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인민출판사에서 나온 백권본 중국전사의 일주로 진한경제사에 대해 서술한다.
百卷本 中國全史 中國秦漢經濟史
(百卷本 中國全史, 北京: 人民出版社, 1994)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은 어째서 그렇게 무너졌고, 한은 진과 무엇이 달랐으며, 전기로부터 중기, 말기와 왕망시기, 그리고 후한동안 경제는 어떻게 변화발전하였는지 유물론적 사관으로 밝혀나간다. 생산력의 발전과 상부구조라는 전통적 시각에 충실하게 당대 경제의 세목을 구분하고 관부의 구성으로부터 관과 민의 진퇴를 세세히 나타낸다. 자료의 구성이 충실하다. 한서랑 사기만 봐도 이정도로 당대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움.
1부. 진한 경제의 개략적 서술
1장. 진한 경제사의 기본 내용
책 전체는 다섯개의 부분으로 구분된다. 통일 이전으로부터 통일과 멸망까지 진의 경제, 초한쟁패기 이후 전기 한의 무위지치, 한 무제를 중심으로 한 유위의 치와 집권화, 그리고 이후의 회복기, 전한 말의 혼란상과 왕망으로 인한 멸망, 후한 전기 지주세력과의 타협과 재정개선을 통한 경제개혁, 그리고 후한 말의 경제 와해까지로 나눈다.
토지와 소유, 농업과 공업, 상업과 유통, 국가체제의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 전반의 변화를 짚어나가며 경제 전반의 요동을 확인한다. 농업을 중심으로 화전, 수렵채집, 유목 등 다양한 삶의 양태가 병존하며, 관료를 중심으로 민간 지주, 상인이 지배계급으로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토지의 겸병은 심화된다. 주기적인 정부 정책에 의한 재분배가 일어나지만, 국가와 사족간의 관계는 후기로 갈수록 사족에게 기울어간다.
관영수공업을 중심으로 만간수공업과 가내수공업이 짝을 이루던 시장은 대토지귀족의 등장과 전횡 속에서 지주들의 지배에 의해 위축된다. 권력과 금력이 관을 타고 고이는 통일왕조에서 왕조의 흥망성쇠는 곧 사회의 경기변동과 직결된다. 정부 시책이 생산의 새로운 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제반여건을 조성할 때는 성장이 이루어지지만, 수확체증이 수확체감으로 넘어가며 이윽고 성장은 정체되고, 관의 지대수익이 비대해지며 국가는 쇠망한다. 그 속에서 기존의 소유체계가 붕괴되고, 새로운 성장의 싹이 자라난다.
"무엇이 진한 경제발전에 파도형 곡선을 나타나게 했을까? 이상의 분석을 통해서 살펴보면, 봉건국가가 집행한 경제정책은 경제기초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중국의 전제 집권적 국가기구가 지닌 행정과 경제의 두 가지 기능 때문에 봉건정권은 사회경제활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리고 사회생산을 조직할 책임도 부담하였다. 농민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이 좋고 나쁜 것이 바로 정부의 좋고 나쁨에서 결정된다."
2부. 진대 사회경제의 쇠퇴와 찬란
진대 사회경제는 통일로 그 경계가 넓어지고 요역을 통해 교통이 발달하며 대규모 사민으로 변경이 확장됨에 따라 규모면에서 발달한다. 그러나 진은 지속적인 정복으로 국가 내 인센티브 시스템이 돌아가는 군사국가였고, 진의 조세, 요역 시스템은 일국 규모에서는 적합했지만 전국 규모에서는 여러 문제를 낳았다. 확장의 한계로 인한 인센티브 시스템의 붕괴, 전국 규모에 대한 조세, 요역 시스템의 과도함은 진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황제는 지고무상의 재정대권을 갖고, 승상은 천자를 도와 만기를 보좌해 다스리는 일을 맡는다. 이사는 도량형으로부터 법령을 통일시키고, 대내와 소내로 나누어 제국의 공가와 제실의 사가의 재정을 관리한다. 대내의 관장은 치속내사, 즉 내사에서 담당하며, 전조, 고세의 징수, 축적과 지출이 이들의 몫이다.
"무릇 각지에 산재해 있는 양식‧추고芻稿는 매년 필수적으로 상계上計[호구‧전곡 등 회계보고]하기 위해 관리가 책을 지어 내사에 보고했다. 이는 치속내사가 통일적으로 장악하기 위함이다. 심지어는 관주官酒를 빚는 선도籼稻[메벼]와 나도糯稻[찰벼]의 수량을 규정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또한 반드시 사용정황을 정기적으로 내사에 보고해야 했다."
소내의 관장은 소부의 몫으로, 산택세의 징수와 염철의 이익, 구부의 징수를 맡는다. 소부는 이외에도 철재의 재고 축적과 방출, 황실에 소용되는 관영 제조업의 관장, 물가의 관리로부터 관개사업, 능묘건설 등 필요한 일이라면 다 한다.
진의 지방관리체제는 군현의 이층제로, 군에는 중앙정부의 기관을 동일하게 이식하여 각자 재정으로부터 군사를 담당했다. 지방의 소부 역시 염철의 전매로부터 관영제조업의 운영, 구세의 징수, 토목의 일을 담당하며 연간의 운용은 중앙으로 상신되어 매년 고핵을 통해 장징(포상과 징계)이 결정되었다. 진나라 관료제 훌륭하다. 현은 만명 이상일 경우 현령, 이하일 경우 현장이 임명된다. 현승을 비롯한 관리들이 현령을 보좌하며 군과 마찬가지로 수공업으로부터 공전, 세제의 집행을 관장한다. 소수민족 단위에는 도색부가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유화된 정책을 집행한다. 현 아래로는 향이, 향 아래로는 정•이가 기층까지 확장한다.
진대 굉료기구는 촘촘한 운용과 경제에 대한 관장을 통해 군사국가로써의 총력전을 뒷받침해주는.내치의 도구였다. 그러나 관영 수공업의 운용과 물가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 등 국가에 대한 개입의 정도는 상당히 높았고, 당대 기술이 갖는 물리적인 한계는 일국 단위의 시스템이 전국 단위로 호가장되었을 때 다대한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진은 이와 같은 영토의 확장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였고, 체제의 모순은 증폭되어 끓어간다.
주대의 토지제도는 100보가 1무요, 100무를 1부에게 지급했다. 상앙의 시대 1부에게 지급하는 토지는 240무로 증가한다.
"상군서商君書 「거강去强」에는 “사경四境 안에 장부丈夫와 여자女子는 모두 이름이 올라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기록하고 죽은 자는 삭제한다”고 하였다.15 이름이 등록된 자는 모두 전택田宅이 수여되었다. 곧 “위로는 자기이름을 등록하여 알릴 수 없고, 아래로는 전택이 없다”와 상반되었으며,16 농민은 태어나면 문서에 올려서 토지를 받았고, 죽으면 문서에서 삭제하고 토지를 환수하였다. 호구와 토지는 모두 국가에서 관리하며 배분도 총괄하였다."
이를 수전제와 편호제라 한다. 더하여 궁공작호사전제를 통해 군공을 세우면 토지를 늘려주고 작위를 주어 인센티브 시스템을 구축했다. 더하여, 1경(240무)당 추세 3석, 고세 2석을 걷고 반드시 본인이 경작하도록 한다.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어서 아비가 죽어 아들이 계승하려고 해도 수전의 국가에 대한 환수와 재수여가 필요했다. 진은 황무지가 많고 인구가 희박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도의 성립이 가능했다.
"진나라의 육국六國 통일 이후 사회형세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곧 진국 자체로 말하면, 진나라의 통일전쟁 완수로 말미암아 토지약탈은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고, 따라서 진나라의 수전사전에 대한 현실투쟁의 수요가 다시 없어지면서 계속 진행할 객관적 조건도 상실하였다."
"요컨대, “백성이 스스로 전지田地를 등록하게 하는” 정책은 단지 진국의 토지제도발전의 필연적 결과만이 아니라, 또한 각국 토지제도 발전상황의 개괄槪括이자 총결總結이었다.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시황始皇 28년(기원전 219년) 낭야대각석琅邪臺刻石에서 “육국을 합친 경내는 황제의 토지이다”고 하였는데,24 짐朕은 곧 국가이고, 전국토지에 대한 최고 소유권을 설명한다.
"이러한 “백성이 스스로 전지를 등록하게 하는” 정책은 또한 황권이 이미 전국 신민臣民이 소유한 토지의 세대계승과 지배권을 승인했음을 설명한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봉건사회 토지점유의 이중구조가 최종 형성되었다. 토지소유권이 국가와 개인으로 양방향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에 온전한 국유제가 아니었고, 또한 온전한 사유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와 개인의 종합체로서 토지소유권이 부정형성과 유동성을 동시에 지녔다."
육국의 통일은 기존의 수전제가 작동할 수 없는 물적 조건을 부여했고, 왕토의 선포와 그에 따른 민간 토지 등록제는.실질적으로 토지의 소유를 허함으로써 기존의 체제를 붕괴시켰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이는 전제주의 중앙집권의 기초였지만, 과연 당대 체제는 그와 같은 운용의 부하를 견딜 여력이 있었는가?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라서 전국 말기에 이르러 각국의 화폐는 두 종류의 통일된 추세가 나타났다. 하나는 경제적 교류가 빈번했던 중원中原 지역인 곧 주周와 한韓, 조趙, 위魏 4국에는 양식이 완전히 서로 같은 소형방족포小型方足布가 통용되었는데, 이것은 자연히 상품교환의 발전과 통일화폐의 계량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다른 하나는 황하黃河 지역에 인접한 주周, 위魏, 조趙, 제齊, 연燕, 진秦 등 나라에는 모두 전후로 원전圓錢이 유행하였다. 원전은 주조, 유통, 저장 등의 방면은 물론이고 모든 면에서 가장 편리하여서 실제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이러한 화폐형식은 자연히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결과였다."
"진나라 중엽에 이르러 일국一國의 화폐는 두 등급으로 나누었다. 황금은 일溢로 이름 짓고 그것을 상폐上幣로 삼았다. 동전에 반량半兩이라 적혀 있고 무게가 그 글자와 같았고 하폐下幣로 삼았다.”27 근래에 이르러 고고발굴로 출토된 진대秦代 “반량半兩”전錢이 비교적 많다."
화폐의 제조권한을 국가에 집중시키고 이를 관장하는 것은 당연히 경제발전의 기초이다. 그러나 중국처럼 광대한 대륙에서 이를 구축한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쉽지않은 일이다. 관에서야 그렇게 하고싶다고 하겠지만, 실제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나 종류는 그와는 달랐다. 물론 세폐를 금납해야했기 때문에 상품으로써의 화폐, 공식 화폐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존재했다. 그러나 민영의 화폐제조와 관의 임의제조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진왕조가 반포한 도량형제는 아래 표와 같다.
길이[度] 1장丈=10척尺=100촌寸
현재 230cm
부피[量] 1곡斛=10두斗=100승升=1,000합合
현재 2,000ml
무게[衡]
1석石=120근斤 현재 307,050g
1근斤=16량兩=384수銖 현재 256.25g
진시황은 다섯차례 순유를 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동시에, 국가 전체를 지나가는 간선도로를 구축하여 국가 내 유통의 활성화를 꾀한다. 진치도는 너비는 50보로 무거운 추로 땅을 다지고 3장마다 청송을 심어 가로수로 삼는다. 함양으로부터 제, 연 방향으로 향하는 간선과 함양으로부터 초로 향하는 간선이 주요했고, 함양에서 내몽골로 이어지는 700km의 신도는 산맥과 평원을 건너는 구간이었으나 2년 반만에 완공된다.
진 왕조는 또한 수리사업을 통해 운하를 건설하고 저수지를 축조하며 광서 지역 홍안현 경내에 영거를 축조하여 남월을 경략하기 위한 보급로로 사용한다.
"중국 고대 수리공정 기술의 최신성과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였고, 노동자가 고도의 지혜를 표출해냈다. 영거는 대략 시황始皇 33년(기원전 214년)에 만들어졌고, 상수湘水‧이수漓水에 인접하였으며, 전체 길이는 30km였다. 그것은 장강長江과 주강珠江의 양대수계를 통과하였고 바로 중국 고대 수리교통의 중요한 중추였으며, “삼초양월三楚兩粤[湖北‧湖南‧廣東‧廣西]의 요충지”37라 칭하였고, 세계의 해운 공정사상 중요지위를 점하였다. 요컨대, 진 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10여 년간 지속적으로 치도馳道‧직도直道‧신도新道‧영거靈渠 등 대형 수륙교통의 건설을 완성하였다. 그 공정은 거대하고 웅장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그 아름다움을 겨룰 만하다. 당시 장성長城 이남의 광대한 지역은 모두 이와 같은 방대한 교통망 내에 포함되었다."
진은 영토가 광대하고 백성이 희소한 나라였으며 백성에 대한 국가의 예속이 강했다. 말인즉슨 천사-즉 사민정책을 활발하게 사용하여 강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한다. 이는 육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파촉과 남양에 대한 사민이 시작되고, 함양으로도 12만 호를 전국에서 끌어올린다. 북부 변방의 양산, 음산, 유중에 대해 조 제 위 초국의 사람들을 식민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응하고, 남부 변방의 육량, 계림, 상군, 남해에도 사람을 천사하여 수자리를 살게한다.
"결론적으로, 진 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 10여 년 내에 계속해서 여덟 차례나 대규모 백성을 이주시켰고, 전체 천사한 백성은 약 106만 호, 인구는 5백만 명에 달하였다. 당시 백성의 이주는 대체로 두 종류로 나뉜다. 호부나 강족强族 같은 부류는 관중에 천사하였고, 평민이나 죄리罪吏[죄를 지은 관리]와 같은 부류는 변경으로 천사하였다."
진왕 영정 미친노인네 전체 인구가 2천만인데 1백만호 5백만명을 천사를 시킨다.
- 진나라의 중국통일 이후, 토지점유의 이중구조가 완전히 확립되었다. 당시 육국의 귀족은 타격을 입어 대부분의 호부豪富는 관중 등지로 천사당하였고, 서민지주의 발전은 완만하였으며, 가장 세력을 얻은 것은 군공으로 가문을 일으킨 관료지주였고, 진대 지주계급의 숫자는 많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적은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의 숫자는 많아졌으며, 그들은 봉건국가에 예속되어서 농업생산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주요역량이었다. 시황 32년(기원전 215년) 갈석碣石의 비문碑文에는, “남자는 그 밭을 즐기고, 여자는 그 업業을 닦고, 일에는 각기 차례가 있다. 여러 산업에 혜택이 미치고, 오랫동안 함께 밭에 나오니, 편안하지 않은 곳이 없다.”56
"철제농기구는 전국시대에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진대秦代 철제농기구 역시 발전하였다. 최근 고고학에서는 진대 대규모 철보습‧철삽‧철호미‧철낫 등을 발견하였는데, 분포가 광범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구의 모습도 개량되었다."
우경 역시 시작되었고, 소도둑은 처벌했으며, 농가에서 사육하는 소는 적정 번식률 역시 관에서 규정하여 이에 이르지 못하면 처벌했다. 아니 소가 새끼를 안쳐도 처벌을 받아요. 진률에는 파종방법과 적정 전지 관리 방법 역시 기술되어있다.
"진대秦代 농업생산력은 일반적으로 1무畝마다 속粟 1석반이 생산되고, 지금 제도로 환산하면 1무는 속粟 140시근市斤[1市近=500g]이다. 당시 농업생산 발전에 따르면 진대 봉건정권이 각지에 분산해 놓은 관창官倉의 쌓인 곡식은 상당히 풍부하였다."
"유방劉邦이 일찍이 “오창의 곡식에 근거해서”67 항우項羽를 패배시켰고 이후에 영포英布가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여전히 혹자는 “오창敖倉의 곡식에 근거한 것”68이 성패成敗의 관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진한교체기 10년간 오창의 곡식은 사용해도 없어지지 않아서 그 비축된 양식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6"
고조본기에도 유방이 이 곡식 털어먹는다. 얼마나 축적된 양곡이 많았으면 초한쟁패기에 그렇게 보급 끌어다쓰고 개국하고나서도 곡식을 땡겨먹냐...?
"생산에 종사하는 공인工人 중에 어떤 사람은 관부가 개인수공업 공장에서 징발하였는데, 대부분은 곧 형도刑徒였다. 무릇 수공업품은 필수적으로 제조 관서, 책임자와 제조인의 성명을 새겨야 하고, 이것으로 질과 양을 조사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관영수공업 생산관리체제 대단하다. 생산자 이력추적을 통해 품질관리를 하고 불량나면 이력에 따라 처결한다. 어떤 처결을 하느냐. 유지보수기간만큼 요역을 늘린다. 관영 야철업으로부터 청동업, 도자공방의 산물들은 오늘날 병마용갱의 제품들로 그 품질이 드러난다. 관영 제조업의 상품들은 국가를 위해 소용되었고 민영 제조업과 시장에서 경쟁하지 않았으나, 양자는 기술수준을 공유하며 공진화한다. 이외에도 옻칠, 방직, 제혁, 자염과 조선, 건축이 발달하였다. 농업을 우선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풍조는 있었지만 진 시황은 대상을 존중하며 상업 발달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한다.
- 예컨대 오씨烏氏<현縣> 나倮는 가축을 기르고 이를 내다팔아서 가문을 일으켰는데, “가축을 기르는 데 말과 소에 곡식을 사용하였고, 진 시황제는 나倮를 봉군封君에 비견하여 당시 열신列臣과 조회에 들게 하였다.”78 파巴의 과부寡婦 청淸은 단혈丹穴을 경영하여 부를 이루었는데, “진 시황이 정조가 굳은 부인이라고 여겨서 빈객으로 대우하고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축조하였다."
- 진대秦代 노동자는 십여 년이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이와 같은 거대한 물질문명을 창조했다는 데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전제주의적‧중앙집권적 정치체계는 황권을 대표로 삼았다. 이것은 주권과 토지소유권‧행정기능과 경제기능의 통일체였고, 그것은 국가기구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경제 생활에 관여하기에 충분하였으며, 노동자의 피와 땀을 억압하여 착취할 수 있게 하였고, 통일국가는 분산되고 약소한 경제역량을 모아서 총체적인 실력을 만들어내서 집중된 역량으로 대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종적으로 경제조건에 대해 명을 내려 바로 시행할 수 없었고, 인간의 비극은 늘 사회경제생활에 과도하게 간여하여, 더욱 많은 사람이 기적처럼 배후背後에서 생산을 창출해내기를 망령되게 기도企圖하였다.
병역으로부터 요역, 역역의 징발은 진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병역으로 안보를 보장하고 요역으로 사회인프라를 닦는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서 동중서董仲舒의 견해를 인용해보면, 진나라는 상앙商鞅의 법을 이용하여 “1개월은 경졸更卒이 되며, 얼마 후 다시 정正이 되어 1년, 둔수屯戍로 1년 복역하며, 역역은 옛날보다 30배이다”라고 하였다."
연간 1개월은 역을 수행하고, 2년간은 병역을 치르는데 1년은 지방에 주둔하며 군사훈련을 하고 1년은 번상하여 경사에 둔수한다. 군공을 세워 작위를 받으면 56세에 퇴역하고, 작위가 없으면 60세에 퇴역한다. 군적에 오르는 기간은 17세로부터 43년이요, 2년의 병역과 요역을 합산하면 전생애주기동안 연간 1개월의 요역은 1290일, 2년간의 병역이 720일로 합이 2010일이다. 정남 인생의 6년은 나라의 것이다. 그런데 요역해서 건축한 시설물 하자나면 유지보수를 해야한다. 이때 요역은 무상으로 가산된다. 더하여 각종 임의규정이 이를 가중한다. 이는 일국 단위에서도 가혹한 예속이지만, 고대사회의 예속의 정도를 보면 군공에 따른 가산제와 결합하여 군사국가로써의 진을 유지해주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육국을 통일한 후였다.
- 그러나 진통일 이후 국토가 광대하고 남방의 백성은 반드시 새북塞北에 이르러 수자리를 살아야 하고, 동방의 백성은 반드시 서남에 이르러 변방을 개척해야 하는데, 원거리를 왕래하여 도로에서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았고, 노동자는 실제로 요역부담이 배로 증가하였으며, 때문에 “백성의 피해와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
- 통치계급은 노동자의 신체노역에 대해 매우 잔혹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진요秦謠가 전한다. “아들을 낳거든 키우지를 말고, 딸을 낳거든 육포를 먹여라. 장성 아래를 보지 못했는가. 해골이 겹겹이 쌓여있구나.”89 이것은 진대 사회에 “보편노예제普遍奴隸制”가 남긴 엄중한 표현이다.
- 진나라 때 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는데, 매년 모두 2백만 이상의 정남丁男이 징발되어야 했다. 정남이 부족하자 또한 정녀丁女를 징발하였고, 대규모 노동력이 생산을 이탈하자 사회경제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초래하였다.
연간 전체 인구의 10%가 징발되어야하고 정남이 모자라자 정녀를 징발하는 사회는 지속될 수 없다. 진이 기존의 군국제를 육국으로 확장하며 그에 맞는 조정을 하지 않은 것은 결국 국가의 쇠망으로, 거대한 저항으로 돌아온다. 진왕 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국의 통일이란 위업은 진대에 처음으로 완수되었고, 미증유의 상황에 대한 시행착오는 필연적이었다. 결국은 집권화와 분권화의 요동이기도 하다. 관이 토지의 소유권과 제반 수공업을 직접 관장하고 민간 노동력을 병역과 요역으로 대부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에서, 정부의 흥망성쇠는 경제의 주기와 직결된다.
- 그러나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 이후 조세제도 개혁이 추진되어, 기본적으로 “토지를 버리고 인신에 과세하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이때 진나라의 조세제도는 주로 전조田租‧고세稿稅, 호부戶賦‧구부口賦, 잡부雜賦 등 크게 세 가지를 포함하였다.
1경은 240무로 1무당 생산량이 속으로 1석 반이었으니 1경에 매겨지는 추세 3석과 고세 2석은 상대적으로 낮은 세율이다. 수전제 하에서 토지의 소유주는 국가로 기타 인두세의 부담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전조와 고세의 비중은 낮은 편이었다. 왜 토지를 버리고 인신에 과세하는가, 인신에 대한 과세가 곧 소득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정챡에 어떻게 대책을 세우느냐, 호구단위로 과세가 이루어지므로 최대한 호를 늘리지 않는다. 즉 정남이 분가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관은, 기준을 정해주어 절세를 예방한다. 세금을 향한 관민의 경합이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아름다운 풍습이다.
- 사기 「상군열전商君列傳」에는 “백성에게 아들이 둘 이상인데 분가分家시키지 않으면 부세를 두 배로 부과하며”,100 “집이 부유하고 아들이 장성하면 분가시킨다”고 했는데,101 그 목적은 한결같이 호부를 많이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호부는 구부로 전환된다. 전기의 행정의 성김이 호부를 통한 세제로 구현되었다면, 병역과 요역을 통해 인구 전반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며 인구의 수에 근거한 징세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얼마였느냐, 천하를 통일한 후 가볍게 거뒀던 구부가 1년에 40전이었다. 이는 물가가 안정되었던 춘추전국 평균 미 1석의 가격이었다. 그러나 당대 호별 부세는 6포로 곧 660전이었는데, 호당 평균 인구인 5인으로 나누면 곧 120전이다. 한대의 산부는 진대의 구부를 계승한 체계로, 산부 역시 1산이 120전이었다.
전세와 구부 이외에도 토공등을 포괄하는 잡부라고 하여 각종 잡세의 임의수취가 있었다.
토지를 버리고 인신에 과세하는 것은 왜 필요했는가. 진대 경제의 고도화는 농업으로부터 민영수공업, 상업과 도시의 흥성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익원의 다변화로, 농지를 버리고 유리걸식하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인구의 증가로 나타났고, 이는 정부의 안정적인 통치에 위협요인이며, 증가한 이윤에 대한 수취방식의 다변화로 나타났다. 따라서 평균적인 백성의 수입을 기준으로 인두세를 걷고, 상고에 대해서는 이의 두배를 걷어 상업을 억압하면서, 전세를 낮게 유지하여 농업에 인센티브를 줄 정책적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토지를 버리고, 인신에 과세한다.'는 원칙으로 이후로도 중농억상의 정책기조를 구성한다. 즉 도시 프롤레탈리아의 생성을 억제하면서 기존의 생산구조로 백성들을 통제하고자하는 국가적 의도의 표출인 것이다.
- 그러나 “토지를 버리고 인신에 과세하는” 경제정책은 단지 사람이 물질적인 재부財富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능동적인 작용을 한다는 데 착안했으나 사람이 반드시 생산수단과 서로 재능을 결합해야 사회 재부를 창조하게 된다는 원리에는 소홀하였다.
- 이 때문에 진통일 이후 노동자의 조세부담은 두 배로 증가하였다. 과도한 조부租賦 수탈은 노동자가 생계유지와 간단한 재생산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므로 “백성은 죽으면 <부세에서 해방되어> 축하하고, 태어나면 <가혹한 부세로 인해서> 조의를 표한다”고 하였다.
가혹한 요역과 부세는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토지소유제도의 변경과 양토의 확장으로 이어졌던 성장이 정체하기 시작하자 비대한 관료제도의 지대추구행위는 결국 국가 자체의 경제적 동력을 갉아먹고, 이내 요역 체계의 불합리성과 급격한 세제인상으로 대중적 저항을 만든다. 이는 인플레이션으로 표출된다.
- 진 시황 31년(기원전 216년) “미米 1석에 1,600<전>”이었는데,117 곧 사회경제의 위기 신호였다. 전국시대부터 평년 작황에는 속粟 1석에 30전錢, 미米 1석에 43전 정도로 환산하였다. 이때 미가米價는 37배나 오른 데는 반드시 식량생산이 매우 감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곡가가 37배 오르면 진시황도 짤없이 가는거야... 항우가 60만 대군을 통솔하고 유방이 56만을 동원했다는 것은 당대 민총이 2천만임을 감안했을 때 그 혼란상을 새삼 짐작하게 한다.
- 전쟁을 통해서 격렬하게 파괴된 지역은 호구가 대규모로 감소하였다. 예컨대 곡역현曲逆縣은 진대秦代 3만 호였으나 한漢 고조高祖 6년(기원전 201년)에는 겨우 5천 호로 5/6가 감소하였고, 다른 크고 이름난 도시(大城名都)에서도 “호구에서 얻을 수 있는 숫자는 2/10~3/10이였다.”123
호구의 감소가 반드시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한이 영토국가라고 하더라도 영토 내의 변경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고, 필요하다면 사람들은 통제롭 터 벗어나 심산유곡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호구의 감소추세가 보여주는 당대의 혼란상은, 다대한 희생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진대의 전국 인구는 2천만, 한 초의 전국인구는 1천4백만이었다. 6백만이 모두 전쟁으로 희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왕조 교체기의 혼란상은 곧 호구의 감소로 나타났다.
- 항우가 바로 전쟁파괴광이었으며, 일찍이 양성襄城을 점령하여 양성에 남은 것이 없게 만들었고, 지나가는 곳에는 전멸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또한 병사를 이끌고 함양咸陽을 도륙하였고, 진나라의 항복한 왕자 영嬰을 죽였으며,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워, 불이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고, 그 보화와 부녀자를 약탈하였으며, 그가 놓은 큰불은 진 시황 병마용갱兵馬俑坑에도 재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아니 항우의 함양 불놀이가 병마용갱에 재로 남았어?
"그러나 진대는 중국역사상 첫 번째로 건립된 봉건통일국가이기 때문에, 진왕조는 대국大國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거울삼을 경험이 아직 없었고, 여전히 전국戰國시대 진나라의 경제제도를 계승하였으며, 소국小國에서 대국大國으로 이르는 전환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진의 급속한 쇠퇴는 무엇이 이유였는가. 일국 단위에서는 기능하던 군국제를 전국 통일 이후에도 유지했고, 그로인한 관리비용의 증가와 요역 수행비용의 증가, 군사국가로써 성장한계가 농업제국으로써의 수확체감선에 다다랐고, 이것이 결국 과도한 노예노동으로, 대중적 저항으로, 사회적 혼란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육국의 정복까지는 잘 기능하던 진의 성장동력은 통일 이후 작동하지 않았고, 거대한 성장만이 유지해줄 수 있었던 진의 가혹한 체제는 결국 막대한 인플레이션으로, 호구의 감소롸 내전으로 달려나간다. 항우라는 미증유의 인간재앙과 유방과의 각축 끝에, 총 인구수는 600만이 감소한다. 진은 붕괴하고, 한이 일어선다.
3부. 전한 전기 사회경제의 회복과 발전
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
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농경제국은 확장을 통해 성장하고, 확장한계에 다다르면 지대수익의 증가에 따라 체제가 건전성을 잃고 붕괴하며, 분권화된 제국은 다시 집권화를 통해 통치를 회복한다.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는 원리이다. 그 과정에서 농업경제 생산의 수단인 토지는 왕조의 개창에서 재분배되나, 이후 토지의 겸병은 심해지고 자영농은 예속관계로 밀려난다. 세수는 감소하고 재정적자는 심해지며 화폐제도는 문란해지고 국가의 권력은 와해되며 외침은 왕조에 마침표를 찍는다.
집권화의 끝이 분권화의 시작이요, 분권화의 무질서는 왕조의 개창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은 재분배되고 지대수익의 축적을 위해 입안되었던 제도는 혁파되며 새로운 생산의 결합을 촉진한다.
- 청대淸代 양정렬楊廷烈의 방현지房縣志에는 그 당시 온몸에 긴 털이 있는 “모인毛人”을 발견했고, 그들은 자칭 선조가 진 시황의 장성축조의 고된 역에서 도피한 민부民伕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깊은 산림 속에 숨어 원시인의 생활을 지내왔으므로, 온몸에 긴 털이 있는 후손이 번성하였다.
이런거 보고있으면 진시황은 살아있나요 도시전설이 남의 일이 아니라니까... 고조 유방은 무위지치를 통해 경제의 자발성이 회복되기를 촉진하고, 이는 여후로 이어져 문경지치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 군현제는 군국제로 전화하나, 이는 통치제도의 후퇴는 아니었다.
"첫째, 군대에서 제대시켜 농업으로 돌려보내고, “공로功勞에 따라 전택田宅을 주었다.”15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서 진나라를 멸할 때 따랐던 관동關東 군인 중에서 관중關中에 남기를 원하면 12년간 요역을 면제하였고, 관동으로 돌아가도 6년간 요역을 면제한다고 선포하였다.
셋째, 노비를 방면放免하도록 명하였다. 전란 중에 기아로 자신을 노비로 판 사람은 일률적으로 서민으로 회복시키도록 조서詔書를 내렸으므로, 사회 노동력이 해방되어 농업전선이 더욱 강화되었다.
다섯째, 인구 증가를 장려하였다. 한서 「고제기하高帝紀下」에는 고조高祖 7년(기원전 200년)의 규정에 “백성이 자식을 낳으면, 다시 2년간 일하는 것을 금한다”고 했는데,19 곧 2년 동안 요역을 면제하였다. 이것은 전후 인구증가에 유리하였고, 이로써 농업노동력은 차츰 증가하였다."
이에 더하여 기존의 소유관계에 대한 회복과 전세 및 부세의 경감을 골자로 고조는 경제의 회복, 그 중에서도 농업 생산의 증대를 목표로 하여 정책의 인센티브를 조절한다. 병역과 요역 양 역 역시 직할령 내에서만 주둔하게 하고 제후왕의 영지에는 폭넓은 자율성을 부여하여 당대 관료체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활용을 영역으로 구분짓는다.
고제 역시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압한다. 상고에 대해서는 관직 보유의 금지, 토지 소유의 금지, 신분의 차이, 더하여 재산세인 산부를 배증하여 적용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되서 주요 상고 씨족을 관중으로 천사를 시켜버린다. 기둥뿌리 뽑아서 관할권에 둔다.
"제齊의 저渚‧전田씨, 초楚의 소昭‧굴屈‧경景씨, 연燕, 조趙, 한韓, 위魏 후예들 및 호걸명가豪傑名家”20를 천사하였고, 부상대고富商大賈를 포함하여 모두 10여 만명을 관중으로 옮겼으며, 그들을 직접 중앙정권의 통제하에 두었다."
"그러나 한초에 비록 상고에 대한 규제를 추진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에게 정상적으로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윤허하였고, 한초漢初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은 상대적 융통성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비교적 융통성이 있었다는 뜻이다. 누구와 비교해서 융통성이 있었느냐, 진왕조이다. 진왕조에서는 종종 시적에 오른 상고들 뽑아다가 변방으로 천사시켰다.
그리고 이성 제후왕들의 분봉이 이어진다. 직할령 외의 영토에 대한 제후왕의 분봉은 군공에 따른 분배이기도 했으나, 당대의 사회경제적 요건에 따른 지방에의 분권화이기도 했다. 통치가 가능한 범위에 대해서 직할령을 선포하고,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제후왕에게 승상의 임명으로부터 재정의 운용, 정책의 집행까지 폭넓은 자율권을 주어 경제의 빠른 회복을 경주한다.
- 한초 정권은 “백이<강>百二<江>”의 이로움이 있는 관중 장안長安을 선택해서 수도로 삼았고, 아울러 수도부근 15군郡 지역은 직접 통괄하였으며, 별도로 중앙통치역량은 한동안 동방 39군郡 지역까지 도달하기가 곤란하여 제후왕국을 세워서 통치하였다.
- 한초 정권은 군국병행제郡國竝行制를 추진하여 지방왕국의 자치권력을 확대하였으며, 중앙정부는 지방 사무에 대해 간섭이 많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무위이치無爲而治”로 표현되었다. 그때의 군국병행제는 지방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비교적 큰 작용을 하였다.
그렇다면 군국병행제의 경제적 회복 성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났느냐, 호구의 급격한 감소는 일시적으로 영토는 조대하고 인구는 희소한 상황으로 구현되고, 이에 따라 지역별로 인구의 유치를 위해 다양한 인센티브를 도입하게 된다.
- 그 목적은 바로 “천하의 망명자亡命者를 초치招致하기”39 위해서, 유망하던 인호人戶를 안치하여 백성이 적극적으로 생산에 종사해서 왕국경제를 발전시키게 하였다.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나라에 동銅과 소금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은 부세가 없었다. 군졸을 대신하면 그때마다 시세에 맞는 품삯을 주었다.
어떤 인센티브냐, 조세감면, 병역을 서면 "임금(!)" 지급! 오왕으로부터 회남의 여왕, 교서의 우왕까지 세제혜택과 이주장려책들이 다발적으로 도입되고, 자체적인 관영 수공업의 잉여가치가 이와 같은 인센티브 정책을 지탱하는 재정적 기반이 된다.
그때 중앙정부 소속 군현郡縣의 성년남자는 변경이나 수도에서 둔수屯戌해야 했고, 그리고 왕국 소속의 사람은 단지 해당 왕국 범위 내에서 역役에 종사하였고, 어떤 제후왕은 또한 역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노임(工錢)을 지급하였고, “군졸로 대신하면 시세에 맞는 품삯을 주었다.”47
앗 중앙정부에서 둔수하면 쌩으로 병역을 치러야하는데 제후왕 영지에서 둔수하면 시세에 맞는 임금을 준다? 개꿀따리... 이와 같은 정책에 의한 인구의 이동은 수치적으로 증명된다.
"전한 전기 연 평균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12%였으나,49 당시 수많은 후국의 호구 증가율은 모두 이 숫자를 초과하였고, 어떤 곳은 심지어 20% 이상에 달하였으며, 그들은 호구를 비교적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였음을 설명한다."
이 부분을 보며 개혁개방 초기 덩샤오핑과 지방정부에 의한 자발적 분권화와 그에 의한 경제 성장이 떠오른다. 집권화는 필연적으로 수확체감에 다다르고, 과도한 집권화는 이후의 분권화와 그에 따른 자발성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지방 제후국 각각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제나라 정부는 자유방임정책을 실행하였고 지역에 적합한 제도로 해당 지역에서 생산을 발전시켰다. 이외에도 전문적인 소금과 철의 생산을 운영하는 기구를 설치해서 풍부한 자연자원을 이용하여 개발하였다."
"오왕 역시 동산銅山[동광]이 있어 주전하였으므로 오전吳錢은 약간 무거웠으나, <동전 위> 문자와 겉모양은 한전漢錢과 다르지 않았다.”56 오국은 곧 지방의 우세함을 충분히 이용하여 부강해졌다. 조趙나라 지역은 철광鐵鑛이 많았으므로, “조국趙國은 제련 및 주조를 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제나라 임치臨淄는 10만 호이며 시조市租는 1천 금金이고 백성은 부유하여 장안長安보다 크다.”60 제나라의 도성 임치臨淄가 한초漢初 70여 년간 이미 인구 10만 호의 대도시(大城市)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제후국들에 대흔 자율성의 부여는 지역 특성에 맞는 산업의 개발과 인구에 대한 인센티브 정책을 통한 재빠른 생산의 재배치, 그리고 생산의 새로운 결합으로 이어지며 제후국 경제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영토에 대한 확장과 개간이 이루어지며 무위의 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주의 대두가 일어나고, 지방의 분열이 나타난다.
한 초기의 상업억압역시 시대가 지나며 완화되기 시작한다. 왜 염철을 전매하였는가, 염과 철은 생필품이라 항상 광범위한 시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진말한초의 격변기 기존의 염철 관리 체계는 붕괴하고 그 틈을 타고 민영 염상과 야철업이 흥성한다. 한 초기 이들은 관영경제에 편입되며, 면허세인 고조를 납부하는 것으로 공식적인 인준을 받았다.
- 당시 한漢 정권이 상품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영업세를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조의 액수는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관자管子 「유관편幼官編」에는 “시부市賦는 2/100세이고 관부關賦는 1/100세이다”고 하였다.
영업을 하면 영업세를 내지요? 왜 영업세가 2/100세인가, 평균이익률이 20%였음. 평균이익률의 1/10을 영업세로 걷었다. 관세는 거용관 옥문관 등 주요 물류유통의 거점을 중심으로 원거리 교역에 대해 매겨졌다.
- 상업 활동의 종사가 농업‧공업보다 훨씬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가 떠들썩하니 모두 이익을 좇아 왔고, 천하가 왁자지껄하니 모두 이익을 위해 갔으며”,88 더 많은 사람에게 농업을 포기하고 상업을 경영하게 하였다.
진대의 교통망 발달 역시 상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도로와 운하로 연결된 전국은 각자의 물산을 개발하고 유통하며 상업이 흥성하였고, 제후국에서도 이루어진 화폐의 주조는 금속의 가치에 비례하게 이루어져 유동성의 공급을 통해 시장거래의 매개가 된다.
- 당연히 전한 전기 상품경제 발전에 대해 과대평가할 수 없는데, 당시 소수의 대염철상 이외에는 여전히 비교적 소규모 생산과 판매를 결합한 원거리 판매형 상업이었다. 게다가 상업자본, 고리대자본, 토지자본은 함께 결합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상품경제는 여전히 봉건경제를 구성하는 일부였다.
낮은 세금이 자영농 경제 육성의 요건이긴 하다. 다만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되어있고, 거대한 시장이 존재하며, 그 시장을 통해 물자가 자유롭게 교환된다는 전제조건에서. 전한 초 농업이 발전하면서 목축업 역시 상보적으로 발전하고 우경과 마경의 증가는 다시 농업생산력을 올린다. 잉여상품은 원거리교역망에서 교환되며 초기적인 시장경제를 구축하고 각 지역의 산물이 이 유통망을 타고 올라가며 제후국에서 생산된 화폐와 정부에서 주조된 화폐가 유동성을 공긎하며 교환을 활성화한다. 그러나 대상부고의 등장과 이들의 지주로의 전환은 토지의 겸병을 강화한다. 농업을 중시하고 말업을 억제하는 조세제도의 전개, 낮은 전세와 높은 구세, 더하여 상업에 대해 적용되는 상세와 재산세는 인센티브 체계를 강화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시장의 구축과 유동성의 공급이 상업의 수익률을 높이고, 증가하는 인구압은 무산자 계급의 출현과 도시 상업의 활성화로 파급되며 곡물의 수요공급이 균형에 다다르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화폐를 국가가 조절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곡가를 직접 매입매출로 조절한다. 앗 국가가 곡물로 쌀선물을 한다!
- 그러나 당시 정부는 화폐주조권을 독점하지 못하여 국가가 장악하는 대량화폐를 운용할 수 없었고, 직접 시장의 양식매매에 참여하여 식량가격의 경輕‧중重을 조정하였다. 그래서 국가는 단지 왕권의 힘을 빌려서 양식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 문제가 추진한 곡물을 귀하게 만드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양식 가격을 끌어올렸다.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는 문제 연간 “충실해져 부유해지니 은택이 여서黎庶[백성]에게 더해졌고, 곡식은 1석石에 수십 전錢에 이르니 상‧하가 풍요롭고 넉넉해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곡가를 몇전으로 조절했냐, 1석 기준 수십전 수준으로 맞춰준다. 이정도가 전한 초 자영농 기준으로 평균이윤율을 추종할 수 있는 목표가격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하였길래 이와 같은 정책의 도입이 필요했는가. 10여전이었다. 그렇다면 곡가 유지의 타겟 프라이스 범주는 어떻게 되었나, 고대 내내, 30~80전이 적정 수준으로 여겨졌다.
- 마침내 전한 전기 “평균이윤平均利潤”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화식열전」에는 당시 일정량의 경영자금은 곧 일정 수량의 합리적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서민庶民인 농農, 공工, 상고商賈는 평균이 또한 1년에 1만 <전>은 이자가 2천 <전>이고, 백만 <전>이 있는 집안은 <이자가> 20만 <전>이다”고 하였다.
사마천이 참 대단한 사람이다. 농, 공, 상고의 평균이윤률을 추산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그 자산기준을 1만전과 100만전으로 잡는다. 전한 초 평균이윤율이 20%라니 현대적 신용체계가 없는 상황에서 이는 연간 기준으로 해석해야겠지만, 석고와 이윤율이 있다면 이에 따라 자산가격 역시 대략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한대의 호적제도는 진대의 제도를 준용하며, 마찬가지로 호구의 이동에 대해 강력하게 제한하였다. 인구에 따라 구세가 부여되고 이것이 주요 세원인 만큼 호구의 통제는 국가 세입에 필요불가결한 절차였고, 승인된 명적에서의 이탈은 처벌받았다. 이들의 호적은 평호제민적에 올라갔고, 그 재산의 차이에 따라 상호, 중호, 하호로 나뉘었는데 백만전을 기준으로 상호, 십만전을 기준으로 중호, 하호의 가계자산은 수만전 이하로 기록되었다. 상호가 되면 사소한 문제가 있는데 종종 황제가 까라면 까야한다. 말인즉슨 천사를 당한다.
- 다만 전한 시기 호등戶等은 또한 당대唐代의 기록처럼 호적 장부에 남아있지 않다. 그때 상호는 대가大家로 칭했고, 가계家計자산은 약 수십만 전 이상이었다. 지방 호강의 경제실력이 악성으로 팽창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상호上戶 대가大家는 종종 천사遷徙를 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무제는 가산이 3백만전 이상인 호를 무릉으로 천사했고, 선제는 1백만전 이상인 호를 평릉, 두릉으로 천사했다. 성제는 5백만전 이상이면 창릉으로 천사시킨다. 이거 뭐 순장보내는 것도 아니고...
- 초원왕전楚元王傳 등에 따르면, 한 고조 유방劉邦은 처음 봉기했을 때 부모‧형제‧자질子姪을 헤아려 약 32명이었으나, 전한 말기 230년간 종실 호구는 10여만 명으로 증가하여 인구 증가률은 최대 42%에 달하였다. 이는 분명히 그들이 향유했던 각종 특권의 결과였다.
유씨네 가족이 번창하는구나. 종실이 갖고있던 특권은 평균 인구성장률 12%에 비해 종실의 수를 번창케 한다. 왕망이 가지를 쳤어도 종실 인구가 크게 줄지는 않았고, 이는 결국 후한 대에도 문제가 된다.
전조는 원래도 소출 대비 1/15로 매우 낮은 편이었으나, 문제 2년과 12년 절반으로 경감되어 일시적으로 1/30으로 떨어지고 경제 원년 1/30으로 고정되어 전한 내내 이 세율을 유지한다. 실질적으로는 비율에 비례한 세액이라기보다는 토지의 풍흉 정도에 따라 상중하의 등급으로 나누어 매겨지는 정액세였다. 이는 1무당 대략 3-4승으로 나타난다. 400경에 전조가 1천석이니 역으로 이야기해보면 1경당 소출은 약 75석인 것이다. 이는 원제 연간의 일이다.
추고에서 고稿는 볏짚(禾杆)이고 추芻는 목초牧草이다. 즉 목축업에 매겨지는 전조이다. 이는 추와 고의 석고로, 전추와 전고, 호추로 나뉘는데 실질적으로 여물 공출 할당량이다. 실제 기록을 보면 여물을 실물로 내는 경우와 금납하는 경우가 있는데, 금납의 경우를 보면 전조에 비해 그 비용은 50:1로 나타난다.
가세는 백성에게 빌려준 공전에 대한 임대료로, 징수처에 따라 대사농관할의 고액가세와 소부 관할의 저액가세로 나뉜다. 전한 초에는 황무지를 직접 개간하게 했지 임차를 주지는 않았는데 무제 시기 재정적자가 두드러지며 고민령으로 뚝딱 압수한 토지에 백성을 둔전 등으로 사민하며 가세를 징수하여 재정적자를 해갈하고자 한다. 대사농이 관할하는 전지는 대개 압수로 인해 소출이 높은 땅이었고, 이것이 고액의 가세로 이어진다. 반대로 소부의 임차농지는 원유•원지의 땅이라 저액 가세를 통해 사민의 목적을 살려야만 했다. 변방의 생산량이 1무당 1 대석(1대석=0.6소석)이라고 할 때 가세는 2두 4승으로 약 24~34%였다.
저액가세는 유민과 빈민 대상으로 전조와 유사한 양의 가세를 수취하였다. 말인즉슨 유랑걸식하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사회복지 정책이었다. 정책상으로는 토지를 단기임대하는 것이었지만, 회수했다는 기록이 없어 실질적으로는 자영농을 육성하는 정책으로 기능했다. 앗 유랑민이라면 기본 토지를 지급하고 도구와 종자곡도 준다고? 이거 기본자산 아니냐... 임차전지 가세 문제가 구장산술에도 나오는데 나온 예시를 보면 이 가세 조차도 연차별로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대 인두세는 구전으로, 대략 인당 연간 120전에 달했다. 한대 인두세는 산부로 바뀌었으며, 무위의 치에 따라 전한 초기에는 63전이었다가 문제 연간 부세는 40전으로 삭감된다. 이후 무제 대 120전으로 성승하고 이후 일시적 삭감은 있었으나 이 금액으로 고정된다. 왜 인두세가 산부로 바뀌었느냐, 구부는 아동에게 걷었다. 무제 대에는 3-14세, 이후로는 7-14세 아동을 기준으로 인당 23전의 구부를 걷는다. 7세면 아동노동력으로 일에 종사할 수 있는 나이라 7세로 기준이 고정된 듯. 3세는 말 그대로 살아있으면 걷었다는 뜻이고... 산부는 군비에 소용되고 구부는 내탕금으로 쓰인다. 와 아동 인두세 걷어서 황제 내탕금한다고... 한 황실 미친놈들인가... 심지어 이 산부와 구부의 액수는 중앙에 올라가는 액수고, 지방관들의 행정비용 역시 이 세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러번 큰 액수를 뜯었다.
- 백성에게 수취하는 부세의 실제수량에 관해서는 각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참작하여 정하였고, 일반적으로 중앙에 납부하는 부세 액수의 몇 배倍를 초과하였다. 한대漢代 백성의 조세 부담은 몹시 무거웠으며, 단지 인두세의 징수만으로도 사람들이 춥지 않은데도 떨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재산세로 자부가 있다.
- 한대漢代에는 인두세 이외에 재산세, 곧 자부貲賦도 징수하였다.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편호민(編民)의 가산家産은 반드시 자산을 헤아려서 등록해야 하며, 자산을 헤아리는 범위는 전지田地, 주택, 수레, 말, 소, 노비 등 모든 재산을 포함한다.
그 세율은 1.2%로부터 6%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나 보통 1.2-3% 내외였다.
그리고 역이 있다. 병역과 요역 양 역의 골간은 진대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구체적인 실현양태에 있어서는 차이가 났다. 우선 지역 중심으로 배치되어 역 수행간 이동거리가 짧아졌고, 변경 수자리에 대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요역의 금납화를 제도로 허했고, 진대 요역의 남용을 거울로 삼아 역을 철저히 제도화하여 그 자의성을 낮췄다.
- 어떤 사람은 변방 수자리를 3일 동안 하는데,274 3백 전을 대신 내는 것이 너무 비싸다고 여겼으나, 기실 변방을 지키는 것은 다소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길에서 오고 가는 비용이 추가되었으므로, 백성은 오히려 이처럼 3백 전을 내기를 바랐다. “경부更賦”는 병역을 치르는 정졸의 대역전이다.
앗 변방 수자리 대립시키는 가격이 300전 싸다 싸 곡으로는 10석정도. 정졸 중 병역을 수행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경우 경부를 내고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왕조 개창기 전한은 무위의 치를 통해 세제를 합리화하고 농업을 육성시키며 상업을 억제했고, 물려받은 유산들, 인프라로부터 제도, 그리고 군국제를 통한 분권화를 통해 빠른 경제회복과 제 방면의 육성,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이는 호구조사에서 상민들의 자산규모로, 곡가의 안정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제적 번영은 제후왕들의 자율성 증가로, 부상대고에 의한 토지의 집중으로 나타나니, 이어서 한무제의 시대가 온다.
4장. 전한 중기 사회경제의 번영과 변혁
- 그들 두 사람은 “문제‧경제의 치세(文景之治)”의 번영기가 지속되면서 무위정책의 비호하에 나날이 불어난 불안정 요소가 바로 통일제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통찰하였다. 자유롭게 범람하던 좋지 않은 영향을 제때에 극복하고 봉건경제가 중앙집권적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유리하도록, 가의와 조조는 사회현실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일련의 경제이론과 경제정책을 제안하였다. 그들의 경제사상은 전한 왕조의 경제정책이 무위無爲에서 유위有爲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문경지치는 번영을 낳았지만 사회적 혼란요소를 낳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제후왕의 자율성이 증가했고 부상대고에 의한 경제적 격차가 증가했으며 북부로는 흉노가 국가를 엄습하고 있었다. 무제는 흉노로부터 고조선, 남월을 정복하여 변방을 안정시키고, 각력한 통제경제를 구축하여 전체 경제에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한다. 제후왕의 권한을 회수하고, 국가의 직할령을 늘린다.
문제 시기롭 터 변방정책은 시작된다. 진의 천사정책이 백성 아무데나 던져놓으면 알아서 살겠지에 가까웠다면, 조조가 기안한 변방 사민정책은 변방의 지리환경에 맞춘 신도시 건설계획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고 천사를 안 시킨 건 아니지만, 인센티브와 지속가능한 식민을 위한 정책적 고려 하에 정착지는 배치된다.
- 사기 「화식열전」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전한 전기 농업생산이 최대로 발달한 지역은 관중關中, 촉한蜀漢, 삼하三河, 제노齊魯 등지였고, 이곳들은 모두 동서로 폭이 좁고 긴 지대였다. 관중에 인접한 촉한 지역 외에는 대체로 황하와 그 중요 지류를 따라서 형성된 농경지대였다.
화식열전을 한번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을 듯. 당대 통일 중국의 주요 거점은 관중, 촉한, 삼하, 제노 등지로 강 유역을 따라 좁고 길게 거주지가 형성되어있었다. 말인 즉슨 중원이 한족의 강역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통치가 미치는 곳은 점과 선을 중심으로 한 인구밀집지역에 가까웠다. 문경지치는 생활의 번영으로 나타났고, 이는 핵심 지역 내의 인구압 증가로 사이클의 분기점에 다다른다. 인구압을 변방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통치의 불안정은 점증하게 된다.
- 화폐를 주조하여 얻는 이익이 막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농업에 힘쓰지 않고, 동을 채굴하여 화폐를 주조하는 데 종사하고자 하였으며, 이렇게 화폐를 주조하는 상공업 거부巨富도 기회를 틈타 대규모 사회노동력을 끌어들여서, 사람들에게 “농기구를 버리고 불을 지펴 제련하게 하니, 간사한 동전은 나날이 늘어났으나 오곡五穀은 늘어나지 않았다.”2
화폐의 개별 주조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업의 팽창은 추가적인 유동성 수요로 이어졌고 지속적으로 인구를 빨아들였다. 이윽고 그것이 농업 생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확인되며, 농업을 육성하고 상업을 억압하는 정책의 강도를 무위의 치로부터 유위의 차로 전환할 시대적 필요가 나타난다. 화폐의 독점은 어떻게 이루는가. 원자재를 통제하면 된다. 7대 원광에 대한 통제를 통해 통화의 유통량을 조절하고자 한다.
- 문제가 조조의 간언을 좇아서 매작령賣爵令을 정비한 후에, 비록 상인들에게서 대규모로 재화를 끌어내어 국가와 농민 모두에게 이롭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상인은 이 때문에 작위를 얻어서 자신의 사회지위를 크게 제고하였다. 따라서 상인이 관직을 얻을 수 없다는 금지령은 취소되었고, 중대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화폐 명목주의적 관점에서 통화량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통해 거시경제를 관리하고, 화폐와 함께 곡물가에 대한 통제를 통해 농엊에 대한 인센티브를 조절한다. 이 과정에서 부상대고는 관직에 진입하며 면모를 일신한다.
- 당시 흉노匈奴귀족‧제후왕‧부상대고는 약정을 맺지는 않았으나 동일하게 서로 연계해 나갔다. 한서漢書 「회남왕전淮南王傳」에는 여왕厲王 유장劉長은 일찍이 “민월閩越과 흉노가 병사를 일으키도록 모의하였고”,27 부상대고도 자주 “제후와 교통하였으며”,28 삼자가 봉건통일제국을 와해시키는 연합전선을 조성하였다.
봉건시대 창조적 파괴란 무슨 뜻이냐 북막에 가서 거래하고 제로부터 사천까지 누비고다니며 연결을 만든가는 뜻이다. 거래의 수행은 곧 정치적 연결이고 중앙으로 집중되지 않는 다원적 연결은 정치적 불안정이기도 하다. 민월부터 흉노까지 이어지는 거래의 망은 소통의 채널이다.
- 조조는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은 「삭번책削藩策」을 올려서 직접 현실을 지적하였다. “지금 <봉지封地를> 삭감하면 또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봉지를> 깍지 않아도 또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봉지를> 삭감하면 그 반란은 빨리 일어나지만 화禍는 적을 것이고, <봉지를> 삭감하지 않으면 그 반란은 지연되지만 화는 클 것입니다”고 하였다.
모든 집권화에는 다 이유가 있다. 과연 통일과 일률적 중앙화는 왜 필요한가. 난세보다는 폭군이 낫기 때문이다. 제후왕들의 자치권은 제약되고 중앙의 관리가 지방에 촘촘히 스민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원경제 구조가 지리경제학적 여건을 무시하고 일원화되고, 이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경제적 구조를 해체하며 쇠퇴로 이어진다. 막북에서 목축하지 말고 농사지으라고 하면 그게 잘도 되겠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법가를 표방하고 가외는 유가를 표방하나, 전통 중국 사회의 대원칙인 표리로는 유가 내실로는 법가를 구축하며 이후로도 꾸준히 계승된다.
화폐의 주조를 일관하는 것이 전한 초의 딜레마였다. 무제의 시기에 이르러 수백만을 사적 주조로 처벌하고, 동관산을 통제하에 넣으며 주조를 일원화한다.
동시에 중앙에서 관장하는 상림원上林苑의 수형도위水衡都尉 아래에 삼관三官(종관鍾官, 기교技巧, 변동辨銅)을 설치하여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하고 법정화폐로 만들어 전국에 유통시켰다. 오수전은 또한 삼관전三官錢이라 칭했고, 그 화폐 가치는 중량과 일치했으며, “무게는 그 <동전 위의> 문자와 같았고”, 게다가 양식 규정에 따라서 정교하게 제작되어, 몰래 주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한시기 국가의 거시경제정책 개입은 화폐, 염철, 곡가를 전국적으로 조정하며 이루어진다. 결국 농업경제에서 요는 새로운 생산의 결합을 어떻게 이루는가이다. 답은 천사고 변경 개척이며 새로운 토지의 확보를 통한 기득권층의 환류이다. 무제를 폭군이라 하지만, 동시에 변경을 개척하여 새로운 생산의 결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과연 농업제국은 지속적인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무제 시기 재정적자를 쌓으며 확장된 제국은 이후 같은 확장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는 수확체증에서 수확체감으로 정환하며 한계에 다다른다. 외부를 개척하건, 내부를 개발하건 어떤 식으로든 전지를 늘려 새로운 생산의 결합을 촉진하는 것 만이 전근대 경제에서 성장의 필수조건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부상대고를 그냥 수탈하면 된다. 그것도 한다.
- 무제는 두주杜周에게 고민 안건을 처리하도록 명했으나, 대체로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가가 몰수한 재산은 억億을 헤아렸는데, 노비의 수는 천만, 전지田地의 경우 대읍은 수백 경頃, 소읍은 대략 백여 경, 주택은 천만 칸이었다. 상고商賈 중등 이상 가정은 대다수 이 때문에 파산하였다. 고민령은 부상대고에 대한 경제수탈이 매우 혹독했음을 알 수 있다.
관에 의한 권력과 금력의 재분배는 사적 재산권을 침탈하며 경제적 활력을 떨어트리지만, 동시에 생산수단인 토지와 노동(노예)의 재분배를 통해 생산구조를 국가중심으로 재편한다. 이때 몰수되는 토지는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좋은 토지로, 이에 대한 고율의 가세를 매기고 자영농을 육성시키며 최종적으로 토지를 불하하는 형태로 분배된다. 유민을 정착시키고 민력을 육성하기위해 경제의 순환을 부수고 다량의 유민을 발생시킨다는 점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 한 무제는 즉시 관영염철방안을 비준하였다. 공근과 동곽함양을 전국 각지의 염철 생산지에 파견하여, 염철을 관리해본 경험이 있는 부상富商을 가려 뽑아서 염관 혹은 철관으로 충당하였고, 전국을 통일적으로 염철을 오로지 관리하는 기구를 건립하였다.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다. 염철을 전매하고 부상대고를 탄압한다면 부상대고가 아니라 관리가 되면 된다. 이는 이후 양조의 국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부상대고의 관료편입을 허용하고, 관에 협조적인 상고들을 통해 국영기업을 경영한다. 어 이거 국진민퇴네.
- 균수‧평준 정책의 시행은 군국에서 공물 수송 시 발생하는 번거로움과 운반비용이 때로는 화물 본래의 가격을 초과하는 나쁜 현상을 제거하였다. 게다가 물가를 조절하고 시장을 통제하는 데 유리하여, 부상대고의 불법 활동을 타도하였다. 국가 재정수입을 증가시켰는데, “백성에게 부세를 더하지 않고도 천하의 재용이 풍부해졌다.”
생산을 통제하고 화폐를 통제하고 아예 나라에서 나서서 물자를 통제한다. 그 과정에서 상고들은 관료가 되고 자율적인 상업보다는 국가가 통할하는 계획경제 내에서 부를 증식시키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말하자면 권력과 금력이 최초로 결합하여 국가 기구 내에서 유통과 물가관리를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지대수익을 찾아먹는다. 이후로도 이 체제는 오래도록 지속된다. 중국 경제의 집권화는 곧 염철의 전매요, 관곡의 수입방출이며, 조폐 권한의 집중이다. 이는 금력과 권력의 결합이며, 관을 통한 관치경제의 구축이고, 그 과정에서 자발성의 관에 대한 동화이기도 하다.
이걸 그럼 누가 하냐, 일차적으로 승상이 재정을 관할한다. 승상 휘하의 직속 어사대부와 부승상이 세목을 정비하고 감찰을 수행한다. 승상과 승상 아래의 어사부 밑으로, 대사농과 소부, 수형도위가 권한을 나눠 갖는다. 대사농은 전조로부터 추고, 산부 등 주요 세목을 관장하고, 염, 철, 주류의 전매를 책임지며, 균수, 평균으로 거시재정정책을 관리하고 관리의 녹봉과 물자의 조운 역시 담당한다. 대사농은 65개 군국에 속리를 두어 개별 지역의 경제 또한 관리 아래 둔다.
대내가 국가 일반 경영을 관장한다면 소부는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며 가세, 상행위에 대한 영업세, 아동에게 걷는 구부의 수취권한으로 황실에 소용되는 물품에 대한 수공업에서부터 피복으로 무기, 황실 자산까지 다방면을 관장하였다. 수형도위는 원래 소부의 화폐제조기능을 독립시키며 이를 전담케하고 추가적으로 소부의 일을 관할을 나누어 분담시킨다. 이들 재정기구의 총 소용은 한서 왕가전의 한 대목을 통해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 한서 「왕가전王嘉傳」에는 한 무제 시기 “도내의 동전은(곧 대사농이 관장하는 동전) 40만만[억] <전>이고, 수형도위의 동전은 25만만[억] <전>이고, 소부의 동전은 18만만[억] <전>이다”고 하였다.98 전한 중‧후기 중앙의 3대 재정기구 수입의 대략적인 정황情況을 알 수 있다.
제후왕들음 전한 초 폭넓은 재정권한으로 지역의 공업과 농업을 진흥시키며 상업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한다. 이에 경제는 칠국의 난을 평정한 후 제후왕의 권한을 축소하고, 영지의 신민에 대한 관할을 조정하며, 제후국의 승상의 격을 상으로 낮춘다. 무제는 이에 더하여 경제적 실권을 약화시키고 화폐주조와 염, 철, 동에 대한 국가의 직접 관리를 통해 통제력을 강화한다.
무제 시기의 집권화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지만 고민령으로부터 대외원정, 세제의 개편, 경제에 대한 직접 개입은 부작용을 낳았고, 이에 따라 유랑걸식하는 유민의 수가 관동에서 200만에 달하고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이후 소제의 즉위와 함께 곽광은 어사대부 상홍양의 염철 전매에 대한 공론을 모으고자 현량문학과 함께 염철회의를 소집하고 이후의 경제정책을 노정한다. 상홍양은 경중론으로, 국가의 거시경제 지표에 대한 직접 개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변방을 안정화시키고 경제를 건실하게 운용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 상홍양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였고, 아울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염철관 등 정책은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를 공고히 하는 데 중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상홍양은 흉노가 끊임없이 변경 지역을 침입하여 혼란을 일으키니, 한왕조는 변방의 경비가 크게 증가하였으므로, 비로소 “염철을 일으키고 주류를 전매하며 균수를 설치하여, 재화를 불려서 변방의 경비에 보충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21
이에 현량문학은 반박한다.
- 그들은 국영 철업鐵業의 수많은 병폐를 지적하였는데, 예컨대 “졸도卒徒는 번거로워서 힘써서 만들어도 다하지 못하였고”,124 관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노예와 범죄자의 노동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소극적이고 태만하게 작업하였고, 생산한 철기는 “매우 좋지 않았고 비용도 줄지 않았다.”1
사람을 묶어놓고 위계적 구조에서 강제노동을 시키면 일의 효율이 나올수가 없다. 이는 한나라 때부터 입증된다.
- 요컨대, 염철회의 논쟁은 실제로 소제 시기를 중심에 놓고 한 무제 만년 “백성과 함께 쉬는” 경제정책을 계속해서 철저히 관철시켜 나가야 하는지 여부였다. (...) 염철회의 이후, 비록 염철관영과 평준‧균수법이 모두 폐지되지 않았더라도, 그 발전된 규모는 일정 정도 제한하였다.
그리고 이를 요약한 것이 염철론이며, 관자와 황로학이 이 책에서 설명된다.
무제 이후 소제와 선제 시기 경제는 다시 회복국면에 들어간다. 염철론으로 대표되는 국가주도적 경중론이 수그러들고, 전한의 무위의 치로 어느정도 복구한다. 이미 대상부고를 고민령으로 정리하며 자영농 기반을 확보한 상황에서, 이는 농업생산의 발전을 촉진한다. 그러나 이미 국가의 손에 들어간 토지와 생산력을 해방하지는 않는다. 관영 농업과 수공업 역시 동시적으로 발전한다. 무제시기와 반대로, 선제 연간에 가장 많은 순리가 등용되었다고 <한서>는 전한다. 태평성대의 증거는 무엇이냐, 낮은 곡가다.
- 요컨대, 소제‧선제가 백성과 함께 쉬어서 생산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사회경제 발전이 고도로 촉진되었다. 선제 연간에는 여러 해 계속해서 풍년이 들면서 1석당 곡가가 단 5전錢이었고, 먼 변방인 금성金城‧황중湟中 지역도 1석당 8전에 불과하였다. 더불어 수공업과 상업도 발전하였다
그래도 10전 이하는 너무 낮지 않나...? 전한시기 철기의 발달과 보편적 보급은 이를 가능케했다. 신강 감숙으로부터 운남 귀주까지 한의 강역에서 철제 보습은 공통적으로 출토된다. 우경 역시 보편적으로 보급되고, 쟁기 겸 파종기인 누리가 발명된다. 누리는 도랑을 열고 씨를 뿌리고 이를 덮는 과정을 자동화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조과가 개발한 대전법 역시 매 해 고랑과 이랑을 바꾸어가며 모의 뿌리를 돋우고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당대 기준으로 1무당 1곡에서 2곡 정도의 증산효과가 있었다. 무제 시기 관중의 낙수 부근에 건설된 용수거는 관개를 위한 지하수로로, 당대의 수리시설에 대한 투자를 보여준다. 무제 시기 일어난 관개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결국 이후 시기의 생산력 증대로 돌아온다.
- 이것을 통하여 보면, 한초 평균 1무畝당 1석石 반—속粟 140시근市斤[1시근=500g]—에서, 전한 말기 평균 1무당 생산은 2~3석—속粟 200~250시근— 정도까지 향상되었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전한 말기 민호는 12,233,062호戶, 인구는 59,594,978명, 이미 개간된 토지는 8,270,536경이었다. 이러한 숫자는 대체로 전한의 농업생산 발전의 규모를 반영하였다.
한대 수공업은 관영, 민영, 가정부업으로 나뉘었다. 염철의 전매를 비롯한 양조의 독점, 동에 대한 통제를 통한 화폐 제조 권한의 통핮 이와에도 소부는 관영 제조업을 관장하며 양잠으로부터 무기, 생활용품까지 공노비로부터 요역을 통해 노동력을 충당하여 생산한다. 진대의 생산이력추적제도는 한대에도 유용하게 소용된다. 이는 고도의 계획경제를 비중있게 실행하였으나, 동시에 민간의 수요 창출에 쓰여야 할 예산이 관의 구조 속에 고이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전한 전기 민영수공업은 흥성하였으나 무제의 고민령 이후 대거 관으로 귀속되고 이후로도 규모의 경제 면에서 관에 뒤지며 관 또는 호족 중신으로 예속성을 갖는다. 산업 자본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그 운명이 국가의 흥성에 달리게 된다. 가내 수공업 역시 조세의 금납화에 따라 농업과의 결합 속에서 발전한다.
철의 보편사용은 야철업 기술의 발달 속에서 가능했다. 대형 야철장 발굴 기록에서 그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탄의 사용역시 두드러진다.
- 정주고영진 유적지의 연철로煉鐵爐는 그 형태는 타원형이었고, 고풍鼓風 설비는 양호했으며, 용광로(高爐)가 하루에 생산하는 생철의 양은 1ton(吨)으로 추정된다. 연철煉鐵유적지의 연료는 목재 이외에, 또한 원탄原煤과 탄병煤餠의 흔적이 있는데, 전한 시기 이미 야철에 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음을 나타낸다.
방직업역시 시장의 흥성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생산량이 증대되고 기술이 정교해진다.
- 직기는 지속적인 개선을 통해서, 한 선제 시기에 이르러 민간 사직업가絲織業家인 진보광의 처가 일종의 고급 제화기提花機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제화기는 120번을 밟아서, 각양각색의 꽃무늬 능백綾帛을 직조할 수 있었고, “60일에 1필匹을 완성하였으며, 1필은 바로 1만 전에 해당하였다.”
전한 초에는 시장경제가 발달하며 도시가 성장하고 상업이 흥성했다. 그러나 무제시기의 국진민퇴 이후로 전반적인 생산은 회복되었으나, 상업은 봉건전제구조와 결핮하여 그 자율성을 상실하고 관의 그늘 아래에서 몸을 불려나간다. 관은 원자재의 산지에 대한 통제를 통해 수공업 공급망을 관리하고, 이로써 시장에 대한 통제를 달성한다.
- 이때 민간 상업은 생존공간이 대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첫째, 관영 상업은 민간의 광대한 토대를 강점하였다. 둘째, 관영 수공업의 확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층 황실과 귀족의 풍부한 시장을 상실하였다. 셋째, 국가는 끊임없이 귤관橘官‧수관羞官‧포수관圃羞官‧칠관漆官 등을 설립하여 원료 산지 및 상품이 생산되는 곳을 제어하였다.
- 여기서 언급한 상고의 시장영업세는 또한 바로 시조이다. 상업이윤에 따라서 1/10세를 징수하였다. 당시 상업이윤은 얼마였을까?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상고는 1백만 전의 자금을 투입하여, 20만 <전>의 이익을 남긴다고 지적하였다. 만약 “2/10가 안 된다면 나의 재산이 아니다”고 하였다.
반복해서 나오는 부분이지만, 평균이윤율 20%로 시조는 그 1/10인 2%가 된다. 그 세부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기술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기초자료를 활용한 통계적 분석이 있다. 세입세출을 쥐고 흔들어서 맞출수도 있으나, 그것도 예측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화식열전이나 경중론에서 보이는 경제분석의 수준은 그 기초가 되는 양적 분석의 기초가 낮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생산력의 흥성은 도로를 타고 이루어지고, 진대에 성립된 도로의 제도는 한대에도 유지보수되고 확장되며 상업의 번영으로 나타난다. 이는 변경으로, 반도를 넘어 왜로 연결되며 남양으로도 뻗어나간다. 남양과의 교류는 유물로도 이른 시기부터 증거된다.
- 두 번째는 서문徐聞(현재 광동廣東 서문徐聞)‧합포合浦(현재 광서廣西 합포合浦)에서 배를 타고 5개월간 남쪽으로 가면 도원국都元國(말레이반도)에 도달할 수 있고, 또한 계속해서 4개월간 항해하면 읍로몰국邑盧沒國(미얀마 연안)에 이르며, 다시 20여 일을 항해하면 담리국湛離國(미얀마 연안)에 이르고, 그런 후에 10여 일을 도보로 가면 부감도로국夫甘都盧國(미얀마 파간성[蒲甘城] 부근)에 이르며, 다시 2개월을 배를 타고 항해하면 최종 황지국黃支國(인도 건지보라建志補羅)에 도달한다.
경제의 발전과 그에 따른 정책수요의 필요는 경제 분석에 대한 이론으로 구체화된다. 사마천으로부터 상홍양, 동중서가 국가 개입의 정도를 놓고 각각 '선인론', '경중론', '염철론'을 통해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한다.
- <화식열전>에는 “선함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 다음이 이익으로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이 가르치는 것이고, 그 다음이 가지런하게 하는 것이며, 가장 하수가 함께 다투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른바 “선함으로 이끈다”는 곧 가장 좋은 경제정책은 민간생산과 무역 활동의 자연발전에 순응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전한 전기 “무위이치無爲而治”, “백성의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되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충분히 확인된다.
사마천은 오늘날의 구분으로 보면 자유시장경제 지지쪽에 가깝다. 인간은 본시 이익을 쫓고, 이익을 쫓는 과정에서 물적 토대의 개선이 일어난다. 따라서 무위의 치를 통해 경제발전의 자발성을 살리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이익으로 돌아온다.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직업이 저마다 치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농을 본업으로 놓고 상을 말업으로 놓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법적인 수단을 반대하고,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화식열전>을 통해 이들에 대한 존중을 드러낸다.
- 사마천은 또한 매우 상인을 존중하여, 선진先秦—한초漢初 일련의 부상富商을 전문으로 하여 「<화식貨殖>열전」을 썼는데, 그들의 사적事迹과 치부경험을 기술하였고, 개인을 중점에 둔 “치생학治生學”을 만들어냈으며, 중국 고대 미시경제를 관리하는 사상의 걸출한 대표가 되었다.
상홍양 역시 상업과 공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민경제 창달을 위한 과정에서 국가의 개입을 강조한다. 주요 상품에 대한 국가의 조절을 통해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국부의 증대로 이어짐을 그는 염철회의에서 재차 피력한다.
- 상홍양은 봉건국가의 재정 당권파가 되어서, 국가에서 “천연의 재화를 규제하고, 관시關市를 금하며”, 산해山海의 이익을 독점하고, 화폐주조를 독점하며, 직접 상공업 활동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것으로 사회경제생활에서 경중의 형세를 지배할 수 있으니, “천하에서 낮은 것을 우리는 높이 여기고, 천하에서 가벼운 것을 우리는 무겁게 여긴다”고 하였다.
요는 화폐로부터 곡물, 염과 철 등 주요 재화에 대한 국가의 조절능력이요, 이에 대한 관의 개입이며, 제조업 내 통제가능한 생산구조를 통한 계획경제의 실현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자발성을 억압한 결과로 생산성의 감소가 나타난다. 적절한 인센티브 시스템이 없는 관치경제는 곧 예속경제이고, 지대추구로 이어진다.
- 요컨대, 경중론은 한 무제 시기 상홍양이 충실하게 구현하고 확대함에 따라서, 이미 경중지세輕重之勢, 경중지학輕重之學, 경중지술輕重之術을 포함하여 봉건국가의 거시적인 경제관리체계를 확충하였다. 그것은 동방의 법가인 관자管子의 사상이 중심이 되었고, 여러 학파의 사상이 융합된 결정체였다.
그리고 동중서가 있다. 동중서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바탕으로 덕으로 문화적 선호를 권면하여 생산물의 적절한 배분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선인론과 경중론의 유교적 결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속에서 생산관계에 대한 고민은 탈각된다. 또한, 그의 후학들은 상업과 공업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을 탈각하고 탈속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이는 이후 수구적인 태도로, 지대이익에 대한 암묵적 옹호로 나타났다.
- 동중서의 경제사상은 유가를 위주로 하되 황로사상이나 법가 등의 학설을 융합하여 국가와 국민 간 경제관계 문제를 어떻게 협력하여 조절할지 탐구하는 데 힘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국가가 전면적으로 경제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데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무위방임 경제정책에도 반대하였다. 국가 전체와 원대한 이익에서 출발해서, 사회경제활동에 대해 “이익으로 이끌고”, “가르치며”, “가지런하게 하여”, 국가와 각계각층 사이에 사회재부를 파악해서 비례대로 배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동중서가 경제 문제에서 구현한 전체 관념은 균형원리에서 민본사상까지 신유가경제이론의 광채로 반짝였다.
- <염철론>은 현량문학의 의義를 숭상하고 이利를 폄하하며 본업에 나아가고 말업에서 물러나며 안빈낙도에 찬성하는 사상이 글에 넘쳐나고, 여러 사적이 유가류儒家類에 편입되었다. 이는 한 원제 시기 유학의 수구 관념을 충분히 반영하였다.
전한시기만 해도 사상 자체는 개방적으로 뻗어나간다. 그러나 토지의 겸병이 심화되고 경제가 지주전장경제로 쏠리며 국가적 기초가 닦이고 지식경제시장에 대한 일원화가 진행된다. 지주전장경제에서 상업과 수공업은 본업인 농업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며 그 발전이 정체되고, 단위경제주체인 장원을 중심으로 경제적 분절이 일어나며 거시경제는 교란된다.
5장. 전한 말기 사회경제 위기와 왕망의 경제제도 개혁실패
무제의 고민령과 상업억압 이후에도 토지의 겸병은 줄어들지 않는다. 외정과 생산의 재배치가 어느정도 자영농 지율을 회복했으나, 토지에 과세하지 않고 인신에 과세하는 대원칙 하에서 생산의 주요 요소인 토지에 대한 독점은 호상대가들이 관료로 진입하며 권력과 금력의 결합에 의해 강화된다. 점증하는 인구압은 이를 심화시키고, 예속의 비율이 높아지고 재정악화가 가속되며 왕조의 경제는 말기로 접어든다.
- 그때 사회인구의 신속한 증가는 또한 토지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하였다. 관련 자료의 추산에 따르면, 한초 인구는 약 1천4백만 명이었고, 무제 초기에는 3천4백만 명 전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인구의 증가에 따라서, 토지의 수요도 자연히 증가하였다.
1천 4백만의 호구가 무제 초기에는 3천 4백만으로, 이윽고 선제 후기 4천만 이상이 되며 한정된 경지에 인구압이 폭증한다. 지속적인 확장과 사민이 농업중심의 제국에서는 유일한 성장의 원천이었고, 확장으로 인한 재정적자가 제국을 기술한계에 따른 성장한계에 이르게 한다. 한계에 다다른 제국 내 인구압의 점증은 농경 특유의 변동성으로 인한 유민의 증가로 나타나고, 이는 토지 겸병의 심화로, 예속경제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 원제 이후 토지겸병이 더욱 심각해졌다. 성제는 민간에 대규모 사전私田을 설치하고, 중국역사상 첫 번째로 공전公田 이외에 사전을 설치한 황제였다. 승상 장우張禹는 “정국거鄭國渠‧백거白渠의 4백여 경頃을 점유하였고 타인의 겸병도 이와 비슷하였기에 사람들은 더욱 곤란해졌다.”
그 과정에서 제실 역시 공익보다 사익을 탐하며 제국의 황제가 아닌.으뜸 대지주로 변모해간다. 폭증하는 공노비와 사노비, 토지의 겸병 문제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필요로 했고, 전한 말기 개인 소유 택지에 한도를 두고 거느릴 수 있는 노비의 구수에 제한을 두며 유예기간을 주어 이를 처분하도록 한다.
- “제왕諸王‧열후列侯는 봉국 내에서 명전名田을 얻고, 열후는 장안에 있고, 공주는 현도에 명전이 있으며, 관내후關內侯‧관리‧백성의 명전은 모두 30경頃을 초과할 수 없다. 제후왕諸侯王의 노비는 200명, 열후‧공주는 100명, 관내후‧이민은 30명이다. 기한 3년이 지나도 어기면 관官에서 몰수한다.
문제는 이를 집행해야 할 관료들이 곧 대지주이며 호상대가라는 점이다. 유예기간은 이들에게 서류를 정리하여 자기 소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산을 재정비할 기회를 주었고, 율령의 집행이 피로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산의 재분배는 일어나지 않는다. 전지제한은 오히려 상호간 권력에 의한 토지쟁탈로 이어지며 사회적 혼란상은 심화되고, 왕망이 인망을 얻고 왕조를 전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도개혁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 열망을 잗아 출발한 신은 복고적인 개혁과 갈피를 못잡는 조치들로 이미 허약해져있던 경제구조에 타격을 가하고, 이는 인구증가율의 감소와 재정의 곤란으로 나타난다. 전한 전기 12%에 이르렀던 인구증가율은 7%로 낮아지고, 세금은 올라가고 병역은 길어지며 유망이 늘어나고 기근과 전염병이 엄습한다.
무제 시기의 개발이 환경적 재앙으로 나타나 수재와 황재가 빈번하고, 감소한 재정여력은 적절한 대응을 불가하게 하며 인재를 낳는다. 황하가 범람하고, 이재민이 유망의 대열에 합류하며 절망이 퍼져나간다. 각지에서 거병이 일어나고 농민봉기가 빈발한다. 이민족들 역시 왕망의 대결적 정책에 반발하며 북방전선에서 흉노가 거병한다. 적미, 녹림의 난은 이 난세에 마무리를 지으며 거세게 타오르고, 나뉜 천하는 다시 합쳐지기를 갈망한다.
6장. 후한 전기 사회경제의 조정과 회복
건무 2년에도 이러한 혼란상은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흉노의 침입, 제 지역세력의 할거, 기근과 전염병, 시장의 붕괴가 대륙을 옥죄어갔고, 질서의 수립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 사료에 따르면, 적미봉기군의 기본대오는 “용인傭人[임노동자]”으로 조직되었다. 용인은 일반적으로 고용노동자를 가리키며, 또한 예속민 계층이다. 그들은 주인과 견고하지 않은 예속관계를 맺었다. 녹림綠林봉기군에는 “용인” 이외에, 또한 일부 호강지주가 거느리는 종족빈객宗族賓客, 부곡가병部曲家兵이 봉기에 참여하였다
적미군이나 녹림이나, 단순한 반도는 아니었다. 호강지주의 예속민과 용인들이 주류를 이루며, 빈객과 가병들이 참여한다. 각자 근거지에 성채를 이루고 자급자족적 경제구조를 갖춘 전장경제가 분권화의 시기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혼란으로 인한 유망의 증가는 이처럼 지역 차원에서 안보를 제공하고 자급자족적인 경제활동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호강대가들의 세력을 불려주는 기회가 된다.
- 당시 각지의 전화戰火가 발생하여 사회가 동요되고 불안하였다. 수많은 호강대가는 자신의 경제실력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잇달아 영참營壍‧오벽塢壁을 만들어 스스로 보호하였고, “귀부할 곳을 기다리던”8 예속농민을 공개적으로 불러 모았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보편적이었고, 그중 남양南陽‧삼보三輔‧하북河北 지역에서 비교적 두드러졌다.
-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당시 만일 지주전장에서 오벽으로 조직된 방식이 없었다면, 백성의 사망은 훨씬 많았을 것이고, 국민경제의 파괴는 더욱 잔혹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봉건경제 규율의 자발적 조절, 대지주 전장경제의 형성, 봉건예속관계의 신속한 발전은 후한 초기 사회경제가 회복되어 한 가닥 삶의 희망을 가져왔다.
그것이 반드시 착취와 수탈이었느냐, 국가의 공백속에 나타난 필연적 선택이었느냐. 호강대가들의 전장경제는 난세를 살아가던 유망민들에게 피치못할 선택이었으며, 동시에 국민경제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질서를 담보할 수 없는 혼란의 시기에, 전장경제는 최소한의 삶의 터전이 되어준다. 전한 말 5천만에 달하던 인구는 후한 시기 1천 2백만으로 줄어든다. 광무제는 비록 질서를 이루었으나, 그가 지주세력과 타협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미 훼손된 국가재정이 있었다. 난세가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해도, 3천8백만이 다 죽지는 않았다. 호구에 잡힐 수 없는, 예속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때 예속의 비율은 19~50%로 추정한다.
- 황보밀皇甫謐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광무중흥光武中興에 이르러, 백성이 헛되이 소모되어 2/10만 보존했다”고 하였다. 만약 전한 평제平帝 시기 호구 수로 추산하면, 후한 정권이 장악한 인구는 단지 1천2백만 명 전후였다. 당연히 이때 또한 수많은 인구가 외부로 유망하였고, 역시 일부 인구는 사노비로 전락하였으며, 더욱 많은 인구가 호강대가에 예속되었다.
결정적으로 유수 역시 호강대가 출신이었다. 그와 함께한 창업공신들 역시 남양, 영천, 하북 등지의 호강지주들로, 곡식을 심고 매매하고 땅을 불려나가며 세력을 키워왔다. 그는 전한 초의 옛 제도를 복원하며 질서를 세울 것으로 기대되었고, 그 열망에 부응하며 낮은 세율과 무위의 치로 경제를 조율한다. 요역 역시 경감되어 정졸병역, 기존의 군국에서의 1년, 경사에서의 1년은 대역전으로 대체되었다. 승상이 사도가 되고, 어사대부는 사공이 된다.
산택과 피지는 소부에서 대사농으로 관할이 이관되고, 염철의 전매는 중앙에서 관장하는 것에서 각 군의 담당으로 내려간다. 균수관을 폐지하며 시장에 대한 개입 역시 줄여나간다. 전국을 13주로 나누고 경사에 대해서는 사예교위를, 나머지 12주에 대해서는 자사를 임명한다. 염철의 제도 변화에서도 드러나지만, 이는 결국 지방 분권화로, 중앙집권체계의 와해로 나타난다.
호강대가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각지에서 영보를 쌓아 할거하던 이들을 국가의 틀 내로 포섭해야만 질서가 선다. 광무제는 이들을 정벌하기를 명하면서도, 토지의 환수와 도륙보다는 평정과 안정을 주문한다. 이는 빠른 진압과 안정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고, 짜른 시일내에 전토를 통할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여전히 근본 모순, 토지의 독점과 백성의 예속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광무제는 이후 건무 15년 토지와 호구의 조사를 통해 통치를 기층까지 내리고자 하지만, 지역에서 호강지주는 관료가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을 갖추고있었고, 관 역시 그들의 편에서 역으로 토지조사를 핑계로 토지를 수탈하며 이익을 취한다. 이와 같은 무장반항과 농단에 대해 알자를 파견하여 실상을 파악하고, 대사도 구양흠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한다. 이후 하남윤 장급과 군수 10여명도 엄벌에 처하고, 이에 따른 호강대성의 무장반항도 강력히 진압한다.
- 이후 토지조사는 성실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호강지주의 이익에 저촉되었기 때문에 호강대성의 무장반항을 야기하였다. 후한서 「광무제기」에는 “군국의 대성병장大姓兵長과 군도群盜가 곳곳에서 모두 봉기하였고, 소재지를 공격해서 약탈하였으며 장리長吏를 살해하였으며, 군현郡縣에서 추격해서 토벌하여 해산시켰으나, 도망쳐서 다시 결집하여 청靑‧서徐‧유幽‧기冀의 4주州가 아주 심했다”고 하였다.
이... 청주 서주 유주 기주 이곳들이 반란향이야... 비록 반란은 진압하였지만 토지조사와 호구조사는 지속적으로 난항에 부딪히고, 호강지주의 세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토지의 겸병과 봉건예속제도는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그 속에서 재정의 압박은 긴축재정을 통한 재정수지 개선을 위한 노력으로 발현된다.
- 광무제는 노비 석방과 동시에 노비의 대우를 개선하는 조서를 내려서, 노비의 신분 지위를 향상시켰다. 노비의 사회적 지위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민에 근접하였고, 노비를 살해하면 서민을 살해한 것과 같은 죄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불로 고문을 받아서 상처 입은 노비는 방면시켜 서민이 되도록 선포하였고, 게다가 서민에게 엄격했던 “화살로 사람을 상해하면 사형에 처하는 율”68을 폐지하였다.
아니 그럼 화살 쏴서 사람 좀 죽여도 된다는 뜻인가? 이게 노비 제도랑 같이 나온 이유가 있을텐데 알 수가 없다... 혹형에 대한 방면은 수도에 대한 사면에서도 나타난다. 지속적인 안보불안 속에서 수형자인 수도의 수는 늘어났고, 이들에 대한 사면은 나름의 자영농 육성 정책이었다.
- 광무제의 내군內郡둔전은 건무 5년(기원후 29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후한 정권의 관동關東 통일전쟁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얻었고, 아울러 계속해서 항복한 병사 수십만 명을 거두어서 재편하였다. 유수는 이러한 유리한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일부 군대에 명하여 둔전으로 곡식을 비축하게 하니, 군량을 스스로 해결하는 데 편리하였다.
둔전 역시 전장경제라는 틀 내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요는 토지 소유권의 문제이고, 둔전은 왕토이면서 자영농의 육성수단이다. 토지겸병의 심화 속에 자영농을 육성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에 의한 소유권의 귀속, 그리고 농업을 통한 생계수단의 제공이었다. 요역이 감소하고 전반적인 재정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는 예속이지만 동시에 재정을 확립하고 소민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후 삼국시대의 둔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 광무제를 계승한 여러 황제는 모두 변지邊地에 둔전을 하였다. 명제明帝 시기 하서河西 지역 둔전 이외에, 또한 서역西域의 이오로伊吾盧에 의화도위宜禾都尉를 두어 둔전을 하였고, 무기교위戊己校尉가 차사<국>車師<國> 전왕정前王庭<의 유중성柳中城>과 후왕부後王部의 금만성金滿城에서 둔전을 하였으며, 더욱이 누란<국>樓蘭<國> 지역 둔전의 성과는 탁월하였다.
둔전은 또한 변방 개척의 수단이기도 했다. 전한 시기 천사가 변경에 수행했던 식민의 역할을 후한에서는 둔전이 수행한다. 둔전은 동시에 이민족에 대한 포섭의 수단이기도 했다. 항복한 강족과 민호를 대상으로도 변둔, 즉 변장 둔전이 시행된다. 이는 조위의 민둔으로 이어진다. 예속이 강화되고 토지의 겸병이 심화됨에도 생산력은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이 후한이 광무제로부터 장제까지 짦은 시기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 후한 시기 농업생산은 전한에 비해 발전하였다.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사용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황하黃河‧장강長江 양대 유역에서 출토된 후한 철제농기구의 수량은 전한을 훨씬 초과하였다. 게다가 길림吉林, 내몽고內蒙古, 감숙甘肅, 신강新疆, 영하寧夏, 운남雲南, 귀주貴州, 광동廣東, 광서廣西 등 변원邊遠 지역은 모두 적지 않은 철제농기구가 출토되었다.
우경이 확산되고, 녹비가 개발되고, 이모작이 시작되며 윤직과 간작등이 시행된다. 국가가 다시 섰으니 치수 역시 시작된다. 황하에 대한 관개가 진행되고, 구거를 복원하며 경지가 지역별로 몇만경씩 개간된다. 강남에 대한 개발 역시 진행된다. 전한 말의 토지겸병과 혼란상은 전통적인 인구밀집지였던 관중과 황하 유역의 난맥상으로 나타났고, 이는 강남으로의 인구밀집을 촉진한다.
- 그러므로 후한 후기에 이르러 남방의 넓은 지역이 개발될 수 있었고, 개간된 전지와 인구의 숫자가 신속하게 증가하였다. 한서 「지리지」와 <사마표의> 속한서 「군국지郡國志」에 따르면, 양주揚州 인구는 321만에서 434만까지 증가하였고, 형주荊州는 374만에서 627만까지 증가하였으며, 익주益州는 455만에서 724만까지 증가하였다.
그리고 관우가 형주를 잃었다. 영릉, 장사, 계양, 예장군의 인구증가율은 동기간 각각 721%, 449%, 321%, 474% 증가한다. 서북의 삼보, 익주, 양주는 인구가 698만에서 160만으로 줄어든다. 중국사의 무게중심이 관중과 화북으로부터 강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장경제와 예속이 심해지는 곳으로부터 출발한 사람들은 변경으로 탈출한다. 이런 점이 중국이라는 땅이 가지고있던 저력이 아니었을까. 난세는 험난하고 수탈은 가혹하지만, 동시에 도망칠 변경 역시 광대했다. 후한 당시 1무당 생산량은 3곡斛이었다. 곡이 뭔가 했네 석이잖아. 1무는 대략 1마지기다. 말이 안되는데... 2모작 연간 생산량인가. 벼로 1석인지?
- <제왕세기>에서 개간한 전지의 최대 숫자가 실린 해는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기원후 105년) <전지> 732,017,080무畝에 달하였고 인구 53,256,229명에 달하였다.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에서 호구가 최대의 숫자인 해는 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기원후 157년) <호구> 10,677,960호, <인구> 56,486,856명이었다.
후한대 수공업 생산은 관영 수공업이 퇴조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며 제작기술과 양 면에서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 야철업에서는 탈탄작업이 정례화되어 강철의 생산이 활발했고 백련강이 출현한다. 비단의 생산이 보편화되고, 촉금은 서역까지 판매되며 높은 인기를 누린다. 전한 시대 마지가 발명되었으나, 환관 채륜이 채후지를 발명하며 제지술을 통해 문명에 기여한다. 무위의 치 속에서 상업 역시 발달을 거듭한다.
전한 시기 민간 산업은 단일산업에 의지허여 성과를 내었으나, 무제의 염철관영으로 부상대고와 관료, 사민이 하나되는 과정 속에서 분업은 해체되고 겸업이 일반화된다. 상업을 하려고해도, 산업을 일으키려 해도 관은 무조건 끼고 가야만 하는 풍조가 생겼고, 지주, 상인, 산업가가 겸업을 통해 다양한 산업을 운용하는 특징이 생긴다. 전장경제가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화폐경제는 교란되고, 조세의 금납화는 쇠퇴하며 물납화가 이루어진다. 화폐경제의 수축은 유통량의 감소로 드러난다.
- 예컨대 양효왕梁孝王이 죽었을 때, 사부私府에 남은 황금은 40여 만 근이었다. 왕망이 패퇴했을 때 성중省中[금중禁中, 궁중宮中] 황금은 1만근을 1궤로 담았는데, 아직 60궤가 남아있었다. 후한 이후 황금은 오히려 훨씬 적게 사용하였다. 후한 황제가 황금으로 하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영제가 교지자사交趾刺史 주준朱俊에게 황금 50근을 하사한 경우가 가장 많은 양이었다.
- 상품경제의 생산은 사회경제 발전과 사회분업의 필연적인 결과였고, 당시 “겸업”은 오히려 사회의 진전된 분업을 봉합해버렸고, 경제의 자급자족 정도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주전장地主田庄 경제는 바로 농상공을 “겸업兼業”하는 사회의 실체였다.
7장. 후한 후기 사회경제의 분화와 붕괴
토지겸병의 증가와 호강지주 전장의 확장은 국가의 재정수입을 감축시키고 겸업의 증가를 통해 시장을 교란하며 상업의 축소와 화폐 유동성의 감쇄를 불러온다. 전장지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관이 그 존재를 묵인해주고 적극적으로 지주의 편에 서야만 성립가능하다. 따라서 지주들은 관직에 진출해야만 자신의 재산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은결이 증가하고 예속민이 늘아나며 국가권력은 약해지고 약해진 권력이 호강대가를 살찌우는 원동력이 되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농촌의 혈연관계 역시 강화되며 종족 단위의 집성촌이 생기고 국가권력의 침투에 저항한다.
전장경제는 자급자족경제이다. 곡물로부터 채소, 임업, 목업 모두를 포괄하며 자체적인 작업장에서 술, 장담그기, 직조, 설탕제조, 기물제작, 병기제작가지 장원에서 일어난다. 말인즉슨 겸업이 전반적인 물적 생산의 품질을 떨어트리고, 자급자족 경제를 완성하며 교역량이 감소하고 전문화된 기업의 발현을 저해한다. 봉건적 자율성의 증가는 자체 방어시설 축조와 사병 모집으로 극에 달한다.
- 이러한 겸업‧자급의 호족경제체계 및 종족 생산조직은 더욱이 오벽塢壁과 영보營堡를 건설하였고, 부곡가병部曲家兵을 통솔하여 전장경제의 체계적 생산을 호위하였다. 모두 봉건정권의 반동경제정책 영향하에서 형성된 변태적인 경제구조였으며, 이러한 경제구조는 일종의 뚜렷한 복고퇴화復古退化의 경향을 나타냈다.
씨족단위로 뭉치고 호강대가 아래 결집하고 전장경제라는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구현하고 사병을 축적하고 요새를 건설하여 자체적인 안보를 구축하고 치수로부터 인프라 정비도 셀프로 하고... 이거 완전 봉건시대네. 유통은 박살나고 시장은 붕괴하고 전장경제 간 자체적인 시장을 구축한다. 전체 시장의 규모는 줄어들지만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큰 이문을 획득한다. 유비를 밀어주었던 미축이 무엇으로 돈을 벌었냐. 그 자신도 호강대가였지만 이런 호강대가간을 중개하는 상인이었다.
- 당시 호강지주는 또한 전장의 생산 활동에 비교적 관심이 있었다. 어떤 호강지주는 “대대로 농사를 잘 지어서 재산을 불렸고”, “산업을 경영하여 물품에 버리는 게 없을 정도로”23 생산관리에 솜씨가 좋았다. 전장의 지조地租는 여전히 50% 혹은 40~60%였으므로, 농가생산의 성패는 직접 지주의 수입에 영향을 미쳤다.
이 병작반수가 전통의 수취율임. 왜 병작반수냐, 소작료를 내고도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하고, 소작료 세금 퍼가도 먹고는 살 수 있을만큼 남아야한다. 그 수취의 비율이 절반이다. 세금을 덜 걷는다고 농민에게 남는 것이 아니다. 봉건사회에서 세금을 덜 걷는다는 건 그만큼 지주의 몫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조선이 세금 덜 걷는다고 민생이 남아나더냐? 토지를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농업사회에서 국가의 부재는 지주의 지배로 이어진다.
- 후한 시기 경제상황의 발전에 따라서, 호강지주 전장의 경제실력은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호강지주 전장은 얼마나 있었을까? 중장통仲長統의 추정에 따르면 후한 말기 “1백 부夫를 지닌 호족은 주州에서 천을 헤아린다”고 했으니,26 호강지주 전장은 매우 보편적이었던 듯하다.
통계에 따르면, 송대 객호는 전국 인구의 35%를 차지하였고, 지주는 전국 인구의 15%를 차지하였으므로,27 후한 지주전장의 총인구는 최대 전국 인구의 50%였다. 또한 후한 호강지주 전장은 대부분 국가호적에서 도피한 은폐隱蔽호구였기 때문에, 전한 평제平帝 시기 전국호구 숫자와 후한 환제桓帝 시기 호구 숫자에 근거하여, 당시 대체로 은폐된 호구를 추산해보면 전국 호구의 약 19%를 차지하였다.
- 가문을 일으켜 재산이 3억 7천만 <전>에 이르렀다”30고 하였다. 그리고 전한 말기 부호의 재산은 최대가 단지 1억 <전>이었다. 후한 시기 재부의 집중 정도를 알 수 있다. 호강지주는 대부분의 재산을 사치성 소비에 사용하였고, 혹은 후장厚葬하여 분묘墳墓에 들여보냈다.
전국에 걸쳐 호강지주는 몇이나 있었을까. 주마다 평균 천정도 있었다고 하면 백부 이상을 거느린 호강지주는 만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인구대비 평균 예속비율은 19%에서 50%로 추산된다. 서진 시기 인구와 대별하여보면 50%에 가까운 예속비율이 조금 더 신빙성있다. 이천만에서 삼천만정도 되는 인구가 일만에서 이만정도의 호강대가에 예속되었으니 평균 3천인이 호강대가 1호의 영향권내에 있는 인구의 수가 아닐까. 이들의 자산규모는 전한 시대에 비해 크게 증가한다. 전한시기 최대 1억전으로 드러났던 개별 부호의 재산은 후한 말에 이르러 3억전 정도로 나타난다. 재산의 집중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하호의 평균 재산이 수만전이었음을 고려하면, 예속인의 비율로 추정해봤을 때 평균 지산은 수천만전 이상이 아니었을까?
- <제왕세기>에 따르면, 한漢 장제章帝 장화章和 2년(기원후 88년) 장적의 호구는 43,356,367명에 달했는데, 이러한 숫자는 대체로 전한 선제宣帝 시기 호구 숫자에 근접하였다. 그것은 한왕조漢王朝 경제제도가 용납 가능한 가장 좋은 수치였음을 사람들에게 암시한다.
멜서스 트랩이 있다면 당대의 생산기술로 지탱가능한 적정 인구수도 있다. 전한으로부터 후한, 서진에 이르기까지 적정인구수를 초과하면 물가가 오르고 유민이 증가한다. 이 시기 그 수는 4천만이다.
- 일설에 따르면 “조정이 텅 비었으며”,34 경매에 부친 양기의 가산은 도합 30억여 <전>이었고, 국가의 1년간 재정수입에 상당하였다.
사람들은 출사를 사양하고 재정난은 악화되고 환관과 외척이 번갈아 전횡한다. 당연히 나라에 도둑놈이 들끓고 서로서로 고발하고 죽여가며 재산을 축적한다. 축재규모가 30억전으로 연간 재정에 필적한다. 이미 후한은 통치불능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황제들은 한술 더 뜬다. 영제가 참 훌륭한 황제다 백성들 밑바닥까지 직접 긁어먹고.
- 비록 노동자는 통치집단의 잔혹한 약탈하에서 일찍이 “하내인河內人은 부인이 남편을 잡아먹고 하남인河南人은 남편이 부인을 잡아먹는” 비참한 상황이 나타났으나, 영제는 마침내 환제의 뒤를 이어서 “천하의 토지에 1무당 10전을 과세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관료기구는 이미 백성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취렴기구로 완전히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재정은 악화되고 유망이 증가하고 이는 다시 재정의 악화로 이어진다. 세율은 높아지고 소수민족에 대한 수탈이 시작되며 강족의 반란이 70년동안 세번 연이어 일어난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만 320억전이 소용되었다. 토지겸병세력의 자발적인 성장에 따라 명전제도가 와해되고 호적제도가, 부세제도가 뒤를 따른다. 관료기구는 공석이 늘어가고 남은 이들은 탐학에 눈이멀어 수십억전을 곳간에 고인다. 유망이 증가하고 빈민들은 호강대가에 예속되어 삶을 영위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개와 재해예방이 잘 될 수가 없다. 화제 영원 원년(기원후 89년)으로 영제 중평 6년(기원후 189년) 100년동안 75년의 수재 한재 풍박 황명의 재해가 일어난다. 전한의 원칙, 토지는 두고 사람에게 과세하는 제도가 토지겸병을 촉진하고, 그 집중을 해소할 수 있는 갈피는 잡지 못하며 모순은 적층되고 국가는 붕괴한다.
그러나 과연 어떠한 대안이 가능했을까. 무제시기 이후 전문화와 분업은 해체되고 관과 상의 상통은 강화되며 겸업을 통한 독점은 증가한다. 토지의 사유제가 문제냐 하면 결국은 정전을 하더라도 그 실행을 담보할 응집력의 문제가 있다. 관료가 다 대토지귀족인데 결국 제도의 틀 내에서 대책을 세우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토지독점의 해체는 전근대 봉건사회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았고, 망해야만 다시 선다.
황건적의 봉기는 붕괴하는 후한에 울리는 조종이었다. 유주, 익주, 예주, 병주의 흑산 황건으로부터 청주, 서주, 그리고 익주와 여남, 양주까지 황전적의 난은 20년간 지속되며 백만에 이르는 이들이 봉기에 가담한다. 동탁이 장안을 낙양을 불사르고 수백만이 유리걸식한다. 곡식은 1곡(석)에 십만전, 오십만전을 호가하고 사람들은 안정을 찾아 천하를 떠돈다. 유우가 유주목에 임명되자 청주 서주로부터 안정을 찾아 이주한 이들이 백만명이었다는 기록에서 당대의 혼란상을 알 수 있다.
- 이에 중원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후한 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기원후 157년) 전국 장적에 등재된 호구는 아직 56,480,000여 명이 있고, 서진西晉 태강太康 원년(기원후 280년)에 이르러, 장적에 등재된 호구는 겨우 16,160,000여 명이었다.
환제로부터 서진까지, 호구가 4천만이 증발한다. 예속된 호구가 호구조사에서 누락되었다 하더라도, 수가 주는 압도감이 있다. 누가 난세에 태어나고 싶으랴. 전한으로 후한에 이르며 일어난 문제는 결국 토지 겸병의 문제다. 증가하는 인구압에 비례해 전지는 늘지 않고, 인당 경작면적의 축소는 농업의 변동성에 따라 빈민을 양산한다. 정부의 개입, 즉 둔전을 통한 자영농의 육성이나 인당 토지보유의 제한, 결정적으로 세제의 개편, 즉 토지에 과세하지 않고 인신에 과세하는 제도의 개혁이 없이 이는 해결되기 어려웠다. 후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모순을 지적하는 소리들은 많았다. 순열과 중장통은 과도한 토지겸병이 경제의 기초체력을 갉아먹음을 역설하며, 토지보유의 제한, 관전을 통한 자영농의 육성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문장에 담긴 절절한 고통이 느껴진다. 역사의 진보는 반드시 비용을 치러야만 한다. 비용을 치르더라도, 진보가 이루어지는 편이 낫다. 어떻게 그 비용을 줄일 것인지, 이행기를 순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고민을 던져준다.
- 조위曹魏 시기 실행된 민둔民屯제도는 바로 사회현실에 근거하여 제정한 “경작하되 소유할 수 없는” 제도였고, 양진 시기 실행된 점전제占田制는 바로 사회현실에 근거하여 제정한 “사람 수대로 전지를 점유하되 한도를 세우는”88 제도였다. 한번 시행해보면 그만큼 견문을 얻는데, 중국 봉건경제의 발전은 매번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마다 모두 반드시 값비싼 학비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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