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일본사

<일본의 역사(상)>, 이노우에 키요시

stingraykite 2026. 5. 11. 09:01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역사를 조망하며, 정통 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해 물적 토대의 변화와 이로 인해 초래된 역사적 거동으로 흐름을 짚어나간다. 중층성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다. 금석병용기 석기로부터 청동기, 철기가 혼용되는 것이나, 지속적인 도래로 인한 문화의 격변과 혼재는 열도라는 지리환경의 특수성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를 더해준다. 옛날 책이라 요즘 연구들에 비해 업데이트가 덜 된 부분들도 있지만, 흐름을 잡아나가는 고유의 특성들은 참고가 된다.
일본 문화의 특징으로 중층성을 꼽는다. 일본의 생산기술, 농업은 패키지로 이식되었다. 석기로부터 금석병용, 철기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동과 철기가 진조된 농업기술과 함께 도래인의 유입으로 전래되었고, 고대국가의 율령체계와 예속제 역시 마찬가지 경로로 일체형으로 도입된다. 이는 기존 사회의 생산양식과 혼재되며 중층된다. 기존의 생산관계는 해체되고 재조직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 아래에 덧씌워진다.
고대천항제ㅡ노예제도사회 ㅡ가 해체되어 갈때에도 유럽에서 게르만 민족이 로마제국의 노예제도 사회를 무너뜨려 봉전제도 사회를 만들기 시작한 것처럼, 타민족이 침입하여 일본의 노예제도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주로 일본인 내부에서 낡은 지배계급 혹은 중간적 계급이, 노예적인 노동인민의 자립을 위한 투쟁(그 밑바닥 에 생산력의 상승이 있음)에 대응하여, 농노주로 서서히 이행했다. 따라서 노예제와 농노제는 수세기에 걸쳐 구분하기 어렵도록 뒤섞여 존재하고 나란히 존재하여 결합되어 있다.
- 24p
조몬시대가 시작되고, 초기로부터 중기, 후기와 만기에 이르르며 거주지간의 교역과 기술의 변화가 일어난다. 수혈식 주거의 군집은 정주생활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흑요석 석촉의 광범위한 분포는 나가노로부터 관동, 후쿠시마와 후쿠이, 사도가섬까지 그 교역의 폭이 넓었음을 나타낸다. 만기로 갈수록 주거지는 평지에 가까워지고, 그 도구의 사용도 다양회되며 생산관계의 분화를 드러낸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 시기의 생활양식에서도 동일본과 서일본의 문화양상 구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동일본에서는 수렵채집도구의 고도화와 다양화가 나타난 반면, 서일본에서는 농경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타제 돌도끼 등 새로운 성질의 노동용구가 나타난다. 갈돌이 발견되고 개의 사육이 시작되는 등 변화는 있었고 이를 통햐 피나 토란등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나, 농경이 지배적인 생활양식은 아니었다.
-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 남쪽에서 북쪽 큐슈의 해안지대에 죠몬 토기와는 계통이 다른, 그것보다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를 지니고 논농사와 금속기를 갖춘 문화가 전해졌다. 이 문화를 그 토기가 처음으로 발곀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야요이식 토기의 문화라고 한다. 야요이문화는 일세기 가량 동안에 산인, 산요 지방을 지나 긴키 지방에 퍼지고, 거기서 이세 만 연안으로 뻗었으며, 기원후 1세기 후반에는 칸토 지방으로까지 보급된 후, 기원후 3세기 후반에는 한층 높은 문화의 단계, 즉 고고학상의 고분시대 전기로 옮겨간다.
- 42p
논농사, 관개, 철기, 동기가 동시에 들어와 석기 및 목기와 병용되며 중층성이라는 특색이 나타난다. 야요이 문화의 철기는 후기에서 자생적으로 생산된다. 그 전에는? 수입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청동기 역시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최초의 청동기는 수입품으로, 중기에 이르면 기존의 도구를 녹여 재생하여 사용한다. 긴키를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하며 북큐슈에 비해서도 청동기 기술과 농경에서 격차가 드러난다.
토기에 저장된 나무열매에서 창고에 저장된 벼로 잉여곡물의 저장형태가 달라지고, 기원후 1세기 한서에 왜인이 찾아와 배알한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최초로 기록으로 확인되는 정치체가 출현한 것이다. 기원 57년 낙랑 뿐만 아니라 낙양까지 왜의 나고쿠의 사자가 파견된 기록이 확인된다. 계급의 분화 역시 지도층의 무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한서>에서 말하는 노국의 중심지의 유적으로 생각되는 후쿠오카현 스쿠 유적에서 보아 추정할 수 있다. 이 곳은 공동묘지의 유적이며 죽은 자는 큰 독에 넣어 매장되어 있는데, 독을 묻은 위를 큰 돌로 덮고, 또한 그 속의 유체에는 청등의 거울•검•유리로 만든 곡옥 등, 중국에서 건너온 당시에 최고로 귀했던 보물을 부장한 특별한 무덤이 있다. 이것을, 돌의 덮개도 없고 부장의 보물도 없는 일반적 무덤과 비교해 보면, 여기에 묻혀 있는 사람이 생전에도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존귀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그가-이 유체는 남성 - 공동묘지에 묻혀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공동체에서 분리된 지배자로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 50p
히미코의 등장에서 모계 전승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인과 하호의 사회에서 군장국가들이 백여국정도 출현하고 이들 국가들의 연맹체가 형성되며 나라의 기틀이 갖춰진다. 기원 239년 위의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의 금인을 받은 그는 그 명분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산한다. 키타큐슈와 긴키 기원설 중 어느것이 사실이었는지는 중심지 이동설을 비롯해 여전히 논쟁의 영역이다.
이후 야마토 정권이 수립되고, 송에 사신보내서 백제 신라 도독 칭호달라고 하다가 찐빠맞고 왜왕 금인만 받는다. 이미 백제왕의 칭호가 야마토 정권에 비해 높은 위치에 있었다.
- 이 시기에 왜국과 친교가 있었던 백제국으로부터 많은 유력자들이 그 일죽과 종속자들을 이끌고 야마토, 카와치 및 이 밖의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 그 가운데는 야마토에서 야마토노아야씨라고 칭한 대호족처럼, 그 조상이 한족에서 나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신라 및 그 밖의 곳에서부터의 도래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왜국 사람이 모르고 있는 생산기술과 새로운 지식을 갖고와 왜국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 덕분에 철기의 생산과 사용이 퍼지기 시작하였고, 대규모의 수리, 토목공사가 착수되었으며 농경의 기술과 도구가 크게 향상되고, 새로운 도기, 가축의 사육, 양잠, 견직물 기타의 생산이 급속히 발달했다.
- 56p
고대 일본 생산력의 발전은 도래인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야요이 시대의 시작도, 야마토 정권의 주도권도 삼한인, 삼국인들의 이주와 이들에 의한 농경의 발전, 도구의 발달 및 생산관계의 고도화에 의지했다. 이들 도래인은 지방호족이 되어 정권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한자, 한문 역시 반도로부터 전래되고, 큐슈로부터 간토까지의 영역에 대한 불완전한 지배가 구축된다. 왕들의 왕으로써 오오키미(대왕, 大王)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오진천황 또는 닌토쿠 천황의 묘로 칭햐지는 거대 전방후원분을 통해 보여진다. 오오키미의 정부는 카츠라기(葛城), 헤구리(平群), 미와(三輪) 등 주요 씨족이 대왕 측근의 최고 집정자가 되고 그 밑에서 유력 족장들이 우지비토(氏人), 부민(部民)을 지휘하여 정무를 분담하고 지위•직무를 세습했다. 예컨대 오토모(大伴), 모노노베(物部)씨는 군사를, 나카토미(中臣)씨와 임베(忌部)씨는 제사를, 소가(蘇我)씨는 재정을 담당하고 그 직무를 세습한다. 이처럼 담당직역이 명확해진 씨족들은 카츠라기(葛城)씨와 같은 구래의 대호족보다도 영향력이 강해진다.
- 이리하여 대왕국가 조직체계 속에 들어간 중앙과 지방의 크고 작은 족 장들은 대왕에게서 오미(臣), 무라지(連), 기미(公), 와께(別), 오비또(首), 아따이(直) 등의 영예를 나타내는 칭호-가바네 (姓) -가 수여되었고, 대왕에게 신하로서 복종하는 귀족으로서의 위치가 주어졌다. 5세기 후기에는 그 칭호 위에 오오미(大臣), 오무라지(大連) 의 성(姓)이 만들어졌다. 또한 지방의 족장 가운데는, 구니노미야쯔꼬(國造), 아가따누시(縣主), 이나기(稻置)등, 그 지역을 지배하는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칭호를 가진 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대왕국가의 지배하이 편입되는 동시에 그것들의 칭호도 성과 비슷한 성질의 것이 되었다. 이들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은 성 외에 우지(氏)의 이름을 갖고 있으므로, 이책에서는 그들을 세성귀족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이끄는 씨족제의 형태를 지닌 집단을, 씨성집단이라고 하기로 한다.
- 60p
우지와 카바네가 이런거구만. 하사된 성으로써의 카바네와 제도 내의 편입에서 주어지는 우지가 복잡하게 교차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경제구조 속에서 살아갔을까. 왕령지로써의 미타(屯田)와 다도코로(田荘)와 부민제가 경제조직 구성의 기초가 된다. 왕령지인 미타는 개간과 관개를 통해 토지를 조성하며 지역주민을 타베(田部)로 편성하여 토지에 예속시키고, 그 조성에 있어서 씨성(氏姓)집단의 우지비토(氏人)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베(部)의 제도는... 이거 완전 향소부곡이네. 조정이 필요한 물자를 각자에 특화된 베에 할당을 주어 생산하고 공급한다. 이 베의 통솔자를 토모노미야쯔코(伴造)로 하급 씨성귀족으로, 이하 속민을 우지비토(氏人)로 하는 예속관계를 구축한다. 다도코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씨족들이 장원에 예속되어 부민으로 종사한다.
- 첫째로 그들은 씨족적 집단에서 충분히 독립하지 못하여, 그 전체 존재는 집단에 규제되어 있다. 이에 반해 농노는 개별적으로 독립된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통째로 그 씨족적 집단이 전체로서 주인에게 소유되어 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소유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집단도 주인의 토지가 대여되는 지대로서 잉여 노동을 수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그 자체를 집단적으로 소유당하였으므로 원래는 그들의 소유였던 토지도 주인의 것이 되고, 그들은 단순히 그 점유자, 경작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것도 집단적으로 노예화된 것이다.
이상, 부민의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이것을 농노라고 할 수는 없으며, 부민제는 일종의 노예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 64p
이와 같은 예속민은 전체의 약 30%를 차지했고, 여기에 더해 노와 비가 약 10%로 추정된다.
조정의 직할령이 확대되고, 이에 각 씨족의 장원도 확장되며, 재정권한을 쥐고있는 소가씨의 역량이 올라온다. 직할지가 늘어나면 뭐하나 결국 진정한 통치는 관료의 손에 들어간다. 고대에도 대장성 우위는 여전하구만... 소가씨는 관료적 지배의 확립을 통해 휘하의 도래인 세력의 개입력을 뫂이고자 하고, 이는 오토모, 모노노베와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만한 예속관계에서 당대의 인구밀도는 예속으로부터의 이탈을 낳게 된다. 기원 555년 기비의 시라이에 설치된 미야케에서 부역을 피해 벗어나는 사람들이 많아, 569년 조정은 관료를 파견하여 호적을 조사한다. 당대의 일본은 토지는 넓고 인구는 희소한 환경이었다. 따라서 예속관계 역시 일정 강도를 넘어서면, 그 구력으로 속민을 제어할 수 없게된다.
소가씨의 세력은 강해져 천황의 사후 소가 우마코와 모노노베 모리야의 알력 속에 요오메이 천황의 아들 우마야도 황자와 함께 황위 계승전에서 승리하고 스시융 천황을 옹립한다. 천황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자 천황을 갈아버리고 황녀를 옹립하여 스이코 천황으로 세우고, 쇼토쿠 태자에게 섭정하게 한다. 이후로도 여성 천황이 몇 나오지만, 여성천황의 등장은 곧 세력가의 지배를 의미한다.
쇼토쿠 태자와 소가씨의 조정에서 직할지는 넓어지며 기존의 씨족관계는 관 중심으로 재편되고 국가의 영향력은 강해진다. 30년의 지배동안 기존의 부민제는 재정기관을 중심으로 관청의 장관에게 집중되는 개편을 맞이하며, 이후 다이카 개신의 기반을 축적한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관등 12계를 구축하고, 헌법 17조를 만들며 국사를 편찬하는 등 고대국가로써의 기초, 율령제의 기반은 이 시기 조성된다.
- 불교의 장려는 씨를 초월한 새로운 신앙으로 귀족의 사상적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중앙 지방의 씨성귀족 및 민중에게 조정의 위력의 인상을 강렬하게 심어주려는 데 그 정치적 의의가 있었다고 하겠다. 태자와 우마꼬의 조정은, 막대한 국가 비용을 투자하여 사천왕사, 법흥사, 법륭사 등, 당시 일본 건축문화의 수준과는 하늘과 땅 정도로 차이가 있는 복잡한 구조의 장대 화려의 극치인 대사원을 세우기 위해 조선에서 다수의 불화• 불상을 들여오고 많은 승려와 사원건축 전문가를 초청했다.
- 73p
동남아시아의 만다라 체제를 연상하게 한다. 만다라 체제야말로 다원적인 집단에 대한 고대국가의 기초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종교를 통해 기존의 믿음을 중앙화하고 집중하며, 율령과 관료제를 통해 국가의 체계가 파고든다. 불교는 동시에 장대한 건축으로 권위를 현시하며 율령의 물적 현현이 된다. 반도와 열도의 문화교류, 특히 대단위 사원의 건축에서 결정권은 열도에 있었다. 인력과 물자가 현지에서 비롯하는데 숙련의 전래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왕령지와 장원의 확장은 예속의 강화로 이어지며 생활을 피폐하게 하고, 당대 기술로 가능한 확장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생산관계에서 과도한 예속으로 인한 모순의 축적은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보호와 예속의 무게 사이에서 저울을 기울게하고, 이내 전장경제는 한계에 부딪힌다. 소가씨의 몰락과 이어지는 다이카 개신은 이 생산관계의 경색에 대한 자체적인 해결책이었다. 소가노 이루카의 시대에 이르러 나카노오에 황자와 후지와라씨를 비롯한 제 씨족이 연합하여 이루카를 척살하고, 다이카 개신을 통햐 율령을 반포하며 진정한 의미로써 고대국가를 완성하게 된다. 전국을 60국으로 나누고, 모든 토지와 민중을 천황의 공지, 공민으로 선포한다. 조, 용, 조에 기반한 세제를 구축하여 전국의 세제를 일원화하고, 이를 실시하기 위해 호적과 계장을 시행한다. 당연히 지방 호족들의 반발이 있을수밖에 없고, 이에 내란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의 투사가 이어지며 일본의 국력은 내권한다. 이 사이 백제는 신라와 당의 공격을 받아 구원을 청하지만 조정은 손발이 묶여 유효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백제는 660년 멸망하며 조정은 체면을 잃고 내흥을 겪게된다. 왜? 그정도인가?
체면을 잃었으니 체면을 회복해야한다.
- 조정은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여 내외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기로 하고, 661년 당시의 천황 사메이이가 몸소 멀리 쯔꾸시(큐슈지방)로 내려가 원정군을 총지휘했다. 사이메이 천항은 오래지 않아 쯔꾸시에서 병사하게 되고, 나까노오에 황자가 사실상의 천황이 되어 원정을 진행시켰다. 그 러나 663년, 일본군은 하꾸스끼노에의 해전에서, 신라, 당 연합군에 섬멸당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타격이 되어 일본군은 패배하였으며, 백제의 유민 다수를 동반하여 본국으로 급히 도망쳐 돌아왔다.
소가씨도 백제 출신이고 백제계 도래인이 다수라는 건 알고있었지만 그 멸망이 체면을 잃고 대군을 일으킬 정도인가...
백제계가 모여들며 오미 조정은 문화적으로 흥성하고, 이는 무리한 해외원정에 대한 내부적 갈등으로 나타난다. 고오붕 천황이 즉위하고, 승계에 대한 불만과 내적 갈등이 폭발하며 야마토로부터 이세, 이가, 오와리, 오미에 걸쳐 열도는 내란에 휩쓸리고 여기에 신라계가 가세하며 덴무 천황이 고오붕 천황을 척살하고 즉위한다. 반도놈들은 왜 내전을 열도 땅에서 하냐? 덴무 천황 즉위과정에도 소가씨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나카노오에가 이루카를 죽이면 뭐하나 야마토 꽉 잡고 다시 재기하는데. 덴무천황은 이전에 비해서도 강력한 중앙집권 하에 국체를 수립한다. 이미 삼국통일이 된 이상 반도와의 관계 역시 신라와의 친교를 중심으로 재편성하고, 열도의 백제계와 신라계간의 갈등을 중재하며 양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을 받는다. 이때로부터 고대천황제가 그 윤곽을 드러낸다.
고대 천황제 하에서 천황의 현인신 관념이 정립되고, 신기관과 태정관으로 관제가 완비되며, 태정대신과 우대신을 필두로 나라일을 총괄하고, 8개 성이 국무를 전담한다. 전국 60국에 국사를 세우고 군, 리로 행정구역을 분할하며 이때 리는 50호 이상의 기층단위가 된다. 기층단위에서 이장은 호적작성, 경찰, 징세의 임무를 맡는다. 병역은 군에서의 향역과 상경하여 수행하는 경직으로 나눈다. 주요 군구에는 군단이 배치되고, 개중 다자이후는 특별히 동국에서 주로 편성된다. 일본이라는 국호 역시 기원후 720년 <일본서기>의 작성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호 역시 최초로 정의된다. 야마토를 일통한 정권의 이름을 야마토로 할 수도 없었고, 기존의 왜는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글자였다. 따라서 선택한 정체성이 일본인 것이다.
오미로부터 후지와라쿄로, 다시 헤이조쿄(나라)로 수도를 옮기고 지속적으로 중심지로 역할하며 나라시대가 시작된다. 중국의 도시설계를 모방하여 궁을 중심으로 격자형으로 도시를 배치한 헤이조쿄의 특징은 성벽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통치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헤이저쿄는 최대 20만의 인구가 거주한 곳으로, 황족, 귀족, 관리, 승려들과 그 예속민들로 이루어진, 자유라고는 하나도 없는 도시였다. 그 시장은 왕국의 물자가 유통되는 곳으로, 전 영토의 핵심적인 물류중심으로 역할한다. 말이 시장이지 모든 물자가 조용조로 공급되는데 유통이란 호족들의 일이기도 하다. 신분제는 양천제로 정립되며 노비, 작호, 가인들이 예속의 지위에 있는 천민으로 분류된다. 당대의 인구는 대략 500~600만으로, 전적인 예속상태에 있는 이들의 비율은 약 10%였다. 기존의 우지비토와 부민은 양천제 하에 공민으로 기존의 예속으로부터는 풀려났으나, 실질적인 지배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속의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들은 호로 구분되며 혈족집단 전체를 가리키는 향호와 그 개별 단위인 방호로 나뉜다. 호적은 6년마다 정리되었으며, 6세 이상의 남자 1인마다 2단(10아르, 1.5마지기), 여자 1인마다 남자의 2/3의 논을 인수마다 할당하여 경작케하는데, 이를 구분전(口分田)이라 하고 이 체제를 반전제(班田制)라 한다. 땅을 공짜로 주진 않겠죠? 받은 전에 따라 의무가 발생한다. 일단 토지에 붙는 조가 있다. 한 반의 수확이 8두인데, 반마다 2속2파의 조가 붙는다. 실질적인 조의 비율은 3%전후인 것이다. 용은 연간 상경하여 10일의 부역을 하는 것으로, 포로 대체될 수 있다. 조는 특산품의 공납으로, 정정(21~60세), 차정(61~65세), 중남(17~21세)으로 차등부과한다. 토지는 버리고, 백성에게 과세한다. 이는 동아시아 고대 공통의 과세원칙이었다. 용과 조를 환산하면 1호 구분전 총 수확의 20%정도였으나, 이는 인당 한마지기의 수확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고대의 농민들에게는 가혹한 부담이었다. 1두가 한 말이다. 한마지기 지어서 8말 나오는데 여기에서 우수리떼면 굶어죽기 딱 좋다. 참고로 진나라는 동일한 조용조 체계에서 100무(10-15마지기)줌. 평균 호당 인원이 5인이었으니 딱 두배준다.
이중에도 병역 부담이 매우 크다. 3-4년에 한번 60일의 병역을 군단 혹은 경사에서 수행하고, 그 해의 다른 역은 면제된다. 이는 복무기간만 산입되며 이동기간은 제외된다. 이동경비는 셀프다. 이러면 사람이 굶어죽기 딱 좋다. 당대 조사에서 등외호(빈곤가구)가 80~90%로 나타난다. 야마카미 오쿠라(山上億良)의 시가 당대의 정황을 잘 묘사한다.
- 형편 없는 움막 속에서 땅 위에 볏짚 깔고, 부모는 머리만, 처자식은 발밀쪽에 둘러않아 있으면서 근심 걱정에 쌓여 어찌할바를 모르고, 굴뚝에서는 연기도 나오지 않고, 먹을 것을 찔 시루에는 거미줄이 쳐져 밥을 지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채찍을 든 사또오사(五十戶長)는 움막 잠자리까지 찾아와 호령을 하는도다.
- 98p
빈궁한 가호가 농사를 짓다보면 세금은 뜯겨 먹을건 없어 당연히 대출이 있어야겠죠? 공스이꼬(公出挙)가 이자가 50%, 이것도 못받으면 사스이꼬(私出挙)가 이자가 100%다. 향촌사회 평균 연이율이네 놀랍지는 않다. 삼정의 문란은 지방관의 착복이요 예속의 증가경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분전과 반전제에 의의가 있다면, 기존의 씨족 중심 경향이 완화되고 제도상으로나마 국가의 공민이 되며 그 주관이 국가라는 하나의 기구로 뭉쳐졌다는 점, 구분전의 수전자에 의한 영세점유에서 소유권이 발달했다는 점, 착취의 한도가 제도로 규율되었다는 점이 있다. 부민제 하에서 우지비토와 부민의 삶은 온전히 그 장의 소유였던 것이다. 물론 실질이 크게 달랐으랴먀는, 그 하찮은 말이라도 있는 편이 없는 편 보다는 낫다. 이렇게 뽕 뽑아서 뭐했냐, 당나라 덕질했다. 당풍 문물을 받아들이고, 체화하고, 적용하며 줄교문화가 융성하고 귀족문화가 꽃핀다. 그러나 이는 외적 투상이었지, 내재적 일치는 아니었다. 동조동기화가 되기에는 바다의 폭이 넓고도 깊다. 따라서, 당풍 문물에 대한 일본적 수용이 당대 문화를 규정한다.
등외호가 90%인데 구분전에 묶여살면 바보겠지요? 대보율령이 반포된지 겨우 8년인 709년부터 구분전으로부터의 이탈이 다량 발생하여 키나이와 오미의 하쿠쇼오(白姓)(나름 부농임)가 인정을 숨겨 예속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지만 그게 되면 같은 일을 반복하여 공표할 일이 없겠죠? 장원이 건설되고 확대된다. 징병제는 이내 붕괴하고, 774년부터의 에조 토벌에서 징집병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져 780년부터는 병사를 "말과 활을 다룰 수 있는 자"중에서 뽑기로 하며 사실상 폐지된다. 723년 개간지의 일대 또는 삼대의 사유를 인정하고(삼세일신법), 743년 일정 항도의 개간지의 영세사유를 인정하며 장원제는 제도적으로 인정받는다. 장원 개척 열풍은 높아져 귀족으로부터 관료 사원까지 영지건설에 매진한다. 정부 수입은 줄어들고 율령제는 무너지고 장원경제가 지배적인 양상이 되니, 수도 역시 옮겨진다. 헤이안쿄(쿄토)로의 천도는 시대의 변환을 알리는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 꼴이 나면 천황도 퇴위하고 장원을 받는다. 결국 율령보다는 실질인 것이다.
토지대장에 따라 조를 비롯한 세제가 연동되며, 토지의 권리는 묘(名)로, 그 소유자는 묘주(名主)로, 그 토지는 묘덴(名田)으로 정착되어간다. 이 전환은 국별로, 시기에 따라 산발적으로 나타났으나, 차차 대세를 점유한다. 공령의 관료와 묘주의 관계는 율령제 국가에서처럼 일률적이지만도 않았으며, 묘주들의 다양한 토지점유 상황에 따라 이들 역시 대토지 소유주로부터 자영농, 농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양태를 나타낸다. 장원의 구조 역시 변화하여 직영지의 비율이 초기에는 20%에 달했으나 10세기 이후로 대부분 소작지로 변화한다. 그 소작인을 타또(田堵)라 하며 이는 묘와 묘주의 관계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유명무실해진 수조권을 제외한, 소유권과 경작권의 분리인 것이다. 일례로 동대사의 장원은 9세기 초 전국 3,460정보에 달했으나, 10세기에는 겨우 212 정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경작권의 보장과 다양화는 경작기술의 발달로도 이어진다. 예속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노예제로부터 농노제로의 이행은 물질세계의 자발성을 돋우며 물적 토대의 발전으로, 그와 서로 조응하며 상부구조의 변화로 이어진다.
- 공령 ㆍ장원을 통하여 묘슈 계층의 광범위에 걸친 성립은 10~11세기의 생산력의 약진과 서로 원인이 되고 또한 결과가 되어 있었다. 볍씨를 뿌리기 전에 물에 담그어둘 것, 모내기, 벼이삭을 자르는 일에서부터 그 뿌리를 베는 일로의 이행, 벼 시렁을 만들고 거기에 볏단을 걸어 건조시키는 일, 이러한 벼농사 과정의 각단계에서의 기술 개선이 이루어졌다. 공이, 써레, 낫, 가래 등 철제 농기구가 11세기에는 점차 일반 농민과 대•소의 토지 소유자층에까지 보급되고 말과 소를 이용하는 경작도 널리 퍼졌다. 작물의 종류가 늘어나 가지ㆍ오이나 참외 등의 원예작물도 많아졌다. 모내기 때의 <유이 :품앗이> 및 이 밖의 노동조직도 발달하고, 모내기 노동을 북돋우고 홍을 부추키는 음악인 전악이 성립한 것도 이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 119p
물질세계의 진보는 공령의 국사들로 하여금 지역을 재장악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고, 이 과정에서 재지사족들은 세력을 이루어 이에 저항한다. 987년으로부터 3년간 오와리의 군지 와 백성이 고쿠슈 후지와라 모토나가의 착취를 고발하여 승리한 사건은 그 일례이다. 이들 재지사족과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관료, 변경으로 나아간 귀족들이 새로운 계급, 무사를 이루고, 이들로부터 헤이안시대는 끝나고 막부의 시대가 도래한다.
조정의 지방 통제력은 형해화되고, 이는 난세로 증명된다. 10세기, 서해에는 후지와라 스미토모의 난이, 동국에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일어난다. 조정은 후지와라씨, 그중에서도 호쿠게(北家)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일족의 장자는 황비를 배출하며 천황이 연소할 시에는 섭정으로, 장성한 후에는 관백으로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한다. 중앙관직의 독점과 지방에의 개입은 여전히 막대한 이권으로 이어졌지만, 통치는 후지와라씨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019년 도이의 침입에서도, 이들을 막아낸 것은 지방의 무사(武士)들이었다.
시라카와 천황의 즉위와 함께 후지와라의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하고, 빠르게 실권을 수권한 시라카와 천황은 후지와라씨의 그림자를 지워낸다. 이후 원정, 즉 실권을 쥔 천황이 상황이 되어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현임은 자리를 채우는 상황이 이후 토바, 스토쿠, 고시라카와 3대에 이어 관례가 되나, 원정이라고 햐서 국가의 율령을 수복하거나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조응하는 새 체제를 구축할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황실, 귀족, 섭관가, 대사원의 장원은 팽창하고, 그 속에서 국가를 흐르는 자원도 증가하지만, 동시에 겐지와 헤이시를 필두로 한 무사들의 세력도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1156년 토바 상황과 고시라카와 천황, 관백가 내의 내분을 틈타 토바 상황의 붕어를 계기로 스토쿠 상황, 고시라카와 천황 사이에 각각 미나모토와 타이라의 선대와 현대를 동원하여 한판 승부를 벌인다. 승부는 하루만에 현임 천황과 미나모토, 타이라의 젊은이들의 승으로 끝나게되고, 미나모토 요시토모와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각각 아버지와 숙부의 목을 베며 호겐의 난을 마무리한다. 이후 미나모토 요시토모는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고시라카와 원에게 중용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다시 난을 일으키지만 귀경한 키요모리에게 격파되며 미나모토는 실권하고 타이라가 권력을 잡는다.
헤이안시대에 이르라 당풍은 물러가고 국풍이 일신한다. 집권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불교는 국풍을 수용하며, 통치의 말단에서 독자적인 봉건영주로, 동시에 기층에 스며드는 경전종교로 발전한다.
- 연력사(延曆寺)의 혜심(惠心, 942~1017년)의 저작 往生要集(985)에는 그 교리가 계통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 비로소 계급이나 신분을 초월하고, 국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개인의 신앙에 의한 구제를 가르치는 불교가 일본 사회에 생겨난 것이다.
압리예토, 흔구정토(厭離穢土欣求淨土) 의 사상은 몰락하고 있는 중,하금이 귀족에게 환영을 받았다. 섭관정치 에서 원정의 시대에 걸쳐, 이 신앙은 최상류 귀족에게도 전파되었지만, 그들은 이것을 현세에 있으면서 극락정토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잠기는 수단으로 삼아버렸다.
- 137p
9세기 경 만요가나는 발전하여 히라가나와 가타가나가 되고, (최근 그 기원이 7-8세기로 상승) 일본 문학이 시작된다. 중국과 그 주변의 한자 문화권에서 독자적인 문자의 창달과 이를 통한 문학의 발전은 분명히 일본적 특수성이다. 열도가 갖는 중층성의 지리환경적 조건이, 문화의 연속적인 축적과 계승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905년 <고금시가집>을 통해 당대 시가가 취합되고, <이세모노가타리>, <타케토리모노가타리>등으로 축적된 설화 베이스는 11세기에 이르러 <겐지모노가타리>로 귀족문학의 꽃을 피운다.
민간의 문화 역시도 발달한다. 고대천황제에서 장원경제로의 이행은 물적 토대의 상대적 발전으로, 장원 소유주들간의 갈등선에 위치한 변경의 확산으로도 나타났고, 이는 민간의 축적을 가능케하는 요인이 되었다. 전악으로, 민간의 가요로, 그리고 상품작물의 재배와 시장을 통한 확산으로 민중문화는 그 토대를 갖추고 축적을 시작한다.
- 11세기에는 민간의 가요인 사이바라가 유행하고,그후 <이마요오>라고 하는, 시라보오시(게이사 :기생) 등이 술좌석에서 부르고 있던 노래가 퍼졌으며, 또한 농촌의 뎅가쿠(田樂)가 쿄토에서 크게 유행하여 최상류의 귀족도 전악(田楽)용의 갓을 쓰고 길거리를 대열을 지어 행진하는 일조차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상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공지공민제에 의한 조•용•조의 제도가 무너져, 지방 민중의 수공업 생산물의 대부분이 조정에 의해 빼앗기는 일이 없어져-물론 일부분은 코쿠가나 장원의 본소, 영가에게 계속 빼앗기기는 하지만-이제 비로소 자유로운 사회적 분업이 성장할 수 있는 한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11~12세기로 해가 지남에 따라, 생산이 풍성한 영주 계층 밑에서는, 농업•수공업의 잉여 생산물이 상품화하는 부분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 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행상인이 미야코(都)와 지방을 연결시켜주게 되었다.
- 146p
겐페이 합전 다들 아니까 지나가고, 여차저차해서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타이라를 물리치고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고케닌을 모아 바쿠후를 설치한다. 고시라카와 원이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 당연히 생존의 발로기도 하지만 미나모토가를 이간질하며 스스로의 정치적 이득을 휙책한다. 근데 다 잘 안된다.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시 군은 전멸하고, 안토쿠천황과 삼종의 신기도 꼬르륵 했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공식 입장은 모조품이 잠겼다고 한다. 고시라카와 원은 이후로도 이런저런 정치적 모략을 피우지만 잘 안된다. 이 난동을 피우고도 목숨줄 붙어있던 것은,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정치적 입장이 아직 조정을 확고히 장악할 정도는 못되었던 탓이다. 혈통이 어쩌고 저쩌고 이러니저러니해도 정통 미야코 귀족이 아니라는 건 통치의 정당성에 있어서 큰 결격 사유였고, 슈고의 임명으로부터 조적의 토벌 역시 조정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요리토모가 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미나모토 가의 권세는 그 이후 호죠씨에게 들어간다. 호죠씨의 정권에서도 공가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 그 자체를 다양한 집단들의 연합체인 제국의 일종으로 본다면, 그 일본의 집단들을 매개하는 개개의 사회적 계약의 주체는 여전히 천황과 조정이기 때문이다. 제국은 무력의 투사로만 성립하지 않는다. 개개 집단과의 개별적 계약과 봉건 질서내에서 집단간의 계서, 그리고 국가 전체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성립한다. 무사 집단이 국가의 물리적인 통제를 이룰수는 있었지만, 그 물적 기반이 장원에 있고, 통치의 정당성이 천황에게 있으며, 공가의 문화적 영향력이 전국을 지탱하는 공통의 정체성을 구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호죠가의 통치 역시 기존의 체제 위에 덧씌워지는, 중층적인 형태로 구현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동시에 농노제는 확산되고 농노제를 직접 조직한 재지영주들이 생산에 기생할 뿐이 중앙귀족들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어 간다.
당대 사회의 구성은 30-50호정도의 마을을 기초로, 마을의 지두, 장관이 세속권력을, 승려, 신관이 종교권력을 분점하며 상층 묘주로 백성명주가, 고만저만한 농민들이, 맨 바닥에는 공민권이 없는 간인, 와끼자이께 들이 살았다. 초가집으로부터 예속민들의 움집까지 구성은 다양했으나, 전반적으로 예속의 비율은 낮았다.
자작농이라도 영주의 직영지를 경작해야하고, 소출의 30%를 현물세로 바쳐야했고, 만잡공사라하여 강제로 노역에 종사해야했다. 소작농의 경우 소출의 50~60%가 지조로 지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13세기 평균 생산량은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긴키의 상답 1단(반, 360보)에서 연 소출은 1석 2-3두에 이르렀는데, 이는 8-9세기에 비하면 30%~60%의 소출 증가다. 재배야채의 수종도 증가한다. 오이•가지•토란•무•파•생강으로부터 당근•우엉•상치등이 추가로 재배되고, 차 역시 일부 도입된다.
물산의 풍요는 유통의 증가로, 정기시에서 상설시로의 변화로, 자유도시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전문적 수공업이 출현하고, 가마쿠라로부터 교토, 나라까지 시장이 형성된다. 기존의 부민, 사원•신사의 예속민이 상인으로 전화하고, 좌(座)라는 동업조합을 통해 관소의 면세권과 원자재 공급망을 구축하며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민간을 통해 중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며, 연간 40-50척의 배가 절강과 일본을 오간다. 주요 수출품은 금, 사금, 유황, 진주, 목재, 도검 등으로, 비단, 명주, 찻종, 약재 외에 동전이 대량으로 반입된다. <헤이케모노가타리>는 다수 대중이 출현하는 소설로써, 당대 문학의 포괄적 성격과 성자필쇠의 의치를 잘 드러내준다. 불교가 대중적으로 전파되며 일련종같은 민중적, 지역적 지향이 기층에 뿌리내린다. 지역을 중심으로 재조직화가 일어나며, 신사가 무사와 명주백성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에 선다.
- 사회의 하부에서는 마부 세력의 결정기, 야스도키와 도키요리 같이 명성이 높은 집권의 지배하에서도 1231년 봄의 [관희의 대기근]을 비롯, 큰 기근이 빈번히 일어나 수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또한 큰 지진과 태풍의 피해도 극심했다. 굶주린 민중이 도처에 넘치고 따라서 그 민중을 노비로 매매하 는일이 성행하여 막부가 자주 금령을 내리는데도 그치지를 않았으며, 도둑이 각지에서 날뛰었다.
(...)
귀족과 막부, 지방의 영주, 대명주(지역 토호)들의 2중 3중의 수탈 밑에서 얼마나 민중의 생활이 파괴되었으며, 얼마나 그 저항이 퍼져 있었던가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한편 으로는 큰 재산, 부를 쌓아올리는 상인의 성장이 있었다.
- 191p
가마쿠라 막부의 치세는 원의 침입으로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외세에 대한 대응에서 막부보다는 지방 사족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이후의 논공행상 역시 중앙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이미 진행되건 장원과 구 체제의 해체는 가속된다. 국가, 장원, 재지사족에 의한 2중, 3중의 착취는 결국 이 생산력에 대한 수조권을 일원화하며 영향력을 끼치고있는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먼저 구축한 이들로 인해 재구성되고, 이들이 전국 시대의 주역이 된다. 상속으로 인한 분가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점차 적자상속제가 자리잡으며 가문 내에서 가독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갈등이 빈발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이상 개척할 땅이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부적 확장이 정체를 맞이하면서 개별 토지에 대한 투자와 집중이 이루어지고, 지역별 분화는 절정으로 다가가며 호죠씨의 지배 역시 도전을 맞이한다.
반 호죠씨 세력이 고다이고 천황을 필두로 니와 나카토시,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래 모여 막부로 진격하고, 가마쿠라는 함락되며 호죠씨는 멸망한다. 큐슈에서도 시마즈, 소니, 오토모 씨 등 주요 슈고에 의해 친제이탄다이가 무너지며 가마쿠라 막부는 종말을 맞이한다. 니와와 아시카가가 핮을 겨루고, 고다이고 천황이 탈출하여 남조를 구성하지만, 아시카가의 집권은 그 당시에는 굳건했다.
가마쿠라 막부 까지만 해도 인정되던 장원의 수조권은 무로마치 막부에 들어서 결정적으로 붕괴한다. 재지사족과 향토무사들에 의한 장원의 침탈이 빈번해지고, 막부의 수립에 있어서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오미, 미노, 오와리 등 8개 지역의 장원에 대해 그 연공의 절잔을 수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각지의 슈고들에게 분배하며 이후 전국 다이묘로의 변화의 발판이 마련된다.
14세기 후반으로 15세기까지, 긴키를 중심으로 총으로 불리는 자치기관이 자연촌을 통해 구성되기 시작한다. 이들은 장을 세우고 회합을 통해 주요대사를 결정하고, 이중, 삼중의 수취에 대해 마을 자체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연공과역을 영주와 상의하여 결정하고 집행하거나, 촌내에 영주의 관리를 두지 않고 공유지를 공동관리하는 등 자치 활동을 통해 생활을 유지한다.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자치활동이 시작된다.
무로마치 막부 역시 슈고와 간접통치로 인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지역을 중심으로 무사들이 정권의 권위와 실질적인 무력을 중신으로 통치를 구축한다. 오닌의 난은 그 지배력의 끝을 알린다. 틈바구니에서 잇키가 분출하고, 전국단위의 잇키와 일향종의 잇코잇키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장원의 시대가 지나가고 촌이 촌락으로, 그리고 영주와의 수직적 관계와 그 속에서의 자치를 통해 점차 전국시대에 근접해가면서 장원에 생계를 의지해왔던 황가와 귀족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주요 무사계급에 온전히 의존한다. 1502년 고카시와바라 천황은 즉위식을 거행하고자 호소카와 관련에게 헌금을 명하나, 그는 헌금을 거절하고 조정은 이를 삼키며 대례를 간소화한다. 비로소 조정은 유명무실해지고, 전국 다이묘들에게 천명이 놓인다.
나가오 타메카게가 우에스기 가주를 죽이고 스스로 우에스기가 되며 그 아들 겐신이 에치고와 북부 칸토를 지배한다. 카이에서는 다케다 가가 세력을 굳히고, 동해에서는 이마가와 씨가, 그 아래에서는 마쓰다이라씨가 깃발을 든다. 오와리의 오다, 시코쿠의 초소카베, 모리와 류조지, 시마즈 등등, 전국 다이묘는 재지사족으로, 관료로 지역에서 기반을 구축하며 일국의 주인으로 통치권을 확립한다. 그 과정에서 개개 촌락은 이전의 유적 구조보다 강하게 통제되었으며, 번집한 권리관계는 일원화되고 수조권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영내 소영주들의 자율권은 박탈당해 가신이 되고, 영지의 온전한 지배를 위해 잇키를 이용하여 기존의 봉건 관계를 떨쳐내기도 한다.
무로마치시대 발전한 생산력은 전국시대 영지의 직접 지배와 이를 통한 대단위의 관계 및 축성기술의 혁신을 통한 토목공사 전반의 개량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벼와 보리의 이모작, 때로는 삼모작이 시행되었고, 임산물을 이용한 시비법이 개발되며 공유지의 관리가 촌락 내 경제활동의 주요 초점이 된다. 단야사, 주물사들은 영주에게 예속되어있었으나 수요의 발달에 따라 차츰 독립적인 위치로 나아간다. 이는 다른 장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요가 올라오고, 도시가 형성되며 분업화와 전문화가 고도화된다. 좌를 기초로 한 동업조합의 구속력이 약해지며 상업이 자유로워진다. 주요 중심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상업도시들은 확장하여 비와호 연안의 상설시장으로, 사카이로, 효고와 하카타로 거점이 구축된다. 사원•신사의 문전에도 상업도시가 발달하며 수천호의 도시가 된다.
중국과 감합무역이 전개되며 감합부에 따라 정규무역이 이루어지고, 이에 더하여 왜구들에 의한 사무역 역시 흥성한다. 해금령은 시행과 철퇴를 반복하며 중국의 해민들과 왜구들이 마찰을 일으키게 한다. 주요 무역품목은 이전과 같이 금과 유황등으로 구성되었으나, 그 양에 있어서 증가가 있었다. 감합무역의 이윤율은 사여품을 포함해 약 5~6배였다. 류큐 역시 무역의 중개지로 부상하며 동남아와 일본, 그리고 중국 상인들로 번창했으나, 일본으로부터 동남아로의 직항로가 뚫리고 이후 정치적 격변에 놓이며 쇠퇴하게 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귀족들에 의한 문화창달은 쇠퇴하고, 전국 다이묘와 대중 지향의 예술들이 창조된다. 사루가쿠로부터 분화된 노가쿠와 쿄겐이 그 일례이다.
- 현대에서 민중에게는 인연이 멀어진 차모임만 하더라도, 그 원류는 키나이의 차를 재배하는 농민이, 차의 품평회를 하는 차모임에 있다. 이것이 발달하여, 여러 사람이 차를 맛보는 일 자체를 즐기게 되고, 그 예법이 형성되어 갔다. 한편, 무사나 귀족은 각지의 차를 마서보고 구별하여 내기를 하는 투차의 놀이를 했는데, 여기에서도 차를 맛보는 모임이 발달하고, 이 양쪽의 차 마시는 예법을 기초로, 나라 태생의 무라따 쥬꼬오가 요시마사에게 불려가 와비차로 발전시켰다.그 후 전국 시대 말기에 사까이의 상인 출신인 센 리큐에 의하여 차도로서 대성된다.
- 264p
이런 의미에서라면 센 리큐의 지조가 이해된다. 그가 대변하는 검박한 다문화는 사람들의 것이었고, 이를 금박으로 치장하고자하는 히데요시 앞에서 그가 절개를 굽히기는 어려웠음이라.
여차저차해서 노부나가가 등장하고 새력을 규합한다. 그의 3대적은 남도북령의 큰 절, 신사와 코오야산으로부터 아사이로부터 다케다, 우에스기, 모리등의 전국 다이묘, 그리고 호쿠리쿠, 토오카이, 긴키 일대의 잇코잇키였다. 종파들은 자체적인 장원과 승병으로 대표되는 무력, 절 앞 상인들과 수공업자를 통한 자체적인 정치적 단위였고, 그 종교적 영토을 통해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외국과도 교류한다. 전국다이묘들이야 당연히 넘어야 할 산이고, 잇코잇키가 그 하나로 꼽힌점이 특이하다.
- 노부나가는 아즈치를 근거지로 삼아, 긴키지방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1536~98년)를 츄우고쿠 지방의 정복을 위해 파견하고, 1580년에는 자신이 오사까 본원사(本願寺)를 공락하여 그잔 당을 평정하였으며, 또 시바타 카츠이에에게 카가의 일향일규(一向一揆)를 토벌하게 했다. 같은해 야마토의 쿠니 안의 영지 검색을 실시하여, 동대사, 홍복사, 그밖의 큰 사원, 신사의 영지도 남김없이 적어내게 하여, 그 장원지배의 유제를 근절시키고, 또한 최후로 남는 고대적 세력의 아성인 코오 야산(高野山)에도, 토벌의 병사를 파견했다. 1582년에는 전기한 바 와 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명하여 타케다를 파멸시켰다.
- 283p
이걸 어떻게 이 기간동안 했지. 말하자면 장원경제의 마지막 잔재이자 가장 유력했던 종파세력을 일소하고, 전국 다이묘들을 하나하나 무릎꿇려가며 일본을 통일시켜나간다. 아즈치 성을 짓고 성하마을에 상인을 모아가며 경제적 통솔권을 구축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히데요시가 천하인에 가까이간다.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시바타 가츠이에를 비롯한 원로들을 물리치고 자기 입장을 관철하며, 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합전을 통해 그를 객장으로 받고 계서를 정맂하며 오사카 성을 축조하여 본인의 영지를 구축한다.
히데요시나 노부나가나 상업을 통한 경제에의 통제권이 곧 권력으로 직결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총 1850만의 석고 중 200만석을 본인의 직할지로 삼고, 사도로부터 이와미까지 주요 금은광을 수중에 넣고, 교토, 사카이, 하카타, 오사카, 나가사키 등 유통과 상업의 주요 결절에 대한 통제권을 구축한다. 고니시 류우사, 카미야 소오탄 등 대상인들을 휘하에 집어넣으며 그 지배를 공고히한다. 특히 고니시 류우사는 사실상의 재무장관으로 재정 전방을 관장했다.
태합거지는 1582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598년까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전국의 전답을 상 중 하 하하의 네 등위로 나누고, 석고를 측정하며, 석고의 3분의 2을 세곡으로 거두고, 원칙적으로 현물세로 수취하나 밭에 대해서는 절반의 소출에 대해 금납을 허한다. 1정이 10단, 1단이 300보로, 상전 1단의 석고는 1석 6두, 이후 등위별로 2두의 차등을 두었다.
카타나가리를 통햐 병농분리를 추진하고, 기존 촌락의 소영주로 군림하던 하타모토 이상 사무라이들을 조카마치로 쓸어넣으며 영지 전체에 대한 관료적 지배를 구축한다.
물론 이 검지가 전국에 대해 일률적으로 적용된 것은 아니다. 검지장에 한명 올려놓은 마을도 있고, 장부에 적힌다는 것은 역 역시 부과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는, 제도에 의한 지배의 구축이다. 이 점은 세명의 천하인이 거로를 찌르고 찌르면서도 공통적으로 관철해온 의지이자, 시대의 요구이기도 했다. 다원적 갈등구조로부터 질서의 수립, 그것이 지난 세월의 다층적 억압과 지속적인 갈등이 낳은 희생으로부터 기인한 시대적 부름이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의고 정유재란을 시도하다 비명에 가고, 그 자리를 도쿠가와가 이어받는다. 세키가하라 합전으로 승패는 결정나고, 오사카 성 공방전으로 막부는 구축된다. 후다이와 도자마 다이묘의 구분과 개역을 통해 지배력을 공고히하고, 결혼과 성의 신축에 막부의 허가를 강제하며, 참근교대를 통해 다이묘들의 일탈을 억제한다. 금중병공중가제법도를 통해서 황실의 정치개입을 차단하고, 황실로부터 공가에 이르기까지 녹봉을 규정한다. 불교로부터 각 종단 역시 막부의 통제하에 놓인다.
지속적인 개역과 영토의 분할로 막부의 직할령은 17세기 말 정국 총 석고 2800만석 중 700만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요 광산에의 통제와 화폐 주조권의 일원화가 이루어지고, 막부의 어용상인들은 막부의 통제기제의 하나로, 외번들의 잉여를 수취하여 막부로 이익을 돌린다.
막부의 내각은 어떻게 구성되어있었는가. 종종 임명되는 다이로와 로쥬가 행정의 책임을 맡고, 와카도시요리가 이를 보좌한다. 각가 오오메츠케와 메츠케를 거느리고 이들을 통해 내부를 관장한다. 종교와 지역마다 봉행이 있어 실질적인 집행을 관장하고, 번의 기구 역시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지역을 통제한다. 이들은 알현이 가능한 하타모토와 그 이하의 고케닌으로, 하타모토 역시 영지를 갖는 소수 상위 10%의 하타모토와 녹봉을 받는 그 이하로 구분되며, 본래의 소영주와 국인층은 조카마치로 모여들고 촌에 대한 막부, 번의 직접 지배가 구축된다. 17세기에나 이르러서야 말이다.
촌은 각 50~60호로 이루어져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는 자작농과 구래로부터 촌장 등을 세습 또는 교대해온 상층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행정의 말단인 동시에 때로는 촌민들의 의사의 대표자로, 막부 또는 번주와 직접 협상하여 세금과 요역을 야리끼리했다. 조세비율은 5공5민 또는 6공4민으로 평균적으로 태합검지의 명목세율보다는 낮았으나, 전의 상태와 실질적 수취여부에 따라 이 비율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로부터 19세기에 이르르며 실고와 표고 사이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수취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무역의 제도가 복구되고 주인선을 통한 무역이 재개된다. 선박기술의 발달은 감합무역의 시대 100톤의 선복량에서 200~300톤으로, 최대 800톤까지 유통량을 늘렸고, 이를 타고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일본인들이 진출한다. 주인선을 이용한 해외로의 도항 연 7만명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중반으로부터 17세기까지 1만명가량의 일본인이 해외에 정착하고, 일본인 거리를 형성하며 동아시아 무역에 종사한다. 특기할만한 일은 1613년의 태형양 횡단이다. 다테 마사무네의 수하 하세꾸라 츠네나가는 이에야스의 비공식적인 묵인 속에 편도 90일로 태평양을 횡단한다.
에도막부의 지배가 공고화되며 기독교와 막부 사이에 갈등이 나타난다. 기독교가 내포하는 인본주의적 지향은 지배계급과의 종교가 불일치하는 상황에서 계급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막부의 기독교에 대한 경계는 갈등이 누적되며 점증한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함께 1635년 쇄국이 시작된다. 1614년부터 1635년까지 추산 28만의 기독교인이 개종을 거부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은 쇄국의 결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열었던 자유로운 교통의 단절과 함께, 에도 막부는 쇄국으로 자발성을 억압한다.
농업기술의 발전, 추수에 있어서 다양한 기계의 사용은 단 당 노동투입을 16세기 말의 50명에서 17세기 말의 40명까지 줄였다고 추정된다. 쌀의 단당 수확량 역시 태합검지 시기의 상전 기준 1석 5두에서 17기 말 1석 7두 내지 2석으로 증가한다. 관개와 수리기술 역시 발전하여, 경지면적은 17세기 초 164만 정보에서 18세기 초 297만정보로 1세기간 80% 증가한다. 수공업 역시 발달하며, 조카마치의 구성을 통한 10% 주요계급의 밀집은 유통과 상업을 진흥시킨다. 17세기 말 에도 인구는 50만으로, 1721년의 인구조사에서 그 수는 50만 1,394만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세계적으로 봐도 베이징, 런던, 광저우 등과 비할 수 있는, 손에 꼽히는 대도시였다. 한양은 한 반정도 된다. 물론 면적 편향이 좀 있음. 에도 경내 넓이가 치요다구, 주오구, 미나토구 인근이라 60~70km^2으로 잡힘.
죠카마치가 성립되며 죠닌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구성된다. 부의 부민으로부터 장원경제의 예속민으로, 좌를 통한 동업조합에서 상업도시의 구성과 함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전국 다이묘의 시대에 정치체들과 연합하며 결국에는 시민권을 얻는다. 상업의 주관은 대상인을 만들고, 화약병기의 시대와 신용, 현금흐름에 대한 통제권은 이들의 정치적 역할 증대로 이어진다. 화폐의 제도가 막부로 귀속되며 전국적 경제가 구축되고, 신용이 발달한다. 화폐의 매매로부터 수신, 대부, 어음이 발달하고, 유력 환전상들간에 <10인환전>이라는 동업조합이 결성되어 규범이 구축된다. 목면상인 미쓰이 하찌로오베에는 17세기에 에찌고옥을 개업하고 정찰판매를 시작한다. 일본사회 상업의 전통이 결코 짧지 않다. 미쓰이는 겸사겸사 막부 공인 대출업자도 겸한다.
- 평민의 경제력 상승과 함께, 엄격한 신분제 밑에 있기는 했었지만, 그들의 사회적 세력의 자각도 또한 생겨났다. 나가사키의 대상 니시카와 죠켄( 1648~724년)의 <쵸오닌부꾸로(1692 년 집필, 1719년 간행)>는 다음과 같이 쵸오닌의 자랑을 말했다. "천하에 금과 은이 사용되기에 이르고, 세상의 금은, 재보 모두 쵸오닌의 손으로 다루어지게 되었 다, 또한 유학자, 의사, 시인, 다도 그 밖의 풍류를 즐기는 여러 예술인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쵸오닌에서 나오게 되어," 쵸오닌이 문화를 떠맡는 사람으로 되기도 하였으므로, 신분제에서는 최하위 인 상인도 사실상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다. "물은 만물의 밑에 있으면서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양육했다."
- 350p
토지는 한정되어있는데 인구는 늘어나면 상속 토지의 단위규모는 줄어들고, 확장한 경지의 수득률 변동성은 높아 결국 흉년이 되면 토지의 겸병은 심화된다. 자작농들이 몰락하며 그 자리를 부농과 쵸오닌들에 의한 기생지주가 채운다.
이하라 사이가쿠, 마츠오 바쇼오, 치카마츠 몬자에몬등의 등장은 문예의 주도권이 점차 보편대중에게로 기우는 것을 보여준다. 유학 역시 이전에는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으나, 에도막부의 수립 이후 주자학을 중심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정립하며 대중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오규 소라이는 기존 주자학의 이기론에서 자연의 리와 인간사회의 리를 구분하고, 후자에 대한 시대적 변천을 감안하여 규범의 시대반영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현실사회에 대한 깊은 관찰과 분석을 통해 구축한 지배의 기술로써의 정치학이 <정담>이다.
<국성야합전>은 중국/일본계 혈통인 정성공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닌교조루리와 가부키로 크게 흥행하며 국가적 정체성을 구축한다. 출판문화의 흥성은 문례의 발전과 결합하여 민족적 정서를 가다듬는다. 1671년의 자료에서 당시의 간해서는 3,874부(22,164책)으로 나오는데, 21년 후 동일 조사에서는 7,204부(35,574책)으로 드러난다. 종교서적으로부터 문예서적이 각각 사할을, 의서 및 기술서 등 학술서가 2할이던 구성에서 이후 문예도서가 수위를 차지하며 출판문화의 중심이 교토에서 에도로 이동한다.
츠나요시의 대로부터 로쥬에 의한 지배에서 소바요닌에 의한 직접통치를 추구하고, 막부의 대관은 징세청부인으로부터 연공징수관, 지방행정관으로의 성격변화가 나타난다. 후다이 다이묘의 연합정권에서, 관료기구로써의 변모가 시작된 것이다. 츠나요시는 생류연민 같은 소리 하면서 개 살생 금지령을 내리고, 증가하는 인구압과 재정압박 속에서 막부의 번정은 서서히 한계에 다다른다. 충의를 강조하고 제도적 정비를 구축하던 중 1701년 충신장 사건, 즉 아코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의 키라 요시마사 피습사건과 할복, 이에 따른 오오이시 요시오 등 46인의 저택 습격 사건이 일어난다. 막부는 그 충의를 전범으로 삼으면서도, 율령의 지엄함을 보이는 사건으로 처결하여 본보기를 보인다.
-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지주와, 소농민 및 소작농의 분화가 현저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1721년에 낭인인 야마시따 코오나이가 막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는 근래에 칸토 여러 마을의 인별장(인구 명부)에서 사라진 농민이 140만명이라고 했다. 세이난의 쿠마모토 번에서도, 1746년의 문헌에 의하면, 이전에 30채의 가옥이 있었던 마을이 15채가 되고, 10채는 5채가 되었으며,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아사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농토를 내놓는 농민이 많은 반면에는 그것이 집중되는 지주 고리대금 업자가 성장하게 된다. [국토의 농지를 100으로 하였을 때 그 95 는 소작에 맡겨지고, 그 지주가 직접 경작하는 일이 없다.]
- 388p
 
그리고 요시무네가 계승한다. 요시무네는 막부 각료의 직제와 담당을 개편하며, 로쥬 중 일인을 캇테카카리로 봉하여 재정 전권을 부여하고, 감정봉행을 공사방과 승수방으로 나누어 전국의 대관을 통한 재정통제의 기조를 수립한다. 민정계에 있어 신분을 뛰어넘은 등용과 이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도 실시한다. 또한 <공사방어정서>를 통해 공사방에서의 민간 사법•경찰 사무와 형사•민사 소송판례를 정리하여 이후의 규범으로 삼는다.경제에 있어서는 신규개간을 장려하고 식산흥업을 통해 상품작물의 재배를 촉진하나, 이는 결과적으로 토지 겸병의 심화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대책으로, 인구압의 팽창과 그에 따른 재정누수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 에도시대 270년 동안에 대흉작 130회, 그 대부분이 18세기 중기 이후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이제 이미 천재가 아니라, 과중하기 그지없는 봉건 수탈로 농민생활이 파괴되어가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농민이나 하층 죠닌은 자식을 키우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낙태는 말할 것도 없고, 마비키라고 하여, 두번째 내지 세번째 이상의 자식을 산욛 즉 출산한 자리에서 갓난아기를 그 대로 죽여버리는 처참한 일이, 동북에서 구주까지 전국에 퍼졌다. 일본의 인구는 17세기초에는 약 2천만명, 이로부터 향보기까지의 1세기 반에 3천만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후의 막번체제에서의 인구는 그리 증가하지 않았다.
 
18세기 중기 무렵부터 텐메이기(天明期)에 걸쳐, 번 전체적인 대농민봉기, 폭동이, 매년 10건 가량이나 일어나기 시작했다. 1738년 오오슈우의 농민 8만 4천명은 영주의 추토군과 싸웠고, 그 이듬해 타지마의 이꾸노에서는 농민과 은광광부의 연합 봉기대가 인근 12개 번의 대군을 맞이하여 싸웠으며, 1754년 치꾸고의 쿠루메에서는 20만명의 농민이 성중의 조총을 산돼지 사냥을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미리 빌려내온 뒤에 봉기했다. 1756년에는 다이 잇키가 16개소에서 일어나 그때까지의 최고에 달했다.
- 398p
 
요시무네 사후(1751년) 틔미한 쇼군 2대가 이어지고, 그 틈 속에서 소바요닌 다누마 오키츠구가 점차로 실권을 장악하며 1772년 로쥬가 된다. 그는 대간척사업에 투자하지만 실패하고, 새로운 카부나까마를 승인하며 세입을 증대하고, 어용상인에게 주요 원자재의 수출입을 독점시키고 세금을 징수하는 등 상업을 통한 지대수익 증대를 노린다. 청국 대상으로 해산물 수출입을 전매시키고 그 이익으로 북해도를 개발하기도 한다. 전혀 상업진흥이 아니잖아..
 
이후 텐메이 대기근이 닥치고 쇼군 이에하루가 위독해지자 다누마는 1786년 정권에서 추방되고 마쯔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한 로쥬의 연합정치가 시작되는데 이를 칸세이 개혁이라고 한다. '정학'을 중심으로 '이학'을 탄압하며 사상을 통제하고 중농억상하며... 아 별로 안들어봐도 알 것 같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당시 에도의 닌소꾸요세바가 일종의 빈민 직업훈련원으로 기능하며 부랑자와 경범죄자들을 교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이다.(1790년)
 
생산관계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이르르며 나까마(동업조합)에 의한 전매가 차차 철폐되어간다. 하려고는 했다. 그러나 이를 강요할 번정과 막부의 통제력이 상업의 자발성을 이기지 못하고 종래 실효성을 상실한다. 각 번의 전매나 막부의 전매나 오래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수공업은 차차 발달하여 선대제로부터 초보적인 매뉴팩쳐로 이행한다. 사회적 분업도 발달하며 공정의 세분화와 결합이 일어나고, 공급망이 촘촘하게 연결된다. 견업에서 양잠, 제사, 제직이 지역적 분업화를 이루고, 뽕나무의 대량 상품화가 지역별로 나타난다. 면 생산 역시 18세기 중엽으로부터 반세기동안 목화 생산은 41배, 백목면 생산은 7배 증가하고, 증가한 견과 면 생산은 염색업의 고도화로 이어진다. 생산량의 증대는 무역에 대한 요구로, 훗카이도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와의 밀무역과, 큐슈 남부를 중심으로 한 중국과의 밀무역으로 이어진다.
 
- 그러나 이 한편에서는 철저하게 상업자본의 입장에 선 카이호 세이로가 상업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유학은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군신의 관계도 충의의 매매계약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오오사카의 죠닌인 야마가따 반또오는 불합리한 것, 초자연적인 것은 모두 부정하고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주장하는 등, 죠닌의 새로운 사상도 일어났다.
 
특히 철학에서는 붕고의 농촌에서 태어나 거기서 한평생울 보낸 미우라 바이엔에 의해, 근대 이전의 일본 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유물론 철학이 창조되었다. 바이엔은 대중을 편안하게 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라고 하여 민중을 위한 학문을 추구하였으며, (...) 자연의 객관적 실재성과 자연의 법칙을 추구했다.
- 414p
 
국학이 나오고 난학이 나온다. 노리나가로부터 하라타 아츠타네에 이르기까지 유교, 불교 전래 이전의 일본성에 대한 탐구로 시작된 국학은 이내 존왕양이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다. 노리나가 문인의 인구분포가 흥미로운데, 총 464인 가운데 죠닌이 166명, 농민 114명, 여성 22명, 칸누시•무사•의원이라는 구성은 그 계급적 지향과 포괄성을 보여준다. 요시무네 시기 화란어 강슺을 신청하여 시작된 난학은 외서의 번역과 실증 실험을 통해 스기다 겐파쿠의 대에 <해체신서>의 번역에 이르르고, 의학, 박물학, 수학, 천문학 등으로 그 관심사는 퍼져나간다. 1759년 일본 최초의 해부서 <조오시>가 나오고, 실험 중심의 난학은 번역과 자체적인 성과를 통해 입지를 구축한다.
 
정치적 논평 역시 활발해진다. 하야시 시헤이는 신분의 귀천 구분이 없는 일본인 전체로써, 서양과 같은 국만국가를 지향해야한다고 역설한다. 혼다 토시아키는 <경세비책>에서 텐메이 대기근과 마비키의 성행을 실정으로 재단하고, 국민국가의 형성과 신분의 구애 없는 능력중심의 등용을 통해 외부의 진출과 상업의 흥성으로 국가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후 사토 노부히로 역시 봉건적 할거의 종식과 국민국가의 형성을 요청하며, 이후 세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런소리하고다니면 당연히 봉건국가에서 잡혀들어감. 그래도, 세대를 이어나가며 국제적으로 닥쳐오는 문제에 대한 인식은 널리 공유되고 번과 막부의 변경에서 지식은 전수되며 미래를 준비한다. 막부와 열도의 모순은 갈수록 누적되어가며, 쇄국과 기존 체제 위주의 개혁은 이를 해갈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킨다.
 
- 1833년, 오우지방에 또다시 대흉작, 대기근이 일어나고, 이듬해 34년에도 전국적으로 흉작, 기근, 그리고 그 타격에서 회복 될 틈도 없이 36년에, 오우 지방은 천명기(天明期) 보다도 비참한 대기근이 들었다. 이 동안에 각 지의 백성일규도 천명기 이상으로 많아져, 36년의 일규는 전국에서 26건, 그 가운데서 코오슈우와 미카와의 대폭동 등, 막부의 중요 군사 거점지역의 질서를 한때 마비시켰던 일도 있었다. 이 이듬해 1837년 2월, 오오사카에서는 전직 마찌봉행소 요리기인 오오시오 헤이하치로오가, 쌀값 폭등과 관리의 무능들과 특권상인의 결탁으로 고통을 겪는 무산 민중을 구하기 위해 무장 봉기했다. 오오시오는 그 문인및 근교의 농민과 마치의 하층 민중 약 300명으로, 코노이케가 및 그밖의 특권상인의 집을 부수고, 봉행이 지휘하는 군대 와 싸웠다. 오오사카 시가지의 4할이 그 전화로 불에 탔다.
- 425p
 
일이 이꼴이 났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고, 쇄국의 기치를 바로세우며 만사의 옥으로 난학 후드려깐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봉착한 재정이 개선될리 없고, 그 와중 제번들은 각자 재정개혁을 통해 활로를 모색한다. 조슈는 시모노세키를 근거로 상업•해운활동을 강화함으로써 번정을 쇄신하고, 사쓰마는 오사카 대상인 채권 로쥬 한명 할복시켜서 책임 뒤집어씌우고 떼어먹고 류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중국 밀무역으로 재정개선에 나서 성과를 거둔다. 히젠 역시 상인들의 착취를 억제하며 농민들에 대한 직접수취를 강화하고, 나가사키 및 효고의 상인들을 통햐 재정 개선에 나선다.
 
시대는 막바지에 다다라 막부의 손은 묶여가고 물적 토대는 변화하는데 지방의 제 번은 저마다 할거하고 다음 시대를 바라보는 사상적 병화가 철학에서, 학문 풍조에서, 그리고 정치적 메세지로 솟아난다. 막부의 정책이 낳은 공백 속에서 실고는 표고 이상으로 상승하고, 지속적인 외국과의 접촉은 국가의 좌표를 새로 써나간다. 비록 막부의 압박이 강고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수는 없는 일이다.
 
고대로부터 개항 이전까지 일본의 역사를 일관하며 경제, 사회, 문화로 시기별 변모를 정리해보는 일이 필요하긴 했다. 조금 옛날 책이라 아니다 싶은건 꾸준히 찾아가며 업데이트를 하긴 했는데, 오래된 관점에서의 해설이 주는 통찰이 있다. 요는 중층성이다. 시대변화가 누적되며 기존 구조 위에 새로운 구조가 축적되고, 이탈로, 저항으로, 그리고 타협으로 새로운 관계가 과거를 대체해나간다. 지역별로 그것이 일관된 일도 아니고, 당연히 저항으로, 역전으로도 나타났지만, 부민제에서 고대 천황제로, 장원경제로, 사무라이의 대두와 슈고 다이묘, 종파와 귀족의 지배에서 전국 다이묘로 나아가며 물적 토대는 발전하고 그에 따른 상부구조도 맞추어 변모한다. 태합검지와 5공5민이 명목상으로는 가혹하지만,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 대책이 있고, 의도치않은 번정에 대한 억압이 결과적으로 죠닌과 농민들의 사회적 역량축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마쿠라로부터 무로마치, 전국시대로 이어지는 여정이란 이중, 삼중의 억압이 일원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문예의 주도권도 황실로부터 귀족으로, 사무라이와 대중으로 확산되고, 사회적 관계의 변화와 상업의 발달은 부로, 사원과 정부에 예속되어있던 장인들이 자기 이름을 찾고, 머물 곳을 찾고, 좌로, 라쿠좌로, 상업도시로 나아가며 죠닌으로 신분의 상승과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를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17세기에 정찰제 판매를 하는 미쓰이를 보고있으면, 일본의 상업, 수공업 전통이 면면부절히 이어져왔음이 새삼 떠오른다. 헤이안 시대로부터 막부의 지배와 전국시대까지 일본의 중세는 물론 대체로 난세였지만, 동시에 전통이 계승될 수 있을만큼 다원적인 사회이기도 했다. 거대한 변경이 존재했고, 귀족, 승단, 무사 등 다원적인 세력들이 통치권을 놓고 저마다의 리그에서 경쟁한다.
 
중층성을 일본사의 주요 특징으로 꼽은 이유를, 그래서인지 알 것만 같다. 야요이 시대 금석병용기 철기로부터 청동기와 농경, 목축이 패키지로 도입되고, 다시 도래인들이 재차 유입되며 고대국가의 율령과 종교가 패키지로 전래된다. 소가씨의 대에 일어났던 정치적 격변과 이후 덴무 천황의 즉위를 놓고 일어난 백제계와 '신라'계의 다툼을 보고있으면, 삼국 다 먹은 놈들이 뭐하러 열도까지 기어들어와서 여기서도 내전을 하고있는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반도의 사람들이 열도로 건너와 정착하고 가문을 이루는 것은, 어떤 마음의 발로였을까. 그 또한 변경을 찾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시대를 바꾸고 그 흔적들이 점점이 누적되어 총체적 변화로 이어진다. 비록 그 전래는 미약하고 느리게 진행되지만, 임계질량을 치고나서는 일사천리다.
전국시대의 마무리에서 세명의 천하인은 비록 서로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는 사이였더라도, 공유하는 지향은 일치했다. 체계화되고, 구래의 풍습, 예컨대 종단에 의한 지배라든가 이중삼중의 착취구조라든가 등등을 개혁하여 일본을 일원화된 구체적인 통치체제로 구축하겠다는 마음 하나는, 오다에게서 도요토미에게로, 도쿠가와에게로 이어진다. 물론 조선침공도 좀 하고.
 
막부의 성립으로 비로소 중세는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지만, 쇄국의 완성은 하나의 가능성의 절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감합무역으로부터 주인장까지 흥성하던 일본의 무역은 이를 기점으로 쇠퇴하고 내권한다. 막부의 관료제는 대를 넘어가며 안정적인 통치를 구축하고 유교 이데올로기와 정학(주자학)이 이에 봉사하지만, 인구압의 팽창과 그에 따른 체제의 낙후는 지속적인 보수만으로 지탱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국학과 난학이 흥성하고, 세계 속 일본의 위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정치적 제언과 그에 대한 공감이 형성되는 와중, 막부는 출구를 모색하지만 앗 흑선이 등장한다.
 
일본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일본이 근대에 이룬 성공은, 어디에 근원하는가. 일본사 고유의 특징은 무엇이 있고, 그게 현대 일본에 어떤 영향을 드리우는지. 고대사 잘 모르던 분야였는데 체계적으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던 듯.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