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임브리지 세계사 시리즈. 농업의 시작 전후를 언어역사학, 유전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를 통해 분화시키며 세계적 차원에서의 연구성과들을 현대적 연구방법론을 통해 비춘다. 연구 종합 리뷰이면서, 권역별의 연구성과 비교를 통해 당대를 보는 창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역사언어학 챕터가 흥미로움. 어근 분석으로 생활양태의 변화시점을 도시하고 교차검증을 통해 이를 확인해나간다.
농경이란 무엇이냐. 신석기 혁명이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인구압의 수축과 확장이고, 또 적응의 결과이기도 했다. 농경은 혁명이라기에는 오랜 이행과정을 거쳤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농경은 폭발적인 인구성장으로, 문화의 창달로, 도시와 국가의 형성으로 나타난다. 차일드의 신석기혁명 개념은 플라이토스세로부터 홀로세로의 기후변화, 간빙기로부터 마지막 빙하기, 그이고 이후의 환경이 농경으로의 이행을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촉진했다고 설명한다. 그 과정은 수천년에 걸친 이행이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본질적인 변화였다.
- 갈릴리 호숫가 오할로(Ohalo) 캠프 유적이다. 연대는 약 1만 9000년 전이며, 1년 중 몇 개월을 고정적으로 머무르는 캠프였 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히 큰 규모의 정착지(사실상 마음)도 있었는데, 사냥과 채집, 특허 어로 작업과 관련된 유적이었다.
농경 이전에 정주가 시작된다. 수렵채집은 그 자체로 수득률의 변동성도 크지만, 이동성이 높은 생활양식이다. 그리고 이는 거주환경의 풍흉에 좌우된다. 그리고 어로는 그중 상대적으로 수득률이 안정적인 생산활동이다. 농경 이전의 정주유적지는 어로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고유전학 분석에 따라 유럽으로부터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이동을 다각도로 바라본다. 유럽의 특징은 높은 불연속성이다. 플라이토스세의 기후변화 속애서 유럽의 많은 지역은 빙하기와 간빙기 사이 종종 빙하에 뒤덮여있었다. 이에 더해 유럽의 지형은 서아시아로부터의 지속적인 침투을 용이하게 했고, 그로 인한 집단의 교체로 이어진다.
- 신석기 시대 중부 유럽의 유전자 구성은 매우 다양했지만, 이러한 새로운 샘플의 분포는 중석기-신석기의 극명한 불연속성을 의미했다. 즉 신석기 시대에 새로 유입된 인구가 기존의 중석기 시대 포레이정 인구를 밀어낸 결과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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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동남아(주요 언어는 오스트로아시아어)의 패턴은 섬동남아와 사뭇 달랐다. 중국 남부와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이들이 쌀농사가 확산되면서 인도차이나반도로 들어왔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수렵 채집 단계에서 기후 변화 때문에 해안선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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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동남아가 섬과 섬을 넘어 인류가 확산되었다면, 대륙 동남아는 석기시대부터 인류의 전래경로에서 차이를 보인다. 유라시아로부터 중국을 따라 대륙부로, 남아시아에서 미얀마로 사람들이 넘나든다. 도서부는 도서부대로 섬과 섬을 넘어 인도네시아로부터 파푸아뉴기니로, 대만으로주터 반도와 열도로 나아간다. 아프리카에서는 반투어군 사용자들이 중앙아프리카로부터 기원하여 남으로, 동으로, 서로 퍼져나가며 농경을 시작한다.
- 역사언어학적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히나의 어족이 1000여년 동안 갈라져온 과정을 밝혀낼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언어의 계통수를 그릴 수 있다. 언어의 계통수가 인간의 역사를 추적하는 밑바탕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릇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사회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회에 흡수된다면 그들의 언어도 곧 소멸하고 만다. 반대로 어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내분으로 갈라지더라도, 혹은 일부 집단이 갈라져 나와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더라도 각각의 집단은 기존 언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어휘나 문법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며, 언어 분화의 과정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 계통수의 구성(언어학적 충서학)은 관련 언어들 사이의 관계도를 그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언어 사용자들의 공동 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분화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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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음. 어근분석을 통해 산포된 어족 간 언어분화 계통수를 그려가며 고유명사 집단 내의 명사간의 관계를 통해 당대의 생활상을 추정하고 이를 고유전학 및 고고학적 발견과 결합하여 과거를 재현한다.
- 언어학을 통해 밝혀진 여러 가지 사실들은 후기 홀로세 사하라 남반 부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와 놀랍도록 일치한다.
1) 기원전 8500~7500년: 토기를 제작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사하라 동부의 남반부에 살았다.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소를 길들였고, 한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대표적 유물은 오늘날 이집트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나브타 플라야(Nabta Playa)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보다 더 남쪽과 서쪽, 즉 오늘날 수단 남부 및 리비아 남동부 끄트머리에서도 이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고학적으로 충분히 확인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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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리공화국 동부 도공(Dogon) 주에 있는 반디아가라 단층(Bandiaga escarpment)에서 은주구(Ounjougou) 유적이 발굴 되었는데, 기원전 제10천년기의 유적이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식량 확보 방식과 불 조작 기술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드러났다. 이 유적에서는 채집 기반 생활 경제와, 기원전 9400년 이전에 이미 토기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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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이야기가 제일 재밌음. 아프리카에서 재배작물의 발전이 늦어진 이유로 야생작물과의 지속적인 교배, 이삭이 흩어지더라도 수확할 수 있는 형태로 발달한 수확기술등을 꼽는다.
- 메소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초기 식량 생산 중심지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중심지마다 어족 계열이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인도에서 독자적으로 농경이 시작된 곳은 최소한 세 군데였다. 남인도, 잰지스 평원 그리고 인더스강 중하류 유역이었다.
인도가 참 특이한 지역이다. 인도는 서아시아로부터 다른 지역의 통로로 기능하기보다,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양자로부터 유입된 이들이 정착하는 거점으로 나타난다. 농경 역시 유사한 시기에 시작되었으나, 쌀과 밀 역시 양방향에서 전래된다.
수렵채집과 농업 중 어느것이 건강에 유리했느냐. 수렵채집은 극심한 변동성과 높은 이동성을 가진 삶의 양식이다. 따라서 재생산 역시 제한되고, 출산률과 아동사망률도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식단의 다양성과 필수 영양소의 충족, 단백질의 지율에서 수렵채집인의 식단은 농업인의 그것에 지해 유리한 점이 많다. 고인골학을 통한 당대 생활상의 측정은 대체적으로 농경 이후 퇴행하는 지표들을 지시하지만, 이는 꼭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수렺채집과 농경의 형태는 기후환경만큼 다양하고, 주곡의 선택과 입지환경은 그 격차를 벌린다.
농경인들의 골다공증 역시 고인골비교에서 자주 지적되는 문제다. 곡물위주의 식단은 칼슘의 부족을 초래하고, 골다공증과 안와천공으로 연결된다. 도서부 동남아시아와 열도에서 쌀 농사 전후로 충치 비율은 달라지지 않았다.
- 농업 이행기처럼 경제 중심의 이행기를 연구할 때 고생물학에서는 유골(뼈와 치아)에 남아 있는 다양한 범주의 "마커들(markers)"을 검토한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흔적으로 간주되는 지표들이다. 또한 뼈와 치아의 형태 및 크기의 변화도 고려한다. 먼저 지적해두어야 할 점은, 관찰 조사 결과의 해석은 언제나 논란의 여지를 내포한다는 사실 이다. 기본 추정 항목(연령, 성별, 계측치 등)뿐만 아니라 득이접 항목(질병 등)으로 밝혀진 사실들도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식생활의 질은 면역 체제와 관련이 있고, 결과적으로 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식생활과 영양 부족 관련 질병, 그리고 정주 생활 관련 질병의 흔적은 곧 농업의 시작 전후로 식생활과 건강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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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샘플 모수분석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변수통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농경 이후의 고생물학 결과는 어떤 인과로 비롯된 것일까. 안면두개골의 형태변화 역시 농경으로의 이행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식생활은 씹는 근육의 사용을 줄이고, 이는 두개골과 턱뼈, 치아의 형태변화로 나타난다. 턱이 좁아지고 치아가 조밀해지며 두개골이 좁고 긴 형태에서 짧고 넓은 형태로 바뀌어간다.
- 건강 문제에 관한 한 사람들이 처 했던 특정 생활 조건에 따라 결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있다. 그래서 해당 유적지에서 개인이 처한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종합적 연구가 고생물학에서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다. 이들 연구에서는 주된 식량의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의 입장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 세계적으로 시대에 따라 잠재적으로 수많은 변수가 존재할 테고, 이는 결국 데이터 해석에 영항을 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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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정량적 분석만이 아니라, 정성적 분석이기도 하다. 충분한 모수가 없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구체적인 생활상은 전체 조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뼈는 물질이지만, 생활은 추론이다.
- 정착지는 대개 단순한 구조의 움막들이 느슨하게 모여 있는 구조였다. 수련채집인과 수렵채집인-농업인이 뒤섞인 대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민속학 연구를 참조하자면, 이러한 주거지에서는 구성원끼리 저장시설을 공유했다. 농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핵가족이 특징적 주거 단위로 대두되었다. 이들은 서로가 별개의 집에 살면서 창고를 각자의 집에 두였다. 이는 곧 농업의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위협성을 갑수할 주체 가 집단 차원에서 핵가족 치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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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이행은 경계의 획정이기도 하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경계는 유동적이고, 경계를 지킴으로써 감수해야 할 리스크는 공유를 허용할 때 발생하는 리스크에 비해 크다. 결정적으로, 대개의 수렵채집사회는 유의미한 잉여를 축적하지 못한다. 붙어봐야 얻을 건 없고 잃을 건 많다. 그러나 농경사회는 경작을 통해 잉여를 축적하고 관리하며, 이를 통해 수득률의 변동성을 헷지한다. 더하여, 경계의 구분은 최소 생산단위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개인주거가 발전함에 따라 저마다의 잉여에는 격차가 생기고, 계서가 발전한다.
수렵채집에서 정주로의 이행은 기후와 풍흉에 따라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정주생활은 발현과 쇠퇴를 반복하고 이는 정주 유적의 출현과 소멸로 나타난다. 초기농경에서 "재배종화"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야생종과의 혼화는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이랑에 흩날린 씨앗은 이를 강화하는 원인이 된다. "재배종"의 표지로 흩날리지 않는 이삭이 제시된다. 더하여 갈돌이 곡물 섭취를 위한 도구로 나타난다.
현재까지 확인된바, 최초의 분명한 가축 사육 징후가 나타날 무렵에 농업은 이미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무의식적 선택에 의한 재배종화, 즉 수확기의 이삭이 저절로 흡어지지 않는 곡물 종의 변이가 일부 지역에서는 총분허 진행된 뒤였다.) 그때가 기원전 제9천년기(cal) 중•후반기, 즉 토기 이전 신석기 B 시대(PPNB,c.8500~6500 cal BCE) 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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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묵축이 발현되며 유목 역시 시작된다. 농경과 목축이 결합된 "패키지"농장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생활형태로 퍼져나간다. 가정의 분화와 단위 가정들의 결합을 통한 일종의 공동주거시설, 즉 확대가족 주거가 유적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집단주거지애서는 토기생산의 특화 역시 발견되며, 초기 신석기의 분업 현황 또한 보여준다. 고생물학 조사에 따르면 건강상태는 성별별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농경에 있어서는 일부 성별분업이 관측되나, 양자 모두 농업에 참여하는 것 역시 확인된다.
유럽의 농경은 서아시아로부터의 이주와 함께 초기부터 완성된 형태로 출현한다. 독일 남서부 보덴호(Bodensee) 서쪽의 호른슈타트-회른레 유적은 기원전 3900년경의 신석기 농경 유적으로, 다양한 야생종 식물의 섭취가 이루어졌음을 유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주된 식량은 곡물이었다. 동거가족이 생산의 기초단위로, 가구마다 생활양식에서 뚜렷한 차이는 나타나지 않지만, 일부 가구에서 발견된 희귀한 초기 청동기 유물은 계서의 분화를 시사한다.
마을을 둘러싼 환호( 구조적 특성상 기끔 방어 시설로도 기능했다)도 그렇지만, 신석기 시대 유럽 전역에서는 이런 식의 "공동"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방어 시설로는 영국의 도싯주 햄블던 힐에 있는 스테 플턴 인클로저(Stepleton enclosure), 글로스터셔주에 있는 크리클리 힐(Crickley Hill) 등이 있다. 둘 다 기원전 제4천년기(cal) 초기 유적들이다. 이런 방어 시설에 화살촉이 모여있고 기끔 실제 인골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 같다. 초기 농업 공동체들 간의 목숨을 건 투쟁 사례는 또 있다. LBK 문화 시기 유적으로 독일 남서부 달하임(Talheim)에서 30여 명의 남성, 여성, 아이가 매장된 대량 학살 무덤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경쟁 부락에서 처들어와서 그 마을의 주민 모두를 한꺼번에 살해했던 것 같다. 집단 분쟁의 사레 중에는 소를 훔치거나 신부를 도둑질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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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채집사회라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신석기의 농경과 정주, 잉여생산물은 방어시설의 구축과 정주지를 중신으로 한 공방으로도 나타난다. 다른 농경 유적에서도 이와 같은 흔적은 드물지 않다. 계서가 발달하고, 소유가 생기고, 영토와 자원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한다.
중국의 농경문화는 기원전 7천년기로부터 6천년기까지에 이르는 배리강 문화유적에서 나타난다. 조와 기장을 심고, 원형 또는 사각 움막에서 거주하며 구덩이 또는 토기에 곡물을 저장한다. 돼지, 개, 닭을 사육하고 사냥 또한 병행하며 화전을 통해 밭을 일군다. 동아시아에서 조리는 서아시아, 유럽과는 다르게 토기를 이용하여 삶고 끓이는 형태로 나타난다. 기원전 5천년기 양자강 하류와 해안 습지의 하모도 문화에서는 벼농사와 물소 사육이 관찰된다. 벼는 이시기 재배종이 되었고, 물소 견갑골로 괭이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특기할만 하다. 이후 양자강 하류에서는 기원전 5천년기 후기 논이 발견되고, 이후 기원전 4쳔년기에는 큰 단위의 인력투입이 필요한 계단식 논이 나타난다.
한국도 농사 지었음. 빗살무늬 토기 시기(기원전 제5-3천년기)에는 기장, 조, 보리등의 농경이 확인된다. 민무늬 토기 시기, 벼와 금속기, 우경이 패키지로 도입된다.
메소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의 농경이 시작된다. 그러나 칠면조와 개를 제외하면 가축의 사육은 확인되지 않는다.
농경의 시작은 밭을 만드는 일이다. 경지의 조성에는 집약적인 노동의 투여가 필요하고, 이는 토지에 대한 점유의식을 구축한다. 왜 경작을 하는가. 수득률 변동성이 낮고, 곡물의 저장을 통해 위험을 헷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작과 목축의 병행은 가구단위의 분화를 촉진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자연환경의 유불리에 따라 생산의 중심은 가정으로, 반대로 공동체로 이동한다. 유럽과 한국의 패키지형 문화이행, 즉 금속기로부터 목축, 농경의 일체 도입은 당대 농업기술의 지역간 이행을 시사한다.
목축의 시작은 대체로 농경 이후의 일이다. 농경은 수확과정에서 부산물을 생산하고, 겨로부터 짚까지 일체의 부산물은 가축의 사료가 되어 겨울을 나게한다. 가축의 생육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다시 농토의 거름이 되고, 개별 육축은 가구의 소유로 다변화된 식생과 차등을 만든다. 생산의 새로운 결합이 격차로 나타나는 것이다. 작물에 있어서는 재배종의 출현이 농경의 증거인 것처럼, 목축에 있어서는 야생종과의 생식의 통제를 통한 축종의 구축이 하나의 단서가 된다. 순록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대개 길들임은 종의 분화로, 경제동물로써 생육기간의 관리와 그에 따른 선별로, 그 결과로써 수컷의 짧은 생육연령으로 확인된다.
신석기에서 금석병용기로 접어들며 목축의 형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축력을 이용한 이동수단과 경작이 발달하고, 우유가 광범위하게 이용되며, 농경과 동물사육 중 후자의 비중이 커지고 인구가 증가한다. 권력이 발달하고, 유목이 시작된다.
- 그런데 어떻게 젖이 멈추지 않도록 조절했을 까? 첫째, 암송아지는 도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둘째, 민속학연구를 통 해 확인된 바 가짜 자극으로 수유를 유도하는 원시적인 소 사육 방식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송아지 가죽으로 암소를 속이거나, 파이프를 이용하여 암소의 외음부에 강하게 바람을 붙어 넣기도 했다. 선택적 교배로 개량종이 완성되기 전에 먼저 속임수나 신중한 관리 등의 방법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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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당불내증 유전자의 활성정도는 유제품 소비량을 표지하는 하나의 지표이다. 2차생산물의 소비는 이 지표의 활성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아프리카에서 목축은 농경보다 먼저 나타난다. 극심한 기후변동성과 건조기후의 발달은 경제적 선택압을 부여했고, 높은 이동성을 갖추면서도 식량수급의 안정성이 있는 목축이 그 결과로 등장한다. 이는 근동의 가축화와는 독립적으로 나타났다.
말의 가축화는 기원전 4200년경 볼가-돈 초원지대의 얌나야 문화와 기원전 3500년경 카자흐스탄의 보타이 문화에서 처음으로 시도된다. 보타이의 말 뼈 골각기의 증가와 말 중심의 가축사육은 이후 염소, 양, 소등을 동반한 유목으로 형태가 바뀌어간다. 유목에서 말의 역할은 높은 이동성과 다른 가축에 대한 통제 면에서도 중요하지만, 겨울철 목초를 찾을 수 있다는 점 역시 하나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도시의 구축에 있어서 전통적 관점은 위계의 발달과 대량의 인력투여를 통한 조직구조의 고도화, 이를 통한 중심지, 또는 착취자로써의 도시와 수탈의 대상으로써의 농촌이었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 관개와 인력집중이 반드시 계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례가 드러나고 있다. 도시와 배후지의 관계 역시, 반드시 수직적인 것은 아니다. 고대 도시 역시 농경에 기반해있었고, 도시민들 또한 농업과 도시에서의 생활을 병행했다. 마야 피라미드 위에서도 계단식 경작을 했다는 부분이 특기할만 하다. 도시의 중앙집중적인 저장기능 역시 반드시 일률적인 통제 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리 중부 니제르 평원의 제니-제노 유적은 수평적인 관계로 구성된 도시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높이 7미터의 텔(인공언덕) 70여개가 4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있는 제니-제노는 직업적으로, 친족적으로 분화된 집단들이 공동으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다원화 체계 속에서 상호 이익이 극대화되는 구조였다.
관개나 도시의 구축이 곧 계서와 착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평적인 도시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개별 반례가 역사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서, 대체적으로 계서가 성립되며 영토국가로, 집단의 분화로 이어진 흐름을 외면할 수 없다. 보편과 특수의 문제에서, 개별적인 변경의 존재에 대해 집중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가능했던 특수한 물적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지 않나.
전반적으로 농업혁명을 둘러싼 시기의 변화에 대해 근자의 방법론을 분과별로 설명하며 개별 사례를 통해 그 적용을 보여준다. 유전자를 이용한 민족이동과 계통수 확인, 고기후학과 고생물학을 이용한 접근은 그래도 본 가락이 있어 익숙한데 역사언어학을 통한 접근은 신선하다.
농경의 시작에 있어서 표지가 되는 재배종의 확립이나 각지에서의 목축의 기원, 지역별 초기 농업의 발전과 곡물 종의 다양화, 유럽 그리고 한국에 대한 농경기술의 패키지 이전 등이 흥미로웠음. 전반에 대해 개괄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해당 시기를 보면서 짚어야 할 부분들은 잘 짚어주는 듯. 특히 고생물학에서의 지표, 골다공증이나 법랑질 미형성 등의 마커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정량적 데이터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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