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역사/일본사

<일본의 역사(하)>, 이노우에 키요시

stingraykite 2026. 5. 15. 16:11

 
정치사로, 경제사로, 문화사로 시대별로 조망하며 선사시대로부터 에도막부까지 일본사의 특징을 중심으로 엮어나갔다. 일본이라는 땅의 다원성, 시대가 갖는 물리적인 한계와 그를 넘어서는 확장의 속도는 고대 천황제를 장원제로, 또 재지사족들에 의한 사무라이의 지배로, 이윽고 전국 다이묘들에 의한 쟁패 속에 에도막부로 바꿔나간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조용조에 신음하고 땅으로부터 도피하며 변경을 찾아나가고, 공경귀족과 사원, 사무라이의 이중 삼중의 수취에 신음하면서도 땅을 갈고 생산력을 증대하며 예속관계에서 촌을 중심으로 한 상보적 계약으로, 부민에서 상인으로, 조닌으로 변모한다. 쇄국 속에서도 시대는, 사상은 미래를 바라보고 국학과 난학, 가부키와 닌교조루리 속에 삶의 흔적들이 묻어나오고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모색들이 쌓여간다. 막부의 지배는 쇠퇴하고, 변경에서부터 변화의 싹이 자라난다. 그리하여 시대는 바야흐로 유신 전야다.
요는 변경이었다. 열도라는 광대한 땅 속에서 땅은 넓고 인구가 희소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한 역사시대는, 영토 전반에 사람이 들어차고 통치가 가능한 구조가 확립되기까지 수많은 부침을 겪는다. 가마쿠라로부터 무로마치, 전국시대까지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던 건, 그 지리환경에 기인한다. 오다 노부나가롭 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기까지 세명의 천하인은 서로가 서로의 유산을 쟁찰하며 인의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동시에 전국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이라는 이상을 공유했고, 사람은 가도 정책은 남아 체제로 선다. 그 체제는 바야흐로 근대의 여명속에 한계를 맞이하지만, 축적된 역량은 그 너머를 지향한다.
흑선이 내한한다. 페리 제독은 개항의 오구를 막부의 면전에 들이밀고, 막부는 네덜란드로부터 미리 친서를 통햐 개국의 충고를 듣고, 미국의 동태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난학의 탄압, 쇄국의 강제는 관성에 따라 쓸려가던 막부의 수동적인 대응이었고, 그 와중 들이밀어진 개항의 요구는 막부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큰 균열을 낳는다.
- 이이 대로도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여, 6월 19일, 칙허가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조약에 조인하고, 내친 길에 25일 장군 후체자는 기주의 요시토미(후의 이에모치)로 절정되었다고 발표를 한 후, 이어 미토, 오와리, 에치젠의 세 번주에게 은퇴, 근신을 명한 것을 비롯, 개혁측 의 영주ㆍ관리를 잇따라 처벌했다.
통상조약에 용감히 독단으로 조인한 이이 나오스케는 진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는 도큐가와 나리아키에 못지 않은 양이 배외주의자이고 완고한 반동이었다. 그가 조약의 조인을 단행한 것은 첫째로 막부의 독재권력을 회복한다고 하는 반동적 투지에서 나온 것이며, 둘째로는 반동적 독재로 각 영주들과 민중을 적으로 만들어버린 그에게는 미국의 압력에 항거할 힘 을 전연 얻을 수 없으므로, 하는 수 없이 조인을 한것 뿐인 것이다. 그 의 재임중에는 아베가 시작한 진보적 사업은 모조리 폐지 또는 축소되었다. 그가 살해당했을 때, 번서조소의 양학 자, 막부 관리의 진보파가 크게 기했을 정도로 그는 미움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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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막부의 지배와 개국이라는 시대적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요동하느냐는 것이다. 나리아키나 마사히로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메이 덴노의 겐세이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는, 다이묘들간의 중지를 모으는 점에 있었다. 결단을 한 이후의 행적이 정치의 실패를 증명한다. 안세이 대옥은 결정적인 탄압이었고, 이를 통해 공의는 넘을 수 없는 강을 넘어선다.
자유무역은 생산관계의 재조직과 이에 따른 물가의 요동으로 이어진다. 생사와 차의 수출이 늘면서 양잠과 제사 산업이 활황을 띄는 반면, 물가의 변동은 민생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특히 금은가격차에 따른 금의 유출과 은의 유입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지고, 생사 가격의 상승은 견직업의 원자재가 인상으로 고용마찰을 낳는다. 조약 자체의 불평등성도 배외감정을 고조시키며, 존왕양이가 주류적 의견으로 자리하는 가운데 토막의 정서가 퍼져나간다. 지사들이 출현하고, 형해화되는 막부의 지배력은 이들의 행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 그들이 영주의 영역을 넘어 정국 의 전면에 나타난 최초의 극적인 사건이, 1860년 3월 3일(음력), 때 아닌 눈이 퍼붓는 에도성 사쿠라다몬 밖에서, 미토, 사쓰마 두 번의 낭사 한패가, 이이 대로를 습격하여 살해한 일이다. 이후 사쓰마, 조슈, 토사 세 번 출신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 지사의 초번적 협력이 여러 기회에 갖가지의 형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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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나오스케는 대로고,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총리기도 하다. 유신의 시작이 총리암살이었으니 민선총리가 암살되는 건 가히 일본의 전통이라 할만하다. 이후로도 꽤 죽는다. 막부는 여론에 밀려 1863년 5월 10일을 양이 개시의 기점으로 하기로 하고, 조슈는 마침 시모노세키를 지나던 미국 선박을 포격한다. 기습도 일본 전통이다. 7월에는 전년 발생한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 함대가 사쓰마의 카고시마 번을 내습하고, 조슈랑 사쓰마는 사이좋게 탈탈 털린다. 양이 흐름을 맞아 타카스키 신사쿠가 기병대를 편성하고 대중적 지지를 받지만, 그 격차는 현저했던 것이다. 매도 먼저 맞아봐야 알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지만 잃고나서라도 고치는 사람이 일류다.
삿쵸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사쓰마보다는 조슈의 서구적 지향이 더 강했다. 타카스키 신사쿠나 이토 히로부미등의 기병대가 보여준 면모는 이후 판적봉환과 폐번치현 과정에서 다이묘들의 몰락을 예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1차 조슈정벌과 이후의 쿠데타, 삿쵸동맹의 결성과 공무합체의 실패를 보면, 막부의 지향 역시 어느정도는 개방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순응해야한다는 것에는 일정정도의 합의가 있었지만, 그 운용에 있어서 막부가 짊어진 구체제의 짐은 과연 그들 주도의 개방이 가능했을지에 대해 회의하게 한다.
- 무려 토막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아챈 장군 요시노부는 전 토사번주 아마노우찌 요오도오의 권유에 따라 형식적으로 천황에게 정권을 갖게하고 그 밑에서 자기가 실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67년 10월 14일,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겠다 고(대정봉환) 청원을 했다. 이튿날 조정은 그것을 허락했다. 대정봉환이 성립되면 막부를 토벌할 구실과 명분이 없어지는데, 사이고, 키도, 오오쿠보 등은 어디까지나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정된 새 정권이 수립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요시노부의 대정봉환 청원과 동일한 14일 이른 아침에, 토막의 밀칙이라는 문서를 천황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기파의 공경으로 하여금 작성케 하여 받아두고, 15일 이후에도 다시 거사의 계기를 만들려고 경도, 오오사카 지방 및 에도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막부를 도발하는 한편, 왕정으로 복고하면 연공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 획득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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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참 얼레벌레한다... 삿쵸동맹도 그렇고 대정봉환 과정에서 문서위조를 통한 밀칙 제조와 정당성 확보, 연공이 절반이라는 프로파간다의 구성등을 보면 이것들이 어떻게 성공했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이 천하대세인가. 유신이라는 것이 필연적인 과정은 아니었다. 죠슈가 더 혹독하게 깨졌을수도 있고, 사쓰마의 지배가 더 약화되었을 수도 있다. 도자마 다이묘들이 꼭 특별한 지향을 갖고 이 사건에 임한 것도 아니다. 하급 사무라이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지사가 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묘하게 마음들이 맞아들어가고, 우연적 사건들이 연결되어 거대한 필연을 낳는다.
여차저차 신정부가 서고 삼직회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그의 영지를 새 정부에 인계하도록 명령하고,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은 막부군과 승부를 벌인다. 막부군은 3배의 병력으로도 신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요시노부는 군함으로 에도로 복귀한다. 에도성은 무혈개성하고, 요시노부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막부의 반대파들은 항전을 이어나가지만,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이 와중에 적보대는 연공삭감을 내걸고 세력을 확장하지만, 신정부군에게 배신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 이와 함께 중앙정권은 고대 친황제의 대보령제를 본뜬 형태를 채택하여, 신기 , 태정의 두 관으로 나뉘고, 태정관에 태정대신•좌대신•우대신•참의를 두고, 그 밑에 행정 6개 성과 그밖의 것 을 두었다. 지방은 부, 번, 현 삼치일치 를 원칙으로 하여 장관을 지사라고 하고 그를 보좌하는 대참사 이하의 관직명도 전국적으로 통일, 획일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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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적봉환하고 폐번치현하고 그 와중에 봉록 가록으로 변환하고 세계경제 구조에 맞춰 경제적 대응구조를 만들고... 근데 신기관에서는 대체 뭘... 했지? 태정관 직제야 존황할거니까 그대로 가져왔다고 쳐도, 신기관에서는 국가신토 구축작업 하면서 신불분리를 통해 기존의 지역 내 기관이었던 절을 억압하고 신앙체계를 신토를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 쵸오슈우 제대의 내란을 진압한 이노우에가 기술하기를 쵸오슈우 번사의 3분의 2를 농업•공업에 돌리고, 나머지 3분의 1도 점차적으로 세록을 폐지할 것, 국민 자유의 권리를 속박하지 말 것, 한자를 폐지하고 기계원리 의 규명의 학문을 장려할 것, 이러한 큰 개혁이 없다면 도저히 민중 지배는 불가능하다라고 한 바 있는데 , 사족과 민중을 떼어놓고 민중을 끌어당겨 근대적 생산력을 높이는 일이, 지배자에게 부과된 심각한 급선무가 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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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는 왜 조졌나. 재정 관리가 안됐다. 물가 관리는 더 안됐고. 그것이 자유무역으로 인해 벌어진 일일지라도, 새로운 생산관계에 조응하는 구조개혁을 막부 체제로는 이룰 수 없었다. 물론 신정부도 한날한시에 이를 구축할수는 없었다. 판적봉환이나 폐번치현이 상대적으로 큰 잡음 없이 진행되었던 것도, 어느정도는 이에 기인한다. 이미 번들 재정이 한계에 다다라있었고, 몇몇 작은 번들은 폐번을 청원하고있었다.
- 그들은 대공업을 급속히 일으킬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했다. 어디를 가거나 지상에서 산출되는 것 가운데 석탄과 철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제품은 그 원료를 모두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고, 이것을 가공하여 외국에 수출하는 것 뿐이다. 제작장의 생산 작업이 양상이 굉장하 고 대단한 것은 이전에 전해 들은 것보다도 월등하여, 도처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에 솟아올라 영국이 부강하게 된 까닭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전반적으로 유럽, 미국 여러 곳의 상황을 살펴 보았더니 소규모의 생산이 많은 곳에서는 그 이익이 적은 것으로 보아 명주라고 할지라도 힘을 모아 대량 생산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큰 것을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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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 기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포커스는 일본을 급속한 산업화로 밀어붙였다. 생사 수출을 기반으로 적정기술을 활용한 수공업적 구조 위에 군사기술을 중심으로 한 중공엊이 육성되고, 지속적으로 자본이 투하되고 민간에 불하되며 산업생산량이 증가한다. 전형적인 외생적 성장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육에 대한 투자도 이루어진다. 물론 나라만 돈을 낸 것은 아니다. 나라에 돈이 없으면? 국민이 내면 된다. 시정촌에 분담된 수업료는 강제적으로 징수되어 학교 건립에 쓰여진다. 기존의 서당들을 중심으로 우선적으로 수업이 이루어지고, 이후 1886년 '소학교령'을 통해 학제가 정지되며 보통교육률이 상승한다.
이것과 나란히 72년에는 정부가 학제를 정하여 전국의 시, 정, 촌에 반드시 소학교를 설치하고, 이 초등학교에 넣을 것을 부모의 의무로 정한 다음, 이것을 게을리하는 사람을 처벌했다. 학교의 건설과 유지, 교사의 봉급 등은 모두 그 시정 촌민의 부담이며, 아동 1명에 대해 1개월 50전까지 의 수업료를 징수하는 일도 인정했다(소학교의 수업료는 1900년에야 간 신히 전폐된다). 극히 대략적인 추계이긴 하지만, 1878년의 직업을 가진 인구 1명 평균의 연간 소득이 겨우 21엔밖에 되지 않았는데, 연액 6엔이나 되는 수업료는 민중에게 얼마나 무거운 부담이었을까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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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조선정부와 부산에서 트러블이 생기고, 1870년대부터 정한의 논의가 시작된다. 이는 제국주의적 확장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동시에 국내 정치에서 파벌간의 성과경쟁의 양상을 띄기도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족들의 입지를 위해 정한이라는 의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1876년 일한수호조약을 맺는다. 개항장의 지정, 해안탐색 권리의 허여, 기한없는 무관세와 화폐의 사용, 치외법권, 양곡 방출까지 가지가지 했다. 1조의 자주독립과 대등한 관계 선포는 ...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일본놈들 당한대로 뒤집어씌운다.
그 와중에 사족이 받던 봉록은 공채로 전환되고, 이는 폐도령과 함께 큰 반발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공채를 팔아 돈을 벌지만, 누군가는 그대로 몰락한다. 폐번치현과 함께 조세가 일원화되고, 이는 근대적 소유권의 확립(1871~72)과 함께 지조개정으로 이어진다. 수확량의 조사에 기반한 현물 수취에서 토지의 가치를 산출에 기반하여 매기고 그 가격의 3%를 지조로 징수, 지조의 3분의 1 이내에서 지방세를 거둔다. 이전의 지조는 오인조 또는 마을 단위 연대책임으로 납부했으나, 이는 개인에게 부과되며 지가는 5년마다 갱신한다.
3%가 낮은 세율처럼 보이지만 실제 표준지가가 산출량에 기반하여 이전의 지조와 유사한 수취액을 보이도록 설정되었으므로 그 부담은 결코 낮지 않았다. 여기에 전체 경지의 3분의 1을 경작하던 소작인들의 입장에서 소작료는 그대로이므로 그 부담은 가중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개인에게 부과되는 세금, 토지 소유권의 보장, 지대의 금납화는 진보적인 측면이다. 더하여, 지가의 5년 갱신은 이후 지속적인 농민들의 투쟁으로 동결되고, 인플레이션은 실질적으로 지조의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1884년 지조의 시가반영은 폐지되며 실제 지가와 법정지가의 분리가 완성된다. 이때 실질 지조는 수확대금의 12% 정도였다.
이때는 중앙성청에 내무성 말고 농산성(1876년)같은 별도 성청이 딱히 없었다. 경찰부터 도로 통신도 다 내무성에서 한다. 식산흥업도 내무성에서 출발한다. 내무성 꽤 세잖아...? 국립은행 조례 제정으로부터 철도 건설, 토미오카 생사 공장 등 근대 산업의 기틀을 닦으며 철도, 전신, 전화에 대한 투자로 국토의 연결성을 높인다. 이는 동시에 경찰력의 강화로도 이어진다. 중앙집중적 국가 한번 제대로 건설한다. 군•경에 대한 집중 투자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이어지는 하나의 기조가 된다.
이전 시대 문명의 전래는 외부로부터, 상층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그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시차가 존재했다. 야요이 문화의 확산이나 삼국시기 도래인의 전파는 외부로부터 기인한, 확장의 대상으로써의 변모였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은 역으로, 스스로 나가 구한 변화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이 20만부가 팔려나가고, 유신의 과정에서 대중적 참여가 두드러진 것도 이와 같은 의지의 단편들이다. 물론 그 기대가 모두 보답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비탈길로 굴러간다. 신문을 통해 자유민권운동이 촉발되고, 헌정과 의회에의 요구는 유신의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모아나간다. 앞전의 지가 개정에 대한 반대나, 입지의 하락에 반발한 사족들의 세이난 전쟁을 통한 저항과 패배는 민권운동에서 다시 흥기를 맞는다.
오쿠마 일차와 자유당의 연대에의 움직임은 정권 주류, 이와쿠라 도모미나 이토 히로부미를 긴장케한다. 그리하여 81년 헌법 제정의 뜻을 밝히는 조칙을 공표하고, 90년을 의회 설립의 기한으로 정한다. 적절한 시기의 김빠짐이다.
- 그 예를 들어 우에키(植木 枝盛)는 그가 정치생활에 눈을 떴던 초기인 1875년의 강화도 사건 때, 정부가 선동하는 정한론에 반대한 논설 <경욕을 논함>을 기고하여 동아시아 여러 국민이 한 집안 처럼 연대하여 서양의 압박에 대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면서 조선 침락을 주장한다는 것은 일가의 존망과 일신의 사생도 알지 못하는 바보이던가 아니면 광인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
81년 4월 류큐문제로 정부가 일청개전의 위기를 선전하는 것에 대해서도 근사평론과 나까이가 주필인 <동양자유신문>은 일청 양국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긴밀한 관계가 있으므로 협동하여 구미의 압박에 저항해야하며 결코 서로 싸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동양자유신문>이 특히 동양의 두 글자를 붙인 것은 자유주의를 동양 전체에 전파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인데, 일본이 동양 을 지도한다고 하는 우월의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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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권운동이 태동하며 아시아주의 역시 하나의 조류를 이룬다. 제국주의적 갈래와 민족간 연대라는 이상은 초기부터 병존하며 나아간다. 왕도인가, 패도인가? 그것이 반드시 정해진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민족의 동참과 공감 또한 있었던 것이고. 그렇다면 정부는 이처럼 들끓는 여론을 진압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이타가키랑 고토를 유럽여행을 보내준다. 핵심 지도부가 타협으로 뽑혀나가자 당은 분열하고, 이합집산 속에 정치는 순행?한다.
지조개정이 완료되고 지조의 금납화가 진행되면서, 이전의 인플레이션 정책은 세수 면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따라서 마츠카타 마사요시의 지휘아래 대장성은 디플레이션으로 급격하게 이행한다. 증세가 이루어지고 유통량이 줄어든다. 공채가 안정화되고 이를 기반으로 생산투자가 이루어지며 상업자본은 산업자본으로 전환된다. 동시에 디플레이션은 곧 소생산자에게 타격이 된다. 쌀과 생사의 가격은 하락하고, 이에 의존하던 농민경제는 토지 공매처분으로 그 곤란이 나타난다. 1883년 3만 3,845건에 이르른 공매건수는 1884년 7만명으로, 1885년에는 10만 8,055명으로 증가한다. 84년 토지담보대출 잔액은 2억엔으로, 당대 경상수입의 2배에 달했다.
서울에서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망명하고, 일청 양국의 대치가 벌어진다. 텐진조약으로 양자는 일단 물러나지만, 불씨는 잠재해있었다. 부청세력은 기세를 돋우어 친일파를 쓸어내고, 조선은 급속도로 청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 이후로 서울에는 일청 양군이 대치하게 되었는데, 청국군도 자중하고, 일본 정부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등이 아직 전쟁을 치를 만한 국내체제가 되어있지 않다고 하여 군부의 개전론을 누르고, 스스로 전권대사가 되어 청국 천진에 가, (1)일청 양국군은 동시에 철수한다. (2) 양국 모두 조선에 군사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3) 금후 조선에 출병할 때는 서로 통지할 것, 을 협정했다. 이 제3항은 일정 양 국이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유로이 조선에 출병하는 일을 상호간 인정한 것이 되기도 때문에 일본의 조선침략의 첫 단계의 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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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연말부터 의회개설이 이루어진 1890년까지 국유지 가운데 키소의 산림 등 경제가치가 가장 높은 산림 및 원야, 목장 등 약 365만 정보를 천황의 것으로 하고, 일본은행(1882년 10월 설립, 유일의 발행 권한을 갖는 중앙은행), 요꼬하마정금은행(외국환은행), 일본우선회사 및 그 밖의 일본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는 회사, 은행의 주식 가운데, 정부소유인 860만 엔을 천황의 것으로 만들었다.
천황의 산림소유는 재산으로서 안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산을 지배하는 자는 물(수자원)을 지배한다, 그리고 물을 지배하는 자는 나라를 지배한다고 하는 농업사회의 이념에 의거하여 천황에게 수원지를 확보하게 해준다고 하는 숨은 의도가 있었으며, 천황의 주식 소유도, 마찬가지로 재산으로서의 안정성 외에 일본 자본주의의 기간을 구성하는 회사의, 엄청난 최대주주의 지위에 천황을 앉히기 위함이었다. 천황은 이리하여 일본 최고의 초대지주, 초대자본가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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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돈은 이후 황실의 운영자금 그리고 군부 정권의 운영자금이 되며 야마가타 등이 신나게 선거에서 사용한다. 메이지 천황과 군 간부들간의 관계는 얕지않았다. 따라서 전후 몰수당한다. 인간선언을 되새겨본다.
天皇ヲ以テ現御神(アキツミカミ)トシ旦日本國民ヲ以テ他ノ民族ニ優越セル民族ニシテ、延テ世界ヲ支配スベキ運命ヲ有ストノ架空ナル觀念ニ基クモノニ非ズ。
화족제도도 생기고 드디어 일본국에도 헌법이라는 게 마련된다. 그 헌법 1조는 아래와 같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大日本帝国ハ万世一系ノ天皇之ヲ統治ス)
전후 이는 아래와 같이 바뀐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이 지위는 주권을 갖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반을 둔다.
(天皇は、日本国の象徴であり日本国民統合の象徴であつて、この地位は、主権の存する日本国民の総意に基く。)
고어에서 평서문으로, 만세일계의 통치자에서 총의에 기반한 상징으로. 국가는 약진하며 절벽으로 달려나간다. 경찰제도의 기반인프라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군대와 경찰의 제도가 확립된다. 전국에 시정촌이 신 행정구역으로 만삼천개가 생겼는데 주재소부터 냅다 1만 1,400개를 박아버린다. 경찰국가라는 표현이 틀린말이 아니다. 어떤 마을에라도, 순사 하나씩은 들어갈 수 있도록 촘촘하게 구성한다.
1886년부터 1889년까지 학제가 정립되고, 1890년 교육칙어가 반포된다. 1896년에는 기미가요가 공식 행사에서 국가의 지위를 갖고, 의무와 통제로 짜여진 교육제도는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간다. 본격적인 제도의 정비 이후 보통교육률은 확연히 상승하여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70~80%에 이르른다. 원래도 문해율이 낮은 사회는 아니었지만, 이와 같은 교육의 신속한 확장은 특별한 일이다.
- 이리하여 민중에게서 떠난 대의사당이 같은 대의사당인 입현개진당과 제휴하여 제2회 의회에서도 예산의 삭감을 갖고 정부를 공격했는데, 정부는 91년 말에 제2 회 의회를 해산하여 92년 2월에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를 치르기에 앞서 메이지 천황은 전회의 의원을 재선시키지 말고 충량의 의원이 나오도록 하라고 마쯔가라 수상에게 주의하고 이 선거간섭을 위한 자금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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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제공 부분은 별도로 교차검증이 안됨. 실질적인 선거자금 제공은 확인되지 않으나, 선거에서 여당에 대한 지지의사는 표현된다. 다이쇼나 쇼와 시대에도 천황의 국정에 대한 영향력이 없지 않았으나, 메이지 시대에는 특히 두드러진다. 내무성은 야당 선거운동 하면 경찰들이 가서 두드려패고 방해공작 비용 지급하고... 당연히 충돌도 있고 부상과 사망도 발생했다.
메이지 시대가 되고 유신이 일어나며 누군가는 시대에 부응하지만 누군가는 그렇지 못했다. 디플레이션은 수많은 농민을 파산으로 밀어넣었고, 삶의 여건은 가팔라져간다. 경제성장이 온전한 우상향은 아니다. 1890년 최초의 공황적 불황이 발생하고 물가의 요동은 민중의 저항으로, 쌀집에 대한 습격으로 나타난다. 기계제 공업의 확장은 생산비의 감소로 선대제 수공업을 밀어내고 고용마찰을 일으킨다.
이촌향도가 강해지고 디플레이션이 농가를 압박하며 쌀 생산량은 지지부진하고 기후에 따라 변동한다. 결국 식료품가격이 물가와 정정안정에 끼치는 영향은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고로 공급원을 확장해야한다. 그 대상이 조선이다. 1889년의 흉작은 쌀 수입물량을 폭증시켰고,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방곡령을 내린다. 일본은 조일장정에 기인하여 이에 항의하고, 이 과정에서 조선 경략에 대한 욕구는 높아져간다. 명치 초년부터 1893년끼지 일본이 외국에서 수입한 지금 총액 68%, 835만엔은 조선으로부터 나왔다. 조일장정의 화폐태환과 상호무역, 광업권의 취득은 1차 생산자로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종속되게 하며 그 경제적 영향력을 심화시킨다.
국제정세가 변화하고 러시아의 극동 진출이 가시화되며, 일본의 외교전략 역시 변동을 겪는다. 기존의 불평등조약에 대한 개정운동이 일어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의 대전략에 발맞추어 일본 역시 이에 조응한다. 1894년 일영통상항해조약으로 영사재판권이 철폐되고, 관세자주권이 부분회복되며 양국의 공조는 긴밀해진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잦 권을 되찾는다는 말은, 세계체제내의 계서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 자리하는 일이다. 곧, 제국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동학 농민운동이 발흥하고, 청조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은 이 첩보를 접수하자마자 조선 진출을 계획한다. 동학군은 외세의 개입소식에 철퇴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텐진조약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청군에 원군을 요청한다는 것은 이미 국권을 제국주의의 테이블에 판돈으로 내놓은 것이다.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청군은 우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연신 패주한다. 청군의 응집성이 일군에 비해 지리멸렬했고, 육전에서의 패배와 해전에서의 궤멸은 청국의 패배로, 조선의 종주권을 이양하게하는 분기점이었다. 일본은 이로 인해 영토적 이권과 배상금으로 일발역전의 기회를 마련했으나, 이내 삼국간섭으로 이는 조정되고 만다. 일본의 만주 진출은 제국 열강들에게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대 경상세입이 1억엔이 조금 안되는데 임시 군사비로 2억 5천만 엔을 지출하지만, 이는 고평은 3억엔으로 벌충되고 다시 군부로 들어간다. 이는 다시 자본으로 투여되어 기계제 공업의 발달로 이어지고, 1893년으로부터 1903년까지 폭발적인 성장으로 나타난다. 10명이상 고용 공장수가 2.19배 증가하고, 원동력 사용 공장수는 5.54배 증가하며 그 비율은 18%에서 45%로 성장한다. 기선 총 톤수 역시 11만톤에서 65만톤으로 약 6배 성장한다. 97년을 분기점으로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며, 매년 수입은 격감하고 수출은 격증한다. 그 주요 시장은 청국과 조선으로, 전체 수출 총액의 40~50%를 차지한다. 이와 같은 성장은 1897년 일본을 은본위국에서 금본위국으로 전환시키며 세계 금융과 연결한다.
당시 산업은 주로 군수산업으로 외생적 투자를 통해 규모를 구축한 후 민간 불하를 통해 자생한다. 은행 역시 관과 연계되어 집중적으로 성장한다. 산업의 구성 또한 자연히 집중되며, 재벌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재벌은 은행을 통햐 지배구조를 구축하고, 대형은행과 산업 전반의 문어발식 확장을 통해 경제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 은행업에서도 1901년 말의 6대 도시의 조합은행 170여행 가운데 제1, 십오, 미쓰이, 미쯔비시, 야스타, 코오노이께, 스미토모 및 정금의 8개 은행의 합계가 전체 조합은행 예금의 51%를 차지했고, 또한 전국의 예금 총액의 3분의 2는 10여 대은행에 집중되었으며 다른 2천여 예금 합계는 3분의1 내외로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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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제 공업이 성장하지만 여전히 수출 총액의 절대다수는 가내공업과 공장제 수공업으로부터 나왔다. 이들의 생산기여는 여전히 70%내외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농가의 총 호수는 이촌향도로 인해 감소하지만 그 비율은 여전히 적지않았다. 1891년 70%에서 1903년 64%로 감소할 뿐이었다. 도구의 개량, 콩깻묵에서 어비로 비료의 변화, 과인산석회와 황산암모늄 등 화학비료의 사용은 농촌의 생산고를 늘린다. 벼의 단보당 수확량은 1878~1882년 5개년 평균 1,169석(1.169의 오기로 보임)에서 1898~1902년 평균 1,497석으로 29% 상승한다. 산업이 발전하면 노동자가 생겨나고 자생적으로 사횢 의도 유입된다. 1900년 초 숙련공을 위주로 철공노조가 42개 지부, 5,400명의 조합원을 확보하며 건설된다. 1898년 일본철도의 기관사 400여명이 해고반대, 근무조건 개선의 요구사항을 내걸며 파업을 단행하고 일철교정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전체 인민대중 중 산업노동자의 수는 여전히 적었다. 아직 농민이 대다수였고, 산업 역시 미발달한데다 군수산업을 위주로 구축되어 적극적 결합이 일어나기에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1901년 <사회민주당>이 창당되지만 하루만에 해산된 사건은 당대 제 사회세력의 미약한 역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천황이 갖고 있는 일본 우선회사의 주식 배당율 5%를 넘는 부분이 기밀정치자금으로 되어 이또오와 야마가타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특히 제2차 야마가따내각이 궁내성에서 인출한 돈은 총계 98만엔의 거액이었으며 야마가따는 이 돈을 정당과 의회 조종에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주머니에도 집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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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성 돈을 인마이포켓하는 놈은 뭐하는 새끼냐... 물론 육군성 돈도 짬짜미했던 전력이 혁혁하시니 별로 놀랍진 않다. 하라 다카시 일기나 궁내성 재정의견서에 기밀비 사용내역이 있다고하는데 이건 사료를 좀 봐야 알 듯. 1900년 의회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개입지점을 남겨두기 위한 일련의 개혁이 진행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가 입안된다. 이 와중에 조선에서는 삼국간섭에 대한 반응으로 민비의 쿠데타가 일어나 친일파들이 축출된다. 이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 내각을 구성하며 다시 일본의 장악시도는 후퇴한다. 러시아와의 협정을 통해 이권은 회복하지만, 일본은 러시아냐, 영국이냐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되고, 이토와 야마가타는 각각 일러협상과 영일동맹을 통해 입장을 전개한다. 물론 어느쪽이든 조선을 영향권안에 놓아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 형식의 차이였을 뿐이다.
- 또한 청국.조선의 이 지역은 원료ㆍ식량과 금의 공급지로서도 아주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설명한 조선 의 금과 쌀, 만주의 태두와 대두박, 대야의 철광등이 지닌 뜻을 생각해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97년 금본위제를 실시할 때, 장래의 금 준비 공급에 대한 예상으 로서 금의 국내 생산량 200관에 대해, 조선으로부터는 500~700관 의 수입을 의도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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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일본의 금 태환준비금이 1억3천만엔인데 조선으로부터의 연간유입이 500만엔이었음. 조선의 금 수출 총량은 1898년 65%, 1899년 79%, 1900년 92%가 일본으로 향했다.
영일동맹이냐 일러협상이냐, 1902년 영일동맹이 성립하며 대세는 굳어진다. 만반도의 주인은 누가 될것인지를 놓고, 러일전쟁이 개전한다. 여순에서, 쓰시마에서 러시아는 패배한다. 전체 전비 17억 8천만엔 중 8억엔은 영•미에서 모집한 외채로 충당되었다. 헌법이, 보통교육이, 금본위제가, 자본의 축적이, 군부 우선의 경제발전이, 영일동맹과 세계체제가 일본'제국'의 승리로, 러시아의 패배와 피억압민족, '조선'의 최종적 귀속으로 귀결된다.
- 일본•러시아 전쟁중의 막대한 전시 이득과, 광대한 식민지 세력범위의 획득에 의해, 지본주의 산업은 또다시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방적, 제사 등의 경공업이 지속적으로 약진하고 제철•조선 기계기구 생산 등의 중공업과 전기•가스•수도 사업도, 국가자본 및 특권 대자본을 선두로 하여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4대 재벌 등의 산업, 금융계(에서의 독점적 지위는 더한층 확고해지게 되었다. 중공업 외에 석탄,금속 광업에서는 특히 재벌의 독점력이 강했다. 또한 1907년, 세계 공황의 일환으로서 일본에도 공항이 일어났는데, 그 대책을 통하여 방적, 화학비료, 정당, 제분 등의 부문에서, 카르텔의 결성 혹은 기업 합동이 진행되었으며, 1910년에는 16개 대 은행의 신디케이트가 조직되어 그 산업에 대한 지배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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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제적 영향력의 확대는 정치적 지배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이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만주와 반도에 대한 진출과 투자가 내지의 번영으로 이어지고, 산업의 발전은 고용의 확장으로, 평균소득의 향상으로 나타난다. 군수산업과 중공업 위주의 발전은 군•관•민의 연관을 심화시키고, 이후 군부의 주도로 연결된다.
- 1907년의 영국•러시아 협약이 성립되고, 일본, 미국의 대립이 격화 되었던 그 당시, 이또오는 한국통감으로서 한성에 있었는데 거기서 장문 의 의견서를 정부에 보내, 일본이 만주의 문호개방을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영, 미의 금융이 중단될 것 을 깊이 우려하고 또한 일본이 <이기적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간다면, 중국인의 민족적 반항을 불러일으켜 , 일청전쟁을 다시 치르기에 이를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일본을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것이 된다고 하여 독점 정책의 변경을 강력하게 요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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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원로정치가 그 자체로 독재적이고 강압적이었으면서도, 동시에 민-군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측면이 있었다. 야마가타를 비롯한 이들이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군의 독주가 지속되는 것을 그나마 잡아챈 것 역시 소위 민주파와 일부 원로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 산업의 발전이 민생의 풍요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감이 필요했고, 이는 러일전쟁의 결과에 대한 불만과 결합되어 1차 호헌운동, 즉 대정정변으로 나타난다. 러일전쟁으로 인해 폭증한 부채는 19억 8천만엔으로, 당시 조세수입의 6배를 넘어선다. 순채무만 치면 비율은 줄어들지만, 재정여력이 충분하지는 못했다. 다시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하고자 해도, 러일전쟁 이후의 국제정세는 일본의 확장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만주에 대한 배타적 권리는 미국의 반발과 영국의 경계로 이어졌고, 2차 만몽독립운동의 계획은 혼란과 원세개의 서거속에 중단된다. 위기의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맞아 재정적으로 숨통이 트인다.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하나 나빴다고 해야하나...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수출은 대폭 확장되며 산업화는 회생하지만, 동시에 군부에 대한 구조조정의 호기 역시 지나가버리고 만다.
정화의 잔고는 1914년의 3억 4,100만 엔에서 1919년의 20억 4,500만 엔으로 증가한다. 자본유입국에서 자본수출국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자본진출이 이루어진다. 농림•수산•광공업의 생산고는 동기간 3배, 공업생산은 5배 증가하며 총 생산에서의 비중은 44.4%에서 56.8%로 확대된다. 회사 총 수 역시 동기간 1만 6858개사, 자본금 20억 7천만 엔에서 2만 6,280개사, 59억 8천만엔으로 증가한다. 고용 역시 1914년 5인이상 공장수 2만 6280개사, 94만 8천명에서 1919년 3만 2천개사, 1617만명으로 증가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적 산업화는 1차대전 이후에야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값은, 중국과 조선이 치렀다. 동아시아와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의 수출 증대는, 핵심 이권지역에서의 독점적 성장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에서의 수출 증대 없이는 이룰 수 없었다.
- 공업의 비약, 도시 인구의 격증과 합께, 농업과 농촌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겨났다. 경작지 면적은 1914년부터 19년까지에 4.4% 늘어났다. 누예고치의 산출액은 1억 7,500만 엔에서 7억 7,100만 엔으로 격증하여 농촌 경기의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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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건 격차의 확대이고 벼락부자의 출현이며 또한 물가의 급변동이다. 1918년 3월에는 한되에 20전이던 쌀값이 7월에는 40전에서 45전으로, 8월 초에는 50전으로 상승한다. 수확철에 따른 쌀값변동에 더해, 근본적인 수요공급 불일치가 물가의 변동성을 키운다. 이는 동시다발적인 쌀소동으로 이어진다. 싸전 아무나 못혀. 한번 쌀소동나면 피보는겨.
노동자의 수적 증가는 일본노동총동맹의 결성으로(1921), 이후 사회주의의 확산과 함께 1925년 좌파들에 의한 일반노동조합 총평의회의 결성으로 나타난다. 쌀소동을 비롯한 제사회세력의 약진은 1918년 하라 다카시 내각의 성립으로 정치적 변화를 만들고, 하라 내각에서 문민통제를 위한 군축시도와 보통선거를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군비는 충실히 확장되어 일반회계의 46%에서 49%로 확장되고, 군의 경제적 우위는 지속되었다.
1918년을 기점으로 토지의 소유관계에서도 변화양상이 나타난다. 대지주의 지배가 축소되고, 지가의 하락이 일어나며 이후로도 저하경향이 강해진다. 식민지에 대한 지배 역시 무단통치로부터 문화지배로 전환한다. 이는 3.1운동과 주요 쌀 생산지로써의 조선의 입지에 따른 정책변화였다. 1915년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는 중일관계를 결정적으로 파탄시켰고, 이는 이후 양국 간의 긴장과 수출입의 감소로 나타난다. 경제적 이행은 일본 자본의 투자에 따른 자연적 현상이기도 했지만, 민족감정의 자극과 그에 따른 불매운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 일본의 경제는 1920년의 공황, 23년의 관동대진재로 잇달아 큰 타격을 받았고, 게다가 일본 자본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시장인 중국에서 민족자본의 경공업이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대전 등판에 일시 후퇴했던 미국과 영국의 세력이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결과 일본의 중국에 대한 수출은 1920년의 5억 2, 400만엔이 21년에는 3억6,500만 엔으로 격감하여 이후 24년까지 정체를 계속 했으며, 25년에 일시적으로 회복은 했지만, 그후 또다시 침체했다. 중국의 수입 무역 가운데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1919년의 36.34%를 최고로 하여 23년에는 22.25%까지 내려가고, 25년에는 31.06%로까지 회복하지만, 이듬해부터 다시 내려가 30년에는 24.68%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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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투자는 꾸준히 이어져 1920년의 공황 이후로 전신, 전화, 철도, 대규모 토목에 예산이 투여되며 국채가 1919년의 32억엔에서 1926년의 51억엔으로 증가했지만, 시장의 확장한계는 그 자본의 팽창을 억제하고 전반적인 이윤율의 감소로 나타났다. 국공합작과 1928년의 북벌은 중국의 통합을 한층 강화시켰고, 이에 일본은 산동성 제남에 2차 병력파견을 단행하여 민족감정을 격발시킨다. 장작림과의 사이도 벌어지며, 1928년 6월 장작림 암살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대공황이 일어난다.
- 공업생산은 공황 전의 정점에서 공황의 최저점까지로 30% 내지 70%나 내려가 무역은 수출이 37%, 수입이 40%의 급락, 물가의 총합지수는 174.5에서 120. 4로 내려갔다. 특히 생사와 쌀이 폭락했다. 실업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고, 귀농자도 포함시키면 300만 명 이상이 직업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 가을의 쌀 작황은 대풍작이었는데,그 때문에 쌀 값은 이전의 절반 가격 이하가 되어, 농가에게는 전례없는 풍작 기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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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내각은 사퇴하고, 하마구치 내각이 입각하며 대공황에 따른 일련의 경제정책을 전개한다. 고용의 조정과 저물가를 이용한 수출중심 정책, 금 수출금지의 해금은 산업재편을 용이하게 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일본 경제가 선방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는 충분치 못했고, 구조개혁에 따르는 고용마찰과 생계난속에 군부는 자본이 집중적으로 투하되었던 만주에 대해 경략을 개시한다.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따른 일본의 요구를 장쉐향은 모두 수용했지만, 관동군은 살짝 돌았다. 류타오후 사건에 있어서 덴노와 내각의 엄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그냥 저질러버린다. 새삼 다시 봐도 미친놈들이군... 당연히 미국은 격렬히 항의하고, 영국 역시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은 급격히 전쟁으로 빨려들어가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
- 그 후 국제연맹을 탈퇴할 무렵에는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전쟁 지지자로 번모되어 있었다. 그 무렵에는 전쟁터로 향하는 부대도 전국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그 출정 병사들의 배후에는 무사 개선을 기원하는 다수의 가족과 친지가 있어, 그 사람들이 병사들의 무사 귀환을 비는 마음은 전쟁이 일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정의의 행위라고 믿고 싶은 마음과 결부되어 있었다. 또한 연맹탈퇴에 의해 일본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있다는 것은 일본의 앞날에 대해 국민에게 불안감을 품게 했는데, 정부는 그 불안을 교묘하 계 유도하여 1935, 36년의 위기에 대처하여 지금부터 준비를 하라고 하는 준전시체제 전환으로 이끌어갔었다. 드디어 전정 개시와 함께 그때까지의 긴축 정책은 인플레 정책으로 전환되고, 군수 산업을 필두로 산업활동이 활발하게 되었으며, 32년 초에는 일본만이 열강을 앞질러 공황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33 년에는 호경기로 돌아서기조차 했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전쟁을 지지하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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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의 우위를 저지하지 못한것, 군-관-민의 연대를 해체하지 못하고, 군이 근대화의 중심 기구로써 교련으로, 교육칙어로 이론을 제거하고 국가 전체가 군사화한 것, 경제에서 군의 우위를 억누르지 못하고, 이를 대신할 민간 중심의, 제 사회세력의 양성을 이루지 못한 것이 결국 일본을 제국으로 만들고, 전쟁으로 몰아넣는다. 영일동맹에 대한 강조, 국제적 위치에서 일본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는 현상유지냐, 현상변경의 문제냐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제국이 되며 자주를 얻었던 경로가, 군과 결합하며 제국의 하위파트너로써의 입지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주변국들을 침탈하면서까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국가를 내몰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국민들의 동조 역시 적지 않았다. 일본의 성장 자체가 불평등조약의 대상에서 당사자로, 조약개정과 타국에 이를 강요하는 입장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의 호황으로 구축된만큼, 이는 군부와 일부 관료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군인들의 쿠데타 계획이 자주 있었고, 또한 10월의 불발 쿠데타 사건 이래 군인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황도파는 주로 군수산업 재벌과 결합하여 공히 군부독재 정권을 만들려고 했다. 통제파란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따 테츠잔을 지도자로 삼은 파로, 한 미쯔이, 미쯔비시 등 이전부터의 재벌과도 협력하려고 했다. 이것을 황도파는 재벌의 앞잡이라고 하여 공격했다. 1935년 8월 황도파의 장교가 나가타를 국장실에서 칼로 베어죽이고, 그공판중인 1936년 2월 26일, 동경 주둔 사단의 황도파 장교들은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대장상 타까하시 고레키요 와 사이또오 미노루 내대신 , 와따나베 죠오따로오 교육총감을 죽이고, 스즈끼 칸따로오 시종장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오까타 케이스께 수상도 자기들이 죽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또한 원로인 사이온지 킨모치, 전 내대신 마끼노 신겐도 습격했는데, 이 두 사람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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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놈들 민간인 총리만 죽이지 않는다. 육군성 군무국장도 죽이고 2.26으로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군부독재의 길에 들어선다. 쇼와 육군이, 전쟁으로 나라를 몰아넣었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군부가 곧 근대화의 산실이었다면, 그 임종 역시 군부의 손에 맡겨진다. 제국으로의 팽창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은 과연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호헌운동과 보통선거로는, 그 관성을 넘어서기가 부족했던 걸까. 민선 총리들이, 너무 빠르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 일본과 청,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독일의 전쟁은 정부 상대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적군 을 격파하면 적의 정부의 전쟁의지 를 좌절시켜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민족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개개의 전투에서 몇 백 번을 이긴다고 할지라도, 민족의 항전의지를 꺾지 못하는 한, 전쟁의 전체 국면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일본이 러시아혁명 간섭을 위한 시베리아 전쟁에서, 아프게 체험을 했었는데도 제국주의자들은 거기서 무엇 하나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였다. 그리고 하루하루 수렁의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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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화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100년동안의 굴욕이 청 제국의 신민들을 중화 민족으로 연련했다. 청의 통치가 강남의 사람들을 미주로 동남아시아로 내몰고, 태평천국과 청일전쟁, 신해혁명과 군벌의 난립은 난세 속에 민족감정을 가다듬어간다. 5.4운동과 북벌은 중국이라는 영토의 통합성을 구축하고, 적대자로써의 일본이 그 응집성에 불을 끼얹는다.
- 천황은 내대신 키도 코오이찌의 조언으로, 10월 18일 도죠를 수상에 임명했다. 천황과 키도는 도죠라면 육군 중견 장교들의 즉시 개전론을 억제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고 기대했었다고 한다. 그 후 천황은 11월 29일, 대미 개전에 대해 중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그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명확히 일•미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이 점은 괜찮을 것인가라던가 그 점은 걱정이 없을 것인가 등을 말할 뿐으로, 자신의 책임하에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개전론의 선두에 섰던 도죠 수상 겸 육상으로서도, 아무런 성산이 없었다. 그는 단지, 인간은 일생 한번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하여 개인의 진퇴와 국가, 민족의 존망을 혼동하여 의기양양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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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인사들이란 대체로 다 이렇다. 태평양전쟁은 말해야 입아프고, 종전의 시기에 핵을 맞고도 결단을 못내리고 지지부진한다. 그렇게 용렬한 이들이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만주사변으로부터 노구교사건,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누구하나 책임감없이 진창으로 빠져들어만가는 세태에 책임하나 지지 않는다.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나 개개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도, 이미 대세가 정해진 이후 그 흐름을 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일본의 사람들도 전쟁의 와중에 고난을 겪었으나, 그것이 식민지 사람들이 당한 수탈에 비할 수 있는 것일까.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동남아로, 착취와 예속의 손이 뻗치고 정말 많은 이들이 고난을 겪는다. 식민지 해방이라는 허울은 얼마나 공허했던지. 동남아에서조차 일본 제국의 확장은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 19세기말, 아시아의 한 구석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구미 국가 이외의 단 하나의 근대 제국주의 국가 대일본제국은 1895년에 처음으로 중국영토인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뒤로 반세기만에 다시 혜성처렄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영토는 일청 전쟁 전의 것보다도, 근대 천황제의 출발당시의 것보다도 좁아졌다. 뿐만 아니라 일본민족의 역사에서 한번도 경험을 해보지 못했던, 외국 군대의 점령 밑에 놓여, 민족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동 양의 패자, 세계의 일등국, 세계5대강국, 3대강국의 하나라고하며 이웃 나라를 희생시키면서 팽창을 계속했던 대일본제국의 최후의 도달점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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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후 미군정 아래 천황은 인간선언을 하고, 히라가나로 된 새 헌법에서 국민의 총의가 된다. 헌법 9조는 일본을 교전권이 없는 국가로, 미국의 안보에 의지하는 나라로 만들었고, 전후 미국의 구상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발맞추어 변화한다. 중국 공산당의 부상과 625 전쟁 속에서, 요시다 시게루 등 보수파의 기획 아래 일본 정부는 다시 진용을 갖춘다. 전후정부는 전전 정부와는 다른 기조로, 일본의 재산업화를 추진한다.
- 한국전쟁을 위한 미군의 특수수요를 계기로 삼아, 1951년 중에 일본 자본주의는 전쟁 전의 생산 수준을 회복하고 계속 급속히 발전했다. 55년의 국민 총생산은 전쟁전의 2배 가까이 되고, 그후 다시 새롭고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하여 1960년에는 중공업ㆍ화학공업을 선두로 하는 공업생산이 55년의 2배를 넘었으며, 미국, 서독, 영국에 이어 자본주의 세계에서 제4위를 차지했다. 농업에서도 쌀의 생산은 1955년 이래 8천만석 전후가 평년작이 되었다(전쟁 전에는 풍작에서도 6천만 석 가량이였다). 일본의 재군비는 54년 7월 자위대의 발족 이래 급속히 현대적인 육.해.공 3군을 갖추고, 아시아의 자본주의 각국 가운데 최정예의 군비가 되도록 강화되었다. 국민교육의 수준 도, 미국과 소련을 제외한, 세계 어느 나라에게도 뒤지자 않는다. 총인구 약 1에 가까운 큰 민족으로, 9년제의 의무교육이 100% 실시되며, 그 수료자의 70%가 후기 중등교육 (고교과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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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인한 호재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점령전략을 바꾸고, 아시아의 후방기지로써의 역할을 부여했지만, 전후 경기복구와 이후의 발전은 단순히 그만으로 설명되기는 어렵다. 전전 시대동안 누적된 숙련과 기술이 대장성과 경산성의 산업정책과 조응하며 시대적 기회 속에서 그 저력을 만개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1970년대 일본 산업의 약진은 내재적 역량의 성장과 안정적인 세계 시장의 구축 위에서 기록적인 성장으로 드러난다.
결어의 시점에서 일본은 1960년대의 안보투쟁과 제사회세력의 약진 속에,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써의 역할을 강요받고있었다. 필자의 입장과 전력이야 두말할 일 없는 공산주의자의 그것이지만, 오늘날 일본의 사회운동이 맞이한 결과를 아는 입장에서 그 외침은 덧없이 울려퍼진다. 다시금 헌법 9조의 개정이 논의되는 지금, 일본 사회는 어떻게 나아가야할까.
1963년 출판이니 정말 옛날 책이다. 현대적 연구에 비추어볼 때 오류도 있고 필자의 입장 역시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기초한만큼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들이 있지만, 고대로부터 현대까지를 분과별로 성실히 정리했다. 일본 역사의 중층성, 외부로부터의 문화 전파와 내적 수용, 변경의 존재와 중심과 변경의 역학, 무엇보다도 지리적 분절성이 초래한 다원적인 사회구성과 그것이 하나의 국가로 통핮되는 과정들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선사시대로부터 야요이, 야마토, 헤이안 시대의 흥성과 그 기저에 깔려있는 경제적 발전은 고대 일본 사회의 국가적 특성을 잘 드러내주고, 가마쿠라로부터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막부에 이르기까지 중세 일본의 형성과 성장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리환경, 그리고 근대로의 연결이 가능했던 이유들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고대 천황제는 다원적인 열도를 하나의 통치로 구속하고자했던 노력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와 지리적 분절성은 그 구축에 경계를 그었고, 예속 중심의 농경사회였던 고대 천황제는 그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장원제로 재편된다. 그러나 헤이안시대의 장원제 역시 재지사족의 대두와 지속적인 잉여의 증가, 예속으로부터의 이탈과 변경으로의 확장 속에 형해화되고, 개척과 확장이 한계에 다다르며 전국 다이묘의 시대가 다가온다.
부락민에서 장원의 예속 수공업자와 상인으로, 상업도시의 형성과 잘전, 그리고 전국 다이묘들간의 갈등 속에서 때로는 정치권력과 따로 또 같이 죠닌들이 성장한다. 일본 사회의 다원성이, 그로인한 갈등의 골이 변경의 선을 구획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움터갈 공간을 만든다.
집권화는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고대 천황제는 조용조를 이용한 강력한 예속정책이었지만, 그 역시 이전 시대의 예속에 비하면 나은 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옥죄면 도망간다. 열도는 기본적으로 토지에 비해 인구가 희소한 사회였다. 이는 중세를 지나며 대지가 개발되고, 점차 메워져나가지만 그 말의 뜻은 그만큼 집권화를 구축하기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촌이 영토 전역에 탄탄히 형성되고, 더이상 이주할 변경이 남지 않은 시기가 되어서야 전국시대로, 전국 다이묘에 의한 탄탄한 지역의 통치로, 천하인들에 의한 중앙집권의 잘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에도시대 역시 다른 동아시아의 왕조국가들에 비하면 중앙의 집권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배양된 물질세계의 역량이, 근대로의 차이를 노정한 게 아닐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넘어 근세로, 근대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에도정부는 쇄국으로 문을 닫아걸고, 집권화를 위해 노력하지만 인구압의 증가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농경위주의 사회에서, 성장은 개척이고 외부로의 투사이다. 변방의 가능성이 닫혀버린 세계는, 내적 역량의 고도화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른다. 그것이 기근으로, 민란으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서도 난학과 국학, 그리고 외부와의 연결은 시대에 조응하며 변화의 단초를 마련하지만, 동시에 전체주의적 국가의 맹아를 낳기도 한다.
흑선이 나라를 개국하고, 막부는 통제를 유지하기위해 개방과 탄압 속에서 우왕좌왕한다. 아베와 이이의 정책들이 반드시 패망으로 귀결될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혁과 전통의 유지를 적절히 분배하고 짖행할 리더십이, 막부에게는 없었다. 유신지사들이라고 체계적인 계획속에 전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뒤에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양이가 된서리를 맞고 흐려지며 삿쵸동맹과 대정봉환이, 신정부와 도바 후시미 전투가, 에도성의 무혈개성이 한 시대를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낸다.
제국주의의 시대에 후발국가들은 어떻게 주권을 되찾는가. 자체적인 근대화의 노력은 군부를 중심으로 한 외생적 산업투자와 병영을 통한 근대화의 이식으로, 교육과 산업을 통한 근대성의 확산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산업에는 경제적 영토의 확장이 필요하다. 조선으로, 중국으로의 경제적 진출은 정치적 개입과 동반되고, 갑신정변과 임오군란을 거쳐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러 반도는 기운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국운을 건 한판 도박이자, 제국의 시작이었다. 먼저 대만이, 그리고 반도가 제국에 종속되고, 전후배상금과 종속된 영토에 대한 이권이 근대적 성장을 폭발시킨다. 러일전쟁은 영일동맹의 결과이기도 하며,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군부의 경제적 응집력은 꾸준히 유지되며 이윽고 1차 세계대전은 그경로의 변곡점으로, 폭발적 성장을 낳는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본격적인 산업화를 통한 근로대중의 성장, 자유주의 세력의 대두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했지만, 이어진 공황과 중국에의 진출, 그리고 이에 대한 영미의 견제는 현상유지에서 현상변경으로의 이행을 촉진한다.
결국은 군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 군부의 폭주를 막지 못했나. 사실은 군부야말로 일본 근대화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산업이 군부로부터 비롯하고, 예산의 비중이 군부에 집중되고, 군-관-민의 결탁이 통치의 기틀이 되는 사회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구축되기 시작한 관과 자본이 군부를 제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계급의 형성 역시 지체되었으며, 그 기원으로부터 군국주의에 포섭되기 용이한 환경이기도 했다. 군과 경을 이용한 국가의 통제는, 에도시대부터 구축된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한 소망의 현현이었다. 전쟁 이후의 반복된 경기호황은 갓 근대에 진입한 시민들을 이익으로 포섭했고, 그렇게 군부는 만주사변으로, 226으로, 반복된 민선 총리의 암살로, 그리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제국을 파멸로 몰고간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주의 역시 제국에 부역한다. 그 시작이 반드시 운명적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시아주의에는, 해방적, 자주적 기초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가 진행되고 군사문화가 사회를 잠식하면서, 이는 대동아공영권으로, 지배민족에 의한 피지배민족들의 영도로, 실질적인 착취와 수탈의 정당화로 나타난다. 오늘날 다시 맞이한 격변기 속에, 아시아주의에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는지.
1963년의 결어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제국의 하위 파트너로 군사적 대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경제적 구조의 일부로 기능하며 아시아로 확장해나갔다. 평화헌법은 오래도록 그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지만,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다시 국기와 국가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세계적 안보위기가 점증하는 상황에서, 자위권이 있는, 서태평양의 주요 국가로써 역할을 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다른 대안의 모색들이 실패로 귀결되고, 자유주의 역시 스러져가는 와중에, 배외주의를 기초로 과거가 돌아오고 있다. 더 나은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속에서 한일관계는, 세계 속에서 양국의 역할은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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