간다. 국가직이 골로 갔다는 점에서, 이들은 시진핑시기 부패척결의 대표사례기도 하다. 근데 그럼 시진핑은? 클린깔끔 선거 하셨나...?
따라서 면담을 통해 후보 추천의 이유를 밝히고,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으로 민주추천제는 변형된다. 총의를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장점이 있지만, 인사권에 대한 총서기의 지도력도 강화된다.
 
장쩌민이 중앙군위 주석 뭉개고 자기가 정한 70세 규범도 씹으면서 대만 핑계대고 연임하고 상하이방 상무위에 꽂아넣은 게 당연히 역풍이 분다. 전국인대에서도 92.5%라는 낮은 투표율로, 원로들의 잔소리로, 다각도의 압박으로 그는 압력을 받는다. 후진타오는 대놓고 그를 공격하기보다, 자기 세력을 요직에 올리고, 상하이방이 먹은 상무위보다는 정치국을 활용하여 결정을 내리며, 장쩌민의 프로젝트를 자기 내용으로 바꿔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장악력을 올린다.
 
이후 2004년 경기과열에 대한 거시경제 조정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상하이방 출신 상무위원들늘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자측으로 포섭하고, 이후 삼개대표 중요사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덩을 추켜세우며 장쩌민을 지워나가는 과정을 통해 세력간 대립을 명확히하고, 군에서도 지지세를 확보한다. 이내 우위를 점한 후진타오는, 2004년 9월에 개최된 16기 4중전에서 중앙군위 주석 자리를 이양받으며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3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정치 2:집단지도와 권력 승계
10장. 권력승계의 규칙
 
마오시기의 권력승계는 후계자의 잔혹사로 이어졌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왕홍원, 마지막으로 화궈펑. 덩샤오핑의 후계지정 역시 후야오방에서, 자오쯔양에서 연이어 실패하며 원로들의 중의에 따라 장쩌민으로 결정된다.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이다. 원만한 권력승계는 자주 일어나지 않았고, 오랜 집권화 후의 권력승계는 정정불안으로 이어졌다. 흐루쇼프나 고르바초프 시기의 정치적 변동 역시도 집권화에서 분권화로의 정치적 변화로 바라볼 수 있다.
 
현직자와 후계자 간 노선의 차이, 후계자가 현직자에게 지켜야 할 의무, 지지와 신뢰의 획득 등은 이 이행의 과정을 까다롭게 하는 원인들이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이행을 순연하기 위해 이를 규범으로, 제도로 구체화한다. 7상8하로 통칭되는 연령규범에서부터 임기제, 당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의 실직 중심, 당-국가 전반에 대한 고려를 기반으로 한 구성규범, 결정적으로 격대지정이라는 후계자 지정 규범은 이 이행의 과정을 보여주는, 집단지도전통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들이 된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지명하면서 후진타오도 지명하고, 후진타오 시기 시진핑은 후와 장의 동의를 받아 건저된다. 격대지정은 시진핑이 당 총서기와 중앙군위, 국가주석 3연임을 확정한 20차 당대회에서 그 원칙이 깨진다.
 
또한, 집단승계 역시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전체 지도부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임기제와 연령규범에 의해 점진적으로 교체된다. 중앙위로부터 정치국으로, 상무위로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나가며 간부들이 교체되고, 이는 지방으로부터 중앙까지 차곡차곡 진행돠며 전체 영도간부의 인적 쇄신과 함께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앙군위 주석에 대한 언급이 특기할만하다. 그렇게 제도화된 당정안에서도 군에는 여전히 제도의 여백이 남아있다. 당 중앙군위 주석과 국가 중앙군위 주석이 다른 직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이 과정에서 비공식정치를 통한 원로들의 개입은 집단지도체제가 성숙해가며 점진적으로 차단되고, 장쩌민의 지속적인 개입은 후진타오 2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주범이 된다. 이에 후진타오는 시진핑으로의 승계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전폭적으로 시진핑에게 이양하고, 군에 대한 통수권도 바로 넘겨준다. 더하여, 은퇴한 원로들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며 장쩌민 사무실 문 닫고 나가게한다. 본인 역시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고, 당 내 서열을 직에 맞춰줄 것은 요구함으로써 일을 매듭짓는다. 이건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지 않았을까. 원로들의 견제와 개입이 문제긴 하지만, 동시에 당 총서기에게는 몇 안되는 견제수단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지는 시진핑의 3연임과 후계자 지정의 문제 역시 견제받지 않는 집권화에 원인이 있지 않나.
 
11장. 평화롭고 안정적인 권력승계
 
장쩌민의 중앙군위 유임이 무엇이 문제냐. 통상적으로 중앙군위 주석이 당 총서기보다 끝발이 높다. 말인즉슨 중앙군위에 눌러앉는다는 건 이중주석 채계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장쩌민 총서기되고도 덩샤오핑한테 군부장악력에서 밀려서 일개 평당원(혁명원로)에게 깨갱했던 게 트라우마는 어지간히 트라우마였나보다. 장쩌민이 이 난리부르스를 치고있으면 당연히 원로들이 편지를 보내고 압박을 넣는다. 완리, 차오스, 쑹핑같은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꼼짝을 안함. 이러니까 중남해에서 후진타오가 방 빼라고 하지...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스스로 중앙군위 주석을 시진핑에게 바로 이양한다.
 
관료들의 기술관료로부터 인문관료로의 이행은 후진타오시기 이미 시작되었다. 국가급 간부들은 기술관료였지만, 2002년 시점에도 이미 당중앙, 국무원 장차관, 성급 간부들의 기술관료비율은 각각 52%, 42%, 52%로 평균 48.7%밖에 되지 않았다. 1997년과 비교했을 때 이미 25% 이상 물갈이가 된 것이다.
 
후춘화와 쑨정차이가 원래 지정된 6세대 지도자였다. 쑨정차이는 시진핑 측, 후춘화는 후진타오 측이었다. 쑨정차이는 보시라이, 저우융캉과 함께 부패사건으로 날아가고, 그 자리를 시진핑 영향 하의 천민얼이 채운다. 여기에 딩쉐샹이 중앙 판공청 주임 및 정치국원으로 진입하며 후계자 경쟁에 가세한다. 하지만 20차 당대회에서 다들 아시다시피 후계자 지정도 없었고 3연임 했습니다^^... 19차 당대회 구성을 보면 정치국 상무위까지도 문돌이 판이다. 시진핑이 말이 화공과지 박사는 정치학으로 받았음. 2013년 3월 기준으로 성급 당서기 및 성장 62명 전공 보면 42인이 인문사회 전공이다. 박사 비율도 높아져서 10인이 박사학위릉 봉 했다. 문과 박사해서 출세하려면 중국가야하나...
 
시진핑은 중앙군위 주석직을 원할히 승계한 것 말고도, 부인 펑리위안이 군 선전부출신인 것, 아버지 시중쉰의 영향력, 모시던 국방주 장관 겅바오와의 인연, 지속적인 군무 경험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군에 대한 장악력으로 나타난다. 4총부 날리고 군구 쪼개는 군제개혁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근데 군제개혁은 했는데 요즘은 왜이럼... 외교부 끝발이 개끝발이긴 하다. 양제츠가 외교라인으로는 14년만에 정치국 진입이라니 국무원라인 6자리중에서 외교부자리는 한자리도 없다는 거잖아...
 
사실 후계자 지정은 19차 당대회에서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로 후춘화의 소극적인 태도나 천만얼의 경험부족을 이유로 들지만, 19차에서는 이 분석이 맞았어도 20차에서도 지정이 되지 않으며 결국 시 총서기 위주의 집권화와 일인지배의 구축이 목적이었음이 분명해진다. 21차가서 4연임 하고 당 주석 찍으면 빼박이고 4연임은 하는데 당 주석은 못찍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고... 보다보니 20차 당대회 분석이 자동으로 된다. 중국 정치를 보는 해상도가 꽤 올라가는 느낌.
 
4부. 덩샤오핑 이후의 엘리트 정치 3:집단지도와 권력 공고화
12장. 권력 공고화의 내용과 전략
 
권력을 이어받았으면 다져나가야겠죠. 통수권자에게는 몇 가지 무기가 있다. 인사권, 이념적 지도. 부패청산 역시 그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권력은 공식적 제도와 비공식적 관계망, 즉 관시를 타고 흐르고, 권력을 공고화한다는 것은 양자의 활용을 통해 자기 승리연합의 영향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왜 마오는 강고한 권력을 그러모을 수 있었는가. 1927년 한커우 긴급회의에서 그는 말한다.
 
“전당(全黨)은 군사(軍事)에 매우 주의해야 하고, 정권(政權)은 반드시 총구에서 취득한다.”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 (槍桿子裏面出政權).’
 
대장정 이후 군권과 지도력을 취득한 마오는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통해 소련파와 경험주의 양자를 자기 세력으로 다져놓고 이후 건국을 통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획득한다. 당-정-군에 통합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느냐가 대대로 중국의 최고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늠자였고, 그중에서도 최고는 군권이었다. 덩샤오핑의 주도적인 지위 역시 군에 대한 영향력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그는 사상적 지도력을 획득하지 못했고, 이는 개혁개방 초기 천윈과 수차례에 걸친 경제에 대한 보-혁 갈등을 통해 드러난다. 군과 당에 대한 지도력을 갖췄다면, 자기 사상을 통해 당성을 주관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에 자기 사상을 삽입할 수 있는지가 집권화의 하나의 지표가 된다. 군을 장악하고, 인사권으로 자파를 요직에 충원하고, 정풍운동과 반부패로 영향력을 투사하며, 자기 사상을 기초하고 이를 당장에 올리는 것, 그것이 권력 공고화의 ABC다.
 
13장. 권력 공고화의 실제
 
장쩌민은 1994~1995년 연간 상하이방을 중앙위와 정치국에 충원하고,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부패 척결 운동을 수행한다. 이후 충분히 집권화를 이룬 1998년부터 '삼강 교육 활동'이라는 정풍운동을 전개한다. 선전부를 장악하고, 판공청, 정책실에 자기 사람을 꽂아넣는다. 군에도 인사권을 행사하며 자기사람을 심는 과정이 권력의 공고화로 이어진다. 권력과 금력이 조화된 사회에서 인사는 만사다. 공식과 비공식으로 권력이 내려가고 금력이 올라온다.
 
정풍운동의 전형적인 형태로, 영도소조가 구성되고 당 중앙으로부터 층층이 교육이 내려간다. 중앙당과 당관간부를 대상으로 당교로부터 민주생활회까지 집체학습이 이루어지고, 지급으로, 현급으로, 기층으로 교육이 확산 전파된다. 장쩌민 시기 국장급은 연평균 100명씩 추가적으로 잡혀가며 물갈이된다. 1기에 연평균 238명, 2기에 335명, 3기에 484명씩 쓸려나간다. 첫째는 선진(先進) 생산력의 발전 요구다. 둘째는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이다. 셋째는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이다. 삼개대표 중요사상으로 자신의 방향성을 압축하고 10대 업적 편찬작업에 나서지만, 보이보와 완리를 비롯한 원로들이 그게 니업적이냐 덩 총서기 업적이지 야지를 놓는 바람에 편찬 작업은 취소된다.
 
삼개대표 중요사상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영 기업가의 입당이다. 소유권의 다변화가 소유재산권의 허용이었다면, 선진생산력의 발전은 그 첨단에 있는 사영 기업가의 온전한 공민권, 즉 당 가입의 허용이기도 하다. 당연히 보수파가 가만있지 않는다. 덩리췬(오래도 산다...)을 위시하여 좌파들이 장쩌민의 당창건 80주년 연설을 비판하자, 장쩌민은 <진리추구>와 <중류>를 폐간하여 응수한다.
 
후진타오는 당교와 공청단을 통해 자파를 배양한다. 당교애서 차세대 영도간부를 교육하며 자기 세력으로 포섭하고, 공청단 출신을 당서기 및 성장에 포진시키며 차세대 역량을 배양한다. 16차 당대회에서 중앙 당직에서 당 조직부, 국무원 사법부와 민정부, 신문판공실등을 장악하고, 새로 교체된 성급 당서기 19명중 7인, 성장 23명중 8인을 자파로 채운다. 공청단 역시 일률적으로 그의 사람들은 아니다. 근시했는지, 중앙에서 관리했는지, 손을 놓은 이후에 가입했는지에 따라 긴밀도가 달라진다. 당 내 정•부급 인사에서 공청단계의 비율이 급속도로 늘어난다.
 
정풍운동은 두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삼개대표 중요사상 학습을 중심으로 하는 선진성 교육활동, 그리고 과학적 학습관 학습 실천 활동이 이어진다. 당원 실태조사를 하면 샘플이 30만명이군... 2000년의 실태조사는 당원들의 낮은 당성을 보여준다. 특히 영도간부들의 기강해이가 문제가 되고, 이에 따라 부패척결이 요구된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제도 개선과 2003년 기검위의 이중영도 문제 해소, 2009년 중앙순시 업무 영도소조 구축을 통해 이를 틀 내에서 해소하고자 노력한다. 말인즉슨 잘 안됐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모두 72인(연 평균 8인)의 장차관급 고위간부가 처벌되었는데, 이는 장쩌민 시기의 176인(연 평균 17.6인)에 비해 반도 안되는 수치이다. 간부들이 갑자기 청렴해졌을리는 없으니...
 
후진타오의 지도이념은 조화사회론에 기반한 과학적 발전관이었다. 민생 개선, 지역불균형 시장, 격차 완화, 환경 개선을 중심으로 '종합적이고 조화로우며 지속가능한 발전관'을 추구하는 것이다. 본인은 조화사회에 강점을 두고 이를 조화세계와 연결하여 내적으로는 조화사회와 과학적 발전을, 외적으로는 조화세계와 평화발전을 융합시켜 지도사상으로 게재하고자 했으나, 내부적 논의에서의 진퇴 속애서 조화사회론은 탈락하고 선대와의 연결성을 강조할 수 있는 과학적 발전관이 채택된다. 아 안구에 습기가...
 
이론 자체의 가치지향에 치우친 측면이 실무적 적용을 어렵게 하기도 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금융위기라는 상황이 기존 정책의 관성을 강화시킨 측면들과 결부되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후진타오 시기의 집권화가 이전 시기에 비해 약했고, 그에 따라 지방 정부의 자율성을 적절히 억제하지 못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구룡치수(九龙治水)라는 말로 표현된다.
 
시진핑도 판공청 조직부 선전부 당교 중앙기위 잡고 시작한다. 고향, 동향, 동일근무처, 학벌, 태자당 등등에서 끌어와 구성된 시진핑 세력은 다종다양한 집단이 시진핑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승리연합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누가 시진핑 세력인가. 동향으로부터 같은 학교, 같은 근무지를 중심으로 세개의 범주로 구성되고, 더 세분하면 일곱가지 범주로 나뉜다. 물론 자료가 좀 되서 업데이트는 필요하다. 태자당, 산시성, 칭화대, 후베이성, 푸젠으로부터 저장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있다. 비율로는 푸젠과 저장이 높게 나타난다. '사풍'(형식주의, 관료주의, 향락주의 사치 풍조) 근절을 위한 군중노선 활동이 전개된다. 일단 차랑 사무실부터 짜르고... 당 총서기 본인이 허배이성 공산당 위원회의 민주생활회에 참여한다^^ 총서기가 직접 지켜보는 민주생활회라니 거 참 진검승부를 하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고 진땀이 나는 생활회였겠다^^...
인허가 13만 7천건이 구조조정되고 회의와 문건이 각각 24.6%, 26.7% 감소한다. 관용차량이 11만 4천대가 정리가 되다니 난 이 수량감각이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됨... 사무실 줄이고 경비 530억 위안(약 9조원)절감하고 도박한 놈 고가선물 (10만위안, 1700만원) 받은 놈 줄줄이 나가리난다. 그리고 3엄 3실, 수신을 엄격히 하고 인성이 견실해야 한다는 운동을 또 한다. 언제까지? 일상적으로 항상 간부생활 끝날때까지...
 
8항규정을 중심으로 간부들을 솎아내며 17만건의 규정위반을 잡고, 쑤룽부터 쉬차이허우, 저우융캉, 링지화와 궈보슝 등 국가급 간부들도 부패혐의로 잡혀간다. 덩샤오핑 이후 이런 일이 없었다. 장차관급 역시 5년동안 440명이 털려나가며 역대 기록을 갱신한다. 전체 장차관급 간부가 3000명인데 이는 15%에 달하는 양이다. 중앙순시조의 활동 역시 강화된다.
 
아이고... 277개 당정기관 전역조사 100%완료를 2017년에나 하셨다... 그 전까지는 전수조사 한번도 안돌렸다는 거 아냐. 잘 할거지? 잘 하자~의 사회에서 비로소 전수조사의 사회가 되었군. 사개전면이 표방되고, 소강사회, 개혁심화, 의법치국, 당 엄격 관리를 중심으로 지도이념이 구성된다. 부패 척결을 완수하며 이는 시진핑 사상의 핵심 요소로 당헌 개정을 통해 그 위치를 확정한다. 1기에서 집권화를 완수하며 최대의 부패척결을 이뤄내고 자기 지도이념을 당헌에 삽입했다.
 
자파 세력의 집중임면 없이 빠른 시일 내에 집권화의 요소, 인적자원 양성, 군 장악, 정풍운동, 부패척결, 지도이념 당헌 삽입을 이뤄낸 것이다. 통치력 자체만 보면 후진타오로부터의 전격 이양이 있었다고는 해도 원로들의 후광을 입었던 장쩌민보다도 빠른 시일 내에 높은 수준의 집권화를 달성했다. 아무리 원로들이 다 퇴진하고 후진타오가 남은 장쩌민도 치워줬다지만, 그의 통치능력이 발군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관간부 3천명의 15%를 5년만에 갈아버리다니 정말 대단한 업적이긴 하다.
 
14장. 결론: 집단지도의 분화와 전망
 
중국 권력은 집권화와 분권화 사이를 요동한다. 장쩌민 2기와 시진핑 전체 시기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면, 후진타오는 집권화를 달성한 적이 없다. 당이 만사를 주관하는 나라에서 주기적인 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지방의 제후들이 규율없이 군다. 후진타오시기 집권화의 부재는 국유기업의 부실화, 과잉투자와 중복투자, 심후한 부패사건으로 당의 존립기반을 위협했다. 민주적 제도와 개혁은 당의 난동과 소수민족의 저항 속에 정체되고, 반동을 맞는다.
 
중앙아시아의 색깔혁명과 그 후과는 당에 경각심을 주고, 9인제 상무위원회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표류한다. 당 중앙에 박힌 상하이방들이 총서기의 결정권을 존중하지 않고, 궁여지책으로 정치국으로 위기를 돌파하려고 해보지만 그럴거면 상무위원회가 왜 있겠나. 정치국 회의 매주 열면 통치가 될 수가 없다. 이는 당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강력한 집권화에 대한 필요로 이어진다. 후진타오의 전격적인 권력이양은 시진핑의 빠른 집권화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군에서는 쉬차이허우, 궈보슝의 숙청은 후계 지정과정에서의 갈등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집권화는 효율과 안정 사이에서 효율의 추구로 이어지고, 20차 당대회에서의 3연임은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해왔던 원칙의 파괴로, 협의의 1인지배로 이어졌다. 개인숭배가 조장되고, 집권화는 강화된다. 그러나 집권화의 강화는 동시에 당의 통치능력의 집중을, 동시에 통치자금의 집중을 의미한다. 기술관료에서 인문관료로의 전화가 완료되고, 권력의 집권화 경향이 이제 15년을 향해 간다.
 
분권화 역시 그 자체의 필요에 의해 요청된 것이었고, 지속적인 집권화는 자금의 집중으로, 자발성의 쇠퇴로, 인센티브 시스템의 경직과 경제적 활력의 축소로 나타나고 있다. 군내의 반발로 중앙군위가 텅텅 비어버린 것 역시, 마냥 좋은 현상은 아니다. 성장률의 감소와 국유재산 수익의 감소는 당 통치자금의 곤란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공무원 임금삭감과 고용조정 역시 단순한 압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변곡점을 암시한다. 당의 통치체계는 고도화되고 제도화되었지만, 동시에 그 한계 역시 갖고있다. 과연 당은 오늘날 제시되는 현실의 문제들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결국은 당성의 문제다. 당성이란 현실과 이론을 조화시켜 재구성하고 모순을 돌파하는 힘이고, 그 원천은 권력과 금력을 조정할 수 있는 당의 위치에 기인한다. 군중이 통제에 순응하는 것 역시, 지난 개혁개방 이후 당이 지속적인 성장으로 그 삶의 풍요를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생적 성장이 한계를 보이는 지금, 기술적 돌파는 일어나고 있지만 그 속도는 줄어들고 실업률은 올라오며 사회적 모순은 누적된다. 과연 당성은 오늘날 중국이 겪는 문제들을 다시 헤치고 나아갈 만큼의 저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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