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

<다시 일어서는 코끼리, 인도 근현대사>, 바버라 맷케프, 토마스 맷캐프

stingraykite 2026. 4. 28. 18:03

 
델리 술탄국으로부터 현대까지 인도의 역사를 요즘 이론과 논의들을 소개하며 개괄적으로 정리한다. 인도는 낙후한 전근대 사회였는가? 무굴 제국은 어떤 국가였을까? 그 속에서 제반 사회는 오늘날의 인식처럼 보편적인 카스트 속에 존재했는가?
무굴제국 집권의 해체 이후, 지방정권들은 근대와의 접변에 대해 어떻게 조응했을까. 동인도회사의 지배와, 영국의 지배는 이 땅에 어떤 상흔을 남겼고, 1차대전과 2차대전, 오랜 영국의 식민지배 속에서 인도는 어떻게 세계와, 영국의 식민지들과 관계했으며, 독립 이후의 인도는 어떤 길을 밟아왔나.
 
인도는 남북으로 3200km, 동서로 3200km에 이르는 거대한 대륙이고, 산맥은 그 땅의 삶을 다양하게 나눠놓았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는 유라시아와 대륙으로 바다로 교류하며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흔적을 남겨왔다. 불교로부터 교역, 이주까지, 오늘날 세계 속에서 인도의 역할 역시 작지 않다. 과연 인도란 정말로 무엇일까.
델리 술탄국이 있었고, 무굴 제국이 있었고, 이슬람들의 지속적인 침투는 북인도를 지배해온 정치적 동학이었다. 남인도는 상대적으로 이 동학에서 자유로웠고, 구자라트와 비자야나가라는 해상을 통해 서아시아와,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연결되었다. 벵골 역시 북인도의 동학에서 한발짝 떨어진 지역이었고, 데칸 고원 또한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치체를 갖고 거동한다.
 
이슬람의 지속적인 침투 속에서, 힌두 문화는 이들과 공존하고 또 저항하며 마찰해간다. 지배민족으로써의 이슬람이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거대한 변경이 존재했던 인도에서 그 예속의 정도가 강했다거나, 적극적인 강제개종이 있었다거나 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침투왕조의 신민들이 과연 전통사회와 잘 융화되었을까. 대개의 경우는 마찰과 화합 사이에서 진동하는 법이다.
 
- 수전 베일리에 의하면, 장인 가문이나 다른 가문은, 혹은 여러 개인의 개종을 이끌어낸 두 번째 동력은 계급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아니라, 오히러 기존 사회 계급 안에서 지위 상승을 위해 전략적인 기회를 사로잡으려는 욕구였다. 통혼 또한 무슬림 인구 증가에 기여했으며, 카리스마적인 스승들을 따르려는 개인들이나 기문들의 선택 역시 무슬림 인구 증가의 원인이 되었다. 19세기 ' 최초로 국세 조사Census가 시행되었을 때, 영령인도 내 무슬림인구 는 전체 인구의 거의 1/4 정도였다.
- 32p
 
무굴 제국이 강제 개종을 위해 힌두교 사원을 불사르고 신앙을 강요한 것은 아니라 해도, 아우랑제브의 지즈야 수취를 위한 시도나 이슬람 신앙에 대한 헌신은 분명히 배타적 태도를 보여왔다. 무굴제국 성립 초기로부터 후기까지 신앙에 대한 헌신과 신앙 투사에 대한 욕구는 여러번 드러났고. 실질적으로 무력을 통한 개종이 없었던 것은 맞고, 악바르 역시 종교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악바르 이후의 황제들이 그의 유훈을 따르지는 않았다. 무굴 제국은 문화를 통한 차등 지배와 교합을 달성했고, 제국 왕실의 지배적인 문화는 이슬람에 기반한다. 조세 수취도 못해서 약탈적으로 제국을 운영해온 무굴 제국 통치력이 기층까지 투사되지 못한 것이지, 그것이 제국의 의도였다고 보기는 어렵지않을까. 여하튼 여차저차해서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제국은 통치불능의 사태에 빠지고 무굴의 관료들은 독립적인 왕국을 구축하며 아대륙은 분권화된다.
 
- 이르판 하비브는, 경작에 종사했던 소농계급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 를 팔 수 없었으나, 국가가 요구하는 세금을 지불하는 한 소농들은 세습되는 경작권을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소농들에 대한 억압이 끊이지 않았 는데, 상위 계급에 속한 이들이 경작자들로부터 모든 잉여생산물을 착취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가 흐르는 동안 이런 억압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이런 가혹한 착취 행태로 인헤 어러 반란이 일어나 무굴제국은 흔들린 끝에 몰락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하비브는 내렸다. 한편 다른 역사학자들은 경작되지 않은 토지가 광범위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착취 정도가 완화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세금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게 되면 경작자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학자들은 지적했다. 다음에 논하겠지만, 더욱이 대부분의 농촌 반란은 저민다르들이 주도한 것 으로, 소농들이 주동했던 것이 아니었다. 확장 중인 경제로부터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소농계급은, 적어도 무굴제국 시대에 한해 이들의 처지가 통치 초기에 비해 더 나빠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46p
 
과연 확장한계의 문제인가, 인구압의 문제인가. 무굴제국의 통치는 자민다르와 만샤브다르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었지만, 조세수취가 멀쩡하게 되고 재정이 정상적으로 굴러갔으면 그렇게 안망했다. 왕령지는 지속적으로 수축되고, 세수는 약탈을 통해서만 정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샤자한과 아우랑제브의 시기에 들어 약탈을 통해 취득한 세수와 지출해야 할 세수 사이에 악순환이 발생하고, 이는 군사귀족들의 복지부동과 이탈로 나타나며 무굴 제국의 지배력은 급속하게 형해화된다.
 
소농들의 상황에 대한 이르판 하비브와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양자 모두 진실을 품고있다. 땅이 넓고 인구가 희소한 사회에서 예속의 강도는 강할 수 없다. 그러나 무굴제국 통치기 팽창한 인구는 이 조건을 바꿔나갔고, 제국의 분권화는 이 상황에서 소농들에 대한 수조권의 집행주체를 국가로부터 토후로 이관시키며 토후들의 착취는 가중된다. 경작이 가능한 땅은 널려있지만, 경작의 수득률이 높은 땅은 한정되어있고, 농사에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 식민지 시대 이전의 인도는 전반적으로 정체된 상태에서 자족적인 마을들로 이루어졌 고, 또 경직된 카스트 제도가 그 안에 존재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식민지 시대 사회의 여러 특성들이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이러한 시각은 당시 힌두교인들 및 무슬림들의 여러 공동체들이 각자만의 정체성을 강하게 갖고 있었으면서 서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실상과 반대된다.
- 59p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다층적인 사회간의 연합이라는 상과 카스트로 규정되는 수직적인 사회구조라는 상은 공존할 수 있다. 그만한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는 대륙이다. 그러나 힌두 사회에 대한 이슬람의 침투라는 과정은 힌두 사회에 내재된 신분제적 요소와 이 모순의 발현이라는 기작을 탈각하고서는 이야기되기 어렵다. 이슬람이 보여주는 힌두에 대비되는 강력한 응집성은 분명 존재하고, 이는 인도 역사에서도 여러차례 증거된다. 자족적인 마을 역시도 풍흉이라는 수급변동성에서 자유롭지 않고, 마찰은 민족과 종교라는 선을 타고 흐른다. 역사적으로 제국의 번영은 인구압의 팽창으로, 그에 따른 갈등의 고조로, 분권화와 그 속에서 질서의 재정립, 그리고 마찰로 나타난다. 수평적인 사회일수록 권위는 부재하고, 마찰은 장기화된다.
 
2장. 무굴제국의 황혼: 지역 국가들의 출현과 영국 동인도회사
 
아우랑제브 사후 무굴제국은 제국이 세워졌던 때처럼 나디르 칸의 습격으로 사실상 해체되고, 자민다르로부터 토후, 제국이 임명한 주지사들에 의한 영토의 전유가 일어난다. 군사적 마찰의 점증은 이들 국가를 군사재정국가화 하고, 마이소르의 티푸로부터 벵골의 나와브들, 하이데라바드의 니자물물크등은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피상적인 무굴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자체적인 행정체계를 정비하고, 군사적 흥기를 통해 자주적인 통치를 수립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영국은 각자의 이권을 추구하며 인도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요새를 축성하고 군사를 모으고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행정구조 확립을 통해 재원을 마련한다. 화약병기의 중요성은 무굴제국의 군사적 행사에서 그 빛을 발했고, 새로 할거한 국가들 역시 유럽인 용병을 활용하기도 하고 자체적인 화기체계를 정비하며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적응한다. 근융가들 역시 이들 국가에 자금을 대며 적극적으로 역할한다. 돈을 꼭 자국 군주들에게만 빌려주란 법은 없다. 더 잘 빌리고 잘 값는 신용있는 정치체라면 누구나 대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영국 동인도회사라든가...
영국 동인도회사는 일찍부터 인도에 진출했었지만, 17세기 무굴제국의 흥기와 함께 지역에서 사업을 팽창시켜나간다. 그러나 무굴제국이 건전하던 시절 그들의 무장과 요새화는 제한되었으며, 지역 내에서 긴장의 점증은 이들의 무역활동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무굴제국의 혼미 속에서 이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이윽고 프랑스인들과의 경합, 그리고 본국에서 발생한 프랑스와의 전쟁에 따른 인도에서의 전선 형성은 이들의 군사적 모험심을 부추기는 재료가 된다.
 
프랑스인들 역시 지역 군주들과의 결합과 무역에서의 이득을 통해 이들과 경쟁하나, 무역 액수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1/4 정도의 매출이 마왔던 프랑스 동인도회사에게 이는 뻔한 귀결이었다. 벵골의 젋은 나와브 시라줏도울라는 확장하는 영국인들의 '자유'무역에 대한 남용을 빌미로 1756년 영국인들을 공격하고, 캘커타의 영국인들을 투옥하고 죽인다. 질식사였으니 고이는 아니고 다만 하루만에 죽었다는 걸로 봐서 감옥의 상태가 심히 메롱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캘커타의 지하감옥"사건이 낳은 40여명의 희생은 동인도회사에 충분한 명분을 제공해줬고, 로버트 클라이브는 1757년 2월 캘커타를 점령하고, 금융가인 저커트 세트 가문과의 연계 속에 미르 자퍼르를 군주로 세울 것을 약속하고 1757년 6월 23일 펄라시 전투의 승리를 통해 벵골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구축한다.
 
- 방글라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 영국동인도회사는 18세기 인도 정치 체제에서 성공을 거두는데 핵심이 되었던 다음과 같은 "군사재정주의" 전략들을 이용했는데. 이런 전락들로는 델리에 있는 무굴 궁정의 파디사에 대한 명목적인 존중, 이전에 현지 너와브들이 생산을 늘였던 초석 등 어러 불품에 대해 무역을 독점하는 행태 이용, 유럽인들이 인도에서 선구적으로 시도했던 훈련받은 전문 보병대 활용, 그리고 독립적인 지위로 인해 정치 체제 안에서 전례없을 정도로 중요한 위상을 지녔턴 저거트 세트 가문과 같은 강력한 신흥 은행가 및 금융가 집단과의 긴밀한 관게 구축 등이 있었다.
(...)
더욱이 산업혁명이 아직 도래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영국 경제 안에는 안전한 사유재산권으로 유지되는 역동적인 상업 정신이 가득했다. 인도에서 현지 통치자들과는 달리, 처유에는 어러 관구 수도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농촌 지대에서 영국인들은 토착 상업 계급들의 임의적인 강탈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전망을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었다.
-95p
 
벵골에서 교두보의 확보는 단순히 영국의 우월한 무력 덕분만은 아니었다. 현지 인력을 활용한 전문 보병대의 구성, 은행가 가문들과의 공조, 현지 지배계급의 포섭이 없었다면 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다른 국가가 아니라 왜 영국이 이같은 모험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 이는 해양에 대한 장악과 더불어, 영국이 이들에게 제시했던 비전에도 이유가 있다. 토착 지주들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상업과 금융이 주인되는 세상, 영국과의 공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거래, 그리고 영국 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무역, 자금의 조달은 현지의 용병들과 일부 지배계급, 상인과 금융가들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제시했다. 현지에 대한 포섭과 동맹 없이, 회사에 의한 제국주의적 확장은 가능하지 않았다.
 
3장. 동인도회사의 인도 통치
클라이브의 통치는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고삐풀린 영국인 상인들은 사실상 약탈이나 다른없는 무역을 하고다녔고, 이는 현지 경제의 급속한 몰락으로 드러나며 그의 초치와 워런 헤이스팅스의 임명으로 이어진다. 워런 헤이스팅스는 현지의 제도와 문화를 이해하고 새로운 학문을 정초했으나, 동시에 그의 지배 역시 갈등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징세관을 통한 직접적인 수취는 권력관계의 전복을 불러왔고, 현지법을 활용한 지배구조의 구축은 그 과정에서 전통법 해석을 전담한 브라만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카스트의 고착화, 확산을 낳았다. 동시에 그의 아시아학은 힌두-불교 전통의 재발견, 그간 인도를 지배했던 이슬람 통치체제의 전제성에 대한 비판과 고대 '토착' 인도 문화였던 힌두-불교에 대한 절대화로 이어진다.
 
마이소르로부터 머라타 연맹 등 인도의 토후들은 영국의 호가장에 저마다의 방싣으로 저항했지만, 영국의 지배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끝내 패배한다. 기술의 차용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자체적인 근대화 시도들이 꼭 실패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국, 즉 동인도회사의 자금조달능력과 전투지속성은 여러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동인도회사가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요는 회복탄력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동조자들에게 어떤 비전을 제시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로도 동인도회사의 총독들은 지속적으로 정복황동을 통해 인도 전토를 직접지배와 간접지배가 이루어지는 구역들로 분할한다. 영국의 군사재정주의를 감당하지 못한 토후국들은 스러지고, 영국의 보호에 들어간 토후국들 역시 직접지배로는 원하는 수익률을 보장할 수 없는 경우에는 승계를 이어나가며 정권을 존속하나 주재관의 감시 속에 주권을 제한당하고, 영국식 상속법을 준수할 수 없는 토후국은 영국(동인도회사)에 점령당한다. 그러나 회사의 지배는 또한 모순을 축적하고, 이후의 반란을 예비한다.
 
콘월리스는 소유권을 중심으로 인도의 토지제도를 개편하지만, 이는 기존의 토지제도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왔다. 영국놈들 토지 소유권을 온전히 분배하면 농촌의 농업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분배하는데, 소유권, 경작권, 수조권이 복잡하게 중첩되어있던 각 지방에서 이는 혼란으로, 생산관계의 해체로, 불만으로 나타났다. 소유권은 국가에 있고 경작권은 소농들에게 있고 수조권은 자민다르에게 있으나 국가에 대한 비용을 납부하는 조건 하에 성립되었던 기존의 관계가 소유권으로 일원화되자 자민다르의 수취는 갈피를 잃고, 소농들 역시 경작권이 토지의 사유재산화로 인해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18세기는 목축민와 유목민, 군대와 요거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이동했던 시기라는 특정을 지녔다. 이 과정은 19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는데, 왜냐하던 펜다르인과 같이 약탈을 일삼았던 집단들이 인도 내 여러 국가들 사이에 존재했던 불명학하고 순찰받지 않는 경계를 마구 넘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동인도회사의 시각에서 봤을 때, 이들의 활동은 영국인들만이 가졌던 강제적 수단에 정치적인 위험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손실도 역시 끼쳤는데, 이 유랑자들은 세금 징수 체계의 관할 대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착화" 대상은 대체로 중인도 내 부족민들이있다. 삼림 지대에 거주하면서 대치 로 수렴 채집을 하며 주기적으로 정주 농업 지역들르 침입했던 칸데쉬 지역 의 빌인과 같은 부족들은 1820년대 여러 차례에 걸진 무장 급습의 대상이 되었다.
-187p
 
그러니까 이게 참... 희한한 일이다. 19세기까지 영토 내에 수렵채집, 유목민들이 국가에 대해 유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 무굴제국 시기에도 영토는 넓고 인구는 희소했다는 점들이 남아시아의 특징을 규정한다. 대단한 인구밀도를 지닌 지역들 사이로 거대한 변경이 존재한다. 세액이 높으면 도망갈 수 있는 변경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소농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면, 점증하는 인구압은 그 삶을 깎아낸다. 인도에 대한 회사의 통치, 소유권의 확립, 체계적인 세금의 징수는 분명 혹독한 통치였으나, 동시에 국가의 수립이며 질서의 정규화이기도 했다.
 
제 4장. 대봉기, 근대국가, 식민지 속민(1848 - 1885)
 
- "절손에 따른 실권"에 대해, 이 개념은 영국인들이 만들거나 그들에게 의존하는 모든 국가 안에서 통치자가 자연상속인 없이 사망하는 것을 뜻한다고 달하우지는 밝혔다. 이를 통해 그는 후계를 이으려는 목적으로 당시 널리 퍼졌던 양자입적 풍습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 조치를 통해 달하우지는 7년 동안 북인도, 방글라, 라저스탄. 그리고 펀자브 고원 지역 내 일급 개 국가들을 차지했다. 이렇게 차지 한 나라들로는 중요한 머라타인들의 나라였던 사타라국, 나그푸르국, 그리고 잔시국이 있었는데, 이후 잔시의 여성 통치자는 곧 있을 대봉기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 149p
 
사실 주요핵심지역은 방글라, 비자야나가라, 구자라트다. 그러나 요핵지를 지키려면 주변의 정정이 안정되어야하고, 이를 안정시키려면 결국 대륙의 중력을 제어할 수 있어야하고, 안드라프라데시는 그대로 파슈툰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진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르시아로, 파슈툰으로, 북인도로 이어지는 연속체는 전체를 장악하지 않으면 하나를 지킬 수 없다.
 
그 과정중에 토후들은 "절손에 따른 실권"으로 양자상속과 여계상속을 불인정당하며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거세당하고, 장교로 승급하지 못하고 경제적 불안속에 높인 세포이들의 불만은 끓어오른다. 인도고등문관, 그리고 부대 내에서의 장교승진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이는 어느정도 인도에 파견될 수 있는 인력풀에 제한이 있던 영국(회사) 측의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고, 탄약포의 우지와 돈지를 계기로 반란이 폭발한다. 전국적인 저항은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끝장내었지만, 토후들의 협력, 펀자브 지방에서 충원된 세포이들의 협조, 내부적 분열과 비전의 부재는 봉기를 진압하는 원동력을 제공해주었다.
 
- 전반적으로 많은 지역들은 여전히 영국에 충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 대봉기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승리를 거둔 이들 중에는 최근에 정복된 펀자브 지역 출신병사들이 특허 그러했는데, 이들은 이전에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겼틴 방글라 지역 출신 시포이들에게 아무런 호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봄베이나 마드라스에 주둔했던 군대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는 남인도는 대봉기의 여파로부티 조용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가장 분명히 "충성심을 드러낸" 이들 중에는 방글라 지역 지식인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방글라 지역의 저민다르들과 마찬가지로 서유력식 교육을 밭 있으며 자신들에게 번영을 안겨다 준 지세액 영구확정령으로 인해 영국의 인도 통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58p
 
요는, 하나의 인도 정체성은 이 시기까지 돈재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점이다. 인도의 다원성은 분권적 정체성으로 나타났고, 개별 토후들의 이해관계와 지역의 억압은 전 인도의 문제로 공통의 경험으로 승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은 직접지배로 전환하며 철도를, 전신을, 우편을 구축하고, 이는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한 통치의 도구로, 경제의 기초로 작용하면서 놀랍게도 그동안 부재했던 공통의 경험을 축적하는 토대로 기능한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도민족은, 근대적 인프라 아래에서 핵심을 구축해나간다.
 
- 또한 여왕의 선언은 봉기의 원인으로 여겨진 여러 조건들을 고려한 것이었다. 달하우지의 정책을 뒤집은 여왕은 선언을 통해 토후들이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보장했다. 양자입적에 대한 제한이 사라졌고, 토후들이 가진 "여러 종류의 권리.위엄.영예" 및 영지 내 권력은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영국의 인도 통치가 끝날 때까지 인도 인민의 약 1/3이 500여명이나 되는 토후들의 "간접" 통치를 앞으로 받게 될 것을 뜻했다. 게다가 정부는 항구한 평화와 선정에 의해서만 실현 기능한 사회 진보"를 기대하는 차원에서 "공공사업을 진흥하고, 인도 내 평화로운 산업을 발전하는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 161p
 
인도의 지배는 토후와의 타협을 통해 국가의 전면 통치로 전환되며, 영국의 통치는 토후국 내 주재관을 통한 간접통치와 직할령에 대한 직접통치로 구분된다.
 
- 니중에 1903년과 1911년에 있었던 제국회동은 무굴제국의 사용 방식을 모방해 더르바르라 불렸으며, 더 "인도적인" 양식으로 간주된 방식으로 조직되었는데, 이 양식은 인도와 유럽 간의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점을 강조했다. 1877년에 리튼이 선인했던 대로, 수 차레에 걸친 이런 제국회동은 제국 안에는 무수히 많은 전통뿐만 아니라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 인종이 있고, 이들의 성격을 결정했던 여러 종교를 믿는 주민들 역시 존재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이를 통해 "봉건주의"라는 표현은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거의 완전하게 밀어냈다.
- 175p
 
영국의 인도에 대한 지배는 인도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를 기반으로 구축된다. 제국회동은 제국 내 다양한 의사를 토후와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수집하고 그 통치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후 주요 정치일정 역시 더르바르(=제국회동)을 중신으로 구성되며 이는 실체를 갖는 의사-의사결정기구로 기능한다. 주요 정책결정에서 영국인과 인도인의 비중을 어떻게 할 지, 정책적 완급조절을 어떻게 가져갈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기구로써의 더르바르는 토후들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기구이면서, 점증하는 인도 민족주의가 표출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 1877년의 제국회동은 기자의 역할을 식민지 정부가 최초로 공인했던 자리였는데, 제국회동에 기자들이 초대되면서 천국 각지에서 온 기자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 기자들 중 다수는 토착어 신문들을 발행했으며, 기자들은 당시 인도 전역에서 등장하고 있었던 영어 교육을 받은 지도층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대중에 속했다.
- 179p
 
영국과의 접촉이 이루어진지도 수세기, 회사의 지배로부터도 120년, 국가의 전면통치 이후로도 한세대가 지났다. 자생적 지식인들이 식민지 인프라에 대한 투여로 생겨난 교통 속에서 현지어 신문을 통해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제국 회동에서 운집하기 시작한다. 전통적 지배체계의 일원이기도, 아니기도 하던 이들은 각 지역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통합된 인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각각 기능한다.
 
비 브라만 바르나로 정치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영국적 교육 하에서 자라나 혼재된 시각을 갖고 제국을 바라봤다는 점에서, 그 발이 인도의 대지에 뿌리박혀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식민지배로 구축된 근대적 토대 위에서 저마다의 정치를 경주한다.
 
5장. 시민사회, 식민지로써의 제약 1885- 1919
장절구분은 주요 사건을 분기로 변화하는 식민통치의 기조와 인도의 자생적인 역량축적에 의한 분기들을 기점으로 각 기간간의 변화를 기술한다. 이미 시작된 지식인 계층의 형성, 매판자본, 민족자본의 융성, 근대적 인프라의 구축에 따른 공론장의 형성과 대중과의 상호작용은 공통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며 민족의 토대를 형성한다. 지역으로, 종교로, 삶의 방식과 전통에 따라 분화되었던 집단들이 근대적 통치가 확산되며 이름을 부여받고 공통점을 인지하며 성기게 연결된다. 점증하는 식민당국의 통치는 대립항으로써의 정체성을 이루어나간다.
 
- 부왕들은, 제국의 경제적인 이해를 수호하고, 안진한 국경을 세우며, 정치적인 책임을 제한적으로 지는 정부를 구축하는데 힘썼다. 위와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데 진력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조지 너새니얼 커즌George Nathaniel Curzon (1859~1925)은 1899년부터 1905년까지 부왕으로 재임하면서 인도인들의 분 노를 샀는데 이 때문에 그 당시까지만 헤도 아직 조용하게 있있던 인도국민회의당 Indian National Congress이 전면적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후 인도국민회의당은 인도를 독립의 길로 이끌게 되었다. 이후 십년 동안 대중들의 행동과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잇따랐는데, 그 중에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부왕으로 재일했던 민토가 속주 입법부 내 인도인들의 참여를 약간 확대했던 조치도 있있다.
-187p
 
영국의 통치는 제국의 경제적인 이해를 우선하며 이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그 과정에서 비용효율적으로 현지 자본을 이용하는 형태로 근대적 인프라를 구축한다. 통치에 대한 제한적인 책임의 원인에는 근본적인 인력의 한정이 있었다. 영국의 관료들은 인도고등문관(Indian Civil Service)로, 통치 전기간동안 1500명이 안된다. 여기에서 인도출신은 극소수였고. 인도같은 거대한 대륙에 영국의 이해를 관철하는 일은 인구의 비례에서, 필연적으로 종말을 예비하는 과정이었다. 요는 그 과정에 이르는 완급의 조절이라는 것을, 식민지 관료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인도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할 역량을 갖추면 갖출수록, 영국인들의 지대추구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군에서의 승진한계와 관료 임관의 한정으로 나타난다.
 
- 서유럽식으로 교육받은 계층은 시민 사회에서 당시 점점 더 높아져 가던 목소리를 대변했다. 공식 교육을 받은 이들은 소수에 그쳐 1921년 전 인구의 겨우 3%에 불과했으며(이 때 남녀 비율은 5:1이었다) 자원 투자는 계속 고등교육에 집중된 상태였다.
- 199p
 
인도의 보통교육은 독립 이후에도 오랜 기간 문제로 남는다. 지역접근성의 문제, 낙후의 문제도 있지만 언어적 다양성 역시 그 원인으로 지적된다. 다원적인 민족, 종교 구성 속에서 무엇이 공용어가 되어야하는가. 고등교육 중신으로 교육구조가 잡히지만, 고등교육을 이수한 이들에게 걸맞은 일자리는 항상 부족하다. 군부에서의 승진제한, 인구규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인도고등문관 TO에서의 차별은 이후로도 문제로 남는다. 상업에 대한 억압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매판자본으로 또 민족자본으로 기업들이 들어서기도 하고, 영국의 식민지전략에서 유효한 노동력으로 인도인들은 제국 체제 내에서 동남아로, 아프리카로 진출한다.
 
인도국민회의당이 1885년 창당되고, 토착어로 된 신문들이 발행되며 저마다의 민족적 정체성이 구축된다. 영자신문만 해도 300종이었으며, 토착어로 된 신문은 이보다 많았다. 영국의 전면지배는, 그 지배에 응하는 과정에서 영국화된 엘리트들에게 교통의 장을 제공했고, 근대의 이념들은 식민지사회를 재구조화하며 저마다의 갈등선을 품고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다. 인도 국민회의의 자주독립 노선은 식민지 정부당국과의 지속적인 타협과 갈등 속에서 구체화된다.
 
1881년부터 10년 주기로 시행된 국세조사는 인도의 인구통계에 대해 신뢰할만한 몇 안되는 자료이면서, 기존의 민족, 종교, 신분질서에 대한 근대적 정식화이기도 했다. 물론 아래 사례에서 보듯 신분질서는 유적이었고, 국지성 역시 존재했지만, 그것을 바꿀만한 유인 역시 전통적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펀자브 지역에 거주했던 머텀 집단은 1911년 국세조사 당시 자신들의 역사와 행동방식에 따라 상충 지위를 지닌 라즈푸트인으로 등재되고자 했다. 이 지역의 국세조사 담당 관리는 이전 정부에서 시행했던 조사에 근거 해, 이전에 이들은 수렵민인 동시에 쓰레기 더미나 뒤지는 집단이었다가 농경민으로 전향했다고 보았지만, 펀자브와 커쉬미르 지역의 라즈푸트인 대표회는 이들을 라즈푸트인으로 인정했다.
- 204p
 
라즈푸트면 낮은 바르나가 아니다. 관리가 판단한 게 맞았다. 국세조사 과정에서 수렵채집 유목민에서 라즈푸트인으로 바르나 떡상한다. 라즈푸트인 대표회는 이걸 또 인정해준다. 한국에서 씨성갈기도 이거보단 어려웠다. 카스트 체계가 식민지 체계에 편입되며 근대적 분류를 통해 보편화되고 정규화된 것은 맞지만, 과연 그렇다면 그 이전의 카스트는 정말로 유적이면서 상대적으로 억압의 강도가 자유로운 것이었을까. 이런저런 사례들 중에 하리잔의 경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바르나는 내부적인 씨족, 분업에 따른 분류이기도 하지만, 바르나의 가장 큰 갈등선은 불가촉천민과 그 외의 카스트에 있다.
 
- 국민회의당 내 많은 당원들이 소 보호 운동을 개별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집중하는 조직들을 세워야 무슬림들의 이익이 가장 잘 보호받을 수 있다고 대부분의 무슬림 지도자들이 판단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힌두 국민국가 수립운동가들에게 소 보호 운동가들의 행위는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러한 행위는 헌두교인들은 수동적이고 비활동적이라는 당시 인식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 226p
 
미얀마에서는 사원 내 경화 착화 금지(절에 신발 좀 벗고 들어가라 양놈들)로 민족감정이 촉발된다면 인도에서는 역시 소님 도살 금지로 무슬림과 힌두간에 갈등이 촉발된다. 무슬림의 정치적으로 우월적인 지위는 식민지배를 통해 희석되었고, 우르두어와 힌드어의 갈등에서 이는 증폭된다. 대체 힌두교에서 소는... 뭐냐...? 그것이 단초이지 근원적인 문제일까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있지만, 식민지배가 낳은 근대성의 이식과 그 안에서 구축된 민족감정이 동시에 갈등의 골을 깊게하기도 한다. 이후로도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은 이어진다. 이꼴 보고있으면 나같아도 무슬림 연맹 만들겠다.
 
- 방글라 지역은 효율적으로 다스리기에 너무 큰 속주로 오랫동안 여겨졌다. 그리하여 커즌은 방글라 동부 지역을 어험 지역과 통합해 당시 인구가 약 3100만 명이나 되는 새로운 속주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나머지 반쪽 방글라 서부 지역은 비하르와 오리사 지역을 통합하게 되면서 인구 약 5000만 명의 또다른 속주가 서쪽에 탄생했 다. 이렇게 재조정을 하더라도 두 속주는 당시 전세계 주요 국가들보다 인구가 여전히 더 많았다.
- 229p
 
벵골이 영국 인도지배의 시점이자 핵이다. 이게 1905년 일임. 분할해도 8천만.
벵골을 보다보면, 과연 어디에서 경계지어지는 것이 맞는지 다시 되새기게 된다. 무엇을 근거로 선은 나뉘는가. 종교 인구의 분포로? 언어의 사용으로? 민족으로? 방글라와 서벵골의 경계는 어디일까. 경계의 획정이 곧 권력이다. 그리고, 영령인도에서 그 선은 나뉘어간다.
 
그리고 1차대전으로 세계는 빨려들어간다. 인도의 제 정당은 전쟁에서 영국에 협력하며, 그 속에서 독립의 기회를 모색한다. 자결권을 향해, 국민회의외 무슬림 연맹은 전적으로 협력한다.
 
- 전쟁을 총력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도는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100만 명을 훨씬 웃도는 인도 병사들이 징집되었는데, 영령인도군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중동에서도 작전을 수행하면서 모든 전선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 전비 지출을 위해 인도르부터 나은 세입의 투입도 역시 상당하여,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매년 전비 수요가 대략 10%에서 15%까지 상승했다. 외부 시장과의 교역은 지장을 받았다. 1918년 몬순철 당시 부족한 강우량 때문에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곡물 가격이 거의 두 배로 올랐으며, 수입품들의 가격은 거의 세 배나 울랐다.
-240p
 
인도는 분명히 제국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제국은 과연 그 헌신에 보답했는가. 자치를 위한 논의도, 자립을 위한 체계의 구축도 지지부진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배신에도 불구하고, 인도인들은 점점 하나로 뭉쳐간다. 연합 제 속주 중 무슬림 비율이 낮은 속주들에 대해 무슬림 가중치를 부여하며 정치적 대표성에 대한 논의는 계속된다. 이는 방글라와 펀자브처럼 무슬림비율이 높았던 지역에서는 역으로 정치적 지배력의 한계로 작용한다. 무험마드 알리 지나 역시 이 협상의 과정에서 무슬림연맹에 가입하며, 이후 지도적인 역할로 부상한다.
 
- 1917년 8원 에드윈 먼터규는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는 목적은 "영 제국의 불가결한 부분인 인도 안에서 책임정부를 점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치 기관들을 서서히 발전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선언은 인도를 통치하는데에 옛 "더르바르"식 정치를 결정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 인도는 케니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이 백인들이 정착한 자치령Dominion들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었다.
- 249p
 
소기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역을 중심으로 자치의 범위가 확대되고, 중앙정부는 여전히 영국의 통제하에 있었으나 의견 수렴의 통로는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는 식민지배의 대표적인 관계면서, 복잡한 갈등선 위에 위치한다. 제국의 하위 파트너로써 인도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인도 내부 자체적인 갈등의 중재자로써 영국의 위치, 착취당하는 식민지로써의 인도와 영국의 지배에 협력해왔던 토후를 비롯한 지배계급들. 회사의 지배로부터 전면 통치, 더르바르로부터 자치의 허용까지, 양자의 관계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정된다. 그리고, 펀자브의 어므릿서르에서 영국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다.
 
- 펀자브 지역에 있는 어므릿서르에서 현지 주둔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장군 레지널드 다이어(1864-1927)는 1919년 4월 13일, 담으로 둘리 싸인 절리앙왈라 바그 정원 안에서, 불법이었으나 평화적인 방식으로 집회를 벌이던 군중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책임을 직접 맡았다. 그는 정원 입구에 고르카인 부대를 배치시킨 뒤 군인들이 시위대를 항해 발포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로 인해 당시 정원안에 갇혀 있었던 시위대 중 약 370명이 살해되고 천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 251p
 
명암이 교차하고 자율과 억압이 공존한다. 아므릿서르, 암리차르가 앞으로도 많이 나온다. 인도에, 힌두랑 무슬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간디가 나타난다.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으로 민족주의에 대한 비전을 갖고있던 그는, 사티아그라하를 통해 대중운동을 건설하며 종파간 갈등을 초월하는 인도민족이라는 상을 투영한다. 구자라트로부터 출발한 그의 여정은 연합제속주와 비하르등 내륙으로 확산되며 추종자를 확보한다. 모틸랄 네루와 자와허를랄 네루 역시 그에게 동조하며, 전문직, 상인공동체, 가장 중요하게도 농민들이 그의 이상에 동조한다. 민족적 소비, 전근대적 삶에 대한 이상화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분출하고, 인도 민족주의는 시민권을 획득해간다. 그러나 봉건적 이상의 환기는 그만한 부작용이 있다. 간디에 대한 신앙적 투상은 극단적 행동으로 표출된다.
 
- 연합제속주 내 고러크푸르의 농민들은, 당시 현지 경찰서 안에 있었던 22명의 인도인 경찰들을 감금 한 뒤 건물에 불을 길렀는데, 이 때문에 건물 안에 있던 경찰들은 전원 살해되었다.
- 263p
 
또한 특정 집단이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면, 지역 내 경쟁 세력들이 반대파에 합류하거나 계속 침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례로 1919년 봄베이에서 발생한 허르탈의 경우, 구즈라트인 상인 계층 출신들이 이 동맹휴업을 주도하자 머라타인 산업 노동자 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 움직임을 관찰했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머라타인들은 자신들이 머라타인이며, 그(간디)는 구즈라트인임을 잊은 적이 거의 없다. 머라타인들 사이에서 간디를 항한 인기는 기복이 심하다."
- 265p
 
인도 제 민족 간 갈등이 하루아침에 불식될 수는 없다. 종교, 민족, 지역의 갈등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선을 긋고 때로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차이가 없지 않고, 근대적 세계관은 이를 증폭한다.
 
처리 처라 사태 이후 비협조운동의 중단으로 분명해진 것치립, 독립을 위한 운동은 앞으로 해마다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1920년대와 1930년대, 그리고 1940년대까지 이어지는 국민회의당의 활동은 그 강도와 초점 측면에서 여러 차례 상승과 하강 국면을 반복했다. 여기서 세 가지 주요한 주기를 확인할 수 있다. 각 주기를 보면, 먼저 영국인들이 오판한 나머지 저지른 도발적인 행동으로 시작되었 다. 그 다음 대중들의 분노가 고조되어 간디의 주도하에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전개되는 것으로 그 절정이 드러났다.
-271p
 
대중운동은 주기를 갖는다. 구조의 억압이 상존하더라도, 분노가 응집되고 폭발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사티아그라하는 여러 차례 반복되고, 주기적 진동은 이를 통상적인 사이클로 여겨지게 하지만, 매번의 활동에서 이룬 진전은 후대로 계승되며 그 층위를 높여나간다. 거사가 한번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구조가 경험을 축적하며 진전한다면, 언젠가는 목표에 닿게 된다. 간디가 품었던 뜻이 당대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는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루었다.
 
- 일레로 지나는 입법부 의석의 1/3이 무슬림들 전용으로 할당되고 나머지 권력은 속주로 이양된다는 확답을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분리 유권자단 설정 요구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후자의 목표는 무슬림들이 인구 다수를 차 지하는 속주들에서 무슬림들이 상대적으로 자치를 누리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나, 이는 인도 전역에 걸쳐 각종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간절히 원했던 네루 등의 생각과 필연적으로 반대될 수밖에 없었다.
- 279p
 
네루는 비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비전을 이행할 실력이 있었는가 하면 의문을 갖게 된다. 간디의 비전 역시 거대했지만, 그는 독립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그를 증명했다. 과연 인도는 어떤 국가가 되어야했을까. 연방제로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까지 다양한 상들이 나타나고, 지나와 네루는 그 속에서 합을 겨룬다. 지나의 비타협적인 태도 역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네루의 중앙집권은 그 필요성은 인정되나, 이후 이를 과연 달성했는가, 그로 유의미한 성과를 축적했는가라는 부분이 장벽이 된다. 네루의 선언문에도 나오듯, 자주를 성취한 이들은 그 자주로 발전을 이뤄야 할 책임 역시 지게 된다. 그리고 그 점에서, 과연 현대 인도의 여정이 최선이었을까?
 
- 가장놀랄 만한 것은 바로 1930년 3월 비협조운동을 재개하기로 한 간디의 결정이었는 데, 그는 자신의 아쉬럼으로부터 바닷가까지 약 390km의 거리를 행진한 뒤 바닷물을 품어 소금을 불법으로 생신하였다. 염세는 정부 세수의 주된 원천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민 회의당 내 많은 인사들은 그가 보였던 이러한 움직임을 경멸했으며. 영국인들은 당혹스러워하며 그저 관망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 소금 행진은 천재적인 발상이었다.생활필수품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싸고 영 제국주의와 맞서기 위해 막대기를 손에 쥐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던 간디의 노쇠해 보이는 모습은, 곧장 인도 전역뿐만 아니라 전 세제이 걸쳐 지지받는 관심 대상이 되었는데, 특히 미국에서 이 소금 행진은 간디가 처음으로 미국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게기가 되었다. 이 행전에서 드러난 강력한 시각적인 형상은 카디를 입은 시위대의 행진으로 더더욱 그 효과가 강화되었는데, 이 시위행진에는 여성들도 최초로 끼어있었다.
- 280p
 
간디가 식산흥업운동으로 국민회의 지도부를 양복에서 카디로 갈아입히고, 소금행진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낸다. 국민회의 지도부의 대중운동에 대한 질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화합의 상이었다. 사소한 생활필수품에 대한 공감이 대중적 동참으로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이 발전한 인프라를 타고 세계로 흘러나간다. 민족을 만든다는 건 이런 과정의 연속이다. 진정성으로 부딪친다.
 
간디가 국민회의의 수장이 되고, 선거벚 개정으로 유권자가 일부 여성을 포함한 3천만으로 확대되며 이후 1937년 선거에서 국민회의는 속주 입법주 1500개의 의석 중 758석을 석권한다. 마드라스, 봄베이, 중앙제속주, 비하르, 연합제속주에서 국민회의는 속주정부를 구성하고 영국 정부와 협력 속에 통치를 이어나간다. 농지개혁은 미뤄지고, 의사결정구조는 탑다운과 바텀 업 사이에서 진통을 겪는다.
 
농업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수리답의 면적은 늘어나고 상업작물의 재배도 확대되지만 이는 지역별로 차이를 보였다. 펀자브는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이로 인한 성장을 누렸던 반면, 방글라에서 생산성의 증대는 인구의 증가를 이기지 못하고 만성적인 곡물부족으로 이어진다. 공업 역시 발전하며 1913년 220만 km의 수입량을 정점으로 수입대체 산업화가 이루어진다. 주요 공업생산은 서부로부터 내륙으로 확장하고, 마르와르인과 체띠야르인 등 주요 상업공동체가 공업으로 체질개선에 나선다. 스워데시 운동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내수소비를 일으키며 이에 촉진제가 되고, 1930년대 말 인도 내 생산 제품이 전체 시장의 2/3을 차지한다. 그리고 2차대전이 발발한다.
 
2차대전을 두고 민족운동진영의 노선은 둘로 나뉜다. 자와허를라 네루 등 자유주의 기반의 민족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반대하며 영숙의 노선에 협조적이었으나, 방글라에 기반한 수버쉬 찬드라 버슈 등 몇몇 인사들은 파시스트 세력, 예컨대 일본과 협력함으로써 인도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네루가 참 줄타기를 잘함. 찬드라 보스는 동남아의 항복한 인도 출신 영국군들과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지만 파트너는 위~대한 대일본제국 황군이다. 버마에서 이친구들? 조졌다.
 
똥줄탄 영국은 매번 인도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회유하지만, 국민회의는 침대축구를 시전한다. 1차대전 후 꼬라지 보면 나라도 그러겠다. 제헌의회, 부황직속 행정 혖의회 내 지분보장이 이어지지만, 영령인도 내 편입을 원하지 않는 지역들에 대한 독립의 보장이 전제조건이었다.
 
제7장. 1940년대:승리와 비극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후 인도는 총력전 조직 속애서 이미 자체적인 역량이 성숙해있었다. 이별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여러차례 약속했지만 지연되어왔던 인도의 독립은, 식민지 치하에서 지식인계층의 성장과 민족의식의 각성, 제 민족간의 갈등과 독립에 대한 연대 속애서 무르익어간다. 인도-파키스탄의 양분(이하 인파양분)은 이 시점까지,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소수민족 할당제로부터 일주 속주의 자치권까지, 옺션은 다양하게 놓여있었다. "파키스탄"이라는 개념은 존재해왔지만, 무슬림 집단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대행정구역을 둘러싸고 지나와 네루 사이에서 갈등이 이어지고, 무슬림의 자치에 대한 대행정구역안이 부결되며 긴장은 끓어오른다.
 
네루는 사회주의적 지향 아래 강력하게 중앙집권할 수 있는 정체를 원했고, 지나와 이 점에서 이견이 있었다. 간디 역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힌두중심적인 세계관의 사람이었다면, 네루는 세속주의에 인도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계획경제를 통해 통합된 인도국가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나와 네루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갈등은 결국 피로써 표현된다. 캘커타에서, 방글라에서, 펀자브에서 무슬림과 힌두는 충돌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난다. 식민지배기간 축적된 양자간의 적대감, 종파별 구분투표를 둘러싼 이견, 대행정구역을 통한 분획 등 다른 선택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갈등은 결국 극단적으로 화한다. 이 충돌은 도합 수십만에서 백만에 달하는 인명의 손실로, 1250만에 당하는 무슬림과 힌두 각 종파에 따른 디아스포라로 나타났다. 국가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수반한다. 그것이 독립일지라도.
 
독립을 기념하는 네루의 연설이 새삼 되새겨진다. 과연 자유의 대저택은 건설되었는가?
 
- 우리가 대표하는 인도 인민 여러분, 우리는 이 위대한 모험 속에서 여러분들이 신념과 차 신감을 갖고 우리와 같이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소하고 파괴적인 비판을 가하거나 악의를 갖거나, 혹은 비방을 일삼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도의 모든 아이들이 살게 될 자유로운 인도라는 고결한 대저택을 건설해야 합니다.
- 318p
 
펀자브와 카쉬미르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고, 다수 주민은 파키스탄 귀속을 원하지만 현지의 토후는 인도에 귀부한다. 인도-파키스탄 군은 실력행사로 국경을 확보하고, 이후로도 여러차례 분쟁을 겪는다. 카쉬미르는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그 지정학적 위치보다는, 누가 영령인도의 진정한 계승자인지를 가리는 정치적 의미가 컸다. 그리고 그 국체논쟁 속에 수많은 이들이 전선에 선다.
 
간디는 암살된다. 그는 인파양분을 막고자 백방으로 노력했고, 힌두의 양보를 주장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폭력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고, 4천만 파운드스털링의 내각자산을 파키스탄에 넘겨야한다고 주장하며 그 틈을 메우고자한다. 그러나 힌두 국민국가주의자인 너트람 고드세는 그의 양보를 마뜩치않아했고, 간디의 암살은 힌두트바 운동의 전면적인 후퇴로 나타났다.
 
8장. 국민회의당의 통치:민주주의와 발전, 1950~1989
 
네루와 국민회의는 토후들을 하나씩 삭초제근하며 내탕금을 내주고 포섭하거나 하이데라바드처럼 점령했다.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하는 그의 열망은 신도시의 설계로, 영화를 통해 "국가"를 앞세우는 이상적인 "인도인"의 형태로 표현된다. 언어적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세속주의 기반하에 인도에 사는 제 민족을 인도국민으로 조형하려고 하지만, 펀자브의 시크로부터 봄베이 관구의 구자라트-머라타까지 갈등은 산재해있었다.
 
요는 경제다.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은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집단농장 안 역시 좌초된다. 전통적인 농촌 숙의기구인 판자야트를 통한 농업 재구조화가 시도되지만, 전근대 향촌기구를 준용하고 공식화한다는 것은 토후들의 지배를 용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1950년대가 되어서야 저민다르가 폐지된 나라에서, 판차야트에 의한 통치와 공동개발계획은 개발의 실권을 토후들에게 넘기며 지배력을 강화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 10년 동안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식민지 시대 마지막 수십년간 불황에 빠 졌던 경제가 개선 국면에 접어들었다. 농업 생산은 제1차 5개년계획 동안 25%6나, 제2차 5개년계획 동안에는 20%나 상승했다. 공업 생산은 1960년대 초까지년 평균 약 7% 성장했다. 전반적으로 제1, 2차 5개년계획 동안 인도의 국민 소득은 매년약 6% 성장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미한 성공에는 막대한 비용이 뒤따랐다.
- 352p
 
5개년계획으로 수입대체 산업화를 이룩하자는 그의 계획은 식민통치기간의 면산업에서의 수입대체 등 기존의 경로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생적 성장은 자본투입 없이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중공업 콤비나트 위주의 투자는 지속적인 생산성개선과 후행 산업의 발달을 통한 규모의 경제 달성 없이는 정체에 직면한다. 이내 성장률은 낮아지며, 고용은 해갈되지 않고, 경제 전체가 정체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이후로도 지속되는 독특한 경향, 환율의 평가절하는 국가적 자존심이 깎이는 일이라는 논리 하에 진행된 환율 절대지켜정책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힌드어의 공용어 지위에 대한 지속적인 시도는 반 힌드어 화자들을 격분시켰다. 인구분포로 볼 때 1950년대 힌드어 화자는 북인도 일부 지방에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은 훨씬 컸다. 1965년 15년간의 이행기가 끝나자 자국어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있던 타밀나드로부터 저항이 분출하고, 결국 교섭상의 언어(associate language)로써 영어의 지위가 유지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교육에 있어서 부담을 가중하는 요인이 된다. 통일된 모국어교육이 원할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적인 보통교육은 난제에 부딪친다.
 
네루는 죽고 여차저차해서 인디라 간디가 즉위한다. 그리고 인도는 대가뭄을 맞는다. 19%라는 곡물생산량 감소에 대비하여, 미국의 도움을 받아 녹색혁명에 나선다. 관개전답을 늘리고, 비료사용과 종자개선, 네루 시기 이루어지던 비효율적 관행을 타파하며 전진한 녹색혁명은 생산량의 26%상승이라는 경이적인 결과로 나타나며 국민소득 증대를 견인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변화는 경지정리된 관개전답에 집중되며, 쌀 생산지역과 밀 생산지역에서 서로 다른 성장률로 드러난다. 투입자본이 높은 이들을 대상으로 집중된 생산성 개선은 농촌에서의 소득격차를 키우고, 지역별 격차 역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정책에서 자영농이 소외되며 다수 농민은 배급에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소비시장의 유의미한 성원이 되지 못하며 잠재정상률을 잠식한다.
 
인디라 간디는 좌파 포퓰리스트였다. 소외된 농민과 불가촉 천민을 바탕으로 이들의 권리를 개선하고자 주장하며 당권을 쥐고 총리에 오르지만, 이는 동시에 기존의 갈등관계를 뒤흔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의 시기 많은 개선안들이 테이블에 오르며 향촌의 질서를 휘저었고, 이는 극단적인 반발로 표출되기도 한다.
 
-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그러한 도전은 반대 없이 진행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불길한 신호로, 1969년 타미르나드주 내 탄자우르에서 지주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예전에 "불가촉천민들"이었던 42명을 오두막에 기두어놓고 불태워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 360p
 
결국 문제는 경제다. 그리고 네루로부터 인디라 간디까지, 인도 경제는 세계 경제로부터 독자노선을 구축하며 고립된다. 인도가 정체하는 동안, 아시아는 비상한다. 집권기반이었던 드라위다 진보운동과의 연계는 타밀나드에 대한 지원으로 남인도의 분리주의 성향을 잠재웠지만, 경제적 정체와 격차의 확대는 서벵골에서 낙샬바리, 즉 낙살라이트의 봉기로 이어진다. 인디라 간디는 은행이 이자수취한다고 폐지도 좀 한다... 당연히 결과는 관료들의 지대추구와 경제적 위축으로 이어진다. 그 와중에 1971년 선거의 구호는 "빈곤을 끝내고 나라를 구하자! Gharībī Hatao Desh Bacao(힌)"였다. 하원에서 352석 석권하며 대승한다. 인디라 간디의 시기 분명 인도는 어느정도 대중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 과연 그 결과는 다수대중의 이익으로 돌아왔는가. 절차와 실질의 구성이 반드시 선순환으로 이어지지는 않음을 이시기 인도는 보여준다.
 
1973년의 오일쇼크는 에너지위기로 나타나며 그에 대한 불만을 전화한다. 인디라 간디의 집권에 대한 불만을 가지누재프러카쉬 나라연을 비롯한 대안세력들이 구즈라트를 중심으로 인도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 단식으로 거대한 대중운동을 일으키고, 1975년 부정선거에 대한 고등법원의 판결은 이를 부추긴다. 인디라 간디는 6월 26일 임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이를 탄압한다. 아들 선재(sanjey)는 빈민가철거와 불임수술로 악명을 떨치고, 인도 인민당은 그 틈을 노리고 수권한다. 힌두 국민국가주의가 다시 시민권을 얻은 것이다.
 
물론 인디라 간디는 재수권하지만, 다시 부상한 종교중심주의 속에서 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은 핀드랑왈레의 운동으로 결집하고, 진퇴양난 속에서 인디라 간디는 이를 "푸른 별 작전"으로 진압한다.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군인들 역시 적지않게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시크교도들의 공분으로 이어지며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암살당한다. 인디라 간디의 죽음은 전국적인 분노로, 다시 전국의 시크교도에 대한 학살로 이어진다. 델리에서만 1천명이 넘는 무고한 시크교인들이 살해되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1984년의 일이었다.
 
인디라 간디의 암살로 그의 아들 라지우가 집권한다. 라지우는 "허가증에 의한 통치Permit/License Raj"를 종식시키고 젊고 현대적인 경영인들로부터 조언을 받으며 인도의 자유화를 시도하지만, 지대수익이 정치의 원천이었던 정치인들과 사회적 반발에 마주하며 제한적인 자유화에 그친다. 각족 규제가 철폐되고, 상속세와 부유세 세율이 줄어들고, 수출입 통관절차가 간소화되긴 했지만 인도 경제의 턴어라운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 경제 정책에서 몇몇 혁신적인 조치들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라지우는 자기 어 머니가 의존했년 종단중심적 정치라는 위험한 정치 행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붓했 다. 당시 무슬림들은 가혹한 조치가 제일 먼저 적용되는 대상이었는데, 1985년 인도 대법원이 내렸던 샤 바노 판결 사건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되있다. 워런 헤이스팅스가 통치하기 200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서로 분리된 힌두 법전 및 무슬림 법전이라는 이 곤혹스러운 문제는 인도가 독립된 이후에도 해결된 적이 없었다. 헌법은 신생국가인 인도가 자국 내 모든 다양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통일민법을 제정하도록 규정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그리한 통일민법은 제정된 적이 없 였다.
- 374p
 
깊게도 얽힌 사슬은 단칼에 잘라내기 어렵다. 인도 민법의 속인주의는 여전히 적용되는 문제이다. 힌두중심주의와 그에 대한 반발 속에 입법은 정체된다. 독립 이후 오늘날까지도, 성문화와 그에 따른 통일민법은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종단간 갈등은 여기에서 그치지않는다.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은 갈등을 빚고, 타밀 타이거가 무장투쟁에 나서며 인도 역시 이에 개입한다. 그러나 이는 지리한 전선의 고착으로, 다대한 피해로 나타나고, 인도군은 이내 1990년 이 전선으로부터 후퇴한다. 하지만 타밀 타이거의 자살폭탄테러는 라지우 간디를 노리고, 그는 1991년 5월 총리에서 물러난 채 유세중이던 그는 한 여성의 자살폭탄테러에 목숨을 잃는다.
 
9장. 새천년을 맞이하는 인도:번영, 빈곤, 권력
 
이와 같은 종교간 갈등은 기존의 지역 구도를 대체하며 핵심적인 갈등으로 떠오른다. 이것이 식민통치의 유산인가. 어느정도는 타당하다. 인도의 근대적 정체성은 식민통치기 형성되었으며, 영국에 의한 규범의 제도화는 모호한 종단간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 이전이라고 해서 종교간 갈등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독립으로부터도 반세기가 지나갔다. 오늘날의 갈등은 과거의 유산이면서, 갈등해결의 실패이고, 또한 성장의 부재이기도 하다. 가장 좋은 세속화는 경제성장이다.
 
커쉬미르, 펀자브, 어험에서의 갈등들은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대응 속에 잦아든다. 펀자브에서의 충돌은 일면으로는 진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로 진행되며 1992년의 선거를 통해 일단락된다. 어험은 방글라인들에 의한 주요 산업과 공직의 장악에 대한 어험 원주민들의 반발로부터 발생하나, 마찬가지로 진압과 회유를 통해 인도라는 틀 내에 잔류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어험 동쪽의 부족민들은 중앙정부의 통제에 저항하고 있다. 2023년말 평화협정을 통해 관계는 진전되었지만, 그 잔재는 남아있다.
 
힌두트바는 소 도축에 관한 논란으로부터 1925년의 국민자원단을 통한 강경 힌두민족주의의 구축, 이후 간디의 암살과 그로 인한 역풍에도 불구하고 장구하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른다. 1964년 창설된 세계힌두협회는 이론적 지도와 대중적 조직을 담당하며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인도인민당의 성과와 네루 가문의 퇴조 속에 나렌드라 모디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다. 무엇이 인도 민족인가. 힌두트바는, 힌두교를 통해 형성된 공통의 정체성이 그 핵심임을 강조하며 제 종교와 민족을 그 틀 속에 넣고자한다.
 
- 새천년에 들어설 무렵, 하층 카스트 집단, 빈민, 그리고 문맹자라는 인도 사회 내 가장 억압받는 일원들은 여러 정당에 가입하고 첩접 더 많이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동향은 여성들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실제로 빈민과 하층 카스트 집단 출신들에게 투표란 정말 말 그대로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하는데 스스로 보유했던 유일한 무기였다. 미국과 같은 나라들과는 달리 인도의 빈민들은, 비율상으로 봤을 때 부유한 이들보다 점점 더 많이 투표에 참여하고 있는데, 부자들은 최근까지도 정치 참여가 자신들의 지위 유지에 필수적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
- 402p
 
라자 나으리들이야 투표할 필요가 없지 그런건 천한 것들이나 하는 것 아니겠어. 직접 민원을 넣으면 되는데 굳이? 아마티아 센이나, 여러 인도출신 학자들은 인도의 민주주의를 인도의 장점으로 꼽지만, 그 실질적인 운용에서 과연 인도의 민주주의는 다수 대중에게 유의미한 효능감을 주었을까. 2000년대 이후로도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네루로부터 인디라 간디까지 국민회의의 통치가 과연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낙후는 개선되지 못했고 보통교육은 난항을 겪으며 대다수는 농촌에서 밭에 매여 살아간다.
 
나라싱하 라우 정권은 봉착한 부채위기를 맞아 IMF의 지원을 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환율은 평가절하를 겪고 만모한 싱의 지휘 아래 수출보조금은 폐지되고 관세는 낮아지며 산엊에 대한 면허제가 폐지되고 공공기업의 비율은 축소된다.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의 조달이 가능해지고(그동안은 없었냐...) 일련의 세제 합리화로 복잡성이 낮아지며 인도 경제는 연평균 7%의 성장을 보여준다. 냉전의 붕괴는 인도의 경제를 세계로 연결했고,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하이데라바드로부터 벵갈루루까지 경제는 활력을 띄고 순항한다.
- 독립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인도 성인 절반은 여전히 문맹 상태이며, 성인 여성의 경우 무려 2/3 이상이 읽거나 쓰지를 못한다. 이 점에서 현재 인도는 19세기 메이지 유신율 단행했던 당시 일본보다 훨씬 열악하며, 시장지향적인 경제 개방이 시작되기 진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있는 남한, 대만, 중국, 태국 등이 성취했던 것보다 매우 뒤떨어져 있다... (중략).. 인도의 개혁 지도자들은 ..(중략).. 문해 및 산술 능력 측면에서 국민들을 폭넓게 교육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다 같이 공유하고 참여하는 경제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완전한 토지 개혁 실시, 양호한 보건체제 구축 등 다양한 사회 정책들을 이행하는데 실패했다. 인도는 국제무역으로 인한 이득을 누리고, 각종 제약과 한계를 제거함으로써 경세 성장분 전반을 끝어올리는 데에는 그동안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 중략.).. 그러나 경제적 으로 주어진 여러 기회를 활용하는 측면에서 인도 내 많은 집단들은 여기서 여전히 배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 407p
 
아마티아 센이나, 개발경제학에서 활약하는 많은 인도인 학자들이나, 그 길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 인도의 낙후는 쉬이 해결되지 못했는가. 식민지배도 한 원인이지만, 독립 이후의 잘못된 판단들과 인도 자체의 다원성과 분절성, 그 속에서의 정체, 전근대 지배계급의 연속된 지배, 구조 자체가 가진 무게가 인도를 정체하게 했다. 전 인구의 20%가 사는 도시는 이미 충분히 소비사회에 진입했지만, 나머지 80%가 사는 농촌은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지역간 불균형은 이를 강화한다. 연안과 남부는 상대적으로 준수한 경제를 달설했으나, 북인도와 내륙은 여전히 낙후해있다. 지난 과거를 딛고, 인도는 과연 범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네루의 선택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독립을 향한 여정에서, 국민회의는 분명히 하나의 전범을 구축했다. 이후의 비동맹 노선 역시 인도라는 질량이 갖는 힘과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식민통치기 수입대체 산업화 역시 유의미한 성과를 보였고. 그러나 네루는 획득한 중앙권력으로 경제성장으로의 기반을 닦지 못했고, 인디라 간디는 녹색혁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빈약한 체제마저 해체하며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아래의 열망을 위로 투사하는 데 까지는 기능했으나, 실질적으로 다수대중의 물적 토대를 발전시키는데에는 실패했다.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는 회사를 매개로 한 수탈로 시작하여 영국정부의 전면 지배 이후 점진적 후퇴로, 지속적인 갈등과 그 해소로, 인도의 역량강화와 그에 따른 권한의 이양으로 나타났다. 단일 식민지중에서는 가장 큰 땅이었고, 식민화의 역사 역시 짧지 않았다. 간디의 등장으로 대중운동은 인도 민중의 원형을 구축했으나, 그 간디조차도 분절된 민족간의 갈등에 고삐를 걸 수는 없었다.
 
나라심하 라오와 만모한 싱의 개방정책은 누적된 인도의 모순을 적기에 해소하며 인도 경제의 구조를 현대화하는데 기여했지만, 오랜 기간 이어진 정체를 해소하는 데 20년이라는 기간은 충분하지 못했다. 보건의료와 교육 면에서 인도가 발전이 없지는 않다. 충분한 발전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이다. 더이상 제조업을 통한 기술입국과 수출주도 성장이 고용을 담보하며 새로운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들은 어떤 모델을 추구해야할까. 나렌드라 모디가 지향하는 인도는 무엇일까.
 
도서부 동남아시아처럼, 인도의 식민지배 역사도 매우 길다. 식민제국주의는 인도의 통치기간에도 여러차례 모습을 바꾸었고, 인도는 그 테스트베드로써 변화를 감내하고 때로는 주체적으로 응수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다. 근대란 무엇이고, 그 접촉은 저개발국에 어떤 변화를 낳았으며, 우리는 근대가 남긴 화인 속에서 어떻게들 살아가고 있는지.
 
 



320x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